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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주의 대학생 선교기관

천안UBF

성경66권강해서

로마서 14장 강해1 성령 안에 있는 하나님 나라

작성자 : 오요한
작성일 : 2013-02-08 00:00:00
조회수 : 3,580

문제지풀이(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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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서 14장 강해 일부.
형제를 비판하지 말라
로마서 14장 1-로마서 14장 12
요절 로마서 14장 1 “믿음이 연약한 자를 너희가 받되 그의 의견을 비판하지 말라”

사도 바울은 계속하여 성도들의 윤리를 가르쳐 주십니다. 오늘 말씀에서는 교회 안에서 윤리를 가르쳐 주십니다. 지난주는 바쁜 주였습니다. 우리는 학생 연합수양회를 다녀 왔습니다. 저는 학생 연합수양회에서 젊은 때를 어떻게 보낼 것인가? 대전선교하는교회에서 어떻게 제자 양성을 할 것인가? 특강을 전하였습니다.
ubf의 다른 모임과 예수님을 믿는 다른 교회를 보면서 한 분 예수님 안에서 연합이 얼마나 아름다운가를 알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다른 모임을 판단하지 말고 예수님 안에서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 모임 안에서도 서로 판단하지 말고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서로 판단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서로를 영접하고 하나되는 것입니다.

(유대인 신자와 헬라인 신자의 차이)

“믿음이 연약한 자를 너희가 받되 그의 의심하는 바를 비판하지 말라. 어떤 사람은 모든 것을 먹을 만한 믿음이 있고 연약한 자는 채소를 먹느니라. 먹는 자는 먹지 않는 자를 업신여기지 말고 먹지 못하는 자는 먹는 자를 판단하지 말라.”(1-3a)

본문에는 판단하지 말라, 비판하지 말라, 업신여기지 말라는 말씀이 반복됩니다. 믿음이 있는 사람이 믿음이 없는 사람을 비판하지 말아야 합니다. 당시에 초대 교회에는 유대교 신자와 이방인 신자들이 섞여 신앙생활을 하였습니다. 이들은 여러모로 서로 갈등하였습니다. 특히 먹는 것과 날짜 문제로 갈등했습니다.
유대교 신자들은 오랫동안 구약에서 금지된 부정한 음식을 먹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삼겹살, 돈가스, 탕수육, 오징어볶음밥, 낙지볶음을 부정하다고 먹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헬라 신자들은 잡아먹으라는 신약의 말씀에 기초하여 아무것이나 믿음으로 잘 먹었습니다. 또한 유대교신자들을 구약부터 지켜온 토요일 안식일에 모여서 예배를 드렸습니다. 유월절 오순절 초막절을 지켰습니다. 그러나 헬라신자들은 안식일의 주인 되신 예수님을 영접하고 주일날 모여서 예배를 드렸습니다. 부활절과 성탄절을 지켰습니다. 무엇이든지 먹고 주일날 예배드리는 이방인 신자들은 유대인 신자들을 믿음이 없고 율법적이라고 판단했습니다. 반면에 유대교 신자들은 헬라 신자들을 부정하고 자유분방하다고 판단했습니다.

(문화와 믿음의 차이로 인한 비판)

이것은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지금도 문화적인 차이나 믿음의 차이로 서로 판단하기 쉽습니다. 아주 예전 이야기입니다. 지금은 말도 안 되는 이야기인데 한번 들어 보시기 바랍니다. 문화적인 차이가 얼마나 사람을 우스꽝스럽게 만드는지를 보여 주는 것입니다 남편과 아내는 함께 식탁에서 식사하지 않았습니다. 아내는 부엌에서 밥을 먹어서 부엌대기라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믿고 여자를 존귀하게 여기는 신자는 안방에서 겸상하여 먹었습니다. 믿음이 적은 자들은 예수님을 믿은 사람들이 부부가 함께 식탁에서 밥을 먹으니 망측하다고 하였습니다. 반면에 믿음이 있어 부부가 같이 먹는 신자들은 남편이 여자를 부엌에서 먹게 하는 것은 여자를 무시하는 믿음 없는 행동이라고 판단했습니다. 옛날에는 남녀칠세부동석이었습니다. 그런데 예배당에서 남녀가 함께 모여서 예배를 드렸습니다. 믿음이 적은 자들은 예배당을 연애당이라고 비방했습니다. 그러나 믿음이 있는 사람은 예수님 안에서 자유롭다고 말을 했습니다.
초기에 목사님들은 자매들이 립스틱 바르는 것을 금했습니다. 지금은 너무나 당연한 것이죠? 그런데 그때는 공적인 예배에서 립스틱 바른 여자들이 쥐를 잡아먹어서 입술이 빨가냐고 설교시간에 책망을 했습니다. 그러나 진보적인 사람들은 목사님을 고리타분하다고 말했습니다. 이런 것이 요즘도 마찬가지입니다. 요즘 귀걸이 하는 것, 머리 염색하는 것, 찢어진 바지 입는 것들이 자연스럽지만 십 년 전만 하여도 그렇지 못하였습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아닌 문화적인 것으로 서로를 판단할 수는 없습니다. 또한 개인적인 믿음의 차이로 서로 비난을 하지 말아야 합니다. 믿음이 없는 사람은 믿음 있는 사람을 비판하지 말아야 합니다. 중국의 향내 나는 음식을 먹는 사람이 이것을 먹지 못하는 사람을 판단할 수 없습니다. 개고기를 먹는 사람이 먹지 않는 사람을 판단할 수 없고 먹지 못하는 사람이 먹는 사람을 판단할 수도 없습니다. 우리는 서로 문화의 다양성을 인정해야 합니다.

