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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주의 대학생 선교기관

천안UBF

성경66권강해서

야고보서 2장 강해 일부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말라

작성자 : 오요한
작성일 : 2005-03-12 00:00:00
조회수 : 4,099

문제지풀이(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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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고보서 2장 강해 일부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말라
야고보서 2장 1-야고보서 2장 13
요절 야고보서 2장 1절

최근 뉴욕 타임즈에서는 나이 오십세를 전후한 간부사원 엘리트 사원들이 보다 젊게 보이기 위해서 피눈물나는 노력을 하고 있다는 내용의 기사를 실은 적이 있습니다. 앞을 다투어 옆머리를 짧게 치기도 하고, 노화 방지 크림을 열심히 바르기도 하고, 몸에 착달라붙는 살빼기 용 속옷을 입기도 하고, 노화된 피부각질을 긁어 내기도 합니다. 갖은 방법으로 젊게 보이고자 합니다. 그러나 이런 것들은 이미 옛날 방법이라고 합니다. 요즘은 성형수술이 유행을 합니다. 얼굴 주름살을 펴고 목에 있는 주름살을 제거하고, 눈 아래의 지방질을 걷어내고, 가슴과 허벅지에 실리콘을 넣어서 근육을 탄탄하게 보이도록 수술을 합니다. 한 해에 미국에서 2만 명의 엘리트가 이런 수술을 받고 있는 데 직종 직업 연령충을 상대로 조사해 보면 간부사원 중에서 4부의 1 정도가 수술을 받는 것이라고 하는데 이것은 사회적으로 큰 문제가 되고 있습니다. 이들을 생체공학적 간부라고 아예 이름을 붙였습니다. 한번 수술하는데 1만 7천 달러가 든다고 합니다. 우리나라 돈으로 2천만원이 넘게 드는 돈입니다. 이렇게 사람들이 노력하는 것은 사람들을 외모로 평가하기 때문입니다. 불록하게 나온 배는 옛날에는 사장님 배라고 좋아했지만 요새는 똥배라고 별로 좋아 하지 않습니다. 또 벗겨진 이마 주름진 얼굴 등은 사람을 늙어보이게 하고 낡고 고루한 인격이라는 인상을 줍니다. 늙어서 무능한 축에 몰리면 감원 대상이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어떻게든 젊어 보이려고 별의별 수단을 다 쓰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우리를 외모로 평가합니다. 그러나 오늘 말씀에서 야고보 선생은 우리를 외모로 평가하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사람을 차별하여 대하지 말라)

1절을 보십시오. "내 형제들아 영광의 주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너희가 가졌으니 사람을 차별하여 대하지 말라" 야고보는 수신자들을 형제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영광의 주 그리스도를 믿는 형제들입니다. 예수님은 영광의 주이지만 볼품없는 모습으로 오셨습니다. 우리는 초라한 주님을 영광의 주님으로 대합니다. 그런데 당시 성도들은 성도들을 영광의 주를 믿는 영광스러운 형제들로 대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사람을 외모로 취했습니다. 차별하지 말라는 말씀은 개역 성경에는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말라고 나옵니다. 외모로 취했다는 말은 사람을 빈부귀천에 따라서 차별대우했다는 말입니다. 우리도 부족한 형제를 영광의 주님처럼 대해야 합니다. 사랑의 교회의 앞에서 3줄은 의사 변호사석이라고 합니다. 소망교회에는 소나타 이상의 차를 탄 사람은 가기 어렵다는 말도 있습니다.

(빈부를 차별할 수 있습니다)

