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바로가기
메인메뉴 바로가기
컨텐츠 바로가기

복음주의 대학생 선교기관

천안UBF

성경66권강해서

야고보서 2장 강해 이부 살아있는 믿음

작성자 : 오요한
작성일 : 2005-03-12 00:00:00
조회수 : 3,750

문제지풀이(2)

    iconB_20213A.hwp  (31.00KB)

    iconB_20213B.hwp  (46.00KB)

야고보서 2장 강해 이부 살아있는 믿음
말씀 야고보서 2장 14-야고보서 2장 26
요절 야고보서 2장 17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

2012년 유행한 말이 있습니다. 개콘의 박성효가 한 사람이 아니무니이다.입니다. 한 예를 들어보면 이렇습니다. 박성효가 들어와서 선생님 앞에 특별 전형하러 왔다고 합니다. 선생님이 지금 학교 입학한 것 아니야? 라고 묻습니다. 입학하지 않았스무니이다라고 합니다. 이 학교애 꼭 입학하고 싶으니이다고 합니다. 선생님이 그래 입학해서 제일먼저 하고 싶은게 뭔데 하고 묻습니다. 박성효는 입학해서 자퇴하고 싶스무니이다. 선생님이 입학하자마자 자퇴하는 사람이 어디 있어라고 묻습니다. 그러자 박성효는 말합니다. 사람이 아니무니이다. 사람같지 않은 사람을 말하는 것입니다. 전정 살아있는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요? 영혼과 육체가 함께 있어야 합니다. 육체 없는 영혼은 귀신이라고 합니다. 영혼 없는 육체는 시체라고 합니다. 믿음의 사람도 이런 점에서 구별해보면 귀신같은 믿음도 있고 시체와 같은 믿음을 가진 사람도 있습니다 2012년 런던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딴 양학선과 같이 역동적인 사람이 진정 살아있는 믿음을 가진 사람입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서 진정 살아 있는 믿음이 어떤 믿음인가? 배울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아멘!

(행함이 없는 믿음은 시체의 믿음입니다.)

14절을 보십시오. "내 형제들아 만일 사람이 믿음이 있노라 하고 행함이 없으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그 믿음이 능히 자기를 구원하겠느냐" 믿음은 중요합니다.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행위로 구원 받을 수 없고 오직 믿음으로 구원을 받을 수 있습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할례를 해야 구원 받는다고 말했습니다. 안식일을 지켜야 구원 받는 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우리가 면죄부를 사야 구원 받는 것이 아닙니다. 계단을 무릎으로 기어올라가서 구원받는 것도 아닙니다. 주일 예배를 드리고 헌금을 해야 구원 받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행함으로 구원받는 것이 아닙니다. 행함으로 구원받을 수 있다는 것은 타종교요 기독교 안에서 이단입니다. 오직 믿음으로만 구원 받을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구원은 믿음으로 받는데 축복은 행함으로 받는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이것도 잘못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축복을 받는 것도 오직 은혜입니다. 우리가 행위로 축복을 받는다고 하면 우리 가운데 축복을 받을 사람이 없습니다. 부모를 공경하라고 하였습니다. 부모에게 불손한 마음을 품은 사람이 없습니까? 이성을 보고 음욕을 품으면 간음이라고 하였는데 이성을 보고 음욕을 품은 사람이 없습니까? 이들은 축복은 고사하고 저주를 받을 것입니다. 우리가 오직 믿음으로 구원을 받고 오직 믿음으로 축복을 받는다는 것이 성경의 주제입니다. 이것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문재는 이런 믿음에 죽은 믿음이 있다는 것입니다. 아무 유익이 없는 믿음이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죽은 믿음을 구별하는 방법이 무엇일까요? 야고보서 저자는 행함이라고 합니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아무 유익이 없다고 합니다. 행함은 나무에 열매가 같습니다. 사과나무에는 언젠가 사과 열매가 맺혀야 합니다. 열매를 보면 나무를 알 수 있습니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자신을 구원할 수 없습니다.

(헐벗는 형제자매는 쓸 것을 주어야합니다.)

