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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주의 대학생 선교기관

천안UBF

연구자료

황재훈 인생소감

작성자 : john444
작성일 : 2010-07-19 00:00:00
조회수 : 626
라이프 소감

저는 서울 목동에 위치한 한 병원에서 태어났습니다.
솔직히 무슨 구인지는 모르고 그렇게 태어났다고만 부모님께 들었습니다.
다만 서울에서 있었던 제 기억이라면 다섯 살 때 기억이 전부인데, 당시 다녔던 유치원과 집만 기억이 납니다.
정원이 있는 붉은 3층 저택에서 살았고, 2층에는 어떤 사람이 세들어 살고 있었으며 지하에도 한 가정집이 자리하고 있었던 것으로 기억하고 있습니다.
모친의 말씀을 들어보니 그당시 할아버지께서 사업을 아버지에게 물려주고 아버지께서 사장직을 맡고 계셨고, 상황이 굉장히 나뻤다고 합니다.
후에 아버지 말씀으로는 사업 아이템을 도자기에서 통신 기기 쪽으로 바꿨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했던 것이 사업을 정리한 원인이 었다고 합니다.
두분 말씀으로는 사업이 망하기 전에 정리를 먼저 했던 탓에 노동자들의 밀린 월급들을 충당할 수 있었고, 사업을 정리한 것에 대해선 두 분 다 그건 분명 후회없는 결정이었다 말씀하십니다.
제가 고입 검정고시를 칠 무렵 어머니께선 당시 할아버지를 괴물처럼 이야기해주며 차라리 사업을 정리했던것이 옳은 결정이었다고 말씀하십니다.
어쨋던 저로선 기업보다는 당시 살았던 집의 형태와 유치원만 기억이 납니다.
당시 전 늘푸른 유치원이라는 곳을 다녔습니다.
아직도 있을련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들어보니 그 당시도 전 또래 아이들과 잘 어울리지 못했다고 합니다.
아니, 들어본 것이 아니라 사실 절 멸시하는 아이들의 얼굴이 생생하게 기억이 납니다.
원인은 당시 아이들이 두려워 제가 똑바로 묻는 말에 답이나 주고받는 것을 잘하지 못했던 것으로 기억하고 있습니다.
또 기억이 나는 것은 유치원 안에서 아이들과 같이 만화를 보며 즐기기 보단, 홀로 밖에서 돌아다니는 시간이 많았던 것과 유치원에 있기가 싫어 스스로 집까지 찾아갔던 적이 기억에 있습니다.
할머니께선 유치원에서 집까지 꽤 먼거리 였었는데 당시 제가 어떻게 집을 찾아왔는지 의문이었다고 항상 말씀하십니다.
하여튼 서울 목동에서의 기억은 대체로 좋았던 것 밖에는 없습니다.
생일 잔치하며 삼촌이 3층에 위치한 방에서 제 생일 선물을 던져 주었던 것.
그것이 전부입니다.
하지만 당시 부모님께선 할아버지 때문에 상당히 괴로웠다고 합니다.
근데 전 대전에 있을 때 만큼 끔찍한 기억이 없습니다.
지금은 나이가 들어 그러시지 않지만 당시 아버지께선 그때까지도 혈기가 넘쳐 어머니와 자주 충돌을 하셨습니다.
아버지께선 집안에 있는 물건을 자주 집어 던지셨고, 박살난 물건들이 한두개가 아니었습니다.
물론 집어던지는 것은 제가 대학을 입학한 후에도 그건 쉽게 고쳐지지 않았습니다.
대학 2학년때 이르기까지 아버지 손에 박살난 제 컴퓨터가 거의 넉대에 이르니까요.
486dx(제가 유치원 당시일때부터 있었으니 당시로 치면 거의 100만원대), 팬티엄 3컴퓨터 (이것 또한 제 초등학교 6학년 시절만 해도 100만원가 했습니다.), 이후 얻은 넉대의 컴퓨터들 역시 아버지 손에서 박살이 났습니다.
원인은 어머니와 싸운 감정을 제 컴퓨터에 푸셨습니다.
