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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주의 대학생 선교기관

천안UBF

성경66권강해서

마가복음 9장 강해 일부 고난 후에 영광의 예수님

작성자 : 오요한
작성일 : 2011-07-27 00:00:00
조회수 : 4,556

문제지풀이(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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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9장 강해 일부 고난 후에 영광의 예수님
마가복음 9장 1-마가복음 9장 8
요절 마가복음 9장 2 엿새 후에 예수께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데리시고 따로 높은 산에 올라가셨더니 저희 앞에서 변형되사

우리의 복음은 우리가 잘 알 듯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십자가의 복음입니다. 우리는 십자가의 길을 가야 구원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십자가의 길을 가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우리가 십자가 후에 영광이 있다는 것을 보아야십자가의 길을 갈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 앞에 짓눌려 있는 시점에서 하나님 나라의 영광을 보셨기 때문에 십자가를 감당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에게도 하나님 나라의 영광을 보여 주사 십자가를 질 수 있는 힘을 주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나라의 영광을 보는 가운데 십자가를 힘있게 감당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십자가 후에는 하나님 나라가 있다.)

1절을 보십시오. "또 저희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기 섰는 사람 중에 죽기 전에 하나님의 나라가 권능으로 임하는 것을 볼 자들도 있느니라" 예수님 주위에는 여러 무리와 제자들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이들에게 자신이 십자가에 죽으실 것을 비로소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자들도 십자가를 져야한다고 가르치셨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이 십자가를 가르친 후에 많이 짓눌려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이들에게 하나님 나라가 권능으로 임하는 것을 볼 자들도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이 권능으로 통치하는 나라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이 성령으로 오셔서 통치하는 나라입니다. 예수님이 다시오셔서 통치하는 완전한 하나님 나라입니다. 이 나라는 새하늘과 새땅입니다. 이곳은 황금보석이 있는 아름다운 나라입니다. 질병도 고통도 슬픔도 싸움도 죽음도 없는 영원한 하나님 나라입니다. 예수님은 함께 있는 사람들 중에는 이런 하나님 나라를 볼 자도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들이 성령의 세례를 받음으로 하나님 나라를 마음에 경험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부활의 능력이 나타나는 것을 봄으로서 하나님 나라가 임하는 것을 볼 수도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들 중에 재림하실 영광의 예수님을 볼 자들도 있을 것이라는 소망을 심어 주십니다. 예수님은 이 말씀을 하시고 나서 세 제자에게 재림하실 예수님을 잠시 보여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사도요한에게도 밧모섬에서 재림하실 영광스러운 모습을 보여주셨습니다. 요한에게 천년왕국과 영원한 하나님 나라의 아름다운 모습을 보여주셨습니다. 사도요한이 이 하나님의 영광을 보았기 때문에 많은 고난을 감당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반드시 십자가를 져야합니다.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문은 오직 십자가의 좁은 문입니다. 십자가의 문 외에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 문은 없습니다. 예수님은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협착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도 바울도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계시록을 공부하면서 배우는 점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고난을 받아야하는 것입니다. 십자가 후에 하나님 나라가 있는 것을 알 때 우리가 이런 십자가를 힘있게 질 수 있습니다.

(십자가 후에 변형되신 예수님)

