메뉴바로가기
메인메뉴 바로가기
컨텐츠 바로가기

복음주의 대학생 선교기관

천안UBF

성경66권강해서

요한복음 10장 강해 일부 선한 목자 예수님(1-21)

작성자 : 오요한
작성일 : 2006-09-19 00:00:00
조회수 : 3,677

문제지풀이(2)

    iconB_04384A.hwp  (16.00KB)

    iconB_04384B.hwp  (44.00KB)

요한복음 10장 강해 일부 선한 목자 예수님

말씀 요한복음 101-요한복음 1021

요절 요한복음 11절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

 

어느 회사에 신입사원에게 시험 문제를 냈습니다. 여러분도 한번 해보시기 바랍니다. 비가 오고 바람이 부는 밤입니다. 차를 몰고 가다보니 버스 정류장에 세 사람이 있습니다. 차가 자주 없는 곳입니다. 딱 한 사람만 태울 수 있습니다. 누구를 태우겠습니까? 한 사람은 죽어가는 노인입니다. 다른 사람은 자신을 살려준 의사입니다. 또한 사람은 한 평생 그려오던 여자입니다. 수험생들은 머리를 짜서 생각하였습니다. 노인을 태워 가면 노인은 가다가 죽을지 모릅니다. 의사를 태우고 가고자 하니 다음에도 신세 갚을 날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절세 미인은 지금은 놓치면 안 됩니다. 그래서 대부분 미인을 태우고 가겠다고 선택하였습니다. 아니면 노인이나 의사를 선택했습니다. 이들은 모두 탈락입니다. 이백 명 중에 한 명이 정답을 말했습니다. 그 사람은 병원의사에게 자동차 키를 주고 노인을 태우고 가서 치료하게 합니다. 그리고 자신은 아름다운 여자와 버스를 타고 갑니다. 그 사람의 지혜는 키를 버리는 데서 나온 것입니다. 그 시험 문제는 버려야 얻을 수 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을 찾은 것입니다.

예수님은 생명을 얻기 위해서 생명을 버립니다. 9장에 보면 예수님이 날 때부터 소경을 고치십니다. 눈뜬 사람은 한 가지 아는 것을 붙잡고 핍박 중에도 예수님을 부인하지 않습니다. 그러자 바리새인들은 이 사람을 출교시켰습니다. 예수님은 이것을 지켜보셨습니다. 예수님은 그 시대의 목자들로 마음이 상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에게 어떤 사람이 진정한 목자인지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바리새인과 달리 자신이 선한 목자라고 선포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선한 목자로서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린다고 하십니다.

예수님은 소경을 위해서 자신의 목숨을 포기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안식일에 병자를 고쳤다고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을 핍박합니다. 예수님은 병들고 고통하는 한 양을 돕고자 하는 선한 목자입니다. 바리새인은 자신의 기득권을 위해서 양들을 이용합니다. 이것을 배경으로 하여 예수님은 왜 자신이 선한 목자이고 종교지도자들은 삯군인가를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양으로 어떻게 살아야하는가 우리가 양들의 목자로 어떻게 살아야하는가 가르쳐줍니다. 이 시간 목숨을 얻기 위해서 자신의 목숨을 버리신 선한 목자 예수님을 배울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문으로 들어가는 자)

 

1,2절을 보십시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문을 통하여 양의 우리에 들어가지 아니하고 다른 데로 넘어가는 자는 절도며 강도요 문으로 들어가는 이는 양의 목자라

 

예수님은 이스라엘에서 양을 치는 풍습을 묘사합니다. 그 풍속을 통하여 참된 목자는 절도나 강도와 무엇이 다른지를 말씀하십니다. 이스라엘은 마을에 하나씩 공동 우리가 있습니다. 이 우리는 3m정도의 담이 쳐져 있고 문지기는 우리의 문을 지키고 있습니다. 저녁이 되면 목자들은 양들을 이끌고 문으로 당당히 들어옵니다. 문지기는 그를 위하여 문을 열어줍니다. 여러 목자들이 한곳에 양들을 섞어둡니다. 목자가 양 우리의 문으로 들어온다는 것은 너무나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그러나 절도나 강도는 문으로 들어오지 않습니다. 문지기가 그는 모르는 사람이므로 문을 열어주지 않습니다. 그들은 문으로 들어오지 않고 담을 넘어오거나 개구멍으로 들어옵니다. 이들은 하나님의 법을 따르지 않고 편법을 많이 씁니다. 이들은 들어와서 양들을 자루에 넣거나 죽여서 훔쳐갑니다. 예수님은 양의 문으로 들어가는 목자입니다. 바리새인들은 다른 곳으로 넘어가는 절도요 강도들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 정하신 문으로 들어갑니다.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여 살아갑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정하신 문은 어떤 문입니까?

