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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주의 대학생 선교기관

천안UBF

성경66권강해서

요한복음 20장 강해 삼사부 평강을 주신 부활의 예수님

작성자 : 오요한
작성일 : 2009-11-29 00:00:00
조회수 : 4,307

문제지풀이(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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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20장 강해 삼부 평강을 주신 부활의 예수님
요한복음 20장 19-요한복음 20장 23
요절 요한복음 20장 19절 이 날 곧 안식 후 첫날 저녁 때에 제자들이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모인 곳의 문들을 닫았더니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고난 주간에 비바람이 치더니 금요일부터 날씨가 화창하게 개었습니다. 대부분의 나라들이 고난 주간이 되면 날씨가 좋지 않다가 부활절이 되면 날씨가 좋아진다고 합니다. 예수님이 돌아가실 때도 캄캄한 어둠이 임하다가 예수님이 부활한 날 밝은 태양이 솟아났습니다. 날씨만 그런 것이 아니라 마음도 고난 주간에 고통이 임합니다. 나도 죽는 것 같은 고통을 느꼈습니다. 고와 사모님도 슬퍼서 울었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부활하여 날씨처럼 우리의 마음도 밝게 하십니다. 우리는 지난 주 막달라 마리아에게 나타나신 예수님을 배웠습니다. 예수님은 울고 있는 막달라 마리아의 눈물을 씻어주셨습니다. 오늘 말씀에는 두려워하는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예수님이 나옵니다. 부활의 주님은 제자들의 두려움을 몰아내시고 평안을 주십니다.

(두려워하는 제자들)

19절을 보십시오. “이 날 곧 안식 후 첫날 저녁 때에 제자들이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모인 곳의 문들을 닫았더니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마리아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보았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이 마리아야 하시는 음성을 들었습니다. 마라아는 제자들에게 달려가서 예수님의 부활을 전하였습니다. “내가 예수님을 보았어요, 예수님은 하나님 아버지께로 올라간다고 하셨어요.” 그러나 제자들은 예수님이 부활했다는 말을 믿을 수 없었습니다. 귀신들렸던 막달라 마리아가 이상하게 된 것이 아닌가 생각하였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이미 빈무덤과 예수님의 수의를 보고 왔습니다. 자신들이 갔을 때는 예수님이 자신에게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다시 마리아에게 나타났다는 말은 믿을 수 없었습니다. 마가복음과 누가복음을 참고하면 엠마오로 가는 두제자도 와서 부활의 소식을 전하였습니다. 그래도 역시 제자들은 믿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신 날 저녁에 제자들은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문을 잠그고 방에 숨어 있었습니다. 그들은 로마인들이 에수님을 죽였으니 다음에는 제자인 자신들을 찾아 죽일 것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예수님은 반역자이니 반역을 함께 도모한 제자들도 예수님처럼 십자가에 죽을 것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들에게 지명 수배령이 내려졌다고 생각하였습니다. 발자국 소리만 들려도 떨리고 바람에 문만 덜컹거려도 가슴이 벌렁거렸습니다. 그들은 두려워 생각과 행동이 마비되었습니다. 예수님이 예루살렘에서 죽었으면 그들은 빨리 예루살렘을 떠나 다른 곳으로 도망을 가야 합니다. 각자 흩어져 숨어야 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두려움에 사로 잡혀 손발이 마비되어 예루살렘도 떠나지 못하고 한 곳에 모여 있었습니다. 로마 군병들이 이들에게 들이닥치면 이들은 일망타진됩니다. 마치 이들은 머리만 땅에 박고 있는 꿩과 같습니다. 사망권세가 제자들을 덮고 있었습니다.

