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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주의 대학생 선교기관

천안UBF

성경66권강해서

고린도전서 14장 강해 일부 방언보다는 예언을

작성자 : 오요한
작성일 : 2009-01-11 00:00:00
조회수 : 3,183

문제지풀이(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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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린도전서 14장 강해 일부 방언보다는 예언을

말씀 고린도전서 141-17

요절 요절 고린도전서 141

 

방언과 예언은 바울이 말한 여러 가지 은사들 중에 일부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유독 방언과 예언의 은사만을 가지고 14장 한 장에 걸쳐 말합니다. 이는 여러 은사 중에 가장 방언과 예언의 대표적인 은사이고 문제를 많이 일으키기 때문입니다.

방언의 은사는 우리가 흔히 불 수 있고 분명히 알 수 있는 은사입니다. 방언의 은사를 받은 사람이 현재까지도 교회에서 문제를 많이 일으킵니다. 심지어 어떤 유명한 교회의 목사님은 방언을 하지 못하면 성령을 받지 않았다고 말하기도 하였습니다. 또한 예언의 은사에 대해서 사람들이 마치 점쟁이가 알아맞히는 것처럼 오해를 많이 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방언과 예언의 은사를 분명히 알아서 교회에 덕을 줄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우리 가운데 예연의 은사가 불같이 일어나기를 기도합니다. 아멘

 

(사랑에 기초한 은사)

 

1절을 보십시오. “사랑을 추구하며 신령한 것들을 사모하되 특별히 예언을 하려고 하라.”

 

우리가 지난 주에 12장에서 배운 말씀처럼 사도 바울은 여러 은사를 설명한 후에 더욱 큰 은사를 사모하라고 하였습니다. 가장 좋은 은사를 보여주겠다고 한 후에 사랑의 은사를 말하였습니다. 모든 은사의 기초는 사랑의 은사입니다. 사랑이 없으면 예언을 하고 방언을 하고 산을 옮겨도 아무 소용이 없고 시끄럽기만 힙니다.

우리는 사랑을 추구해야합니다. 사랑은 본질적이고 영원한 것입니다. 다른 은사는 일시적이고 도구적입니다. 모든 은사를 받기 이전을 사랑을 구해야 합니다. 모든 은사를 받고 나서도 은사를 사용할 때는 사랑을 따라서 은사를 사용해야 합니다.

 

(예언의 의미)

 

바울은 예언을 하려고 하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면 예언의 은사는 무엇입니까? 우리는 예언의 은사에 대해서 오해가 있습니다. 예언의 은사에 대한 바른 이해를 해야 합니다. 대부분 예언의 은사하면 미래에 있을 일을 점장이처럼 알아맞히는 것이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매우 신령한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예언을 네이버 사전에 찾아보면 1. 일반적으로 다가올 일을 미리 알거나 짐작하여 말함. 2 <기독교>신탁(神託)을 받은 사람이 하나님으로부터 직접 계시된 진리를 사람들에게 전하는 일. 또는 그런 말. 이라고 나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첫번째 의미로 성경의 예언을 이해하는데 이는 비기독교인들이 쓰는 예언입니다. 기독교인에게 예언은 두번째 의미가 맞는 말입니다. 예언은 하나님께 받은 진리를 전하는 것입니다.

킹제임스 번역에는 예언이라고 번역하지 않고 대언이라고 합니다. 또는 신언(神言)이라고도 번역합니다. 대언(代言)이란 하나님의 말씀을 대신 전한다는 뜻입니다. 아니면 예언의 예자를 미래 예()자로 쓰지 않고 예금 예치한다는 맡길 예()자를 쓰는 경우도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맡겨주신 말씀을 전한다는 뜻입니다.