 

(십자가의 좁은 문)

 

마태복음 713,14절입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자가 적음이라하나님이 정하신 문은 십자가의 좁은 문입니다. 십계명의 문입니다. 그 문은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입니다. 그 문으로 가는 길도 좁습니다. 그 문은 자기가 죽어야하는 들어갈 수 있는 좁은 문입니다.

번데기에서 나비가 나올 때 좁은 문으로 나옵니다. 그 문으로 나오는 것은 힘이 듭니다. 그러나 그 문을 거쳐서 나올 때 나비는 힘을 얻고 생명을 얻습니다. 나비가 나올 때 번데기의 입구를 잘라서 문을 넓혀주면 그 나비는 힘을 읽고 조금 날다가 죽는다고 합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예수님은 생명으로 인도하는 좁은 문으로 가십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의 문으로 가십니다. 그 길은 고난의 길이요. 수치의 길입니다. 처자와 형제도 버릴 수 있는 각오를 해야 하는 길입니다. 자기 목숨까지 버리는 길로 가십니다. 선한 목자 예수님은 이 좁은 길로 가셨습니다. 우리를 위해서 자신의 피를 흘려 죄를 사하십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의 길로 가면 양들이 생명을 얻습니다. 나중에는 예수님 자신도 생명을 얻습니다.

하지만 바리새인들은 하나님이 정하지 않은 문으로 갑니다. 그 문은 십자가 없는 넓은 문입니다. 그 문은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입니다. 그곳으로 들어가는 길도 넓습니다. 그들은 양들을 이용하여 자신들의 이익을 추구하는 길로 갑니다. 바리새인들은 자신이 희생하지 않는 길입니다. 그 길을 따라가면 최종에는 지옥으로 가는 길입니다.

 

(양의 이름을 각각 불러 인도함)

 

3절을 보십시오. “문지기는 그를 위하여 문을 열고 양은 그의 음성을 듣나니 그가 자기 양의 이름을 각각 불러 인도하여 내느니라

 

우리에는 여러 집의 양들이 섞여 있습니다. 아침이 되면 목자들이 와서 각각 자기 양의 이름을 불러서 인도하여 냅니다. 목자와 양은 깊은 사랑의 관계입니다. 짐승처럼 생각하지 않고 아들이나 딸처럼 생각합니다. 유치원에 자녀를 맡기고 엄마들이 아기를 데리러 갑니다. 그러면 자녀들이 엄마의 발소리 목소리를 잘 압니다. 목자와 양은 서로를 알기 때문에 다른 집의 양들과 서로 섞이지 않습니다. 양들은 각자의 이름이 있습니다. 점있는 양은 점박이, 눈이 큰 양은 왕눈이, 맘착한 양은 온순이, 싸움 잘하는 양은 투쟁이, 소망이 가득한 양은 소망이, 기쁨이 충만한 양은 조이라고 이름을 지어줍니다.

예수님은 우리 인간의 이름을 아십니다. 우리의 이름을 각각 불러서 인도하여 내십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허물과 약점, 장점과 특기를 아십니다. 흑인들이 우리 보기에는 다 같은 것 같지만 하나가 서로 다릅니다. 우리의 형편과 처지를 아십니다. 양들은 이름도 다르고 특성이 다르고 성격도 다릅니다. 목자는 양을 사랑하기 때문에 양을 인격적으로 압니다. 목자는 양이 양을 아는 것보다 더 잘 압니다. 예수님은 니고데모나 사마리아인이나 삼십팔년 병자나 소경을 아시고 각자 인격적으로 돕습니다.

 

(우리의 이름을 아시는 예수님)

 

다윗은 사울에게 쫓기며 여러 번 죽을 고비를 넘겼습니다. 사울은 여러 번 다윗에게 창을 던졌습니다. 불레셋 가드왕에게 포로로 잡히기도 하였습니다. 사울에게 완전 포위당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는 자신과 죽음과의 거리가 한 걸음 사이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은 그의 처지를 아시고 그를 안전하게 인도하여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그가 많은 전쟁을 치르면서도 손가락 하나 잘라지지 않게 하셨습니다.

다윗은 자신을 인도하신 목자 여호와를 이렇게 고백합니다. 시편 1391-4절입니다. “여호와여 주께서 나를 살펴 보셨으므로 나를 아시나이다 주께서 내가 앉고 일어섬을 아시고 멀리서도 나의 생각을 밝히 아시오며 나의 모든 길과 내가 눕는 것을 살펴 보셨으므로 나의 모든 행위를 익히 아시오니 여호와여 내 혀의 말을 알지 못하시는 것이 하나도 없으시니이다하나님은 우리가 우리를 아는 것보다 더 우리를 잘 아십니다.

