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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주의 대학생 선교기관

천안UBF

성경66권강해서

로마서 13장 강해 그리스도의 갑옷을 입자

작성자 : 오요한
작성일 : 2013-02-04 00:00:00
조회수 : 3,841

문제지풀이(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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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서 13장 강해 일부.
위에 있는 권세에게 복종하라
로마서 13장 1-로마서 13장 7
요절 로마서 13장 1절 “각 사람은 위에 있는 권세들에게 복종하라 권세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지 않음이 없나니 모든 권세는 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바라”

어제 천안 유랑동 생태찌개를 먹었습니다. 오후 1시 넘어서 갔는데 사람들이 가득차서 30분을 기다려 식사를 하였습니다. 우리가 식사하고 나올 때는 2시 반인데 그때까지 빈자리 없이 손님들이 모여들었습니다. 그곳에는 생태찌개 한 가지만 팔았습니다. 반찬도 김치 한 가지이고 후식으로 커피도 주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오직 생태찌개 하나에 음식점을 걸었는데 성공하였습니다.
요즘 기독교 전도에서 한계를 느끼며 새로운 프로그램을 많이 도입합니다. 그러나 사실 중요한 기독교의 문제는 교회가 복음의 맛을 내지 못하는 것입니다. 교회가 예수 그리스도의 맛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교회가 예수 그리스도의 맛을 내는 하나님 나라를 이룰 때 교회에도 사람들이 모여들 것입니다.
오늘 로마서 13징 말씀은 그리스도인의 국가 생활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말합니다. 신자들이 이 세상에서 어떻게 맛을 내는 사회생활을 할 수 있는지를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권세에 복종하는 삶)

“각 사람은 위에 있는 권세들에게 복종하라 권세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지 않음이 없나니 모든 권세는 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바라”(1))

위에 있는 권세에 복종하라는 이 말씀에 약간 거부반응이 들 수 있습니다. 우리가 잘못된 권위를 많이 보아 왔기 때문에 이 말씀에 거부반응이 듭니다. 일본 제국주의자들의 권위. 해방 직후의 독재자의 권위, 부정부패로 얼룩진 권위, 그리고 가정에서 폭력을 행사하시는 아버지의 권위, 직장에서 노동력을 착취하는 고용주의 권위, 그리고 학교에서 폭력적인 선생님의 권위 이런 것들이 우리에게 권위에 대해서 반발하게 합니다.
그러나 바울은 각 사람은 위에 있는 권세에 복종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권위는 다 하나님으로부터 난 것입니다. 모든 권위는 하나님이 정하신 것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이 권위를 주신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순종한다면 하나님이 세우신 권위에 순종해야 합니다. 우리는 사람의 권위에 순종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므로 하나님이 상을 주실 것입니다.

(하나님을 거스르는 죄)

“그러므로 권세를 거스르는 자는 하나님의 명을 거스름이니 거스르는 자들은 심판을 자취하리라”(2)

권위는 하나님에게서 난 것입니다. 권위를 주신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권위를 거스르면 하나님의 명을 거스르는 것입니다. 이들은 하나님께 불순종하는 것이므로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됩니다. 독재정부도 인정해야 할까요? 무정부 시대보다는 독재정부가 낫습니다. 하나님은 독재정부도 허락하십니다. 하나님은 독재정부도 사람들의 악을 징계하시기 위해서 허용하십니다. 하나님이 그 권위를 이용하여 우리를 훈련하고자 허용하신 것입니다. 권위는 역기능도 있지만 순기능도 있습니다.
요한복음 19장 11절에서 예수님은 로마의 권위에 순종하였습니다. 빌라도의 권위에 순종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셨습니다. 하나님이 위에서 로마에 주신 권위를 인정하셨습니다. 옳지 않은 권위에 우리는 복종하지만 그 권위를 지지해서는 안 됩니다. 거기에 동참해서는 안 됩니다. 잘못을 비판할 수 있어야 합니다.
본히퍼는 히틀러의 조직에 대해서 반발하였습니다. 광란의 질주를 하는 운전자가 있다면 그를 끌어내야 한다고 말하였습니다. 우리는 선지자의 눈으로 잘못된 권위를 비판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간디와 같이 비폭력 저항운동을 해야 합니다. 로마의 권위를 인정한다고 친로마적인 사람이 되라는 말은 아닙니다. 옥한음목사가 노태우 정부 때 조찬기도회 참석하여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노태우 씨가 요즘에는 회개하고 변화되었습니다. 세례요한은 불의한 죄악에 대해서 불의하다고 말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권위에 복종하여 죽었습니다. 예수님도 종교지도자들을 독사의 자식이라고 책망하시다가 그 권위에 순종하여 십자가에 죽으셨습니다.