2절을 보십시오. "엿새 후에 예수께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데리시고 따로 높은 산에 올라가셨더니 저희 앞에서 변형되사"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십자가를 가르치신 후에 십자가를 반대하는 베드로를 사단이라고 호되게 책망하셨습니다. 십자가 없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려고 하는 자는 사단입니다. 십자가 없는 기독교는 사단의 기독교입니다. 에수님이 베드로를 책망하신 후 엿새가 지났습니다. 베드로는 항상 풀이 죽은 얼굴로 다녔습니다. 다른 제자들도 덩달아 어깨가 쳐져 있었습니다. 베드로는 양들과 제자들이 다 있는데서 사단이라고 책망하신 예수님께 대한 섭섭함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신다면 과연 예수님을 계속 따를 수 있을지 자신감이 없었습니다. 베드로는 신앙의 영적 위기를 맞이했습니다. 예수님 편에서도 영적인 위기였습니다. 제자들과 사람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십자가의 길을 가느냐 아니면 십자가의 길을 포기하느냐는 갈등이 있습니다. 물론 예수님도 십자가의 길을 가고 싶지 않으셨습니다. 십자가의 길을 포기하고 지상에서 왕이 된다고 선언하면 베드로와 제자들은 매우 좋아할 것입니다. 로마정부를 몰아내고 부강한 이스라엘을 건설하면 이스라엘 백성도 예수님을 메시야로 환영할 것입니다. 그러나 십자가를 포기하는 것은 하나님이 원치 않으십니다. 무엇보다 인류의 구원역사를 이룰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베드로가 힘들어한다고 십자가의 길을 포기할 수도 없었습니다. 분명히 하나님의 뜻은 십자가를 지고 십자가를 통하여 구원역사를 이루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사람을 기쁘게 하기보다 하나님을 기쁘게 하고자 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중대한 시점에 무엇을 하셨습니까? 예수님은 12제자 중에 베드로 야고보 요한을 데리시고 높은 산으로 올라가셨습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을 떠나서 하나님과 만날 수 있는 호적한 산으로 가셨습니다. 이 산은 다볼산으로 알려져 있으며 ‘채석장’이란 뜻입니다. 갈릴리 호수 서남쪽 약 20㎞ 지점에 위치한 해발 588m의 산입니다. 예수님은 기도를 통해서 십자가 후에 부활의 영광을 보시고 십자가를 질 수 있는 힘을 얻기를 원하셨습니다. 세 제자들에게 십자가 후에 부활하실 영광의 예수님을 보여주시고자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수제자에게만 특별히 부활의 영광을 보여주시고자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세 제자가 부활의 체험을 통하여 솔선수범하여 십자가를 지기를 원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산에 올라가서 제자들에게 각자 개인 기도를 하라고 방향을 주시고 자신도 기도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모습이 기도하는 어느 순간에 갑자기 변화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 후에 변형되실 부활의 모습이 되셨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생전의 예수님과 다른 모습으로 변형되었습니다. 이 모습은 시공의 제한을 받지 않는 모습입니다. 변형되신 예수님의 모습은 어떠합니까?

(해와 같이 변형되신 예수님)

