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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주의 대학생 선교기관

천안UBF

성경66권강해서

마가복음 9장 강해 사부 누가 크냐

작성자 : 오요한
작성일 : 2012-06-22 00:00:00
조회수 : 4,509

문제지풀이(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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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9장 강해 사부 누가 크냐
말씀 마가복음 9장 30-마가복음 9장 37
요절 마가복음 9장 35 예수께서 앉으사 열두 제자를 이르시되 누구든지 첫째가 되고자 하면 뭇사람의 끝이 되며 뭇사람을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리라 하시되

예수님은 그리스도의 고백을 받은 후 세 명의 제자만 데리고 변화산에 올라가 그리스도로 변화된 모습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때부터 제자들은 누가 크냐는 경쟁을 본격적으로 하였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그리스도로서 예루살렘에 올라가 왕이 될 것이라고 확실히 믿었습니다. 그때 누가 큰 자리에 앉을 것이냐를 다투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자리보다는 제자로서 어떤 내면성을 갖는 사람이 큰자인지를 가르치셨습니다. 제자로서 고난을 받고 겸손히 다른 사람을 섬기고 영접하는 사람이 큰 자라고 가르치셨습니다. 우리가 오늘 말씀을 통하여 예수님의 제자로서 큰 내면성을 가져서 진정 큰 자가 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제자 양성에 전념하신 예수님)

30,31절을 보십시오. “그 곳을 떠나 갈릴리 가운데로 지날새 예수께서 아무에게도 알리고자 아니하시니 이는 제자들을 가르치시며 또 인자가 사람들의 손에 넘겨져 죽임을 당하고 죽은 지 삼 일만에 살아나리라는 것을 말씀하셨기 때문이더라” 예수님이 변화산인 다볼산 밑을 떠나서 갈릴리로 가고자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아무에게도 자신을 알리고자 하지 않고 비밀리에 갈릴리에 가고자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조용히 제자양성에 전념하고자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이제 십자가에 죽으신 후에 이 세상을 떠나야 했습니다. 예수님이 하늘나라에 가신 후에 남는 것은 제자입니다. 예수님이 승천하신 후에 단지 열두 사도를 포함한 120명의 성도가 남아서 예수님의 역사를 계승하였습니다. 우리가 죽은 후에도 남는 것은 무리가 아니라 제자입니다. 우리는 마지막이 가까워 올수록 은밀하게 제자 양성에 전념하여야 합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다시 한번 십자가를 가르치셨습니다. 에수님은 당신이 사람들의 손에 넘기워 죽임을 당하고 죽은 지 삼 일만에 살아나리라는 것은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그리스도의 고백을 받으신 후에 처음으로 십자가를 가르치셨습니다. 변화산에서 내려오시며 다시 십자가를 가르치셨습니다. 예수님은 세 번째 십자가와 부활을 가르치셨습니다. 이 후에도 예수님은 계속적으로 반복하여 십자가를 가르치십니다. 예수님이 이렇게 반복하여 십자가를 가르치셨을까요? 십자가가 너무나 좋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십자가를 져야 부활이 있고 그 후에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십자가는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통로입니다. 십자가는 생명과도 같이 좋은 것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셨기 때문에 세계만민을 구원하실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생전에 구원역사를 이루신 것보다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이루신 것이 휠씬 더 많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우리에게 죄사함을 주십니다. 저주와 질병에서 우리를 해방시켜주십니다. 십자가는 우리의 죄악에서 벗어나 새로운 삶을 살게 합니다. 십자가는 하나님의 절대적인 사랑을 가르쳐주십니다. 죄가 얼마나 무서운가 하나님의 공의를 가르쳐주십니다. 십자가는 우리에게 하나님 나라를 맛보게 합니다. 에수님 자신도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부활하여 우리의 그리스도가 되셨습니다.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 하나님 우편에 앉으셨습니다. 이렇게 십자가는 너무너무 좋은 것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선물한다면 가장 좋은 것을 선물해야합니다. 가장 좋은 십자가를 가르쳐야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사랑하는 제자들에게 십자가를 지도록 반복하여 가르치셨습니다. 우리가 지난 주 디모데후서를 공부하였습니다. 바울은 먼저 자신이 예수님과 함께 고난을 받았습니다. 그는 고난을 받으며 많은 유익을 맛보았습니다. 고난을 받았을 때 하나님이 그와 함께하여 많은 표적과 기적을 행하셨습니다. 그를 통하여 많은 사람을 구원하셨습니다. 그는 죽을 때까지 많은 고난을 받았습니다. 그의 노년은 너무나 쓸쓸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거의 다 고난 받는 사도바울을 떠났습니다. 그러나 그는 고난을 받으면서 신실하신 하나님이 고난 후에 반드시 영광을 주실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그의 믿음대로 그의 편지가 신약성경의 삼분의 이가 되었습니다. 그를 통하여 세계선교를 이루어주셨습니다. 그는 죽어서 하늘나라에서 하나님 나라에서 큰 영광을 맛보고 있습니다. 그는 자신이 십자가를 질뿐 아니라 사랑하는 아들 디모데에게도 나와 함께 고난을 받으라고 반복하여 말씀하셨습니다. 사도바울과 함께 감옥에서 마지막 고난을 받은 사람은 누가입니다. 바울은 디모데에게 자신에게 도움이 되는 마가를 데리고 오라고 하였습니다. 바울과 함께 끝까지 고난을 받은 누가는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을 집필하였습니다. 마가는 마가복음을 썼습니다. 자식 교육의 왕도는 십자가를 가르치는 것입니다. 십자가를 가르치는 것은 세상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세상 사람들도 제대로 된 사람은 자녀에게 고난을 가르칩니다. 돈도 자기 스스로 벌어보게 합니다. 축구선수였던 베컴은 자산 5억파운드(약 6800억원)의 부자임에도 18세 된 아들에게 시급 4600원 받는 커피숍 아르바이트를 시켰다고 합니다. 가수 마돈나의 17세 아들은 지난해 자전거로 음식 배달하는 아르바이트를 했다는 보도가 있습니다. 땀을 흘리며 돈의 가치를 깨달아라는 교육철학입니다. 서양에서는 운동선수와 연예인이 떼돈을 벌 수 있는 직업인데, 이들이 자기 자식들에게는 인생에서 떼돈 벌기가 쉽지 않다는 이치를 알려주려고 하였습니다. 그렇습니다. 고난은 참으로 좋은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랑하는 자녀에게 고난을 주십니다. 고난을 주시지 않으면 자녀가 아니라 사생아입니다. 우리는 고난을 받을 때 감사해야합니다. 고난은 우리의 믿음을 순수하게 하고 겸손하게 합니다. 다른 사람을 깊이 이해하고 사랑하게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나에게 주신 고난을 받을 뿐 아니라 자원하여 고난을 받아야합니다. 기도의 고난, 말씀공부의 고난, 말씀에 순종하는 고난, 말씀을 가르치는 고난, 금식하는 고난을 받아야합니다. 우리가 고난을 받으면 신실하신 하나님이 반드시 영광을 주실 것을 믿습니다. 아멘

