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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주의 대학생 선교기관

천안UBF

성경66권강해서

요한복음 7장 강해 삼사부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25-52)

작성자 : 오요한
작성일 : 2006-04-16 00:00:00
조회수 : 3,439

문제지풀이(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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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7장 강해 삼부 더큰 십자가의 표적
요한복음 7장25-요한복음 7장 36
요절 요한복음 7장 31 무리 중의 많은 사람이 예수를 믿고 말하되 그리스도께서 오실지라도 그 행하실 표적이 이 사람이 행한 것보다 더 많으랴? 하니

오늘 말씀의 배경은 이스라엘의 삼대 명절인 초막절 때 일어난 일입니다. 초막절은 장막절이라고도 합니다. 이날은 이스라엘이 출애굽하여 사십 년 광야 생활한 것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이스라엘에 사는 모든 사람과 다른 나라에 흩어졌던 성인들이 예루살렘에 모여 듭니다. 이들은 8일 동안 텐트를 치고 생활하기 때문에 그날을 장막절이라고 합니다. 장막 위에 풀이나 나무를 얹기 때문에 초막절이라고도 합니다. 우리 달력으로는 10월 15일경이기 때문에 모든 추수가 끝나고 저장한 후입니다. 마치 우리나라 추석과 같이 한 해의 추수를 감사하는 날이기도 합니다. 곡식을 다 저장하였다고 하여서 그날을 수장절이라고도 합니다.
이 명절은 일 년 중에 가장 풍성한 명절입니다. 하나님께 가장 감사하는 명절입니다. 우리나라는 이런 추석 명절에 선물을 가지고 고향으로 갑니다. 고향에서는 풍성한 과일과 고기와 술로 즐깁니다. 따뜻한 방안에서 온 가족이 오손도손 송편을 먹으며 지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런 즐거운 수장절에 과거 조상들이 사십년 광야 생활한 것을 일주일간 체험하게 하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풍요를 누리게 한 것이 아니라 불편함을 체험하게 하였습니다. 이들이 장막생활을 하면 자고 씻고 먹는 것이 다 불편합니다. 이때는 가을이므로 밤이 되면 춥습니다. 바람이 불어오고 하늘에는 별이 보입니다. 하나님은 참으로 풍성한 명절에 우리의 풍속하고는 전혀 다르게 불편함을 체험하게 하였습니다.
흥미롭지 않습니까? 왜 이렇게 하였을까요? 하나님은 사람들에게 감사하는 마음을 갖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사람들은 풍요만으로 감사하는 것이 아닙니다. 궁핍을 알 때 감사합니다. 궁핍을 알면 우리의 기대수준이 낮아집니다. 기대수준이 낮아진 상태에서는 모든 것이 감사합니다.
저는 ‘눈먼 자들의 도시’라는 영화를 보았습니다. 이 도시에서 한 사람씩 눈이 멀게 됩니다. 눈머는 것이 전염됩니다. 눈먼 자들을 수용소에 가둡니다. 눈먼 자들의 수용소는 무정부 상태가 찾아옵니다. 그곳에는 인권이 없습니다. 물질적으로 약탈당하고 성적으로 유린당합니다. 그러다가 한 사람씩 눈먼 순서대로 눈을 다시 뜨게 됩니다. 그들은 감격에 외칩니다. 그 수용소에 눈이 멀지 않았던 한 사람이 있습니다. 그가 남편을 따라서 수용소에 들어갔습니다. 그 여자가 말합니다. “이 사람들은 이렇게 많은 것을 깨달았는데 나는 무엇을 깨달았는가?” 계속 눈이 떠있던 사람은 감사도 감격도 없습니다. 이것을 안타까워합니다. 소경이었던 사람은 눈뜬 것에 대해서 감사가 있습니다. 그러나 계속 눈을 떴던 사람은 눈뜬 것에 감사가 없습니다.
이처럼 궁핍한 생활을 체험하면 풍요에 대해서 감사가 생깁니다. 이스라엘이 출애굽을 하였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애굽에서 노예살이도 했습니다. 사십년 광야 생활도 하였습니다. 이들이 가나안 땅에 왔을 때 그들은 감격하였습니다.
하지만 광야 생활도 체험하지 못하고 풍요 속에 태어난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들은 원래부터 풍요를 누린 줄로 생각합니다. 이들은 감사가 없습니다. 이것이 문제입니다.
우리가 감사를 잃어버릴 때가 있습니까? 군대 갔다 온 사람은 자유로운 사회에서 사는 것도 감사합니다. 병원에 가서 호흡기를 꽂고 살았던 사람들은 숨쉬는 것으로도 감사합니다. 맹장 수술을 받았던 사람은 방귀를 꿀 수 있는 것도 감사합니다.
여기에 비극이 있습니다. 우리가 꼭 고난을 당해보고야 감사해야 하겠습니까? 우리는 이런 고난을 당하기 전에 우리가 사는 것만으로 감사해야합니다.

