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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주의 대학생 선교기관

천안UBF

성경66권강해서

요한복음 8장 강해 일부 나도 정죄치 아니하노니(1-11)

작성자 : 오요한
작성일 : 2006-04-16 00:00:00
조회수 : 2,553

문제지풀이(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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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8장 강해 일부 정죄치 않는 예수님.
요한복음 8장 1-요한복음 8장 11
요절 요한복음 8장 11절 대답하되 주여 없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

레마르크의 서부 전선 이상 없다라는 소설이 있습니다. 그가 일차세계대전 때 학도병으로 끌려간 경험을 가지고 쓴 소설입니다. 루이스 마일스톤이라는 사람이 영화로 만들기도 하였습니다. 일차세계대전시 독일에서 선생님이 학생들에게 지금이 조국을 위해서 싸울 때입니다. 라는 말을 듣고 학도병이 10주간 훈련을 받고 7명이 나가서 싸웁니다. 주인공은 19세의 파울입니다. 그들은 마치 전쟁놀이를 하듯이 재밌게 사람을 죽입니다. 그들은 삼년 동안을 전쟁하며 6명이 다 죽고 파울만 남습니다. 그가 교회 부근 전투에서 프랑스 병사에게 마구 총을 쏘고 나서 보니 전쟁터가 너무나 조용합니다. 모두가 죽고 자신만 살아 남았습니다. 그는 그곳에서 죽은 병사의 주머니에서 나온 가족 사진을 보고 전쟁에 회의를 느낍니다. 그 사람들도 자신과 같은 사람이라는 것을 깨닫습니다. 그 사람도 자신과 같이 그를 기다리는 사랑하는 가족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들도 자신과 같이 죽는 것을 두려워하는 존재라는 것을 깨닫습니다. 그들의 고민이 나의 고민이라는 것을 깨닫습니다. 죽여 놓은 후에 그들도 같은 인간이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그는 절규합니다. “이 사람들도 나와 같은 사람이구나” 마지막 장면은 이렇게 끝납니다. 오랜만에 전투는 소강상태이고 쾌청한 날씨입니다. 병사들은 전쟁 중이라는 것도 잊고 누군가가 부르는 하모니카 소리에 귀를 기울입니다. 파울의 눈은 날고 있는 나비를 좇고 있습니다. 나비가 평화처럼 생각되어 참호에서 몸을 일으켜 나비에 손을 내미는 순간 저격병의 총격에 파울도 전사합니다. 그날 전선은 종일 조용했습니다. 전선 사령부는 본국에 전문을 보냈습니다. ‘서부전선 이상없다.’ 내가 남을 죽이고 결국 나도 다른 사람의 총탄에 죽는다는 이야기입니다. 과연 그것이 이상 없는 일인가 하는 문제를 제기하는 영화입니다. 우리는 죽이지는 않지만 남을 비판합니다. 내가 남을 비판하면 결국은 나도 비판받습니다. 우리는 아무렇지 않게 살아갑니다. 이것은 이상 없는 일이 아니라 심각한 문제입니다.
예수님은 한 여인을 정죄하는 인간들은 아무 문제가 없는 듯이 행동합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자신의 문제를 먼저 살펴보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예수님도 그녀를 정죄하지 않고 그 죄를 감당하십니다. 예수님은 용서 받은 사람에게 새로운 삶을 살도록 방향을 주십니다. 오늘 말씀은 초막절 행사와 연결됩니다. 초막절 행사에 중요한 것은 물을 붓는 것과 촛대에 불을 켜는 것이 중요한 행사입니다. 오늘 말씀은 빛을 통하여 예수님이 누구신지를 가르쳐주십니다.