(십자가를 두려워하는 제자들)

32절을 보십시오. “그러나 제자들은 이 말씀을 깨닫지 못하고 묻기도 두려워하더라”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가르치시자 제자들은 이 말씀을 깨닫지도 못하고 묻기도 두려워했습니다. 사람들은 본성에 얼마나 십자가에 대해서 거부반응이 있는지 알 수 있습니다. 제자들의 마음에 세상적인 꿈과 욕망이 들어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왕이 되기를 기대하고 자신들은 장관이 되기를 기대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사형수로 십자가에 죽으신다니 그것은 말도 안되는 일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세상의 영광을 원하고 십자가를 싫어하는 것은 인간의 본성입니다. 이런 본성 때문에 역사적으로도 많은 성도들이 십자가를 배척하고 거부했습니다. 특히 경제적으로 풍요로워지고 살기가 좋아지면 좋아질수록 사람들은 십자가를 싫어합니다. 3D 업종을 싫어하고 쉽고 편한 길을 가고자 합니다. 하지만 십자가를 싫어하면 할수록 그 모임은 생명력을 상실합니다.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일하실 수 없습니다. 도덕적으로 타락합니다. 선진국에 갈수록 교회가 텅텅 비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나라도 주 5일 근무를 시행하며 교회는 점점 비어가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십자가의 복음을 듣는 것을 싫어합니다. 디모데후서에 보면 사람들은 말세에 자신의 귀를 긁어줄 스승을 찾는다고 하였습니다. 그들은 축복의 메시지 은혜의 메시지만 듣고자 합니다. 이런 시대일수록 우리는 사람들이 원하는 대로 십자가 없는 복음을 가르치기 쉽습니다. 번영과 성공의 길만을 말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십자가를 가르치지 않는 것은 둘 다 망하는 길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본 받아 사람들이 싫어해도 십자가를 반복하여 가르쳐야합니다. 십자가를 가르치는 것이 나도 살고 다른 사람도 사는 길입니다. 계시록에 보면 예수님께 칭찬받는 두 교회가 나옵니다. 그 중에 하나인 서머나 교회는 예수님 때문에 궁핍과 환난을 받는 교회입니다. 그들은 예수님 때문에 가난하고 핍박을 당하였습니다. 그래도 그들은 믿음의 중심을 지켰습니다. 변함없이 충성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교회를 칭찬하시고 하늘나라에서 생명의 면류관을 주셨습니다. 사무엘서에 보면 한나는 아들 사무엘에게 십자가를 가르쳤습니다. 부모를 떠나 주의 종 엘리 곁에 있으면서 순종하며 주님의 일을 섬기도록 도왔습니다. 그는 훌륭한 하나님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엘리는 자신의 아들들에게 십자가를 가르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순종을 가르치지 않았습니다. 엘리와 아들들은 같은 날 죽임을 당하였습니다. 우리 교회가 부활의 영광을 바라보며 십자가를 가장 사랑하는 교회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우리 교회를 사랑하시고 축복하여 줄 것입니다. 아멘