(두려워하면 지옥에 간다)

사망권세는 사람을 두렵게 합니다. 우리가 죽는다는 것은 우리를 두렵게 합니다. 사랑하는 사람들이 죽을 때도 두렵습니다. 요즘에 천안함 침몰로 사망 권세가 천안만 아니라 전국을 덮고 있습니다. 구조어선도 실종되었습니다. 그들을 구조하던 유디티 대원도 죽었습니다. 최진실 동생 최진영도 자살하였습니다. 이들을 보면서 우리는 두려움에 사로잡힙니다. 우리는 살면서 망할 것 같고 실패할 것 같은 두려움도 있습니다. 요즘은 경기가 좋지 않습니다. 무한경쟁의 시대입니다. 작은 것은 큰 것을 이기기 어렵습니다. 약자들은 도태합니다. 우리는 이런 시대에 직장 생활하며 시시각각으로 두려움이 몰려옵니다. 요즘 환절기에 심한 독감에 걸린 사람도 많습니다. 이들은 혹시 병이 나서 죽는 것이 아닌가 두려워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사고가 나서 다치면 장애가 찾아올까 두려워합니다. 물건을 들다가 허리라도 삐끗하면 허리를 쓰지 못할까 두려워합니다. 장래에 대한 두려움도 있습니다. 학생들은 졸업하고 취업은 되나 장가나 시집을 갈 수 있나 두려워합니다. 늙어서 어떻게 먹고 사나하는 두려움이 있습니다. 자식들을 어떻게 키우나 두려워합니다. 인간이 하나님을 떠난 후부터 두려움이 인간을 찾아왔습니다. 사단은 우리에게 두려움을 심습니다. 두려움이 임하면 우리의 손발이 마비됩니다. 얼굴이 굳어집니다. 생각이 마비됩니다. 두려워하는 것이 우리의 미래에 이뤄집니다. 욥은 재난을 당한 후에 나의 두려워하는 것이 내게 임하였다고 하였습니다. 우리 인간은 마음 속에 두려움을 항상 가지고 살아갑니다. 우리는 이런 두려움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두려워하는 자는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들어갑니다. 우리가 두려움을 생기는 것을 어쩔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두려움이 오면 우리는 두려움을 극복해야합니다.

(평강을 주신 예수님)

예수님은 두려워하는 제자들에게 찾아 오셨습니다. 문도 열지 않고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시공을 초월한 새로운 몸으로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오셔서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말씀에 보면 예수님은 세 번이나 반복하여 평강이 있을지어다. 말씀하셨습니다. 부활의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평강을 주십니다. 예수님 외에는 진정한 평강을 얻을 길이 없습니다. 사망권세를 물리치려면 사망권세보다 더 큰 권세가 필요합니다. 부활의 예수님은 사망권세를 이기셨습니다. 부활의 예수님은 사망권세보다 크신 분입니다. 사망 권세가 얼마나 큰지 압니까? 이 세상에 권세를 가진 자들이 있습니다. 대통령이니 왕은 큰 권세가 있습니다. 옛날에 박정희 대통령은 나는 새도 떨어뜨리는 권세가 있었습니다. 그가 고속도로에 차를 타고 가다 영남대학이 안 보인다고 하자 층수를 올려 고속도로에서 영남대학이 보이게 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도 김재규가 쏜 총탄에 죽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부자들도 돈으로 세상을 마음대로 움직입니다. 이병철은 우리나라 최고의 부자였습니다. 돈이 있으면 죄인도 무죄로 만듭니다. 돈이 있으면 좋은 병원에서 죽어가는 자도 살립니다. 그러나 이병철도 늙어 한 줌 흙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는 일년만 더 살게 하면 재산의 절반을 주겠다고 하였다고 합니다. 이들도 모두가 죽음 앞에서는 무릎을 꿇었습니다. 그 정도로 죽음은 권세가 큽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런 사망권세보다 더 큰 권세를 가지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사망 권세의 머리를 깨셨습니다. 부활의 권세는 사망권세보다 더 큰 권세입니다. 이제 예수님은 명실공히 세계에서 가장 큰 권세자가 되었습니다. 부활의 권세자 예수님만이 우리 마음에 사망권세를 물리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영접하면 우리는 세상을 이길 수 있다는 담대함이 생깁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요한복음 16장 33절입니다. “이것을 너희에게 이르는 것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우리가 예수님을 믿으면 담대해지고 세상 사람들이 알지 못하는 평안을 누립니다. 넉넉히 세상을 이길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죽지 않는다는 말은 아닙니다. 죽어도 사망권세에 시달리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스데판은 순교를 당하면서도 얼굴에 기쁨이 가득하였습니다. 그는 죽은 후에 다시 살아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날 것을 믿었습니다.