예수님은 나다니엘을 보았을 때 이는 참 이스라엘이라 그 속에 간사한 것이 없다고 하였습니다. 그러자 나다나엘은 예수님께 어떻게 나를 아시나이까? 라고 반문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사마리아 여자를 보았을 때 그가 다섯 남편이 있었으나 지금 또 다른 사람과 살고 있는 것을 아셨습니다. 그가 만족함이 없이 사시는 것을 아셨습니다.

예수님은 삼십팔 년된 병자를 보셨을 때 그의 병이 벌써 오랜 것을 아셨습니다.

예수님은 눈뜬 사람이 쫓겨난 것을 아시고 그를 찾아가 도우셨습니다.

예수님은 사울이 교회를 핍박할 때 사울을 아시고 사울아, 사울아 부르셨습니다.

예수님은 40년 동안 광야 생활하는 모세를 아시고 모세야 모세야 부르셨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예수님이 죽은 후에 슬퍼하는 막달라 마리아를 아셨습니다. 예수님은 마리아야! 하고 부르신 후에 그에게 부활하신 예수님을 보여주시고 기쁨을 주셨습니다.

김춘수의 꽃이라는 시에 보면 누가 나의 빛깔과 향기에 알맞은 이름을 불러달라고 합니다. 예수님은 나의 외모와 본질에 알맞은 이름을 불러주십니다. 예수님은 나의 장점을 아시고 나의 약점도 아십니다. 예수님은 나의 생일을 아시고 나의 결혼기념일도 아십니다. 나의 아픔을 아시고 나의 가난도 아십니다. 나에게 무엇이 부족한 지를 아십니다. 공부하는데 지혜가 부족한 것도 아십니다. 무슨 과목의 시험을 잘못 보았는지 그래서 마음 고생하는지도 아십니다. 담배나 술을 끊지 못하여 고통하는 것도 아십니다. 불면증으로 고통하는 것도 아십니다. 나의 결혼과 취업의 문제도 아십니다. 이 모든 것을 아시고 우리를 부르시고 우리를 도와주십니다.

 

(목자와 양의 깊은 신뢰)

 

4,5절을 보십시오. “자기 양을 다 내놓은 후에 앞서 가면 양들이 그의 음성을 아는 고로 따라오되 타인의 음성은 알지 못하는 고로 타인을 따르지 아니하고 도리어 도망하느니라

 

목자는 한 양 한 양을 불러내고 앞서 갑니다. 위험이 있어도 목자가 먼저 당합니다. 수렁에 빠져도 목자가 먼저 빠지고 맹수를 만나도 목자가 먼저 만납니다. 목자는 양들이 따라 올 것을 신뢰하여 앞서갑니다. 그러면 양들은 목자의 음성을 아는 고로 양들은 목자를 신뢰하고 따라갑니다. 양들은 목자를 알고 목자를 깊이 신뢰합니다. 때로는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까지 따라갑니다.

목자는 양에게 목에 멍에를 메거나 다리를 묶거나 입에 자갈을 물리지 않았습니다. 뒤에서 매를 때리지도 않습니다. 소나 돼지는 뒤에서 몰아갑니다. 말을 듣지 않으면 채찍을 때립니다. 그래도 말을 듣지 않으면 꼬뚜레를 잡아다녀 고통을 줍니다. 그러나 목자는 양들 앞서 가면서 본을 보입니다. 목자가 앞으로 가니까 수백 마리의 양들이 따라갑니다. 곁길로 가지 않습니다. 목자와 양은 이처럼 깊은 사랑과 신뢰로 맺어진 관계입니다.

목자는 앞서 가시면서 가시덤불을 제하고 독초가 있는 곳은 피합니다. 목자는 양들을 푸른 초장 쉴만한 물가로 인도하십니다. 때로는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날 때도 있지만 양들은 목자를 신뢰하고 따라갑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을 광야에서 구름 기둥과 불기둥으로 인도하셨습니다. 그들을 광야 생활을 40년간 거쳐서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셨습니다.

월드컵의 명장면을 뽑으라면 포르트칼 전에서 박지성이 한 골을 넣고 히딩크에게 가서 안기는 모습입니다. 히딩크와 박지성은 깊은 신뢰로 맺어져 있었습니다. 얼마나 아름답습니까?

그러나 양은 타인의 음성은 알지 못하는 고로 타인의 음성을 듣지 않습니다. 타인이 부르면 타인에게 도망갑니다. 같이 있어도 타인인 경우가 있습니다. 타인은 양을 자신의 뜻을 이루고자 합니다. 바리새인은 성경 지식이 있고 목자라는 타이틀이 있습니다. 그러나 양들은 목자로 여기지 않습니다. 양을 도울 때는 사심이 없어야합니다. 오랫동안 사랑과 친절이 있어야합니다. 우리는 오랜 시간 사랑을 통하여 인격적인 관계를 맺어야합니다.

