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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주의 대학생 선교기관

천안UBF

성경66권강해서

요한복음 7 장 강해 일이부 하나님에게서 온 교훈(1-24)

작성자 : 오요한
작성일 : 2006-04-04 00:00:00
조회수 : 2,937

문제지풀이(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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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7장 강해 일부 은밀히 가신 예수님
말씀 요한복음 7장1-요한복음 7장 13
요절 요한복음 7장 10절 그 형제들이 명절에 올라간 후에 자기도 올라가시되 나타내지 않고 은밀히 가시니라

예수님은 두 번째로 예루살렘에 올라가십니다. 예수님은 예루살렘에 은밀히 올라가십니다. 예수님은 아직 십자가에 죽으실 때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세 번째로 예루살렘에 올라가실 때는 공개적으로 올라가셔서 십자가를 지십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감추실 때와 나타나실 때를 아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때를 따라서 행동하는 법을 배우고자 합니다.

(아직은 때가 아니다)

1절을 보십시오. “그 후에 예수께서 갈릴리에서 다니시고 유대에서 다니려 아니하심은 유대인들이 죽이려 함이러라.”

요한복음 7장은 5장의 내용을 배경으로 합니다. 예수님이 예루살렘 근처 베데스다 못가에서 안식일을 어기고 삼십팔 년된 병자를 고치셨습니다. 고치실 뿐 아니라 그에게 그의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고 하였습니다. 병나은 사람은 바리새인들을 찾아가서 예수님이 시켜서 안식일 법을 어겼다고 고자질하였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이 안식일 법을 어기게 한 장본인임을 알았습니다. 그들은 안식일 법을 어긴 예수님을 죽이고자 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유대인들이 자신을 죽이고자 하시는 것을 아시고 유대 땅으로 가지 않으셨습니다. 주로 갈릴리에 거하였습니다.
때는 2절을 볼 때 초막절이 가까웠습니다. 초막절은 우리 달력으로 10월 15일쯤 됩니다. 우리나라 추석과 같은 큰 축제의 날입니다. 초막절이 되면 이스라엘의 성인과 다른 나라에 흩어진 유대인들이 다 예루살렘에 올라갑니다. 성전 주위에 초막을 짓고 하나님께서 광야 사십년 동안 베푸신 은혜를 찬양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초막절이 와도 예루살렘에 올라가지 않으셨습니다. 죽음이 두려워서가 아닙니다. 예수님은 아직은 죽을 때가 아님을 아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때에 죽고자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영광을 가장 잘 드러내는 때에 죽고자 하셨습니다. 그리스도의 복음을 가잘 잘 드러내는 유월절에 죽고자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죽는 것조차도 자신의 마음대로 죽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따라서 살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서 하나님의 때에 죽고자 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이 초막절 행사가 한창 진행될 때에 예루살렘에 올라가십니다.

(세상에 나타내소서)

2-4절을 보십시오. “유대인의 명절인 초막절이 가까운지라. 그 형제들이 예수께 이르되 당신이 행하는 일을 제자들도 보게 여기를 떠나 유대로 가소서. 스스로 나타나기를 구하면서 묻혀서 일하는 사람이 없나니 이 일을 행하려 하거든 자신을 세상에 나타내소서. 하니.”

