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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주의 대학생 선교기관

천안UBF

성경66권강해서

요한복음 19장 강해 1 일이부 보라 너희 왕이로다

작성자 : 오요한
작성일 : 2009-11-29 00:00:00
조회수 : 2,675

문제지풀이(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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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19장 강해 일부 보라 너희 왕이로다
요한복음 19장1-요한복음 19장 16
요절 요한복음 19장 14절 이 날은 유월절의 준비일이요 때는 제육시라 빌라도가 유대인들에게 이르되 보라 너희 왕이로다

예수님은 아무 죄없는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아무 죄없는 예수님이 로마 총독 빌라도에게 심문을 당하고 많은 고난을 받고 사형 판결을 언도 받습니다. 예수님은 유대인의 왕이라는 죄목으로 십자가에 못 박힙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우리의 진정한 왕이 되십니다. 하나님 나라의 왕이 되십니다. 우리는 오늘 말씀을 통해서 예수님이 왜 고난을 받고 십자가에 죽으셨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채찍질 당하신 예수님)

1절을 보십시오. “이에 빌라도가 예수를 데려다가 채찍질하더라”

여기는 로마법정입니다. 빌라도는 재판장으로서 예수님을 심문하였습니다. 그는 예수님에게서 아무 죄도 찾지 못하였습니다. 그는 예수님에게서 아무 죄를 찾지 못하였다면 그는 무죄를 선고하고 놓아주면 됩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놓아주는 것에 대해서 여론이 좋지 않았습니다. 그는 민심을 보아가며 예수님을 놓아주고자 하였습니다. 자신이 유능한 총독으로 인정받으면서 좋은 재판관으로 인정받고자 하였습니다. 빌라도는 먼저 유월절 특사를 이용하여 예수님을 놓아주고자 하였습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이 예수님 대신에 유명한 강도 바라바를 놓아달라고 하였습니다. 빌라도는 일차 협상에서 실패하였습니다.
이제 빌라도는 방법을 바꿉니다. 예수님을 채찍질하여 유대인들의 동정심을 유발하여 예수님을 석방하고자 하였습니다. 채찍질은 선고를 내린 후에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빌라도는 사형 판결을 내리기 전에 채찍질하였습니다. 당시에 죄인은 사십에서 하나 감한 매를 맞았습니다. 예수님은 삼십구대의 매를 맞았습니다. 휙-하는 채찍질 소리가 들렸습니다. 채찍에는 뼈조각과 쇳조각을 아교로 붙여 놓아 채찍에 맞을 때마다 살점이 떨어져 나갔습니다.
예수님은 채찍을 맞을 때마다 신음하였습니다. 예수님의 몸에는 살점이 떨어져 나가고 피가 낭자하게 흘렀습니다. 유대인들은 이렇게 무력한 예수님이 무슨 왕이냐고 말합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예수님이 채찍에 맞기 700년 전에 이 광경을 보고 왜 예수님이 채찍에 맞는지를 예언하였습니다. 이사야 53장 4절 후반절입니다.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예수님이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는 나음을 입었습니다. 우리의 모든 질병을 치료하기 위해서 채찍에 맞으셨습니다.
요즘 우리는 많은 사람이 사람들이 선진국 질병을 앓고 있습니다. 심장질환 혈관질환 암을 앓고 있습니다. 우울증, 정신분열증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두려움과 불안에 시달립니다. 우리 가운데도 복통이나 아토피성 피부염이나 비염이나 디스크를 앓는 사람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이런 우리의 질병을 치료하기 위해서 십자가에 죽으셨습니다.

