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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주의 대학생 선교기관

천안UBF

성경66권강해서

에베소서4장 강해 2부(4:17-32) 그리스도 안에서 새생활

작성자 : 오요한
작성일 : 2005-03-15 00:00:00
조회수 : 5,970

문제지풀이(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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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베소서 4장 강해 이부 그리스도 안에서 새 생활

말씀/에베소서 4 17-에베소서 432

요절/424"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입은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24)

 

4장부터 사도 바울은 실제적인 그리스도인의 윤리 문제를 돕고 있습니다. 앞에서 바울은 성도들이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 되기 위해서 성도들은 윤리적인 면에서도 성숙해야 합니다. 세상 사람들과 달라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생활을 해야 합니다. 이제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인의 성숙에 대해서 가르쳐주십니다.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난 자)

 

17, 18절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내가 이것을 말하며 주 안에서 증거하노니 이제부터는 이방인이 그 마음의 허망한 것으로 행함 같이 너희는 행하지 말라. 저희 총명이 어두워지고 저희 가운데 있는 무지함과 저희 마음이 굳어짐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 있도다."

 

바울은 그리스도를 믿지 않은 이방인들의 생활이 어떠한지를 말씀하십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이들과 달라야 함을 말씀하십니다.

이방인이 타락한 근본 원인은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났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떠난 것은 꽃이 꺾여져 생명의 근원인 뿌리를 떠나서 꽃병에 꽂혀 있는 상태를 말합니다. 지구가 태양을 돌다가 괘도를 이탈한 것과 같습니다. 성경에는 이것을 죄라고 합니다. 죄는 교만으로 자신이 하나님이 되어 하나님을 떠난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은 것입니다. 이는 탕자가 아버지의 구속이 싫어서 아버지를 멀리 떠난 것과 같습니다.

왜 그들이 하나님을 떠났습니까? 사도 바울은 두 가지를 지적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무지함과 마음이 굳어짐으로 하나님을 떠났다고 말합니다.

 

(무지로 떠남)

 

첫째, 그들은 무지로 하나님을 떠났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에 대해서 알지 못합니다. 그들은 영적인 눈이 가리워져 있습니다. 물질 때문에, 정욕 때문에, 탐욕 때문에 영적인 눈이 가리워져 있습니다. 그들은 사랑과 능력의 하나님, 살아계신 하나님을 알지 못합니다. 창조주 하나님을 알지 못합니다. 하나님을 모르니 하나님을 떠날 수밖에 없습니다.

 

(마음이 굳어짐으로 떠남)

 

둘째, 그들은 마음이 굳어짐으로 하나님을 떠나있습니다. 그들의 마음이 굳어졌다는 것은 마음이 완악한 것을 의미합니다. 바위처럼 딱딱해진 상태를 의미합니다. 바로와 같이 고집을 부리고 회개하지 않는 마음을 말합니다. 이런 자들은 하나님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마음이 완악해져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합니다. 내 마음대로 살고 싶어합니다. 세상을 사랑하고 세상 욕심을 따라서 살고 싶어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떠났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을 떠난 자들의 마음은 어떻게 됩니까?

 

(하나님을 떠날 때의 현상)

 

그들이 하나님을 떠났을 때 처음으로 나타나는 현상은 마음의 허망한 것으로 행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떠난 사람들은 세상 것으로 빈자리를 채우고자 합니다. 사람이나 물질이나 오락 등으로 그 속을 채우고자 합니다. 이들은 일시적인 만족만을 줍니다. 마음이 허망해집니다. 이들은 무엇인가 열심히 사는 것 같지만 인생을 결산해 보면 남는 것이 없습니다. 죽음과 함께 모든 것이 사라지기 때문입니다. 이런 자들은 가을이 되면 공허함과 우울증이 찾아옵니다.