(권위에 대한 경외심)

“다스리는 자들은 선한 일에 대하여 두려움이 되지 않고 악한 일에 대하여 되나니 네가 권세를 두려워하지 아니하려느냐 선을 행하라 그리하면 그에게 칭찬을 받으리라”(3)

하나님은 다스리는 자에게 심판의 권위를 주셨습니다. 다스리는 자들은 선한 일을 하는 자들에 대해서 두려움을 심지 않습니다. 악한 일을 하는 자를 두렵게 합니다. 하나님은 악한 일을 행하는 자에게 악한 지도자를 징계의 도구로 주십니다. 권위자는 선을 행하는 자는 상을 주십니다. 하나님은 권위자를 통하여 우리의 죄와 선에 대해서 심판하십니다. 우리가 악할 때는 악한 지도자를 주어 징벌합니다. 선할 때는 선한 지도자로 우리를 축복합니다. 우리는 지도자 뒤에 계시는 하나님을 보아야 합니다. 그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권위를 두려워하고 악을 행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적극적으로 선을 행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며 믿음으로 살아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우리에게 선한 지도자를 주어 상을 주실 것입니다.

(권위자는 하나님의 사역자)

“그는 하나님의 사역자가 되어 네게 선을 베푸는 자니라 그러나 네가 악을 행하거든 두려워하라 그가 공연히 칼을 가지지 아니하였으니 곧 하나님의 사역자가 되어 악을 행하는 자에게 진노하심을 따라 보응하는 자니라”(4)

사도 바울은 권위자는 ‘하나님의 사역자’라고 말을 합니다. 하나님의 사역자는 두 가지 면이 있습니다.
첫째는 심판의 도구입니다. 하나님은 권위자에게 칼을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악을 행하는 자에게 진노하십니다. 하나님은 사역자를 통하여 진노하십니다. 하나님은 권위자를 죄를 심판하시는 도구로 사용하십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죄를 지었을 때 앗수르와 바벨론을 통하여 징계하셨습니다. 우리가 악을 행한다면 권위자를 두려워해야 합니다. 권위자 뒤에 계신 하나님을 두려워해야 합니다. 권위자가 공연히 칼을 가진 것이 아닙니다. 그는 악을 행하는 자에게 심판하기 위해서 칼을 가진 것입니다.
둘째는 권위자는 상을 주는 자입니다. 하나님의 사역자로서 선을 베푸는 자입니다. 하나님은 선을 행하는 자에게는 선한 권위자를 세우사 상을 주십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믿음으로 살면 좋은 지도자를 주어서 우리를 복 주실 것입니다. 우리가 선을 행한다면 권력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비록 우리가 선을 행하다가 권위자에 의해서 죽는다 할지라도 우리는 천국에 가서 상을 받을 것입니다. 세례요한은 헤롯에 의해서 죽임을 당했지만 하나님은 세례요한에게 큰 상을 주실 것입니다.

(권위자에 순종한 사람들)