(자기중심적인 성경공부)

25-27절을 보십시오. “예루살렘 사람 중에서 어떤 사람이 말하되 이는 그들이 죽이고자 하는 그 사람이 아니냐? 보라 드러나게 말하되 그들이 아무 말도 아니 하는도다. 당국자들은 이 사람을 참으로 그리스도인 줄 알았는가? 그러나 우리는 이 사람이 어디서 왔는지 아노라. 그리스도께서 오실 때에는 어디서 오시는지 아는 자가 없으리라. 하는지라."

예수님은 초막절 명절에 예루살렘 올라가셨습니다. 예수님도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말씀을 가르치셨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예수님이 그리스도가 아니라고 결론을 지었습니다. 이들은 그리스도가 오실 때는 어디서 오는지 모른다는 생각하였습니다.
이사야서 64장에 보면 그리스도는 하늘을 가르고 강림하시며 산이 진동하게 하신다고 하였습니다. 메시야는 큰 영광과 위엄 가운데 강림하십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가난한 목수 요셉과 마리아에게서 어린 아기로 태어나셨습니다. 예수님은 무시받는 갈릴리 나사렛 출신입니다. 예수님이 어린 아기로 태어난 것을 다 알고 있는데 예수님이 무슨 메시야냐는 것입니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신비성이 없습니다.
그들의 말은 맞는 것 같지만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 자들입니다. 성경에는 하늘에서 강림하시는 메시야에 대한 예언도 있지만 우리가 지난 주 배운 것처럼 한 아기로, 한 싹으로, 흠모할 만한 것도 없으신 모습으로 오신다는 말씀도 있습니다. 예수님이 처음 오실 때는 어린 아기로 오시지만 다시 오실 때는 하늘에서 오십니다.
예수님을 믿지 못하는 자들은 성경 말씀 중에 자신에게 은혜가 되는 말씀만 받아들이고 좋아하지 않는 말씀은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으려면 성경이 우리에게 가르치는 말씀을 다 받아 들여야 합니다. 예수님은 재림 때는 영광의 주로 오시지만 초림때는 고난의 주님으로 오십니다. 예수님은 재림 때는 권능으로 오시지만 초림 때는 연약한 아기의 모습으로 오십니다.

(보내신 자의 뜻을 따라서)

28,29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성전에서 가르치시며 외쳐 이르시되 너희가 나를 알고 내가 어디서 온 것도 알거니와 내가 스스로 온 것이 아니니라. 나를 보내신 이는 참되시니 너희는 그를 알지 못하나 나는 아노니 이는 내가 그에게서 났고 그가 나를 보내셨음이라. 하시니”

예수님은 베들레헴에서 태어나고 갈릴리에서 자란 자신이 왜 메시야인가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스스로 베들레헴에서 태어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그곳으로 보내셔서 그곳에서 태어나고 자라신 것입니다. 미가서 성경 말씀대로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보내신 하나님을 알고 계십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과 함께 계셨습니다. 예수님은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누구보다 하나님을 잘 아십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마음을 아십니다. 하나님이 예수님을 왜 인간의 모습으로 보내시고 십자가에 죽게 하시는지 그 마음을 잘 알고 있으십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잘 아시는 하나님의 뜻을 따라서 가난한 인간의 모습으로 오셨습니다. 인간을 이해하시고 인간의 죄를 감당하기 위해서 십자가에 죽으십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우리의 그리스도가 되십니다.
요한복음에서 예수님은 자신을 보낸 분이 있고 자신은 하나님이 보내서 이 땅에 오셨다는 말씀을 반복하여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이 보내신 분이 바로 메시야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이 예수님을 보내셨다는 말씀이 무슨 뜻일까요? 예수님은 스스로의 뜻을 따라서 아기의 모습으로 오신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베들레헴에 태어난 것도 성경에 기록된 대로 하나님의 뜻을 따라서 된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소원을 따라서 오신 것입니다. 그들이 정말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의 뜻을 안다면 그들은 가난한 아기의 모습으로 오신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때에 알게 된다)

30절을 보십시오. “그들이 예수를 잡고자 하나 손을 대는 자가 없으니 이는 그의 때가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음이러라.”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잡지 않은 것은 예수님의 때가 이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보내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여 죽으십니다. 제자양성의 사명을 다 감당하고 하나님의 때에 죽으십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을 따라서, 하나님의 때에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우리의 그리스도가 되십니다. 그때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알게 됩니다.