(부활의 주님을 보자)

20절을 보십시오. “이 말씀을 하시고 손과 옆구리를 보이시니 제자들이 주를 보고 기뻐하더라.” 부활하신 예수님은 못 박힌 자신의 손과 옆구리를 제자들에게 보여주셨습니다. 제자들은 눈에 힘을 주고 예수님을 바라보았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문도 열지 않고 오시자 예수님을 귀신으로 생각하였습니다. 그러나 부활하신 에수님은 귀신으로 나타난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새로운 몸으로 부활하셨습니다. 누가복음에 보면 생선도 잡수셔서 몸으로 부활한 것을 증거하셨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보고 기쁨을 얻었습니다. 우리가 기쁨을 얻으려면 부활의 주님을 보아야합니다. 히브리서 저자는 예수님을 보자고 권면합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보라고 합니다.

(세상으로 가라)

21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또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예수님은 다시 한번 평강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자신을 보낸 것처럼 자신도 제자들을 보낸다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사망권세에 시달리는 세상 사람들에게 부활이요 생명이신 에수님을 보내셨습니다. 예수님도 제자들에게 평강을 주시고 그들을 세상으로 보내셨습니다. 세상은 어둠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죽음의 권세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아무리 부와 명예와 미를 가진 자라도 죽을 수밖에 없습니다. 진시황도 클레오파트라도 죽었습니다. 우리의 조상들이 죽고 있고 지금도 죽어가고 있습니다. 나의 부모님도 돌아가셨습니다. 준석형제의 할머니도 허노아 목자님도 돌아가셨습니다. 엊그제는 한안드레 선교사님의 부친도 돌아가셨습니다. 우리 장인도 돌아가실 날이 며칠 남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죽음이 끝이 아닙니다. 죽은 후에는 심판이 있습니다.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들어가야합니다. 이들은 두려움과 불안으로 잠을 못자고 수면제를 먹고 있습니다. 이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부활의 복음입니다. 제자들은 이들에게 부활의 예수님을 증거해야 합니다. 세상으로 가서 부활의 복음을 전해야합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심으로 어둔 세상에 빛이 비추었습니다. 예수님은 부활의 첫열매가 되셨습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우리는 영생을 얻고 우리도 부활하게 됩니다. 새 하늘과 새 땅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도 영원히 죽음을 맛보지 않고 살게 됩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성령을 받으라)

22,23절을 보십시오. “이 말씀을 하시고 그들을 향하사 숨을 내쉬며 이르시되 성령을 받으라.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사하면 사하여질 것이요, 누구의 죄든지 그대로 두면 그대로 있으리라 하시니라.” 예수님은 제자들을 향하여 숨을 내쉬며 성령을 받으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생기를 아담에게 불어넣어주셨듯이 제자들에게 성령을 불어넣어주셨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이 우리에게 성령님을 주십니다. 우리가 부활하신 주님을 영접하면 성령이 우리의 마음 속에 들어오십니다. 부활하신 주님은 제자들이 나가서 사람들에게 죄사함을 이루라고 하셨습니다. 부활의 주님은 성령을 주시고 성령을 통하여 죄사함의 역사를 이루십니다. 성령께서 우리의 죄를 깨닫게 하십니다. 성령께서 우리의 죄가 사해지고 의로워졌다는 확신을 주십니다. 우리가 죄사함을 받은 후에 성령이 우리 속에 들어오십니다. 부활의 주님은 성령을 통하여 죄사함을 이루십니다. 성령은 평강의 왕이십니다. 성령이 오시면 이 세상에서 얻을 수 없는 평강을 얻을 수 있습니다. 세상이 주는 평안과 다른 평안을 주십니다. 내면서 솟아나는 평안을 주십니다. 외부 환경에 의해서 흔들리지 않는 평안을 주십니다. 예수님은 광풍 앞에서 잠을 주무시는 평안함이 있었습니다 스데반은 돌에 맞아죽으면서도 평안함을 잃지 않았습니다.
요한복음 20장 강해 삼부 평강을 주신 부활의 예수님
요한복음 20장 19-요한복음 20장 23
요절 요한복음 20장 19절 이 날 곧 안식 후 첫날 저녁 때에 제자들이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모인 곳의 문들을 닫았더니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요한복음 20장 강해 삼부 끝입니다.