 

(본을 보이심)

 

예수님은 앞서 가며 우리를 인도하셨습니다. 이스라엘과 아랍이 서로 싸우면 이스라엘은 나를 따르라고 한다고 합니다. 그러나 아랍군대는 뒤에서 돌격 앞으로 한다고 합니다. 예수님은 양들에게 나를 따르라고 합니다.

세월호 선장은 가만히 있으라고 하고 자신은 도망했습니다. 이승만 대통령이 안심하라고 하고 자신은 한강철교를 끊고 자신은 도망갑니다.

종교지도자들은 뒤에서 조종하지만 에수님은 앞서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예수님은 먼저 발을 씻기시고 서로 발을 씻기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의 길을 가시고 나를 따르려면 십자가의 길로 오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시고 말씀을 실천합니다. 예수님은 길을 아시고 길을 인도하십니다. 예수님은 죽음의 강을 먼저 건너가시고 하나님 나라로 가는 길을 내셨습니다. 예수님은 꽃이 아름답고 생명나무 실과가 주렁주렁 열려 있는 하나님 나라로 인도하여주십니다. 지금은 말씀과 성령께서 우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십니다.

사도바울은 이 예수님을 따라서 가는 선한 목자였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죽으심을 본받아 어찌하든지 죽은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고자 하였습니다. 그는 자신이 예수님을 본받은 것처럼 양들도 자신을 본받으라고 하였습니다. 고전 111절입니다.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가 된 것 같이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가 되라사도 바울이 앞서가자 양들은 바울을 따라갔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예수님의 양으로서 해야할 일은 무엇입니까?

 

(양은 목자의 음성을 안다)

 

4절 후반절에 양들은 그의 음성을 아는고로 따라오되

 

목자되신 예수님의 음성을 알고 예수님을 따르는 것입니다. 양들은 여러 면에서 부족합니다. 뿔도 없고, 발톱도 없고, 이빨도 날카롭지 않습니다. 오징어는 먹물이라도 뿌리는데 양은 아무런 방어기능도, 공격기능도 없습니다. 눈은 지독한 근시입니다. 앞발이 짧아서 넘어지면 일어나지 못합니다. 토끼나 사슴처럼 빨리 도망가지 못합니다.

필립켈러 박사는 양에 대해서 깊이 연구하였습니다. 그분에 의하면 양은 보수적인 동물입니다. 아주 고집이 셉니다. 방향 감각이 없습니다. 먹이를 스스로 찾지 못합니다. 양은 같은 길로만 가서 양들이 가는 길에 도랑이 생긴다고 합니다. 다른 쪽에 언덕이 있어도 그곳에 갈 줄을 모르고 한 곳에서 황폐하게 할 정도로 먹습니다. 양은 너무나 착합니다. 죽일 때 아무 발버둥치지도 않고 말없이 죽습니다.

양은 반드시 목자가 필요합니다. 목자가 없이는 양은 살 수 없습니다. 양과 목자를 연결시켜주는 한 가지가 있습니다. 그것은 양의 귀가 발달한 것입니다. 양은 목자의 음성을 분간할 줄 압니다.

실제로 이런 실험을 하였습니다. 목자가 다른 사람의 옷을 입고 양을 불렀습니다. 타인이 목자의 옷을 입고 양을 불렀습니다. 양들은 정확히 목자의 음성을 따라서 갔습니다. 타인의 음성은 아무리 개인기를 가지고 흉내를 내도 따르지 않았습니다. 양들은 목자의 음성을 아는 천부적인 능력이 있습니다. 양이 해야 할 한 가지는 목자의 음성을 듣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양이라면 예수님의 음성과 사단의 음성을 구별할 수 있어야합니다. 우리는 무엇보다 십계명의 말씀을 들어야합니다. 십자가의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사단의 음성이 들리면 도망가야 합니다.

 

(하나님의 양 요셉)

 

하나님은 요셉을 타국의 노예로 감옥의 죄수로 인도하셨습니다. 요셉은 목자 되신 하나님이 함께 계셨으므로 애굽의 노예생활도 감옥의 죄수 생활도 그 길은 요셉에게 푸른 초장이요. 쉴만한 물가였습니다. 그는 기쁨으로 하나님의 음성을 따랐습니다.

그러나 사단이 보디발 여사를 통해서 동침하자고 하였습니다. 그 음성은 달콤한 음성이었습니다. 요셉은 그 음성이 타인의 음성이라는 것을 알고 도망갔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요셉을 애굽의 목자로 귀히 사용하여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성경 말씀을 통하여 말씀하십니다. 성령으로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우리를 인도하는 하나님의 음성이 사랑의 음성인 것을 압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음성을 따라갑니다. 이 세상에는 많은 소리가 들립니다. 시끄러운 소리가 들립니다. 사람들의 인간적인 소리가 들립니다. 눈이 뜬 소경은 예수님의 음성을 알아듣고 예수님께 경배하였습니다. 양들은 목자의 음성을 사랑의 음성으로 알아들어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는 성장할 수 있습니다.