(더 큰 십자가의 표적)

31절을 보십시오. “무리 중의 많은 사람이 예수를 믿고 말하되 그리스도께서 오실지라도 그 행하실 표적이 이 사람이 행한 것보다 더 많으랴? 하니”

예루살렘에 있는 어떤 사람들은 예수님이 행하시는 표적을 보았습니다. 죽은 나사로를 살리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행하시는 많은 표적을 보았습니다. 예수님은 소경의 눈을 뜨게 하시고 문둥병자, 중풍병자를 고치시고, 죽은 자를 살리셨습니다. 바람과 바다를 잔잔케 하시고 군대 귀신을 쫓아내셨습니다. 그들은 메시야가 오시더라도 예수님이 행하신 표적보다 더 많은 표적을 행하실 수 없다고 말하였습니다. 그들은 이런 표적을 근거로 예수님을 메시야라고 생각하였습니다.
예수님이 메시야로서 보여주실 표적은 이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예수님은 이보다 더 큰 표적을 보여주십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셔서 하늘에 승천하여 그리스도이심을 보여주십니다. 십자가와 부활은 예수님이 그리스도라는 필요충분한 증거입니다.

(보내신 이에게로 돌아가겠노라)

32-34절을 보십시오. “예수에 대하여 무리가 수군거리는 것이 바리새인들에게 들린지라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그를 잡으려고 아랫사람들을 보내니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너희와 함께 조금 더 있다가 나를 보내신 이에게로 돌아가겠노라. 너희가 나를 찾아도 만나지 못할 터이요 나 있는 곳에 오지도 못하리라. 하시니”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의 인기가 올라가자 예수님을 체포하러 사람들을 보냈습니다. 예수님은 무리들과 자신을 잡으러 온 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조금 있다가 유대인들에게 체포되고 십자가에 죽으실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조금 있다가라고 하십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삶이 조금 남은 것을 아셨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죽으실 날이 7개월 남은 것을 아셨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죽으시고 사흘 만에 새로운 몸으로 부활하십니다. 부활 후에 사십 일 동안 부활을 증거하시다가 하늘로 승천하여 보내신 아버지 하나님께로 돌아가실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 승천하여 우리의 그리스도가 되십니다. 오직 예수님만이 그리스도가 되시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세상의 어떤 사람도 우리를 위해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사람은 없습니다. 공자도 석가도 마호멧도 아닙니다. 문선명도 죽었고 김일성도 죽었습니다. 나사로나 야이로의 딸은 죽었다가 소생한 것이지 부활한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이들은 그리스도가 아닙니다. 부활하신 예수님만이 우리의 진정한 그리스도가 되십니다.

(땅만을 생각하는 자들)

35,36절을 보십시오. “이에 유대인들이 서로 묻되 이 사람이 어디로 가기에 우리가 그를 만나지 못하리요 헬라인 중에 흩어져 사는 자들에게로 가서 헬라인을 가르칠 터인가 나를 찾아도 만나지 못할 터이요 나 있는 곳에 오지도 못하리라 한 이 말이 무슨 말이냐 하니라”

그러나 사람들은 예수님이 하나님께로 돌아간다는 말씀을 이해하지 못하고 헬라에 흩어진 유대인들에게 갈 것인가 반문했습니다. 예수님이 이방 땅으로 가시니 예수님을 이제 만날 수 없는 것이냐고 물었습니다. 이들은 하늘 아버지가 있는 것을 알지 못하고 땅 위에 있는 것만 생각하는 자들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흩어진 유대인에게 가는 것이 아니라 하늘에 계신 하나님 아버지에게로 돌아가십니다. 부활승천하십니다. 예수님은 하늘에 오르락내리락하신다고 수직적으로 말씀하시지만 그들은 베들레헴이냐 갈릴리냐 수평적으로 말합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하나님 아버지에게로 가셔서 하실 일이 무엇입니까?
요한복음 7장 강해 삼부 더큰 십자가의 표적
요한복음 7장25-요한복음 7장 36
요절 요한복음 7장 31 무리 중의 많은 사람이 예수를 믿고 말하되 그리스도께서 오실지라도 그 행하실 표적이 이 사람이 행한 것보다 더 많으랴? 하니
요한복음 7장 강해 삼부 끝입니다.