(믿음 작은 자에 대한 판단)

믿음이 있는 사람도 있고 믿음이 작은 사람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나의 믿음을 다른 사람에게 강요해서는 안 됩니다. 믿음이 성장한 사람이 믿음이 어린 사람도 판단할 수 없습니다. 믿음이 있는 사람은 새벽기도를 합니다. 새벽기도하는 사람이 새벽기도하지 않는 사람을 판단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이 새벽 미명에 기도하실 때 혼자 가셨다는 것은 은혜가 됩니다. 제자들도 믿음이 성장하면 새벽기도하실 것을 아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책망하지 않으시고 기도의 본을 보이셨습니다. 새벽기도 때 깨어서 열심히 기도한 사람이 새벽기도 때 조는 사람을 판단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기도하라고 했지만 조는 제자들에게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 하고 이해해 주셨습니다. 믿음으로 열심히 공부해서 장학생이 된 사람이 F 학점 맞은 사람을 판단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 자신은 많은 헌금을 드린 사람이 조금 헌금을 드린 사람을 판단할 수 없습니다. 자신은 일대일 말씀을 많이 가르쳐서 많이 해서 제자를 세운 사람이 제자를 세우지 않은 사람을 판단할 수 없습니다. 자신은 은혜 안에서 참 자유를 누리는 사람이 그렇지 않은 사람을 판단할 수 없습니다. 이들을 이해하고 긍휼을 베풀어야 합니다.

(믿음 있는 자에 대한 없는 자의 판단)

반대로 믿음이 없는 사람이 믿음 있는 사람을 판단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믿음으로 사마리아 여인과 대화를 하셨습니다. 당시는 여자와 특히 사마리아 사람과 대화를 하지 않는 시대였습니다. 그렇다고 제자들이 예수님을 감히 판단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앞두고 심히 놀라시고 슬퍼하셨습니다.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다고 제자들이 예수님께 왜 그렇게 믿음이 없이 근심하느냐고 책망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예수님만이 지는 큰 고통의 십자가입니다.
사도 바울은 항상 기뻐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지만 사도 바울은 유대인들을 생각할 때 큰 근심과 그치지 않는 고통이 있었습니다. 교회를 인하여 눌리는 것이 있고 근심이 있었습니다. 그러면 사도바울이 자신은 기뻐하지 않고 기뻐하라 하고 근심하느냐고 판단할 수 없습니다. 이때는 사단과 싸우는 시기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받으시는 성도들)

“이는 하나님이 저를 받으셨음이니라”(3b)