15,16절을 보십시오. “만일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일용할 양식이 없는데 너희 중에 누구든지 그에게 이르되 평안히 가라, 덥게 하라, 배부르게 하라 하며 그 몸에 쓸 것을 주지 아니하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야고보는 행함이 없는 믿음이 얼마나 헛된가를 예를 들어서 설명합니다. 우리의 친구 가운데 한 사람이 먹을 것도 없고 입을 것도 없는 빈털털이가 되었습니다. 찬바람은 불어오는데 오돌오돌 떨고 배에서는 꼬로락 소리가 들려옵니다. 그런 사람에게 우리가 "참 안 됐구려 따뜻하게 지내고 배불리 먹으시오." 말만 하고 아무 도움도 주지 않있습니다. 그 따위 신앙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이 사람에게는 라면 한 그릇이라도 끓여 주든지 아니면 자신이 입던 옷이라도 벗어 주어야 합니다. 믿음이 행함으로 나타나야 실제 유익이 있습니다. 요한일서 3:17,18절은 말합니다. "누가 이 세상재물을 가지고 형제의 궁핍함을 보고도 도와줄 마음을 막으면 하나님의 사랑이 어찌 그 속에 거할까 보냐 자녀들아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오직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 사랑도 마찬가지입니다. 궁핍한 형제를 보면 도와 주는 것이 사랑입니다. 궁핍한 형제를 보고도 도와주지 않는다면 그는 사랑이 아닙니다. 2012년에 성탄절에 새롭게 조명된 목사가 밥퍼목사의 최일도 목사입니다. 1988년 초겨울의 추위를 느끼는 아침, 청량리역 앞에서 한 노인이 간질로 쓰러진 것을 발견했습니다. 간질로 쓰러진 노인을 도와주려했지만 시간이 지나면 다시 일어날 것이라는 말을 듣고 그냥 갈길을 갔습니다. 저녁에 다시 돌아올 때 보니 그 노인은 돌아가셨습니다. 그때부터 노숙자와 부랑자에게 밥을 먹었냐고 묻기 시작했고, 가족 몰래 청량리 역 근처에 있는 무의탁 노인들에게 코&#54194과 양은 냄비를 갖고 라면을 끓여주기 시작했습니다. 청량리 588의 영업에 방해가 된다고 판단 된 조폭들은 물론이고 무료 급식 때문에 식당에 장사가 되지 않는 것을 걱정하는 사람들에게 맞기도 많이 맞았습니다. 그는 나눔 사역 5년째인 1993년에 위기가 닥쳤습니다 다일공동체 초기 온갖 협박과 회유에도 두렵지 않았지만 일을 하여 돈을 벌어오던 부인도 그를 떠나고 그를 보살펴주시던 전도사 어머니도 그를 떠나겠다고 하였습니다. 그날따라 공동체 내부는 유리창은 깨지고, 십자가는 부러지고, 커튼은 찢어져 있었습니다. 무작정 기차를 타고 용문산에 도착하여 삼일간 철야 금식 기도를 하였지만 응답이 없었습니다. 그는 삼일째 너무 배가 고픈데 어디서 밥짓는 냄새가 나서 찾아가보았더니 움막 같은 텐트에서 밥 냄새가 솔솔 났습니다. 염치불구하고 할아버지에게 밥을 구걸했더니 할아버지는 혀를 끌끌 차며 말씀하셨습니다. “젊은 사람이 이렇게 살면 쓰나. 청량리에 가봐. 최일도라는 목사가 자네 같은 사람에게 공짜로 밥을 나눠준대. 밥은 거기서 얻어먹고 다시 한 번 일어나야지….” 하나님의 목소리는 용문산 할아버지를 통해 들렸습니다. 다시 청량리에 돌아오니 아내도 어머니도 돌아왔습니다. 나눔의 집과 섬김의 집에 오는 사람들은 대부분 크고 작은 병을 갖고 있었습니다. 하루에도 몇 번씩 목숨이 위중한 그들을 업고 병원에 가도 돈이 없다는 이유로, 행색이 남루하다는 이유로 문전박대를 당하기 일쑤였습니다. 가톨릭 무료 병원을 환자를 업고 갔는데 개신교는 그렇게 큰 대형 교회도 많은데 무료병원 하나 없느냐 그만 데리고 오라고 핀잔을 하였습니다. 그러면서 병원을 세우겠다는 결심을 했고 2002년 10월 4일, 제7차 천사운동의 결과 천사 후원금을 낸 7000여 후원자들의 정성이 모여 70억 원을 모을 수 있었고 다일천사병원이 문을 열게 됩니다. 외래 환자는 물론이고 입원 환자도 치료를 받을 수 있는 전액 무료 병원이 탄생한 것입니다. 최일도 목사님과 같은 분이 바로 에수님의 사랑을 실천하는 사람입니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입니다)

