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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주의 대학생 선교기관

천안UBF

성경66권강해서

요한복음 18장 강해 1일이부 체포당하신 예수님(1-27)

작성자 : 오요한
작성일 : 2009-11-29 00:00:00
조회수 : 2,880

문제지풀이(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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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18장 강해 일부 체포당하신 예수님
요한복음 18장1-요한복음 18장 11
요절 요한복음 18장 11절 예수께서 베드로더러 이르시되 칼을 칼집에 꽂으라 아버지께서 주신 잔을 내가 마시지 아니하겠느냐 하시니라

사순절이란 사십일을 지키는 절기입니다. 성경에는 사십일의 숫자가 많이 나옵니다. 모세는 시내산에 사십일 동안 올라가 금식하셨습니다. 노아 홍수가 사십일 지속되었습니다. 예수님도 공생애를 앞두고 사십 일을 금식하며 사단에게 시험을 받았습니다. 이런 예수님을 배우기 위해서 예수님의 부활절 전에 사십일 동안 하루 한 끼만 먹으면서 금식하는데서 사순절이 유래되었습니다. 교회사적으로 보면 325년 니케아 공의회 때부터 사순절을 정하고 지키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러나 요즘에는 금식보다 사순절의 정신을 지키는 데 힘쓰고 있습니다. 사순절을 맞이하여 가난한 사람들을 구제하고 좀더 경건한 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사순절 주일을 맞이하여 체포당하신 예수님을 배우고자 합니다. 우리도 예수님을 위해서 체포당하고 구속당하는 삶을 살아 다른 사람들에게 자유를 줄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결단의 기도)

1,2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제자들과 함께 기드론 시내 건너편으로 나가시니 그 곳에 동산이 있는데 제자들과 함께 들어가시니라 그 곳은 가끔 예수께서 제자들과 모이시는 곳이므로 예수를 파는 유다도 그 곳을 알더라”

예수님은 하나님께 기도를 드렸습니다. 예수님은 대제사장으로 자신과 제자들과 세계에 있는 모든 그리스도인을 위해서 기도하였습니다. 예수님이 기도한 후에 밤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과 함께 기드론 시내 건너편으로 가셨습니다. 기드론 시내 건너편에는 겟세마네 동산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곳에서 십자가를 준비하는 개인적인 기도를 드리셨습니다. 예수님은 세 차례의 기도를 통하여 아버지가 주시는 십자가의 잔을 마시고자 결단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가끔 겟세마네 동산에 제자들과 함께 모였습니다.
가룟유다가 예수님이 제자들과 이곳에 모이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이미 가룟유다는 성만찬 석에서 예수님을 팔기 위해서 공동체를 나갔습니다. 그가 예수님이 자주 오시는 이곳으로 올 것은 뻔한 일입니다. 예수님이 유대인들에게 잡히지 않기 위해서는 이곳만은 피하여야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평상시 가시던 대로 기드론 시내 건너편 동산으로 가셨습니다. 예수님은 기도를 통해서 십자가를 영접했다기보다 이미 십자가에 죽고자 결단하고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셨습니다. 기도를 통하여 순종할 힘을 얻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유대인들에게 할 수 없이 체포당했다기보다는 일부러 체포당하기 위해서 가셨습니다. 예수님이 어쩔 수 없이 십자가의 길을 가지 않았습니다. 자발적이고 능동적으로 십자가의 길을 걸어가셨습니다.

(예수님께 오는 무장한 군인들)

3절을 보십시오. “유다가 군대와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에게서 얻은 아랫사람들을 데리고 등과 횃불과 무기를 가지고 그리로 오는지라”

예수님이 기도를 끝낸 후에 예상대로 가룟유다는 로마 군대와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에게서 얻은 아렛사람을 데리고 예수님을 잡으러 왔습니다. 12절에 보면 로마 천부장도 나오는 것을 볼 때 천부장은 많은 군대를 데리고 왔음을 알 수 있습니다. 유대인들의 성전 경비병도 함께 왔습니다. 이미 날이 어두워 있었습니다. 그들은 어둠을 밝히는 등과 횃불을 가지고 왔습니다. 그들은 중무기로 무장하고 예수님께 나왔습니다.
예수님이 평소에 많은 하나님의 능력을 행하셨습니다. 죽은 자를 살리시고 바람과 바다를 잔잔케 하였습니다. 그들은 바람과 바다를 잔잔케 하신 예수님이 장풍이라도 쓰실 줄로 생각하였습니다. 그들은 능력 많으신 예수님을 잡으려면 많은 군대와 최첨단의 무기가 필요하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유대인들은 엘리야를 잡으러 온 군대들이 오십 명씩 불에 타서 죽은 것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불이라도 내리면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까지 생각하고 왔습니다.