(가시 면류관 쓰신 예수님)

2절을 보십시오. “군인들이 가시나무로 관을 엮어 그의 머리에 씌우고 자색 옷을 입히고”

빌라도는 군인들이 에수님을 희롱하도록 허용하였습니다. 이것도 동정심을 유발하기 위한 방법 중에 하나입니다. 빌라도가 예수님을 채찍질한 후에 군인들이 예수님을 희롱하였습니다. 군인들이 가시나무로 관을 엮어 예수님의 머리에 씌웠습니다. 예수님은 왕이 쓰는 금면류관 대신 가시 면류관을 쓰셨습니다. 계시록에 보면 예수님은 금면류관을 쓰고 계십니다.
요한계시록 14장 14절에 말씀하십니다. “또 내가 보니 흰 구름이 있고 구름 위에 인자와 같은 이가 앉으셨는데 그 머리에는 금 면류관이 있고 그 손에는 예리한 낫을 가졌더라”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는 금면류관을 쓰고 오실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이 처음 오셨을 때는 가시면류관을 쓰셨습니다. 가시면류관은 저주를 의미합니다. 아담이 저주 받음으로 가시나무와 엉겅퀴가 났습니다. 예수님은 저주의 가시면류관을 쓰셨습니다. 예수님은 왕이 입는 자색 옷을 입고 가시면류관을 쓰셨습니다. 가시면류관에 왕복은 어울리지 않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조롱하고자 왕복을 입혔습니다. 다른 복음서에 보면 군병들이 갈대로 가시면류관을 내리쳤습니다. 예수님의 이마에는 가시가 깊이 박히고 피가 흘렀습니다. 예수님은 저주 받은 자가 되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 예수님을 보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갈라디아서 3장 13절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해방)하셨으니” 예수님이 우리를 대신하여 저주 받으셨습니다. 우리를 저주에서 자유롭게 하셨습니다. 우리는 조상으로부터 내려오는 저주가 흐르고 있습니다. 아담이 받은 저주를 우리도 받고 있습니다. 가난의 저주, 질병의 저주, 실패의 저주를 받고 있습니다. 부모가 일찍 죽었으니 나도 일찍 죽고 아버지가 폭력남편이니 나도 폭력남편을 만날 것 같다는 두려움이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으심으로 우리는 저주에서 해방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축복이 우리에게 임하게 되었습니다. 이제 우리는 아브라함의 복, 이삭의 복, 야곱의 복을 받게 되었습니다. 이제 우리의 삶에 저주는 끊어지고 복이 흐르게 되었습니다. 이제는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새로운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멸시 받으신 예수님)

3절을 보십시오. “앞에 가서 이르되 유대인의 왕이여 평안할지어다 하며 손으로 때리더라”

군인들은 계속하여 예수님을 희롱합니다. 지금 예수님은 왕이 입는 자색옷을 입고 가시면류관을 쓰고 있습니다. 군인들이 예수님 앞에 가서 유대인의 왕이여 평안할지어다 하며 조롱하였습니다. 그들은 네가 무슨 왕이냐 하며 손바닥으로 예수님의 뺨을 때렸습니다. 아무 힘도 없는 네가 무슨 왕이냐고 조롱하였습니다. 힘이 있는 우리가 왕이지 너는 왕이 아니라고 하였습니다. 우리는 뺨을 맞으면 자존심이 상하고 매우 기분이 나쁩니다. 뺨을 맞으면 모멸감을 느낍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의 뺨을 때리며 모욕하고 멸시하였습니다. 사람들은 차마 눈을 뜨고 볼 수 없어서 예수님을 외면하였습니다. 군병들은 예수님 한 사람을 둘러싸고 멸시하고 버렸습니다.
요즘 왕따를 받으면 매우 고통스럽습니다. 강력반 형사에 보면 왕따를 당하고 자살하는 학생이 나옵니다. 예수님은 왕따를 당하셨습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예수님이 멸시 받을 것을 미리 예언하였습니다. 이사야 53장 3절 전반부입니다. “그는 멸시를 받아 사람들에게 버림 받았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이 그에게서 얼굴을 가리는 것 같이 멸시를 당하였고” 예수님은 우리를 대신하여 멸시를 받은 것입니다.
하나님은 자신을 멸시하는 자를 경멸히 여깁니다.(삼상 2:30) 우리는 하나님을 멸시하고 경외치 않았습니다. 예배를 소홀히 여겼고 가장 귀한 시간이나 물질을 드리지 못하였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멸시를 받아야 마땅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우리를 대신하여 멸시를 받으셨습니다. 이제 우리는 예수님 안에서 존귀히 여김을 받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황태자요. 황공주와 같이 대접받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이제 예수님 안에서 하나님을 존중히 여기고 경외하게 되었습니다.