‘집안사정이 어떻게 돌아가는 데 컴퓨터만 하고 있냐고, 이거 부숴버릴 거라고.’
여튼 대전에서의 생활은 지옥 그 자체였습니다.
어머니께선 매일같이 이혼하겠다는 말씀을 하시고 아버지께선 항상 화가 난 채로 계시고 당시 전 아버지께서 느낀 불화의 감정을 그대로 받아왔습니다.
그래서 어린 시절은 컴퓨터 게임보단 만화를 보는 것으로 시간을 보냈는데, 저로서도 당시 제가 좀 모자란 구석이 없진 않을 것이라는 추측을 할 수 있었습니다.
만화 캐릭터들의 행동자체를 동경한 나머지 그행동을 그대로 따라한 탓에 학교에서 바지에 똥을 싸거나 여러 바보 같은 행동들을 많이 자행해 왔으니까요.
제 기억이 맞다면 만화 캐릭터들의 행동을 통해 인지도를 도모해보려는 생각도 없진 않았을 거라 사례됩니다.
그것은 어떻게 말하든 참 바보같은 발상이 었죠.
덕분에 전 초등학교 1학년때 부터 왕따라는 것을 알게 되었고, 아버지께 그날 죽도록 맞았습니다.
초등학교 2학년 때도 1학년 때의 행동들이 그대로 반영 되었던 탓에 왕따란 타이틀을 움켜쥐고 살았고, 결국 3학년에 이르러 전학을 갔습니다.
그때도 대인관계가 확실히 안좋았습니다.
솔직히 어딜가나 대인관계가 좋았던 적은 거의 없었습니다.
전 3학년 때도 아이들에게 얻어맞고, 아버지께서 절 구타한 학부모를 찾아가 충돌을 빚었던 적이 많았습니다.
대전에서의 기억은 아버지께서 무척이나 다혈질이셨다는 것과 제 행동에 있어 저 자신의 책임이 부담된다는 것을 몰랐던 것 그리고 그런 집안 사정을 보며 항상 눈물을 보이셨던 어머니의 모습 뿐이었습니다.
그대로 3학년 2학기때 처음으로 친구를 사귀었습니다.
지금은 고등학교때 만남이후 서로 불쾌한 감정이 싸여 지금까지도 연락을 안하고 있는 영현이라는 친구였습니다.
처음부터 그친구와 사이가 좋았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처음엔 그친구와 서로 수도 없이 다투었고, 그 끝에 제가 그간에 제가 한 행위들에 대해 사과하는 것으로 그친구와 우정의 관계를 가질 수 있었습니다.
그놈은 초등학교 6학년이 되기까지 유일하게 뭔가 문제를 안고 있었던 제 옆을 지켜주었던 녀석이고 지금은 비록 연락조차 끊고 살고 있지만 그친구에 대한 미련은 아직 남아 있습니다.
후에 제가 미래에 대하여 조금 더 당당한 모습이 되면 그 녀석을 다시 친구로서 연락을 취해 볼 생각입니다.
어쨋던 초등학교 3학년 당시 전 그 친구를 만났고, 지독한 왕따 생활 속에서도 일말의 위안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다시 넘어가 당시 저희 어머니와 아버지의 관계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대전의 어은동에 살았던 우리가족은 제가 학교를 옮기면서 송강동으로 옮겨갔습니다.
당시 아버지께선 사업을 접고 어떻게 하신건지 속셈학원 원장직을 맡고 계셨고, 그때가 바로 제가 쇠몽둥이로 얻어 터졌을시의 기억입니다.
당시 어린 마음에 이벤트로 산타 복장을 한 선생님.
아버지 밑의 직원이 나왔을때 저는 가짜다 가짜 하면서 아이들을 선동했습니다.
이날 아버지께 다리가 거꾸로 집어 들려진 채로 얻어 맞았습니다.
그때는 제 행위와는 상관없이 억울한 감정이 컷던탓에 스케치북에 화가 풀릴때까지 아버지에 대한 욕설을 마구 적어놓은뒤 침대 밑에 숨겨놓았습니다.