오늘 말씀에 어느 정도 공감하십니까? 저도 솔직히 이 말씀을 보면서 어쩐지 마음속에서 반발이 일어나는 것을 어쩔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 말씀을 묵상하며 이 말씀의 좀 더 깊은 뜻을 알게 되었습니다.
구약에 보면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범죄하면 주위에 강대국인 바벨론이나 앗시리아를 통해서 징계하십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공경하면 이웃 나라를 통해서 조공을 받게 하십니다. 결국 이웃 나라의 권력은 하나님의 몽둥이나 상급이고 이웃 나라를 움직이고 계신 분은 바로 하나님이심을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은 신약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신약시대에 이스라엘은 로마의 옥타비아누스가 권력을 잡고 있었습니다. 그는 천하로 다 호적하라고 명령을 내렸습니다. 식민지 이스라엘 국가에게 세금을 거두기 위해서입니다. 이에 순종해야 합니까? 말아야 합니까? 예수님의 부모님들은 이 호적 명령에 순종했습니다. 놀라운 것은 그때 메시야가 베들레헴에서 태어난다는 하나님의 말씀이 성취되었다는 것입니다. 결국 이 명령을 내리도록 말씀하신 분도 하나님이심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도 권위에 순종하는 것을 반발하시는 분이 있을까 봐 우리 예수님의 경우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예수님이 왜 십자가에 죽으셨습니까? 예수님이 로마의 법에 순종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얼마든지 열두 영이나 되는 천사를 보내어 로마의 권위를 깨뜨릴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하나님이 로마에 권세를 주신 것을 알고 그 권위에 순종하여 십자가에 죽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친히 가이사에게 세금을 내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가이사의 권위를 인정해 드렸습니다. 우리도 부당한 권위로 명령하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런 때 그들을 세우신 사랑의 하나님을 보고 순종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부당한 권위를 통하여 우리의 내면을 훈련하십니다. 그리고 순종하는 사람에게 복을 주실 것입니다. 우리가 순종하는 사람이 되어야 정상적인 맛을 내는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습니다. 그 권위자가 우리에게 감동을 받고 변화될 수 있습니다. 잘못된 권위자는 하나님이 심판할 것입니다. 다윗은 사울을 세우신 하나님의 권위를 인정하고 순종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다윗을 훈련하여 하나님의 때에 왕으로 세우셨습니다.

(순종할 수 없는 권위)

그렇다고 우리가 다 순종하라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순종할 수 없는 것이 있습니다. 특히 십계명에 금지되어 있는 것을 시킬 때는 순종할 수 없습니다. 국가가 우상에게 절하라고 하고 부모님이 조상신에게 절하라고 하면 절을 할 수 없습니다. 아무리 부모님이라도 예수 믿지 말라고 말씀하시면 그것은 죽음을 각오하고 순종할 수 없는 것입니다. 십계명에 어긋나는 것은 순종할 수 없습니다.
한 목동이 이번 설에 제사상에 절을 하지 않기로 결단했는데 이는 큰 믿음입니다. 바벨론의 느브갓네살 왕은 자신의 신상을 만들고 모든 사람에게 절하라고 하였습니다. 절하지 않으면 극렬히 타는 풀무불에 집어넣겠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는 이에 복종치 않고 뜨거운 풀무 불에 들어갔습니다. 일제시대 공산당 통치 하에서 많은 사람이 순교를 당한 것도 바로 그 때문입니다.
우리가 권위자에게 순종한다고 해서 하나님께서 부당한 권세에 순종하는 것은 아닙니다. 사도행전에 보면 종교지도자들은 말씀을 전하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너희 말을 듣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보다 옳은가 생각해 보라고 말하며 순종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뜻에 상반되는 명령은 순종하지 않아도 됩니다. 룻은 나오미가 자신을 떠나 모압신을 따라가라고 하였을 때 따라가지 않았습니다. 먼저 하나님께 복종하고자 하였습니다.

(하나님이 심판하시는 부당한 권위)

우리가 부당하게 세워진 권위에 순종하면 부당한 권위는 계속 잘못을 범할 것이 아닙니까? 라고 반문할 수 있습니다. 성경은 부당한 권위에 대해서 하나님이 친히 심판하신다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앗수르나 바벨론이 교만하여 아스라엘에 대해서 무자비하게 행했을 때 그들을 또한 심판하셨습니다.
사울이 계속하여 다윗에게 악을 행했을 때 다윗은 사울을 세우신 하나님을 경외하고 심판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블레셋을 통하여 사울을 심판하였습니다. 사무엘이 엘리에게 순종하였습니다. 우리는 순종을 배워야 인격이 형성됩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자로 빚어집니다. 그러나 잘못된 권위는 하나님이 친히 심판하십니다. 하나님은 엘리를 친히 심판하셨습니다. 따라서 권세를 가진 자는 그 권세가 자신의 권세가 아닌 하나님이 주신 권세임을 인식하고 두렵고 떨림으로 권위를 행해야 합니다. 권력을 남용하거나 악용해서는 안 됩니다.

