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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주의 대학생 선교기관

천안UBF

성경66권강해서

고린도전서 15장 강해 이부 그리스도의 부활 성도의 부활

작성자 : 오요한
작성일 : 2009-01-28 00:00:00
조회수 : 3,598

문제지풀이(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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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린도전서 15장 강해 이부 그리스도의 부활, 성도의 부활
말씀 고린도전서 15장 12-고린도전서 15장 19
요절 고린도전서 15장 12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다 전파되었거늘 너희 중에서 어떤 사람들은 어찌하여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이 없다 하느냐?

아프리카 선교사가 추장에게 전도하였습니다. 선교사는 우리도 주님을 따라서 부활하게 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아프리카 추장은 얼굴이 하야지면서 부활하면 안 된다고 하였습니다. 자신이 억울하게 죽인 사람들이 많아서 부활하면 자신은 그들에게 복수를 당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우리는 힘들면 나 하나 죽으면 되지 하는 생각을 합니다. 자살하면 모든 것이 끝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아니면 다른 사람이 힘들게 하면 그 사람만 죽이면 되지 생각하여 다른 사람을 죽이고자 합니다. 내가 미워하는 그 사람만 죽이면 모든 문제가 해결될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죽음으로 모든 것이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죽음은 부활의 시작입니다. 죽음을 넘어서는 세계, 죽음보다 더 큰 세계가 있습니다. 부활은 기독교의 핵심입니다. 우리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믿음으로 우리의 현재 삶이 변화되기를 기도합니다. 아멘!

(그리스도의 부활)

12절을 보십시오.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다 전파되었거늘 너희 중에서 어떤 사람들은 어찌하여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이 없다 하느냐?” 이 말은 예수님의 부활을 부정한다는 말이 아닙니다. 당시는 예수님의 부활을 부정하는 사람들은 없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본 증인들이 시퍼렇게 살아 있었습니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부활을 의심없이 인정하였습니다. 예수님은 부활하였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일반적인 사람들의 부활과 다릅니다. 예수님이 계실 때도 나인성 과부의 아들이나 나사로도 살리시고 야이로의 딸도 살리셨습니다. 이들은 우리의 삶이 잠시 연장된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다시 두번째 죽었습니다. 그들은 부활이라고 하지 않고 소생이라고 합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소생이 아닌 변화입니다. 우리 주위에는 부활의 그림자인 이런 변화를 볼 수 있습니다. 봄이 되면 벚꽃이 피어납니다. 잎이 나지도 않았는데 꽃이 활짝 신비롭게 피어납니다. 번데기에서 애벌레가 되고 애벌레가 나비가 됩니다. 우리는 저녁에 잠 자다가 아침에 일어납니다. 참으로 자연 속에 부활의 신비가 가득차 있습니다. 그러나 이보다 더욱 신비로운 일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신 것입니다. 죽은 예수님이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변화된 것입니다. 고린도 성도들은 그리스도의 부활은 인정하나 성도들의 부활을 믿지 않았습니다. 헬라의 이원론 사상에 영향을 받은 그들은 죽은 후에 영혼만 구원받는 것이지 어떻게 새로운 몸으로 부활하느냐고 말합니다. 예수님 믿고 착하게 살고 복 받으면 되지 부활이 우리에게 무슨 필요가 있느냐고 생각합니다. 현세에서 복을 중시하는 사두개인들도 부활을 믿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부활하였다면 우리 모두가 부활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닫혀진 생명의 문을 활짝 열어놓으셨습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신 후로 우리도 예수님 안에서 생명의 문으로 들어갈 수 있습니다. 죽은 후에 우리도 부활할 것을 믿는 것이 우리 신앙의 핵심입니다. 죽은 후의 부활을 믿어야 이곳의 신앙도 바로 할 수 있습니다. 이곳에서 잘 살 수 있고 잘 죽을 수 있습니다. 믿음으로 잘 죽는 사람이 신앙생활 잘하는 사람입니다. 죽는 것을 보면 그 사람의 신앙을 알 수 있습니다. 죽음에는 우리의 신앙이 다 담겨 있습니다. 고고학자는 무덤만 찾아다닙니다. 무덤에서 그 시대의 가치관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무덤에서 그 개인의 신앙, 가정의 신앙, 그 시대의 가치관을 알 수 있습니다. 무덤은 그 사람의 최종적인 가치관을 보여줍니다. 마찬가지로 신자의 죽는 모습을 보면 그 사람의 신앙을 가장 잘 알 수 있습니다. 신앙생활하며 성공하고 기도하고 응답받은 사람도 있습니다. 이런 일도 감동적입니다. 그러나 진정한 감동은 잘 죽는 사람입니다. 신앙생활 잘하는 사람은 생애의 마지막을 잘 정리하는 사람입니다. 죽음을 부활의 소망 속에서 맞이해야합니다. 우리는 사는 동안에 열심히 살아야 합니다. 우리는 언제 갈지 모르지만 부르시면 예! 하고 대답하고 기쁨으로 가야 합니다. 그날 안 가겠다고 발버둥쳐서는 안 됩니다. 인상 쓰고 슬퍼하며 두려워하며 울어서는 안 됩니다. 이 세상에 올 때는 울면서 왔지만 갈 때는 기쁨으로 환하게 웃으며 가야 합니다. 잠자듯이 평화롭게 가야 합니다. 이 사람이 신앙 생활을 잘하는 사람입니다.

