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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주의 대학생 선교기관

천안UBF

성경66권강해서

요한복음 21장 강해 삼사부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작성자 : 오요한
작성일 : 2009-11-29 00:00:00
조회수 : 3,969

문제지풀이(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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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21장 강해 삼부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요한복음 21장 15-요한복음 21장 17
요절 요한복음 21장 15절 그들이 조반 먹은 후에 예수께서 시몬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하시니 이르되 주님 그러하나이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이르시되 내 어린 양을 먹이라 하시고

오늘 요한복음을 강해를 마칩니다. 요한복음에는 생명이라는 단어가 20번 나옵니다 요한은 생명이라는 말을 빛이라는 말로도 표현합니다. 빛이라는 단어는 23번 나옵니다. 합하면 43번 나오는 것입니다. 사도 요한은 요한복음을 쓴 목적이 생명을 얻게 하기 위해서라고 말씀하십니다. 사랑이라는 단어는 무려 57번 나옵니다.
요한복음을 한 마디로 하면 사랑과 생명의 복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랑과 생명은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사랑을 할 때 생명이 태어나고 사랑을 할 때 생명이 자라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주시고 우리에게 하나님을 사랑하고 자신을 사랑하고 제자들끼리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오늘 요한복음 마지막 말씀에서 베드로에게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세 번 물으십니다. 예수님이 이렇게 세 번이나 반복하여 물으신 적이 없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에게 사랑을 고백합니다. 예수님은 베드로가 고백할 때마다 내 양을 먹이라고 세 번이나 부탁하고 떠나십니다. 예수님의 양에게 생명을 주라는 말입니다. 이 시간 우리가 예수님께 사랑을 고백하고 예수님의 양을 먹이는 자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먼저 조반을 먹인 후)

15절을 보십시오. “그들이 조반 먹은 후에 예수께서 시몬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하시니 이르되 주님 그러하나이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이르시되 내 어린 양을 먹이라 하시고”

오늘 말씀은 예수님과 제자들이 조반 먹은 후에 일어난 사건입니다. 예수님은 사랑하시느냐 물으시기 전에 먼저 베드로를 사랑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이른 아침에 비치 파티를 열어주셨습니다. 추운 그들을 위해서 숯불을 피워주셨습니다. 배고픈 그들을 위해서 떡과 고기를 구워서 섬겼습니다. 예수님은 밤새도록 고기를 잡는데 실패한 제자들에게 153마리의 고기를 잡게 해주셨습니다. 그 고기를 가져오라고 하여 하나님이 직접 요리를 해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이들에게 떡과 고기만 대접한 것이 아닙니다. 그들에게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예수님의 살과 피를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몸을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쳐서 사랑하여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베드로를 만나는 처음부터 사랑하여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그를 사랑하셔서 그를 처음 만났을 때 그가 많은 고기를 잡게 도우셨습니다. 그를 항상 가까이 데리고 다니셨습니다. 변화산이나, 야이로의 딸을 살릴 때나, 겟세마네 동산에 데리고 가셨습니다. 그의 크고 더러운 발을 닦아주셨습니다. 그가 세 번 부인한 후에 두 번 나타나셨습니다. 부활의 주님은 그의 허물을 한번도 말씀하지 않으시고 두려워하는 그에게 평안을 주셨습니다. 베드로는 부활의 주님을 만나고도 고기 잡으러 갔습니다. 예수님은 고기 잡으러간 그를 변함없이 사랑하여 153마리 고기를 잡게 하시고 해변의 파티를 해주셨습니다.