(십자가에서 나오는 권위)

우리 권위를 가진 남편분이나 부모님들이나 윗분들에게 물어보겠습니다. 자신의 권위 아래 있는 분들이 말을 안 들으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폭력을 행사해야 합니까? 큰소리를 쳐야 합니까? 아니지요? 예수님은 어떻게 하셨습니까? 예수님은 불순종하는 자들을 섬기시고 이들을 위해서 십자가에서 목숨까지 버리셨습니다.
요즘 한국에 이혼율이 많은 이유는 남편들이 쓸데없는 권위주위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입니다. 앉아서 물 떠와라, 숟가락 줘라. 손톱깎이 가져와라 어깨 주물러라 말을 하기 때문입니다. 옛날 여자들은 한이 맺혀 살았지만 지금 사람들은 그렇게 살아가지 않습니다. 자녀들 가운데 아버지에 대한 미움이 그렇게 많은 이유도 바로 아버지들의 잘못된 권위 때문입니다. 이는 오랜 일제의 권위주의, 유교의 권위주의 그리고 군사정권의 권위주의에 영향을 받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권위를 가진 자는 바른 권위를 행사하고 겸손히 이해와 용서와 사랑에서 나오는 권위를 가져야 합니다. 섬기는 리더십을 가져야 합니다. 아버지는 그 아들을 노엽게 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친히 하나님께서 권위를 가진 자들을 심판하실 것입니다.

(양심을 따라서 하는 복종)

“그러므로 복종하지 아니할 수 없으니 진노 때문에 할 것이 아니라 양심을 따라 할 것이라”(5)

여기서는 복종하는 단계를 넘어서서 더 큰 것을 요구하십니다. 양심을 인하여 하라고 말씀합니다. 양심으로 하라는 것은 눈가림으로만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마음으로 순종하라는 것입니다.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을까요? 예수님을 생각하면 가능합니다. 그들에게 권위를 주신 분이 우리를 위해서 목숨을 버리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신 그리스도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우리를 사랑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자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믿을 때 순종할 수 있습니다

(국가에 대한 의무)

“너희가 조세를 바치는 것도 이로 말미암음이라 그들이 하나님의 일꾼이 되어 바로 이 일에 항상 힘쓰느니라 모든 자에게 줄 것을 주되 조세를 받을 자에게 조세를 바치고 관세를 받을 자에게 관세를 바치고 두려워할 자를 두려워하며 존경할 자를 존경하라”(6,7)

바울은 두려워할 자를 두려워하고 존경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생각하여 권위자를 두려워하고 존경할 자를 존경해야 합니다. 우리는 구체적으로 납세의 의무, 국방의 의무, 근로의 의무, 교육의 의무, 환경보호의 의무 그리고 교통법규를 지키고 쓰레기를 내놓는 법규를 지켜야 합니다.

(권위를 인정하는 것이 복음을 전하는 길)

한번은 로마 시대에 주인이 저녁에 바깥을 돌아다니는데 노예들이 있는 곳을 지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곳에서 자신의 이름이 들려 오는 것입니다. 주인은 긴장하여 무슨 말을 하는지 들어 보았습니다. 노예들은 주인을 칭찬하고 주인을 위해서 간절히 축복기도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를 보고 주인을 크게 감동되어 예수님을 믿었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우리가 위에 있는 권세를 인정하고 경외할 때 이들이 변화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변화된 모습을 보여 드릴 때 우리 부모님, 직장 상관도 변화될 수 있습니다.

로마서 13장 강해 일부. 위에 있는 권세에게 복종하라
로마서 13장 1-로마서 13장 7
요절 로마서 13장 1절 “각 사람은 위에 있는 권세들에게 복종하라 권세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지 않음이 없나니 모든 권세는 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바라”
로마서 13장 강해 일부 끝.



로마서 13장 강해 이부.
그리스도의 갑옷을 입자
말씀 로마서 13장 8-로마서 13장 14
요절 로마서 13장 12절 “밤이 깊고 낮이 가까웠으니 그러므로 우리가 어둠의 일을 벗고 빛의 갑옷을 입자”

바울은 지금까지 국가와 사회의 윤리를 가르쳤습니다. 하나님이 세우신 권위를 인정하고 순종하라고 가르쳤습니다. 이제부터는 그리스도인이 하나님과 다른 사람의 사랑을 많이 받고 서로 사랑하라고 가르쳐 주십니다. 우리는 예수그리스도의 옷을 입음으로 서로 사랑하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우리가 져야 할 사랑의 빚)