요한복음 7장 강해 사부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
요한복음 7장37-요한복음 7장 52
요절 요한복음 7장 37, 38절 명절 끝날 곧 큰 날에 예수께서 서서 외쳐 이르시되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 하시니

영국의 유명한 저술가인 토마스 에드워드 로렌스라는 분이 있습니다. 국제 연맹이 창설된 후에 1919년 파리에서 평화 회담을 개최했습니다. 로렌스경은 이 때에 아랍 대표들과 서방 사람들 사이에 중재역할을 맡았습니다. 아랍대표들은 파리에서 보았던 에펠탑이나 루브르 박물관보다도 호텔의 목욕탕을 훨씬 더 인상적으로 보았습니다. 물이 아주 부족한 사막에서 왔는데 수도꼭지만 틀면 물이 펑펑 나오는 것이 너무도 신기하였습니다. 그런데 그 회담이 끝날 무렵 로렌스경에게 그들이 묵고 있던 호텔의 직원이 황급히 찾아왔습니다. “정말 큰일 났습니다. 로렌스 경, 지금 아랍 대표들이 호텔의 목욕탕을 다 뜯고 있습니다. 빨리 와 보십시오.” 그래서 가서 보니 정신없이 목욕탕을 뜯고 있었습니다. 무슨 일이요? 묻자 그들의 대답은 정말 황당했습니다. “물이 없는 사막에서 이 목욕탕은 정말 인기가 있을 것이고, 사막 한가운데에 이 목욕탕을 놓고 수도꼭지만 틀면 물이 펑펑 쏟아질 테니까요. 돈은 걱정하지 마십시오. 다 변상하겠습니다.” 속사정을 들은 로렌스가 아랍 대표들에게 목욕탕에 물을 공급해 주는 수도관이 따로 수원지에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땀을 뻘뻘 흘리면서 겨우 설명했습니다.
물은 수원지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우리 가운데 보면 성령 충만한 사람이나 교회가 있습니다. 사람들은 그 사람이나 교회에 관심을 갖습니다. 그러나 그들에게 성령을 공급하는 성령의 수원지가 있습니다. 성령의 수원지를 아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광야에 샘물을 주신 하나님)

37-39절을 보십시오. “명절 끝날 곧 큰 날에 예수께서 서서 외쳐 이르시되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 하시니 이는 그를 믿는 자들이 받을 성령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예수께서 아직 영광을 받지 않으셨으므로 성령이 아직 그들에게 계시지 아니하시더라.)”

이제 초막절 마지막 8일째입니다. 이때는 명절의 절정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초막절 행사에 초막을 짓는 것 외에 또 하나 기념하는 것이 있습니다. 제사장들이 실로암 못에서 물을 길어다가 예루살렘 성전 앞에 붓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사막 땅에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물을 주신 것을 기념하였습니다. 이백만의 인구와 가축이 사막에서 40년 동안 물을 먹었다는 것은 놀라운 일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사막에서 물이 없어 갈증이 나서 모세를 원망하며 부르짖었습니다. 이 때 하나님은 모세에게 반석에 대하여 서서 지팡이로 바위를 치라고 하였습니다. 모세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였을 때 바위에서 물이 나왔습니다. 처음에는 조금씩 나오다가 나중에는 폭포수같이 물이 쏟아져 나왔습니다. 그 물은 강물을 이루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과 모든 가축들이 이 강물에서 풍족하게 물을 마셨습니다. 하나님이 사막에서 물을 주신 것은 하나님의 큰 은혜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실로암 못에서 물을 퍼다 성전에 부으면서 하나님이 주신 물을 기억하고 감사하였습니다.

(물을 붓던 바위 위에 서서)

이스라엘 사람들은 초막절 행사를 육일 동안 하고 칠일째는 성회로 모입니다. 예수님은 성회에서 그들이 물을 붓던 바위 위에 서셨습니다. 예수님은 일반적으로 앉아서 말씀을 가르칩니다. 유대인의 풍속은 우리나라와 다르게 청중은 서고 선생은 앉아서 가르칩니다. 그러나 아주 중요한 진리를 선포할 때는 일어섭니다. 예수님은 앉아서 말씀을 가르치다가 갑자기 일어서셨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주목하여 예수님을 바라보았습니다.
예수님은 이들에게 큰 소리로 외쳤습니다.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솟아나리라.” 예수님은 목마른 사람을 초청하셨습니다. 세상에는 마실 것이 많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우리에게 진정한 생수를 주십니다. 예수님은 바위를 자신에 비유하셨습니다. 바위에서 강물처럼 나온 생수를 성령님에 비유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참으로 신선한 비유를 하셨습니다. 이 말씀이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것은 무엇입니까?