(기도하고 가르치심)

1,2절을 보십시오. “예수는 감람 산으로 가시니라. 아침에 다시 성전으로 들어오시니 백성이 다 나아오는지라. 앉으사 그들을 가르치시더니”

초막절 행사가 끝난 후에 다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감람산으로 가셨습니다. 예수님은 감람산에서 쉬시기도 하시고 기도하기도 하셨습니다.(눅21:37,22:39) 예수님은 큰 말씀 역사 후에 기도하십니다. 예수님은 오병이어로 오천 명을 먹이신 후에도 기도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아침에 다시 성전으로 오셨습니다. 백성들은 말씀을 사모하여 아침부터 성전에 나아왔습니다. 예수님은 앉아서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가르치셨습니다. 백성들은 서서 말씀을 들으셨습니다.
예수님은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말씀을 전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성전에서나 길에서나 바닷가에서나 말씀을 가르치셨습니다. 명절 때도 말씀을 가르치고 명절이 끝나고도 말씀을 가르치셨습니다. 예수님은 말씀을 통하여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하십니다. 예수님은 말씀 전하시는 것에 좋은 본을 보여주셨습니다.

(음욕의 본성)

3,4절을 보십시오.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음행 중에 잡힌 여자를 끌고 와서 가운데 세우고 예수께 말하되 선생이여 이 여자가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혔나이다.”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살기가 등등하였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안식일을 범한다고 예수님을 죽이고자 하였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잡고자 하속들을 보냈습니다. 그러나 하속들이 말씀의 은혜를 받고 예수님을 잡아오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새롭게 예수님을 고소할 궁리를 하였습니다. 그들은 힘으로 예수님을 잡고자 하지 않았습니다. 머리를 써서 지혜로 예수님을 죽이고자 하였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잡기 위한 미끼로 쓰기 위해서 밤새 간음하는 자들을 찾았습니다.
초막절 행사에 은혜를 받고 그 분위기에 취하여 한 남자와 여자는 간음을 행하였습니다. 죄의 소욕은 끈질깁니다. 죄는 본능입니다. 절기나 율법으로 인간의 죄성을 해결할 수 없습니다. 삼손이나 다윗이나 솔로몬이 이런 죄에 넘어졌습니다. 이런 죄에서 안전한 사람은 없습니다. 우리는 항상 깨어서 조심해야합니다.
빌리그래함 목사는 여비서를 안 두고 여성도와 커피를 마시지 않았다고 합니다. 차를 탈 때 오른 편에는 아내 외에는 자매를 태우지 말아야합니다.

(예수님을 잡기 위한 미끼)

바리새인들은 간음하는 현장을 덮쳤는데 남자는 도망가고 여자만 잡혔습니다. 그러나 상관없었습니다. 그들은 다만 하나의 미끼가 필요할 뿐이었습니다. 그들은 현장에서 잡은 여자를 질질 끌고 성전으로 왔습니다. 성전은 죄사함을 주는 곳인데 그들은 성전에서 여자를 고발하고자 왔습니다.
여자의 옷매무새는 흩어져 있었습니다. 머리는 헝클어져 있었습니다. 얼굴은 두려움에 사색이 되어 있었습니다. 그들은 여자를 말씀 전하는 한 가운데 세웠습니다. 그리고 여자를 이용하여 예수님을 시험하였습니다. 예수님을 고소하고자 하였습니다.

(바리새인의 올가미)

5,6절을 보십시오. “모세는 율법에 이러한 여자를 돌로 치라 명하였거니와 선생은 어떻게 말하겠나이까? 그들이 이렇게 말함은 고발할 조건을 얻고자 하여 예수를 시험함이러라. 예수께서 몸을 굽히사 손가락으로 땅에 쓰시니”

그들은 예수님께 한 가지 질문을 통하여 여자를 미끼로 하여 덫을 놓았습니다. 모세는 율법에 이런 여자를 돌로 치라고 하였는데 예수님은 어떻게 말하겠느냐는 것입니다.(레위기 20장 10) 거룩한 하나님의 말씀을 이용하여 하나님의 아들을 죽이고자 합니다. 그들은 시기심과 미움의 노예가 된 살인자입니다. 이 질문에는 빠져나갈 수 없는 함정이 있습니다. 우선 돌로 치지 말라고 하면 십계명 중에 육 계명 간음하지 말라 간음하는 자는 죽이라는 말씀을 어기는 것입니다. 그들이 예수님이 하나님의 십계명을 어겼다고 공개적으로 체포할 수 있습니다. 공회에 넘겨서 예수님께 사형 선고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돌로 치라고 하면 예수님이 평소 가르치신 사랑의 계명과 어긋납니다. 또한 로마법에도 어긋납니다. 당시에 유대인은 사형 집행권이 없었습니다. 예수님을 로마법에 의해서 살인 교사죄를 체포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빠져 나갈 구멍이 없습니다.