2-3절을 보십시오 “만일 너희 회당에 금 가락지를 끼고 아름다운 옷을 입은 사람이 들어오고 또 남루한 옷을 입은 가난한 사람이 들어올 때에 너희가 아름다운 옷을 입은 자를 눈여겨 보고 말하되 여기 좋은 자리에 앉으소서 하고 또 가난한 자에게 말하되 너는 거기 서 있든지 내 발등상 아래에 앉으라 하면" 회당에 금가락지를 끼고 아름다운 옷을 입은 부자가 들어오면 그를 눈여겨 보았습니다. 그에게 여기 좋은 자리에 앉으소서 하며 제일 좋은 상석에 앉혔습니다. 반면에 허름한 옷을 입은 들어오면 거들떠 보지도 않고 "자리가 부족하니 거기 뒤에 서 계시오." "만약 앉고 싶으면 여기 내 발 밑 땅 바닥에 앉으시오."라고 푸대접을 했습니다. 손에 금가락지를 끼었다는 것은 단순히 부의 상징뿐만 아니라 지위의 상징이기도 했습니다. 이처럼 그들은 사람을 빈부귀천에 따라서 차별대우했습니다. 돈 있는 사람, 비싼 옷 입는 사람, 지위가 있는 사람, 좋은 차 타는 사람들은 대우 받고, 돈 없고, 빽없고, 지위가 없는 사람들은 대접을 받지 못했습니다. 이는 물질주의와 권위주의와 같은 세상 가치관에 영향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이런 가치관 가운데 사는 사람들은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돈을 벌고자 하고, 신분 향상을 위해 물불을 가리지 않습니다. 그들은 할 수만 있으면 비싼 옷을 사 입고 할 수만 있으면 큰 차를 타고, 할 수만 있으면 넓은 아파트에서 살고자 합니다. 그래야 대접 받기 때문입니다. 우리나라 사람들도 외모로 사람을 평가합니다. 사람들은 혈연 지연 학연 등으로 사람을 평가합니다. 그래서 T.K. P.K. K.S. 라는 말이 나온 것입니다. 특히 지역 감정을 갖고 평가하기도 합니다. 일류병이 생겨났습니다. 외모로 사람을 취하기 때문에 석유 한 방울 나지 않는 나라임에도 불구하고 대형 승용차들이 거리를 누비고 있습니다. 작은 차를 타고 다니면 사람들이 아저씨 아주머니라고 부르고 큰 차를 타고 다니면 사장님 사모님이라고 부릅니다. 소나타를 타고 다니면 "얘. 소나 타고 다니는 거야!"라고 말한다고 합니다. 이는 세상적인 가치관입니다. 기독교 가치관이 있는 독일이나 네들란드를 가보면 거의 프라이드형 차들이 많습니다. 우리나라는 살아가는 집의 평수로 사람을 평가하기 때문에 필요 이상으로 넓은 아파트에서 살아갑니다. 옷을 가지고 평가하기 때문에 허영에 들뜬 여인들이 명품백을 들고 일억원짜리 밍크 코트를 입고 다닙니다. 우리나라 명품가격은 계속하여 올라가고 있습니다. 장안에 화제가 되고 있는 억대의 옷로비 사건도 이런 허영심에서 나온 것입니다. 교회내에서도 부자를 존귀하게 대하고 가난한 사람을 푸대접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들은 그 사람을 귀히 대접하는 것이 아니라 돈을 보고 헌금 많이 할 것을 기대하면서 돈을 귀하게 대하는 것입니다. 목사 장로 권사 집사 등을 계급으로 알고 이를 보고 사람을 차별대우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나 직분은 계급이 아니라 섬김의 직분이 다른 것입니다. 목사만 성직자이고 일반 성도는 평범한 평직자가 아닙니다. 목사의 길만이 성적의 길이 아니고 평신도의 길은 평직의 길이 아닙니다. 목자도 staff목자와 평신도 목자와 차이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또는 full time 목자와 평신도 목자의 차이도 있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 안에서는 사장이나 회장이 등록을 하면 월척을 낚았다고 한다고 합니다. 그러면 일반 사원이 등록하면 뭐가 됩니까? 피라미입니까? 교회는 외모로 사람을 평가 해서는 안됩니다. 몸매나 얼굴을 갖고 평가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얼마 전에 명문대학의 대학원까지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한 젊은 여자가 단지 외모가 시원치 않다는 이유로 연달아 취업에 실패하자 이를 비관해서 자살을 했습니다. 젊은 이들은 결혼할 때에 거의 대부분이 외모부터 봅니다. 다른 영적인 것은 볼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결정적인 실수인 줄 알면서도 번번히 이렇게 평가 합니다.

(차별하는 것은 악한 생각입니다.)