(예수님은 수원지)

첫째, 예수님이 물을 공급하는 수원지가 되신다는 것입니다. 광야에서 바위에서 샘물이 나왔습니다. 하나님은 바위를 치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서 치라고 하십니다. 예수님의 허리를 찌르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면 옆구리에서 피가 흘러납니다. 성령의 강물이 그 옆구리에서 흐르게 됩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여 하나님 우편에 올라가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우편에서 성령을 받아서 우리에게 보내주십니다.
우리는 처음 죄사함을 받고 예수님을 영접할 때 성령을 충만히 받습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잃어버리고 예수님이 계시는 자리에 다른 것을 놓습니다. 예수님 대신에 물질을 놓고, 예수님 대신에 자녀나 부모를 놓고, 예수님 대신에 양들을 갖다 놓고, 예수님 대신에 이성異性을 갖다 놓습니다. 자기 자신을 갖다 놓습니다. 그들의 신앙 생활이 메말라 있습니다. 우리가 성령을 받으려면 우리의 마음 중심에 예수님을 다시 높아야합니다. 예수님을 나의 그리스도로 모셔야합니다.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여 영광 중에 그리스도가 되신 예수님을 나의 그리스도로 영접해야합니다. 그러면 성령께서 나의 마음 속에 충만히 임하십니다.

(강물 같은 성령님)

둘째, 성령님은 바위에서 나오는 강물과 같습니다. 성령님을 비유하는 것이 많습니다. 불에도 비유하고 바람에도 비유하고 기름에도 비유하고 비둘기에도 비유합니다.
오늘 말씀에서는 성령님을 물에 비유합니다. 물은 우리 몸에 80%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물은 우리가 살아가는 데 아주 중요합니다. 물이 있어야 생명이 자랄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우리가 날마다 물을 마셔야하는 46가지 이유를 나에게 적어 보냈습니다. 그것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물은 에너지의 주 원천입니다. 물은 인체 내에 전기적 에너지와 자기적 에너지를 생성합니다. 우리는 물로부터 살아갈 힘을 공급받습니다. 물은 세포구조의 건축 설계에서 강력접착제 역할을 합니다. 물은 유전자를 가지고 있는 DNA의 변형을 줄여줍니다. 물은 골수의 면역체계의 기능을 증강시켜줍니다. 여러 병원균을 막아줍니다. 물은 모든 음식물과 비타민 미네랄을 용해시켜 음식물을 날라주고 소화 흡수시켜 줍니다. 물은 산소를 공급하며 유독 가스를 배출시켜 줍니다. 물은 몸의 체온을 일정하게 유지시켜 줍니다. 물은 척추나 관절에 윤활유 역할을 하며 완충제 역할을 합니다. 하여튼 물이 있어야 생명이 자라고 활동할 수 있습니다. 성령은 물과 같습니다.
성경에는 물에 관한 이야기가 많습니다. 모세와 야곱이 사랑하는 사람을 우물에서 만납니다. 에덴 동산과 하나님 나라에는 생명수의 강물이 흐릅니다. 예수님이 주시는 성령은 목마름을 채워주십니다. 사람들은 여러 가지 목마름이 있습니다. 이성으로 채울 수 없고 물질로 채울 수 없고 세상적인 쾌락으로 채울 수 없는 목마름이 있습니다. 성령은 우리의 이런 영혼의 목마름을 채워주십니다. 사마리아 여자가 다섯 명의 남편으로 채울 수 없는 목마름을 성령님은 채워주셨습니다. 성령은 우리 영혼에 샘솟는 기쁨을 주십니다. 영원한 기쁨을 채워주십니다. 사람들이 알지 못하는 마음에 강같은 평화를 주십니다.
예수님은 곡식의 씨와 같습니다. 성령님은 씨에 주는 물과 같습니다. 물을 주어야 씨가 자랍니다. 성령님은 모든 영적인 것을 운반하고 활동하게 합니다. 성령님은 우리 속에 있는 죄의 노폐물을 씻어내는 역할을 합니다. 우리의 상처받은 것을 다 씻어내 주십니다. 성령님은 우리가 먹은 말씀을 소화 흡수하게 합니다. 성령님은 우리가 예수님께 붙어있게 하는 접착제 역할을 합니다. 성령님은 우리의 속사람을 날마다 새롭게 하십니다. 우리가 육적으로는 늙지만 영적으로는 점점 새로워져야합니다. 이 일을 성령님께서 하십니다. 성령님은 우리를 공격하는 마귀로부터 우리를 지켜주십니다. 성령께서는 우리의 영혼에 완충제 역할을 합니다. 어떤 시련이나 충격적인 일을 받아도 그 충격을 흡수시켜 다치지 않게 합니다. 성령님은 윤활유와 같이 우리의 활동을 부드럽게 하십니다. 성령님은 우리의 영적인 생활을 부드럽게 만들어주십니다. 성령님이 우리에게 은혜의 단비를 주십니다. 우리를 위로해주십니다. 성령님은 어머니와 같습니다. 어머니처럼 우리를 위로하시고 격려해주십니다. 성령님은 힘을 주십니다. 성령님은 우리에게 능력을 주셔 병자를 치료하십니다. 물이 생명을 주듯이 성령님은 생명을 주십니다. 인류는 물이 있는 곳에 발전하였습니다. 물이 끊어지면 사막과 같아집니다.
에스겔서 47장에 보면 사해지방에 물이 흐릅니다. 물이 흐르자 나무들이 자라고 꽃이 피어납니다. 동물들이 모여들고 사람들이 모여듭니다. 마찬가지로 성령이 계신 곳에 하나님은 생명을 자라게 하십니다. 성령님은 자유를 주십니다. 성령님은 우리의 영혼을 자라나게 하십니다. 성령님은 우리를 풍성하게 하십니다. 곡창 앞에서 굻어죽는다는 말이 있듯이 예수님을 옆에 두고 목이 마른 사람이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곁에 두고 바라만 보지 말고 예수님을 보고 믿는 생활을 해야 합니다. 성령님이 우리를 풍요롭게 하십니다. 성령님은 물이 어떤 현실에서도 적응하듯이 우리가 현실에서 잘 적응하게 하십니다.