 

(깨닫지 못하는 자들)

 

6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이 비유로 그들에게 말씀하셨으나 그들은 그가 하신 말씀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니라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에게 예수님의 좋은 양이 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다음에 양들의 좋은 목자가 되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깨닫지 못하였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또 다른 비유를 말씀하십니다.

 

(영의 문 예수님)

 

7,8절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예수께서 다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나는 양의 문이라 나보다 먼저 온 자는 다 절도요 강도니 양들이 듣지 아니하였느니라

 

예수님은 다시 한번 진실로를 반복하여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양의 문이라고 하십니다. 예수님보다 먼저 온자는 절도요 강도입니다. 세례요한은 예수님보다 먼저 왔지만 절도요 강도가 아닙니다. 그는 양들을 예수님께로 인도합니다.

그러나 바리새인들은 예수님께로 들어가지 않고 예수님께로 들어가는 자를 막습니다. 먼저 왔다는 것은 예수님보다 다른 것을 앞세우는 자입니다. 예수님의 문으로 들어가지 않는 자는 다 절도요, 강도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보다는 율법을 앞세우는 자는 절도요 강도입니다. 성전이나 율법은 예수님을 가르치기 위해서 주신 것입니다. 종교지도자들은 오히려 성전과 율법을 이용하여 예수님을 믿지 못하게 하였습니다.

에스겔서에 보면 자신들의 배만 부르게 하는 자는 삯군이 나옵니다. 지금도 본이 되지 못하고 죄악을 짓는 자가 있습니다. 그러면 양들은 저 지도자 때문에 나는 교회를 갈 수 없다고 합니다. 사랑의 교회 목사가 몰카를 찍어서 사람들의 지탄을 받고 있습니다.

예수님보다 자신을 앞세우는 것도 절도요 강도입니다. 예수님보다 이념이나 교리를 앞세우는 자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양들이 그들의 말을 듣지 않는다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을 통하지 않고 율법이나 도덕이나 사람들의 구미에 맞는 것이나 타 종교로 설득하는 자는 다 절도요 강도입니다.

 

(예수님과의 교제)

 

9절을 보십시오. “내가 문이니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받고 또는 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얻으리라

 

이것은 앞서의 비유와 또 다른 상황입니다. 앞에는 마을에 있는 공동 우리입니다. 그러나 여기는 양들을 이끌고 너무 멀리 나가서 마을의 공동 우리에 들어오지 못할 때를 말합니다. 그때는 돌로 만든 울타리만 있는 우리에 양들을 데리고 갑니다. 목자는 출입구를 가로질러 침구를 놓고 잡니다. 그러면 목자는 양의 문이 됩니다.

목자는 도적이나 사나운 들짐승에서 양들을 보호하는 문이 됩니다. 문은 통로이고 보호하는 기능이 있습니다.

티벳에 목자는 카메라가 어는 정도로 추울 때도 양의 우리 곁에서 자는 모습이 텔레비전에 방영된 적이 있습니다. 목자는 양들 가까이서 자다가 이리나 늑대가 오면 양을 구해줍니다. 양들은 목자를 통하지 않고는 들어가며 나오며 할 수 없습니다. 목자는 양들이 목자를 통과할 때 양들이 다치거나 병들었는지를 살피게 됩니다. 상한 자는 싸매주고 병든 자를 치료해주십니다.

예수님도 우리를 구원하시는 문이 되십니다. 예수님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십니다. 예수님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구원을 받을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죄를 위해서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다시 오십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죄에서 구원해주시고 사단에서 구원해 주시고 사망권세에서 구원해 주십니다. 예수님의 문으로 들어가며 나가는 자는 꼴을 얻습니다. 들어가며 나오며는 자유로운 교제를 말합니다. 우리는 예수님과 자유로운 교제를 하며 꼴을 얻습니다. 풍성한 말씀을 얻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살과 피를 참된 양식과 음료로 얻습니다. 하나님의 풍성한 사랑을 얻습니다. 우리의 십자가의 예수님과 깊은 교제를 해야 합니다. 예수님과 깊은 사랑의 관계성을 맺어야 합니다. 우리도 예수님을 본받아 십자가의 길을 갈 때 양들에게 풍성한 꼴을 공급할 수 있습니다.