다음으로 총명이 어두워집니다. 이는 지혜와 분별력을 상실하게 된다는 말입니다. 지혜는 어떻게 사는 방법을 말합니다. 정보화 시대를 맞이해서 지식은 홍수처럼 날로 늘어나고 있지만 지혜는 사라졌습니다. 그 길로 가면 죽는다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그 길로 갑니다. 이는 마치 돼지에게 먹을 것만 주면 돼지는 나중에 잡아먹으려고 먹을 것을 주는 것인 줄도 모르고 고맙다고 꿀꿀거리는 것과 같습니다. 사람들은 노름을 하고, 알콜 중독, 담배에 중독, 겜에 중독이 되면 자신의 인생이 파멸해 간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 길을 버리지 못합니다. 이는 총명이 어두워져 미련해진 것입니다.

 

(감각없는 자와 같이 되어)

 

19절을 보십시오. "저희가 감각 없는 자 되어 자신을 방탕에 방임하여 모든 더러운 것을 욕심으로 행하되"

 

사람이 총명이 어두워지면 감각 없는 자가 됩니다. 감각이 없다는 말은 무감각해졌다는 말입니다. 감각이 없다니요? 오늘날 감각 문화가 얼마나 발달했습니까? 오늘날은 3F Female(여성), Feeling(느낌), Fun(재미) 시대라고 합니다. 오늘날 사람들은 보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감정으로 느끼고자 합니다. 그래서 감각 문화가 발달하고 있습니다.

문제는 육체의 말초 신경을 자극하는 것들에 대해서는 사람들의 감각이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지만 영적인 것에 대해서는 무감각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영적 문둥이와 같이 되었다는 말입니다. 문둥이는 자신의 손이 뜨거워도 뜨거운 줄을 모르고 칼에 의해서 손이 베어도 아픈 줄을 모릅니다. 마찬가지로 죄를 지어도 죄책감을 느끼지 못하는 것입니다. 간음을 하고 도적질을 하고 살인을 해도 아무 죄의식이 없습니다. 오히려 이런 죄악을 자랑합니다.

 

(방탕에 방임하여)

 

이렇게 감각을 잃게 되면 방탕에 방임하여 더러운 것을 욕심으로 행합니다. 방탕이라는 말은 기준이 없는 삶을 말합니다. 방탕한 자는 성적으로 타락합니다. 요즘의 스포츠 신문을 보면 음란한 기사로 가득 차 있습니다. 인터넷에는 오양, 비양등의 부끄러운 짓을 한 것이 공공연히 떠돌고 있습니다. 동성애가 자연스러운 것이 되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혼전 순결을 잃고 그것을 아무렇지도 않게 여깁니다. 유부남들의 원조 교제가 성행합니다. 유부녀들은 춤바람이 나서 돌아다니고 있습니다. 이혼이 일상화되고 있습니다. 사회가 점점 성적으로 걷잡을 수 없을 만큼 타락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우리는 이같이 배우지 않았다고 말합니다.

 

(그리스도를 배우는 삶)

 

20절을 보십시오. "오직 너희는 그리스도를 이같이 배우지 아니하였느니라."

 

여기서 그들이 "그리스도를 배웠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것은 그들이 그리스도에 관하여, 혹은 그리스도의 교훈을 배웠다는 뜻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그들의 그리스도요 주님이요 구세주임을 배웠다는 뜻이다. 그리스도에 관하여 배우는 것과 그리스도를 배우는 것은 엄청난 차이가 있습니다. 그리스도에 관하여 배우는 것은 그리스도에 대해서 지식을 얻는 것에 불과합니다. 그리스도와 깊은 관련을 맺지 않습니다. 그리스도를 믿고 의지하지 않습니다. 이런 자는 그리스도에 관하여 많은 지식을 알고 있지만 그것이 그에게 아무런 생명을 주지 못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배운다는 것은 그리스도를 체험한다는 뜻으로서 그리스도를 나의 구주요 생명의 주인으로 모시며 그리스도를 소유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나의 그리스도로 믿고배워야 합니다.