17절을 보십시오.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 야고보 사도는 결론적으로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고 말합니다. 야고보는 죽은 믿음과 살아 있는 믿음을 구별합니다. 우리가 살아 있다는 것은 무엇인가 움직여야 합니다. 심장이 움직이고 뇌파가 움직여야 합니다. 죽은 자는 아무런 움직임이 없습니다. 심장이 뛰지 않고 피가 움직이지 않으면 온 몸이 차가워집니다. 몸에 혈색이 없어지고 푸른색으로 변하고 점점 고목처럼 썩어갑니다. 썩은 몸에서는 약취가 납니다. 우리는 시체를 볼 때 혐오감이 느껴집니다. 죽은 믿음도 마찬가지입니다. 죽은 믿음은 말은 잘하는 데 행함이 없습니다. 이런 믿음은 썩어서 냄새나는 시체와 같은 믿음입니다. 예수님은 한 비유를 들어서 행하는 믿음이 중요함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한 사람이 두 아들이 있었습니다.(마21:28-31) 아버지는 맏아들에게 "얘 오늘 포도원에 가서 일하라" 명했습니다. 그는 "예. 가겠습니다." 기쁘게 대답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가지 않았습니다. 반면에 둘째 아들은 반대였습니다. 아버지가 말씀하자 그는 "싫어요" 대답했습니다. 그러나 후에 뉘우치고 갔습니다. 누가 살아 있는 믿음을 가진 사람입니까? 둘째 아들입니다. 여기서 첫째 아들은 당시에 종교지도자들입니다. 그들은 말로는 하나님을 잘 믿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의 뜻대로 행치 않았습니다. 여기서 둘째 아들은 세리와 창기들을 의미합니다. 그들은 음란하고 이기적인 말을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회개하고 예수님을 영접했습니다. 이들은 사랑을 실천하였습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세리들과 창기들이 너희보다 먼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리라."(마태복음 21장 28-31) 행하는 믿음이 천국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마7:21,22)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자라야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재림하시는 날에 많은 사람이 예수님께 말합니다.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 그러나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한다." 왜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까?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떠나가라." 예수님이 그들을 알지 못하겠다고 한 이유는 행함이 없는 믿음이기 때문입니다. 서로 사랑하라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고서도 믿음으로 귀신을 쫓아내고 병자를 고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것보다 사랑하라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을 더욱 기뻐하십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기를 원하십니다. 한국에는 1200만의 성도가 있습니다. 이 숫자는 우리 나라 인구의 25%에 해당합니다. 바닷물은 소금의 비율이 2.8%만 있어도 &#50026지 않습니다. 그런데 한국은 25%의 성도가 있는데도 지금 정치 경제 사회 곳곳에 병리 현상이 생겨 파탄 지경에 이르고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이는 행함이 없기 때문입니다. 전법무부 장관 김태정씨가 구속되었습니다. 