그리고 사흘 뒤 어떻게 된건지 그스케치북이 아버지 손에 들어갔습니다.
전 이날 방으로 불려들어가 아버지가 무서워 도망치려던 와중에 쇠몽둥이로 등짝을 얻어맞았습니다.
당시 송강동에는 할렐루야 교회라는 장로 교회가 있었는데 달리 생각나는 곳이 없었던 전 그곳으로 숨어들어갔고, 다행히 후에 아버지께서 화를 푸신 탓에 집안에서 잠을 이룰수 있었습니다.
여튼 초등학교 시절은 아버지께 얻어맞았던 기억이 태반이었고, 뭐 저뿐만아니라 제 나이또래들은 그당시 다 그렇게 컷을 것이라는 생각을 위안 삼아 초등학교시절을 보냈습니다.
그리고 제가 고입 검정고시를 보게되었던 원인인 중학교 시절로 넘어가겠습니다.
초등학교시절을 왕따로 지낸탓에 아이들에 대한 두려움이 많았던 전 초등학교 때와 달리 아이들에게 얻어맞는 한이 있어도 저항할 줄을 몰랐습니다.
체구가 작은 아이가 와서 때려도 전 맞기만 했고, 그것이 청소년기를 넘길 수 있는 유일한 방편이라고 믿고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믿음조차도 보기좋게 배신당하고 말았습니다.
1학기가 거의 끝나갈 무렵 3학년들이 축구를 하는 모습을 보았는데, 옆에 있던 한 친구가 그 선배를 잘 못한다며 욕을 했습니다.
하지만 우습게도 그친구는 후환이 두려웠는지 그죄를 고스란히 제게 떠넘겼고, 우습게도 제가 선배들에게 끌려가 선배를 욕했다는 이유로 추궁을 받았습니다.
억울한 감정을 하소연 했지만 들어주는 이가 없었고, 내일 죽여버리겠다는 협박에 겁에 질린 전 내가 행하지도 않은 일로 오인을 받아 선배들이 날 죽이려 들었다 억울해서 모친께 학교를 더 이상 다닐 수가 없다는 감정을 눈물로 하소연 했습니다.
그렇게 고입 검정고시를 보게 되었고, 이것은 가족들 사이에서 조차 약점을 잡히게 되어 이자식 그냥 학교를 보냈어야 했어란 말이 나오게 되었습니다.
중학교를 1학년 1학기만에 중퇴한 이후 전 검정고시에 매진했고, 어머니께서 연결해주신 과외 선생님의 지도하에 수학과 영어만 90점대가 나왔습니다.
여기서 과외선생님에 대하여 이야기 해 드리겠습니다.
제 과외선생님께선 서울대를 졸업하셨고, 아버지만큼이나 다혈질을 성격을 가진 분이셨습니다.
하지만 서울대란 이름이 어색하지않게 항상 성실한 면모를 보이셨고, 병에 걸려 다 죽어가는 상태에서 조차 저를 찾아와 과외를 지도하셨습니다.
제인생에서 가장 무서웠던 사람둘을 꼽자면 제 초등학교 시절의 아버지와 중고등학교 시절 만난 과외선생님이라 답할 수 있을 것입니다.
과외선생님 역시 매로서 절 다스려 주셨습니다.
처음엔 꿀밤에서 시작했습니다.
겨우 꿀밤이라 생각하실지도 모르겠지만 머리에 혹이 생길 정도입니다.
그 이후 꿀밤에서 시작하여 점점 발전해 나갔습니다.
꿀밤에서 시작하여 길고 굵은 쇠철사에 이르기까지.
이때 어머니가 정말 미웠는데 다름아닌 그러한 매를 제공해 주신 분이 어머니셨습니다.
덕분에 제 중학생에서 고등학생 시절까지는 여러 가지의 억화심정으로 어머니와 잦은 충돌을 빗었습니다.
다행히 그런 엄한 과외선생님이 계셨던 탓에 다른건 몰라도 수학과 영어 만큼은 90점대로 고입과 대입 검정고시를 통과할 수 있었습니다. (다른 과목은 묻지마세요. 특히 다른 분들 고등학교 시절 다 잘 봤다하는 가정은 드릴말씀 없습니다.)