 

(황명환 목사님)

 

수서교회의 황명환 목사님이 계십니다. 그분의 간증입니다. 그분은 어려서 죽을 병을 앓았습니다. 그분을 꿈을 꾸었습니다. 많은 짐승들이 쫓아왔습니다. 막 도망가는데 다른 괴물까지 쫓아왔습니다. 그가 도망가는 그 앞에 교회가 있고 문이 열려 있었습니다. 아이가 교회에 들어가자 문이 닫혔습니다. 그러자 괴물들이 달려 들어와 문을 긁어대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러나 문이 닫혀서 들어올 수 없었습니다. 아이는 그때 혼수상태에서 깨어났습니다. 당시에 교인들은 하나님께 철야 기도를 하고 있었습니다. 이처럼 예수님은 우리를 사단과 사망권세에서 보호해주시는 분이십니다. 예수님 안에 있으면 평안합니다. 예수님을 머리로 한 교회도 우리를 보호해주는 문과 같은 역할을 합니다.

 

(생명을 풍성히 얻게)

 

10절을 보십시오 도둑이 오는 것은 도둑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예수님이 오신 것은 양들이 생명을 얻고 풍성히 얻게 하시기 위해서입니다. 생명을 풍성히 얻는다는 것은 생명이 넘쳐난다는 말입니다. 성령이 충만해집니다. 성령이 충만하면 만나는 세상의 모든 것이 풍성해보입니다. 사람들이 예뻐 보이고 나무도 꽃도 예뻐 보입니다.

다윗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다녔습니다. 다윗은 그곳에서도 하나님을 자신의 목자로 모셨습니다. 다윗은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라고 하였습니다. 그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내 잔이 넘친다고 하였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나의 목자시니 나의 삶이 풍성하다고 고백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부족한 것이 많습니다. 돈도 부족하고 사랑도 부족합니다. 양도 부족하고 지혜도 부족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 편에서 보면 풍성합니다. 우리가 욕심을 가질 때 부족한 것 투성입니다. 욕심을 버리고 하나님의 사랑 편에서 보면 모든 것이 풍성합니다. 우리는 욕심을 버리면 풍성한 삶을 누릴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풍성한 삶을 살았습니다. 그는 장막 생활을 하였고 한 평의 땅도 없었지만 그는 풍성하게 손님을 대접하였습니다. 우리가 풍성하신 예수님을 나의 중심에 모시면 우리의 삶도 풍성해집니다. 예수님은 풍성한 은혜의 주님이십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그물이 찢어지도록 많은 고기를 잡게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오병이어로 오천 명을 먹이고 열두 광주리가 남게 하셨습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사랑도 풍성하고 지혜도 풍성하고 물질도 풍성하고 건강도 풍성해집니다.

우리는 내가 가져아 할 것보다 하나님이 너무나 많이 주신 것을 알게 됩니다. 나는 나와 같이 부족한 자에게 주님이 주신 은혜를 생각할 때 한없는 감사를 드립니다. 나를 학원에서, 천안 ubf에서 분에 넘치게 축복하여주셨습니다. 그러나 때로는 욕심이 들어오고 불신이 들어오면 모든 것이 짜증날 때가 있습니다. 결국은 내가 예수님을 나의 목자로 모시느냐 아니면 내가 목자가 되느냐는 것입니다.

 

(목숨을 버리는 목자)

 

11-13절을 보십시오.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 삯꾼은 목자가 아니요 양도 제 양이 아니라 이리가 오는 것을 보면 양을 버리고 달아나나니 이리가 양을 물어 가고 또 헤치느니라 달아나는 것은 그가 삯꾼인 까닭에 양을 돌보지 아니함이나

 

양들이 풀을 뜯고 있을 때 늑대나 이리가 나타나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때 목자가 이리나 늑대와 싸우면 목숨이 위태할 수 있습니다. 이때 목자와 삯꾼의 행동이 달라집니다. 삯꾼은 삯을 위해서 목자를 하는 사람입니다. 삯꾼은 삯이 목적이므로 자신의 손해가 나는 행동을 하지 않습니다. 삯꾼은 자신에게 손해가 날 때는 양들을 버리고 도망갑니다.

그러나 목자는 목숨을 걸고 이리나 늑대와 싸웁니다. 목자는 자신의 생명보다 양들을 더 사랑합니다. 선한 목자는 목숨까지 희생합니다. 예수님은 양들을 위하여 자신의 소중한 생명을 희생합니다. 죄인들을 위해서 생명을 아낌없이 내어놓습니다. 자식이 부모를 신뢰하는 것은 부모의 희생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보다 멋있는 말을 하는 자가 있지만 생명을 내어주는 자도 없습니다. 예수님은 하늘영광, 부귀영화를 버리고 생명도 버리셨습니다. 우리가 선한 목자가 되기 위해서는 능력만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지혜만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무엇인가를 버려야합니다.