(이중적인 바리새인)

우리는 여기서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에 대해서 생각해보아야합니다. 그들은 간음하지 말라는 율법을 수호하고자 하는 의지가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마음에 여인에 대한 사랑도 없고 예수님에 대한 사랑도 없었습니다. 그들은 율법을 지키는 것 같으나 율법을 지키지 않는 자였습니다. 율법의 최고의 계명은 사랑인데 그들은 사랑의 계명을 지키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도 자신의 욕심을 채우는 도구로 사용하였습니다. 그들은 선한 척했지만 속은 악한 자였습니다. 그들은 이중적이었습니다. 그들은 사단의 자식입니다.

(죄인을 돕는 법)

그러면 우리가 간음하는 여자를 그냥 두어도 된다는 말입니까? 그런 사람에게 박수라도 쳐주라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는 죄에 대해서 분노해야합니다. 책망해야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인본주의자가 됩니다. 다만 죄를 책망할 때 우리는 사랑으로 책망해야 합니다. 불쌍히 여기는 마음으로 죄를 도와야 합니다. 인격적으로 회개하도록 도와야합니다. 회개하면 용서해야합니다. 회개치 않을 때는 교회에서 출회시켜야 합니다.

(군중에서 개인으로)

예수님은 이들의 질문에 아무 말씀도 아니 하시고 땅에 앉으사 손가락으로 무엇인가를 쓰셨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무엇을 썼는지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글을 쓰므로 예수님은 격앙된 분위기를 진정시킨 것입니다. 그들은 군중심리 가운데 흥분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글씨를 쓰심으로 그들이 차분히 생각할 시간을 주셨습니다. 그들이 군중이 아닌 개인으로 생각할 수 있는 여유를 주었습니다. 예수님이 무슨 글을 썼는지 학자들은 여러 말을 합니다. 킹제임스 성경에는 예수님이 군중들의 말을 듣지 않는 것처럼 땅에 글씨를 썼다고 나옵니다. 어떤 사람은 죄 없는 자가 돌로 치라는 말을 썼다고 말합니다. 어떤 사람은 사람들의 죄목을 쓰셨다고도 합니다. 당시에 지성인들만이 글을 읽을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먼저 지성인들이 한 사람씩 와서 글을 볼 때 그들의 죄를 쓰셔서 죄를 깨닫기를 원하셨습니다. 지성인들이 먼저 회개하기를 원하셨습니다.

(죄 없는 자가 돌로 치라)

7,8절을 보십시오. “그들이 묻기를 마지 아니하는지라. 이에 일어나 이르시되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하시고 다시 몸을 굽혀 손가락으로 땅에 쓰시니” 예수님이 아무 대답도 하지 않으시자 그들은 묻기를 마지 않았습니다. 어떻게 말씀하시겠나이까? 물으며 재촉하였습니다. 앉으셨던 예수님은 일어나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을 둘러보시며 말씀하셨습니다. “너희 중에 죄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예수님은 이 말씀을 하시고 땅에 손가락으로 다시 쓰기 시작하셨습니다. 두 번째 침묵을 하였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이 다시 한 번 생각할 시간을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죄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고 하셨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돌로 치지 말라고 할 것을 기대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의 생각을 되집고 그들에게 돌로 치라고 하셨습니다. 원래는 증인이 먼저 돌로 쳐야 하는데 예수님은 먼저 죄없는 자가 돌로 치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엄청난 지혜입니다. 예수님은 한 사람, 한 사람 말씀 앞에서 자신을 비추어보게 하셨습니다. 먼저 지성인이요 지도자부터 자신을 살펴보고 회개하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러면 너희 중에 죄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는 의미가 무엇입니까?