중고등학생 시절 그런 존경스러운 선생님도 계셨지만 이면에 끔직했던 시간들도 없진 않았습니다.
어머니의 클래식 기타 레슨을 도와 동급생이나 어린 아이들을 지도하는 것입니다.
초등학생들은 그럭저럭 넘길 수 있어도 당시 제 초등학교 기억을 알고 있는 중 학생들이 존재했던 탓에 전 지옥같은 시간을 보내야 했습니다.
중학생들은 어지간히 그 시간을 빌미 삼아 절 무시하려 들었고, 당시 다혈질이었던 전 말보다는 손이 앞섰습니다.
그 결과 학원이 미치광이가 있다는 소문이 돌기 시작했고, 어머니께서 학원을 운행하시는 건 순탄치 만은 않았습니다.
더욱이 집이 학원이었던 탓에 개인의 프라이버시가 지켜지지 않았습니다.
아이들이 레슨하는 곳을 넘어가 제 사생활을 훔쳐보거나 그걸 빌미삼아 자기들끼로 욕설을 하고 저는 그것에 욱하여서 아이들에게 언질을 놓으려면 어머니께서 무조건 제게 책임을 물으셨습니다.
그리곤 그 아이에게 사과하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럴수록 아이들은 저를 더욱 괄시하려 들었고, 사생활에 대한 보장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는 학원 운영은 그야말로 지옥 그 자체 였습니다.
무엇보다 여기서 사생활에 대하여 가장 큰 오류를 범한 것이 어머니의 실수 였습니다.
고입 검정고시를 마쳤던 전 홀가분한 기분으로 모든 것이 끝났다는 생각에 방구석에 틀어박혀 야동을 보거나 게임을 하는 것을 시간을 보냈습니다.
하지만 모친된 입장에서 아들의 그런 모습이 좋게만 보였을리 없었습니다.
여기서 어머니께서 범한 것이 바로 아이들에게 잠겨진 문을 열쇄없이 딸 수 있는 방법을 알려준 것입니다.
레슨하는 공간과 집안의 사적인 공간으로 통하는 문은 길다란 책받침 하나를 쓰면 간단하게 따낼 수있습니다.
처음엔 아이들도 이것을 알지못해 출입을 하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어머니께서 누차 출입하신 이후 전 항상 아이들에게 부끄러운 모습을 노출시켜야 했고, 심지어 아이들이 있는 곳에서 조차 저에 대한 질책을 누그러 뜨리지 못하셨습니다.
윽박을 지르시며 아이들 앞에서 망신을 주던 어머니의 모습이 아직도 기억에 생생합니다. 전 아직도 그당시의 어머니에 대해선 원망스러운 감정을 숨길 수가 없습니다.
더욱이 어머니는 제가 아무것도 안하고 있다는 사실에 클래식 기타 레슨을 시키셨고, 어린아이들에게 조차 이미지가 실추될 만큼 실추된 상황에서의 레슨이 순탄할리만은 없었습니다.
아이들은 뒷 이야기를 하며 항상 비관적인 눈으로 저를 봐왔고, 아이들의 그런 시선을 피하고 싶어 레슨을 그만하려고 들면 또다시 불과 같은 어머니의 질책이 뒤따랐습니다.
그렇게 레슨을 하여 도저히 참기 힘든 모욕을 들어 때리진 않더라도 형으로서 언질만이라도 놓으려 들면 어머니께선 제게 책임을 물어 제 생활을 그대로 들먹이며 아이들에게서 망신을 주셨습니다.
어머니께선 제가 아이들에게서 받게되는 억울한 감정따윈 안중에도 두시지 않으셨습니다.
여동생 조차 그런 저를 사람보 듯 하지 않았고, 저는 마땅히 위로 받을 곳이 없었습니다.
그때 저는 열등감의 지배하에 놓이게 되었고, 거기다 대학시절 이후조차 이것에 시달려 여러 사람으로부터 지탄의 대상이 되어야 했습니다.
특히 직업전문학교는 제 인생에 있어 최악의 장소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라 사례됩니다.