예수님은 판단할 수 없는 이유를 하나님이 받으셨기 때문이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믿음이 부족한 자나 믿음이 성숙한 자나 다 받으셨습니다. 그들의 믿음을 주신 분도 하나님이시고 받으신 분도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도 하나님이 받으시듯이 다른 사람을 받아야 합니다. 다른 사람을 영접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어린 아이를 곁에 세우고 어린 아이를 영접하는 자는 바로 예수님을 영접하는 자고 이들이 하나님 나라에 있는 자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가실 때 사마리아 사람들이 영접하지 않았습니다. 요한과 야고보는 하늘에서 불을 내려 이들을 멸하자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요한과 야고보를 책망하였습니다. 예수님은 배척하는 사마리아 사람들을 이해하시고 영접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 그들을 받으신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십지어 가룟유다도 영접하고 그의 발을 씻겨 주셨습니다. 십자가에서 자신을 못 박는 자들까지 다 영접하시고 용서하셨습니다. 우리는 이 예수님을 생각할 때 영접하지 못할 사람이 없습니다. 우리는 내가 영접 못 하는 한 사람을 영접할 때 모든 사람을 다 영접할 수 있습니다.
한참 전쟁을 하고는 최전방에 있는 사람에게 왜 세수 안 했느냐 왜 얼굴이 그 모양이냐고 판단할 수 없는 것입니다. 저는 어려서 목자님을 판단한 죄를 지은 적이 있습니다. 나는 양식말씀을 보고 기도하고 있는데 목자님은 아침에 오셔서 신문을 보시는 것입니다. 목자님이 정치적인 이야기를 하면 영적인 이야기를 하지 않는다고 판단을 하였습니다. 나의 작은 지식으로 주의 종을 판단한 교만의 죄를 지은 적이 있습니다.
이렇게 사람을 판단하는 것은 자기중심적입니다. 우리는 믿음이 있는 자나 믿음이 없는 자나 서로를 판단하지 말아야 합니다. 믿음이 없는 자는 연약하기 때문에 판단할 수 없습니다. 어린 아이가 밥을 먹지 못한다고 어린 아이가 오줌이나 똥을 싼다고 판단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어려서 그렇고 크면 잘할 것을 믿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모든 것에 때가 있음을 알고 여유 있게 참고 기다려야 합니다.

(믿음을 주시는 하나님)

“남의 하인을 비판하는 너는 누구냐 그가 서 있는 것이나 넘어지는 것이 자기 주인에게 있으매 그가 세움을 받으리니 이는 그를 세우시는 권능이 주께 있음이라”(4)

믿음으로 사는 자는 믿음이 적든 많든 하나님이 받으셨기 때문에 서로 판단할 수 없습니다. 그들이 넘어지고 서는 것이 하나님께 있습니다. 그들의 믿음을 세워 주시는 분도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채식하는 자도 받으셨고 육식하는 자도 받으셨습니다. 하나님은 안식일을 지키는 자도 받으셨고 주일을 지키는 자도 받으셨습니다.
다윗이 성전에서 진설병을 먹은 것을 하나님이 받으셨는데 사람들이 그것을 판단할 수 없습니다. 제자들이 안식일에 밀 이삭을 잘라 먹은 것을 하나님이 받으셨는데 바리새인들이 판단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우리도 하나님이 받으신 사람을 영접해야 합니다.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을 판단하는 것은 주님을 판단하는 것입니다. 그를 서게 하는 분도 하나님이시고 넘어지게 하시는 분도 하나님이십니다. 그를 세우시는 권능이 주님께 있습니다. 우리가 판단하는 사람이 하나님의 하인입니다. 외국인을 모욕하면 그 나라를 모욕하는 것입니다. 자녀를 비난하면 그 부모를 비난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하인을 판단하는 것은 하나님을 판단하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예수님을 못질하는 것이요. 창으로 찌르는 것입니다. 우리는 판단하는 악한 행동을 할 때 예수님이 얼마나 고통스러워하는가를 알고 판단을 그쳐야 합니다.

(자기 마음에 확정하라)

“혹은 이 날을 저 날보다 낫게 여기고 혹은 모든 날을 같게 여기나니 각각 자기 마음에 확정할찌니라.”(5)

유대기독교인들은 안식일을 중시하고 이방 기독교인은 주일을 중시합니다. 안식교는 안식일을 지켜야 구원을 받는다고 하고 다른 기독교인은 주일을 지켜도 구원을 받는 데 문제가 없다고 합니다. 안식교는 목숨을 내놓고 이를 위해서 싸웁니다. 안식교는 안식일을 지키기 위해서 군대에 가서도 안식일에 일을 하지 않다가 영창을 가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런 것은 본질적인 것이 아닙니다. 날이라는 것은 해가 도는 것을 인간 중심으로 나눈 것에 불과합니다.
어떤 분은 꼭 주일 오전 열한 시에 예배를 드려야 주일예배라고 인정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우리는 비본질적인 것에 목숨을 걸 필요는 없습니다. 구원과 연관이 없는 것이 비본질적인 것입니다. 이것은 각자의 마음에 따라서 확정함녀 됩니다.
그러나 우리는 본절적인 것은 목숨을 걸고 싸워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의 복음을 변질시키는 율법 신앙과 목숨을 걸고 싸웠습니다. 할례로 구원을 받는다고 주장하는 사람들과 심하게 다투고 예루살렘 교회까지 다녀왔습니다. 야고보는 거짓 믿음으로 행함이 없는 자는 죽은 믿음이요 귀신과 같은 믿음이라고 싸웠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믿음과 관계없을 때는 할례하는 문제까지도 양보하고 할례를 하도록 하였습니다. 디도는 할례를 하지 않게 도왔고 디모데는 할례를 하게 도왔습니다.