(죄를 지은 자를 돌로 치라)

첫째,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에게 죄를 지은 여인을 향하여 돌을 던지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분명히 돌로 치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여인은 돌에 맞아 죽어야하는 존재라는 것을 인정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간음죄는 돌에 맞아야 할 죄입니다.
하나님이 십계명에서 간음하지 말라 말씀하시고, 레위기 20장 10절에서 간음한 자는 죽이라 하신 것은 간음이 심각한 죄이기 때문입니다. 신명기 22장 21절에 결혼한 후에 처녀가 아닌 것을 발견되면 돌로 쳐서 죽이라고 하였습니다.
간음이란 하나님이 인정하신 부부가 아닌 모든 성관계를 말합니다. 유부남이나 유부녀가 바람나서 다른 남자나 여자와 관계를 맺으면 간음입니다. 결혼 전에 성관계를 맺어도 간음입니다. 설령 약혼한 사이라도 관계를 맺어서는 안 됩니다.
사람들은 요즘 사랑해서 육적 관계를 맺는데 왜 죄냐고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십계명에서 간음하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간음은 죄입니다. 간음을 하면 우선 마음에 하나님의 형상을 잃고 짐승처럼 됩니다. 마음이 깨끗해지지 않고 더려워 집니다. 마음에 성령께서 떠나십니다. 간음은 가정을 파괴시킵니다. 가정이 파괴되면 자녀들이 고생합니다. 원치 않는 생명을 잉태합니다. 그로 인하여 사회도 점점 파괴됩니다.
하나님은 성적으로 타락하면 반드시 심판하십니다. 노아시대나 소돔과 고모라 시대에 성적으로 타락하자 심판하셨습니다. 사도 바울은 간음을 하고 회개하지 않는 자는 교회에서 출교시키라고 하였습니다. 계시록에 21장 8절에 보면 간음한 자는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들어간다고 하셨습니다.

(죄 없는 자가 치라)

그러나 예수님은 죄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돌을 던지는 자들이 자신을 돌아보도록 합니다. 들킨 죄인인가, 안 들킨 죄인인가 하는 차이만 있을 뿐입니다. 우리는 다 죄인입니다.
돌로 칠 수 있는 자격은 죄없는 자입니다. 죄가 있는 자는 돌을 던질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고발하는 자의 책임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내 눈의 들보를 빼고 남의 눈의 티를 빼야 합니다. 죄는 간음죄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모든 죄를 의미합니다. 예수님은 마음에 음욕을 품어도 간음이라고 하였습니다. 다른 사람을 미워하면 그것은 살인이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원수도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 이런 것을 어기면 우리도 죄인입니다. 이 세상에 죄 없는 사람이 있습니까? 아무도 없습니다. 모든 사람이 죄인입니다. 죄인이 다른 사람을 정죄하면 자신도 정죄를 받습니다. 그러므로 어떤 죄인도 다른 사람을 정죄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모두 다 죄인입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을 정죄하는 대신 사랑해야합니다. 긍휼히 여겨야합니다. 죄에 대해서 하나님의 사랑으로 책망해야합니다. 정죄하고 판단하는 문제는 심각한 문제입니다.
부부는 살을 맞대고 사는 가장 가까운 사이입니다. 그런데 부부 사이도 사랑하지 못하고 서로 판단하고 정죄합니다. 부모와 자식도 마찬가지입니다. 부모는 자식에게 왜 그것도 못해라고 말합니다. 우리 교회는 사랑의 공동체입니다. 선교사들은 사랑을 전하는 사람입니다. 그들은 같은 한국인입니다. 같은 선교사입니다. ubf선교사입니다. 그런데 서로 사랑하지 못하고 반목과 시기하는 곳도 있습니다. 두 가정만 모이면 싸우다가 개척 나가겠다고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왜 우리가 서로 이렇게 피터지게 싸웁니까? 오랜 우리나라의 역사와 관련이 있습니다. 한국은 정말 오랫동안 싸웠습니다. 당파로 나누어져 싸우고 사상으로 나뉘어 싸우고 영호남으로 나누어져 싸웠습니다. 우리는 너 죽고 나 죽자고 싸웁니다. 왜 너 죽고 나도 죽어야합니까?
나는 죽어도 너는 살아야합니다. 아니면 너도 살고 나도 살아야합니다. 우리의 속의 피에는 서로 정죄하는 피가 흐르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 우리를 살펴보십시오. 우리도 같은 죄인입니다. 나도 똑 같은 사람입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을 정죄할 수 없는 자입니다.
다른 사람을 정죄한 사람은 다른 사람에게 정죄를 당하게 됩니다. 우리는 정죄보다 이해와 사랑을 하는 성령을 주시도록 기도해야합니다. 사랑하는 마음으로 다른 사람을 권면해야합니다. 연약한 자의 연약함을 감당해야합니다.