(사랑은 용서)

파티 후에 도마는 이를 닦으러 가고 나다나엘은 부른 배를 소화시키려 산보를 갔습니다. 예수님은 베드로를 따로 불러 세웠습니다.(23절 참조) 베드로는 따로 부르자 불안하고 두려웠을 것입니다. 자신이 예수님을 세 번 부인한 것이 생각나서 책망 받을 준비를 하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너 어떻게 그럴 수 있니? 앞으로는 그렇게 하지 않겠지? 하고 한 마디 책망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오직 한 마디 질문하였습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다만 그가 예! 라고 대답할 수 있는 한 가지 질문을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베드로를 사랑하시고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물으셨습니다. 예수님은 내가 너를 이렇게 사랑하는데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 물으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원하시는 것은 돈이나 충성이 아니었습니다. 사랑이었습니다. 예수님이 하신 사랑으로 베드로도 예수님을 사랑하기를 원하였습니다. 예수님이 원하는 딱 한 가지는 예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베드로가 예수님에게 사랑을 고백함으로 그 죄사함 받기를 원하셨습니다. 예수님을 사랑하면 그의 모든 허물을 덮어주십니다. 세 번 부인 했느냐 예수님을 버리고 도망갔느냐 물고기 잡으러 갔느냐 아무 것도 중요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을 위해서 목숨을 버리느냐 순교하느냐 그것이 중요하지 않습니다. 다만 예수님을 사랑하느냐가 중요합니다. 지금 예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중요합니다. 현재 예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있다면 모든 것은 용서받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지금 사랑한다면 무엇을 했어도 괜찮습니다. 예수님은 그 한 가지만을 원하십니다.

(순수한 사랑)

예수님은 "요한의 아들 시몬아“ 라고 부르셨습니다. 아버지 요한을 부른 것은 성까지 넣어서 부른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성이 없어 누구의 아들 누구라고 부릅니다. 예수님은 베드로를 부름 받기 전의 모습으로 부르셨습니다. 예수님은 시몬이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고백한 후에 이름을 베드로로 바꾸어 주셨습니다. 그가 교회에 기초가 될 것이라고 소망을 심어주셨습니다. 그러나 이번에는 예수님이 사명을 주시기 전으로 돌아가서 질문하셨습니다.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시몬아 하며 질문하십니다.
나에게 오요한아! 라고 부르지 않고 오학영아! 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신앙생활하기 전 자연인으로 돌아가 대답하라고 하십니다. 모든 직책을 내려 놓고 자연인으로 돌아가 생각해보라는 말입니다. 사도라는 직책, 수제자라는 명칭을 떼고 대답하라고 하십니다. 사랑은 모든 것을 버려야합니다. 대리, 과장, 목자, 아버지, 아들, 모든 것을 버리고 주님 앞에 서야 합니다.
아프리카 왕자의 결혼하기가 생각납니다. 아프리카 왕자가 신부감을 구합니다. 많은 신부감들이 결혼하기 위해서 옵니다. 그들은 신랑을 사랑하여 온 것이 아닙니다. 왕비가 될 수 있다는 기대감에 온 것입니다. 왕자라는 신분을 보고 온 것입니다. 왕자는 미국에 가서 청소부를 하다가 한 여인을 만나서 사랑을 합니다. 그녀는 왕자 자체를 순수하게 사랑하였습니다. 왕자는 그녀를 아내로 삼아 데리고 옵니다. 이것이 순수한 사랑입니다.

(다른 사람이 사랑하는 것보다 더)