(믿고 순종하는 자에게 주시는 성령님)

셋째, 성령님은 예수님을 믿는 자에게 주십니다. 사람들은 성령을 받기 위해서 여러 가지로 애를 씁니다. 어떤 사람은 소나무뿌리를 뽑으며 부르짖는 사람이 있습니다. 성령을 받으려면 소나무를 세 그루는 뽑을 정도로 힘을 쓰며 기도해야 한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목이 쉬도록 부르짖습니다. 대부분 성령 운동을 하시는 분들이 목이 쉬어 있습니다. 이들이 간절히 찾는 것은 성령을 받는데 중요합니다.
그러나 더욱 중요한 것은 허공에 대고 성령을 달라고 부르짖다가 악령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성령을 받기 위해서 무엇보다도 예수님을 나의 그리스도로 믿어야 합니다. 예수님을 믿은 후에 하나님이 성령을 주신 것을 믿고 인정하고 환영하고 받아들이면 성령을 충만히 주십니다. 우리는 이미 성령을 주시기 위해서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여 하나님 우편에 앉아계신 것을 믿고 받아들여야합니다. 더 나아가 하나님께 순종해야합니다. 요한복음에서 믿음은 순종입니다. 진정한 믿음은 순종을 수반합니다. 우리는 십자가에 죽기까지 순종해야합니다. 회개와 순종과 사랑과 감사의 십자가를 져야합니다. 그러면 성령님이 오십니다.

(강물처럼 흐르는 성령님)