예수님의 형제들은 “형님, 지금이 예루살렘으로 올라갈 수 있는 적기입니다. 지금 올라가시지요.” 라고 하였습니다. 당시는 유대인의 명절인 초막절이 가까워서 예루살렘 주위에는 세계에서 온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룹니다. 형제들은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가셔서 많은 사람이 있는 곳에서 능력을 행하기를 원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삼십팔 년된 병자를 고쳤듯이 예루살렘에서 많은 사람들의 병을 고쳐주시기를 원하였습니다. 물을 포도주로 바꾸어 잔칫집에서 기쁨을 주었듯이 그곳에서도 많은 사람에게 포도주를 주시기를 원하였습니다. 오병이어로 오천 명을 먹였듯이 그곳에 있는 많은 무리에게 떡을 주시기를 원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예루살렘에서 유명해지기를 원하였습니다.
형제들은 스스로 나타나기를 구하면서 묻여서 일하는 사람이 없다고 하였습니다. 갈릴리에 숨어서 일하지 말고 예루살렘에서 자신을 적극 나타내라는 말입니다. 우리나라 속담에도 사람을 낳으면 서울로 보내고 말은 제주도로 보내라는 말이 있습니다. 형제들은 예수님이 예루살렘 가서 많은 사람들의 인정을 받기를 원하였습니다. 때를 보아서 이스라엘의 왕이 되기를 원하였습니다.
그러면 그들은 왕의 형제들로 덕을 보고자 하였습니다. 예수님과 형제들이 예루살렘에 올라가는데 이런 차이가 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왕으로 모시고 하나님의 영광을 따라서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자신의 마음대로 살고 있습니다. 자신이 왕이 되어 자신의 영광, 세상의 영광을 따라서 행하고 있습니다.

(전적으로 맡기는 믿음)

5절을 보십시오. “이는 그 형제들까지도 예수를 믿지 아니함이러라.”

저자 요한은 그 형제들까지도 예수님을 믿지 않았다고 말합니다. 이게 무슨 말입니까? 형제들도 예수님을 믿었습니다. 그 표적을 행하심을 믿었습니다. 예수님의 능력을 믿었습니다. 말씀이 은혜가 있음을 믿었습니다. 이스라엘의 왕이 될 것을 믿었습니다. 그런데 왜 예수님을 믿지 않는다고 할까요?
예수님을 제대로 믿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의 인격을 믿고 전적으로 신뢰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 자신을 믿기보다 예수님을 통해서 얻고자하는 정치적인 이익을 믿었습니다. 예수님을 통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기 보다 자신의 영광을 드러내고자 하였습니다.
이런 점에서 형제들은 예수님이 떡을 주지 않자 예수님을 떠나 무리들과 같습니다. 이들의 공통점은 모두 기복신앙을 가진 것입니다. 기복신앙은 진실한 믿음이 아닙니다.
믿음이란 무엇입니까? 믿음이란 전적으로 의탁하고 따라가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소망을 두고 이 세상에 살아가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 나라에 소망을 두고 목자를 신뢰하고 따라가야합니다. 자신의 영광보다 하나님의 영광만을 구하는 것입니다.
어떤 곡예사가 있었습니다. 곡예사는 절벽에 줄을 매어 놓고 70킬로그램이나 되는 쌀가마를 메고 몇번을 왔다 갔다 하였습니다. 그리고 그곳에 있는 구경꾼들에게 내가 다시 저곳을 다녀올 것을 믿습니까? 그러자 사람들은 예! 믿습니다. 그러면 나의 어깨에 올라탈 사람은 나오십시오. 몸무게가 70킬로그램 이하는 나오십시오. 제가 저 절벽을 다녀오겠습니다. 아무도 나오지 않았습니다. 그때 저 뒤에서 나요! 하고 나오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 사람의 아들이었습니다. 곡예사는 아들을 목마를 태우고 몇 번을 왔다갔습니다. 누가 믿은 사람입니까?
형제들은 예수님의 능력을 믿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 자신의 삶을 맡기지 않았습니다. 하나님 나라에 소망을 두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믿지 않은 사람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예수님께 자신의 삶을 의탁하고 예수님의 뜻을 따라서 하나님 나라에 소망을 두고 사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께 자신의 삶을 맡기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서 하나님 나라를 향하여 가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을 주인으로 삼고 나는 그분의 도구가 되어 쓰임 받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은 전적으로 하나님을 신뢰하였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 자신을 하나님나라로 인도하시는 것을 전적으로 신뢰하고 십자가의 길을 가셨습니다. 여러분은 예수님을 어느 정도 믿습니까? 예수님을 전적으로 믿는다면 전적으로 나의 삶을 하나님께 맡기는 사람입니다. 하나님 나라에 소망을 두는 자입니다.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는 자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무엇도 내 마음대로 하지 못합니다. 텔레비전 보는 것도 내 마음대로 못하고 공부하는 것도 내 마음대로 못합니다. 우리는 모든 것을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의 때를 찾아서)

6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 때는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거니와 너희 때는 늘 준비되어 있느니라.”