이런 경우 미래적인 것이 포함되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어느 날 한 예언자가 왕을 찾아왔습니다. 예언자는 왕과 아는 사이이기 때문에 인사를 하고 한 가지 판단을 구하였습니다. 한 부자가 있습니다. 한 도에서 제일가는 부자입니다. 그는 많은 양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한 가난한 사람이 있습니다. 이 사람은 양이 한 마리이기 때문에 항상 양과 끼고 잠을 자고 함께 식사를 하였습니다. 부자에게 한 손님이 찾아오자 부자는 가난한 사람의 양을 빼앗아 잡아서 손님을 대접하였습니다. 왕이시여 이 부자를 어떻게 해야 할까요? 왕은 말합니다. “당장 부자를 죽이시오.” 그러자 선지자는 말합니다. 당신이 바로 그 부자입니다. 나단 선지자가 다윗에게 자신의 아내가 여럿인데도 남의 하나뿐이 없는 아내를 빼앗은 죄를 책망하는 말씀입니다. 이것이 예언자 나단이 다윗에게 예언한 내용입니다. 나단은 하나님의 말씀을 받고 그 말씀을 그대로 전하였습니다. 이것을 예언이라고 합니다.

구약성경의 선지서, 신약성경의 계시록은 예언의 내용입니다.

 

(두 가지 방언)

 

2절을 보십시오. “방언을 말하는 자는 사람에게 하지 아니하고 하나님께 하나니 이는 알아 듣는 자가 없고 영으로 비밀을 말함이라.”

 

방언에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사도행전에 보면 사도들이 성령이 임한 후에 방언을 말합니다. 사도들은 각 나라의 말로 복음을 전합니다. 그곳에 십륙 개 국의 나라 사람들이 다 복음을 알아듣습니다. 이 방언은 사람들에게 하는 방언입니다. 하나님은 때로 이렇게 외국어의 방언을 주시기도 합니다. 말이 통하지 않을 경우 복음을 전해야하는 아주 특별한 경우에 한한 경우입니다.

고린도 교회에서 말하는 방언은 이런 방언이 아니라 하나님을 향하여 하는 방언입니다. 우리가 흔히 방언 기도한다고 할 때 하는 그 방언입니다. 우리 교회에도 방언을 하시는 분들이 여러 명 있습니다. 갑자가 혀가 꼬이고 다른 사람들뿐만 아니라 자신도 알아듣지 못하는 말로 기도합니다. 이것이 방언 기도입니다.

나는 과거 방언은사 이야기가 나오면 기가 죽었습니다. 나는 방언 기도를 못했기 때문입니다. 나는 방언을 받고자 비가 오는 밤에 기도원을 찾아가기도 하고 부르짖어 기도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나에게 방언의 은사를 주지 않았습니다. 때로는 내가 성령을 받지 않지 않았나 의심도 들었습니다. 분명 내 내면에 평안과 기쁨이 있었지만 방언의 은사는 받지 못하였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방언을 잘 하시는 한 목사님을 만나서 상담을 하였습니다. 그분은 내가 성령을 받았다는 확신을 심어주었습니다. 방언의 은사는 성령님께 나의 혀를 맡기는 것이라고 말해주었습니다. 그 후 그분은 나에게 안수 기도를 하여주었습니다. 그때 나는 방언을 말하게 되었습니다. 신기하여 운전하면서도 방언을 말하였습니다. 방언을 하면서 좀더 오래 기도할 수 있습니다.

방언 기도를 하지 못하면 조금 기도하다가 주여 주여하는 말을 반복하다가 졸기 쉽습니다. 그러나 방언기도하면 밤새 기도할 수 있습니다. 나의 이성적인 생각을 초월하여 기도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방언 기도한 후에 나의 신앙이 바뀐 것은 없었습니다. 방언 기도 후에 달라진 것이 별로 없습니다.

우리가 방언 기도를 못한다고 신앙적인 열등감을 가질 필요는 없습니다. 한국교회의 유명한 한경직 목사님이나 곽선희 목사님도 방언을 하지 못한다고 합니다. 맥콤 센타에 성드림 선교사님은 학생 때 친구들과 함께 수련회를 갔습니다. 그런데 다른 학생들은 모두가 방언을 하는데 자신은 방언을 하지 못하였습니다. 그는 이로 인하여 신앙적인 열등감에 사로 잡혔습니다. 하나님이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다고 생각하여 신앙생활을 멀리 하였습니다.