그 아내와 함께 그는 믿음 있는 사람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분의 처제가 온누리 교회 하용조 목사의 사모입니다. 김태정씨의 아내가 옷로비 사건의 주역입니다. 김영삼 전대통령은 이명박 대통령은 장로였습니다. 그러나 김영삼 아들이 많은 비자금을 조성하다가 구속되었다 풀려났습니다. 미국 TV의 유명한 말씀강사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알고 보니 여자와의 스캔들이 있었습니다. 참으로 이 시대 부끄러운 모습입니다. 기독교 인구는 많지만 살아 행하는 믿음은 적습니다. 죽은 믿음이 많습니다.얼마 전에 나온 통계에 따르면 미국의 십대들 중에 75%가 만 18세가 되기 전에 성경험을 했다고 합니다. 워싱턴 D.C.가 미국에서 제일 도덕적 문제가 심각한 곳 중에 하나인데 그 도시의 고등학교 여학생중에 65%가 16살 미만에 성관계를 가졌다고 합니다. 또 그 중에 반 이상이 3,4명의 상대와 관계를 가졌습니다. 그런데 더욱 충격적인 일이 있습니다. 불과 몇 년 전 C.C.C.에서 사역하는 어떤 분이 미국의 보수주의 성향을 가진 어떤 교회 19세들을 상대로 성경험에 대한 조사를 했는데 교회 안 다니는 학생들과 거의 차이가 없었습니다. 복음이 바로 전달되고 열심히 기도하고 신앙 생활하고 제자 훈련하는 교회들의 십대가 그렇습니다. 우리나라도 미국의 전철을 밟고 있습니다. 옛날 우리 모임에 나왔던 한 형제는 교회 성가대장이었지만 결혼전에 동거하고 있었습니다. 내 양이었던 한 형제는 신학생이었는데 같은 신학생 자매와 문란한 성관계를 맺고 있었습니다. 말만 있고 행햄이 없는 죽은 신앙이 얼마나 판치고 있는 지를 보여 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세상에 나가서 빛의 역할을 감당하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예배당에서는 빛된 삶을 사는 것 같은데 예배당 문을 열고 나가면 불신자처럼 살고 있습니다. 세상 사람처럼 똑 같이 술마시고 담배 피우고 이성과의 관계가 복잡합니다. 이들이 시체들의 믿음을 가진 자입니다. 우리가 살아 있는 믿음을 가지고 있다면 순종을 배워야 합니다. 십계명에 순종해야합니다 하나님이 시간의 주인이라는 믿음이 있다면 주일 예배를 나와서 주님께 시간을 드릴 수 있습니다. 믿음이 있다고 하면서 예배를 드리지 않는 것은 죽은 믿음입니다. 더욱 믿음이 있는 사람은 새벽기도도 참석할 수 있습니다. 물질에 대한 믿음이 있는 사람은 십일조를 구별하여 하나님께 드릴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 헌금을 드리기를 아까워 한다면 하나님이 물질의 주인이라는 믿음이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믿고 하나님께서 우리의 장래를 인도해주실 것을 믿는다면 우리는 믿음으로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라서 결혼할 수 있습니다. 모든 것은 다하겠다고 하면서 결혼은 믿음으로 하지 못하겠다고 한다면 이는 자신의 장래를 하나님께 온전히 맡기지 못한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나의 참구주로 믿는다면 우리는 양들에게 우리가 믿는 예수님을 증거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거룩한 하나님의 자녀라면 우리는 순결하게 살아야 합니다. 우리가 진실된 하나님의 자녀라면 우리 학생들은 거짓말을 말하지 말고 컨닝을 하지 말고 어른들은 뇌물을 받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가 행함이 있는 살아있는 믿음을 소유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프랑스와 러시아의 혁명이 일어나기 전에 기독교 국가였습니다. 그러나 기독교인들이 가난한 사람을 돌보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가난한 사람들이 혁명을 일으켜서 부자들도 망하게 되었습니다.