“피차 사랑의 빚 외에는 아무에게든지 아무 빚도 지지 말라. 남을 사랑하는 자는 율법을 다 이루었느니라.”(8)

‘--’ 외에 ‘--’을 하지 말라는 말씀은 이중부정으로 강한 긍정입니다. 이는 사랑의 빚을 지라는 말입니다. 우리는 사랑의 빚을 지지 않고 살 수 없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주신 태양, 공기, 물의 혜택을 받으며 살아갑니다. 우리는 태어나면서부터 문명의 이기 속에 살고 있습니다. 전기, 자동차, 언어, 컴퓨터 이 모든 것은 선조들에게 사랑으로 받은 것입니다. 나는 노트북으로 무선 인터넷을 하면서 매우 고마워하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햇빛과 물과 공기 속에서 살아갑니다.
부모님은 어떻습니까? 우리는 아무 의지도 없을 때 어머니는 나를 임신하시고 열 달 동안 기뻐하시며 살았습니다. 그리고 똥오줌 받아서 키워 주셨습니다. 참으로 감사한 것입니다. 이런 것을 우리가 다 기억조차 못합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 한 사람이 예수를 믿기까지 얼마나 많은 사람이 눈물을 흘리며 기도했습니까?
더욱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얼마나 큰 고통을 당하셨습니까? 우리는 이런 모든 은혜를 입고 자란 것입니다. 더욱 예수님은 부활하셔서 매일 매일 새 힘과 기쁨을 주십니다. 또 우리는 매주 말씀을 공급받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크신 은혜로 말씀을 공급받습니다. 우리는 적극적으로 사랑을 받아야 합니다. 우리가 양식말씀을 쓰고 기도하고 말씀 공부를 하는 목적이 무엇입니까? 이는 은혜를 받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우리는 많이 받고 받은 은혜를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는 이렇게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나는 은혜 받은 것이 너무 많다. 너무 많은 은혜를 받았다” 많은 사람이 은혜 받을 줄을 모릅니다. 은혜는 예수님을 믿을 때 한 번 받고 그 후에는 계속하여 봉사하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는 죽을 때까지 계속 은혜의 빚을 지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를 알고 은혜를 받아야 강해집니다. 은혜를 많이 받아야 우리는 행복해지고 힘이 납니다. 우리는 부모님의 은혜를 받고 자식들로부터도 은혜를 받는 것입니다. 무엇보다 창조주 하나님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그리고 우리와 임마누엘 하시는 성령님의 은혜를 받는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가 사랑받기 위해서 태어난 사람들입니다. 이렇게 은혜의 빚을 지었으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이웃 사랑의 계명)

“간음하지 말라, 살인하지 말라, 도적질 하지 말라, 탐내지 말라. 한 것과 그 외에 다른 계명이 있을찌라도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그 말씀 가운데 다 들었느니라.”(9)

이 말씀은 한마디로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사랑을 많이 받으면 사랑의 샘이 솟아납니다. 우리가 사랑이 생겨나면 우리는 서로 사랑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사랑의 빚을 졌으면 사랑의 빚을 갚아야 합니다. 우리는 물질의 빚을 지면 누구나 갚으려고 합니다. 빚을 갚지 않으면 잠이 오지 않습니다. 그러나 사랑의 빚은 지고도 갚으려고 하지 않는 사람이 있습니다. 물질의 빚은 갚는 것이 피곤합니다. 그러나 사랑의 빚을 갚는 것은 행복합니다.
사랑은 받는 것도 행복하지만 사랑하는 것도 행복합니다. 사랑하면 우리 자신이 변화됩니다. 사랑하면 우리는 모두 율법을 쉽게 지킬 수 있습니다. 남편이 아내를 사랑하면 남편은 바람을 피우지 않습니다. 이웃을 사랑하면 도적질하거나 살인하거나 거짓말하지 않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은 마음에 참된 만족이 있습니다. 탐심이 사라집니다. 우리는 사랑을 받는 것에 그쳐서는 안 됩니다. 이제는 사랑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받기만 해서는 안 됩니다. 주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우리가 받기만 하면 시화호처럼 썩어 버립니다. 주기도해야 동해 바다처럼 깨끗하고 고기들이 살고 사람들이 모여 들게 됩니다. 은혜가 필요한 사람에게 은혜를 베풀고 사랑이 필요한 사람에게 사랑을 베풀어야 합니다. 사도바울은 사랑의 빚을 갚기 위해서 로마와 세계에 복음을 전하고자 하였습니다.