(보라 이 사람이로다)

4,5절을 보십시오. “빌라도가 다시 밖에 나가 말하되 보라 이 사람을 데리고 너희에게 나오나니 이는 내가 그에게서 아무 죄도 찾지 못한 것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함이로라 하더라 이에 예수께서 가시관을 쓰고 자색 옷을 입고 나오시니 빌라도가 그들에게 말하되 보라 이 사람이로다 하매”

빌라도는 피 범벅이 된 예수님을 데리고 유대인들이 있는 곳으로 끌고 나왔습니다. 지금 유대인들은 빌라도의 관정으로 들어오지 않고 문 밖에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유대인들에게 나왔을 때 예수님의 옷은 채찍으로 찢어졌습니다. 가시면류관에서 피가 흘러내렸습니다. 예수님의 온 몸은 채찍 자국이 벌겋게 나 있었습니다. 온 몸은 피로 물들었습니다.
빌라도는 이들에게 예수님이 아무 죄가 없다는 것을 알게 하고자 합니다. 빌라도는 세 번이나 예수님의 무죄를 주장합니다. 예수님은 무죄함으로 대속적인 고난을 받으신 것입니다. 빌라도는 고난 받으신 예수님을 보라 외칩니다. 라틴어로 에케호모라고 합니다. 헬라어로 이데 호 안쓰로포스입니다. 빌라도는 죄없이 가시면류관을 쓰신 예수님을 보라고 외칩니다. 아무 죄없이 채찍에 맞으신 분을 보라고 합니다. 불쌍하니 이제 그만 놓아주자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곳에는 더 깊은 의미가 있습니다. 아무 죄없는 예수님이 왜 이렇게 피로 범벅이 되었는지 생각해 보라는 말입니다. 왜 이렇게 고난을 받았는지 생각해 보라고 말합니다. 이사야는 예수님이 찔린 이유를 말하였습니다. 이사야서 53장 5절 전반부에서 말씀하십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예수님이 가시면류관에 찔린 것은 우리의 허물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채찍에 상한 것은 바로 우리의 죄악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이 우리의 허물과 죄악 때문에 가시에 찔리고 채찍에 상하셨습니다.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게 되었습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이 장면을 보고 53장 8절에서 외칩니다. “그는 곤욕과 심문을 당하고 끌려 갔으나 그 세대 중에 누가 생각하기를 그가 살아 있는 자들의 땅에서 끊어짐은 마땅히 형벌 받을 내 백성의 허물 때문이라 하였으리요” 사람들은 알지 못하였지만 예수님은 우리의 허물 때문에 형벌을 받으셨습니다. 아무 죄도 없는 그가 우리를 대신하여 고난 받으신 것을 보라고 합니다. 우리의 질병을 대신하여 채찍 맞으신 것을 보라고 하십니다. 우리의 저주를 대신하여 모욕을 받으신 것을 보라고 합니다. 하나님을 경외치 않는 우리의 죄를 대신하여 멸시를 받으신 것을 보라고 하십니다. 나의 허물 때문에 이 세상에서 끊어진 것을 보라고 하십니다. 우리는 이 예수님을 보아야합니다. 그러면 병이 낫습니다. 하나님의 복을 받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제 존중히 여김을 받을 수 있습니다. 죄사함을 받을 수 있습니다. 이제 우리는 하나님을 경외하며 살 수 있습니다.