그러나 전혀 그렇지 않았습니다. 드림 목자님이 비록 방언을 못했을지라도 하나님은 드림 목자님을 사랑했고 드림 목자님은 거듭났습니다.

 

(권면하며 위로하는 예언)

 

3-4절을 보십시오. “그러나 예언하는 자는 사람에게 말하여 덕을 세우며 권면하며 위로하는 것이요, 방언을 말하는 자는 자기의 덕을 세우고 예언하는 자는 교회의 덕을 세우나니

 

사도 바울은 방언과 예언을 대조하여 방언보다는 예언하기를 힘쓰라고 말합니다. 방언은 자신에게 덕을 세웁니다. 방언기도는 대체로는 나와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므로 나에게 유익이 됩니다.

그러나 예언은 교회의 덕을 세웁니다. 예언은 사람을 위하여 권면하며 위로하는 것입니다. 권면이란 격려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언을 통하여 다른 사람을 격려하고 위로해 주어야 합니다. 예언은 교회의 유익이 되도록 써야합니다.

어떤 분이 딸을 위하여 기도하였습니다. 기도 중에 딸이 발이 새까맣게 보였습니다. 어머니는 딸이 직감적으로 어떤 좋지 않은 곳으로 다니고 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렇다고 어머니는 딸에게 찾아가서 내가 계시를 보았는데 너 요즘 죄 짓는데 다니지 않느냐고 책망하지 않았습니다. 딸을 붙잡고 기도하였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딸의 눈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을 보게 하시고 딸의 귀가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을 듣게 하시고 딸의 손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을 하게 도우시기를 기도합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발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곳에만 가게 하소서 기도하였습니다. 딸은 어머니의 기도를 듣고 나서 이전에 친구들과 나이트클럽에 가서 술을 먹고 죄를 지은 것을 회개하였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자는 격려하고 위로해주기 위해서 조심스럽고 인격적으로 전해야합니다.

우리 한 선교사가 자신이 예언의 은사를 받았다고 자신이 받았다고 생각하는 말을 그대로 전하여 다른 선교사에게 말하여 엄청난 상처를 준 적이 있습니다.

 

(특별히 예언하기를 원하노라)

 

5절을 보십시오. “나는 너희가 다 방언 말하기를 원하나 특별히 예언하기를 원하노라. 만일 방언을 말하는 자가 통역하여 교회의 덕을 세우지 아니하면 예언하는 자만 못하니라

 

사도 바울은 고린도 성도들이 다 방언 말하기를 원합니다. 방언을 통하여 하나님과 영으로 교제하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바울은 무엇보다 예언하기를 원합니다. 다른 사람들에게 덕을 세우고 공동체를 세우는 사람이 되기를 원합니다.

우리의 은사는 나보다는 공동체를 세우는데 필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방언보다는 특별히 예언하기를 원한다고 합니다. 사도 바울은 방언과 예언을 계속하여 대조하며 예언의 은사가 풍성하기를 기도하라고 합니다.

 

(교회에서 방언이 주는 문제점)

 

6-11절을 보십시오. “그런즉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서 방언으로 말하고 계시나 지식이나 예언이나 가르치는 것으로 말하지 아니하면 너희에게 무엇이 유익하리요? 혹 피리나 거문고와 같이 생명 없는 것이 소리를 낼 때에 그 음의 분별을 나타내지 아니하면 피리 부는 것인지 거문고 타는 것인지 어찌 알게 되리요 만일 나팔이 분명하지 못한 소리를 내면 누가 전투를 준비하리요 이와 같이 너희도 혀로써 알아 듣기 쉬운 말을 하지 아니하면 그 말하는 것을 어찌 알리요 이는 허공에다 말하는 것이라 이같이 세상에 소리의 종류가 많으나 뜻 없는 소리는 없나니 그러므로 내가 그 소리의 뜻을 알지 못하면 내가 말하는 자에게 외국인이 되고 말하는 자도 내게 외국인이 되리니 그러므로 너희도 영적인 것을 사모하는 자인즉 교회의 덕을 세우기 위하여 그것이 풍성하기를 구하라