(주를 위해서 사는 것)

“날을 중히 여기는 자도 주를 위하여 중히 여기고 먹는 자도 주를 위하여 먹으니 이는 하나님께 감사함이요, 먹지 않는 자도 주를 위하여 먹지 아니하며 하나님께 감사하느니라.”(6)

본문에 ‘주를 위하여’라는 말이 5번 그리고 ‘자기를 위하여’ 라는 말이 2번 반복되어 나옵니다. 여기서 사도 바울은 먹고 날을 지키는 목적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삶의 목적을 주님께 두고 살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의 피로 우리를 당신의 소유로 사셨습니다. 우리는 주의 것입니다. 우리는 먹어도 주를 위하여 먹고, 먹지 않아도 주를 위하여 먹지 말아야 합니다. 토요일에 모여도 주를 위한 것이고 주일날 모여도 주를 위한 것입니다. 우리가 자기를 위하여 산다면 책망받을 것이나 주님을 위하여 산다면 감사한 일입니다.
우리는 주를 위하여 산다는 목적 아래 우리의 행위에 자유함이 있어야 합니다. 주를 위한다면 꼭 살아야 주를 위한 것이 아니고 죽어도 주를 위한 것입니다. 우리가 진정 주를 위한다면 우리나라 사람과 결혼할 수도 있지만 다른 나라 사람과도 결혼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진정 주를 위한다면 흑인과 결혼할 수도 있지만 백인과도 결혼할 수 있어야 합니다. 주를 위한다면 모든 것이 자유하고 감사한 것입니다. 먹어도 감사하고 먹지 않아도 감사합니다. 주를 위하여 산다면 누구도 판단할 수 없습니다.

(주님 안에서 자유한 삶)

우리가 주를 위해서라면 그 안에서 자기가 확정해야 합니다. 바울은 획일적으로 확정하지 않고 다양하게 판단하라고 하였습니다. 모든 면에서 자유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귀걸이를 할 수도 있지만 귀걸이를 하지 않을 수도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찢어진 바지를 입을 수도 있지만 또 찢어지지 않은 바지를 입을 수도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머리에 염색을 할 수도 있어야 하지만 염색을 하지 않을 수도 있어야 합니다.
중요한 것은 주님을 위해서 어느 것이 유익하느냐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을 위한다는 전제만 있으면 너무 사소한 것에 목숨을 걸 필요가 없습니다. 이는 마치 우리 조상들이 제사상에서 과일을 먼저 놓느냐 탕을 먼저 놓느냐를 가지고 싸우는 것과 같습니다. 과일도 빨간 과일이나 하얀 과일을 어디에 놓느냐 위치를 따지며 언성을 높입니다. 우리가 이런 것을 보면 우습게 보입니다.
그러나 우리도 이런 오류를 범하는 것입니다. 중세에 러시아에서는 십자가의 성호를 어느 쪽에서 먼저 긋느냐를 가지고 백 년을 싸웠다고 합니다. 그러다가 러시아에 공산주의 혁명이 일어난 것입니다. 대부분의 ubf가 십자가를 달지 않았지만 우리가 십자가를 달 수도 있습니다. 주일에 축구를 하지 않을 수도 있지만 양들의 믿음을 위하여 축구를 할 수도 있습니다. 축구를 하느냐 하지 않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어느 것이 주님을 위한 것이냐가 중요한 것입니다. 우리는 이 모든 것에 감사해야 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피로 산 고귀한 자)

“우리 중에 누구든지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고 자기를 위하여 죽는 자도 없도다.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라. 이를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죽었다가 다시 살으셨으니 곧 죽은 자와 산 자의 주가 되려 하심이니라.”(7-11)

우리는 자기를 위해서 살아도 안 되고 자기를 위해서 죽어도 안 됩니다. 우리는 살아도 주를 위해서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해서 죽습니다. 우리는 사나 죽으나 주님의 것입니다. 우리가 왜 주님을 위해서 살아야 합니까? 주님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창조하신 피조물입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위하여 죽었다가 살아나셨습니다. 십자가의 피로 우리를 값 주고 죄에서 사셨습니다. 우리는 나의 것이 아니요 주님의 것입니다. 예수님은 산 자와 죽은 자의 주님이 되셨습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하나님의 소유인 우리는 자신을 위해서 살지 말고 하나님을 위해서 살아야 합니다. 우리가 주를 위해서 산다면 아무도 우리를 판단할 수 없습니다.