(군인들을 압도하는 예수님의 권위)

4-6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그 당할 일을 다 아시고 나아가 이르시되 너희가 누구를 찾느냐 대답하되 나사렛 예수라 하거늘 이르시되 내가 그니라 하시니라 그를 파는 유다도 그들과 함께 섰더라 예수께서 그들에게 내가 그니라 하실 때에 그들이 물러가서 땅에 엎드러지는지라”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예수님은 능력이 있으십니다. 예수님은 군사를 물리치고 체포당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이미 체포당하고자 기도시간에 결단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체포당할 것을 이미 아셨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죽으실 것을 아셨습니다. 예수님은 앞으로 나아가서 당당하게 그들에게 물으셨습니다. “누구를 찾느냐?” 그들은 나사렛 예수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은 내가 그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군인이나 경찰이 오면 대부분 죄인들은 기가 죽습니다. 싸울 수 없으면 도망갑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내가 나사렛 예수라고 앞으로 당당히 나갔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로서 권세가 있으셨기 때문에 조금도 두렵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적극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기 위해서 앞으로 나가셨습니다.
군대들 사이에는 가룟 유다도 있었습니다. 가룟유다는 예수님의 제자 편에서 유대인 무리 편으로 갔습니다. 열한 제자는 예수님 편에 있었습니다. 우리가 어디에 소속되어 있느냐가 중요합니다. 우리가 세상에 속하면 예수님을 배신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항상 예수님 편에 있어야합니다. 내가 있어야할 곳은 예수님 편입니까? 아니면 세상 편입니까?
예수님이 바로 내가 나사렛 예수요 하자 군대들이 뒷걸음질을 치다가 땅에 엎어졌습니다. 죄인이 엎어져야할 것 같은 데 죄인을 잡으러 온 사람이 엎어졌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앞으로 한 발 나아오자 예수님이 엘리야처럼 하늘에서 불이라도 내릴 줄로 생각하였던 것 같습니다. 그들은 얼굴이 하얗게 질렸습니다. 그들은 두려워서 물러가 땅에 엎드려졌습니다.

(제자를 하나도 잃지 않게 보호하심)

7-9절을 보십시오. “이에 다시 누구를 찾느냐고 물으신대 그들이 말하되 나사렛 예수라 하거늘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너희에게 내가 그니라 하였으니 나를 찾거든 이 사람들이 가는 것은 용납하라 하시니 이는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자 중에서 하나도 잃지 아니하였사옵나이다 하신 말씀을 응하게 하려 함이러라”

예수님은 그들에게 다가가서 다시 누구를 찾느냐고 물으셨습니다. 그들이 나사렛 예수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은 다시 한번 내가 나사렛 예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나를 찾으면 나를 붙잡고 제자들은 가도록 내버려 두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순순히 잡히고자 하셨습니다. 그 대신 제자들을 보호하고자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기도하실 때 예수님에게 주신 자는 하나도 멸망하지 않고 지키셨다고 기도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기도한 대로 제자들을 보호하고자 하셨습니다.(17:12) 예수님은 말씀대로 순종하고자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버리고 도망갈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도망가면 제자들이 체포당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자신이 체포당하심으로 제자들을 보호하고자 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양을 지키시는 선한 목자이십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체포되심으로 우리는 죄와 사단에게 잡히지 않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참 자유를 얻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체포당하심으로 우리는 참 자유를 얻게 되었습니다.