요한복음 20장 강해 사부 도마에게 나타나신 부활의 주님
요한복음 20장 24-요한복음 20장 31
요절 요한복음 20장 29.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 하시니라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나타날 때 도마는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도마한 사람을 위해서 다시 나타나 믿음을 심으셨습니다. 그리고 보지 않고 믿는 자가 복이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보지 않고 믿는 복 받는 믿음을 가질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도마의 섭섭함)

24, 25절을 보십시오. “열두 제자 중의 하나로서 디두모라 불리는 도마는 예수께서 오셨을 때에 함께 있지 아니한지라. 다른 제자들이 그에게 이르되 우리가 주를 보았노라. 하니 도마가 이르되 내가 그의 손의 못 자국을 보며 내 손가락을 그 못 자국에 넣으며 내 손을 그 옆구리에 넣어 보지 않고는 믿지 아니하겠노라. 하니라.” 예수님이 오셨을 때 도마는 없었습니다. 그는 화장실에 갔는지 아니면 유대인을 살피러 갔는지 모릅니다. 다른 열명의 제자들은 도마에게 부활의 예수님을 증거하였습니다. “우리가 주를 보았다.” 열 명이 한 마디씩만 했어도 열 마디를 들었습니다. 도마는 제자들의 말을 믿지 않았습니다. 그는 자신이 예수님의 손의 못자국을 보며 내 손가락을 그 못자국에 넣으며 내 손을 창으로 찔린 옆구리에 넣어보지 않고는 믿을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그는 열 명의 눈보다 자신의 눈을 더 신뢰하였습니다. 그는 부활의 주님을 확실하게 체험하기 전에는 믿을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도마는 의심 많은 자입니다. 도마가 왜 이렇게 의심 많은 자가 되었을까요? 그의 마음 속에 예수님에 대한 서운함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왜 자신이 없을 때 오셨나? 서운해 하였습니다. 자기가 그릇을 이루지 못한 것은 생각지 않고 예수님께서 자기만 왕따 시켰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이렇게 사랑에 대한 불신이 생기면 의심이 생깁니다. 의심은 병입니다. 어떤 사람은 의심은 정신병보다 더 무섭다라는 말을 하였습니다. 의심은 관계성을 단절시킵니다. 예수님을 의심하면 에수님과 관계성이 단절됩니다. 사람들에 대해서 의심이 생기면 사람들과의 관계가 단절됩니다. 의처증을 가진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의심이 생길 때는 직장에 가서도 10분마다 집에 전화를 해서 부인이 어떻게 지내는지 확인했습니다. 그러다가 시장에 간 30분 동안 연락을 되지 않자 집에 와서 꼬치꼬치 캐물었습니다. ‘시장에 간 것이 분명하냐, 시장에 가서 뭐 했냐, 누구 만났냐?’ 그날 심각하게 싸웠습니다. 결국 같이 시장으로 가서 만난 사람들을 다 확인하고서야 의심을 풀었습니다. 이렇게 한바탕하고, 의심을 풀면서 그는 ‘이제 더 이상 의심하지 않겠다’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10분 후에, ‘그래도 혹시 다른 사람이 거짓말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들어왔다고 했습니다. 타진요는 20만이 그의 학력을 의심하였습니다. 나중에는 방송과 법원에서 타불로 편을 들자 방송과 법원과 그리고 학교에 친구들과 교수들이 증거하지 그들도 의심하였습니다. 이런 의심을 어떻게 물리칠 수 있습니까?

(도마 한 사람을 위하여)

26,27절을 보십시오. “여드레를 지나서 제자들이 다시 집 안에 있을 때에 도마도 함께 있고 문들이 닫혔는데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하시고 도마에게 이르시되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라. 그리하여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 여드레 후입니다. 제자들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지만 아직도 문을 닫고 집에 모여 있었습니다. 그들은 아직 두려움에서 완전히 자유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세상으로 가서 부활의 복음을 전하지 않았습니다. 그들 마음 속에 성령님이 내주하시지만 그들에게 아직 성령님이 충만하게 임재하지 않았습니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강물처럼 흐르지 않았습니다. 이곳에 도마도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여드레 후에 도마 한 사람을 위하여 다시 나타나셨습니다. 예수님은 가운데 서서 너희에게 평안이 있을지어다 인사하였습니다. 예수님은 도마에게 네 손가락을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옆구리에 넣어보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의심하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은 도마 한 사람도 믿음을 갖기를 원하십니다. 예수님은 도마 한 사람을 사랑하여 찾아오셨습니다.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신 예수님이 도마 한 사람을 사랑하여 찾아오셨습니다.