예수님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고 물으셨습니다. 하나님도 우리에게 사랑받기를 원하십니다. 베드로는 수제자입니다. 수제자는 누구보다 예수님을 사랑해야합니다 예수님은 베드로를 수제자로 회복시켜주시고자 하십니다. 베드로는 누구보다 예수님을 더 사랑하였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예수님을 보았을 때 배를 타고 예수님께 왔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추운 바닷 속을 풍덩 뛰어들어 헤엄쳐 갈 정도로 예수님을 사랑하였습니다. 물고기를 가져오라고 하였을 때 헤엄쳐온 베드로가 고기를 가져온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베드로가 다른 어떤 제자보다 예수님을 더 사랑하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그 사랑을 고백하기를 원했습니다. 종은 울려야 종이고 사랑은 고백해야 사랑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사랑은 고백해야 사랑입니다.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것보다 더)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는 말은 베드로가 사랑하는 다른 것보다 예수님을 더 사랑하느냐는 뜻도 있습니다. 이 사람을 이것들로 번역된 데도 있습니다. 베드로는 에수님을 사랑하였습니다.
그러나 민족도 사랑하였습니다. 민족의 독립을 꿈꾸었습니다. 아내도 사랑하고 장모도 사랑하였습니다. 무엇보다 자기 자신을 사랑하였습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사랑하여 모든 것을 버렸지만 한 가지 버리지 못한 것이 있습니다. 자신의 꿈을 버리지 못하였습니다. 예수님이 왕이 되면 한 자리 하고자 하였습니다. 그가 예수님보다 자신의 꿈을 더 사랑하였기 때문에 예수님을 세 번 부인하였습니다. 베드로가 지금까지 실패한 원인은 예수님을 더 사랑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더 사랑할 때 모든 것을 회복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무엇보다 더 사랑해야하는 분이십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창조주이십니다.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구원하신 구원자이십니다. 우리는 어떤 피조물보다 예수님을 더 사랑해야 합니다. 우리는 마음과 목숨과 힘과 뜻을 다하여 주님을 사랑해야합니다.
나는 이번 여름수양회에서 십자가의 사랑으로 소감을 썼습니다. 십자가에서 나의 죄악을 보았습니다. 나에게는 나에게 보내주신 사람을 더 사랑하는 문제가 있는 것 같았습니다. 아니면 하나님이 맡기신 교회를 더 사랑하는 것이 문제인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전혀 그러지 않았습니다. 나에게는 나를 사랑하는 것이 있었습니다. 나는 나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고 나를 미워하는 자를 미워하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나에게 나를 사랑하는 자가 나를 죽이는 자임을 알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나를 미워하는 자가 나를 사랑하는 자임을 알게 도우셨습니다. 이를 통하여 하나님보다 나를 더 사랑하는 것이 결국은 죽음의 길을 알게 하셨습니다. 나보다 하나님을 더 사랑하는 것이 생명의 길임을 알게 하셨습니다. 나의 실패의 원인은 하나님보다 나를 더 사랑하는데 있었습니다.
내가 실패를 회복하기 위해서는 나보다 하나님을 더 사랑해야합니다. 주님을 나를 사랑하여 자신의 아들까지 주셨습니다. 내가 하나님보다 나를 더 사랑하면 질투하십니다. 지옥보다 잔인하게 질투하십니다. 제가 더욱 주님을 사랑하겠습니다. 나를 죽이고 주님을 사랑하겠습니다. 사랑의 표시로 지금까지는 성경을 연구하였습니다. 이제는 사랑의 표시로 하루에 세 시간 기도하고자 합니다. 때로는 세 시간 기도하는 것이 어려울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세 시간 기도하면 두 시간은 넉넉히 할 수 있습니다. 제가 아직 기도에서는 어린아이입니다. 제가 기도를 잘 배울 수 있기를 원합니다. 기도에서 성숙하기를 원합니다. 그리고 나에게 보내 주신 사람들을 사랑하기 원합니다.

(아가페 사랑)

예수님이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물으신 사랑은 아가페입니다. 아가페는 하나님의 사랑으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타인 중심의 사랑입니다. 에로스로는 자기 중심의 사랑입니다. 나의 이익을 위해서 그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아가페는 그를 위해서 나를 희생하고 섬기는 것입니다. 오래 참는 사랑입니다. 모든 것을 참아내고, 믿어주고, 바라고, 견디는 사랑입니다. 예수님은 아가페로 베드로를 사랑하셨습니다. 그의 필요를 도와주었습니다. 이제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예수님을 아가페로 사랑하기를 원하십니다.