4절을 보십시오. “너희끼리 서로 차별하며 악한 생각으로 판단하는 자가 되는 것이 아니냐” 우리는 서로 차별대우하지 말아야합니다. 외모로 사람을 판단하는 자는 악한 생각을 하는 자입니다. 악하다는 말은 사단적이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절대 사람을 외모로 평가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외모로 쓰지 않으십니다. 역사에 나타난 존경받는 인물은 대체로 잘 생긴 사람이 아닙니다. 얼마 전 어떤 잡지에 이런 기사가 났습니다. 그 유명한 이스라엘 여수상이었던 골다 메이어 수기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나는 어렸을 때 하도 못생겨서 모든 사람으로부터 업신여김을 받았다. 심지어 부모도 나를 시원치 않게 여겼다. 그래서 에라 공부나 해야겠다 하고 열심히 공부하였더니 오늘날 정치가가 되었다." 여자로서 얼굴이 못생긴 것은 아주 기가 막힌 어려움이지만 바로 그 때문에 이스라엘의 수상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소크라테스는 얼굴이 울퉁불퉁하고 눈도 작은 데다가 튀어나오고 키도 조그맣고 정말 못생긴 사람 중에 하나로 사람들의 조롱을 받으며 살았습니다. 우리가 존경하는 칼빈도 빼빼 마른 몸매, 눈에는 항상 눈꼽이 끼고, 신경질적인 사람이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가 오늘의 큰 역사를 이루어 놓았습니다. 에이브라함 링컨은 몸과 얼굴이 깡마르고 다리는 유달리 길어서 고릴라라는 별명이 붙어 다녔습니다. 정치가들까지도 조소하고 비웃는 인물이었다고 합니다. 성경에 나타난 가장 위대한 인물 사도 바울은 여러분이 아시는 대로 키는 작고, 시력도 좋지 않고, 주기적으로 발작하는 병까지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어떠합니까? 예수님은 연한 순과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줄기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고, 우리의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모양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예수님의 외모는 아름다움을 조금도 발견할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도 예수님을 믿는 우리가 외모로 사람을 평가해서 되겠습니까? 믿기지 않는 이야기인데 이런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어떤 사람이 강남에서 가게를 하는데 진열해 놓은 물건을 양심대로 정가 표를 붙여 놓았다고 합니다. 대체로 하면 3만원하는 핸드백이지요. 그런데 몇주일이 지나도 하나도 안 팔리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너무도 화가 나서 0하나를 더 붙여서 30만원으로 값을 매겨 놓았습니다. 그랬더니 당장 그 핸드백이 다 팔리더라는 것입니다. 손님 하나가 그 핸드백의 가격을 보고 조금 깎자고 했는데. 절대로 못깎겠다고 했더니 고스란히 30만원을 주고 사갔습니다. 사람들은 필요한 물건을 사는 것이 아니라 이것이 얼마짜리라는 기분에 사는 것입니다. 이들은 사람들에게 잘 보이고자 하는 허영심 때문에 사는 것입니다. 사람들에게 얼마짜리 핸드백이라고 자랑하려는 허영심 때문에 장사꾼에게 당하는 것입니다. 사람이 몸짓이 크면 거인이라고 합니다. 마음이 크면 거물이라고 합니다. 마음이 커야 인물인 것입니다. 그런데 외모가 뭐 그리 문제가 됩니까? 우리는 외모에 신경을 쓰며 살아가야 할 이유가 없습니다. 외모란 엄격히 말해서 내가 보는 내가 아니라 다른 사람이 보는 나의 모습입니다. 사실은 내가 보는 것이 진실입니다. 내가 보는 것보다 더욱 진실한 것은 하나님이 보는 나의 모습입니다. 남이 보는 나에게 신경을 쓸 때에 이것이 체면이요, 위신이요, 허영이요 바라기요. 거품인 것입니다. 야고보는 분명히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중심과 미래를 보시는 하나님)