 

(배우고 듣고 가르침을 받는 삶)

 

20,21절에서 배우다, 듣다, 가르침을 받다라는 단어는 마치 학교에 온 듯한 느낌을 줍니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의 학교에서 배우고, 듣고, 가르침을 받는 것이 매우 중요함을 배우게 됩니다. 우리는 복음 진리를 듣는 순간부터 하나님의 학교에 입학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학교에서 우리가 배워야 할 주된 과목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신앙생활은 한마디로 그리스도를 배우는 것입니다. 그 분의 인격과 생애, 그분의 십자가의 고난과 부활의 권능을 배우는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까지 예수님을 믿지 않는 이방인의 삶을 배웠습니다. 그러나 우리 그리스도인의 생활은 이방인과 달리 그리스도를 배워야합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이 학교의 교사도 바로 그리스도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성령께서 그리스도를 가르쳐주십니다. .

 

(옛 사람을 벗어 버릴 것)

 

21-22절을 보십시오. "진리가 예수 안에 있는 것 같이 너희가 과연 그에게서 듣고 또한 그 안에서 가르침을 받았을 진대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좇는 옛사람을 벗어버리고"

 

우리는 진리가 되시는 예수님 안에서 가르침을 받았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생명에 접붙임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이제 그리스도의 힘과 은혜로 살아가게 되었습니다.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살게 되었습니다. 그러면 그리스도인답게 살아야 합니다.

어떻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인답게 사는 것입니까? 우리는 헌옷을 벗고 새옷을 입는 일을 해야 합니다. 옛사람을 벗어버려야 합니다. 사람은 옛사람과 새사람이 있습니다. 옛사람은 예수님을 믿기 전의 육신의 사람이고 새사람은 예수님을 믿은 후의 새로운 성령의 사람입니다.

사도 바울은 옛사람의 특징으로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좇는 존재라고 말합니다. 새사람은 성령을 따르지만 옛사람은 욕심을 따르는 사람입니다. 육신의 정욕, 명예욕, 안일욕을 따릅니다. 썩어져 가는 구습은 썩어서 냄새나는 옛날 습관을 의미합니다. 욕심을 따르고 사단을 따르고 세상의 유행을 따르는 삶입니다. 욕심을 따르는 삶은 지나고 보면 아름다운 것 같지만 악취를 풍기는 삶입니다. 연애하는 삶은 잠시 쾌락이 있지만 나중에 보면 부끄러운 냄새가 납니다. 우리는 이런 옛사람을 벗어버려야 합니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나의 구주로 영접할 때 믿음으로 거듭나서 새 사람이 되지만, 우리의 생활 속에는 여전히 육신을 가진 옛 사람의 모습이 남아 있게 됩니다. 이는 마치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크신 능력으로 출애굽하여 완전한 자유인이 되었지만 그들 속에는 여전히 노예 백성으로서 옛 생활 습관이 남아 있었던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노예로서의 옛 생활의 습관을 벗어버리고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새 생활을 하는 훈련을 받아야 했습니다.

옛사람을 벗어버리는 것은 회개하는 생활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오랫동안 옷을 갈아입지 않으면 옷에서 냄새가 납니다. 우리는 오래 입어서 더러워진 옷을 벗어버려야 합니다. 그리고 새 옷을 입어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욕심을 따르는 우리의 옛사람은 악취를 풍겼습니다. 이런 생활을 회개해서 벗어 던져야 합니다. 신분이 변하면 의복도 변하게 됩니다. 죄수가 석방되어 자유의 몸이 되면 죄수복을 벗고 일반인이 입는 옷을 갈아입게 됩니다. 또한 군인이 제대하면 군복을 벗고 민간인의 옷을 입게 됩니다. 군인이 제대를 했는데 계속해서 군복을 입고 다닌다면 이는 분명 이상한 사람으로 취급될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 안에서 새사람이 되었으면 옛사람의 옷을 벗어버려야 합니다. 옛사람을 십자가에 못 박아야 합니다. 정과 욕심을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아야 합니다. 옷은 자주 갈아 입어야 신선하고 기분이 좋습니다. 우리는 자주 죄악된 옛사람을 회개하고 십자가에 못박힌 것을 선포하는 생활을 해야 합니다. 그러면 성령이 임하여 우리 마음이 시원해집니다.