(똥물이 튄 사람)

제가 갈보리채플에 다니는데 그곳에 아줌마 학생이 있습니다. 그분은 집사님입니다. 그 남편이 바람을 피웠습니다. 남편의 새로운 여자는 집사님에게 전화를 하여서 남편을 양보하라고 하였습니다. 집사님은 여자에게 그럼 집으로 오라고 하였습니다. 오라고 해 놓고 너무 두려워서 집안사람을 다 불러 모았다고 합니다. 남편에 대해서는 분노가 일어나서 치를 떨었다고 합니다. 더러워서 남편과 같이 살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집사님이 기도하는데 이런 음성이 들리더라는 것입니다. 남편의 몸이 똥이 묻었느냐? 예, 대답했습니다. 다시 예수님의 음성이 들렸습니다. 그러면 너의 몸에 똥물이 튀지 않았느냐? 집사님은 반문하였습니다. 예? 곰곰히 생각해보니 자신에게도 똥물이 튀었습니다. 다른 잘 생기고 매너 있는 남자 탈렌트를 보고 부러워하고 저런 사람이 남편이었으면 어떨까 생각하였습니다. 집사님은 예수님께 대답하였습니다. “예, 제게도 똥물이 튀었습니다.” “그러면 불쌍히 여기고 사랑하라” 그래서 집사님은 남편을 데리고 기도원에 갔다고 합니다. 남편은 부들부들 떨면서 모든 죄를 회개했다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사랑만이 사람을 변화시킬 수 있습니다.

(말씀 앞에서 죄를 발견하는 삶)

9절을 보십시오. “그들이 이 말씀을 듣고 양심에 가책을 느껴 어른으로 시작하여 젊은이까지 하나씩 하나씩 나가고 오직 예수와 그 가운데 섰는 여자만 남았더라."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양심의 가책을 느꼈습니다. 전에는 말씀에 가책을 느끼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면 누구도 무릎을 꿇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바람과 파도를 잔잔케 하신 하나님이십니다. 거룩하신 예수님은 그들의 양심에 돌을 던져서 죄인임을 깨닫게 하십니다. 그러자 예수님의 말씀이 무디어진 그들의 양심을 살아나게 하였습니다.
사람의 양심은 문화에 영향을 받습니다. 예를 들어서 전에는 자위행위만 해도 엄청난 가책을 느꼈습니다. 남녀 간에 성관계를 맺은 자는 눈물을 펑펑 쏟으면 회개하였습니다. 그러나 요즘은 성개방 문화가 퍼져나가고 있습니다. 혼전 순결을 범하는 자도 죄를 죄로 여기지 않습니다. 2009년에는 혼인 빙자 간음죄가 위헌이라는 판정이 나왔습니다. 2010년은 간통죄가 폐지되었습니다. 이런 분위기에서 혼전 관계를 갖는 것을 죄로 여기지 않는 분위기입니다.
이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통하여 죄를 깨닫게 합니다. 유비에프 어느 지부에 한 형제가 있었다고 합니다. 그는 장막방에서 장막장까지 하는데 자매와 잠을 자고도 조금도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것이 왜 죄냐고 반문을 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목자님이 네이버에 왜 혼전 순결이 죄인가 치니까 많은 말씀이 나왔다고 합니다. 혼전 순결을 지켜야 하는 대표적인 말씀이 요셉이 죄를 지을 가능성이 있을 때 창세기 39장 9절에 내가 이 큰 악을 행하여 하나님께 득죄하리까 한 말씀입니다. 그리고 출애굽기 22장 16,17절에도 처녀와 관계를 금하고 있습니다. 신명기 22장 21절에도 처녀가 순결을 잃으면 돌로 쳐죽이라고 하였습니다. 정혼 한 후에 순결을 잃은 경우로 죽이라고 하였습니다. 고린도전서는 간음 죄는 몸 안에 짓는 생명을 잉태하는 죄입니다. 그래서 그것을 정리하여 주었더니 눈물 콧물 흘리며 회개하였다고 합니다. 회개한 그분은 지금 새사람이 되어 선교사로 나갈 준비를 하고 있다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말씀은 사람의 잠자는 양심을 깨어나게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자신의 죄를 발견하고 회개해야 합니다.
사람들이 죄를 발견하자 어른에서 시작하여 젊은이까지 하나씩 하나씩 나갔습니다. 사람들은 나이를 들수록 더 죄를 짓게 됩니다. 우리가 하나씩 말씀 앞에서 자신을 발견하면 다 죄인이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죄를 깨달을 때 다른 사람을 정죄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죄)