3절을 보십시오. "그 옷이 광채가 나며 세상에서 빨래하는 자가 그렇게 희게 할 수 없을 만큼 심히 희어졌더라." 마태복음을 참고하면 예수님의 얼굴은 해처럼 밝게 빛나셨습니다. 예수님은 태양보다 더욱 밝으신 큰 빛으로 변화되었습니다. 큰 빛되신 예수님의 모습이 옷에 비쳐 옷까지 환하게 빛이 났습니다. 이 모습은 변형되기 전의 예수님과 대조적입니다. 변형되기 전의 예수님은 초라한 모습이었습니다. 이사야서를 참조하면 고운 모양도 풍채도 없었습니다. 간고와 질병의 고통도 아신다고 했습니다. 잘 드시지 못해서 예수님의 얼굴은 마른 편이었을 것입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예수님이 마른 넝쿨 같다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의 옷도 남루한 옷에 잘 빨아서 입지 못했기 때문에 꾀죄죄하였을 것입니다. 여기 저기 기운 곳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시자 사흘만에 부활하여 변화되십니다. 예수님은 강하고 영광스럽고 썩지 않는 신령한 새로운 몸으로 변화되십니다. 예수님은 시공을 초월하시는 새로운 몸으로 살아나십니다. 해처럼 밝은 새로운 모습으로 살아나십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이 얼마나 영광스럽게 빛났는지 부활의 메시지를 전하는 천사조차도 모양이 번개같고 옷은 눈과 같이 희었습니다. 계시록에 보면 사도요한이 본 예수님의 얼굴은 해가 힘있게 비치는 것 같았다고 하였습니다. 새하늘과 새땅에서는 예수님의 영광이 찬란하여 태양이 쓸데없다고 하였습니다.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님은 한마디로 해와 같이 변화되십니다. 빛되신 예수님은 부활 승천하셔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계십니다. 예수님의 빛은 역사 속에서 계속하여 비추고 있으십니다. 예수님은 바울에게도 큰 빛으로 찾아오셨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해와 같이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변화될 것을 아셨기 때문에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우리도 십자가를 지면 예수님처럼 해와 같은 모습으로 변화됩니다. 예수님은 마태복음 13장43에서 그 때에 의인들은 자기 아버지 나라에서 해와 같이 빛나리라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지금 약하고 추하고 썩는 몸이지만 그 날에는 강하고 영광스럽고 썩지 않는 모습으로 변화됩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과 같은 모습으로 변화됩니다. 그러나 부활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십자가의 고난을 받아야합니다. 한 알의 밀이 죽어야 새로운 밀로 태어나듯이 우리도 십자가를 져야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변화됩니다. 십자가 없는 부활의 변화는 없습니다. 십자가는 잠간이지만 부활은 영원합니다. 사도베드로는 고난 받은 성도들에게 이때의 사건을 회상하며 재림 신앙을 심었습니다. 베드로후서 1장 "16.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과 강림하심을 너희에게 알게 한 것이 교묘히 만든 이야기를 따른 것이 아니요 우리는 그의 크신 위엄을 친히 본 자라 17. 지극히 큰 영광 중에서 이러한 소리가 그에게 나기를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실 때에 그가 하나님 아버지께 존귀와 영광을 받으셨느니라 18. 이 소리는 우리가 그와 함께 거룩한 산에 있을 때에 하늘로부터 난 것을 들은 것이라“ 베드로는 이 변화산 사건을 통하여 재림할 예수님에 대해서 확신을 가졌습니다. 그리고 베드로도 고난을 받았습니다. 베드로는 고난 받는 성도들에게 다시 오실 영광의 예수님을 소망하며 십자가를 지도록 권면하였습니다.

(영광 중에 나타난 엘리야와 모세)

4절을 보십시오. "이에 엘리야가 모세와 함께 저희에게 나타나 예수로 더불어 말씀하거늘" 누가복음을 참조할 때 엘리야와 모세는 나타나서 예수님과 더불어 장차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실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엘리야는 선지자의 대표요. 모세는 율법을 대표합니다. 선지자와 율법의 말씀이 구약입니다. 이들이 나타나서 예수님의 십자가를 말씀한 것은 구약의 성경도 십자가의 그리스도를 증거함을 보여줍니다. 뿐만아니라 엘리야와 모세는 모두가 고난의 종입니다. 그들은 모두가 사명을 감당하는 것이 너무 힘이 들어서 하나님께 죽기를 기도했던 사람입니다. 자살 충동까지 느꼈던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현재는 변형되어 영광 중에 있습니다. 그들도 예수님과 같이 영광스럽게 변화되었습니다. 성경에 나오는 사람들치고 고난 없는 사람이 없습니다. 아브라함 이삭 야곱 믿음의 조상을 비롯하여 예수님의 그림자라고 하는 요셉이나 모세나 다윗 모두가 고난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마지막은 영광스러워졌습니다. 고난을 통한 영광 이것이 성경적인 메시야관입니다. 고난 없는 영광을 가르치면 기독교를 무너뜨리는 것입니다.

(고난 없는 영광을 원하는 베드로)

