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바로가기
메인메뉴 바로가기
컨텐츠 바로가기

복음주의 대학생 선교기관

천안UBF

성경66권강해서

고린도전서 15장 강해 사부 나는 날마다 죽노라

작성자 : 오요한
작성일 : 2015-04-03 00:00:00
조회수 : 2,545

문제지풀이(2)

    iconB_071517A.hwp  (10.50KB)

    iconB_071517B.hwp  (30.00KB)

고린도전서 15장 강해 사부 나는 날마다 죽노라
말씀 고린도전서 15장 29-고린도전서 15장 34
요절 고린도전서 15장 31절 형제들아 내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서 가진 바 너희에 대한 나의 자랑을 두고 단언하노니 나는 날마다 죽노라.

오늘 말씀에는 부활을 믿는 자의 삶과 믿지 않는 자의 삶이 어떻게 다른가 나옵니다. 불신자들은 내일 죽을 터이니 먹고 마시지 하며 살았습니다. 선한 행실을 더럽혔습니다. 그러나 사도바울은 예수님의 부활을 믿고 날마다 죽는 삶을 살았습니다. 깨어 의를 행하였습니다.

(순교자들 위에서 받는 세례)

29절을 보십시오. “만일 죽은 자들이 도무지 다시 살아나지 못하면 죽은 자들을 위하여 세례를 받는 자들이 무엇을 하겠느냐 어찌하여 그들을 위하여 세례를 받느냐.” 부활은 실제적인 삶에 영향을 줍니다. 만일 부활이 없다면 우리의 현재 삶이 어떻게 될 것이냐고 말합니다. 괴테는 부활이 없다면 우리의 지식, 철학, 과학이 헛것이라고 말합니다. 우리의 모든 노력이 허사로 돌아갑니다. 예쁘고 머리가 좋고 집이 좋아도 백년이 지나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다 그저 그렇습니다. 얻고 성공하는 것도 죽으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부활이 없다면 우리의 인생이 아무것도 아닙니다. 바울은 교회론적인 견지에서 부활을 설명합니다. 세례는 자신이 자신의 믿음으로 자신을 위해서 받는 것입니다. 남을 위해서 받아주는 것이 아닙니다. 지극히 개인적인 것입니다. 그래서 유아세례를 안 주는 분도 있습니다. 세례는 자신의 믿음으로 받고 자신이 그리스도인임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은 죽은 자들을 위해서 세례 받았다는 말이 나옵니다. 이것을 죽은 사람을 위해서 내가 대신 세례 받았다는 뜻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세례는 자신의 구원을 위해서 자신이 받는 개인적인 것입니다. 세례는 종말론적인 의미를 갖습니다. 진정한 의미를 알고 세례를 받았다면 세례를 받는 것은 하늘나라 생명책에 기록되는 것입니다. 세례 받고 죽으면 천국가고 받지 않으면 지옥간다는 말입니다. 콘스탄틴 황제는 죽음이 임박할 때까지 세레를 안 받았다고 합니다. 왕이라 사람을 많이 죽였으므로 세례를 받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는 죽을 때도 오른 손은 남겨놓고 세례를 받았다고 합니다. 오른 손은 죄를 지을 수밖에 없었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세례는 세례의 의미적으로 생각하면 구원을 위해서 절대적인 것입니다. 세례를 받은 것은 하늘나라 백성으로 사는 것입니다. 여기서 죽은 자들을 위하여 라고 번역한 것은 원어적으로 보면 죽은 자 위에서 세례 받는다는 뜻입니다. 어떤 부족은 사람을 처형하는 바위 위에서 세례를 주었다고 합니다. 머리를 바위에 짓찧어 죽입니다. 그 피를 닦지 못하게 합니다. 그 붉은 피가 묻은 바위 위에서 세례를 줍니다. 옛사람이 완전히 죽었다는 것을 깨닫게 합니다 이미 순교한 사람들의 자리에서 세례를 주었다는 뜻입니다. 또 하나는 죽은 사람들을 생각하며 세례받았다는 뜻입니다. 옛날에는 세례받는 것이 힘들었습니다. 지금도 이슬람권에서는 세례를 주는 것이 어렵습니다. 세례받은 사람이 발각되면 처형됩니다. 세례준 사람은 쫓겨납니다. 초대교회에 세례 받고 순교당합니다. 모든 교인들이 죽은 그 사람을 보고 용기를 받습니다. 그 사람을 생각하며 죽음을 각오하고 세례를 받습니다. 그것을 죽은 사람을 대신하여 세례를 받았다는 말을 쓴 것입니다. 그들은 부활을 믿지 않는다면 세례를 받을 수 없습니다. 부활이 없다면 그들이 세례를 받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느냐는 것입니다. 죽은 사람의 빈자리를 채우기 위해서 세례를 받습니다. 세례는 종말론적인 의미가 있습니다. 죽은 성도를 생각하며 그와 나를 동일시하며 세례를 받는 것입니다. 그와 내가 하나가 되어 나도 순교하겠다는 것입니다. 안 믿는 청년이 믿는 처녀와 결혼하였습니다. 그후에 남편이 예수님을 믿습니다. 그 후에 시어머니가 아들과 며느리를 핍박합니다. 교회 나올 때마다 문간에서 핍박합니다. 그런데 어느날 시어머니가 같이 가자고 합니다. 하나밖에 없는 아들 천국 가는데 나도 가야한다고 생각합니다. 부활을 전제로 생각하면 부모님을 예수 믿게 하는 것이 최고의 효도입니다.