(누가 크냐)

33,34절을 보십시오. “가버나움에 이르러 집에 계실새 제자들에게 물으시되 너희가 길에서 서로 토론한 것이 무엇이냐 하시되 그들이 잠잠하니 이는 길에서 서로 누가 크냐 하고 쟁론하였음이라” 예수님이 가버나움에 이르러 집에 계실 때였습니다. 예수님은 길에서 제자들의 토론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그들은 토론을 했지만 공개적으로 한 것이 아니라 예수님 몰래 자기들끼리 쑥덕대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이를 아시고 제자들에게 "너희가 노중에서 토론한 것이 무엇이냐?"고 물어보셨습니다. 제자들은 아무 말도 못하고 잠잠했습니다. 이는 제자들이 누가 크냐고 쟁론을 했고 그것이 떳떳하지 못한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예루살렘에서 예수님이 왕이 되면 누가 큰 자리에 앉을까 쟁론하였습니다. 누가 총리가 되고 부총리가 되는가 토론하였습니다. 그들은 변화산 파 세 명과 산 밑의 파 아홉 명으로 나뉘어서 누가 크냐 경쟁을 하였습니다. 누가 크냐는 토론은 제자들만의 토론은 아닙니다. 사람들은 둘만 있으면 누가 크냐 도토리 키재기를 합니다. 니이체는 사람들이 더 갖고자 하는 욕망, 더 높아지고자하는 욕망이 있다고 하였습니다. 제자들은 큰자가 어느 자리에 앉는가에 따라서 결정되는 줄로 알았습니다. 더 많은 학위를 가져야 큰 자라고 생각하였습니다. 더 많은 소유를 가진 사람이 큰 자로 생각하였습니다. 헤게모니를 잡고 권세를 부리는 사람이 큰 자로 생각을 했습니다. 갑질하는 자가 큰자라고 생각하였습니다. 다른 사람에게 명령하고 지시하는 자가 크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이렇게 자리에서 큰 자가 되고자 하면 권력투쟁이 일어나게 됩니다. 자리는 한정되었고 사람은 많기 때문에 서로를 시기하고 모함하고 깔아뭉개고자 합니다. 이렇게 되면 모임이 하나가 되기 어렵고 아름다운 공동체를 만들기가 어렵습니다. 우리나라의 사색 당쟁이 일어난 이유도 자리를 두고 누가 크냐고 싸웠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자리가 큰 자를 만드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 목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목자가 먼저 되었다고 큰 자가 아닙니다. 더 많은 제자를 양성하였다고 큰 자가 아닙니다. 헌금을 더 많이 하는 자가 큰 자가 아닙니다. 예수님은 누가 크냐고 토론하는 제자들을 책망하지 않으시고 어떻게 큰 자가 될 수 있는지 가르쳤습니다. 제자들이 자리를 통해서 크고자 하는 것이 문제이지 크고자 하는 마음 자체가 문제는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가 크고자하는 것은 좋은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을 가졌기 때문에 더 크고자 하는 욕망이 있습니다. 명예욕이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진정 큰 자가 되어야합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다 큰 자가 되기를 원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큰 자는 자리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내면성에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큰 자는 세 가지 내면성을 가진 자임을 말씀하십니다.