 

(새 사람을 입을 것)

 

23,24절을 보십시오. “오직 심령으로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와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

 

우리는 새사람을 입어야 합니다. 여기서 새사람은 예수님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을 입으라는 말은 예수님을 마음에 영접하라는 말입니다. 부활하여 살아 계신 예수님을 믿어야 합니다. 예수님을 영접하고 이제는 성령을 따르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성령께서 주시는 생각을 하고 성령이 주시는 방향에 순종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생명이 우리의 삶을 지배합니다. 성령께서 우리의 생각과 감정과 행동을 변화 시킵니다. 그러면 새사람의 특징은 어떠합니까?

 

(의와 진리와 거룩함을 가진 사람)

 

새사람은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새사람은 하나님처럼 거룩한 사람입니다. 세상과 구별된 성도가 된 것입니다. 거룩한 사람은 두 가지 특징이 있습니다.

그것은 의와 진리입니다. 의는 하나님과 바른 관계성을 맺은 것을 의미합니다. 믿음으로 하나님의 법을 따라서 사는 사람입니다. 십계명에 순종하는 사람입니다. 정의롭게 말씀을 따라서 사는 것입니다. 새사람의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을 경외하며 계명을 순종하며 사는 것입니다. 그리고 새사람은 진리가 있어야 합니다. 진리란 진실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진실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진리입니다. 예수님도 진리입니다. 성령도 진리의 영이십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진리의 말씀입니다. 우리는 진리의 말씀을 따라서 항상 진실하게 살 때 새로워질 수 있습니다.

 

(참된 것을 말하라)

 

26절을 보십시오. "그런즉 거짓을 버리고 각각 그 이웃으로 더불어 참된 것을 말하라. 이는 우리가 서로 지체가 됨이라."

 

우리는 예수님을 머리로 하는 한 지체입니다. 지체는 옷을 벗듯이 거짓을 벗어버려야 합니다. 지체에 대해서 진실합니다. 앞에 차가 오고 있는데 눈이 발에게 차가 오지 않는다고 거짓말을 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발만 죽는 것이 아니라 눈까지도 함께 죽을 것입니다. 손도 밥을 먹지도 않았는데 밥을 먹었다고 거짓말하지 않습니다. 만약 거짓말하면 온 몸이 피곤할 것입니다. 몸은 아프면 아프다고 기쁘면 기쁘다고 말을 합니다. 자신의 상태를 진실되게 말을 합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서로에게 진실 되어야 합니다.

기독교인의 생명은 진실된 데 있습니다. 그런데 왜 많은 사람이 거짓말을 합니까? 자신을 드러내고자 하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한 일에 대해서 책임을 지지 않으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사람들 앞에서 체면을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방법이야 어떻든지 목적만 달성하고자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어떤 희생이라도 감당하고자 할 때 진실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살 때 항상 진실할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 그리스도의 지체의식이 있을 때 서로 간에 진실할 수 있습니다.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라)

 

26,27절을 보십시오.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며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고 마귀로 틈을 타지 못하게 하라."

 

성경도 분이 나는 것에 대해서는 인정을 합니다. 그러나 분이 오래 지속되게 해서는 안 된다고 합니다. 해가 지도록 분을 품어서는 안 됩니다. 겨울에는 해가 빨라지니까 빨리 분을 버려야 합니다.

분을 품고 잠을 자면 마음과 신체에 병이 납니다. 분이 오래 지속되면 분을 품은 사람에게 홧병이 나게 됩니다. 분을 내면 자기만 손해입니다. 왜냐하면 분은 고혈압, 소화불량, 스트레스 등 모든 병의 원인이 되기 때문입니다.