(죄를 찾지 못하였노라)

6절을 보십시오. “대제사장들과 아랫사람들이 예수를 보고 소리 질러 이르되 십자가에 못 박으소서 십자가에 못 박으소서 하는지라 빌라도가 이르되 너희가 친히 데려다가 십자가에 못 박으라 나는 그에게서 죄를 찾지 못하였노라”

대제사장들과 그의 사주를 받은 아랫사람들이 예수님을 피를 보고 동정심에 사로잡히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더욱 소리를 질렀습니다. “십자가에 못박으소서!. 십자가에 못박으소서!!” 그들을 피를 보고 더욱 으르렁대는 이리떼 같았습니다. 빌라도는 예수님에게서 죄를 찾지 못하여 십자가에 못박을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너희가 직접 데려다고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으라고 하였습니다. 다른 복음서에 보면 아내가 빌라도에게 사형 판결을 내리지 말라고 합니다. 아내의 말도 있어 빌라도는 예수님께 사형 판결을 내리기 원치 않았습니다. 빌라도는 예수님의 무죄를 알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

7절을 보십시오. “유대인들이 대답하되 우리에게 법이 있으니 그 법대로 하면 그가 당연히 죽을 것은 그가 자기를 하나님의 아들이라 함이니이다”

유대인들은 그들의 율법에 의하면 예수님이 죽을 죄를 졌다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여 신성 모독을 하였다고 하였습니다. 레위기에는 신성모독죄는 돌로 쳐죽이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실제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을 몰라보고 십자가에 못박으라고 외쳤습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니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으라는 이 말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임을 역설적으로 증거합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입성할 때 예수님을 두 손 들어 환호하였습니다. 그들은 가이사 같은 그리스도를 원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정치적인 왕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여 하나님 나라로 인도하시는 왕이십니다. 진정한 하나님의 아들은 우리를 하나님 나라로 인도하여 주십니다.
유대인들은 그들을 로마 식민지에서 구원하지 않으시는 예수님에게서 실망합니다. 이제는 실망이 분노로 변합니다. 그들의 기대와 소망이 저주로 바뀝니다. 그들은 매우 이기적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법을 이용하여 자신의 욕심을 채우고자 합니다. 인간의 왜곡된 욕망으로 예수님을 희롱합니다. 그들은 그들의 법에 따라서 예수님을 죽여야 하지만 그들은 죽일 권한이 없으므로 빌라도에게 사형집행을 해달라고 합니다.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죽이면 예수님은 돌에 맞아죽습니다. 로마사람들이 죽여야 예수님은 십자가 형벌을 받습니다. 예수님은 이방인에 의해서 십자가에 죽으실 것이 예언하셨습니다. 십자가에서 그들의 죄와 질병을 담당하실 것을 에언하였습니다. 그들이 로마 사람들의 손을 빌려서 예수님을 죽이고자 하는데도 하나님의 선하신 뜻이 있습니다.

(말없이 순종하신 예수님)

8-9절을 보십시오. “빌라도가 이 말을 듣고 더욱 두려워하여 다시 관정에 들어가서 예수께 말하되 너는 어디로부터냐 하되 예수께서 대답하여 주지 아니하시는지라”

빌라도는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말을 듣고 더욱 사형 판결내리는 것을 두려워하였습니다. 그는 다시 관정에 들어가 예수님이 말만 잘하면 예수님을 놓아주고자 심문하였습니다. 그는 예수님이 어디서 왔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는 예수님이 하늘에서 온 하나님의 아들인가 물었습니다.
예수님은 아무 대답도 해주지 않았습니다. 이미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을 따라서 죽고자 결심하였기 때문에 더 변호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조금도 자신을 변명하지 않고 말없이 순종하였습니다. 사람들은 죄인으로 법정에 서면 변호사를 사고 변호사 살 돈이 없으면 국정변호사를 통해서라도 자신을 변호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아무런 변호도 없이 말없이 순종하였습니다.
이사야서 53장 7절은 말씀하십니다.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 가는 어린 양과 털 깎는 자 앞에서 잠잠한 양 같이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 사람들은 무슨 일을 시키면 말이 많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하나님이 시키신 일에 말없이 순종하셨습니다. 인간의 죄를 감당하고자 말없이 순종하신 예수님은 아름답습니다. 죽으라는 명령에도 예수님은 말없이 순종하였습니다. 이삭이 아버지 아브라함에게 순종하여 모리아 산으로 끌려갔듯이 예수님도 말없이 십자가에 순종하셨습니다.