(성도의 부활)

13절을 보십시오. “만일 죽은 자의 부활이 없으면 그리스도도 다시 살아나지 못하셨으리라.” 바울은 가정법과 반어법을 쓰고 있습니다. ‘내가 날개가 있다면 날 수 있을텐데’ 가정법은 나는 날개가 없어서 날 수 없다는 현실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죽은 자의 부활이 없으면 그리스도도 살지 못 하였으리는 말씀은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셨으므로 죽은 자들도 부활한다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신 것은 역사적인 사실입니다. 그 사실을 예수님에게만 국한시키지 말아야합니다. 우리도 부활한다는 것을 믿어야합니다. 우리도 한 번 해보겠습니다. “예수 부활하셨네. 나도 부활하겠네!” 예수님의 부활은 내가 부활할 것에 대한 약속이요. 보증입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객관적인 사건을 나도 부활하실 것이라는 주관적인 신앙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이 사람이 부활신앙을 가진 사람이 됩니다. 젊은 어머니가 어린 아이들을 이 땅에 두고 얼마 후에 죽어야합니다. 어머니는 임종이 가까워왔는데 자녀들과 작별해야합니다. 어머니는 어린 자녀들에게 죽음을 설명합니다. “너는 책상에서 공부하다가 잠들었지. 그런데 네가 깨어나니 침대에 있었지. 아버지가 너를 옮겨 놓은 거야. 마찬가지로 내가 죽은 후에 하나님이 더 좋은 곳으로 옮겨놓을 거야. 죽음은 더 좋은 곳으로 옮겨놓는 것이란다.”라고 말하였습니다. 죽음은 잠시 공간 이동하는 것이니 죽음을 슬퍼하지 말라고 말합니다. 엄마는 며칠이 지나 임종을 맞이합니다. 이제 깊은 잠을 자니 굳나잇 키스를 하자고 하였습니다. 작은 아이들에게는 다시 볼 것이니 ‘잠간 굳나잇’이라고 하였습니다. 큰 아이에게는 영원히 만날지 모르니 ‘영원히 굿바이’라고 하였습니다. 큰 아들이 물었습니다. 왜 나에게는 영원히 굳바이인가요? 어머니는 말합니다. 동생들은 예수님을 잘 믿으니 나중에 만날 수 있어서 굳나잇이라고 하지만 너는 예수님을 믿지 않으니 다시 만날 수 없어 영원히 굳바이라고 한다고 하였습니다. 믿지 않는 자에게 죽음은 무서운 것입니다. 죽음은 무지막지한 힘이 있습니다. 영원한 이별입니다. 그러나 우리 신자는 죽음이 두렵지 않습니다. 우리에게는 죽음보다 더 큰 부활의 권세가 있습니다. 부활을 믿는 우리에게는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죽음은 잠입니다. 우리는 잠 잘 때 두려워하지 않듯이 죽을 때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이대 첫번째 총장인 김활란 박사는 죽을 때 하늘 가는 밝은 길이 라는 노래를 불러달라고 하였습니다. 승리의 행진곡을 장례식장에 틀어달라고 하였습니다.

