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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주의 대학생 선교기관

천안UBF

성경66권강해서

사무엘상 6장 강해 벧세메스 암소처럼

작성자 : 오요한
작성일 : 2008-04-11 00:00:00
조회수 : 3,978

문제지풀이(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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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엘상 6장 강해 벧세메스 암소처럼

사무엘상 61-사무엘상 621

요절 사무엘상 614

 

지난 주가 석탄일이었습니다. 저는 집에서 김동리의 소설 등신불을 영화로 만든 것을 보았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등신불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불교식으로 바꾼 것이라는 평합니다. 주인공이 조기입니다. 조기의 어머니 장씨는 개가를 하여 사신이라는 부자에게 시집을 갑니다. 조기는 그곳에서 이복 동생인 사구와 여자동생을 만납니다. 여자동생과는 연정도 느낍니다. 그런데 어머니 장씨는 재산을 노리고 새아버지를 독살합니다. 더 나아가 이복동생인 사구까지도 밥에 독약을 넣어서 죽이고자합니다. 이를 알고 조기는 집을 나와서 만적이라는 스님이 됩니다. 그 후에 어머니 장씨는 정신병이 걸립니다. 한번은 밖에 나가서 이복동생인 사구와 여동생을 만났는데 이들이 문둥병이 걸렸습니다. 그때 만적은 절에 들어와서 자신을 소신공양하고자 합니다. 자신을 온전히 불태워 부처에게 드리고자 합니다. 목욕제계하고 깨로만 연명을 합니다. 사십일 지난 후에 그의 머리에 향로를 얹어서 불에 태웁니다. 그때 많은 사람들이 이 소신공양의 예불에 참여합니다. 어머니와 이복 동생들도 소신공양에 참여하려고 옵니다 이 소신공양을 지켜보면서 그들은 정신병과 문둥병이 낫습니다. 그 외에 많은 사람들도 병이 낫습니다.

이는 불교에서 깨달음만은 강조하는 한계를 느끼고 기독교의 희생을 통한 구원을 도입한 소설입니다. 어쨌든 만적과 같은 사람도 자신을 온전히 희생하였을 때 많은 사람들을 살립니다. 본문에 보면 벧세메스 암소를 번제로 드림으로 블레셋 사람들이 치료받는 모습이 나옵니다. 벧세메스 암소는 십자가의 예수님을 닮았습니다.

 

(불레셋 사람들은 속건제를 드렸습니다.)

 

1-5절을 보십시오. “여호와의 궤가 블레셋 사람들의 지방에 있은 지 일곱 달이라 블레셋 사람들이 제사장들과 복술자들을 불러서 이르되 우리가 여호와의 궤를 어떻게 할까 그것을 어떻게 그 있던 곳으로 보낼 것인지 우리에게 가르치라 그들이 이르되 이스라엘 신의 궤를 보내려거든 거저 보내지 말고 그에게 속건제를 드려야 할지니라 그리하면 병도 낫고 그의 손을 너희에게서 옮기지 아니하는 이유도 알리라 하니 4. 그들이 이르되 무엇으로 그에게 드릴 속건제를 삼을까 하니 이르되 블레셋 사람의 방백의 수효대로 금 독종 다섯과 금 쥐 다섯 마리라야 하리니 너희와 너희 통치자에게 내린 재앙이 같음이니라 5. 그러므로 너희는 너희의 독한 종기의 형상과 땅을 해롭게 하는 쥐의 형상을 만들어 이스라엘 신께 영광을 돌리라 그가 혹 그의 손을 너희와 너희의 신들과 너희 땅에서 가볍게 하실까 하노라

 

여호의 궤는 에그론에 있은 지 일곱 째 달이 되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언약궤를 돌려보내고자 하였지만 어떻게 해야할 지를 몰랐습니다. 그들은 불레셋의 제사장들과 복술자를 불러서 어떻게 언약궤를 보내야하는가 물어보았습니다. 제사장들은 하나님을 위해서 속건제를 드리라고 하였습니다. 속건제는 피해를 끼친 것을 배상하는 제사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마음을 아프게 한 것을 인정하였습니다. 제사장은 불레셋 사람의 방백의 수효대로 금종기형상 다섯과 금쥐 다섯 마리를 드리라고 합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그들에게 내린 독종 재앙대로 속건제를 드렸습니다. 쥐가 병을 옮겼다고 생각하여 쥐의 모양으로 제사를 드렸습니다.