(네 믿음을 내게 보이라)

18절을 보십시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너는 믿음이 있고 나는 행함이 있으니 행함이 없는 네 믿음을 내게 보이라 나는 행함으로 내 믿음을 네게 보이리라 하리라." 귀신은 눈에 보이지 않듯이 믿음은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보이지 않는 믿음이 행함으로 눈에 나타나게 됩니다. 예수님은 행함을 통하여 겉으로 드러나는 믿음을 보시고 능력을 행하십니다. 우리는 우리의 믿음을 하나님께 보여 드려야 합니다. 마가복음 2장 5절에 보면 중풍병자를 데리고 온 네 친구가 아옵니다. 네 친구는 믿음으로 장애물을 뚫고 예수님께 나아왔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병자에게 죄사함을 주시고 병을 치료하여 주셨습니다. 여호와의 눈은 온 땅을 두루 감찰하사 전심으로 자기를 향하는 자의 믿음을 보시고 자신의 능력을 베풀어 주십니다. 우리는 행함으로 우리의 믿음을 하나님께 보여 드려야 합니다. 행함으로 보이지 않는 믿음은 귀신같은 믿음을 가진 사람입니다.

(귀신도 믿고 떨었습니다.)

19절을 보십시오. "네가 하나님은 한 분이신 줄을 믿느냐 잘하는도다 귀신들도 믿고 떠느니라." 이 말씀은 귀신들의 믿음을 가르쳐 줍니다. 처음에 예수님이 복음을 전할 때 대부분의 사람들은 예수님이 누구신지 몰랐습니다. 열두 제자까지도 예수님을 알지 못했습니다. 성경을 많이 안다고 하는 바리새인들도 성경박사인 사두개인들도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알지 못했습니다. 성경을 많이 안다고 하는 바리새인들도 성경박사인 사두개인들도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알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그때 귀신들은 예수님을 알아보았습니다. 더러운 귀신들이 어느 때든지 예수를 보면 소리질렀습니다. "나사렛 예수여 우리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우리를 멸하러 왔나이까 나는 당신이 누구인 줄 아노니 하나님의 거룩한 자니이다." (막1:24) 귀신들은 누구보다도 예수님을 대한 정확한 지식이 있었습니다. 그뿐 아닙니다. 그들은 정확한 지식 뿐 아니라 정서적인 느낌까지도 있었습니다. 사도 야고보는 귀신들이 믿고 떤다고 하였습니다. 그들은 예수님 앞에서 두려워 떨었습니다.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경외했습니다. 귀신은 감정적으로 하나님을 느끼고 있습니다. 요즘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사대성인 중에 하나로 알고 있습니까? 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보고도 무서워할 줄을 모릅니까? 하나님을 무서워할 줄 모르고 도둑질을 하고 음란한 짓을 하고 있습니까? 하나님을 두려워할 줄 모른다면 문제가 있습니다. 누구나 죄를 범하면 두려워하고 떨며 하나님 앞에 엎드리는 것이 정상입니다. 귀신도 하나님을 무서워하며 떠는데 죄를 짓고도 뻔뻔한 사람은 양심이 마비된 자입니다. 이들은 귀신만도 못한 믿음을 가진 사람입니다. 그러나 귀신들의 결정적인 문제가 무엇입니까?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귀신의 믿음입니다)