넷째, 성령은 강물처럼 흐른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강물은 원어적인 의미로 홍수가 졌을 때 흐르는 폭포수와 같은 것입니다. 많은 양의 물이 힘 있게 흘러갑니다. 본문에 보면 예수님이 영광을 받으신 후에 성령의 강물이 흘렀다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이 부활승천하신 후에 예수님에게서 성령의 강물이 흘렀습니다. 예루살렘에 성령이 흐르고 유대인들이 이 흐름을 막았습니다. 그러자 성령의 강물은 사마리아 지방으로 안디옥으로 소아시아로 유럽으로 로마로 미국으로 아시아로 흘러갔습니다. 이 물이 지금 한국에까지 흐르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성령이 강물처럼 흐른다고 하셨습니다. 성령은 한강이나 금강물처럼 흐릅니다. 대청댐의 물을 청주 대전 천안 사람들이 먹습니다. 한강물을 이천만의 서울 시민이 다 먹습니다. 성령님은 이렇게 많은 양이 흘러넘칩니다. 서울 여의도 순복음 교회는 허허벌판이었습니다. 그러나 조용기 목사님에게 성령의 강물이 흘렀습니다. 그러자 많은 사람들이 그곳에 모여들어서 성령의 강물을 마셨습니다. 이사무엘 선교사님에게서 성령의 강물이 흐르자 한국의 대학생들이 마시고 이제는 세계 85개국으로 흘러갔습니다. 성령의 강물이 우리의 속에 흘러야합니다. 우리의 교회에는 성령의 강물이 흘러야합니다.

(성경에 기초한 성령님)

다섯째, 성령의 강물은 성경에 이름과 같이 흐릅니다. 스가랴서에서 보면 성령의 강물이 성전에서 동서로 흘러간다고 하였습니다. 에스겔서에 보면 성령이 성전에서 시작되어 강물처럼 흐릅니다. 성령이 강물처럼 흐르자 온갖나무와 꽃들이 자라고 동물들이 뛰어놉니다. 성령의 강물이 흐르는 것은 이런 구약성경 말씀에 기록된 것입니다.
왜 이것을 저자가 강조할까요? 성령은 말씀에 기초한 확실한 것을 보여주시기 위해서입니다. 우리는 성령이 일하신다는 표적을 보기 원합니다. 방언하고 예언하고 병을 고치는 표적을 원합니다. 그러나 성령은 성경말씀에 기초하여 확신할 수 있습니다. 성령이 보이지 않아도 성경말씀에 기초하여 성령이 흐르는 것을 받아 들어야합니다. 계시록에 보면 예수님이 재림하여 오셔서 하나님 나라를 만드는 그곳도 생명수의 강물이 흐릅니다. 성경에 말씀하시는 것 같이 하나님 나라에 생명수의 강물이 흐르게 할 것입니다.

(말씀에 대한 전적인 신뢰)

여러분은 생수의 강물이 마음 속에 흐르고 있습니까? 우리가 어떻게 하면 성령의 강물이 풍성하게 흐르도록 유지할 수 있을까요? 예수님은 저를 믿는 자는 생수의 강물이 흐른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면 믿는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우리는 광야에 있었던 이스라엘 백성들의 상태로 돌아가 보아야합니다. 하나님은 광야에서 생수의 강이 넘치게 하셨습니다. 광야는 어떤 것입니까? 광야는 아무런 물도 없는 곳입니다. 하나님만을 의지할 수밖에 없습니다. 사람들은 광야에서 오직 하나님께만 매달렸습니다. 이렇게 전적으로 하나님께 매달리는 것이 믿음입니다. 전적으로 예수 그리스도만 신뢰하는 것이 믿음입니다. 하나님은 초막절을 통해서 예루살렘의 풍요를 비우고 옛날에 궁핍을 체험하도록 하셨습니다. 궁핍 속에서 전적으로 하나님을 의지할 때 성령님이 임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성령의 역사는 비우고 예수그리스도를 전적으로 믿는 자들에게 임하십니다.
내려놓음으로 유명한 이용규박사는 하버드대 박사와 미국 시민권을 내려놓고 몽골로 갔습니다. 그곳에 성령께서 일하셨습니다. 유비에프는 78년 이후에 큰 성령의 강물이 있었습니다. 사무엘 선교사님은 한국의 기득권을 내려놓고 미국으로 가셨습니다. 전요한 목자님은 내과 전문의를 내려놓고 풀타임 목자가 되었습니다. 82년에 대전에는 큰 성령의 강물이 흘렀습니다. 홍보나 목자님은 청주에서 교회를 건축한 후 모든 것을 버려두고 대전으로 왔습니다. 우리도 이런 비움을 실천할 때 크신 성령의 강물을 이루실 것을 믿습니다.

(사랑의 강물)

우리에게 성령의 강물이 흐른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많은 사람들은 성령하면 표적을 생각합니다. 축복을 생각합니다. 그러나 고전 12-13장에 보면 성령의 강물은 사랑의 강물입니다. 사랑의 강물이 우리 마음에 흐르게 해야합니다. 정의의 강물, 믿음의 강물, 소망의 강물이 우리 마음 속에 흐르게 해야합니다.