물론 이들이 드린 제사는 하나님이 정하신 제사는 아닙니다. 그러나 그들은 나름대로 잘못을 인정하고 하나님께 용서를 빌었습니다. 그들은 제사를 통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자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모독하던 자들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자로 변화되었습니다.

 

(그들은 바로와 같이 완악하지 않았습니다)

 

6절을 보십시오. “애굽인과 바로가 그들의 마음을 완악하게 한 것 같이 어찌하여 너희가 너희의 마음을 완악하게 하겠느냐 그가 그들 중에서 재앙을 내린 후에 그들이 백성을 가게 하므로 백성이 떠나지 아니하였느냐

 

그들은 이스라엘 출애굽 역사를 통하여 교훈을 배웠습니다. 바로는 끝까지 회개하지 않다가 열 가지 재앙을 받았습니다. 장자까지 잃었습니다. 그들은 망한 바로를 교훈 삼아서 바로처럼 완악한 마음을 갖지 않았습니다. 그들의 잘못을 회개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들의 회개는 온전한 회개가 아닙니다. 온전한 회개는 하나님의 사랑에 감동하여 하는 회개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사랑을 알지 못했습니다. 다만 그들은 하나님의 심판을 무서워하였습니다. 심판만을 피하고자 하였습니다. 이런 회개는 내면의 변화가 일어나지 않습니다. 재앙만 사라지면 다시 옛날로 돌아갑니다.

어떤 분은 하나님을 떠나서 큰 질병에 시달렸습니다. 사고도 만나서 많은 돈을 잃었습니다. 그는 회개하고 다시 돌아왔습니다. 하지만 그는 하나님의 사랑을 몰랐습니다. 자신의 죄로 인하여 예수님이 얼마나 희생하셨는지 몰랐습니다. 그는 모든 재앙이 끝나고 좋은 일이 일어나자 다시 하나님을 떠났습니다. 우리는 회개해서 재앙만 피하려는 생각을 버려야합니다. 자신을 사랑하는 하나님을 영접하고 마음 중심으로 깊이 회개하여 내면이 변화되어야합니다. 하나님을 멸시하는 자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로 변화되어야합니다. 세상을 사랑하는 자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로 변화되어야합니다. 그래야 온전한 구원을 받을 수 있습니다.

 

(여호와의 궤를 암소에 실어서 벧세메스로 보냈습니다.)

 

7-9절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새 수레를 하나 만들고 멍에를 메어 보지 아니한 젖 나는 소 두 마리를 끌어다가 소에 수레를 메우고 그 송아지들은 떼어 집으로 돌려보내고 여호와의 궤를 가져다가 수레에 싣고 속건제로 드릴 금으로 만든 물건들은 상자에 담아 궤 곁에 두고 그것을 보내어 가게 하고 보고 있다가 만일 궤가 그 본 지역 길로 올라가서 벧세메스로 가면 이 큰 재앙은 그가 우리에게 내린 것이요 그렇지 아니하면 우리를 친 것이 그의 손이 아니요 우연히 당한 것인 줄 알리라 하니라

 

블레셋 사람들은 하나님이 재앙을 주셨다고 고백하였습니다. 하지만 아직도 우연이 아닌가하는 일말의 의심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이 의심을 해결하고자 하나의 표적을 구하였습니다. 그들은 젖 나는 소 두 마리를 끌어왔습니다. 이 소들은 한 번도 멍에를 메지 않은 소들입니다. 이들의 송아지는 불레셋의 집으로 돌려보냈습니다. 그들은 두 마리의 암소에 수레를 메웠습니다. 수레에는 속건제물을 실었습니다. 그들은 이 소가 이스라엘의 본 지역 벧세메스로 가면 하나님이 이 재앙을 내리신 것으로 인정하고자 하였습니다. 하지만 암소가 블레셋으로 돌아오면 이 재앙은 우연히 내린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이 암소들이 이스라엘로 돌아갈 가능성은 영 프로입니다. 젖먹이는 소들이 송아지가 있는 곳으로 돌아가는 것이 매우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두 마리의 암소는 서로 보조를 맞추어야합니다. 이 소들은 처음으로 멍에를 메어서 전혀 훈련이 되지 않았습니다. 이 소들은 답답하여 수레를 엎을 수도 있습니다. 어떻게 이 소들이 벧세메스로로 갈 수 있단 말입니까? 이 소들은 어떻게 하였습니까?