(우리를 심판하시는 주님)

“네가 어찌하여 네 형제를 판단하느뇨? 어찌하여 네 형제를 업신여기느뇨? 우리가 다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리라. 기록되었으되 주께서 가라사대 내가 살았노니 모든 무릎이 내게 꿇을 것이요, 모든 혀가 하나님께 자백하리라. 하였느니라. 이러므로 우리 각인이 자기 일을 하나님께 직고하리라.”(11,12)

우리를 오직 판단하시는 분은 주님이십니다. 하나님이 재판장입니다. 우리는 모두가 재판장이 아니라 피고들입니다. 피고인 사람이 다른 사람을 판단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간음한 여인을 판단하는 사람들에게 죄 없는 자만 돌을 던지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같은 죄인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목자도 부모도 사장도 교수도 다 죄인입니다. 죄인은 판단하는 자가 아니라 판단받는 자입니다. 우리는 다 재판장이신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고 심판을 받을 것입니다. 오직 판단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죄 없으신 예수님도 우리를 정죄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대신하여 정죄받으시고 우리를 자유케 해주셨습니다. 예수님도 우리를 판단하지 않으셨는데 우리가 남을 어떻게 판단합니까? 우리는 남을 판단하지 말고 남의 판단으로 의기소침하지 말고 자신도 자책하지 말아야 합니다. 물론 다른 사람들이 내게 하는 말을 참고해야 하지만 그것으로 자신을 판단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오직 주님의 심판을 두려워하고 주님의 긍휼을 구해야 합니다. 죄인들을 긍휼히 여겨야 합니다. 죄를 용납하라는 것은 아닙니다. 죄에 대해서 미워해야 합니다. 모세는 죄지은 사람들을 위해서 기도하였습니다. 자신이 생명책에서 지워지더라도 그들의 죄를 용서해 달라고 기도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회개치 않을 때 레위인들에게 칼을 차고 죽이라고 하였습니다. 우리는 서로 판단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판단만을 구해야 합니다. 그러나 죄에 대해서 분노할 수 있어야 합니다.

로마서 14장 강해 일부. 형제를 비판하지 말라
로마서 14장 1-로마서 14장 12
요절 로마서 14장 1 “믿음이 연약한 자를 너희가 받되 그의 의견을 비판하지 말라”
로마서 14장 강해 일부 끝.


로마서 14장 강해 이부.
성령 안에 있는 하나님의 나라
로마서 14장 13-로마서 14장 23
요절 로마서 14장 17절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

지금까지 사도바울은 형제를 비판하지 말고 받으라고 하였습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죄인임을 인정하고 서로를 불쌍히 여겨야 합니다. 이제 사도바울은 다른 사람에게 덕을 세우는 행위를 믿음으로 하라고 말씀하십니다. 더 나아가 우리가 중시할 것은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라 성령 안에 있는 하나님 나라라고 말씀하십니다.

(형제를 거치게 하는 것)

“그런즉 우리가 다시는 서로 판단하지 말고 도리어 부딪힐 것이나 거칠 것으로 형제 앞에 두지 아니할 것을 주의하라. 내가 주 예수 안에서 알고 확신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스스로 속된 것이 없으되 다만 속되게 여기는 그 사람에게는 속되니라.”(13,14)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자유합니다. 그러나 모든 것이 자유한 것이 아닙니다. 내가 한 행동으로 다른 사람이 실족한다면 우리는 그 자유의 제한을 받아야 합니다. 우리는 나의 행동으로 다른 사람이 부딪히거나 거치면 그것을 하지 말아야 합니다. 부딪히는 것은 장애물이고 거치는 것은 덫을 말합니다. 우리의 행동으로 다른 사람이 불신에 빠져서 목숨을 잃게 하지 말라는 말입니다. 무엇이든지 스스로 속된 것은 없습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이 속되게 여기면 그 사람에게 속됩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이 속되게 여긴다면 그것을 하지 않을 수 있어야 합니다. 나의 행동으로 형제가 근심한다면 우리는 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항상 약자를 배려해야 합니다. 선진국이 될수록 약자를 배려하는 사회가 되는 것입니다. 내가 술을 먹어서 다른 사람이 불신에 빠진다면 나는 전혀 술을 먹지 말아야 합니다.