사무엘상 16장에 보면 사무엘이 다윗에게 기름을 붓는 사건이 나옵니다. 사무엘은 이새의 맏아들 엘리압을 보는 순간 기름을 붓고자 했습니다. 아마 그는 키도 크고 용모도 빼어났고 흠 잡을 데가 없었던 것 같습니다. 그 때 하나님께서 "그 용모와 신장을 보지 말라. 나의 보는 것은 사람들과 같지 아니하니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엘리압을 취하지 않고 들에서 양똥이나 치던 이새의 말째인 다윗을 왕으로 기름를 부었습니다. 그는 중심이 하나님께 있었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그의 아버지도 왕의 자격이 없다고 생각하던 자요 자신 스스로도 자신을 낮게 평가하고 있던 자였습니다. 그는 왕을 선발하는 자리에 나오지도 않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중심을 보시고 그를 세우셨습니다. 하나님은 중심을 보시고 믿음을 보십니다. 섬김과 헌신을 보십니다. 하나님은 십자가를 더 많이 지는 자를 더 사랑하십니다. 고난을 더 많이 받는 자를 사랑하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받기 위해서는 힘써 고난을 받아야합니다. 다윗왕에 앞서서 하나님은 사울을 왕으로 세우셨습니다. 사울은 키가 큰 사람입니다. 잘난 사람입니다. 그는 효심도 있고 매너도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사울이 처음에는 겸손하더니 점점 교만해졌습니다. 변심하고 인내력이 부족했습니다. 나중에는 아멜렉과의 싸움에서 이겼다고 자기 기념비를 세워놓고 자기 자랑을 합니다. 그러할 때에 하나님께서 사울을 버리셨습니다. 너는 안 되겠다고 그를 폐위 시켜 버립니다. 그리고 내 마음에 합당한 사람을 세우겠노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다윗을 세우십니다. 그는 키도 작고 목동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의 중심에 합한 사람이었습니다. 그 중심이란 곧 정직함이이요 신앙적인 충성심입니다. 그는 아버지의 양떼를 지킬 때에 충성했습니다. 그는 자신에게 맡겨진 일이면 어떤 일이든지 충성을 다했습니다. 사울을 대신하여 왕이 될 수 있는 왕자 요나단과도 아주 친하게 지냈습니다. 다윗은 시기와 질투를 모르는 사람입니다. 다윗은 책임을 질 줄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이스라엘에 가뭄이 드니 내 잘못이라고 합니다. 자녀들이 반란을 일으켰는데도 내 잘못이라고 합니다. 사울은 다윗을 죽이고자 했으나 다윗은 사울을 죽이지 않았습니다. 그는 자신을 죽이고자 하는 사울을 떠나서 피난 길에 오릅니다. 사울은 이런 다윗을 찾아서 토벌 작전을 나섭니다. 다윗은 사울을 굴 속에서 만납니다. 다윗은 사울을 죽일 수 있는 기회를 만났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사울을 죽이지 않았습니다. 왜 입니까? 하나님이 기름 부어 세우신 종이니까 내가 미워해서는 안되고 손을 댈것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듯이 사울을 경외합니다. 그는 모든 일을 하나님께 맡겼습니다. 그것이 다윗의 중심이요 다윗의 진실입니다. 어떤 피해를 입어도 설령 내가 죽어도 하나님이 맡겨주신 신하의 본분을 다하겠다는 것입니다. 그는 하나님이 세우신 하나님의 종을 경외했습니다. 그는 결코 의인이 아닙니다. 그리 깨끗한 사람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의 중심이 곧은 사람입니다. 하나님은 다윗을 얼마나 좋아하는지 모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그에게 복을 주십니다. 다윗이라는 사람이 800번이나 나옵니다. 예수님께서도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의 과거도 보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두가지 기준으로 보십니다. 하나는 깊은 중심을 보십니다. 삭개오의 중심을 보시고 뽕나무에 올라간 그를 부르셨습니다. 사람들은 그를 매국노라고 손가락질했지만 하나님은 그의 내면에 잘못을 뉘우치며 메시야를 기다리고 있음을 보셨습니다. 귀신 들린지 18년이 되어서 아무도 사람 취급하지 않는 여자를 보시고 아브라함의 딸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과부가 두 렙돈을 헌금하는 것을 보고 다른 부자보다 더 많이 헌금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는 구차한 중에서도 그의 전부를 넣었기 때문입니다. 다음으로 예수님은 우리의 미래를 보십니다. 예수님은 나다니엘에게 네가 하늘이 열리는 것을 보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이 베드로를 처음 보실 때 무식한 어부였습니다. 그는 모래알처럼 의지가 약했습니다. 그는 큰 소리를 치는 big mouth였습니다. 그에게는 반석다운 면이 조금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를 보는 순간 장차 게바라 하리라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반석이라는 뜻입니다. 사실 베드로는 계집종 앞에서도 세 번 예수님을 부인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후에 변하여 반석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변화될 그 모습을 보셨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일개 촌부로 보지 않으셨습니다. 그에게서 열국의 아비가 될 미래를 보시고 그에게서 메시야가 태어나고 복의 근원이 될 비전을 보셨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2000년 후의 모습을 보셨습니다. 우리도 외모로 사람을 평가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도 하나님의 마음으로 중심을 보고 미래를 보아야 합니다.