(타인 중심의 사랑)

한 며느리가 있었습니다. 시어머니가 매일 혼내키고 동네방네 욕을 하며 다녔습니다. 시어머니만 만나도 가슴이 벌렁벌렁하고 무서웠습니다. 며느리는 죽을 것 같아서 의원을 찾아 갔습니다. 의원은 시어머니가 가장 좋아하는 것이 무엇인가 물었습니다. 인절미라고 하였습니다. 그러자 백일동안 아침마다 인절미를 새로 해드리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면 시어머니가 죽을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며느리는 기뻐서 말랑말랑한 인절미를 매일 해서 시어머니에게 드렸습니다.
시어머니는 저년이 죽을려고 환장을 했나? 안 하던 짓을 하네라고 하였습니다. 두 달을 해드리자 시어머니는 감동하여 동네를 다니며 며느리 창찬을 하며 다녔습니다. 세 달이 지나자 진심으로 며느리를 사랑하고 며느리를 칭찬하였습니다.
며느리는 걱정이 되었습니다. 이제 정말 시어미니가 죽으면 어떻게 하나 하는 걱정이 생겼습니다. 며느리는 다시 의원을 찾아가서 시어머니가 죽지 않게하는 법을 물었습니다. 그러자 의원은 너를 미워하던 시어머니는 죽었다고 말했습니다.
이것이 아가페의 사랑입니다. 아가페는 내가 미워하는 사람이라도 그 사람이 좋아하는 것을 해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런 사랑으로 베드로를 사랑해주셨습니다. 그가 고기를 많이 잡게 하셨습니다. 이제는 베드로도 예수님을 그 사랑으로 사랑하기를 원하십니다. 한국인은 어떨 때 ‘사랑’이란 감정을 가장 크게 느끼는 걸까. 설문조사 결과 응답자의 42.7%가 ‘나의 마음이나 행동을 누구보다 잘 이해해줄 때’라고 답했습니다. ‘매력적인 모습을 봤을 때’(16%)나 ‘힘든 순간 내 곁을 묵묵히 지켜줄 때’(15.3%)보다 3배 가까이 높은 수치입니다. 반면 ‘나에게 사랑을 표현할 때’라고 응답한 비율은 5%에 그쳤습니다.

(겸손한 사랑)

베드로는 네가 나를 더 사랑하느냐는 질문에 예, 내가 사랑합니다. 사랑하겠습니다. 라고 자신 있게 대답하지 못하였습니다. 베드로는 주여 그러하외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십니다. 라고 대답하였습니다. 베드로는 자신있게 사랑을 고백할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네가 닭 울기 전에 세 번 나를 부인할 것이라고하였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다른 사람은 예수님을 버려도 자신은 버리지 않겠다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을 위해서 목숨까지 버리겠다고 맹세하였습니다. 예수님을 세 번 부인하고 나서 더 사랑한다고 고백할 자신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을 사랑하는 것은 사실이었습니다. 예수님을 부인한 것은 연약하여 부인한 것이지 사랑하지 않아서 부인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은 창조주로서 이런 베드로의 마음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주께서 내가 사랑하는 줄을 아신다고 겸손하게 고백하였습니다.

(은혜로 하는 사랑)

연인들은 뜨겁게 사랑을 고백하고 결혼합니다. 그리고 사랑이 식어지면 이혼합니다. 서태지와 이지아가 그렇게 사랑하여 결혼했는데 이혼했다는 것이 세간의 화제입니다. 사랑하는 것도 우리의 힘으로 되지 않는 것을 보여줍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예수님을 사랑할 수 있습니다. 주께서 아시나이다. 이 말은 나는 모른다는 말입니다. 베드로도 자신이 자신을 몰랐습니다. 자신이 사랑을 고백하고 다시 예수님을 부인할지 몰랐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자신을 자신보다 더 아신다고 말합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버리고 도망 갈 것을 아셨습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세 번 부인할 것도 아셨습니다. 그는 예수님이 나의 장래를 나보다 더 잘 아시지 않습니까? 라고 말합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게속 사랑할지 사랑하지 못할지 주님은 아신다고 말합니다. 내가 주님을 사랑한다는 주권을 넘겨드렸습니다. 그때 우리는 은혜 속에서 예수님을 사랑할 수 있습니다. 사랑도 성령이 주신 은혜라는 것을 알아야합니다.