(음식으로 근심케 하는 사람들)

“만일 음식으로 말미암아 네 형제가 근심하게 되면 이는 네가 사랑으로 행하지 아니함이라 그리스도께서 대신하여 죽으신 형제를 네 음식으로 망하게 하지 말라 그러므로 너희의 선한 것이 비방을 받지 않게 하라”(15,16)

우리의 형제는 예수님이 십자가에 피 흘려 죽으신 귀한 형제입니다. 우리는 형제를 귀히 여겨야 합니다. 형제를 실족시키는 것은 그를 연자 맷돌을 목에 걸고 바다에 던져 죽이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는 나의 행동이 다른 사람에게 근심을 주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우리는 술을 먹을 수 있는 자유가 있습니다. 저혈압일 때는 술을 조금 먹는 것이 좋습니다. 술을 먹는 것이 선한 것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술을 먹는 선한 것이 다른 사람의 비방을 받을 수 있습니다. 과도하게 술을 먹어서 다른 사람이 고통한다면 우리는 술을 먹지 말아야 합니다. 술을 먹어서 일을 그르치는 경우도 있습니다. 바바라 톰슨이 쓴 한 잔 술로 죽어 간다는 책을 보면 방화와 익사 사고의 80%가 술 때문이고 자살사고의 30%가 술 때문이라고 합니다. 알코올중독이 되면 인격이 파괴되고 가정이 깨지고 급기야 생명이 위독할 수도 있습니다. 이렇게 술이 해를 끼친다면 술을 먹지 말아야 합니다. 특히 음주 문화가 잘못된 한국적인 전통에서는 술을 금하는 것이 좋습니다. 조선 장로교 7대 강령 가운데 일곱째 강령이 금주 금연입니다. 금주 금연을 하지 못하는 자는 장로로 세우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자기 율법으로 범죄케 하는 사람들)

우리는 금식을 할 수 있는 자유가 있습니다. 다른 사람에게 금식을 권유할 수도 있는 자유가 있습니다. 그러나 지나친 금식 명령을 만들어서 다른 사람을 죄짓게 해서는 안 됩니다.
사울은 전쟁하여 한창 승리하는 중에 금식 명령을 내렸습니다. 이로 인해서 전쟁의 영웅인 요나단이 꿀을 먹고 죄를 짓게 되었습니다. 백성들은 소를 집아 피째 먹어서 죄를 짓게 되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안식일에 걸을 수 있는 거리, 들고 갈 수 있는 무게, 또 할 수 있는 일의 종류를 제한하므로 죄를 짓게 했습니다. 손을 씻는 것, 목욕하는 자질구레한 규례를 만들어 사람을 구속하였습니다. 제자들이 손을 씻지 않고 금식을 하지 않았다고 정죄를 하였습니다.
우리는 가능한 한 자기 율법을 버려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다른 사람에게 자유를 주어야 합니다. 우리가 어린 사람을 많은 율법으로 막는다면 오히려 사람을 주눅 들게 하기 쉽습니다.
어떤 집에는 아들과 딸들에게 주는 이십 계명을 적어 놓았습니다. 그러나 그 자녀들은 오히려 반발심으로 더 삐뚤게 나가는 것을 보았습니다. 우리는 처음 예수님을 믿는 사람에게 무엇을 하지 말고 무엇을 하라는 것을 가르쳐야 합니다. 신앙이 어린 사람은 자립심이 없어서 율법을 가르치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래야 예수님을 배웁니다. 주일예배에 참석하고 기도하고 말씀 보는 것을 가르쳐야 합니다. 그러나 신앙이 성장하면 자율적으로 판단하고 행하게 해야 합니다.
예수님을 아는 사람에게도 지속적으로 율법적인 행위를 가르치면 그것이 거치는 것이 됩니다. 성도들은 답답해하고 자라지 못하게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에서 자유를 주어야 합니다. 부부들이 결혼하여 같이 살다 보면 생각이 많이 다릅니다. 어떤 사람은 깨끗이 치우는 것을 좋아하는데 어떤 사람은 그냥 늘어 놓고 쓰는 것을 좋아합니다. 어떤 사람은 발수건이 꼭 있어야 하는데 어떤 사람이 없어도 삽니다. 어떤 사람은 짜게 먹고 어떤 사람은 싱겁게 먹습니다. 어떤 사람은 조미료를 많이 넣은 음식을 좋아하고 어떤 사람은 조미료 없는 칼칼한 것을 좋아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런 것으로 서로를 제약하지 말아야 합니다. 서로 상대성을 인정하고 자유를 주어야 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죽은 형제라는 것을 알고 서로를 존중히 여겨야 합니다.