(믿는 자들의 죽음을 무릅쓰는 삶)

30절을 보십시오. “또 어찌하여 우리가 언제나 위험을 무릅쓰리요” 사도바울은 날마다 도살할 양같이 취급받았습니다. 바울은 부활을 생각하고 죽음을 무릎쓰며 살았습니다. 리빙스톤은 아프리카에서 맹수의 위협 속에서 살았습니다. 그가 다시 아프리카에 가서 선교할 수 있었던 것은 부활의 주님이 함께 하였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부활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부활을 믿으면 순교도 기쁘게 받습니다. 해마다 겨울이 찾아오듯이 우리 인생에도 반드시 죽음이라는 불청객은 찾아옵니다. 우리는 될 수 있는 대로 죽음에 대해서 생각하고 싶지 않지만, 때의 차이만 있을 뿐 인류 역사에 누구도 죽음을 피해간 사람은 없습니다. 에녹과 엘리야 딱 두 사람 천국 특차 합격생만 빼고 모두 다 이 죽음을 맞이하게 됩니다. 불로초를 찾던 진시황, 이순신, 국민 배우라는 최진실도 위대한 수령 김일성도 바울 같은 믿음의 사람도 죽었고 이효리나 김태희도 죽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믿는 사람들은 죽기 전에 세례를 받습니다. 부활 신앙은 신자들의 현재의 삶을 바꿔 놓습니다. 부활이 없다면 그저 이 땅에서만 잘 살려할 것입니다. 그러나 부활을 믿으면 죽어도 좋다는 각오로 살게 됩니다. 구원이 있고 부활이 있기 때문에 세례를 받고 위험을 무릅쓰고 십자가를 지는 것입니다. 부활 후에 영광을 믿기 때문입니다.

(믿는 자들의 날마다 죽는 삶)

31,32 전반절을 보십시오. “형제들아 내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서 가진 바 너희에 대한 나의 자랑을 두고 단언하노니 나는 날마다 죽노라. 내가 사람의 방법으로 에베소에서 맹수와 더불어 싸웠다면 내게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바울은 예수님을 믿는 형제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바울은 고린도성도들을 자랑으로 생각하였습니다. 바울은 고린도 성도에게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를 믿는 사람으로서 그들을 바울의 자랑으로 생각하며 이 말씀을 드리고 있습니다. 바울은 날마다 죽음의 위험을 당하고 있다고 말합니다. 바울 자신도 부활 신앙을 가지고 믿음으로 에베소에서 복음역사를 방해하는 세력인 맹수와 더불어 싸우는 삶을 살았습니다. 또 부활신앙을 가지고 날마다 죽는 삶을 살았습니다. ‘날마다 죽는다’는 말의 의미는 죽도록 힘들다는 탄식이 아니라 순교적인 자세로 복음역사를 섬겼다는 것입니다. 생명을 내놓지 않고서는 복음을 증거할 수 없는 상황 속에서 바울은 복음전파의 사명을 완수함에는 자신의 생명을 조금도 아끼지 않았습니다. 그는 자원하여 죽음을 각오하고 살았습니다. 그는 매일같이 죽음을 무릅쓰고 있습니다. 우리 주위에는 사고가 늘 있습니다. 우리는 언제나 죽음 앞에 노출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날마다 죽을 수 있다고 생각해야합니다. 오늘 죽어도 좋다는 생각으로 살아야 합니다. 또한 인간적인 생각을 죽여야 합니다. 영으로 육신을 죽여야합니다. 바울은 정욕도 있고 안일하게 살고 싶은 생각이 있고 향락적인 생각이 있습니다. 바울은 그것을 죽였습니다. 수도원에 들어갈 때는 호적을 지우고 들어갑니다. 수도원에는 세상적인 바람 어떤 것도 다 죽이고 들어갑니다. 그곳에서 소원 성취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 나라만을 바라보고 사는 것입니다. 오늘이 가장 행복한 날입니다. 바울은 자신을 십자가에 못박는 생활을 반복합니다. 그것이 사는 길입니다. 바울이 순교적인 자세로 오직 주님만을 위하여 넘치도록 수고하며 살고자 했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요? 그것은 주안에서 날마다 죽을 때에야 날마다 나를 살리는 하나님의 권능을 체험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죽어야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죽는 것이야말로 영적으로 사는 길입니다. 우리는 지금, 나의 자리에서 죽어야 부활의 능력을 현재적인 것으로 체험할 수 있습니다. 장래의 부활이 아니라, 지금 내 속에서 역사하는 부활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죽어야 하나님 나라가 우리에게 임합니다. 그러면 부활을 믿지 않는 자들은 어떻게 살아갑니까?