(사랑의 표시)

예수님은 사랑의 고백을 들으신 후에 내 어린 양을 먹이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예수님을 사랑하는 표시로 예수님의 양을 먹이라고 하셨습니다. 양들의 목자가 되라는 말입니다. 예수님은 양들에게 떡을 먹이라고 하신 것은 아닙니다. 베드로가 금과 은이 없는 것을 잘 아셨습니다. 예수님은 베드로가 양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먹이기를 원하였습니다.
말세가 되면 밥이 없어 주림이 아닙니다. 물이 없어 갈증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못한 기근이 온다고 하였습니다. 성령의 생수를 마시지 못하는 갈증이 옵니다. 베드로는 이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쳐야 합니다. 그들이 예수님을 믿고 성령의 생수를 마시도록 도와야 합니다. 그리고 실제로 사랑으로 떡도 먹여야 합니다.

(예수님의 양)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내 양을 먹이라고 하였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양을 먹여야 합니다. 이 세상에는 예수님의 양이 있고 예수님의 양이 아닌 자가 있습니다. 요한복음 10장 26,27절에는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내 양이 아니므로 믿지 아니하는도다 내 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 나는 그들을 알며 그들은 나를 따르느니라” 예수님의 양은 예수님의 음성을 듣고 따르는 자들입니다.
예수님의 양이 아닌 자는 예수님을 믿지 않고 따르지 않는 자들입니다. 이들은 양이 아니요. 염소들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 예수님의 양이 있다는 것을 믿어야합니다. 예수님의 양이 아닌 자를 먹일 필요는 없습니다. 불신하고 불순종하는 자를 먹일 수는 없습니다. 예수님께 순종하는 자들을 골라서 먹여야 합니다. 우리는 양들이 나의 양이 아니라 예수님의 양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의 양이므로 예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먹여야 합니다. 베드로의 양을 돌보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양을 돌보는 것입니다. 욕심으로 양을 돌보아서는 안 됩니다.

(어린 양)

예수님은 어린 양을 먹이라고 하였습니다. 어린 양은 절대적으로 보살핌이 필요한 양입니다. 어머니가 먼 곳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어린 아기를 놓고 가야 합니다. 어머니는 자신이 사랑하고 자신을 사랑하는 자에게 아이를 맡기고 갑니다. 이런 경우에 베이비시터가 그 어머니를 사랑한다면 책임감을 갖고 아이를 먹이고 돌보아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의 양들은 말 그대로 양입니다. 그들은 연약합니다. 무지합니다. 어디로 가야 할지도 모릅니다. 죄와 사망권세와 싸울 수 없습니다. 우리는 이런 어린 양들을 책임감을 가지고 먹여야 합니다. 베드로의 고백을 들으신 후에 예수님은 두 번째와 세 번 째로 시몬에게 물으셨습니다.

(세 번의 고백)

16,17절을 보십시오. “또 두 번째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이르되 주님 그러하나이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이르시되 내 양을 치라 하시고 세 번째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주께서 세 번째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므로 베드로가 근심하여 이르되 주님 모든 것을 아시오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 양을 먹이라”

에수님은 두 번째로, 세 번째로 다시 베드로에게 물으셨습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예수님이 이렇게 반복하여 물으신 것은 다시 생각해보고 마음 깊은 곳에서 대답하기를 원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세 번째 묻자 베드로는 근심하였습니다.
다른 성경에는 불안하다고도 나오고 슬펐다고도 나옵니다. 예수님이 자신의 사랑을 믿지 못하는 것이 아닌가 슬펐습니다. 예수님을 세 번이나 부인하여서 못 믿으시는 것이 아닌가 근심하였습니다. 또 다시 자신이 예수님을 부인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불안도 밀려왔습니다. 예수님은 베드로가 이렇게 근심하는 것을 알면서도 세 번이나 물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마음 중심에서 주님을 사랑한다는 고백을 원하십니다.