(재판관 빌라도)

10절을 보십시오. “빌라도가 이르되 내게 말하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를 놓을 권한도 있고 십자가에 못 박을 권한도 있는 줄 알지 못하느냐”

빌라도는 아무 말씀도 하지 않는 예수님이 이상하였습니다. 예수님이 변호를 잘하면 자신이 풀어줄 수 있는데 예수님은 아무 변호도 하지 않는다고 말하였습니다. 빌라도는 내가 너를 놓을 권세도 있고 십자가에 못박을 권세도 있는데 왜 변호하지 않느냐 왜 나에게 살려달라고 애원하지 않느냐고 물었습니다.

(빌라도에게 권세를 주신 하나님)

11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위에서 주지 아니하셨더라면 나를 해할 권한이 없었으리니 그러므로 나를 네게 넘겨 준 자의 죄는 더 크다 하시니라”

예수님은 위에서 하나님이 빌라도에게 주시지 않으면 자신을 해할 권세가 없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위에서 빌라도에게 십자가에 못을 수 있는 권세를 주셨기 때문에 빌라도도 예수님을 십자가형을 내릴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빌라도에게 순종하는 것이 아니라 빌라도 뒤에 계신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놓아주려는 빌라도의 착한 마음을 이해하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빌라도보다 더 악한 사람들은 예수님을 넘겨준 유대의 종교지도자들이라고 하십니다. 그들은 시기심으로 예수님을 죽이고자 하였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예수님이 왜 십자가에 죽으시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빌라도보다 힘이 없어서 죽으시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하늘에서 열두영이 되는 군단을 불러 충분히 로마 군병을 물리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위에 계신 하나님께 순종하여 죽으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빌라도 위에 계신 하나님을 보았습니다.
이 세상에서는 권세자들이 많습니다. 우리를 억울하게 하는 권세자들이 많습니다. 우리를 고통스럽게 하는 권세자들이 많습니다. 우리는 이들 위에 계신 하나님을 바라보아야합니다. 이들에게 권세를 주신 하나님을 보아야합니다.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을 보아야합니다. 그럴 때 사람들에게 자유를 얻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세우신 사람들의 말에 순종할 수 있습니다.

(희생을 각오하지 못한 빌라도)

12-13절을 보십시오. “이러하므로 빌라도가 예수를 놓으려고 힘썼으나 유대인들이 소리 질러 이르되 이 사람을 놓으면 가이사의 충신이 아니니이다 무릇 자기를 왕이라 하는 자는 가이사를 반역하는 것이니이다 빌라도가 이 말을 듣고 예수를 끌고 나가서 돌을 깐 뜰(히브리 말로 가바다)에 있는 재판석에 앉아 있더라”

빌라도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고자 하지 않았습니다. 그의 아내도 와서 흉몽을 꾸었으니 놓아주라고 하였습니다. 빌라도는 예수님을 놓아주려고 무리에게 동점심을 유발시키셨습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빌라도의 약점을 공격하였습니다. 이 사람을 놓으면 가이사의 충신이 아니라고 하였습니다. 자신을 왕이라 하는 자는 반역자라고 말합니다.
유대인들은 처음에는 종교적인 이유로 고발하다가 이제는 정치적인 이유로 고발합니다. 그들은 코브라와 같이 빌라도의 약점을 정확히 공격하였습니다. 반역자를 놓아주는 것은 반역자에 동조하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들은 빌라도가 예수님을 놓아주면 충신이 아닐뿐 아니라 반역자라고 위협하였습니다.
빌라도는 이 말을 듣고 예수님을 놓아주는 것에 대해 다시 갈등하였습니다. 그는 다시 한번 유대인을 설득하기 위해서 돌을 깐 재판석으로 갔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진리 편에 서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가 배웁니다. 진리 편에 서기 위해서는 총독의 직위를 포기할 각오를 해야합니다. 더 나아가서 자신도 반역자가 되어 처형당할 각오까지 해야 합니다. 그래야 진리를 행할 수 있습니다. 빌라도는 진리를 알지만 행할 힘이 없었습니다.