(겸손히 섬기는 자가 크다)

35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앉으사 열두 제자를 이르시되 누구든지 첫째가 되고자 하면 뭇사람의 끝이 되며 뭇사람을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리라 하시되" 첫째 큰 자는 뭇사람의 끝이 되어야 합니다. 뭇사람은 모든 사람을 의미합니다. 여기서 모든 사람의 끝은 모든 사람보다 낮아지는 겸손을 의미합니다. 겸손한 사람은 높은 자리에 올라간 사람이 아니라 겸손한 인격을 가진 사람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자신이 얼마나 작은 자인가 자신을 발견해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죄인으로 깊이 발견한 사람이 겸손한 사람입니다. 사도바울은 하나님의 능력을 가진 믿음의 사람이요. 많은 교회를 개척한 개척자요. 성경을 집필한 지혜의 말씀의 은사를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만났을 때 작은 자가 되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에서 자신을 사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라고 하였습니다. 만물의 찌끼 같다고 했습니다. 에베소서에는 모든 성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라고 하였습니다. 노년에 쓴 디모데전서에서는 모든 죄인 중에 우두머리라고 하였습니다. 그는 세상에서 가장 큰 죄인으로 진실하게 고백합니다. 그는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발견할 때 조금도 자기 의가 없었습니다. 조금도 자신을 주장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하나님 앞에서 자신이 얼마나 끝에 있는가를 알았습니다. 끝에 있는 그는 핍박과 환난을 기쁨으로 받았습니다. 끝에 있는 바울은 큰 자가 되었습니다. 시편 39편 5절의 말씀처럼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날이 없는 것 같음을 느끼는 사람이 진정 큰 사람입니다. 모세는 이집트의 왕자였습니다. 그는 애굽의 학술과 무술에 능했습니다. 그는 무엇이든지 다 할 수 있는 사람 같았습니다. 자신이 출애굽을 이끌 지도자로 적당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때는 아무도 그를 지도자로 인정해 주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가 광야 40년 훈련을 받고 나서 그는 겸손한 자가 되었습니다. 자신은 입이 뻣뻣해서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자로 발견했습니다. 그는 이스라엘의 첫자리가 아니라 끝자리에 있음을 발견했습니다. 그때 그는 겸손하게 200만 이스라엘 백성을 감당하는 영적 지도자가 되었습니다. 그는 겸손하여 이스라엘 백성이 욕을 하고 돌로 치는 것을 참을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지만 모든 사람의 끝이 되셨습니다. 예수님은 세상의 끝에 서 있으셨습니다. 예수님의 끝은 십자가입니다.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죄인의 우두머리가 되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습니다. 하나님의 본체이신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기까지 순종하셨습니다. 사람들의 모욕과 멸시를 대항하지 않고 감당하셨습니다. 끝에 있는 사람은 모욕을 받되 대항하지 않습니다. 대항할 힘이 있어도 대항하지 않고 여유가 있습니다. 큰소리치지 않고 빙그레 웃을 수 있는 사람이 큰 사람입니다. 예수님은 가장 큰 자가 되었습니다.

(섬기는 자가 크다)