 

(암소는 벧세메스로 갔습니다.)

 

12절을 보십시오. “암소가 벧세메스 길로 바로 행하여 대로로 가며 갈 때에 울고 좌우로 치우치지 아니하였고 블레셋 방백들은 벧세메스 경계선까지 따라 가니라

 

참으로 신기한 일이 일어났습니다. 두 마리의 암소들은 벧세메스 길로 갔습니다. 암소는 집에 두고온 송아지를 생각하며 슬퍼 울었습니다. 암소들은 울면서도 집으로 돌아가지 않았습니다. 울면서도 벧세메스를 향하여 갔습니다. 두 마리의 소가 발을 맞추어 갔습니다. 좌우로 조금도 치우치지 않고 갔습니다. 불레셋 방백들은 수레를 따라서 벧세메스 경계선까지 갔습니다. 하나님의 암소의 마음과 발걸음도 인도하셨습니다. 벧세메스로 간 암소를 통하여 두 가지를 배웁니다.

 

(하나님이 암소를 보내셨습니다)

 

첫째, 하나님이 하신 일입니다. 소를 주관하신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소의 의식을 하나님이 전적으로 주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벧세메스로 향하는 마음을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두 마리의 소가 동역하도록 도우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두 마리의 소가 길길이 날뛰지 않도록 도우셨습니다. 이 모든 것을 주관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는 때로 주님의 역사를 처음 섬기기 때문에 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또는 저 사람과 동역하는 것이 너무 어렵다는 생각합니다. 내가 어디로 가야할지 모른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일하시면 모든 것이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섬세하게 간섭하십니다. 하나님은 정확하고 완전하게 모든 것을 하십니다. 우리를 온전히 주관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우리의 교회를 움직이고 계시는 분도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는 때로 우리의 교회가 어디로 어떻게 가야할지 모를 때도 있습니다. 여러 사람들이 함께 하기 어려울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우리 교회를 주관하시면 모든 것이 온전하게 인도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겨 드려야합니다. 하나님께서 일하시도록 믿고 기도해야합니다.

 

(암소는 정을 끊고 순종하였습니다)

 

둘째, 암소는 정을 끊고 순종하였습니다. 암소가 송아지를 떼어놓고 가는 길은 너무나 고통스러웠습니다. 그러나 암소는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기 위해서 울면서 송아지를 떼어놓았습니다. 좌우로 치우쳐 송아지에게 가고 싶은 마음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여 좌우로 치우치지 않았습니다. 이 암소는 송아지를 떼어놓는 아픔이 있었지만 언약궤를 메는 가장 영광스러운 암소가 되었습니다. 성경에 기록된 유일한 암소가 되었습니다. 대부분의 암소들이 열심히 짐을 나르고 밭을 갈고 수고합니다. 그 후에 도살장에 끌려가서 인간을 위하여 모든 것을 내어줍니다. 그렇게 소들은 허무하게 일생을 마칩니다. 하지만 벧세메스 암소는 가장 영광스럽고 아름다운 암소가 되었습니다. 인류 역사에 영원히 남는 소가 되었습니다.

이 암소는 엘리 제사장이나 흡니와 비누하스와 대조적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암소는 하나님의 말씀에 철저히 순종하였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쓰임받는 것은 큰 영광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세상에서 먹고 살기 위해서 평생을 살다가 한 줌 흙으로 돌아갑니다. 허무한 삶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쓰임 받는 길은 생명이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에 상급이 있습니다. 의미와 가치가 있습니다. 쓰임 받는 것 자체가 영광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려면 인간적인 정을 끊는 아픔이 필요합니다.