(가난한 자가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습니다.)

5,6a절을 보십시오.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들을지어다 하나님이 세상에서 가난한 자를 택하사 믿음에 부요하게 하시고 또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나라를 상속으로 받게 하지 아니하셨느냐 너희는 도리어 가난한 자를 업신여겼도다" 하나님께서 가난한 자들에게 어떻게 대하시는가?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가난한 자들을 택하셔서 믿음에 부요하게 하십니다. 예수님도 가난하게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고아나 과부나 세리나 창녀를 택하셔서 구원역사를 이루셨습니다. 그들이 예수님을 믿으면 하나님 나라를 상속으로 받게 하십니다. 가난한 자는 일반적으로 마음도 가난하고 겸손합니다. 하나님은 어린 아이처럼 겸손한 자에게 하나님 나라를 계시하여 주십니다. 예수님은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가난한 자를 축복하시고 하나님 나라로 인도하시지만 교인들은 가난한 자를 업신여겼습니다. 가난하다고 무시합니다. 그들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는 악한 자들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겸손하고 온유하고 배고픈 자들이 들어가는 나라입니다.

(부자들은 대체로 교만합니다)

6b-7절을 보십시오. “부자는 너희를 억압하며 법정으로 끌고 가지 아니하느냐 그들은 너희에게 대하여 일컫는 바 그 아름다운 이름을 비방하지 아니하느냐” 당시 성도들은 가난한 자를 괄시하고 부자를 존중히 여겼습니다. 이는 부자들을 통해서 도움을 받고자 하는 이기심 때문입니다. 그들은 사람보다도 사람들 뒤에 있는 돈을 보고 고개를 숙인 것입니다. 그러나 부자들은 어떠합니까? 부자들을 존귀하면 그들이 교만해집니다. 이들은 마음이 교만하여서 가난한 자들을 압제하고 법정으로 끌고 가서 고소하였습니다. 그들은 주로 하나님의 아름다운 이름을 비방하였습니다. 삼성같은 대기업은 하청업체를 착취하는 경영인이 있습니다. 대부분은 사람들의 인격보다 사람들이 가진 소유에 대해서 관심을 갖습니다. 부자들은 하나님의 아름다운 이름을 훼방합니다. 선진국 사람들이 마음이 부유하여 예수님을 잘 믿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마음이 부유한 자들에게 은혜를 베푸실 수 없습니다. 우리는 공부 잘 하는 사람들을 더 존중히 여기기 쉽습니다. 그러나 똑똑한 사람들은 자기의 유익을 추구하고 나중에 법정에 무식한 사람들을 끌고 갑니다. 자신의 유익에 따라서 사람을 대할 때 자승자박으로 자기가 당합니다. 교회가 예수님과 같은 마음을 잃어버리면 교회에 생명력을 상실합니다. 결국 굽은 나무가 선산을 지키듯이 가난한 사람들이 교회를 지키는 것을 알아야합니다. 예수님은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보다 더욱 어렵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소유를 보시는 것이 아니라 마음이 겸손한가? 아니면 부유한가?를 보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마음을 따라서 중심을 보고 겸손한 자를 존중히 여겨야 합니다.

(우리는 이웃을 사랑해야합니다.)