예수님은 아직 내 때가 이르지 않았다고 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시간표대로 움직이셨습니다. 예수님은 물을 포도주로 바꿀 때도 내 때가 되지 않아서 도울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마리아가 하인들에게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그대로 하라고 하였을 때 예수님은 일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지금도 때가 이르지 않았다고 하시고 며칠이 지나서 예루살렘에 올라가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영광을 가장 잘 나타내는 때를 따라서 행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때에 민감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스스로 움직일 수 없으셨습니다. 하나님의 때를 따라서 움직이셨습니다. 하나님의 때에 따라서 살고 하나님의 때에 따라서 죽으셨습니다.
그러나 형제들은 자신들의 좋은 대로 움직입니다. 자기가 왕입니다. 사람들은 자신의 감정에 민감합니다. 그러므로 그들의 때는 항상 준비되어 있습니다. 항상 자기 마음대로 사는 자입니다. 이 세상에서 자기 영광을 구하는 자입니다.

(미움 받는 특권)

7-10절을 보십시오.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지 아니하되 나를 미워하나니 이는 내가 세상의 일들을 악하다고 증언함이라. 너희는 명절에 올라가라. 내 때가 아직 차지 못하였으니 나는 이 명절에 아직 올라가지 아니하노라. 이 말씀을 하시고 갈릴리에 머물러 계시니라. 그 형제들이 명절에 올라간 후에 자기도 올라가시되 나타내지 않고 은밀히 가시니라.”

형제들은 세상 사람들이 원하는 대로 살았습니다. 세상에 소망을 두고 살았습니다. 그러므로 세상은 형제들을 미워하지 않았습니다. 세상적인 가치관을 따라서 사는 사람은 세상 사람들에게 핍박을 받지 않습니다. 그들은 입으로는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는다고 하면서 자신의 삶은 자신의 마음대로 사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처럼 하나님의 뜻을 따라서 사는 사람들은 세상의 미움을 받습니다. 바울은 무릇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핍박이 있다고 하였습니다. 예수님 때문에 핍박을 받는 것은 큰 특권입니다. 우리 가운데 에베소 말씀을 공부하는 팀들은 대부분 외지에서 옵니다. 이들은 토요일 일요일을 하나님께 반납합니다. 그렇게 하다 보니 친구나 가족들에게 미움을 받습니다. 예수님은 이 말씀을 하시고 갈릴리에 머물러 계셨습니다. 형제들이 올라간 후에 은밀히 예루살렘에 올라가셨습니다.

(드러나게 말하지 못하는 사람들)

11-13절을 보십시오. “명절 중에 유대인들이 예수를 찾으면서 그가 어디 있느냐 하고 예수에 대하여 무리 중에서 수군거림이 많아 어떤 사람은 좋은 사람이라 하며 어떤 사람은 아니라 무리를 미혹한다 하나 그러나 유대인들을 두려워하므로 드러나게 그에 대하여 말하는 자가 없더라.”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올라가자 유대인들은 예수님에 대해서 감시의 눈초리를 늦추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찾을 뿐 잡지는 않았습니다. 아직 예수님이 죽으실 때가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예루살렘에서 여론의 중심에 있었습니다. 두서넛씩 모이면 그들은 예수님에 대해서 이야기하였습니다.
어떤 사람은 예수님을 좋은 사람이라고 하였습니다. 병 고치시고 먹을 것을 주시는 예수님을 좋은 사람으로 보았습니다. 말씀에 은혜를 받은 사람도 예수님을 좋게 보았습니다. 이들은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믿었습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예수님을 좋지 않은 사람으로 보았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무리를 미혹한다고 보았습니다. 무리를 선동한다고 말하였습니다.
예수님 주위에 항상 많은 무리가 모이자 예수님이 자신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여 무리를 미혹하게 한다고 보았습니다. 이들은 예수님을 사이비 종교의 창시자로 보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좋게 보는 사람들도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이를 공개적으로 말하지는 못하였습니다. 유대인들이 예수님이 그리스도로 고백하면 그들은 메시야쥬라고 하여 유대 공동사회에서 쫓겨납니다.
이천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그렇습니다. 회복이라는 영화를 보면 지금도 메시야를 믿으면 유대 사회에서 너는 유대인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을 공개적으로 믿지 않는 사람들도 하나님의 인정보다는 사람들의 인정을 구하는 자들입니다. 이들은 진정한 믿음을 가진 사람이 아닙니다. 진정한 믿음을 가진 사람은 어떤 핍박이 있어도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시인하는 사람입니다. 사도 바울은 입으로 시인해야 구원을 받는다고 하였습니다.