 

(정을 끊고 순종한 사람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기 위해서 본토친척 아버지 집을 떠났습니다. 16년 동안 키운 이스마엘과 첩하갈을 쫓아냈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사랑하는 아들 이삭을 번제로 드리기도 했습니다.

한나는 하나님의 뜻에 따라서 아들 사무엘을 드리기 위해서 젖을 뗀 후에 성전에 맡겼습니다. 한나의 눈에는 눈물이 흘렀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부르심에 순종하기 위해서 직장을 떠났습니다. 가족을 떠났습니다.

저는 오늘 이 말씀을 공부하면 생각나는 분이 있습니다. 시카고의 안 마리아 선교사님이십니다. 그분은 예수님을 매우 사랑하는 분이십니다. 아버지가 고법 부장 판사이시었고 자신은 서울대 미대를 졸업한 엘리트였습니다. 한번은 동기 전임 목자가 하는 믿음의 결혼식에 참석하였습니다. 주례하시는 이사무엘 목자님은 주례를 할 때 신랑에게 아내보다 하나님을 더 사랑하는가 물어보았습니다. 아내와 떨어져서라도 하나님을 섬길 수 있는가? 물어보셨습니다. 당시 신부가 너무나 사랑스럽고 예쁘기 때문에 하나님보다 아내를 더 사랑할 가능성이 있었습니다. 성령께서 목자님에게 감동을 주어 즉흥적으로 신랑에게 이를 경계하기 위해서 물어보신 것 같습니다. 그러나 신랑되신 목자님은 말을 못했습니다. 그것을 바라보는 안 마리아 선교사님은 너무나 안타까웠습니다. 하나님을 더 사랑한다고 대답을 해야지 라고 속으로 기도하였습니다. 그래도 대답을 하지 않자 마리아 선교사님을 속으로 기도하였습니다. 주님 제가 결혼하면 제가 그렇게 하겠습니다. 이것도 성령님께서 주신 감동이었습니다. 마리아 선교사님은 최초로 종로학사회 자매 스텝이 되었습니다. 나중에 마리아 선교사님은 외교관인 호세안 선교사님과 결혼했습니다. 직업 특성상 호세안 선교사님은 외국으로 나가야했습니다. 마리아 선교사님은 한국에 남아서 양들을 돌보아야 했습니다. 이제 학사회가 막성장하는 시기이므로 양들을 버려두고 외국으로 갈 수 없었습니다. 이사무엘 목자님도 선교사로 나가서 전요한 목자님을 동역할 사람도 필요하였습니다. 이때 마리아 선교사님은 처녀 때 했던 서원을 생각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이 서원을 받으사 십년을 별거하며 역사를 섬기게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마리아 선교사님을 통해 지금 배봉센타 전신인 종로 삼부를 굳게 세우셨습니다. 호세안 선교사님을 통해 아르헨티나 멕시코 브라질을 개척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쓰시다 하나님의 때에 시키고에서 합하여 역사를 섬기게 하셨습니다. 우리 사모님들 가운데도 자녀을 맡겨두고 눈물로 하나님의 역사를 섬기신 분들이 많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를 축복해주시기를 기도합니다.

 

(벧세메스 암소는 자신을 온전히 희생했습니다.)

 

13,14절을 보십시오. “벧세메스 사람들이 골짜기에서 밀을 베다가 눈을 들어 궤를 보고 그 본 것을 기뻐하더니 수레가 벧세메스 사람 여호수아의 밭 큰 돌 있는 곳에 이르러 선지라 무리가 수레의 나무를 패고 그 암소들을 번제물로 여호와께 드리고

 

벧세메스 사람들은 하나님의 언약궤가 돌아오자 크게 기뻐하며 환영하였습니다. 벧세메스 암소는 수레를 끌고 벧세메스 사람 여호수아의 밭에 머물러 섰습니다. 무리는 수레의 나무를 패고 그 암소를 번제물로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암소는 마지막에는 자신을 온전히 태워 드렸습니다. 수레를 끌고 온 암소를 돌려보내서 송아지에게 젖를 먹이게 했으면 어떨까하는 안타까움마저 느껴집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하나님의 수레를 멘 그 암소들이 다시 세상의 짐을 메기를 원하지 않으셨습니다. 더욱 중요한 것은 블레셋 사람들의 죄악을 속하는 데는 그들이 보낸 금쥐와 금독종만으로 부족했습니다. 하나님이 정하신 제사를 드려야 속죄함을 받습니다.