(양잡는 날)

14절을 보십시오. “이 날은 유월절의 준비일이요 때는 제육시라 빌라도가 유대인들에게 이르되 보라 너희 왕이로다”

이 날은 유월절을 준비하는 날이었습니다. 양을 잡아서 먹고 누룩 없는 떡을 먹는 날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양잡는 날 양처럼 십자가에 죽으십니다. 때는 제 육시로 낮 열두시였습니다. 빌라도는 유대인들에게 다시 한 번 말합니다. “보라 너희 왕이로다” 너희 왕을 왜 죽이고자 하느냐고 묻습니다. 이 전에는 “보라 이 사람을 보라” 고 하였습니다. 세례요한은 “보라 세상 죄를 지고가는 어린 양이로다” 하였습니다. 하나님은 빌라도를 통하여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님을 보라고 합니다. 백성들은 가이사적인 왕을 기대하지만 하나님은 수난당하고 희롱당하는 예수님을 보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을 버린 유대인)

15,16절을 보십시오. “그들이 소리 지르되 없이 하소서 없이 하소서 그를 십자가에 못 박게 하소서 빌라도가 이르되 내가 너희 왕을 십자가에 못 박으랴 대제사장들이 대답하되 가이사 외에는 우리에게 왕이 없나이다 하니 이에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도록 그들에게 넘겨 주니라”

그러나 유대인들은 더 크게 소리질렀습니다. 없이 하소서 없이 하소서 그를 십자가에 못박게 하소서 빌라도는 다시 묻습니다. 내가 너희 왕을 십자가에 못박아야 하느냐고 묻습니다. 그들은 가이사 외에는 왕이 없다고 합니다. 그들은 가이사와 같은 왕을 원합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출애굽한 후에 애굽적인 신을 열망합니다. 사람들은 율법을 가르치는 모세를 돌로 쳐죽이고자 합니다. 우리도 세상적인 왕국을 만들어주는 그리스도를 갈망합니다. 예수님이 그런 메시야가 아니면 예수님에게 등을 돌립니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이 보내신 예수님을 왕이 아니라고 거절하였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그들의 왕으로 영접하는 것을 거절하였습니다. 그리고 가이사를 자신의 왕으로 영접하였습니다. 결국 그들은 자신이 왕이 되고자 하는 것입니다. 빌라도는 결국 자신이 반역자를 옹호했다는 말을 듣지 않고자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도록 넘겨주었습니다.

(세상적인 부귀를 추구하면)