(사랑은 율법의 완성)

“사랑은 이웃에게 악을 행치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니라.”(10)

사랑하는 사람은 이웃에게 악을 행하지 않습니다. 사랑은 율법의 완성입니다. 율법은 십계명입니다. 십계명의 핵심은 사랑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율법의 모든 행위는 사랑에서 나온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면 하나님 외에 다른 신을 두지 않고 우상을 만들지 않고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않고 안식일을 지킵니다. 사람을 사랑하면 살인하지 않고 도적질하지 않고 간음하지 않고 거짓증거하지 않고 탐심을 갖지 않습니다. 우리는 율법적인 행위를 중시하기보다는 사랑을 중시해야 합니다.
바리새인들은 율법적인 행위를 중시하였습니다. 안식일을 지키고 십일조를 내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내면에서는 사랑이 없었습니다. 그들은 안식일 법을 지키면서 안식일에 병을 고치는 것은 비판하였습니다. 안식일을 지켰지만 사람을 사랑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이 모순된 행동을 한 것은 율법은 있고 사랑을 버렸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사랑받는 것을 부담스러워하는 것은 교만한 것입니다. 우리는 사랑을 받고 사랑을 해야 합니다. 한 목자님 수술을 할 때 어떤 사람이 익명으로 수술비를 보냈습니다. 그는 사랑의 빚을 졌습니다. 그 사랑을 받고 나니까 다른 사람에게 은혜를 적극적으로 베풀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을 섬기는 것은 먹고 남는 것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먹을 것으로 해야 합니다.

(자다가 깰 때)

“또한 너희가 이 시기를 알거니와 자다가 깰 때가 벌써 되었으니 이는 이제 우리의 구원이 처음 믿을 때보다 가까웠음이라 밤이 깊고 낮이 가까웠으니.” (11.12b)

본문은 때를 말합니다. 밤이 깊고 낮이 가까웠습니다. 밤은 예수님이 오시기 전입니다. 낮은 예수님이 다시 오실 때를 말합니다. 예수님이 오심으로 새벽이 시작됩니다. 예수님이 오실 때가 가까이 왔습니다. 우리가 죽을 날이 점점 가까이 오고 있습니다. 우리가 천국 갈 날이 가까이 왔습니다. 우리는 이제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빛의 갑옷)

“그러므로 우리가 어둠의 일을 벗고 빛의 갑옷을 입자”(12b)

우리가 밤에는 잠옷을 입습니다. 낮이 되면 외출복으로 갈아입습니다. 사람들은 밤에는 어둠이 주는 쾌락을 따라갑니다. 사단은 잘 보이지 않는 밤에 죄의 독화살을 쏘아댑니다. 우리는 어둠의 옷을 벗고 빛의 갑옷을 입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어야 합니다. 죄악된 삶을 청산해야 합니다. 예수님 안에서 누구에게 공개해도 떳떳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옷은 신분을 상징합니다. 옷은 정체성을 말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인답게 떳떳하게 살아야 합니다. 옷은 무장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어야 합니다. 옷은 자신을 보호해 줍니다. 우리가 예수님 안에서 선을 행하면 선이 우리를 죄에서 보호됩니다. 선이 사탄의 공격에서 우리를 보호해줍니다.

(성결한 삶)

“낮에와 같이 단정히 행하고 방탕하거나 술 취하지 말며 음란하거나 호색하지 말며 다투거나 시기하지 말고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13,14)

밤에는 향락문화가 발달합니다. 방탕하고 술 취하여 비이성적이 됩니다. 음란하고 호색하여 성적으로 문란합니다. 쟁투하고 시기하여 서로 다투고 싸웁니다. 정욕적이고 육신의 일을 도모합니다. 그러나 낮에는 이런 일을 벗어 버립니다. 낮에는 어둠의 옷을 벗어 버리고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빛 앞에서 모두에게 공개해도 떳떳하게 살아가야 합니다. 성결하게 살아가야 합니다.
어거스틴이 이 말씀을 영접하고 방탕한 삶을 버렸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만나기전에 마니교에 빠져서 허랑방탕하게 생활하고 사생아를 낳았습니다. 그러나 이 말씀을 영접하고 예수님 안에서 거룩한 삶을 살았습니다. 기독교의 교리를 세우는 훌륭한 신학자가 되었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사는 삶)