존 헌터라는 세계적인 생리학자가 있었습니다. 그는 분노, 질투, 독선의 감정을 품으면 심장의 혈관이 압박을 받아 심장병이 생긴다는 학설을 주장했습니다. 존 헌터는 학회를 열어 이 논문을 발표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학자가 그의 설명을 듣고 맹렬한 공격을 가했습니다. 존 헌터는 너무 화가 나서 반격을 가하려고 자리에서 일어나는 순간 쓰러져 숨을 거두고 말았습니다. 사인은 극심한 분노가 심장의 혈관을 압박해 일어난 심장마비였습니다. 존 헌터는 죽음으로 자신의 학설을 증명한 셈입니다.

분노에 대한 듀크대 의사들의 연구결과는 다음과 같습니다. "화를 잘 내는 사람이 보통 사람보다 사망률이 20%나 높다. 위궤양과 대장염 환자들은 대부분 성격이 급하거나 화를 잘 내는 사람들이다." 화는 인간의 영육을 병들게 합니다. 화는 영어로 anger인데 이것은 위험이라는 단어 danger에서 d를 뺀 말입니다. 화를 내는 것은 위험의 신호입니다.

 

(분을 오래 품을 경우에)

 

분이 오래되면 죄를 지어서 상대방에게 상처를 줍니다. 닭이 알을 오래 품고 있으면 병아리가 나오듯이 분을 오래 품고 있으면 죄를 짓습니다. 죄를 짓는다는 것은 복수를 한다거나 술을 퍼 마시거나 쾌락을 좇거나 어디론가 떠나 버리는 것을 의미합니다.

가인은 분을 오랫동안 품고 있다가 살인의 죄악을 지었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죄를 용서하신 예수님을 생각하고 다른 사람의 죄를 용서해야 합니다. 그 사람을 깊이 이해하면 분노가 사라지게 됩니다. 악을 악으로 갚다가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겨야 합니다. 우리는 원수 갚는 것은 하나님께 맡겨야 합니다. 우리가 분을 버리고 용서하면 무엇보다 나의 내면에 성령을 주십니다. 상대방도 자신의 잘못을 깨닫게 됩니다.

어느 목사가 있었습니다. 그 분은 아내와 깊은 갈등을 겪고 있었습니다. 여러모로 성격이 맞지 않았습니다. 한 번 싸우고 나면 아내는 밥을 해놓고 콩나물 장수가 흔드는 종을 하나 사서 식사시간에 흔들었습니다. 어느 때는 문을 발로 차고 갔습니다. 어느 때는 밥을 해주지도 않았습니다. 그렇다고 목사도 형제의 자존심이 있어서 미안하다는 말을 하지 못했습니다. 목사는 이혼을 한다면 하나님의 종을 다시 할 수 없다는 생각 때문에 이혼을 하지 못했습니다. 마음에는 분노가 치밀어 올랐습니다. 그렇게 목회를 하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밤에 기도하는데 성령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아내에게 가서 화해하라. 그 음성은 너무 크게 들렸습니다. 만약에 화해하지 않으면 당장 벼락이 내릴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새벽 두시에 이 목사는 아내에게 갔습니다. 난생 처음으로 아내에게 무릎을 꿇고 용서를 빌었습니다. 자신이 얼마나 이중적이고 마음으로 이혼을 하고 미움으로 살인하는 죄를 지었는지를 회개했습니다. 그러자 한없이 눈물이 흐르며 성령이 충만히 임했습니다. 그러자 아내도 여보 내가 잘못했어요. 내가 죽을 년이에요. 하고 함께 울기 시작했습니다. 우리는 불화의 원인을 나에게서 찾아야 합니다. 우리는 내가 먼저 회개해야 합니다. 그럴 때 분을 버릴 수 있습니다.

 

(제 손으로 수고하라)

 

28절을 보십시오. "도적질 하는 자는 다시 도적질하지 말고 돌이켜 빈궁한 자에게 구제할 것이 있기 위하여 제 손으로 수고하여 선한 일을 하라."