(칼을 꽂으라 하신 예수님)

10,11절을 보십시오. “이에 시몬 베드로가 칼을 가졌는데 그것을 빼어 대제사장의 종을 쳐서 오른편 귀를 베어버리니 그 종의 이름은 말고라 예수께서 베드로더러 이르시되 칼을 칼집에 꽂으라 아버지께서 주신 잔을 내가 마시지 아니하겠느냐 하시니라”

베드로는 예수님을 지켜보았습니다. 예수님은 두려움이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강하고 담대하셨습니다. 베드로는 함께 하신 예수님을 보고 힘을 얻었습니다. 그는 가룟유다와 군대를 볼 때 분노가 솟아났습니다. 그는 칼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15cm되는 단도라고 합니다. 베드로는 대제사장의 종을 쳐서 그 오른 편 귀를 베어버렸습니다. 그 종의 이름은 말고였습니다.
다른 성경에 보면 예수님은 그 귀를 다시 붙여주셨습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칼을 가진 자는 칼로 망하니 칼을 칼집에 꽂으라고 하였습니다. 우리는 혈기의 칼, 자기 뜻의 칼을 꽂아야합니다. 인간적인 싸움의 칼, 자기 영광의 칼을 꽂아야합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이 힘이 없어서 잡히는 줄로 생각하였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의 도움을 받지 않고도 이들을 얼마듡니 물리칠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 26장 53절에 보면 하늘에서 열두 군단이나 되는 천사를 데리고 와서 이들을 싹 쓸어버릴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이들을 심판하신다면 이들만 죽일 수 없습니다. 예수님이 로마 군병을 죽이면 로마인들은 다시 군대를 가지고 몰려올 것입니다. 그러면 이들도 죽여야 합니다.
같은 공의의 기준에 따라서 죄인들은 다 죽여야 합니다. 인간은 하나님 앞에서 죄인이 아닌 사람이 없습니다. 예수님은 공의로 모든 인류를 다 죽여야 합니다. 모든 인류가 망해야 합니다. 모든 인류가 망하면 예수님이 어떻게 인류의 왕이 될 수 있습니까? 하지만 죄악된 인류를 죽이지 않는다면 누군가 그 죄값을 받아야합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그 죄값을 받고 모든 사람을 살리고자 하셨습니다. 예수님 자신이 체포당하심으로 하나님의 공의를 이루고 모든 사람에게 자유를 주시고자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잔을 선택하신 예수님)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칼을 꽂으라고 하시고 하나님 아버지께서 주신 잔을 마시지 않겠느냐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칼을 꽂게 하시고 잔을 선택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칼로 싸우지 않고 기도로 영적인 싸움을 싸우셨습니다. 예수님은 눈에 보이는 칼을 버리시고 성령의 검인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자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사람들과 싸우지 않고 마음 속에 있는 사단과 혈기와 교만과 싸우셨습니다.
칼은 나의 뜻이고 잔은 하나님의 뜻입니다. 칼은 육체적인 싸움을 싸우는 것이고 잔은 영적인 싸움을 싸우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시는 것은 대제사장의 시기 때문만은 아닙니다. 빌라도의 나약한 판결 때문이 아닙니다. 군중들의 무지 때문도 아닙니다. 가룟유다의 배신 때문도 아닙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시는 것은 그것이 아버지의 뜻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죄악된 인간에게 진노의 잔을 내려야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아들에게 그 진노의 잔을 마시게 하고 온 인류를 구원하고자 하셨습니다.
우리는 현실에서 내가 해야 할 그것이 아버지의 뜻이냐 아니냐는 것을 우선 분별해야 합니다. 다음으로 예수님이 잔을 선택하셨듯이 우리도 칼이냐 잔이냐는 갈등에서 하나님이 주시는 잔을 선택해야합니다. 그 잔을 피하기 위해서 칼로 혈기를 부려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무시하느냐고 사람들과 싸웁니다. 왜 나만 죽느냐고 불평합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냐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주시는 잔이라면 우리는 어떤 가운데서도 그 잔을 마셔야합니다. 하나님이 나에게 주시는 잔이라면 우리는 기쁨으로 그 잔을 마셔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주시는 잔이 가장 좋은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우리를 사랑하셔서 구원역사를 이루실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사단의 뜻을 물리치고 육신의 뜻을 물리치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고자 하는 결단을 해야 합니다. 그 잔을 마실 때는 고통스럽지만 나중에 생명의 열매가 있고 하나님의 영광이 있습니다.