(믿음과 선교의 근거 부활)

14-16절을 보십시오. “그리스도께서 만일 다시 살아나지 못하셨으면 우리가 전파하는 것도 헛것이요, 또 너희 믿음도 헛것이며 또 우리가 하나님의 거짓 증인으로 발견되리니 우리가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셨다고 증언하였음이라. 만일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나는 일이 없으면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지 아니하셨으리라. 만일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나는 일이 없으면 그리스도도 다시 살아나신 일이 없었을 터이요.” 예수님의 부활은 우리의 믿음과 선교의 근거입니다. 믿음의 시작은 예수님이 나를 위해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것이요. 믿음의 마지막은 예수님과 같이 나도 부활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전도하는 핵심도 예수님이 우리를 위하여 죽으시고 다시 살아나 그리스도가 되셨다는 것입니다. 사도행전의 복음을 전하는 사도들은 부활의 증인들입니다. 부활이 없다면 우리의 신앙이 송두리째 무너집니다. 우리는 허깨비를 쫓아 산 사람들입니다. 복음을 전하는 사람은 완벽한 거짓말쟁이가 됩니다. 기독교는 사기극을 행하는 집단입니다. 우리가 복음을 전하는 것은 사기치는 것이요. 선교사는 국제사기단이 됩니다. 유비에프는 잘 사는 사람들을 유혹하여 캠퍼스 사기, 국제 사기를 치는 악한 집단으로 만드는 곳입니다. 기독교의 모든 기초가 다 무너집니다. 그러나 우리는 믿고 있고 선교하고 있고 우리는 진실하므로 예수님은 부활하신 것입니다.

(죄사함의 기초인 부활)

17절을 보십시오. “그리스도께서 다시 살아나신 일이 없으면 너희의 믿음도 헛되고 너희가 여전히 죄 가운데 있을 것이요.” 구약에서 구원 받은 사람들은 죄사함을 주겠다는 약속 어음을 갖고 산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셔서 이 약속 어음이 결제되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부활을 통하여 죄사함을 받게 되었습니다. 부활을 통하여 십자가에 우리 죄를 위해서 죽은 예수님의 피가 살아계신 하나님의 피로서 효력을 갖게 됩니다. 부활이 없으면 죄사함을 주시겠다는 약속 어음이 부도가 나는 것입니다. 우리는 여전히 죄 가운데 있습니다. 부활이 없으면 예수님의 피는 보통 사람이 죽은 그 피와 다름이 없습니다. 죽음은 죄의 결과입니다. 죄사함을 주었다면 예수님은 죽음을 이겨야합니다. 따라서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것은 죄사함을 주셨다는 확실한 증거입니다. 또한 부활을 믿을 때 우리가 죄를 짓지 않을 수 있습니다. 칸트는 도덕적이고 정직해야한다고 말합니다. 그렇게 살아야 삶에 유익하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칸트는 내세를 전제 하지 않고는 죄를 짓지 않고 살아가야하는 절대적인 이유를 발견할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도덕적인 삶을 살아야하는 근거를 찾을 수 없었습니다. 그는 도덕적인 삶을 위해서라도 부활을 믿어야한다고 말하였습니다. 부활 없는 도덕은 처세술에 불과합니다. 부활 윤리는 부활을 전제하여 하여 윤리적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초대교회는 유무상통하였습니다. 인간이 물질에 집착하는 마음이 깨어졌습니다. 그들이 윤리를 가르친 것이 아니라 그들은 부활을 가르치니 윤리적이 되었습니다. 부활신앙을 가질 때 명예에서 자유로워집니다. 사람들은 칭찬에 집착합니다. 죄에서 자유로워집니다. 그러나 부활을 믿으면 칭찬을 기대하지 않고 선하게 살 수 있습니다. 사람들이 왜 역사에 이름을 남기고자 합니까? 왜 비석에 한 자라도 더 쓰려고 난리를 쳐야합니까? 이는 부활을 믿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부활을 믿을 때 명예에서 자유로울 수 있습니다.