8절을 보십시오. “너희가 만일 성경에 기록된 대로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 하신 최고의 법을 지키면 잘하는 것이거니와” 하나님은 우리의 중심을 보십니다. 우리의 중심에 사랑이 있는지를 보십니다. 우리가 사랑이 있을 때 외모로 사람을 평가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 하신 최고의 법을 지키면 잘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아프리카의 우간다 난민이나 동티모르의 원주민은 사랑할 수 있습니다. 이들은 우리에게 고통이나 피해를 주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같이 사는 부부나 공동생활방에 있는 동역자를 사랑하기 힘이 듭니다. 이들은 우리에게 자존심을 상하게 하고 아픔을 주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새계명을 주노니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의 형제가 얼마나 귀합니까? 부자는 귀하고 가난한 자는 천한 것이 아닙니다. 이는 물질에 따라 정해지는 상대적인 가치입니다. 무엇의 가치는 그것에 얼마의 대가를 지불했느냐?에 따라 결정됩니다. 예수님은 우리 형제를 위해서 목숨을 버리셨습니다. 십자가에서 피 흘려 돌아가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예수님의 피값으로 사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위해서 독생자를 주셨습니다. 우리의 형제 자매는 천하보다 귀합니다. 우리는 이렇게 귀하게 대해야 합니다.

(차별대우는 십계명을 어기는 죄를 짓는 것입니다.)

9-11절을 보십시오. “만일 너희가 사람을 차별하여 대하면 죄를 짓는 것이니 율법이 너희를 범법자로 정죄하리라 누구든지 온 율법을 지키다가 그 하나를 범하면 모두 범한 자가 되나니 간음하지 말라 하신 이가 또한 살인하지 말라 하셨은즉 네가 비록 간음하지 아니하여도 살인하면 율법을 범한 자가 되느니라” 우리가 범죄자라고 하는 것은 육법전서의 모든 법을 어겨서 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만 어겨도 범죄자입니다. 예를 들어서 간음하지 말라는 법을 어기면 이는 간음죄를 짓는 것이요 살인하지 말라는 법을 어기면 살인 죄를 짓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웃을 사랑하라는 법은 이 모든 법보다 최고의 법입니다. 모든 법을 포괄하는 법입니다. 우리가 가난한 자를 괄시하는 것은 살인이나 간음죄보다도 더욱 큰 이웃사랑을 어긴 죄입니다. 가장 큰 죄를 짓는 것입니다. 우리는 무엇보다 사랑의 계명을 지켜야합니다.

(긍휼은 심판을 이기고 자랑합니다.)

12,13절을 보십시오. "너희는 자유의 율법대로 심판 받을 자처럼 말도 하고 행하기도 하라 긍휼을 행하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긍휼 없는 심판이 있으리라 긍휼은 심판을 이기고 자랑하느니라" 자유의 율법은 복음 편에서 이해한 율법입니다. 우리는 복음 편에서 율법을 보면 율법은 우리에게 자유를 주시는 것이요 복을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은혜와 긍휼과 사랑으로 율법을 싸서 보는 것입니다. 우리는 자유의 율법대로 심판받을 자입니다. 우리는 심판을 생각하며 말도 하고 행하기도 해야합니다. 무엇보다 서로 사랑해야합니다. 하나님은 긍휼히 여기는 자를 긍휼히 여겨 주십니다. 우리가 가난한 자를 긍휼히 여긴다면 하나님은 우리가 비록 죄인일지라도 우리를 긍휼히 여기사 용서해 주십니다. 우리를 하나님 나라로 인도하여 주십니다. 그러나 긍휼히 여기지 않는 자에게는 긍휼없는 심판이 있습니다. 우리가 가난한 자에게 긍휼이 없다면 하나님은 우리를 긍휼 없이 심판하십니다. 하나님의 논리는 사랑의 논리 긍휼의 논리입니다. 세상의 논리는 생산성 경제성입니다. 율법의 논리는 율법의 조문을 지켰느냐를 칼같이 따집니다. 긍휼이 없는 자는 세상의 원리대로 심판을 받을 것입니다. 이들은 하나님이 예비하신 지옥에 갈 것입니다.