(왜 예수님을 사랑하지 않았는가?)

전 미국 대통령이었던 지미 카터가 쓴 책 중에 살아있는 신앙이라고 하는 책이 있습니다. 그 책 중에 지미 카터가 한평생을 지향했던 그의 좌우명이 나옵니다. 그의 좌우명은 "왜 최선을 다하지 않았는가?" Why not your best?하는 것입니다. 왜 최선을 다하지 않았는가……. 이 좌우명을 선택하게 된 사연이 있습니다. 그가 해군장교가 되기 위하여 해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임관 바로 직전에 그 유명한 해군 제독 릭오버 제독과 함께 면담할 기회를 가졌었답니다. 제독께서 전술과 전략에 대하여 얼마 이야기한 후에 화제를 좀 부드럽게 바꾸면서 "성적은 어땠는가?" 하고 물었습니다. 지미 카터의 성적이 좋았기 때문에 점수와 등수를 말씀드렸습니다. 제독께서는 다시 물었습니다. "그 성적이 자네가 최선을 다한 결과인가?" 하고 물었습니다. 카터는 식은땀이 났습니다. 벌벌 떨리는 것을 느꼈습니다. "최선을 다했는가?" 그는 두려운 마음으로 대답했습니다. "글쎄요. 최선을 다했다고야 말씀드릴 수 없겠지요." 그때 제독은 무섭게 쏘아보며 다시 질문을 합니다. "왜 최선을 다하지 않았는가?" 대답을 못했습니다. 다른 학생들보다 상대적으로 잘했기 때문에 최선을 다하지 않은 것입니다. 제독은 다시 물었습니다. "왜 최선을 다하지 않았는가, 라고 묻고 있지는 않느냐?" 그는 더더욱 대답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 후에 왜 최선을 다하지 않았는가를 좌우명으로 삼았다고 합니다.
예수님은 마지막 날에 우리에게 물으신다면 네가 나를 사랑했느냐일 것입니다 양을 몇 명 쳤는가? 헌금을 얼마나 했는가? 주일날 빠진 날은 몇 번인가 이런 질문이 아닙니다. 왜 예수님을 사랑하지 않았는가? 일 것입니다. 왜 예수님을 가장 사랑하지 않았느가 물으실 것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인생의 좌우명으로 삼아야 합니다.

(우리의 한 가지 계명)

우리가 해야 할 한 가지는 예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 사랑으로 이웃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출애굽한 후에 이스라엘 백성에게 한 가지 계명을 주셨습니다. 우리의 하나님은 유일하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마음과 목숨과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해야 합니다. 십계명에서 네 가지 계명은 하나님에 대해서 가르치는 계명입니다. 나외에 다른 신을 두지 말라 너를 위하여 우상을 만들지 말라 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 안식일을 거룩히 지키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을 한마디로 하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가장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 무엇이냐 물었을 때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주신 단 하나의 계명은 서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우리 주위에는 사랑스러운 것이 많습니다. 우리는 눈에 보이는 것에 마음을 빼앗기고 눈에 보이는 것을 사랑하기 쉽습니다. 눈에 보이는 돈을 사랑하고 가족을 사랑합니다. 무엇보다 자기 자신을 사랑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사랑해야 합니다.

(사랑하는 자에게 주시는 은혜)

하나님을 사랑하면 우리 마음에 생명이 들어옵니다. 우리는 풍성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의 계명을 지키면 천대까지 은혜를 주신다고 하였습니다. 우리가 짓지 않은 집을 주시고 우리가 농사짓지 않은 열매를 주십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에게 풍성한 은혜를 주십니다. 우리가 예수님에게 나의 사랑을 고백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중심에서 나오는 고백)

베드로는 예수님의 세 번째 질문을 듣고 근심하였으나 예수님을 사랑하는 것은 사실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자신의 모든 것을 알고 있음을 믿었습니다. 그가 세 번 부인한 것도 알고 계시고 또 사랑하는 것도 알고 계십니다. 앞으로 예수님을 사랑할 것도 알고 계십니다. 그는 모든 것을 알고 계시는 주님 앞에서 사랑을 고백하였습니다. 진심으로 고백하였습니다. 우리는 마음 깊은 곳에서 사랑을 고백해야 합니다. 우리의 중심으로 사랑을 고백해야 합니다.