결론적으로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을 따라서 은밀히 올라가셨습니다. 자신을 드러내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죽으실 때가 되면 공개적으로 나귀타고 올라가서 드러내셨습니다. 사람들의 큰 환영을 받으며 올라갑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따라서 드러내지 말기도 하고 드러내기도 해야합니다. 우리는 나를 드러내지 말고 하나님만을 드러내야 합니다. 아멘
요한복음 7장 강해 일부 은밀히 가신 예수님
말씀 요한복음 7장1-요한복음 7장 13
요절 요한복음 7장 10절그 형제들이 명절에 올라간 후에 자기도 올라가시되 나타내지 않고 은밀히 가시니라
요한복음 7장 강해 일부 끝입니다.


요한복음 7장 강해 이부 하나님에게서 온 교훈
요한복음 7장 14-요한복음 21
요절 요한복음 7장 17 사람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려 하면 이 교훈이 하나님께로부터 왔는지 내가 스스로 말함인지 알리라

우리가 성경을 공부합니다. 기독교는 성경 말씀에 기초한 종교입니다. 세상에는 많은 고전이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 말씀이 세상의 교훈과 다른 점이 무엇입니까? 왜 우리가 성경 말씀을 공부합니까? 왜 성경 말씀에 나의 인생을 거는 것입니까? 그것은 바로 성경 말씀이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책은 아무리 좋은 것이라 하더라도 인간의 책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성령의 감동으로 된 하나님의 책입니다. 오랜 역사에 걸쳐서 예수님의 말씀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정받고 있습니다. 그 말씀을 통하여 많은 사람은 변화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세계 역사를 바꾸어놓았습니다. 사람들을 지옥에서 천국으로 옮겨줍니다.
그러면 우리가 예수님의 말씀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을 어떻게 하면 알 수 있을까요? 참된 믿음은 무엇입니까?

(배우지 아니하였거늘 어찌 글을 아느냐)

14,15절을 보십시오. “이미 명절의 중간이 되어 예수께서 성전에 올라가사 가르치시니 유대인들이 놀랍게 여겨 이르되 이 사람은 배우지 아니하였거늘 어떻게 글을 아느냐? 하니”

초막절 명절은 칠박 팔일 동안 이루어집니다. 9월말이나 시월 초에 이루어집니다. 지금도 이스라엘 사람은 초막절을 지킵니다. 예수님은 초막절이 시작되고 삼사일이 지나서 예루살렘에 올라가셨습니다. 예수님은 성전에 가서 공개적으로 말씀을 가르쳤습니다. 유대인들이나 무리들은 은밀히 예수님에 대해서 말하였으나 예수님은 공개적으로 말씀을 전하였습니다. 그들에게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하셨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의 가르침을 듣고 놀랐습니다. 어떻게 배우지 않았는데 그렇게 말씀을 잘 가르치는지 놀랐습니다. 예수님은 정규교육을 받지 않았습니다. 바울은 가말리엘 문하에서 배웠지만 예수님은 어떤 스승에게도 배우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이렇게 말씀을 은혜롭고 권세 있게 전하는지 놀랐습니다.
이런 현상은 사도행전에도 나타납니다. 베드로가 성령 강림 후에 그리고 앉은뱅이를 고친 후에 공개적으로 말씀을 전하였습니다. 그 말씀을 듣고 수천 명이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었습니다. 그러자 사람들은 학문을 배우지 않은 이들이 어떻게 저리 말씀을 잘 전하는가 놀랐습니다.(행전 4:13,14)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신 예수님)

16-17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 교훈은 내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것이니라 사람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려 하면 이 교훈이 하나님께로부터 왔는지 내가 스스로 말함인지 알리라.”