 

우리는 다른 사람의 물건을 훔치는 도적질을 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런데 물건을 훔치는 것만이 도적질은 아닙니다. 우리가 일을 하지 않는 것도 도적질입니다. 일을 하지 않으면 일을 한 사람의 것을 얻어먹어야 합니다. 그것도 일한 사람의 것을 빼앗는 도적질입니다. 학생들은 컨닝을 하지 말고 다른 사람의 레포트를 베껴서는 안 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일하기 싫어하는 자는 먹지도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자신이 먹을 것을 벌을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을 도와줄 것까지도 벌어야 합니다. 열심히 일하여 다른 사람을 도와주어야 합니다.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런 면에서 본을 보였습니다. 그는 양들에게 말씀을 먹일 뿐만 아니라 열심히 일해서 다른 사람에게 폐를 끼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물질적으로 부족한 자들을 도와주었습니다.

 

(은혜로운 말을 할 것)

 

29절을 보십시오. "무릇 더러운 말은 너희 입 밖에도 내지 말고 오직 덕을 세우는데 소용되는 대로 선한 말을 하여 듣는 자들에게 은혜를 끼치게 하라."

 

바울은 말을 신중하게 하도록 말씀하십니다. 더러운 말을 하는 사람들은 더러운 인격을 가진 사람입니다. 더러운 인격을 가진 사람은 더러운 생각을 하고, 더러운 말을 하고, 더러운 행동을 합니다. 더러운 생각을 하면 더러운 귀신이 그 속에 역사합니다. 대부분 더러운 귀신들린 사람들은 더러운 생각을 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더러운 생각을 입 밖에도 내지 말아야 합니다. 유해한 말을 하지 말아야합니다. 다른 사람의 마음에 비수를 꽂는 말을 하지 말아야 합니다. 음담패설을 말하지 말아야 합니다. 갖은 욕설을 입에 담지 말아야 합니다. 썰렁한 말, 영양가 없는 말, 상처 주는 말, 사람 잡는 말을 하지 말아야 합니다.

어떤 사람은 마음대로 말해 놓고 나는 뒤 끝이 없어 라고 말합니다. 뒤끝도 없어야 하지만 앞끝도 없어야 합니다. 요즘은 인터넷시대라 웹사이트를 이용하여 익명으로 불특정 다수에게 말을 하여 많은 사람에게 상처를 줍니다. 살인은 한 사람을 죽이지만 험담은 세 사람을 죽입니다. 험담을 늘어놓는 사람과 험담을 듣는 사람과 험담의 대상 모두 피해자가 됩니다. 우리는 더러운 말 대신에 덕을 세우는 데 소용되는 선한 말을 해야 합니다. 덕을 세우는 말은 다른 사람에게 힘과 용기를 주는 말입니다. 다른 사람들을 포용하는 말입니다. 따뜻하게 감싸 안는 말입니다. 하나님에 대해서 믿음을 심는 말입니다. 이런 덕을 세우는 말은 듣는 사람에게 은혜를 끼칩니다. 기쁨을 주고 힘을 줍니다.

 

(화살과 같은 말)

 

유대교의 가르침에는 혀를 칼에다 비유하지 않고 화살에 비유했습니다. 왜 그렇게 했을까요? 이에 대해 어떤 랍비가 대답했습니다. "누가 제 친구를 죽이려고 칼을 뽑았다가도 그 친구가 빌며 용서를 구하면 그 사람은 화가 누그러져서 그 칼을 도로 집어넣을 수도 있다. 그러나 한번 쏜 화살은 아무리 나중에 후회를 한다 해도 다시 돌이킬 수 없기 때문이다."

동유럽의 어느 마을에서 한 청년이 마을 사람들에게 랍비를 중상모략하고 다녔습니다. 그러다가 어느 날 자신의 행동을 후회하고 랍비에게 와서 용서를 구하며 죄를 사하기 위해 어떤 벌도 달갑게 받겠노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랍비는 그 청년에게 새의 깃털로 속을 넣은 베개를 가지고 와서 안을 자르고 그 깃털들을 바람에 날려 보내고 자기에게 오라고 했습니다. 그 청년은 시킨 대로 한 후 "이제 제 죄가 씻겨졌습니까?"라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랍비는 "자네가 해야 할 일이 한 가지 더 남아 있네. 이제는 가서 날라 간 깃털들을 모두 주워오는 것일세." 그 청년은 "그건 불가능한데요. 이미 바람에 다 날려 보냈는데요"라고 대답했습니다. 그 때 랍비가 말했습니다. "바로 그렇지. 자네가 이미 말로 저질러 버린 일은 다시 회복할 수 없다네. 자네 말 한마디로 인해서 끼쳐진 피해를 회복시킨다는 것은 이미 날라가 버린 새 깃털을 다시 주워 모으는 일만큼이나 불가능한 것이네." 이처럼 다른 사람에 대한 험담이나 중상모략은 돌이킬 수 없는 일이 되어 상처를 줍니다.