(우리 뒤에 계시는 하나님)

아인슈타인에 대한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아인슈타인이 상대성원리를 발견했을 때입니다. 그때는 텔레비전도 없고 신문도 없는 때라 아인슈타인의 얼굴이 널리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아인슈타인은 자신을 초청하는 곳이면 어디든지 가서 상대성 원리를 강연하였습니다. 대학도 가고 고등학교도 가고 과학자들에게도 갔습니다. 무려 삼십 번이나 동일한 강연을 하였습니다. 운전기사가 삼십 번을 들으니 다 외울 정도가 되었습니다. 하루는 운전기사가 내가 강의를 할 테니 나에게 맡기라고 하였습니다. 아인슈타인도 좋다고 하였습니다. 아인슈타인이 운전하고 기사가 강의를 하였습니다. 아인슈타인이 하는 것보다 더 잘 하였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습니다. 한 물리학자가 기사에게 질문을 하였습니다. 기사는 조금도 당황하지 않고 빙그레 웃으면서 말하였습니다. 그렇게 하찮은 문제로 질문하십니까? 그것은 나의 운전기사도 대답할 수 있습니다. 저기 운전기사가 있습니다. 아인슈타인이 아주 잘 대답하였습니다. 운전기사가 그렇게 담대할 수 있었던 것은 뒤에 아인슈타인이 있기 때문입니다. 아인슈타인이 맡긴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는 아인슈타인을 신뢰하였습니다. 우리의 뒤에는 하나님이 계십니다. 모든 것을 아시는 하나님이 계십니다.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이 계십니다. 우리에게 잔을 주신 하나님이 게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모든 문제 앞에서 담대하게 하나님이 나에게 주시는 잔을 마실 수 있습니다.

결론적으로 예수님은 우리를 자유케 하시기 위하여 체포당하셨습니다.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기 위해서 죽음의 잔을 마셨습니다. 우리에게도 하나님이 주신 잔이 있습니다. 내가 마셔야할 잔이 있습니다.
진정한 사순절의 의미는 내가 굶고 굶어가는 다른 사람을 배부르게 하는 것입니다. 내가 구속을 당하고 다른 사람에게 자유를 주시는 것입니다. 내가 아픔을 당하고 다른 사람에게 치료를 주시는 것입니다. 내가 고난의 잔을 마시고 다른 사람에게 축복의 잔을 마시게 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인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쇠사슬에 매이는 사도가 되었습니다. 우리도 다른 사람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기도의 쇠사슬에 묶이고 말씀의 쇠사슬에 묶이기를 원합니다. 우리도 나의 이웃에게 행복을 주기 위해서 내가 불행을 당할 수 있기를 원합니다. 아멘!
요한복음 18장 강해 일부 체포당하신 예수님
요한복음 18장1-요한복음 18장 11
요절 요한복음 18장 11절 예수께서 베드로더러 이르시되 칼을 칼집에 꽂으라 아버지께서 주신 잔을 내가 마시지 아니하겠느냐 하시니라
요한복음 18장 강해 일부 끝입니다.



요한복음 18장 강해 이부 베드로가 또 부인하니 닭이 울더라
요한복음 18장 12-요한복음 18장 27
요절 요한복음 18장 27이에 베드로가 또 부인하니 곧 닭이 울더라

예수님이 체포당하신 후에 대제사장 가야바의 장인 안나스의 집에서 심문을 받습니다. 베드로는 그 대제사장의 뜰에 있다가 예수님을 세 번 부인합니다. 그가 세 번 부인하였을 때 예수님의 말씀대로 닭이 울었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하고 닭과 함께 울었습니다. 베드로의 눈물을 통하여 베드로는 변화되어 새 사람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말씀을 기억하고 우리의 죄를 발견하고 회개하기를 기도합니다.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는 것이 유익하다)

요한복음 18장 12-14절을 보십시오. “이에 군대와 천부장과 유대인의 아랫사람들이 예수를 잡아 결박하여 먼저 안나스에게로 끌고 가니 안나스는 그 해의 대제사장인 가야바의 장인이라 가야바는 유대인들에게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는 것이 유익하다고 권고하던 자러라”