(부활을 믿는 자가 가장 행복한 자)

18,19절을 보십시오. “또한 그리스도 안에서 잠자는 자도 망하였으리니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바라는 것이 다만 이 세상의 삶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이리라.” 우리가 주님을 위해서 헌신하고 희생했는데 모든 것이 끝난다면 우리는 가장 불쌍한 자입니다. 그러나 부활이 있기 때문에 우리는 가장 행복한 자입니다. 우리는 부활 소망이 있기 때문에 기쁨으로 주님께 헌신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상주심을 믿기 때문에 주님을 위해서 헌신할 수 있습니다. 헌신하면서도 가장 행복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이런 믿음이 있었기 때문에 초대 성도들은 순교도 기쁨으로 하였습니다. 순교하지 못하면 슬퍼서 울었습니다. 순교한 사람들은 가장 큰 상을 받을 사람입니다. 초대 교회에서 그렇게 많은 사람이 어떻게 사자의 밥이 될 수 있었습니까? 어떻게 불에 타 죽을 수 있었습니까? 죽은 후에 부활할 것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주님을 위해서 왜 시간과 물질을 드리는 것입니까? 왜 우리가 설날에도 예배를 절대적으로 드려야합니까? 부활을 믿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부활을 믿을 때 우리는 오늘 여기서 가장 행복하게 살 수 있습니다. 웰빙할 수 있습니다. 부활을 믿을 때 우리가 주님께 드리는 헌신이 하나하나 의미가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 부귀영화를 추구하는 목회자들이 있습니다. 이들은 진정한 의미에서 부활을 믿지 않는 자들입니다. 또한 우리가 부활을 죽을 때 정말 행복하게 죽을 수 있습니다.

(결론 부활을 믿지 않는 자의 슬픔)

실화입니다. 군에서 수류탄을 내무반에 투척하여 사형 선고를 받은 자가 있었습니다. 그는 죽기 전에 쇠고기를 실컷 먹고 싶었습니다. 사람들은 아무도 그에게 고기를 사주지 않았습니다. 그는 자신의 시신을 대학 병원에 팔았습니다. 그는 십 만원을 받아서 그 돈으로 고기를 사서 마음껏 먹었습니다. 그는 고기를 마음껏 먹고 싶었지만 삼 만원어치밖에 먹지 못하였습니다. 주위에서 그를 지켜보는 죄수가 물었습니다. 맛 있냐? 그러자 그가 말합니다. 내 몸을 팔아 내가 먹는데 무슨 맛이 있느냐? 고하였습니다. 그렇습니다. 부활을 믿지 않는 자는 이 사형수와 같이 가장 불쌍한 자입니다. 많은 사람이 사형수처럼 다 언젠가는 죽을 것입니다. 그것을 알면서 열심히 죽을 똥 살 똥 일하며 먹고 삽니다. 그렇게 먹는 고기가 맛있습니까? 죽을 것을 알고 먹는 고기가 맛이 있습니까? 우리는 부활을 믿어야 진정한 고기 맛도 느낄 수 있습니다. 진정한 웰빙은 부활 신앙 속에서 가능합니다.
고린도전서 15장 강해 이부 그리스도의 부활, 성도의 부활
말씀 고린도전서 15장 12-고린도전서 15장 19
요절 고린도전서 15장 12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다 전파되었거늘 너희 중에서 어떤 사람들은 어찌하여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이 없다 하느냐?
고린도전서 15장 강해 이부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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