삯군은 자신의 목숨을 살고자 양들을 과감히 버리는 자입니다. 목자는 양들을 위해서 목숨까지도 아까워하지 않는 자입니다.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에게 늑대요, 이리라고 합니다.

예수님이 바리새인을 공격하면 죽을 것을 압니다. 그래도 예수님은 선한 목자로 목숨을 버리는 길을 가십니다.

삯군과 목자를 구별하는 시험지는 바로 목숨입니다. 요즘에 양들은 이리에게 목숨의 위헙을 받고 있습니다. 위기 상황에서 자신의 목숨을 버릴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목숨을 버려서 말씀을 전해야 합니다. 아버지가 췌장암이 걸려서 죽는데 딸이 울고 있습니다. 아버지는 딸이 울지 못하게 하려고 전혀 죽음이 두렵지 않다고 하며 딸을 위로합니다. 딸을 사랑하니 죽음이 두렵지 않습니다. 시간을 희생하고 돈을 희생하고 심지어 자존심까지 희생합니다. 양들을 위하여 모든 것을 희생합니다. 샤론 자매는 복음을 전하기 위하여 용돈의 구십 프로를 쓴다고 합니다.

 

(양을 사랑하는 목자)

 

14,15졸울 보십시오. “나는 선한 목자라 나는 내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아는 것이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 같으니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

 

목자가 돈의 가치로 따지면 얼마 값이 안 나가는 양을 위해서 어떻게 목숨을 버립니까? 가치를 계산해보십시오. 손익계산을 해보십시오. 양을 위해서 어느 정도는 희생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목자가 하찮은 양을 위해서 어떻게 목숨을 버립니까? 양은 얼마 후에 잡아먹을 것입니다. 목숨을 버릴만한 가치가 있습니까?

목자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은 목자가 양을 알기 때문입니다. 양을 안다는 것은 양을 깊이 이해하고 사랑하고 신뢰한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은 양들이 죄로 인하여 고통하는 것을 아십니다. 사랑은 아는 것과 일치합니다. 사랑은 손익을 따지지 않습니다. 사랑은 이익을 생각하는 것이 아닙니다. 바리새인들은 자신의 유익이 되지 않자 출교를 시킵니다.

요즘 사람은 너무 계산합니다. 그러나 진정한 사랑은 계산하지 않습니다. 목자는 사랑을 해야 합니다. 목자는 양들을 사랑하여 목숨까지 희생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목숨까지 버리며 양들을 사랑합니다. 인간은 사단의 이리, 질병의 늑대, 가난의 도둑, 죄의 사자, 죽음의 강도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우리는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이런 우리를 아셨습니다. 우리를 사랑하였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구하고자 목숨을 버리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죄와 사단과 사망에서 건지고자 십자가에서 자신의 목숨을 온전히 버리셨습니다. 십자가에서 우리의 죄를 위해서 피흘려죽으셨습니다.

 

(우리에 들지 않은 양)

 

16절을 보십시오. “또 이 우리에 들지 아니한 다른 양들이 내게 있어 내가 인도하여야 할 터이니 그들도 내 음성을 듣고 한 무리가 되어 한 목자에게 있으리라

 

유대인은 자신들이 우리에 있어서 자신들은 구원받을 것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러나 유대인의 우리에 있다고 구원받는 것이 아닙니다. 목자되신 예수님을 따라야 구원 받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아직 유대인의 무리에 들어오지 않은 다른 양들을 생각하였습니다. 많은 이방인을 생각하였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을 위하서도 목숨을 버리고자 하십니다. 한 목자이신 예수님의 음성을 듣고 예수님을 따라서 구원받을 날을 바라봅니다. 예수님은 세계 만민을 구원할 그날을 바라보십니다.

 

(다시 얻기 위하여)

 

17절을 보십시오. “내가 내 목숨을 버리는 것은 그것을 내가 다시 얻기 위함이니 이로 말미암아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시느니라

 

예수님이 목숨을 버리는 또 다른 이유는 목숨을 다시 얻기 위해서입니다. 예수님을 죽으실 때 다시 부활할 것을 믿었습니다. 이것이 생명의 역설입니다. 우리는 죽어야 산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므로 하나님이 예수님을 사랑하십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양들을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십니다.

어떤 사람이 요술램프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 요술 램프는 딱한 가지 소원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 사람은 세 가지를 항상 생각하였습니다. 그는 돈, 여자, 결혼이었습니다. 그는 한 가지 소원을 묻는 요술램프에게 돈 여자 결혼하다가 돈- 여자와 결혼하겠다고 말하여 결국은 돈(돌은) 여자와 결혼하였습니다. 우스개 이야기입니다. 한 가지를 포기하지 못해서 다 잃은 경우을 재미있게 표현한 것입니다.

서론에서 말한 것처럼 포기해야 얻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죽어야 삽니다. 희생해야 생명을 얻습니다.