예수님이 군인들에게 한 번의 저항도 없이 순순히 잡히자 군인들은 안심하였습니다. 군대와 천부장과 유대인의 아랫사람들이 예수님을 잡아 결박하였습니다. 오랏줄로 묶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먼저 대제사장의 장인 안나스에게로 끌고 갔습니다. 안나스가 유대인이 임명한 대제사장입니다.
당시에 로마는 가야바를 대제사장으로 임명하였습니다. 가야바는 유대인 가운데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는 것이 유익하다고 말한 사람입니다. 요한복음 11장 50-52절에 말씀하십니다.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어서 온 민족이 망하지 않게 되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한 줄을 생각하지 아니하는도다 하였으니 이 말은 스스로 함이 아니요 그 해의 대제사장이므로 예수께서 그 민족을 위하시고 또 그 민족만 위할 뿐 아니라 흩어진 하나님의 자녀를 모아 하나가 되게 하기 위하여 죽으실 것을 미리 말함이러라” 당시에 하나님은 대제사장을 통하여 예수님이 왜 체포당하는가 그 의미를 말하였습니다. 예수님 한 사람이 죽으심으로 모든 민족이 망하지 않게 하십니다. 예수님은 흩어진 하나님의 자녀들이 모여서 하나가 되게 하기 위해서 체포당하시고 죽으셨습니다.
우리는 죄인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지도 경외하지도 않는 죄인입니다. 우리는 체포당하고 죽어야합니다. 십자가 형벌을 받고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들어가서 영원히 죽어야합니다. 그러나 아무 죄 없는 예수님이 죽으심으로 우리는 죽지 않아도 됩니다. 우리는 영생을 얻고 한 교회를 이루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대제사장의 뜰에 들어간 저자 요한)

15절을 보십시오. “시몬 베드로와 또 다른 제자 한 사람이 예수를 따르니 이 제자는 대제사장과 아는 사람이라 예수와 함께 대제사장의 집 뜰에 들어가고”

예수님이 체포당하여 끌려가자 시몬 베드로와 또 다른 제자 한 사람이 예수님을 따라갔습니다. 또 다른 제자는 요한복음의 저자 요한이라고 합니다. 요한은 대제사장과 잘 아는 사람입니다. 요한은 나가서 문지키는 여자에게 말하여 베드로를 안나스의 집으로 데리고 들어갔습니다.

(베드로의 첫번째 부인)

16-17절을 보십시오. “베드로는 문 밖에 서 있는지라 대제사장을 아는 그 다른 제자가 나가서 문 지키는 여자에게 말하여 베드로를 데리고 들어오니 문 지키는 여종이 베드로에게 말하되 너도 이 사람의 제자 중 하나가 아니냐 하니 그가 말하되 나는 아니라 하고”

문 지키는 여종이 베드로에게 물었습니다. 너도 예수님의 제자 중 하나가 아니냐? 문 지키는 하녀는 그렇게 무서운 사람이 아닙니다. 칼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베드로는 종에게 내가 수제자다! 라고 큰 소리치지 못하였습니다. 조금 전에는 칼을 휘두르던 베드로가 예수님이 체포당한 후에 한없이 연약하여졌습니다. 베드로는 엉겁결에 나는 제자가 아니라고 하였습니다.
베드로가 의지하던 예수님은 이미 힘없이 체포당하였습니다. 그곳은 대제사장과 산헤드린 회원들과 군대들이 가득 찬 살벌한 분위기였습니다. 이곳에서 자신이 예수님의 제자라고 하면 자신도 잡힐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는 두려움에 사로 잡혀 예수님의 제자임을 부인하였습니다. 자신이 살고자 예수님을 부인하였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위해서 감옥에라도 같이 가고 목숨을 버리겠다고 맹세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목자가 체포되자 힘없이 무너지는 한 마리 어린 양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어린 양 위해서 체포당하신 것입니다.

(그 자리를 피하지 않은 베드로)

18절을 보십시오. “그 때가 추운 고로 종과 아랫사람들이 불을 피우고 서서 쬐니 베드로도 함께 서서 쬐더라”

그때 사람들은 추워서 불을 피우고 불을 쬐고 있었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부인하였으면 빨리 그 자리를 피하여야 했습니다. 그래야 두 번 세 번 죄를 짓지 않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대제사장의 아랫뜰로 이동하여 계속하여 불을 쬐고 있었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떠나지도 못하고 적극적으로 시인하지도 못하였습니다. 그는 어정쩡하게 멀찍이서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이런 어정쩡한 신앙을 가진 사람들이 죄를 짓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어정쩡하게 따르지 말고 예수님을 분명히 따르고자 결단을 해야 합니다. 죄를 지었을 때는 빨리 회개하고 그 죄악된 환경을 떠나야합니다.