(양을 돌보라)

예수님은 베드로의 사랑의 고백을 들으시고 둘째는 내 양을 치라고 하셨습니다. 내 양을 돌보라는 말입니다. 말씀만 먹일 뿐 아니라 아픈 것 상처난 것을 돌보아야 합니다. 서로 싸우지 않고 하나가 되도록 돌보아야 합니다. 세 번째는 내 양을 먹이라고 하셨습니다. 어린 양뿐 아니라 다 자란 양도 먹여야 합니다. 제자 훈련을 해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가 죽은 후에 하나님의 역사는 계승됩니다. 우리는 양을 치는 바톤을 후배에게 넘겨주어야합니다. 그 양이 다른 양을 치는 목자가 되기까지 돌보아야합니다.

(오직 한 가지 질문)

부활하신 예수님이 다시 오실 때 우리에게 한 가지 질문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주님을 그 무엇보다 더 사랑하느냐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 사랑으로 예수님의 양을 먹이기를 원하십니다. 그 사랑으로 예수님을 따르기를 원하십니다. 예수님을 본받아 살기를 원하십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사랑하는 표시로 예수님을 닮은 한 양을 치기를 기도합니다. 아멘
요한복음 21장 강해 삼부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요한복음 21장 15-요한복음 21장 17
요절 요한복음 21장 15절 그들이 조반 먹은 후에 예수께서 시몬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하시니 이르되 주님 그러하나이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이르시되 내 어린 양을 먹이라 하시고





요한복음 21장 강해 사부 너는 나를 따르라
요한복음 21장 18-요한복음 21장
요절 요한복음 21장 22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올 때까지 그를 머물게 하고자 할지라도 네게 무슨 상관이냐 너는 나를 따르라 하시더라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물으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양을 돌보라고 맡기셨습니다. 예수님의 양을 돌보는 일은 예수님이 하신 일입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따라가면 됩니다. 그 길이 비록 가시밭길이라도 다른 사람 상관하지 말고 예수님을 따라가면 우리는 양들을 돌보는 목자가 될 수 있습니다.

(베드로의 순교)

18,19절을 보십시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네가 젊어서는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하지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 이 말씀을 하심은 베드로가 어떠한 죽음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을 가리키심이러라 이 말씀을 하시고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나를 따르라 하시니”

예수님은 베드로의 미래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베드로가 젊어서는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다고 하십니다. 그러나 이제 늙어서는 그가 팔을 벌리면 남이 띠를 띠우고 원치 않는 곳으로 다닙니다. 자신의 뜻대로 살 수 없고 다른 사람의 의지에 의해서 따라가는 삶을 살아야합니다. 이 말씀을 하신 것은 베드로가 어떤 죽음으로 죽을 것을 아시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을 아셨습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의 순교를 예언하셨습니다. 전하는 이야기에 따르면 베드로는 십자가에 거꾸로 못박혀 죽었다고 합니다. 이 말씀을 하시고 예수님은 너는 나를 따르라고 하셨습니다. 우리의 삶은 예수님을 따르는 삶입니다. 예수님을 따르려면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합니다. 평생 예수님을 배우는 삶을 살아야합니다.