둘째로 큰 자는 섬기는 자입니다. 식사를 섬기거나 청소를 섬기는 것도 섬기는 것입니다. 말씀과 기도로 섬겨 주는 것도 섬기는 것입니다. 그러나 섬기는 것이 그런 외적인 것만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섬기는 자는 다른 사람을 깊이 이해하는 자입니다. 나를 중심으로 생각하지 않고 타인을 중심으로 생각하는 자입니다. 다른 사람의 연약함과 허물을 감당하는 자입니다. 그 사람의 허물과 죄악을 나의 허물과 죄악으로 영접하고 감당하는 것입니다. 그 사람의 죄악을 회개하기까지 오래참고 돕는 사람입니다. 말씀을 통해서 그 죄를 발견하고 회개하도록 돕는 사람입니다. 다른 사람의 질병을 나의 질병으로 여기고 기도하는 사람입니다. 요셉은 섬기는 자였습니다. 그는 노예가 되었을 때 주인을 섬겼습니다. 억울하게 누명을 쓰고 감옥에 갇혔을 때 얼마나 분통이 터졌겠습니까? 그러나 그는 그곳에 억울하게 들어오는 죄수를 이해하고 섬겼습니다. 다른 죄수에게 어찌하여 얼굴에 근심이 있습니까? 물어보고 해결해주고자 하였습니다. 그가 이렇게 섬겼을 때 그는 애굽의 총리가 되었습니다. 애굽의 총리가 되어서도 형들의 내면이 변화되기까지 섬겨 주었습니다. 그들이 거짓을 회개하고 진실한 사람이 되도록 도왔습니다. 그들이 시기심을 회개하고 사랑의 사람이 되도록 도왔습니다. 다윗은 사울의 시기심에 의해서 평생을 쫓겨다녔습니다. 그는 환난당한 자요 원통한 자였습니다. 다윗은 쫓겨가면서 아둘람 굴에 숨었습니다. 그곳에 다윗처럼 원통한 자 빚진 자 환난당한 자들이 나왔습니다. 다윗은 그들을 이해하고 섬기는 목자가 되었습니다. 다윗이 섬긴 사람들이 다윗왕국의 중신들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통해서 병자, 귀신들린 자를 이해하고 섬겨주셨습니다. 더 나아가서 죄악된 인간들을 이해하고 섬기기 위해서 목숨을 대속물로 주시기까지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세번 부인한 베드로가 회개하였을 때 이해하고 받아주셨습니다. 예수님은 가장 위대한 자가 되었습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을 깊이 이해하고 섬기는 자가 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우리가 때로는 은혜를 베푼 자에게 모욕을 받을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런 것을 분노하지 않을 수 있는 것은 그를 통해서 예수님의 십자가에 동참하기 때문입니다. 연희의 이승훈 목자님이 지금까지 사람들이 자신을 부린다고 불평이 많았습니다. 그러나 섬기니까 리더십이 생기기 시작하였다고 하였습니다. 이렇게 예수님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이 섬기는 것입니다.

(어린 아이를 영접하는 자가 크다)