(우리에게 더 중요한 하나님 나라)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17)

이 말씀은 성경에서 아주 중요한 말씀입니다. 우리가 정말 중요시해야 할 것은 무엇입니까?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이런 비본질적인 율법을 하지 말라는 것이 아닙니다. 먹고 마시는 것이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마음속에 하나님 나라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우리의 가정과 교회와 학교와 직장에 하나님 나라를 만드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를 만드는 것이 하나님의 강한 소원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신 이유도 하나님 나라를 만들기 위해서입니다. 우리도 하나님 나라가 이 땅에 이루어지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 나라는 성령이 다스리는 세계입니다. 성령님이 우리를 다스릴 때 우리는 의로움이 생기고 사람들과 평화하고 마음에는 기쁨이 있습니다. 의는 하나님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고 사랑하시고 자랑스럽게 여기는 것입니다. 십계명을 지키는 것입니다. 화평은 다른 사람들과 평화롭게 지내는 것입니다. 희락은 나 자신이 기쁨을 얻는 것입니다. 우리는 의와 평강과 희락의 깃발이 있으면 그곳이 성령이 다스리는 하나님 나라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런 성령이 다스리는 나라가 임하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성령을 따라서 사는 삶)

우리가 이런 하나님 나라를 누리기 위해서는 성령을 따라 사는 것이 중요합니다. 우리는 성령 충만함을 받아야 합니다. 우리가 성령님을 기쁘게 하는가? 성령님을 근심케 하지는 않는가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성령으로 육의 행실을 죽여야 합니다. 예수님처럼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기도를 드려야 합니다. 우리는 성령님 안에서 진정한 행복을 누려야 합니다. 이런 사람이 신앙생활을 잘하는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마음속에 성령님을 소멸시키고 있는지 성령님을 근심시키고 화나게 하는지 아니면 성령님이 충만한지 여기에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성령님을 존중히 여기고 경외해야 합니다. 성령님을 무시하는 죄악이 가장 큰 죄입니다.
우리는 성령님 안에서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섬겨야 합니다. 예수님을 왕으로 경외해야 합니다. 나와 돈과 쾌락의 우상을 버려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는 더욱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자유합니다. 예수님은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영이 있는 곳에 자유가 있다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마음에 성령님 안에 있는지 아닌지 이런 것은 사람들의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성령 안에 없으면서도 주일예배에 올 수 있습니다. 성령님 안에 없으면서도 새벽기도에 올 수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성령님을 소홀히 여길 수 있습니다. 우리는 겉에 나타나는 행동보다 속에 있는 성령님을 살펴보아야 합니다. 그 마음속에 있는 성령님이 없으면 믿음을 도와 성령 충만하도록 도와야 합니다. 우리는 이것을 가장 힘써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 나라를 누릴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를 섬기는 자)

“이로써 그리스도를 섬기는 자는 하나님께 기뻐하심을 받으며 사람에게도 칭찬을 받느니라.”(18)

이렇게 성령으로 그리스도를 섬기는 사람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고 사람에게도 인정을 받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으려면 그리스도를 섬겨야 합니다.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섬겨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나의 마음 깊은 곳에 숨은 죄를 회개해야 합니다. 진실되게 죄를 회개해야 합니다. 마음 깊은 곳에서 하나님을 사랑해야 합니다. 예수님을 나의 그리스도요 하나님의 아들로 고백해야 합니다. 그러면 성령의 충만함을 받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성령의 인도를 받으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사람들에게도 칭찬을 받을 수 있습니다.

(교회의 덕을 세우는 삶)

“이러므로 우리가 화평의 일과 서로 덕을 세우는 일을 힘쓰나니 식물을 인하여 하나님의 사업을 무너지게 말라.”(19,20a)

우리는 모든 일에 자유를 갖고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자유를 쓸 때 원칙이 있습니다. 다른 사람과 화평하는 일을 하고 덕을 세우는 일을 해야 합니다. 교회의 유익을 추구해야 합니다. 나의 행동으로 하나님의 사업을 무너지게 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나의 모든 행동이 하나님의 사업을 세우는 데 힘을 써야 합니다. 무너뜨리는 것은 잠깐이지만 세우는 것은 어려운 일입니다. 하나님의 사업을 무너뜨리는 것은 많은 사람을 죄에 빠지게 하는 심각한 죄입니다. 서로 판단하고 싸우면 하나님의 사업을 무너뜨립니다.

(형제를 배려하는 것)

“만물이 다 정하되 거리낌으로 먹는 사람에게는 악하니라. 고기도 먹지 아니하고 포도주도 마시지 아니하고 무엇이든지 네 형제로 거리끼게 하는 일을 아니함이 아름다우니라”(20b,21)