민수기 19장을 보면 암소를 번제로 드리는 모습이 나옵니다. 몸이 튼튼하고 멍에를 메어보지 않은 암소를 끌고 옵니다. 암소를 잡아서 피를 뿌립니다. 그 후에 암소를 태웁니다. 고기뿐 아니라 가죽과 피와 똥까지 다 태웁니다. 암송아지를 태우고 남은 재는 부정탄 사람을 깨끗하게 하는 제물로 사용합니다. 하나님은 암송아지를 번제로 드려서 불레셋 사람들의 죄를 다 속하도록 하셨습니다.

 

(벧세메스 소와 같은 예수님)

 

우리는 벧세메스 암소를 볼 때 예수님이 생각납니다. 예수님은 법궤 대신에 십자가를 지고가셨습니다. 벧세메스 암소가 울면서 갔듯이 예수님도 심한 통곡과 눈물로 십자기의 길을 가셨습니다. 벧세메스 암소가 좌우로 치우치지 않았듯이 예수님도 십자가에 죽기까지 온전히 순종하였습니다. 벧세메스 암소가 번제로 드려서 그 피와 재로 부정한 죄를 깨끗게 합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십자가에서 온전히 피흘리시고 무덤에 묻히셔서 그 피와 죽음으로 우리의 죄악을 용서하십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벧세메스 암소와 다른 점도 있습니다. 암소는 피조물에 불과합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흠없는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암소의 피도 사람들의 죄를 사합니다. 하물며 거룩하신 하나님의 아들의 피가 사람들의 죄를 사하지 못하시겠습니까? 우리는 예수님의 피를 의지하여 영원히 죄사함을 받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피를 의지하여 살아계신 하나님을 섬길 수 있습니다.

또한 벧세메스 암소를 보면 다윗때의 장군 우리아가 생각납니다. 다윗은 우리아를 죽이라는 편지를 우리아에게 주어 전쟁터로 보냈습니다. 우리아는 충성스럽게 자신을 죽이라는 편지를 갖고 요압장군에게 갔습니다. 그는 끝까지 요압의 말에 순종하여 전사하였습니다. 우리아는 메시야의 족보에 올라갔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 한 번 태어났습니다. 과연 어떻게 사는 것이 바르게 사는 것인가 생각해 봅니다. 왜 결혼은 하고 왜 자녀는 낳고 왜 양을 치는가 생각해봅니다. 저는 과거에 그런 것을 통하여 무엇인가 영적인 것을 얻는 것이 목표였습니다. 그러나 요즘 와서 그런 모든 것이 다 부질없는 것임을 배우게 됩니다. 다만 하나님의 뜻에 온전히 순종하여 죽는 것이 온전한 삶입니다. 벧세메스와 같이 주님을 위해서 살다가 주님께 온전히 드려지는 삶을 살아야합니다. 하나님의 거룩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여 하나님의 뜻에 온전히 순종하는 삶을 살아야합니다. 우리 자신을 하나님께 온전히 산 제사로 드려야합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우리를 하나님 나라로 온전히 인도하실 줄을 믿습니다.

 

(번제를 드린 벧세메스 사람들)

 

“15. 레위인은 여호와의 궤와 그 궤와 함께 있는 금 보물 담긴 상자를 내려다가 큰 돌 위에 두매 그 날에 벧세메스 사람들이 여호와께 번제와 다른 제사를 드리니라 16. 블레셋 다섯 방백이 이것을 보고 그 날에 에그론으로 돌아갔더라 17. 블레셋 사람이 여호와께 속건제물로 드린 금 독종은 이러하니 아스돗을 위하여 하나요 가사를 위하여 하나요 아스글론을 위하여 하나요 가드를 위하여 하나요 에그론을 위하여 하나이며 18. 드린 바 금 쥐들은 견고한 성읍에서부터 시골의 마을에까지 그리고 사람들이 여호와의 궤를 큰 돌에 이르기까지 다섯 방백들에게 속한 블레셋 사람들의 모든 성읍들의 수대로였더라 그 돌은 벧세메스 사람 여호수아의 밭에 오늘까지 있더라