10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일어나사 여자 외에 아무도 없는 것을 보시고 이르시되 여자여 너를 고발하던 그들이 어디 있느냐 너를 정죄한 자가 없느냐?”

예수님은 사람들의 정죄에서 자유하게 하셨습니다. 사람들 앞에서 죄의식을 느끼는데서 해방시켜주셨습니다. 사람들에게서 자유를 얻게 하십니다. 하나님 앞에서 죄를 발견하게 하셨습니다. 죄는 사람 앞에서의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의 문제입니다. 하나님은 죄를 지은 자를 지옥 불에 집어넣습니다. 다윗은 내가 하나님께만 죄를 범하였다고 하였습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죄를 발견해야 깊이 회개할 수 있습니다.

(대신 정죄 받으신 예수님)

11a절을 보십시오. “대답하되 주여 없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결국은 모든 사람이 떠나고 예수님과 여자만 남았습니다. 예수님은 아무 죄없는 분이시므로 여자에게 돌을 던질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십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으로서 간음죄를 지은 자를 돌로 치라고 구약에서 말씀하신 분이십니다. 아무 죄없는 예수님은 여자에게 내가 너에게 사형을 선고하노라고 해야 합니다. 그래야 사람들이 죄를 무서워하여 다시 죄를 짓지 않습니다. 죄를 벌해야 악을 제거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돌을 던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않는다고 하셨습니다. 다른 사람은 자격이 없어서 정죄를 못합니다. 나는 자격이 있어도 정죄하지 않는다고 하십니다. 예수님은 죄사함을 선포하셨습니다. 예수님이 하신 말씀은 구약에서 하신 말씀과 이율배반적인 것처럼 보일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은 일구이언하지 않으십니다. 그런데 이 말씀을 보면 예수님은 일구이언하는 것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거룩하신 예수님이 이렇게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않는다고 말씀하십니까? 예수님이 여인을 대신하여 정죄를 받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으시고 저주에서 해방시켜주셨습니다. 예수님은 부끄럽게 옷을 발가벗기고 십자가에 죽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여인을 사랑하여서 여인 대신 죽으셨습니다.
아무 죄없는 하나님이 왜 그 수치와 모욕을 당해야합니까? 아무 죄없는 예수님이 왜 그 고통을 당해야합니까? 그것은 바로 여인의 죄를 용서하여주시기 위해서입니다. 내면 깊은 죄의식에서 자유를 주시기 위해서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심판에서 자유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예수님 안에 있으면 아무도 우리를 정죄하지 못합니다. 하나님도 마지막 날에 심판하지 않으십니다. 우리는 예수님 안에서 어떤 죄도 용서받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과거를 기억도 하지 않으십니다.
다윗은 간음죄, 살인죄, 거짓말하는 죄를 범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죄를 회개하고 죄사함을 받았습니다. 이런 죄사함을 받고 행복하여 시편을 기록하였습니다. 시편 32편 1절입니다. “허물의 사함을 받고 자신의 죄가 가려진 자는 복이 있도다.” 요즘에 어려서부터 성적인 학대를 받은 사람들 있습니다. 깊은 수치를 느끼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이 예수님을 통하여 용서를 받을 수 있습니다. 이 여자가 잡혀서 적나라하게 나온 것이 은혜입니다. 죄를 드러내서 죄사함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과거의 상처를 치료할 수 있는 것은 바로 예수님 앞에 드러내고 사함을 받는 것입니다.