대전에 있는 직업전문학교에서는 40대 남성을 인두로 지져버리려 들었고, 수원 직업전문학교에서는 30대 남성의 머리를 모니터로 내리 찍어버렸습니다.
처음엔 기능대도 인간 말종들이 모이는 곳이라 느꼈지만, 직업전문학교는 교사진을 비롯하여 정말 사람이 있는 곳 같지가 않았습니다.
특히 수원 직업 전문학교는 마지막으로 나올 때 교사와 거의 싸울뻔하고 나왔습니다.
기억해보면 직업전문학교 인간들은 대체로 개념이란 단어들을 굉장히 좋아했습니다.
저는 그들의 행위들 가운데 모순점을 찾아 이를 토대로 개념이란 단어 자체를 반박할 방법들을 찾았습니다.
그리고 그결과 개념이란 단어를 언급하는 자들을 수도없이 질책하는 결과를 낳았습니다.
이것이 ubf를 알기까지의 제가 살아오며 느낀 인생에 대한 경험이자 정의들이었습니다.
그렇게 하여 저는 그런 인간들 속에 묻혀살 수 없다는 생각에 편입영어에 매달렸고, 문법이나 어휘따윈 고려치 않은채 그때는 그저 단어와 답만이라도 죽기살기로 외웠습니다.
물론 그때 외웠던 단어들을 지금 답하라면 지금의 저로선 답할 길이 없습니다.
하지만 저는 편입 시험을 통해 목표했던 단국대학교 3학년으로 편입하게 될 수 있었고, 이를 통해 조금이나마 직업전문학교나 기능대학 보다 조금 더 나은 인생을 영유하고 있다는 일말의 자존심을 쟁취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4년제의 교과목들은 부푼 희망들을 절망으로 이끌기 충분했습니다.
이미지 영상하나에도 기능 대학을 다닐시 얕게 배웠던 고급 프로그래밍 언어 들을 사용하고 있었고, 우습게 여겼던 영상 편집 프로그램 조차도 세밀하면서 여러개의 복잡한 추가 기능들로 구현된다는 사실에 경악을 금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답답한 감정을 당시 니코틴이라는 가연성 물질로 풀어야 했던 전 그때 모친으로부터 한통의 전화를 받을 수 있었습니다.
다름아닌 동아리를 가입하라는 말씀이었습니다.
저는 기존에 클래식 기타를 전공했던 경험을 살리기 위해 라미레즈라는 동아리를 수소문하여 그곳의 동아리방을 찾았습니다.
제가 그곳을 찾아가 동아리를 가입하고 싶다고 하자 라미레즈의 동아리 사람 한명이 말하기를
“여긴 군대식 체계를 따르고 있어서 3학년들 조차 처음 들어 왔다면 1학년처럼 굴립니다.”
‘차라리 그냥 욕을 하지’라는 생각이 제 머릿속에 지배적으로 깔리고 있었고, 저는 그런 인간과 상대하기 보단 그냥 다른 동아리를 찾아보기로 마음을 굳혔습니다.
그러던 중 저는 결국 포기라는 단어를 알게 되었고, 망연자실하게 혼자 더위를 달래며 휴게실 앞을 서성이던 중 마침 전도를 나오신 요한 목자님과 이삭목자님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당시 저는 기독교 동아리라는 사실에 카운슬링을 기대하고는 주저 없이 그곳을 찾아갔고, 덕분에 당시 인턴 목자로 동방에 자주 나오시던 이삭 목자님께선 저로 인해 많이 시달려야 했습니다.
처음엔 기타 동아리인 라미레즈에 대한 욕설에서 시작하여 기능대학, 그리고 직업전문학교에 이르기까지 있는 감정이나 없는 감정들 전부 토해냈고, 어느새 카운슬링 보단 논전을 즐기게 되어 자주 동방을 찾게 되었습니다.
그런 활동으로 전 다행히 기능대학이나 직업전문학교로부터 느낀 격한 감정으로부터 조금을 거리를 둘수 있게 되습니다.