(긍휼의 중요성)

우리는 일만 달란트 빚진자를 잘 알고 있습니다. 이는 250만년의 품삯이라고 합니다. 그는 빚을 다 갚지 못하여 자신과 처 자식까지 모두 노예로 팔려가게 되었습니다. 그는 주인에게 조금만 참아 달라고 호소했습니다. 그는 울며 자신의 잘못을 깊이 회개했습니다. 주인은 그가 평생을 벌어도 그의 빚을 다 갚을 수 없는 것을 아시고 그를 긍휼히 여기셔서 그의 모든 빚을 탕감하여 주셨습니다. 돈보다 그 사람을 귀히 여기고 그 사람이 변하여 새 사람이 될 것을 믿어 주었습니다. 그는 빚이 탕감 받자 날아갈 듯 기뻤습니다. 그런데 그에게 백데나리온 빚진 자가 있었습니다. 이는 백일 동안의 품삯입니다. 그는 자신에게 빚지은 자의 목을 끌고 왔습니다. 그가 참아주소서 사정사정해도 듣지 않고 긍휼히 여기지 않고 옥에 가두었습니다. 이를 본 동관들이 민망하여 주인에게 이 모든 사실을 알렸습니다. 그러자 주인은 대로하여 말합니다. "내가 너를 불쌍히 여김과 같이 너도 네 동관을 불쌍히 여김이 마땅치 아니하야?" 주인은 일만달란트 빚 지었던 자의 빚을 탕감해 주었던 것을 취소했습니다. 그리고 그 빚을 다 갚기까지 그를 감옥에 가두었습니다. 그가 백데나리온 빚지었던 자에게 긍휼을 베풀지 않자 주인도 그에게 긍휼을 베풀어 주지 않으셨습니다. 그가 긍휼을 베풀었다면 주인도 그에게 긍휼을 베풀어 주었을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긍휼을 받았습니다. 우리는 과거 죄와 질병과 가난으로 빚진 자였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이만큼 용서하시고 건강케 하시고 부요케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긍휼의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는 우리가 하나님께 받은 긍휼에 기초하여 서로 사랑하고 긍휼을 베풀어야 합니다. 우리보다 못사는 사람, 그리고 우리보다 병든 사람, 우리에게 잘못한 사람에게 긍휼을 베풀고 사랑해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긍휼을 베풀어 주실 것입니다. 우리는 양과 염소의 비유를 잘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마지막날 양과 염소를 나누고 심판하십니다. 양은 우편에, 염소는 왼편에 놓으십니다. 하나님의 심판의 기준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지극히 작은 소자에게 긍휼을 베풀었느냐가 심판의 기준입니다. 주리고 목마르고 헐&#48280고 옥에 갇힌 자를 어떻게 대했느냐?에 따라서 그들을 심판하십니다.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우리가 가난한 자를 괄시 하지 말아야 하는 이유는 예수님이 그들의 모습으로 오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사랑한다면 우리 주위에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을 도와주어야합니다. 이런 얘기가 있습니다. 어는 흑인이 백인 교회에서 쫓겨나서 울고 있었습니다. 그는 울면서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흑인이라고 교회에서 쫓아내니 이는 말이 되는 것입니까? 억울합니다. 하나님은 백인의 하나님뿐 아니라 흑인의 하나님도 되지 않습니까?" 그가 하나님께 한창 기도하자 예수님이 나타나셔서 말씀했다고 합니다. "얘야 너는 한 번 쫓견난 것을 가지고 뭘 울고 그러느냐? 나는 매일 쫓겨난단다." 우리가 가난하고 연약한 자를 무시하는 것은 바로 예수님을 무시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지극히 작은 소자 하나를 예수님을 대하듯 귀히 대할 수 있어야 겠습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을 차별하면 하나님도 우리를 차별합니다. 이렇게 차별이 있는 나라가 지옥입니다.

(긍휼의 내면을 갖자)

결론적으로 하나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말라" 우리는 형제를 외모로 취하지 말아야 합니다. 자기 자신도 외모를 취해서는 안 됩니다. 그의 중심에 믿음을 보고 그의 장래를 보아야겠습니다. 무엇보다 긍휼과 사랑의 내면을 가져야 합니다. 우리의 중심이 하나님을 무서워하고 신뢰하고 감사하고 사랑하는 내면으로 가득해야하니다. 우리가 긍휼의 사람이 될 때 우리는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아멘!

야고보서 2장 일부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말라
야고보서 2장 1-야고보서 2장 13
요절 야고보서 2장 1절
야고보서 2장 강해 일부 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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