(죄에 대한 책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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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죄사함을 받았지만 그렇다고 죄에 대해서 사회적인 책임도 없어진 것으로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죄사함을 받았지만 사회적인 책임을 져야합니다. 남의 것을 도적질하였으면 네 배, 다섯배 배상을 해야 합니다. 다른 사람에게 죄를 지어서 피해를 주었다면 그 피해를 물질적으로나 정신적으로 보상해야합니다. 그리고 회개의 열매를 맺어야합니다.
다윗도 죄를 짓고 나서 징계를 받았습니다. 그에게는 자녀들 사이에 강간과 살인이 일어나고 반란이 일어났습니다. 이런 것은 다윗을 사랑하여 그 내면을 변화시키고자 하는 하나님의 징계였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회개의 열매를 맺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시고 훈련하십니다.

(다시 죄를 범치 말라)

11b를 보십시오. “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

예수님은 죄사함을 주시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죄사함을 받은 후에 새 삶을 살라고 방향을 주셨습니다. 용서는 은혜이지만 다시 죄를 짓지 말라는 말씀은 진리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지금까지 죄를 지은 사람은 죄를 짓는 습관이 있습니다. 연약한 육신이 있습니다. 죄를 유혹하는 환경들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죄의 세력에서 자유를 주시기 원하십니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죄를 다시 짓지 않을 수 있습니까?

(나를 위해서 희생하신 예수님)

첫째, 우리는 나를 위해서 희생하신 예수님을 생각해야합니다. 우리가 다시 죄를 지으면 우리가 예수님을 다시 십자가에 못박는 것입니다. 어떤 분이 나의 모든 빚을 갚아주었습니다. 많은 고생을 하며 생명을 희생하여 번 돈으로 빚을 갚아주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다시 빚을 질 수 있습니까? 죄도 마찬가지입니다. 고의로는 절대로 죄를 지을 수 없습니다. 연약하여 다시 죄를 지을 수는 있습니다. 이런 것은 다시 사랑으로 감당하여 줍니다. 그러나 고의로 죄를 범하면 다시 용서하여 주지 않으십니다.

(거룩하게 사는 연습)

둘째, 거룩하게 사는 연습을 해야합니다. 우리가 죄를 다시 짓지 않을 수 있는 것을 다루는 것이 로마서 6-8장입니다. 요약하면 우리가 죄에 대해서 죽은 것을 알아야합니다. 우리 안에 성령께서 오셔서 새생명을 주신 것을 알아야합니다. 그렇게 여겨야합니다. 매일 말씀에 순종하는 법을 배워야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내 힘으로 안 된다는 것입니다. 내가 하려고 하다보면 자꾸 한계에 빠집니다.
사도 바울도 자신의 힘으로 탐심을 없애지 못하여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라고 외쳤습니다. 우리는 나의 힘으로 하지 말고 성령께서 주시는 힘으로 해야 합니다. 우리 마음 속에 계신 성령님을 인정해야 합니다. 말씀의 은혜를 받아야 합니다. 이를 위해서 기도하고 말씀을 지속적으로 공부해야합니다. 우리가 한 번에 거룩한 사람이 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지속적인 훈련이 필요합니다. 이스라엘이 사십년 광야 생활을 한 것처럼 경건에 흐르는 연습이 필요합니다. 하나님은 때가 되면 우리를 새롭게 하여주실 것입니다.
우리는 가능한 한 빨리 결혼해야합니다. 부부간에 서로 사랑해야합니다. 결혼하지 않은 사람은 창조적인 일에 에너지를 발산해야합니다. 힘써 양들을 사랑하고 복음을 전해야합니다.

(정죄치 않는 에수님)

결론적으로 정욕의 죄는 하나님이 명령하신 분명한 죄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을 받고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들어가야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우리 대신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우리는 죄사함을 받았습니다. 크신 은혜를 받은 우리가 다시 죄를 범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은혜를 아는 가운데 우리가 다시는 죄를 범치 않는 새로운 삶을 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아멘 요한복음 8장 강해 일부 정죄치 않는 예수님.
요한복음 8장 1-요한복음 8장 11
요절 요한복음 8장 11절 대답하되 주여 없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
요한복음 8장 강해 일부 끝입니다.







번호 제목 작성자 작성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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