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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주의 대학생 선교기관

천안UBF

성경66권강해서

요한복음 5장 강해 일이부 진정한 베데스다 예수님( 5 : 1-9)

작성자 : 오요한
작성일 : 2005-03-12 00:00:00
조회수 : 4,282

문제지풀이(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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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5장 강해 일부 진정한 베데스다 예수님

요한복음 51-요한복음 59

요절 요한복음 56절 예수께서 그 누운 것을 보시고 병이 벌써 오래된 줄 아시고 이르시되 네가 낫고자 하느냐

 

우리는 혹시 인생을 살면서 혼자 헤쳐 나가기에는 너무나 힘든 수렁 속에서 허우적 거릴 때가 있지 않았습니까? 소망도 없고 환경도 건조하여 하루하루 의욕 없이 시간만 보내는 마치 앉은뱅이와 같은 상황에 직면하고 있지는 아니하십니까? 혹시 그런 분이 계신다면 이 시간을 통해 38년 된 병자를 고치시는 예수님을 만나고 매일매일 소망과 소원이 가득 차 힘있게 걸어가는 삶을 사시길 기도합니다.

요한복음은 예수님을 통하여 생명의 역사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38년 된 병자에게 소원을 주시고 새로운 생명의 역사를 이루어가십니다.

 

(유대인의 명절에)

 

1.2절을 보십시오! “그 후에 유대인의 명절이 되어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올라가시니라 예루살렘에 있는 양문 곁에 히브리 말로 베데스다라 하는 못이 있는데 거기 행각 다섯이 있고

 

여러분은 명절 하면 무엇이 가장 떠오르십니까? 명절이 되면 멀리 흩어져 열심히 살고 있던 형제, 자매, 친척들이 고향에 모여 부모님을 찾아뵙고 즐거운 시간을 가지는 장면이 가장 떠오를 것입니다. 설날이 되면 서로 덕담을 나누며 복을 빌어주고 즐거운 놀이를 하기도 합니다. 아이들은 한복을 곱게 입고 부리나케 어른들께 세배를 올리며 세뱃돈을 받습니다. 유대인에게도 이처럼 명절이 돌아왔습니다.

유대인의 삼대 명절은 유월절 오순절 초막절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지금의 우리의 명절 모습과는 사뭇 달랐습니다. 그들은 명절이 되면 예루살렘 성전에 모여 말씀을 듣기도 하고 맛있는 음식을 준비하며 함께 나누어 먹었습니다. 명절에 하나님께 감사의 제단을 쌓았습니다. 명절은 그야말로 주님을 위한 축제였습니다. 명절에는 주님을 더욱 사랑하였습니다. 이스라엘 공동체가 하나 되어 서로 교제하였습니다. 예수님도 또한 제자들과 즐거운 명절을 보내시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셨습니다.

 

(자비의 주님)

 

예수님은 예루살렘에 어디로 가셨습니까? 예수님은 명절에 성전으로 들어가지 않으셨습니다. 성전에서 그리 멀지 않은 자비의 집이라는 뜻을 가진 베데스다라는 하는 연못으로 가셨습니다. 베데스다 연못 주위에는 다섯 개의 정자가 있었었고, 다섯 개의 정자에는 하나님의 자비를 구하는 많은 병자들이 모여 있었습니다. 바로 예수님은 명절에 이곳 사람들에게 자비를 베푸사 그들에게 꿈과 희망과 용기를 주고자 하셨습니다. 베데스다 연못은 바로 예수님의 사랑의 선택지였습니다. 예수님은 자비와 긍휼이 풍성한 분이십니다.

 

(병든 사람들)

 

3절을 보십시오! “그 안에 많은 병자, 맹인, 다리 저는 사람, 혈기 마른 사람들이 누워 [물의 움직임을 기다리니

 

베다스다 못은 현대 사회와 유사합니다.

첫째로 베데스다 연못은 병든 사회였습니다. 베데스다 연못 안에 많은 병자, 맹인, 다리 저는 사람, 혈기 마른 사람들이 누워 물의 움직임을 기다렸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예배해야하는 명절에도 병으로 인해 성전에조차 올라 갈 수가 없었습니다. 그들의 삶은 너무나도 초라하였습니다. 실패자와 패배자라는 인식으로 소원마저 희미해진 안타까운 삶을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차라리 이렇게 고통 받으며 살아가는 것보다 여기서 뼈를 묻으며 죽는 편이 오히려 더 낫다고 생각하는 병자들도 있었을 것입니다. 이곳은 우리의 사회와 유사함을 느낍니다.