5,6절을 보십시오. “베드로가 예수께 고하되 랍비여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우리가 초막 셋을 짓되 하나는 주를 위하여, 하나는 모세를 위하여, 하나는 엘리야를 위하여 하사이다 하니 이는 그들이 몹시 무서워하므로 그가 무슨 말을 할지 알지 못함이더라” 베드로는 예수님이 기도하실 때 잠을 자고 있었습니다. 베드로는 추운 산에서도 잠을 잤습니다. 베드로는 기도하자고 하기만 하면 잠을 잤습니다. 잠을 자다가 이야기 소리에 깨어난 베드로가 영광스럽게 빛나는 예수님과 모세와 엘리야의 모습을 보고 예수님께 말씀했습니다.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우리가 초막셋을 짓되 하나는 주를 위하여 하나는 모세를 위하여 하나는 엘리야를 위하여 하시지요" 베드로는 이 말을 하면서 자신이 무슨 말을 하는지 몰랐다고 했습니다. 취중진담이라는 말도 있듯이 베드로가 마음 깊은 곳에 있는 본심을 이야기 한 것임을 보여 줍니다. 베드로는 물론 자기 집을 짓자고는 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베드로 요한 야고보는 각기 세 사람과 하나씩 나누어 살자고 하였을 것입니다. 베드로는 문제 많고 고난 많은 세상으로 내려가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렇다고 죽어서 하늘나라에 가고 싶지도 않았습니다. 그는 하늘과 땅 사이에서 영광 중에 천년만년 거하기를 원했습니다. 베드로의 마음 깊은 속에는 고난 없는 영광을 얻기를 원했습니다. 이것이 모든 인간의 공통된 심리입니다. 사람들은 고난 없이 영광을 얻기를 원합니다. 그래서 요즘 복권이 불티나게 팔립니다. 그러나 고난 없는 영광은 샤머니즘적인 것입니다. 사단의 기독교입니다. 십자가 지지 않고 열심히 교회다니고 기도하기만 하면 복받는다고 생각하는 것은 다분히 기복신앙입니다. 이는 불교를 믿고 절에 가서 절하는 것이나 조상신을 모시고 복받기 위해 제사 지내는 것이나 다름이 없습니다. 고난 없는 영광은 잘못된 것입니다. 고난없이 영광을 얻는다고 해도 그것은 복이 아니라 저주입니다. 통계적으로 복권으로 많은 돈을 번 사람들을 조사해보니 대부분이 정상 이하의 불행한 삶을 살고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도 베드로는 무의식 가운데 고난 없는 영광을 구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제자들이 예수님이 환상을 보여주신 의미를 깨닫지 못하자 직접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십자가를 받아들이라 말씀하심)

7절을 보십시오. "마침 구름이 와서 저희를 덮으며 구름 속에서 소리가 나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니 너희는 저희 말을 들으라." 구름은 하나님의 임재를 의미합니다. 하나님은 영광 중에 친히 나타나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을 사랑하는 아들이라고 높여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세 번 직접 말씀하셨는데 이곳에 나타나신 것이 그 세 번 중에 두 번째입니다. 하나님은 십자가를 지시고자하는 매우 중요한 순간에만 직접 나타나십니다. 하나님은 친히 나타나셔서 십자가를 말씀하시는 예수님의 음성을 들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께 경외심을 갖도록 하셨습니다. 그들이 들어야할 예수님의 말씀은 십자가의 말씀입니다. 마가복음 8장 “34. 무리와 제자들을 불러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35. 누구든지 자기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와 복음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 십자가가 하나님의 뜻이요. 하나님의 지혜요 하나님의 권능임을 친히 말씀하셨습니다. 고린도 교회는 십자가를 부끄럽게 여겼습니다. 헬라인은 지혜를 자랑했습니다. 로마인은 힘을 자랑하였습니다. 유대인은 표적을 자랑했습니다. 유대인은 십자가를 거리끼는 것으로 생각하고 헬라인은 십자가를 미련한 것이라고 말하고 로마인들은 십자가를 무능한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예수님의 십자가 외에는 자랑할 것이 없다고 말씀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십자가가 하나님의 지혜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말씀하였습니다. 요즘도 사람들은 부를 자랑하고 미를 자랑합니다. 출신학교를 자랑하고 학위를 자랑합니다. 세상권력을 자랑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오직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님을 자랑하고 십자가에서 고난 받는 것을 자랑해야합니다.