 

(성령을 근심케 말 것)

 

30절을 보십시오. "하나님의 성령을 근심케 하지 말라. 그 안에서 너희가 구속의 날까지 인치심을 받았느니라."

 

우리는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영접한 순간부터 성령을 받았습니다. 우리는 성령의 세례를 받았습니다. 성령은 우리가 부활하여 몸의 구속을 받는 그날까지 영원히 우리와 함께 할 것입니다. 성령은 우리와 임마누엘하십니다. 성령님은 인격이 있습니다. 우리는 성령을 근심케 하지 말아야 합니다. 성령님의 마음에 상처를 주지 말아야 합니다.

성령님은 사울처럼 불순종을 할 때 근심하십니다. 하나님의 뜻을 따르지 않고 자기 길로 갈 때 근심하십니다. 성령님은 불신이 있을 때 근심하십니다. 정욕적인 더러운 생각을 하고 더러운 말을 할 때 근심하십니다. 기도를 하지 않을 때 근심하십니다. 세상을 사랑할 때 성령은 근심하십니다. 특히 에베소서에는 불신의 말, 더러운 말, 혈기가 있는 말을 할 때 근심하신다고 합니다. 우리가 믿음의 말을 해야 성령은 기뻐하십니다.

가나안을 정탐한 열 두령이 불신의 말을 하여서 다 죽었습니다. 자신만 죽을 뿐 아니라 이스라엘 사람들까지 죽게 만들었습니다. 우리는 갈렙이나 여호수아와 같이 성령을 기쁘시게 하는 말을 해야 합니다. 우리는 성령님을 기쁘시게 해야 합니다. 성령님은 순종할 때 기뻐하십니다. 성령님은 성령님이 주시는 생각을 할 때 기뻐하십니다. 성령님이 주시는 소원에 순종할 때 하나님은 기뻐하십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면 성령님은 기뻐하십니다. 우리는 성령님을 기쁘시게 해야 합니다.

 

(혈기를 부리지 말라)

 

31절을 보십시오. "너희는 모든 악독과 노함과 분냄과 떠드는 것과 훼방하는 것을 모든 악의와 함께 버리고"

 

사도바울은 한 마디로 혈기를 부리지 말라고 합니다. 혈기는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가리우고 자신을 드러냅니다. 혈기를 부리지 않으려면 악독 노함 분냄 떠드는 것 훼방하는 것 그리고 악의를 버려야합니다. 악독은 화해에 응하지 않는 "오래된 원한"을 말합니다. 우리는 남에게서 당한 모욕, 피해, 무시를 두고두고 기억하며 그 쓰라린 감정을 마음에 간직하고 있을 때가 많습니다. 이것은 빨리 버려야 합니다. 이것을 마음에 간직하고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더 깊어져서 나를 못쓰게 만들어 버리기 때문입니다. 노함은 감정적인 격분하는 것을 말합니다. 분냄은 뿌리깊은 적대감을 말합니다. 떠드는 것은 흥분한 사람들이 서로 싸우며 고래고래 고함을 지르는 것을 말합니다. 훼방은 다른 사람이 없는 데서 그 사람을 비방하여 그의 명성을 손상시키는 것을 말합니다. 그리스도인이라면 다른 사람의 인격을 손상시키는 말을 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악의는 남에게 해를 입히는 일을 기뻐하며 이를 꾀하기까지 하는 악한 경향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 모든 것들은 마귀에게 속한 것임으로 벗어버려야 합니다.