예수님은 자신의 교훈이 사람에게서 온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서 온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에게서 교육을 받아서 가르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랍비학교를 나오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께 가르침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에게 성령을 한량없이 부어주셨습니다. 성령을 주셔서 하나님의 말씀을 하게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말이 아니라 성령이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였습니다.

(순종하면 하나님의 말씀임을 알 수 있다)

우리가 예수님의 말씀이 사람의 말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17절에 보면 예수님은 내 말을 행하려 하면 알 수 있다고 하십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할 때 알 수 있습니다. 곡예사의 아들이 곡예사에게 자신의 몸을 맡긴 것처럼 전적으로 예수님을 믿고 나의 삶을 맡길 때 예수님이 누구인지를 알 수 있습니다.
어느 존경하는 목사님에게 물어보았습니다. 교회에서 어떤 신자가 가장 무섭습니까? 여러분은 어떤 분으로 생각하십니까? 불평하는 사람, 비판하는 사람, 불순종하는 사람일 것이고 생각되시죠? 그러나 그분의 대답은 뜻밖이었습니다. 나의 말을 하나님의 말씀처럼 듣고 행동하는 사람이 가장 무섭다고 하였습니다. 그 이유는 이런 사람에게는 함부로 말씀을 할 수 없다고 합니다. 무엇을 물어보면 어떤 때는 철야기도하고 어떤 때는 금식기도하며 하나님의 뜻이라는 확신이 와야 이야기 할 수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내 말을 행해보면 내 말이 하나님의 말씀인 것을 알 것이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말씀이 하나님의 말씀이므로 전적으로 신뢰하고 따라보라고 하십니다. 한번 순종해보라고 하십니다. 어떤 분은 이정표같은 사람이 있습니다. 남에게 어디로 가라고 지시는 하지만 자신은 그 방향대로 가지 않는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은 예수님을 하나님으로 체험하지 못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고 전적으로 신뢰하고 순종하는 사람이 예수님을 하나님으로 알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많이 아는 것입니까? 머리가 좋은 사람이 아닙니다. 이들은 머리에는 많은 지식을 가지고 있지만 정작 자신의 것은 없습니다. 한 말씀이라도 하나님의 말씀으로 듣고 순종하는 사람이 많이 아는 사람입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이 깊은 대로 가서 고기를 잡으라고 말씀에 의지하여 그물을 내렸습니다. 베드로는 순종해 보고 예수님의 말씀이 하나님의 말씀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성경 말씀에 순종해 본 많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순종은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순종하며 체험을 하고 환한 길이 보이고 그를 통하여 예수님이 그리스도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아버지의 영광을 구하는 자는 참되니)

18절을 보십시오. “스스로 말하는 자는 자기 영광만 구하되 보내신 이의 영광을 구하는 자는 참되니 그 속에 불의가 없느니라.”

예수님은 스스로 온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보내셔서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스스로 말씀하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영광을 구하지 않고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였습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였습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해서 십자가에서 온전히 죽으셨습니다. 사람을 기쁘게 하는, 사람의 말을 전하지 않았습니다.
인간은 다 거짓됩니다. 우리가 자신과 다른 사람을 기쁘게 하다 보면 거짓됩니다. 하나님만이 참되십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자는 참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말씀은 천지가 없어져도 일점일획도 없어지지 않는다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에 나의 삶을 전적으로 의탁하고 살아야합니다. 말씀에 자신을 맡기고 말씀대로 사는 사람이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이 사람은 바위에 집을 지은 사람입니다. 그러나 사람의 말은 당시는 아무리 옳은 것 같아도 시간이 지나면 다 없어집니다. 일시적인 것입니다. 사람의 말은 거짓됩니다. 만유인력 법칙은 진리로 생각하였습니다. 그러나 상대성 원리가 나오자 거짓으로 드러났습니다. 우리는 과학에 내 인생을 맡기지 말고 하나님의 말씀에 내 인생을 맡겨야합니다.