 

레위인은 여호와의 궤와 그 궤와 함께 있는 금 보물 상자를 내려다가 큰 돌 위에 두었습니다. 벧세메스 사람들은 여호와 하나님께 번제와 다른 제사를 드렸습니다. 블레셋 다섯 방백은 에그론으로 돌아가 불레셋의 다섯 지방을 위해서 속건제물을 드렸습니다. 아스돗과 가사와 아스글론과 가드와 에그론을 위하혀 다섯 금독종을 드렸습니다. 방백들은 견고한 성읍에서부터 시골의 마을까지 모든 성읍의 수대로 금쥐들을 여호와께 드렸습니다. 여호와의 궤를 놓았던 돌은 사무엘서를 기록할 당시까지 벧세메스 사람 여호수아의 밭에 있어서 역사적인 사실임을 증명하고 있습니다.

 

(벧세메스 사람들은 소만도 못했습니다.)

 

19-21절을 보십시오. “벧세메스 사람들이 여호와의 궤를 들여다 본 까닭에 그들을 치사 (오만) 칠십 명을 죽이신지라 여호와께서 백성을 쳐서 크게 살륙하셨으므로 백성이 슬피 울었더라 벧세메스 사람들이 이르되 이 거룩하신 하나님 여호와 앞에 누가 능히 서리요 그를 우리에게서 누구에게로 올라가시게 할까 하고 전령들을 기럇여아림 주민에게 보내어 이르되 블레셋 사람들이 여호와의 궤를 도로 가져왔으니 너희는 내려와서 그것을 너희에게로 옮겨 가라

 

벧세메스 사람들은 하나님의 언약궤를 들여다 보았습니다. 그들은 칠십 명이 죽었습니다. 어떤 사본에는 오만 칠십명이라고 기록되었지만 그 당시 벧세메스의 인구를 생각해볼 때 칠십 명이 맞습니다. 그들은 오랜만에 돌아온 여호와의 궤를 호기심을 가지고 들여다보았습니다. 하나님은 호기심의 대상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그들을 심판하사 70명이 죽게 하셨습니다. 민수기를 보면 많은 사람들이 여호와의 언약궤를 만진다든지 가까이 가서 죽임을 당하는 것을 봅니다. 하나님은 거룩하신 하나님으로 마음으로 높이고 사랑하고 섬길 분이지 호기심의 대상이 아닙니다. 이들은 암소만도 못한 자입니다. 암소들은 하나님을 경외하고 자신을 온전히 드려서 희생하였습니다.

그러나 벧세메스 사람들은 하나님을 무슨 신기한 물건의 하나로 여겼습니다. 우리도 경외심이 없으면 벧세메스 암소만도 못한 자입니다. 우리는 암소를 통해서 경외심을 배워야합니다. 그들은 칠십명의 죽음을 통해서 잘못을 회개하고 하나님을 경외해야했습니다. 심판 속에 담긴 하나님의 사랑을 알아야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을 섬기기 어렵다고 생각하고 하나님을 기럇여아림으로 보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복을 받을 수 있는 좋은 기회를 놓쳤습니다. 기럇여아림 백성들이 하나님의 은혜를 빋았습니다.

 

(벧세메스 암소처럼)

 

결론적으로 한 번뿐이 없는 우리의 삶을 어떻게 살아야하겠습니까? 하나님께 귀하게 쓰임 받아야합니다. 우리의 목숨까지도 온전히 드려서 순종해야합니다. 그런 인생이 아름다운 인생입니다. 우리 모두 벧세메스 암소처럼 쓰임 받기를 기도합니다. 아멘!

사무엘상 6장 강해 벧세메스 암소처럼

사무엘상 61-사무엘상 621

요절 사무엘상 614

사무엘상 6장 강해 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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