만물이 다 깨끗합니다. 그러나 거리낌으로 그것을 먹는다면 그것은 악합니다. 만약에 고기나 포도주를 먹어서 교회에 성도들이 거리낀다면 포도주도 고기도 먹지 말아야 합니다. 성도들이 양심에 가책을 받는다면 아무리 맛있는 고기가 있어도 먹지 말아야 합니다. 성도에게 상처를 주지 말아야 합니다. 형제를 배려하는 것이 아름다운 것입니다.
공동생활하면서 우리는 발을 안 닦고 잠을 잘 수 있는 자유가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발을 닦지 않아서 다른 사람에게 냄새를 피우고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준다면 발을 닦아야 합니다. 우리는 외출한 후에 와서 손을 닦지 않고 음식을 먹을 수 있는 자유함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을 보고 어린 사람이 상처를 받는다면 우리는 손을 닦아야 합니다. 우리는 공동 생활할 때 자신의 양말이 없어서 다른 사람의 양말을 신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다른 사람이 이로 인하여 실족한다면 맨발로 다녀도 다른 사람의 양말을 신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방안을 어질러 놓아도 살 수 있는 자유함이 있지만 다른 사람이 문제에 빠진다면 방을 치울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귀걸이를 하거나 미니스커트를 입을 수 있는 자유가 있습니다. 하지만 나로 인하여 다른 형제들이 정욕문제로 넘어진다면 교회에 올 때는 단정하게 입고 올 수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 삶의 원칙입니다.

(믿음으로 사는 자의 행복)

“네게 있는 믿음을 하나님 앞에서 스스로 가지고 있으라. 자기의 옳다 하는 바로 자기를 책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22)

우리가 공동체의 덕을 세우다가 자신의 확신을 잃어버려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음식을 먹거나 날짜를 지키는 문제에 대해서 스스로 판단할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믿음으로 고기를 먹지 않거나 채식만 하겠다고 결정할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나는 고기를 먹으며 힘을 내며 주님을 섬기겠다고 결정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어떤 결정을 할 때도 스스로 확신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죄책감을 느끼면서 해서는 안 됩니다. 자신의 옳다 하는 것으로 자신을 책망하지 않는 자는 행복한 사람입니다. 우리는 자신의 확신이 있는 대로 살아야 합니다. 확신을 갖고 사는 사람이 행복한 사람입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살아야 행복합니다.

(모든 것을 믿음으로)

“의심하고 먹는 자는 정죄되었나니 이는 믿음으로 좇아 하지 아니한 연고라 믿음으로 좇아 하지 아니하는 모든 것이 죄니라.”(23)

우리는 자신이 하는 그것에 대해서 의심해서는 안 됩니다. 먹으면서도 의심하면 죄입니다. 먹지 않으면서도 의심하면 죄입니다. 이렇게 의심이 들면 하지 말아야 합니다. 꺼림칙하면 하지 말아야 합니다. 의심하는 자는 심판을 받습니다. 믿음으로 하지 않고 의심하는 자는 모든 것이 죄입니다.
우리는 확신을 갖고 행하며 다름 사람의 말에 너무 휩쓸리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가 덕을 세우려고 하다가, 너무 다른 사람을 의식하다가 자신의 믿음을 잃어버려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모든 일을 믿음으로 해야 합니다. 믿음이 확고한 상태에서 다른 사람을 배려해야 합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믿는 일에 힘을 써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일을 해야 합니다.
어떤 아버지와 아들이 나귀를 끌고 갔습니다. 사람들이 ‘왜 나귀를 끌고 가느냐 타고 가지’ 하니 아버지가 타고 아들은 걷게 했습니다. 아들이 걷고 아버지가 타고 가니 또 어떤 사람이 어린 아이를 걷게 하느냐 아버지가 걸어야지 하니 아들을 태우고 아버지가 걸었습니다. 또한 어떤 사람이 아버지가 걸어가고 아이를 태우느냐 불효자라고 하니 아버지와 아들이 둘 다 나귀를 타고 갔습니다. 또 어떤 사람이 둘이 나귀를 타고 가니 나귀가 불쌍하다고 하니 나귀를 장대에 꿰어 어깨에 메고 갔습니다. 우리가 너무 다른 사람의 말이나 다른 사람을 신경 쓰다 보면 그렇게 됩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의 의견을 존중하고 덕을 구하되 하나님 안에서 자신의 믿음을 잃지 말아야 합니다. 자신의 믿음을 가지고 남을 배려해야 합니다.

(성령님을 경외하는 삶)

결론적으로 우리는 남을 판단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나도 자유를 얻고 다른 사람도 자유를 주어야 합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의 자유를 위하여 믿음 안에서 나의 자유를 제한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이런 판단보다 하나님 나라를 구해야 합니다. 하나님 나라는 성령 안에서 이루어집니다. 우리는 성령 충만함을 구하고 그 안에서 죄사함과 평화와 기쁨을 누려야 합니다. 성령님을 경외해야 합니다. 우리가 성령 안에서 하나님 나라를 구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아멘!

로마서 14장 강해 이부. 성령 안에 있는 하나님의 나라
로마서 14장 13-로마서 14장 23
요절 로마서 14장 17절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
로마서 14장 강해 이부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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