덕분에 이삭목자님께선 저로 인해 피곤할 일이 줄어 드셨고, 동시에 휴학하게 되어 저는 수원 집으로 돌아가 어느덧 제게 마음에 치유를 준 ubf의 관계들에 대하여 조금은 뜸을 두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3학년 2학기에 접어들면서 다시금 ubf의 활동에 조금은 제 의지를 더해 보았고, 그 끝에 오늘 목동선어에 입거한 라이프 소감 발표에 이를 수 있었습니다.
오늘이시간에 이르기 까지 ubf에서 학생회 밑 성경 공부를 통해 많은 말씀을 배웠습니다.
하지만 그중에 제기억속에 자리한 것은 단하나입니다.
“하늘에서 소리가 나기를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심히 너를 기뻐하노라.”
그안에 깃든 뜻은 다름아닌 열등 심리에 사로잡힌 저 자신에 대한 충고이자, 완벽하게 사랑할 수도 없는 자기 자신을 사랑하기 보단 진정으로 자신을 이해해 주고 아껴줄 수 있는 하나님으로 자신의 프라이드를 형성하라는 의미였습니다.
오랜시간 전 자신을 사랑한다고 말하면서도 정작 형성된 방어심리를 통해 그것이 관계성에 결여된 열등심리로부터 비롯된 것임을 깨달았고, 동시에 그 열등심리가 자기 사랑이 아닌 바로 자신을 혐오하는 곳으로부터 나왔음을 인지 할 수 있었습니다.
전 저 자신을 사랑하고 누구보다도 큰 자아를 형성하고 있다고 말하면서도 실제로는 누구보다도 자신을 억압하고 질책을 가하고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결과적으로 하나님외에는 인간은 진정으로 누군가를 사랑할 수 없다는 것이 었습니다.
그리고 그때 전 알 수 있었습니다.
인간은 타인에 대한 사랑도 그렇고 육적사랑도 완벽할 수가 없으며 하다못해 자기 자신조차도 온전히 사랑할 수 없는 나약한 존재라는 사실을.
결국 인간이 근본적으로 사랑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은 오직 하나님 뿐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하나님께선 성령 안에서 거하는 모든 이들을 자신의 아들로서 심히 기뻐한다고 말씀 하셨습니다.
이것은 인간의 사랑은 완벽할 수가 없기에 하나님 께선 하나님 자신의 사랑을 통하여 진정한 사랑을 배우라는 의미와 같은 것입니다.
한 학자가 말하기를 자신을 온전히 사랑할 수 있을때 비로소 타인을 사랑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전에는 그 학자의 말이 전적으로 옳은 줄로만 알았지만 그것은 제가 인간의 능력을 너무 과신했던 문제가 있었음을 발견 할 수 있었습니다.
이곳에서 자기 자신을 사랑할 수 있는 아니, 이세상에서 진정으로 자기 자신을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되는 지를.
결국 인간은 감정으로 비롯된 욕구라는 본성에 억압을 받고있기에 즉, 열등감, 질투, 혹은 분노의 굴레로부터 벗어나지 못하기에 진정으로 무언가를 한결같은 마음으로 사랑할 수가 없습니다.
자신의 감정만큼이나 타인의 감정 역시 쉴새없이 변화하고 자신 역시도 시도때도 없이 변화하는 기분으로 인해 한결 같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에 대한 사랑은 한결 같을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선 모든 이의 마음가운데 자리하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즉, 우리가 기억할 수 있는 하나님은 우리가 육안으로 확인 할 수가 없기에 그분의 허물을 가늠할 수 없을뿐더러 성경속에서의 하나님은 그 어떤 상황속에서도 항상 인간을 향한 한결같은 사랑을 보이셨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사고는 시간과 때에 따라 변화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사랑은 시간에 구애를 받지 않고 언제나 말씀안에서 한결같은 마음으로 인간의 구원을 외치고 계십니다.
저는 이런 하나님의 사랑을 인식하고 이번 목동 선서를 통하여 더 나아가 온전히 사랑할 수조차없는 결국 미련만 남아있는 자신을 제하고 그곳을 하나님을 채우게 되길 희망하며 소감 발표를 마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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