20절을 보십시오. "아아 허탄한 사람아 행함이 없는 믿음이 헛것인 줄을 알고자 하느냐" 귀신들의 믿음은 행함이 없는 믿음을 가진 것입니다. 귀신의 믿음의 가장 큰 약점은 사람의 눈에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행동으로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귀신은 예수님과 관계를 맺기를 싫어하고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치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군대 귀신 들린 자를 만나서 "더러운 귀신아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 명령하셨습니다. 그러자 귀신 들린 자는 달려와서 큰 소리로 부르짖었습니다.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여 나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원컨데 하나님 앞에 맹세하고 나를 괴롭게 마옵소서"(막5장 7절) 귀신은 예수님이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아들이신 것을 믿었습니다. 예수님께 기도도 드렸습니다. 큰 소리로 부르짖는 기도까지 하였습니다. 그가 큰소리로 부르짖는 것을 볼 때 그는 확신을 갖고 있었습니다. 요즘에 많은 사람이 기도하지 않습니다. 기도를 해도 모기만한 소리로, 기어들어가는 기도를 합니다. 이들은 귀신만도 못한 자들입니다. 귀신의 믿음은 모든 면에서 우리의 신앙에 모범이 될만합니다. 그러나 귀신은 한 가지 치명적인 약점이 있습니다. 귀신은 예수님과 관계성 맺기를 거절했습니다. 그는 예수님과 관계를 맺으면 맺을수록 괴로웠습니다. 귀신은 예수님을 알고 느끼지만 사랑하지는 않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따라 행하기를 싫어했습니다. 지식과 감정은 예수님을 알지만 의지적으로 결단하지 않았습니다. 여기서 볼 때 우리가 말씀을 듣고 행함이 없을 때 이는 육체 없는 귀신과 같은 믿음임을 알 수 있습니다. 요즘 성경을 공부해서 성경에 대해 해박한 지식을 가진 사람이 있습니다. 성경을 공부하고 감격해서 눈물까지 흘리는 사람이 있습니다. 또 열심히 부르짖어 기도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생활을 보면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과 똑같이 행동합니다. 세상 사람들과 똑같이 술마시고 노름하고 노래방 게임방 비디오방을 전전합니다. 이들은 귀신의 믿음을 가진 사람입니다 우리는 어찌하든지 말씀대로 행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야고보는 산 믿음에 대해서 아브라함과 라합의 예를 들어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행하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21-24절을 보십시오.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그 아들 이삭을 제단에 바칠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 네가 보거니와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하게 되었느니라 이에 성경에 이른 바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니 이것을 의로 여기셨다는 말씀이 이루어졌고 그는 하나님의 벗이라 칭함을 받았나니 이로 보건대 사람이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고 믿음으로만은 아니니라" 아브함은 75세에 신앙을 출발했습니다. 그는 본토 친척 아비집을 떠나고 조카 롯을 믿음으로 키웠습니다. 롯이 포로로 잡혀 갔을 때는 목숨을 걸고 싸워서 롯을 구하기도 했습니다. 하나님께 십일조의 물질을 드리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한 명의 아들이 없었습니다. 그는 두려움과 절망 속에 있었습니다. 이때 하나님게서 아브라함을 찾아오셨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셨습니다. "하늘을 우러러 뭇별을 셀 수 있나 보라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 그는 자신의 나이가 85세요 사라의 경수가 끊어진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을 때 믿음이 생겼습니다. 그는 죽은 자를 살리시는 하나님, 없는 것을 있는 것같이 부르시는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을 믿는 아브라함을 의롭다고 여기셨습니다. 하나님은 그 믿음을 의롭게 여기셨습니다. 그러나 다시 14년이 흘러도 자식이 없었습니다. 하나님은 그를 99세에 다시 찾아오시고 이름을 바꿔주시고 할례를 행했습니다 아브라함은 전능하신 하나님을 다시 믿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믿고 아내와 잠을 잣습니다. 하나님은 믿고 행한 그에게 이삭을 아들로 주셨습니다. 그는 믿음으로만 의롭다함을 받았다면 그의 기록은 여기서 끝나야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를 다시 한번 시험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믿음이 성장하도록 도우셨습니다. 그 내용이 창세기 22장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창세기 15장이나 17장 신앙에서 머물러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22장 신앙으로 나가야합니다. 하나님은 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서 내가 네게 지시하는 한 산 거기서 그를 번제로 드리라." 아브라함은 사랑의 하나님, 능력의 하나님, 좋으신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믿었기 때문에 아들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서 아들을 잡고자 칼을 높이 들었습니다. 그는 그 무엇보다 하나님을 더 사랑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사랑과 순종을 보시고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셨습니다. "그 아이에게 네 손을 데지 말라 아무 일도 그에게 하지 말라 네가 네 아들 네 독자라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창22장 12) 하나님은 이제야 라고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순종을 할 때 그의 믿음이 온전한 믿음임을 보시고 인정해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만민이 복을 얻으리니 네가 나의 말을 준행하였음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로 볼 때 그는 믿음으로만 인정을 받은 것이 아니라 순종과 행함으로 인정을 받은 것입니다. 나무가 열매를 맺듯이 진정한 믿음은 행함으로 열매를 맺습니다.

(라합은 행하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25절을 보십시오. "또 이와 같이 기생 라합이 사자들을 접대하여 다른 길로 나가게 할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 당시에 여리고 백성들은 이스라엘이 홍해를 건너고 요단강을 건넌 것을 들었습니다. 그들은 상천하지의 하나님을 믿고 심히 두려워하고 간담이 녹았습니다. 여기까지는 여리고 백성이나 라합이나 똑같습니다. 여리고의 모든 사람들은 이를 알고 믿고 느끼고 있었을지라도 행함이 없었습니다. 아무도 이스라엘 정탐군을 영접하고 선대하지 않았습니다. 이스라엘 정탐군을 죽이고자 하였습니다. 다만 라합만이 정탐군을 숨겼다가 여리고 군사가 나간 후에 내어 보냈습니다. 라합은 정탐군에게 내가 너희를 선대하였은즉 너희도 내 아버지의 집을 선대하도록 여호와로 내게 맹세하고 내게 증표를 내라고 하였습니다.(수2:12) 이렇게 행함이 있는 라합은 구원을 받았지만 행함이 없는 다른 사람들은 다 멸망하고 말았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었으면 주의 종을 선대해야합니다. 주의 종을 선대하는 사람이 구원을 받습니다.