유대인들이 왜 예수님을 왕으로 영접한느 것을 거절하였습니까? 그들은 예수님이 주는 떡을 먹었습니다. 예수님으로부터 병을 치료 받았습니다. 말씀의 은혜도 받았습니다. 그때는 예수님을 왕으로 세우고자 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이 원하는 정치적인 왕이 되지 않으셨습니다. 그들은 로마정부를 물리치지 못하는 무능한 왕을 원치 않았습니다. 그들은 로마 정부에게 아무 말도 못하는 바보 같은 왕을 원치 않았습니다. 그들은 로마황제 가이사와 같이 힘 있는 왕을 원하였습니다. 그들은 세상적으로 지혜로운 왕을 원하였습니다. 그들은 세상적인 왕을 원하고 하나님을 거절하였습니다. 그들은 모세와 같은 민족적인 지도자를 원했지 세계 만민의 메시야를 원하지 않았습니다.
유대인들은 700년 동안 식민지살이하고 가난에 시달렸습니다. 그들은 메시야가 와서 이스라엘의 독립을 이루어줄 왕을 원하였습니다. 경제적으로 부유하게 해줄 경제적인 왕을 원했습니다. 가이사같은 왕을 원하는 그들은 결국 돈이나 권력을 왕으로 모신 자들입니다. 자기 자신이 왕이 된 자들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요구를 들어주지 않는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았습니다. 우리가 세상적인 부귀와 권세를 추구하면 결국 예수님을 못박을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기복신앙을 갖든지 표적 신앙을 갖으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을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어떤 희생이 있어도 예수님을 따르고자 해야 합니다. 세상 부귀를 주지 않아도 예수님을 따르고자 해야 합니다. 깨끗하고 순수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왕으로 모셔야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통하여 영원한 하나님 나라를 소망해야합니다. 그래야 예수님을 우리의 왕이요 그리스도로 모실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 19장 강해 일부 보라 너희 왕이로다
요한복음 19장1-요한복음 19장 16
요절 요한복음 19장 14절 이 날은 유월절의 준비일이요 때는 제육시라 빌라도가 유대인들에게 이르되 보라 너희 왕이로다
요한복음 19장 강해 일부 끝입니다.


요한복음 19장 강해 이부 십자가에 못박히신 예수님
요한복음 19장 17-요한복음 19장 22
요절 요한복음 19장 17 그들이 거기서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을새 다른 두 사람도 그와 함께 좌우편에 못 박으니 예수는 가운데 있더라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박히게 넘겨주었습니다. 드디어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박히십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박심으로 우리 죄는 사함을 받고 우리의 옛사람은 죽임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십자가에 못박히신 예수님)

17.18절을 보십시오. “그들이 예수를 맡으매 예수께서 자기의 십자가를 지시고 해골(히브리 말로 골고다)이라 하는 곳에 나가시니 그들이 거기서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을새 다른 두 사람도 그와 함께 좌우편에 못 박으니 예수는 가운데 있더라”

빌라도는 예수님에게 사형 판결을 내리고 예수님을 로마군병들에게 넘겨주었습니다. 예수님은 자기가 못박힐 십자가를 지고 해골이라는 곳으로 나갔습니다. 예수님은 이미 힘이 빠져서 여러 번 쓰러졌습니다. 예수님은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양이십니다. 예수님은 메시야로서 자기의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예수님이 계속 쓰러지자 구레뇨 사람 시몬에게 예수님의 십자가를 대신 지고 가게 하였습니다. 그들이 해골처럼 생긴 골고다 언덕에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았습니다. 다른 두 행악자도 그의 좌우편에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죄인들의 대표로 십자가에 못박혔습니다. 예수님은 어린양으로서 제물이 되셨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박힘으로 우리의 정과 탐욕도 십자가에 못박혔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박혀 저주 받은 자처럼 높이 들리셨습니다. 바울은 갈라디아서 5장 24절은 말씀하십니다.“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그리스도의 사람들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해서 세상의 죄와 관계를 끊게 되었습니다. 갈라디아서 6장 14절에서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 우리가 세상에 대하여 못박히고 세상이 우리에 대하여 못박힘으로 세상의 죄와 우리는 관계가 끊어지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죄에 대해서 죽고 하나님에 대하여 산 자로 다시 태어나게 되었습니다.