(믿지 않는 자들의 향락적인 삶)

32절 후반절을 보십시오. “내일 죽을 터이니 먹고 마시자 하리라”라고 말합니다. 부활을 부정하면 결국은 허무한 죽음의 권세에 시달립니다. 이들은 허무주의에 사로 잡혀 살았을 때에 쾌락주의, 찰라주의 삶을 살게 됩니다. 노세. 노세. 젊어 노세. 말초적인 자극에 몸을 맡기고 허랑방탕한 삶을 삽니다. 성의 자유화가 이루어지고 호모섹스가 합법화됩니다. 오늘 더 맛있는 것을 먹고 좋은 경치를 찾아다니면서 더 즐기고자 합니다.

(믿지 않는 자들의 도덕적으로 부패한 삶)

33절을 보십시오. “속지 말라 악한 동무들은 선한 행실을 더럽히나니” 나아가 부활을 믿지 않는 자들은 악한 동무들입니다. 이들은 선한 행실을 더럽히고 죄를 짓자고 합니다. 향락문화를 따라 즐기는 삶이 최고라고 유혹합니다. 술, 러브호텔, 맛사지, 도박 문화가 발달합니다. 부활을 믿지 않으면 도덕적으로 살아야할 이유가 없습니다. 우리가 도덕적인 삶을 살 수 있는 근거는 부활을 믿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부활을 실제로 믿지 않으면 도덕적으로 부패합니다. 교회를 다니고 신앙생활의 모양은 있어도 그저 이 땅에서 잘 사는데만 관심 갖는 현세적이고 기복주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합니다.

(믿는 자들의 깨어 의를 행하는 삶)

34절을 보십시오. “깨어 의를 행하고 죄를 짓지 말라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가 있기로 내가 너희를 부끄럽게 하기 위하여 말하노라” 그러나 부활신앙을 믿고 사는 우리는 깨어 의를 행하고 죄를 짓지 말아야 합니다. 부활과 심판을 믿을 때 절대적으로 의를 행할 수 있습니다. 진실하게 살 수 있습니다. 공산주의는 내세가 없어서 도덕도 정치 철학도 없어집니다. 창세기에 나오는 아브라함보다 롯이 현실 감각이 있고 이익을 잘 챙기는 지혜로운 점이 있습니다. 소돔과 고모라가 심판을 받지 않았다면 롯이 아브라함보다 지혜로운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심판과 부활이 있으므로 롯은 가장 어리석은 자이고 아브라함이 지혜로운 삶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에게 부활이 있기 때문에 믿음으로 사는 우리가 지혜로운 사람들이요 세상적으로 사는 사람들이 가장 불쌍한 사람들입니다.
15장 강해 사부 나는 날마다 죽노라
말씀 고린도전서 15장 29-고린도전서 15장 34
요절 고린도전서 15장 31절 형제들아 내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서 가진 바 너희에 대한 나의 자랑을 두고 단언하노니 나는 날마다 죽노라.
고린도전서 15장 강해 4부 끝입니다.




번호 제목 작성자 작성일
31 [고린도전서] 고린도전서 16장 강해 이부 이런 사람을 알아주라 오요한 2015-10-27
30 [고린도전서] 고린도전서 16장강해 일부 연보에 대해서 오요한 2015-10-27
29 [고린도전서] 고린도전서 15장 강해 6부 부활의 승리와 우리의 삶 오요한 2015-10-27
28 [고린도전서] 고린도전서 15장 강해 5부 부활의 방법과 형체 오요한 2015-10-27
27 [고린도전서] 고린도전서 15장 강해 사부 나는 날마다 죽노라 오요한 2015-04-03
26 [고린도전서] 고린도전서 15장 강해 삼부 부활의 원리와 순서 오요한 2015-04-03
25 [고린도전서] 고린도전서 15장 강해 이부 그리스도의 부활 성도의 부활 오요한 2009-01-28
24 [고린도전서] 고린도전서 15장 강해 일부 부활의 복음 오요한 2009-01-13
23 [고린도전서] 고린도전서 14장 강해 이부 질서 있는 예배 오요한 2009-01-13
22 [고린도전서] 고린도전서 14장 강해 일부 방언보다는 예언을 오요한 2009-01-11
1 2 3 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