(불충분한 정보)

40-44절을 보십시오. “이 말씀을 들은 무리 중에서 어떤 사람은 이 사람이 참으로 그 선지자라 하며 어떤 사람은 그리스도라 하며 어떤 이들은 그리스도가 어찌 갈릴리에서 나오겠느냐? 성경에 이르기를 그리스도는 다윗의 씨로 또 다윗이 살던 마을 베들레헴에서 나오리라 하지 아니하였느냐? 하며 예수로 말미암아 무리 중에서 쟁론이 되니 그 중에는 그를 잡고자 하는 자들도 있으나 손을 대는 자가 없었더라.”

예수님의 말씀을 들은 사람들은 선지자라고도 하고 그리스도라고도 하고 그리스도가 아니라고도 하였습니다. 그리스도로 믿지 않은 사람들은 예수님이 베들레헴에서 나지 않고 갈릴리 나사렛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그리스도가 아니라고 하였습니다. 우리가 알듯이 예수님은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시고 갈릴리 나사렛에서 자라셨습니다. 이들은 불충분한 정보들 근거로 예수님에 대해서 불신에 빠졌습니다. 우리가 성경 잘 공부해보면 예수님은 구약 성경에 예언된 바로 그 그리스도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믿는 자는 저주를 받은 자)

45-49절을 보십시오. “아랫사람들이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에게로 오니 그들이 묻되 어찌하여 잡아오지 아니하였느냐? 아랫사람들이 대답하되 그 사람이 말하는 것처럼 말한 사람은 이 때까지 없었나이다. 하니 바리새인들이 대답하되 너희도 미혹되었느냐? 당국자들이나 바리새인 중에 그를 믿는 자가 있느냐? 율법을 알지 못하는 이 무리는 저주를 받은 자로다.”

종교지도자들은 하속을 보내서 예수님을 잡아오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하속들은 예수님의 말씀에 은혜를 받고 감동되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그리스도라는 믿음이 생겼습니다. 그러나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이 율법을 알지 못하므로 그리스도가 아니요. 저주를 받은 자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삼십팔년된 병자를 고치셨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안식일 법을 어겼으므로 그리스도가 아니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를 믿는 자는 저주를 받은 자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안식일 법을 어겼지만 더 큰 자비의 법을 지켰으므로 예수님은 저주를 받은 자가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지만 실제로 저주를 받고 죽으심으로 우리에게 복을 주십니다. 예수님을 믿는 자는 복받은 자입니다.

(불충분한 지식)

50-52절을 보십시오. “그 중의 한 사람 곧 전에 예수께 왔던 니고데모가 그들에게 말하되 우리 율법은 사람의 말을 듣고 그 행한 것을 알기 전에 심판하느냐? 그들이 대답하여 이르되 너도 갈릴리에서 왔느냐 찾아 보라 갈릴리에서는 선지자가 나지 못하느니라. 하였더라.”

이때 공회원으로 예수님을 믿은 니고데모가 말하였습니다. 예수님을 만나서 그의 말을 들어보고 예수님의 행한 것을 알기 전에 예수님이 죄인이라고 판단하는 것은 잘못되었다고 하였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만난 후에 마음 속에 예수님에 대한 믿음이 싹트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이 갈릴리 출신이라는 것으로 예수님을 거절하였습니다. 그들은 갈릴리에서 선지자가 난 적이 없다고 하였지만 요나는 갈릴리 출신이었습니다. 그들은 대충 아는 것으로 예수님을 판단하였습니다. 공의의 판단을 하지 못하였습니다.

(성령의 강물이 흐르기를)

예수님은 처음에 아기의 모습으로 오셨습니다.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님은 하늘에 올라가시고 이제는 성령으로 오셨습니다. 다음에는 큰 능력과 영광으로 재림하실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세 번 오십니다. 처음에는 베들레헴 말구유에 오셨습니다. 두번째는 오순절날 예루살렘에 오셨습니다. 이제 세번째는 구름타고 번개처럼 오실 것입니다. 우리가 이 성탄절에 예수님을 믿고 우리의 마음 속에 성령의 강물이 흐르게 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우리를 통하여 많은 사람들이 성령을 충만히 먹고 마시기를 기도합니다. 아멘!
요한복음 7장 강해 사부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
요한복음 7장37-요한복음 7장 52
요절 요한복음 7장 37, 38절 명절 끝날 곧 큰 날에 예수께서 서서 외쳐 이르시되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 하시니
요한복음 7장 강해사부 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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