예수님의 옷을 입는 것은 예수님과 함께 사는 자입니다. 갈라디아서 3장 27절을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 입었느니라.” 그리스도와 합하여 세례받은 것은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새 생명을 받은 것입니다. 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죽고 부활하신 예수님이 내 안에 살아 계신 것입니다. 우리는 내 안에 살아 계신 예수님을 믿음으로 살아야 합니다. 이렇게 우리 마음에 예수 그리스도가 살아 계시면 우리는 범죄치 않습니다. 우리는 어둠의 열매를 맺지 않고 빛의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거룩한 옷을 입고, 사랑의 옷을 입고, 경건의 옷을 입고 살아갑니다. 그리스도를 닮고 그리스도의 향기를 내는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고난에 참여하는 삶)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는 것입니다. 베드로 전서 4장 1절을 말씀하십니다. “그리스도께서 이미 육체의 고난을 받으셨으니 너희도 같은 마음으로 갑옷을 삼으라. 이는 육체의 고난을 받은 자가 죄를 그쳤음이니.” 예수님께서 육체의 고난을 받으셨습니다. 우리도 같은 마음으로 갑옷을 삼아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같이 고난을 감당해야 합니다. 십자가를 믿을 뿐 아니라 십자가를 져야 합니다. 이것이 그리스도로 갑옷을 입는 것입니다. 우리가 십자가를 질 때 우리는 죄의 어떤 공격에서도 넘어지지 않고 죄에서 자유함을 얻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지금까지 은혜의 복음을 배웠습니다. 아직도 은혜를 모르는 사람도 몇 명 있지만 대부분은 은혜를 압니다. 은혜를 아는 사람은 마음에 자유와 기쁨을 누립니다. 신앙생활을 하면서 행복을 누립니다. 이제 은혜의 복음을 알았으면 그 자유와 기쁨으로 자신의 죄를 짓는 데 사용해서는 안 됩니다. 이제는 은혜에 기초하여 예수님의 십자가를 감당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위하여 자기의 뜻을 포기할 줄 알아야 합니다. 이는 부담스러운 것입니다. 그래도 그 길을 갈 때 그곳에 예수님의 생명이 있습니다.

(고난을 배울 때 일하시는 성령님)

저는 지금까지 언제 성령의 역사가 있는지를 되돌아보았습니다. 자신을 부인하고 고난의 십자가를 졌을 때입니다. 제가 믿음으로 순종을 배웠을 때 성령께서 역사하사 직장을 주시고 믿음의 조상들을 세워 주셨습니다. 한번은 여름수양회를 위해서 가장 무더운 해에 3개월 동안을 기도했는데 그때 학생회에 큰 성령의 역사가 있었습니다. 한 번은 봄학기에 네 번의 수양회를 가졌는데 그때 하나님은 제자들을 많이 서게 도우셨습니다. 우리 ubf가 선진국 선교, 공산권 선교, 그리고 제삼세계 선교를 하는 것은 정말로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순종할 때마다 하나님은 은혜를 주시고 선교를 이루어주셨습니다. 이를 볼 때 우리가 주님께 해야 할 것은 무엇을 해드리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뜻을 알고 복종하는 것입니다. 겨울수양회를 도전하는 것은 부담스러운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순종했을 때 하나님은 겨울수양회를 통해서 거듭남의 역사를 이루어 주셨습니다.

(소문난 교회로의 비전)

우리 모임이 어떻게 유랑동 생태찌개와 같이 소문난 교회가 될 수 있나요? 브랜드 높은 제자들이 될 수 있나요? 그것은 권위에 순종하는 것이요 사랑을 충만히 받고 사랑하는 것이요. 그리스도로 옷 입고 십자가의 고난을 받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 그리스도의 맛을 내는 성도, 브랜드 가치 높은 교회가 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아멘!

로마서 13장 강해 이부. 그리스도의 갑옷을 입자
말씀 로마서 13장 8-로마서 13장 14
요절 로마서 13장 12절 “밤이 깊고 낮이 가까웠으니 그러므로 우리가 어둠의 일을 벗고 빛의 갑옷을 입자”
로마서 13장 강해 이부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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