(도마의 하나님)

28절을 보십시오. “도마가 대답하여 이르되 나의 주님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 도마는 예수님을 나의 주님이요. 나의 하나님이라고 고백하였습니다. 우리가 여기서 한 번 생각해볼 것이 있습니다. 과연 도마가 예수님 못박힌 손에 손 가락을 넣어보았을까요? 예수님의 옆구리에 주먹을 넣어보았을까요? 성경에는 그것이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예수님도 네가 보고 믿느냐고 하였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보고 믿었습니다. 도마는 감히 예수님의 옆구리에 손을 넣어보지 않았을 것입니다. 도마는 자신을 찾아오신 예수님의 사랑에 감동하여 예수님을 본 것으로 족하였습니다. 도마가 의심에 빠졌던 이유는 예수님의 옆구리에 손을 넣어보지 않아서가 아닙니다. 예수님의 사랑을 믿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의심은 사랑을 믿지 못하는데서 옵니다. 자신은 예수님을 몸바쳐 따랐는데 그를 버려두고 가신 예수님이 원망스러웠습니다. 자신을 사랑한다면 자신을 이렇게 버려둘 수 있는가 생각하였습니다. 자신만 없는데 나타나셨나 생각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도마를 찾아오자 그런 의심이 다 사라졌습니다. 예수님의 사랑을 확신할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을 하나님으로 고백할 수 있었습니다. 엠마오로 가는 두제자도 예수님이 떡을 떼어주시지 부활의 주님을 믿었습니다. 고기 잡으러 간 제자들도 예수님이 고기를 많이 잡게 해주자 부활의 주님을 영접하였습니다. 이들은 예수님의 사랑에 감동하여 모두 의심을 물리치셨습니다. 부활의 주님은 지금도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사랑하십니다. 우리는 이 사랑에 의해서 의심을 극복할 수 있습니다. 도마가 고백하였듯이 부활하신 주님은 우리의 그리스도이십니다. 부활하신 주님은 우리의 하나님이십니다. 부활이 아니고는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증거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부활을 통하여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시고 우리의 그리스도가 되셨습니다.

(보지 않고 믿는자는 복이 있다)

29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 하시니라.” 예수님은 도마를 한 마디 책망하셨습니다. 예수님을 보고 믿는 자보다 보지 않고 믿는 자는 복되다고 하셨습니다. 우리의 보는 것은 불완전하고 일회적이고 가변적인 것입니다. 보는 것은 한계가 있습니다. 너무 작아도 커도 보지 못합니다. 하나님을 볼 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보면 죽습니다. 사도 바울도 부활의 주님을 믿고 눈이 멀었습니다 우리는 사랑이나 기쁨과 같은 것도 보지 못합니다. 우리가 보는 것이 거짓일 수 있습니다. 정신분열증은 남이 보지 못하는 것을 봅니다. 환상을 봅니다. 보는 것으로 착각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태양이 도는 것을 보고 태양이 돈다고 하였는데 알고 보니 지구가 도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보고 믿고자 하는 생각을 버려야합니다. 우리는 보지 않고 믿어야합니다. 그렇다고 보지 않는 것을 다 믿으라는 말은 아닙니다. 없는데 있다고 하면 거짓말입니다. 보이지 않는 것 중에 있는 것을 믿어야합니다. 그것을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우리가 보는 것도 믿지 못한다면 무엇을 믿을 수 있습니까? 성경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진실합니다. 많은 증인들의 증거를 믿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말씀과 증인들의 증언을 통하여 예수님의 부활을 믿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막달라 마리아 열두 제자 야고보 오백여 형제들에게 자신을 보이셨습니다. 사도 바울에게 보이셨습니다. 우리는 이들의 증언을 통해 부활의 예수님을 믿을 수 있습니다. 또한 성경 말씀을 통하여 부활의 주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우리 모두 예수님을 보지 않았지만 예수님을 믿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지금 여기 에 예수님이 와 계시다고 믿으십니까? 우리는 기록된 성경 말씀에 기초하여 믿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 나도 거기 함께 하시겠다고 약속하였습니다. 분명히 여기에 예수님은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모였고 두세 사람이 넘기 때문에 부활하신 주님이 여기에 계시다는 것을 믿습니다. 아멘! 부활의 주님은 여기에 지금 계십니다. 여러분은 여러분의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흐르는 것을 아십니까? 여러분은 보이지 않는다고 생각하실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나를 믿는 자는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 우리가 예수님을 믿습니까? 그러면 우리의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흐른다는 것을 믿어야합니다. 보지 않고 믿는 자는 복이 있습니다. 성령이 강물처럼 흐르는 표적을 구하지 마십시오. 눈에 보이는 표적을 구하기 때문에 성령의 능력을 체험하지 못합니다. 믿음이 보는 것보다 먼저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이 여기 살아계신 것을 믿고 성령이 우리의 배에서 강물처럼 흐르는 것을 믿으면 그것이 우리의 삶 속에 나타나실 것입니다. 나는 왜 나에게 생수의 강이 흐르지 않는가 하나님께 불평하였습니다. 하나님이 나에게 생수의 강이 흐르지 않게 하면 나는 목자를 할 수 없다고 간절히 기도하였습니다. 그러자 하나님은 나에게 이 말씀을 응답으로 주셨습니다. 결국 나의 문제는 믿음이 없는 것이었습니다. “보지 않고 믿는 자는 복이 있도다.” 베드로 사도는 베드로전서 1장 8절에서 말합니다. “예수를 너희가 보지 못하였으나 사랑하는도다. 이제도 보지 못하나 믿고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즐거워하니” 그렇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보지 못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예수님을 사랑합니다. 예수님을 보지 못하나 믿고 말할 수 없는 즐거움으로 즐거워합니다. 아멘!