36,37절을 보십시오. “어린 아이 하나를 데려다가 그들 가운데 세우시고 안으시며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 아이 하나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요 누구든지 나를 영접하면 나를 영접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를 영접함이니라” 셋째 큰 자는 도움이 필요한 자를 영접하는 자입니다. 예수님은 어린 아이 하나를 데려다가 그들 가운데 세우고 안으시며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많은 사람을 상대한 것이 아니라 한 사람 어린아이를 영접하였습니다. 예수님은 누구든지 예수님 이름으로 이런 어린 아이 하나를 영접하면 곧 예수님을 영접함이요. 누구든지 예수님을 영접하면 예수님을 영접함이 아니요. 예수님을 보내신 하나님을 영접하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어린아이와 같이 연약하고 부족한 모습으로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높고 큰 보좌에 오신 것이 아니라 마굿간에 한 아기로 오셨습니다. 부유한 자의 모습으로 오신 것이 아니라 가난한 자의 모습으로 오셨습니다. 강한 자의 모습이 아니라 연약한 자의 모습으로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지금도 연약한 자의 모습으로 오십니다. 예수님은 헐벗고 굶주린 자, 병든 자, 감옥에 갇힌 자, 나그네의 모습으로 오십니다. 제자들 중에 누구든지 눈에 보이지 않는 예수님을 영접하려면 눈에 보이는 이런 어린 아이를 영접해야 합니다. 어린아이같은 자들을 예수님 이름으로 영접해야합니다. 예수님이 보내신 사람으로 영접해야합니다. 어린 아이에게 예수님이 있다는 것은 놀라운 비밀입니다. 누구든지라는 말이 두 번 나오고 영접하는 이라는 말은 다섯 번 나옵니다. 영접은 마음으로 그를 환영하는 것입니다. 만약 우리의 그리스도 예수님이 우리 집에 오시면 여러분은 어떻게 하겠습니까? 기쁨으로 환영하지 않겠습니까? 우리는 예수님을 환영하는 마음으로 우리에게 도움이 필요한 사람을 영접하고 섬겨야 합니다. 그런 연약한 자들 뒤에 있는 하나님을 보아야합니다. 아브라함이 손님 셋을 환영하며 영접하였는데 한분이 하나님이고 둘이 천사였습니다. 제자들이 큰 자가 되려면 어린 아이와 같은 자를 영접해야 합니다. 어린 아이를 예수님과 같이 보고 하나님과 같이 보아야합니다. 어린 아이와 같은 자를 하나님처럼 섬겨야 합니다. 어린 아이를 영접하는 것은 누구의 말대로 장난이 아닙니다. 어린 아이의 요구를 들어주어야 합니다. 배고프다고 울면 우유를 주어야 하고 똥을 싸면 똥을 치워주어야 합니다. 어린 아이들이 어지럽혀 놓은 것을 치워주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들이 어떤 일을 버릴 줄 모르기 때문에 항상 관심을 가지고 지켜 보아야합니다. 어린 아이를 영접하고 섬기고 희생하는 사람이 위대한 사람입니다. 친정 어머니는 딸이 손자 손녀의 어린아이를 데리고 오면 기쁘다고 합니다. 그러나 하룻밤 자고 빨리 데리고 가면 더 기쁘다고 합니다. 어린 아이를 섬기는 것이 힘들어서 그런 것입니다. 캠퍼스에 대학생들도 어린아이같은 자들입니다. 그들은 우리에게 도움을 주기보다는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이런 대학생들을 있는 모습 그대로 영접하고 섬겨야합니다 선교사님들은 어린 아이같이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입니다. 선교사님들은 나그네와 같이 외국에서 고생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이들을 기도와 물질로 섬기는 것이 바로 예수님을 섬기는 것입니다. 우리 주위에 불우한 이웃을 섬기는 것이 바로 예수님을 섬기는 것입니다. 방황하는 한 양을 섬기는 것이 바로 예수님을 섬기는 것이요. 위대해지는 것입니다. 아내나 남편을 영접하는 것도 어린 아이를 영접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아내의 모습으로 오시고 남편의 모습으로 오십니다. 아내를 어린 아이처럼 생각한다면 당연히 영접할 수 있습니다. 어린 아이들이 똥을 쌌다고 혼내키는 사람은 없습니다. 이것을 당연하게 여깁니다. 우리도 상대방을 어린 아이라고 생각하면 얼마든지 이해할 수 있습니다. 어린 아이들이 물을 엎지를 수도 있다고 생각해야합니다. 그들을 있는 그대로 영접해 주어야합니다. 나에게 도움이 되는 사람을 섬기는 것이 아닙니다. 나에게 도움이 필요한 사람을 섬기는 것입니다. 당시에 제자들은 어린 아이는 거들떠 보지도 않았습니다. 어린아이는 쫓아냈습니다. 그들이 흠모하는 대상은 로마 총독 그리고 유다왕이요. 로마 황제 가이사였습니다. 그들은 로마 황제같이 되어야 큰 자가 되는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들은 권세자를 마음에 동경하고 권세자가 되고자 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어린 아이를 영접하는 자가 큰 자라고 말씀하십니다. 정말 하나님의 역사는 어린 아이를 귀히 여기는 역사입니다. 병든 자, 소외된 자, 무시 받는 자, 연약한 자를 귀히 여기는 역사입니다. 이런 자들을 영접해야 아름다운 신앙의 공동체를 만들 수 있습니다. 어린아이를 영접해야 하나님 나라가 이루어집니다.

(큰 자는 십자가를 지는 자이다)

결론적으로 하나님 앞에서 큰자는 십자가를 지는 자입니다. 고난을 받고 고난을 가르치는 자입니다. 겸손히 낮아지는 자입니다. 다른 사람의 죄와 연약함을 섬기는 자입니다. 어린 아이처럼 도움이 필요한 사람을 영접하고 섬기는 사람입니다. 넓은 내면성으로 다른 사람을 영접하는 사람입니다. 죄를 회개하기까지 오래참고 돕는 사람입니다. 우리가 이렇게 낮아지고 섬겨서 큰 자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우리 교회에 큰 사람, 거목과 같은 사람이 많이 나오기를 기도합니다. 아멘!
마가복음 9장 강해 사부 누가 크냐
말씀 마가복음 9장 30-마가복음 9장 37
요절 마가복음 9장 35 예수께서 앉으사 열두 제자를 이르시되 누구든지 첫째가 되고자 하면 뭇사람의 끝이 되며 뭇사람을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리라 하시되
마가복음 9장 사부 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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