(드러내 놓고 가르치신 예수님)

19절을 보십시오. “대제사장이 예수에게 그의 제자들과 그의 교훈에 대하여 물으니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드러내 놓고 세상에 말하였노라 모든 유대인들이 모이는 회당과 성전에서 항상 가르쳤고 은밀하게는 아무 것도 말하지 아니하였거늘 어찌하여 내게 묻느냐 내가 무슨 말을 하였는지 들은 자들에게 물어 보라 그들이 내가 하던 말을 아느니라”

대제사장이 예수님을 심문하였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과 그의 교훈을 물었습니다. 예수님을 중심으로 한 조직이 어떻게 형성되었는지를 조사하였습니다. 예수님의 조직을 일망타진하고자 하였습니다. 예수님이 가르친 사상은 어떤 사상인가를 물었습니다. 예수님의 사상이 어떤 점에서 고소거리가 되는지 밝히고자 하였습니다.
예수님은 드러내 놓고 세상에서 말씀을 전하였습니다. 모든 유대인들이 모이는 회당과 성전에서 항상 가르쳤습니다. 은밀히 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항상 예수님과 함께 있었습니다. 많은 무리들이 말씀을 들었습니다. 예수님이 무슨 말씀을 가르쳤는지 듣는 자에게 물어보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항상 공개적이었습니다.
그러나 바리새인들과 종교지도자들은 은밀히 예수님을 감시하였습니다. 그들이 예수님을 죽이기 위해서 몰래 엿보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은밀히 밤에 불법 재판을 하였습니다. 죄는 은밀히 짓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공개적으로 말씀을 가르쳤습니다. 진리의 말씀은 모든 사람에게 공개되어도 떳떳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지금까지 떳떳하게 사셨습니다. 예수님은 밝은 빛과 같이 사셨습니다. 사람들은 떨면 먼지 안 나는 사람이 없습니다. 세무조사를 하고 사생활을 캐면 다 더러운 냄새가 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사생활을 공개하면 할수록 아름다운 모습이 드러납니다. 예수님이 어떤 죄가 있어서 체포당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앞에서 아무 죄가 없습니다. 예수님은 모든 인류의 죄를 위해서 대신 체포당하시고 대신 죽으시는 것입니다.

(무죄하신 예수님)

22-24절을 보십시오. “이 말씀을 하시매 곁에 섰던 아랫사람 하나가 손으로 예수를 쳐 이르되 네가 대제사장에게 이같이 대답하느냐 하니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말을 잘못하였으면 그 잘못한 것을 증언하라 바른 말을 하였으면 네가 어찌하여 나를 치느냐 하시더라 안나스가 예수를 결박한 그대로 대제사장 가야바에게 보내니라”

예수님이 이렇게 당당히 말씀하시자 대제사장 곁에 있던 한 사람이 손으로 예수님을 쳤습니다. 그는 예수님에게 대제사장의 권위를 무시한다고 생각하여 손바닥으로 예수님의 뺨을 쳤습니다. 인간이 감히 하나님의 뺨을 쳤습니다. 그들은 대제사장의 권위는 높이면서 하나님의 아들되신 예수님의 권위를 알아보지 못하였습니다.
예수님은 내가 잘못한 것을 말로서 증언하라고 하였습니다. 바른 말을 하였으면 왜 치느냐고 그를 책망하였습니다. 예수님은 바른 말을 하셨고 진리를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뺨을 맞을 짓을 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죄가 없음을 분명히 밝혔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죄로 십자가에 죽으시는 것이 아님을 분명히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치는 자들의 죄로 인하여 십자가에 죽으시는 것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에게서 아무 죄를 찾지 못하고 예수님을 대제사장 가야바에게로 끌고 갔습니다.

(두번째 부인하는 베드로)

25절을 보십시오. “시몬 베드로가 서서 불을 쬐더니 사람들이 묻되 너도 그 제자 중 하나가 아니냐 베드로가 부인하여 이르되 나는 아니라 하니”

예수님은 가야바의 집으로 갔지만 베드로는 가야바의 집으로 가지 않고 계속하여 안나스의 집에 남아 있었습니다. 시몬 베드로가 계속 서서 불을 쬐고 있었습니다. 사람들이 불빛에 비친 베드로를 알아보고 너도 예수님의 제자 중 하나가 아니냐고 하였습니다. 베드로는 두 번째로 부인하여 나는 아니라고 하였습니다.