(유대인의 왕 예수님)

19-22절을 보십시오. “빌라도가 패를 써서 십자가 위에 붙이니 나사렛 예수 유대인의 왕이라 기록되었더라 예수께서 못 박히신 곳이 성에서 가까운 고로 많은 유대인이 이 패를 읽는데 히브리와 로마와 헬라 말로 기록되었더라 유대인의 대제사장들이 빌라도에게 이르되 유대인의 왕이라 쓰지 말고 자칭 유대인의 왕이라 쓰라 하니 빌라도가 대답하되 내가 쓸 것을 썼다 하니라”

빌라도가 십자가에 위에 죄패를 붙였습니다. 나사렛 예수 유대인의 왕이라고 기록되었습니다. 히브리어와 로마어와 헬라어로 기록되었습니다. 당시의 세계어로 기록되었습니다. 골고다 언덕은 예루살렘 성에서 가까우므로 많은 사람이 이 패를 읽었습니다. 유대인의 대제사장들은 빌라도에게 유대인의 왕이라고 쓰지 말고 자칭 유대인의 왕이라고 쓰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빌라도는 내가 쓸 것을 썼다고 하며 패를 바꾸지 않았습니다. 결국 예수님은 유대인의 왕으로 십자가에 돌아가셨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는 왕이십니다. 죽어지는 왕이십니다. 가이사적인 왕과 대조적입니다. 하나님 나라 왕이신 예수님은 다릅니다. 예수님은 유대인의 왕으로 돌아가심으로 육신을 입은 유대인의 왕은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만이 왕이시다)

에덴동산에서 하나님만이 왕이셨습니다. 그러나 인간이 왕이 되어 하나님께 반역을 하고 에덴에서 쫓겨났습니다. 그때부터 사람들은 내가 왕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부르셔서 하나님이 왕이 되는 나라를 만들고자 하였습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왕이 되는 나라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사람들은 하나님을 왕으로 거절하고 사람을 왕으로 세우고자 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사람에게 왕의 제도를 허락하셨지만 인간 왕이 진정한 왕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하셨습니다.
사울왕은 자신이 왕이 되고자 하였다가 버림 받았습니다. 다윗은 하나님을 왕으로 모시고 살아서 진정한 왕이 되었습니다. 그는 자신은 왕이 아니라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습니다. 다윗의 후손은 이스라엘 왕들은 자신이 왕이 되고 우상을 왕으로 섬기다가 버림 받았습니다. 예수님은 이곳에 하나님이 왕이 되는 나라를 세우고자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돌아가심으로 육신을 입은 왕은 없다고 하셨습니다. 부활하여 성령으로 오셔서 우리의 왕이 되셨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세상에는 진정한 왕은 없다고 강력하게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눈에 보이는 것은 예수님 자신도 왕이 아닙니다.
사랑하는 사람도 돈도 왕이 아닙니다. 나 자신도 왕이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왕이십니다. 우리는 항상 눈에 보이는 모든 것에 대해서 그것은 왕이 아니라고 말해야 합니다. 하나님에 대해서만 왕이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왕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우리가 의지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없으면 마음이 허한 것입니다. 불안하고 염려하는 것입니다. 그것에 대해서 원망과 불평을 많이 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왕은 하나님 한 분입니다. 우리는 하나님 한분만 있으면 우리는 부족함이 없다고 말해야합니다. 다른 사람들에게도 나로 만족하지 말고 하나님 한분으로 만족하도록 해야 합니다. 하나님만이 우리의 마음과 삶을 다스려야합니다. 우리를 통하여 하나님의 통치주권이 이루어져야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끊임없이 나는 십자가를 지고 죽어야합니다. 내 뜻과 영광과 그리고 내 나라를 죽여야 온전히 하나님이 나의 삶에 왕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 가운데 하나님 나라가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십자가를 보자)

지금도 하나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보라고 합니다.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님은 하나님만이 우리의 왕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시간에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님을 바라봄으로 하나님을 나의 왕으로 모실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예수님을 바라봄으로 질병과 저주와 죄악에서 진정한 자유를 누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아멘! 2
요한복음 19장 강해 이부 십자가에 못박히신 예수님
요한복음 19장 17-요한복음 19장 22
요절 요한복음 19장 17 그들이 거기서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을새 다른 두 사람도 그와 함께 좌우편에 못 박으니 예수는 가운데 있더라
요한복음 19장 강해 이부 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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