 

당시 고린도 교회에서는 방언으로 대표기도하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방언으로 특송을 하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문제는 회중들이 이 방언 기도나 찬송을 알아듣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방언으로 대표기도하거나 특송하는 자는 회중을 무시하는 죄악입니다. 우리가 하는 말은 뜻을 가지고 소리를 냅니다. 기타나 피아노도 아기 홍요한이 와서 줄을 튕기고 건반을 눌러서 나는 소리는 소음에 불과합니다. 악보를 가지고 연주해야 우리가 알아듣고 은혜도 받습니다.

군대에서 쓰는 나팔의 경우도 기상나팔과 취침 나팔이 다릅니다. 공격 나팔과 후퇴 나팔이 다릅니다. 사람이 하는 말은 더욱 그렇습니다. 우리는 사람들이 알아듣기 쉬운 말을 해야 합니다.

우리가 알아듣지 못하는 방언을 하면 마치 외국인이나 야만인 취급을 받습니다. 야만인이라는 말이 영어로는 barbarian인데 이는 바바바하는 사람이라고 붙여진 단어입니다. 방언으로 기도하는 것은 이런 야민인의 말과 같습니다. 그러나 예언은 어떤 것입니까?

 

(계시나 지식이나 예언)

 

6절을 다시 보십시오. “그런즉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서 방언으로 말하고 계시나 지식이나 예언이나 가르치는 것으로 말하지 아니하면 너희에게 무엇이 유익하리요?"

 

바울은 예언과 유사한 3가지를 말합니다. 계시나 지식이나 예언이나 가르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계시는 하나님이 하나님의 세계를 인간에게 깨우쳐 주시는 말씀입니다.

지식은 하나님의 말씀을 체계적으로 전하는 것입니다.

가르치는 것은 말씀 선생이 되어서 말씀을 가르치는 것입니다.

이를 볼 때 예언의 은사는 말씀의 은사와 흡사함을 알 수 있습니다. 넓게 보면 같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말씀의 은사와 예언의 은사는 엄밀히 같은 것이 아닙니다. 말씀의 은사는 일반적인 은사입니다. 체계적으로 말씀의 지식을 가르치는 것입니다. 하지만 예언의 은사는 각 사람에게 두신 하나님의 뜻을 말씀에 기초하여 깨닫게 하는 것입니다. 아니면 기도 중에 받은 말씀을 그에게 주는 것입니다.

한 번은 가을 감사제 수양회 말씀을 무엇으로 할까 고민하며 기도하였습니다. 시편 103편 나의 마음 속에 내 속에 있는 것들아 다 주를 송축하라는 말씀이 떠올랐습니다. 그런데 당시 심 목자님이 나에게 와서 그 말씀으로 감사제 수양회를 했으면 어떻겠느냐고 하였습니다.

또 한 번은 저녁 기도모임을 없앤 후에 나의 마음이 매우 고통스러웠습니다. 여러 가지 안 좋은 일이 계속 터졌습니다. 나는 그 문제를 하나님께 여쭈어 보았습니다. 그때 하나님은 하나님이 시기하기까지 너희를 사모하는줄을 알지 못하느냐는 말씀을 주셨습니다. 나는 그 말씀이 어디에 나오는지도 몰랐습니다. 성경에 있는지도 몰랐습니다. 그때는 성경 검색 시스템도 없는 때였습니다. 나는 주일 예배에 광고하고 현상금을 걸어 어느 말씀인지를 찾았는데 오스트리 양다니엘라 선교사님이 나에게 야고보서에 나온다고 알려주어서 상품권을 준 적이 있습니다.

이처럼 구체적인 현실 가운데 하나님의 뜻을 알려주는 것이 계시의 은사요 예언의 은사입니다. 이는 사람들에게 힘을 주고 방향을 주는 말씀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방언보다 예언의 은사를 하고자 사모해야합니다.