 

(계명에 순종)

 

18절을 보십시오. “이를 내게서 빼앗는 자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버리노라 나는 버릴 권세도 있고 다시 얻을 권세도 있으니 이 계명은 내 아버지에게서 받았노라 하시니라

 

예수님이 목숨을 버리는 세번 째 이유는 하나님의 계명에 순종하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에게 사랑의 계명을 주셨습니다. 십계명을 주셨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죽기까지 세상 사람들을 사랑하도록 방향을 주셨습니다. 그래야 사람들이 하나님을 사랑하고 순종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계명에 순종하십니다. 하나님은 계명에 순종하는 예수님을 사랑하십니다.

 

(스스로 버림)

 

예수님은 내가 스스로 버리노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하나 밖에 없는 생명을 스스로 버립니다. 자원하여 능동적으로 버리십니다. 자원하여 순종하십니다. 예수님은 잃어버리는 것이 아닙니다. 빼앗기는 것이 아닙니다.

부모가 자식에게 돈을 주면서 강도 만났다고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런 부모는 자식에게 빼앗기는 마음으로 줍니다. 예수님은 스스로 버린다고 하였습니다. 자원하는 마음으로 기쁨으로 버리는 것입니다. 우리가 기왕 줄 것이라면 좋은 마음으로 주고 웃는 마음으로 주어야 합니다. 빼앗기는 마음으로 주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가 주님을 위해서 충성할 때 빼앗기는 마음으로 드려서는 안 됩니다. 잃어버리는 마음으로 드려도 안 됩니다. 스스로 자원하는 마음으로 드러야 합니다. 주도적이고 자율적인 충성입니다.

예수님은 나는 버릴 권세도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스스로 버린다는 것은 엄청난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시면서 누가 나를 죽이는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죽는다고 하십니다. 우리가 얻으려면 버려야합니다. 확실한 목적이 있습니다. 목적의식을 잃어버리고 버리는 것은 상실된 것입니다. 바울은 양들을 위해서 자신의 피를 드려도 좋다고 하였습니다. 지금은 잘 사는 시대에 살아갑니다. 우리는 자원하는 마음으로 주님을 위해서 희생해야 합니다.

 

(그리스도 예수님)

 

19-21절을 보십시오. “이 말씀으로 말미암아 유대인 중에 다시 분쟁이 일어나니 그 중에 많은 사람이 말하되 그가 귀신 들려 미쳤거늘 어찌하여 그 말을 듣느냐 하며 어떤 사람은 말하되 이 말은 귀신 들린 자의 말이 아니라 귀신이 맹인의 눈을 뜨게 할 수 있느냐 하더라

 

예수님이 자신을 선한 목자요, 양들의 문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만이 유일한 선한 목자라는 말입니다. 그러자 사람들은 두 가지 반응을 보였습니다.

처음에는 깨닫지 못하였지만 이제는 자신이 절도요. 강도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들은 화가 났습니다. 이들은 예수님을 보고 미쳤다고 하였습니다.

어떤 사람은 맹인의 눈을 뜨게 하신 분이 그리스도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미친 사람의 말이든지 아니면 그리스도로서의 말입니다. 여러분은 예수님을 어떤 분으로 생각하십니까? 예수님은 우리의 그리스도가 되십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음으로 그 안에서 풍성한 삶을 누리기를 기도합니다. 아멘!

요한복음 10장 강해 일부 선한 목자 예수님

말씀 요한복음 101-요한복음 1021

요절 요한복음 11절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

요한복음 10장 강해 일부 끝입니다.





번호 제목 작성자 작성일
37 [요한복음] 요한복음 12장 강해 이삼부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12-26) 오요한 2007-07-16
36 [요한복음] 요한복음 12장 강해 일부 사랑의 허비 (1-11) 오요한 2007-06-22
35 [요한복음] 요한복음 11장 강해 이삼부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보리라(28-57) 오요한 2007-03-14
34 [요한복음] 요한복음 11장 강해 1 부 죽음은 잠이다 오요한 2007-03-14
33 [요한복음] 요한복음 10장 강해 이부 예수님의 착한 양(22-47) 오요한 2007-03-14
32 [요한복음] 요한복음 10장 강해 일부 선한 목자 예수님(1-21) 오요한 2006-09-19
31 [요한복음] 요한복음 9장 강해 이부 우리도 맹인인가?(13-41) 오요한 2006-08-06
30 [요한복음] 요한복음 9장 강해 일부 운명은 없다(1-11) 오요한 2006-07-09
29 [요한복음] 요한복음 8장 강해 삼사부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라라(31-59) 오요한 2006-06-11
28 [요한복음] 요한복음 8장 강해 이부 세상의 빛 예수님(12-30) 오요한 2006-06-04
1 2 3 4 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