(과연 율법을 지키는 자는 누구인가)

19-21절을 보십시오. “모세가 너희에게 율법을 주지 아니하였느냐? 너희 중에 율법을 지키는 자가 없도다. 너희가 어찌하여 나를 죽이려 하느냐? 무리가 대답하되 당신은 귀신이 들렸도다. 누가 당신을 죽이려 하나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한 가지 일을 행하매 너희가 다 이로 말미암아 이상히 여기는도다.”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죽이고자 하였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율법을 지키지 않는다고 예수님을 정죄하였습니다. 예수님이 한 가지 일을 하자 다 기이히 여겼습니다. 예수님이 안식일에 삼십팔 년된 병자를 고치자 다 기이히 여겼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안식일을 어긴다고 죽이고자 하였습니다.
그들에게 안식일 법은 절대적입니다. 출애굽기에 보면 안식일을 지키라는 말씀이 다섯 번이나 반복하여 나옵니다. 안식일을 지키지 않으면 죽이라는 말씀도 나옵니다. 안식일 날 불도 피우지 말라고 나옵니다. 이들이 안식일 법을 이렇게 지키고자 하는데 예수님은 안식일 날 병자를 고쳤습니다. 자리까지 들고 가라고 하였습니다. 그러자 그들은 예수님이 율법을 지키지 않는다고 예수님을 죽이고자 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들에게 너희 중에 율법을 지키는 자가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과 바리새인들은 서로 율법을 지키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바리새인들과 예수님이 충돌하였습니다. 그러면 과연 율법을 지킨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종교지도자들은 제사를 지내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율법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제사와 순종은 어떻게 다릅니까?

(긍휼을 갖고 율법을 지키는 자)

첫째, 긍휼이 있느냐 없느냐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긍휼의 법은 최고의 법입니다.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이 죄인들과 함께 식사한다고 비난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가서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마9:13) 그들은 하나님의 마음을 몰랐습니다. 하나님이 안식일 법을 주신 것은 긍휼의 마음입니다. 인간이 일의 노예가 시달리기 때문에 그들을 일에서 자유를 주시기 위해서입니다.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휴식을 주시기 위해서입니다. 예수님이 안식일 날 병자를 고친 것도 긍휼의 마음입니다. 그는 병으로 삼십팔 년 동안 안식을 누리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그의 병을 고쳐서 그가 참 안식을 누리게 하였습니다. 우리에게는 무엇을 했느냐 하지 않았느냐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그 사람에 대한 사랑이 있느냐는 것입니다.

(욥의 친구들)

요즘 욥기 양식을 보고 있습니다. 저는 욥의 친구들을 좋은 사람으로 알았습니다. 그러나 욥은 친구들이 자신에게 침뱉는 자들이라고 말합니다. 자신을 죽이는 악인이라고 말합니다. 옳은 말이 사람을 괴롭게 한다고 합니다. 친구들이 바로 바리새인들과 같은 자들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욥에게 왜 고난을 주는지 알지 못하였습니다. 그들은 욥에 대한 하나님의 긍휼을 몰랐습니다.
우리는 무엇보다 마음 속에 사랑의 강물이 흘러야 합니다. 저는 한분의 신앙을 인하여 마음에 근심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분의 아내는 저에게 이런 말을 하였습니다. 자신의 남편을 위해서 기도하는데 너무 불쌍해서 통곡이 되었다고 합니다. 저는 저에게도 그런 마음을 주시도록 기도해달라고 하였습니다. 그렇습니다. 목자에게는 무엇보다 긍휼의 마음이 있어야합니다.

(큰 것에 목숨을 걸라)

둘째, 상위법을 앞세우는 것입니다.