(베드로의 비교의식)

20,21절을 보십시오. “베드로가 돌이켜 예수께서 사랑하시는 그 제자가 따르는 것을 보니 그는 만찬석에서 예수의 품에 의지하여 주님 주님을 파는 자가 누구오니이까 묻던 자더라 이에 베드로가 그를 보고 예수께 여짜오되 주님 이 사람은 어떻게 되겠사옵나이까”

베드로가 돌이켜 예수님이 사랑하시는 그 제자 요한이 예수님을 따르는 것을 보았습니다. 요한은 만찬석에서 예수님을 파는 자가 누구인가 물었습니다. 베드로는 요한은 어떻게 될 것인가 물었습니다. 나는 십자가에 죽는데 요한은 안 죽느냐고 물었습니다. 자신이 죽으면 요한도 함께 죽어야 위로가 될 것 같았습니다. 요한은 오래 산다면 자신은 억울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베드로의 마음에는 요한에 대한 비교의식이 생겼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따르는데 비교의식이 생기면 따르기가 어렵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바라볼 때는 마음이 뜨거웠습니다. 그러나 요한을 보자 그 마음이 식어버렸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이 가장 힘들어하는 것이 비교의식입니다. 내가 못 살아서 힘든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이 더 잘 살아서 힘이 듭니다. 내가 주님을 위해서 헌신해서 피해의식이 드는 것이 아닙니다. 다른 사람들이 나보다 덜 희생하니까 피해의식이 드는 것입니다. 우리는 나는 나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다른 사람들에 대해서는 신경을 끄라)

22.23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올 때까지 그를 머물게 하고자 할지라도 네게 무슨 상관이냐 너는 나를 따르라 하시더라 이 말씀이 형제들에게 나가서 그 제자는 죽지 아니하겠다 하였으나 예수의 말씀은 그가 죽지 않겠다 하신 것이 아니라 내가 올 때까지 그를 머물게 하고자 할지라도 네게 무슨 상관이냐 하신 것이러라”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예수님이 재림할 때까지 그를 살게할지라도 무슨 상관이냐 말씀하셨습니다. 쉽게 말하면 요한에 대해서 신경을 끄라는 것입니다. 너나 잘하라는 것입니다. 요한이 이천 살을 살든 삼천 살을 살든 무슨 상관이냐는 것입니다. 타인의 과제는 타인에게 맡기라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요한이 죽지 않을 것이라고 말하였으나 그런 뜻은 아닙니다. 예수님이 올 때까지 머물게 하실지라도 너에게 무슨 상관이냐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베드로에게 나를 따르라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따르는 데는 다른 사람을 상관하지 말아야합니다. 나는 나의 길을 가면 됩니다. 나는 나의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라야 합니다. 각자가 걸어가는 길은 다릅니다. 나는 다른 사람과 비교하지 말고 나의 길을 가야 합니다. 한 달란트를 받았으면 한 달란트를 가지고 충성하고, 두 달란트 받았으면 두 달란트 받은 대로 충성하고, 열 달란트 받았으면 열 달란트로 충성하면 됩니다. 토마스 아킨피스는 자신의 일을 게을리 하는 사람이 남의 일을 신경 쓴다고 하였습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은 그분에게 맡기고 나의 일에 충성하면 됩니다.

(의미 있는 사건만 기록한 요한복음)

24,25절을 보십시오. “이 일들을 증언하고 이 일들을 기록한 제자가 이 사람이라 우리는 그의 증언이 참된 줄 아노라 예수께서 행하신 일이 이 외에도 많으니 만일 낱낱이 기록된다면 이 세상이라도 이 기록된 책을 두기에 부족할 줄 아노라”

요한이 바로 자신이 예수님이 사랑하는 제자라고 말합니다. 자신이 요한복음의 저자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은 이 외에도 기록할 일이 많지만 다 기록하면 이 세상에 두기에 부족하다고 말합니다. 요한은 의미 있는 일만 찾아서 기록하였습니다.
요한복음 21장 강해 사부 너는 나를 따르라
요한복음 21장 18-요한복음 21장
요절 요한복음 21장 22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올 때까지 그를 머물게 하고자 할지라도 네게 무슨 상관이냐 너는 나를 따르라 하시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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