 

(방언은 통역해야합니다)

 

13절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방언을 말하는 자는 통역하기를 기도할지니

 

방언을 공중에서 할 때는 반드시 통역하기를 기도해야합니다. 외국어를 통역하듯이 방언도 통역해야합니다.

통역하는 은사를 받은 사람도 겸손해야합니다. 자신의 말을 하지 말고 하나님이 주시는 말씀을 그대로 가르쳐야합니다. 자신이 통역할 수 없는 것을 말하지 말아야합니다.

구한말에 통역을 하는 자들이 말하는 사람의 말보다 자신의 말을 전하여 권세를 부린 자들이 있었습니다.

한국 교회에서 회자되는 이야기입니다. 어떤 분이 한국에서 최고의 방언 통역 은사를 가졌다고 자처하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어떤 목사님이 그를 시험해보고자 하였습니다. 그에게 가서 방언 기도를 하였습니다. 그리고 통역해 달라고 하였습니다. 한국 최고의 방언 통역 은사를 가지신 분은 삯꾼 목자는 회개하시오이런 내용으로 통역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사람이 한 방언은 주기도문을 헬라어로 외운 것이었습니다. 그는 큰 창피를 당했습니다.

 

(방언기도와 일반 기도의 병행)

 

14-15절을 보십시오. “내가 만일 방언으로 기도하면 나의 영이 기도하거니와 나의 마음은 열매를 맺지 못하리라. 그러면 어떻게 할까 내가 영으로 기도하고 또 마음으로 기도하며 내가 영으로 찬송하고 또 마음으로 찬송하리라.”

 

방언 기도는 영으로 하는 기도입니다. 마음으로 하는 기도가 아닙니다. 영은 열매를 맺지만 마음은 열매를 맺지 못합니다.

따라서 방언 기도만 하지 말고 소리 내서 하는 마음의 기도도 병행해야합니다.

 

지난 번 스텝 미팅에서 한 목자가 말하였습니다. 한 형제가 방언으로 기도하는데 도덕적으로 거룩한 삶을 살지 않는다고 말하였습니다. 그 형제가 악령을 받았다고 내어 쫓았다고 합니다. 그러나 방언은 영으로 하는 것이지 마음으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방언의 은사와 도덕적인 삶과는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방언기도를 많이 한다고 도덕적으로 깨끗하게 사는 것이 아닙니다.

마태복음 7장에 보면 예수님의 이름으로 병자를 고치고 귀신을 쫓아냈는데 예수님은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한다는 말씀이 있습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할까요? 은사는 영의 일입니다. 마음의 일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그런 현상이 있을 수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내면의 변화를 소홀히 하고 은사만 중시하는 은사주의 교회를 경계해야합니다. 은사를 지나치게 강조하는 은사주의 교회가 대체로 비도덕적으로 빠지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들이 마음의 일을 소홀히 하기 때문입니다. 은사는 반드시 말씀에 대한 순종과 병행해야합니다.

 

(통역이 필요한 이유)

 

16,17절을 보십시오. “그렇지 아니하면 네가 영으로 축복할 때에 알지 못하는 처지에 있는 자가 네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지 못하고 네 감사에 어찌 아멘 하리요? 너는 감사를 잘하였으나 그러나 다른 사람은 덕 세움을 받지 못하리라.”

 

방역을 통역하지 않고, 각자가 영으로만 감사를 드리면, 초신자의 처지에 있는 사람은, 그것이 무엇을 말하는지를 알아듣지 못합니다. 그러면 그는 어떻게 그 감사 기도에 "아멘"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우리들 각자가 훌륭하게 감사를 드린다고 할지라도, 다른 사람에게는 덕이 되지 않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공중에서 방언할 때는 통역을 해야 합니다.

 

고린도전서 14장 강해 일부 방언보다는 예언을

말씀 고린도전서 141-17

요절 요절 고린도전서 141

고린도전서 14장 강해 일부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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