22-23절을 보십시오. “모세가 너희에게 할례를 행했으니 (그러나 할례는 모세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조상들에게서 난 것이라) 그러므로 너희가 안식일에도 사람에게 할례를 행하느니라. 모세의 율법을 범하지 아니하려고 사람이 안식일에도 할례를 받는 일이 있거든 내가 안식일에 사람의 전신을 건전하게 한 것으로 너희가 내게 노여워하느냐”

예수님은 안식일에 할례를 하는 것을 예로 들어서 말씀하십니다. 할례는 아브라함 때부터 하나님이 하라고 명하신 것입니다. 안식일도 하나님이 지키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이 두 법이 충돌할 때가 있습니다. 할례를 팔일만에 하라고 하셨는데 팔일이 안식일인 경우는 어떻게 하느냐는 것입니다. 적어도 팔분의 일은 확률상 안식일에 할례를 해야합니다. 그들은 할례를 해야 한다고 해석하였습니다. 할례를 상위법으로 놓았습니다. 유대인들은 사람의 지체를 248가지 이루어졌다고 보았습니다. 할례는 그 중에 하나를 깨끗게 하는 것으로 보았습니다. 그들은 깨끗게 하는 것이 쉬는 것보다 우선한다고 해석하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안식일날 삼십팔년 된 병자를 고치셨습니다. 이것은 전신을 깨끗게 한 것입니다. 그런데 안식일을 지키는 법과 사랑하라는 법이 있을 때 어느 것을 앞세워야하겠습니까? 예수님은 어느 것이 우선이냐는 것입니다. 우리는 신앙 생활하면서 정말 너무나 작은 것에 목숨을 거는 사람이 있습니다. 우리는 작은 것은 넘어갈 수 있어야 합니다. 큰 것에 목숨을 걸어야합니다. 일반법과 헌법이 충돌할 때 헌법을 앞세우는 것과 같습니다. 헌법은 상위법입니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작은 율법이 아닙니다. 율법의 근본정신인 사랑과 공의입니다.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는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 바 정의와 긍휼과 믿음은 버렸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 (마23:23) 그렇습니다. 상위법은 정의와 긍휼과 믿음입니다. 하위법은 십일조입니다. 우리는 가장 중요한 정의와 긍휼과 믿음을 가져야합니다. 우리의 마음에 정의의 강물이 흐르고 긍휼의 강물이 흐르고 믿음의 강물이 흘러야합니다. 다른 것은 부수적인 것입니다. 제가 말씀을 준비하며 내 마음이 아픈 것은 이런 정의와 긍휼과 믿음이 없어서 하나님이 보내주신 양들을 잃은 것입니다. 주님 나에게 정의와 긍휼과 믿음이 있게 도와주십니다.

(중심을 보고 판단)

셋째, 공의롭게 판단하는 사람입니다.

24절을 보십시오. “외모로 판단하지 말고 공의롭게 판단하라 하시니라.”

예수님은 외모로 판단하지 말고 공의로 판단하라고 합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안식일 법을 어기는 것만을 가지고 판단하였습니다. 예수님의 마음 속에 있는 긍휼을 보지 못하였습니다. 예수님의 중심을 보지 못하였습니다. 그들은 하위법에 매여서 상위법을 보지 못하였습니다. 우리는 하위법에 기초하여 판단하지 말고 상위법으로 판단해야합니다. 하위법은 행동을 보고 판단하지만 상위법은 중심을 보고 판단합니다. 우리는 중심을 보고 판단해야합니다. 공의로운 판단은 시림의 중심을 보고 판단하는 것입니다.

(진정한 믿음)

결론적으로 예수님의 말씀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이 하나님의 말씀을 아는 자들은 말씀에 순종해 보는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섣부르게 판단하지 말고 순종해보고 판단해야합니다. 아무리 사람들이 예수님을 욕할지라도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인생 문제를 해결하고 하나님을 경험한 사람은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고 따라갑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가운데 예수님의 말씀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만나고 영생을 얻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아멘!
6요한복음 7장 강해 이부 하나님에게서 온 교훈
요한복음 7장 14-요한복음 21
요절 요한복음 7장 17 사람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려 하면 이 교훈이 하나님께로부터 왔는지 내가 스스로 말함인지 알리라
요한복음 7장 강해 이부 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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