(마지막 부인한 베드로)

26,27절을 보십시오. “대제사장의 종 하나는 베드로에게 귀를 잘린 사람의 친척이라 이르되 네가 그 사람과 함께 동산에 있는 것을 내가 보지 아니하였느냐 이에 베드로가 또 부인하니 곧 닭이 울더라”

대제사장의 종 하나가 있었습니다. 그는 전에 베드로 귀를 자른 말고의 친척이었습니다. 그는 베드로의 갈릴리 사투리를 알아보고 다시 물었습니다. 네가 그 사람과 함께 동산에 있는 것을 보지 아니하였느냐고 물었습니다. 베드로는 맹세하며 내가 제자라면 장에 손을 지진다고 부정하였습니다.
베드로는 세 번에 걸쳐서 자신이 살기 위해서 예수님을 부인하였습니다. 다른 성경에 보면 맹세하면서 저주하며 부인하였습니다. 예수님을 세 번 부인한 것은 완전 부인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예수님을 부인하면 예수님도 우리를 부인한다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부인하면 우리와 예수님은 관계가 끊어집니다. 천국에 갈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됩니다.

(베드로의 회개)

베드로가 예수님을 세 번 부인하자 닭이 꼬끼요 하며 울었습니다. 밤이 지나고 새벽이 왔습니다. 예수님이 닭 울기 전에 세 번 부인한다는 말씀이 성취되었습니다. 다른 복음서를 보면 베드로는 닭이 울자 닭 울기 전에 세 번 부인할 것이라는 말씀을 기억하고 울며 통곡하였습니다. 요한복음에서만은 베드로가 회개하였다는 말을 기록하지 않고 있습니다. 요한은 베드로가 회개하기보다 이런 죄를 짓지 말아야하지 않았느냐는 질책이 담겨있습니다.
우리는 회개도 중요하지만 죄를 범하지 말아야합니다. 특히 수제자가 이런 죄를 범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죄를 범하였을 때는 회개해야합니다. 회개도 중요한 것입니다. 베드로가 가룟유다와 다른 점이 바로 회개한 것입니다. 가룟유다는 자책하고 자살하였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심판을 생각하며 자살하였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예수님의 사랑을 생각하며 통곡하고 회개하였습니다. 진정한 회개는 하나님의 사랑이 느껴질 때 가능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있을 때 가능한 것입니다. 베드로가 교회의 반석으로 쓰임 받을 수 있었던 것은 말씀을 기억하고 회개하였기 때문입니다.

(죄를 담당하신 예수님)

베드로가 회개한 후에 십자가의 은혜를 깊이 깨닫게 되었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이 체포당하신 그 순간에 이기적이고 두려움 많은 한 인간이었습니다. 베드로는 이 사건을 통하여 자신이 얼마나 양같은 자인가 깨닫게 되었습니다. 자신은 양과 같이 자기 길로 갔지만 자신을 위해서 죽으시는 선한 목자 예수님을 영접하게 되었습니다.
베드로는 이 예수님을 베드로전서 2장 24,35절에서 이렇게 증거합니다.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니 너희가 전에는 양과 같이 길을 잃었더니 이제는 너희 영혼의 목자와 감독 되신 이에게 돌아왔느니라" 우리는 실패를 통하여 십자가의 예수님을 만나야합니다. 그러면 우리는 더욱 강한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결론-우리의 통곡)

스가랴서에 보면 하나님께서 말세에 은총과 간구하는 열을 부어주신다고 하였습니다. 사람들이 찌른 그를 보고 그를 위하여 애통하기를 독자를 위하여 애통하듯하며 그를 위하여 통곡하기를 장자를 위하여 통곡하듯이 한다고 하였습니다. 우리가 내 대신 체포당하고 고난 받고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님을 볼 때 우리는 통곡이 됩니다. 우리는 내가 바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은 자라는 것을 깨달을 때 우리는 애통하는 마음이 듭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애통하는 마음을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아멘!
요한복음 18장 강해 이부 베드로가 또 부인하니 닭이 울더라
요한복음 18장 12-요한복음 18장 27
요절 요한복음 18장 27이에 베드로가 또 부인하니 곧 닭이 울더라
요한복음 18장 강해 이부 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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