(성경에 기초하여 믿으라)

30,31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제자들 앞에서 이 책에 기록되지 아니한 다른 표적도 많이 행하셨으나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요한은 특별히 일곱 가지 표적을 기록하였습니다. 우리는 이 표적을 통하여 부활의 예수님을 믿게 하고자 하였습니다. 예수님은 물을 포도주로 바꾸셨습니다. 예수님은 변화의 능력자이십니다. 에수님은 왕의 신하의 아들을 말씀으로 고치셨습니다. 예수님은 말씀의 권세자이십니다. 예수님은 삼십팔년된 병자를 고치셨습니다. 예수님은 어떤 고질병도 치료하여 주십니다. 예수님은 오병이어로 오천명을 먹이셨습니다. 예수님은 생명의 떡이십니다. 예수님은 물위를 걸어오셨습니다. 예수님은 시공을 초월하여 찾아오십니다. 예수님은 소경된 자의 눈을 뜨게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세상의 빛이 되십니다. 예수님은 나사로를 살리셨습니다. 예수님은 부활이요. 생명이십니다. 사도 요한은 이를 기록하여 우리로 예수님을 믿고 영생을 얻기 원하였습니다. 우리는 기록된 성경 말씀에 기초하여 부활의 주님을 믿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부활의 예수님을 믿으면 우리는 영생을 얻습니다. 성령을 받고 예수님의 새생명을 얻습니다. 죽은 후에도 부활하여 영원히 살 수 있습니다. 아멘!
요한복음 20장 강해 사부 도마에게 나타나신 부활의 주님
요한복음 20장 24-요한복음 20장 31
요절 요한복음 20장 29.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 하시니라
요한복음 20장 강해 사부 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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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 [요한복음] 요한복음 20장 강해 일이부 여자여 어찌하여 우느냐 오요한 2009-11-29
52 [요한복음] 요한복음 19장 강해 삼사부 다 이루신 예수님 오요한 2009-11-29
51 [요한복음] 요한복음 19장 강해 1 일이부 보라 너희 왕이로다 오요한 2009-11-29
50 [요한복음] 요한복음 18장 강해1 삼부 진리가 무엇이냐(28-40) 오요한 2009-11-29
49 [요한복음] 요한복음 18장 강해 1일이부 체포당하신 예수님(1-27) 오요한 2009-11-29
48 [요한복음] 요한복음 17장 강해 삼사부 하나되게 하옵소서.(14-26) 오요한 2009-1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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