 

(서로 인자할 것)

 

32절을 보십시오. "서로 인자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

 

헬라인들은 인자를 "이웃의 일을 자기 일처럼 생각하는 심정"이라고 정의했습니다. 친절은 남의 감정을 자기 감정처럼 관심을 가지는 것입니다. 남의 슬픔, 남의 고통, 남의 문제를 자기 일처럼 생각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은혜를 모르는 자와 악한 자에게까지도 인자로우신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동일하게 비취게 하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골고루 내리우십니다(5:45). 이런 하나님의 마음을 품고 서로 인자하게 하라는 것입니다. 불쌍히 여기는 것은 영어로는 "compassionate"이며, 사랑과 온유의 원천이 되는 좋은 마음을 의미합니다. 좋은 마음을 가지고 있으면 자연히 남의 고통에 대해서 깊은 관심을 가지고 도와 줄 수 있게 됩니다. 서로 용서하라고 말씀하실 때에는 하나님이 우리를 용서하신 것 같이 서로 용서하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이 십자가에서 우리를 무조건 용서하신 것 같이, 우리도 다른 사람을 무조건 용서하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용서하는 마음으로 다른 사람의 죄를 회개하도록 도와야 합니다.

 

(사랑하는 삶)

 

우리가 힘써 가져야 할 것은 사랑입니다. 사랑은 서로의 연약함을 인자히 여기고 불쌍히 여기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의 잘못을 판단하고 정죄하기보다 용서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의 잘못을 보면 분노를 잘 합니다. 그리고 그 잘못을 끊임없이 캐내고자 합니다. 그 잘못을 다 캐어내면 그 속에 예수님이 있을 것처럼 생각합니다. 그러나 잘못을 아무리 캐어도 그곳에는 예수님이 없습니다. 우리의 잘못을 들추어내면 낼수록 물을 뿌리지 않고 바닥을 쓰는 것처럼 먼지만 날릴 뿐입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을 불쌍히 여기고 용서하고 믿어 주어야 합니다. 그 사람의 잘못에 대해서 내가 책임을 지고 희생을 해야 합니다. 목자는 양을 불쌍히 여기고 양도 수고하는 목자를 불쌍히 여겨야 합니다. 그러면 변화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성령께서 역사하십니다.

프로야구가 처음 생겼을 때 선수들이 승부에 너무 집착하여 상대 선수에게 덤벼들며 그 몸을 상하게 하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하다 보니 비록 승리를 하더라도 상처뿐인 영광이었습니다. 관중들은 그런 dirty play에 눈을 돌렸고, 모든 선수들은 피해를 입었습니다. 그 후부터 그들은 서로 나뉘어 경기를 할지라도 본질적으로 한 식구라는 마음으로 서로를 아껴 주었습니다.

마찬가지로 믿음의 가족들인 우리가 서로를 아껴 주지 않으면 누가 아껴 주겠습니까? 우리는 서로를 비방하고 적대시하는 그런 사이가 아닙니다. 우리는 너무 가까이 에서 함께 생활하기 때문에 다른 사람이 보지 못하는 약점도 보고 허물도 봅니다. 그렇지만 하나님께서 우리를 용서하신 그 사랑을 생각하면 용서 못할 사람은 없습니다. 하나님은 그 아들의 생명을 희생하심으로 우리의 죄를 용서하셨습니다. 이 용서의 사랑으로 서로를 사랑하고 불쌍히 여기며 용서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이상에서 그리스도 안에서 새 생활은 의롭고 진실 된 삶입니다. 인자하며 불쌍히 여기며 용서하는 삶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변화된 새 삶을 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우리의 죄를 감당하여주었듯이 우리가 다른 사람의 죄를 감당해줄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그때 우리는 서로 하나 될 수 있습니다. 아멘!

에베소서 4장 강해 이부 그리스도 안에서 새 생활

말씀/에베소서 4 17-에베소서 432

요절/424"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입은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24)

에베소서 4장 강해 이부 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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