(로버트 믿음을 가진 자가 있습니다)

26절을 보십시오. "영혼이 없는 몸이 죽은 것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 새벽 메시지를 듣고 한 자매가 아주 지혜로운 질문을 하였습니다. 행함은 있는데 믿음이 없는 사람은 어떻게 되나요? 이 사람은 몸은 있는데 영혼이 없는 몸과 같은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은 로버트 믿음이라고 합니다. 연극인 믿음입니다. 광해 왕이 된 남자에 나오는 이병헌과 같습니다. 이병헌은 광해군 역할을 하지만 광해군이 아닙니다. 드라마 속의 탈렌트의 분명히 움직이지만 나의 모습이 아닙니다. 법정스님은 선행을 행하였습니다. 그러나 믿음은 없었습니다. 이런 사람도 구원 받지 못합니다. 행함은 있으나 믿음이 없는 사람이 이와 같습니다. 이들은 바리새인처럼 형식적인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입니다. 이런 자들도 구원을 받지 못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우리가 믿음이 있고 행함이 있어야합니다. 행함보다는 믿음이 먼저입니다. 그러나 믿음이 있다면 행함이 따라서 와야 합니다. 살아 있는 믿음은 행하는 믿음입니다. 살아있는 믿음은 믿을 뿐만 아니라 행동까지 따르는 사람입니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입니다. 우리가 행하는 믿음으로 구원을 받을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십자가의 강도는 분명히 믿음으로만 구원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도 살아 있었다면 행함이 있었을 것입니다.

(믿음으로 행하는 자가 구원받습니다.)

어떤 사람이 그런 말을 했습니다. 요즘 신자들 가운데 바다에 빠지면 입만 동동 떠서 다닐 사람이 많다고 하였습니다. 이는 입으로는 약장사처럼 예수님을 잘 믿는데 행함이 없는 사람이 많다는 것입니다. 이들은 맛을 잃은 소금이요 빛을 잃은 들불들입니다. 이들은 아무 쓸데가 없습니다. 이런 시대에 야고보서는 엄청난 도전을 줍니다. 이 시대 구원을 받을 사람이 얼마나 될까요? 입만 아니라 온몸이 구원을 받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요? 우리 모임이 이런 시대에 살아있는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우리는 살아계신 하나님을 믿어야합니다. 그러면 행하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행하는 믿음으로 입뿐만 아니라 온 몸이 함께 구원 받는 자가 되길 기도합니다. 우리에게 행함이 중요합니다. 그러나 행함보다는 믿음이 더 중요합니다. 아멘!
야고보서 2장 강해 이부 살아있는 믿음
말씀 야고보서 2장14-야고보서 2장 26
요절 야고보서 2장 17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
야고보서 2장 강해 이부 끝입니다.




번호 제목 작성자 작성일
10 [야고보서] 야고보서 5장 강해 이부 믿음의 기도 오요한 2012-01-02
9 [야고보서] 야고보서 5장 강해 일부 주의 강림이 가까우니라 오요한 2012-01-02
8 [야고보서] 야고보서 4장 강해 이부 우리의 생명은 안개다 오요한 2012-01-02
7 [야고보서] 야고보서 4장 강해 일부 하나님을 가까이 하라 오요한 2011-12-26
6 [야고보서] 야고보서 3장 강해 이부 하나님의 지혜 오요한 2011-12-26
5 [야고보서] 야고보서 3장 강해 일부 혀를 제어하라 오요한 2005-03-12
4 [야고보서] 야고보서 2장 강해 이부 살아있는 믿음 오요한 2005-03-12
3 [야고보서] 야고보서 2장 강해 일부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말라 오요한 2005-03-12
2 [야고보서] 야고보서 1장 강해 이부 자유롭게 하는 온전한율법 오요한 2005-03-12
1 [야고보서] 야고보서 1장 강해 일부 시험을 참는자 오요한 2005-03-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