(영광을 보여주신 이유)

예수님이 십자가를 감당할 수 있었던 것도 부활의 영광을 바라보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부활의 영광을 십자가 전에 미리 체험했습니다. 그리고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을 생각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영원히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는 영광을 보셨습니다. 예수님은 이 영광을 보셨기 때문에 십자가의 짐시 고난을 참으실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세 제자에게 영광스런 당신의 모습을 보여 주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이는 영광 중에 안주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영광을 보고 십자가를 가볍게 감당하도록 하시기 위함입니다. 우리가 영광을 본다면 십자가를 가벼운 마음으로 질 수 있습니다. 실제적으로 세 제자는 하나님 나라의 영광을 보고 십자가를 모두가 기쁨으로 감당했습니다. 베드로는 십자가에 거꾸로 메달려 순교했다고 합니다. 야고보는 12사도 중에 최초의 순교자가 되었습니다. 요한은 꿇는 물에 들어갔으나 죽지 않았다고 합니다. 요한은 밧모섬에 유배되어 예수님의 고난에 평생을 동참했습니다. 사도 바울도 큰빛의 예수님의 영광을 보았습니다. 뿐만아니라 사도 바울은 셋째 하늘인 낙원에 올라가서 말할 수 없는 신비로운 말을 들었습니다.(고린도후서 13장) 그는 이런 영광을 보았기 때문에 기쁨으로 예수님의 고난에 동참했습니다. 그는 매를 맞고 돌로 침을 당하고 굶주리고 헐벗고 춥고 눌리는 생활을 했습니다. 이런 고난을 당하고도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롬8:18) 그는 장차의 영광을 보았기 때문에 현재의 고난이 하찮게 보였습니다. 그는 고난이 작게 보였기 때문에 날마다 죽고 날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본받는 생활을 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 가운데 십자가가 크게 보이는 분이 계십니까? 이 분은 십자가가 큰 것이 아닙니다. 부활의 영광이 얼마나 영광스러운지를 모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변형되신 것처럼 우리도 해와 같이 변형되는 날이 올 것입니다. 예수님이 큰 영광과 위엄으로 강림하실 때에 우리가 변화됩니다. 사도바울은 말합니다. "보라 내가 너희에게 비밀을 말하노니 우리가 다 잠잘 것이 아니요 마지막 나팔에 순식간에 홀연히 다 변화하리니 그 나팔 소리가 나마 죽은 자들이 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고 우리도 다 변화하리라. 이 씩을 것이 불가불 썩지 아니할 것을 입겠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으리라"(고린도 전서 15장) 우리는 씩지 않고 죽지 않는 신령한 몸으로 변화됩니다. 강하고 영광스럽고 신령한 모습으로 변형됩니다. 에베소서에 보면 예수님과 함께 우리도 하나님 우편에 앉히신다고 말을 합니다.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에베소서 2장5,6) 사도 바울은 미래에 이루어질 일을 현재형으로 쓰고 있습니다. 바울은 예수님이 하늘 우편에 앉으실 때 예수님과 함께 연합된 모습을 현재 본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과 함께 영원한 영광 중에 거할 것입니다. 새하늘과 새땅에서 영생복락할 것입니다. 우리도 예수님 안에서 하나님 나라에 있는 모습을 보아야합니다. 우리가 이 영광을 볼 때 십자가를 자원하는 마음으로 감당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이런 변형되신 모습을 생각할 때 현재의 고난을 넉넉히 감당할 수 있습니다.

(오직 예수만 남는다)

8절을 보십시오. "문득 둘러 보니 아무도 보이지 아니하고 오직 예수와 자기들뿐이었더라." 결국 선지자나 율법은 다 사라지는 것입니다. 나중에 남는 것은 오직 예수와 나만 남는 것입니다. 환상 뒤에 환상에 매여서는 안됩니다. 예수만 마음에 남아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만 마음에 남아야합니다. 우리 주위에 있는 모든 영광도 사라집니다. 천국에 가면 결국은 나와 예수님만이 남을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환상을 보았지만 혼자 간직하고 다른 사람에게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묵묵히 십자가를 감당하였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나라의 영광을 보고 십자가를 감당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아멘! 
마가복음 9장 강해 일부 고난 후에 영광의 예수님
마가복음 9장 1-마가복음 9장 8
요절 마가복음 9장 2엿새 후에 예수께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데리시고 따로 높은 산에 올라가셨더니 저희 앞에서 변형되사
마가복음 9장 강해 일부 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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