지금 우리는 어떻습니까? 인류 역사상 과학기술이 발달하고 물질의 풍요를 누리는 사회에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과연 우리가 건강하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우리가 진정으로 잘 살고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우리는 현재 육체적, 정신적, 또는 영적으로 병들어 있습니다. 의학이 발달하여 많은 외적인 병들이 정복 되었다 하지만 아직도 치유 불가한 병들이 많이 있습니다. 또한 묻지마 살인, 존속 범죄, 아동 성폭행, 사이버 테러 등 지금 이 순간도 수많은 범죄와 사고가 생겨나고 있습니다. 눈부신 문명의 혜택으로 인하여 어쩌면 모든 사람들이 각자의 생활에 만족을 느끼고 살아야 하는데 허무, 불평, 무의미, 원망, 부정적인 생각 등 영적인 병을 안고 살아가는 세상입니다. 좀 가난하기는 했어도, 인정이 넘치고, 예의와 염치를 아는, 평화로운 예전 시절이 그리운 이유입니다. 이렇게 현대인들은 각자의 고질병을 안고 씨름하며 살아가는 고단하고 병든 사회에 살고 있습니다.

 

(경쟁사회)

 

4절을 보십시오! “이는 천사가 가끔 못에 내려와 물을 움직이게 하는데 움직인 후에 먼저 들어가는 자는 어떤 병에 걸렸든지 낫게 됨이러라

 

둘째로 베데스다 연못은 경쟁사회의 축소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곳에는 가끔 천사가 못에 내려와 물을 움직이게 하는데 움직인 후에 먼저 들어가는 자는 어떤 병에 걸렸든지 나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아쉽게도 모든 사람이 병을 낫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오로지 가장 먼저 물에 들어가는 선착순 한 명만이 병을 나을 수 있는 혜택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가장 빨리 물에 들어가기 위해서 서로 서로 끊임없이 경쟁을 해야 하는 곳입니다. 그야말로 너를 이겨야 내가 살 수 있습니다.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는 어떻습니까? 돈이 삶의 의미이자 목표가 되고 말았습니다. 부의 능력으로 그 사람을 평가 하는 세상이 되었습니다. 외모, 학력, 모두 마찬가지입니다. 남성 키 180 이하면 루저(looser)취급을 받는 세상입니다. 학력이 낮으면 또한 지방대를 나오면 패배자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이 때문에 우리는 태어나면서부터 끊임없이 경쟁 속에서 살아갑니다. 입시경쟁, 취직경쟁, 승진경쟁 심지어 외모경쟁까지 삶의 모든 게 경쟁의 연속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 태어나기 위해서 처음으로 경쟁을 하게 됩니다. 어머니의 뱃속에서 태어나기 해서 격렬한 몸부림을 치며 결국 엄청난 경쟁률과 치열한 경쟁을 뚫고 이 세상에 태어납니다. 그러면서 본격적으로 눈에 보이는 경쟁을 직면합니다. 살아가는 것이 경쟁의 연속입니다. 학창시절엔 똑같은 머리스타일 똑같은 교복에 모두들 비슷비슷한 겉모습이지만 오로지 평가의 잣대는 학업성적입니다. 일류대학에 가기 위해서 끊임없이 경쟁하며 입지 지옥에서 시달려야 합니다. 그렇게 입시지옥에 탈피 하여 대학생이 되었다고 하지만 여기서 경쟁은 멈추지 않습니다. 바늘 구멍만한 좋은 취업 자리에 들어가기 위해서 눈을 뜨면 토익, 자격증 등 스펙을 쌓는 공부를 하느라 정신이 없습니다. 고학년이 될수록 개인의 취미나 관심거리는 사라져 갑니다. 미래의 삶을 편안하게 보내기 위해 현재를 희생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준비하여 원하는 직장을 가졌다고 편안하다고 할 수 있을까요? 또 다른 경쟁의 시작입니다. 보직이나 진급을 놓고 벌어지는 경쟁은 전쟁터와 다름없습니다. 직장에서 살아남기 위해서 근무 이외에 별도로 더 준비하고 노력해야 합니다. 출세를 위해서라면 때론 불의가 정의를 지배합니다. 바르게 사는 자가 승리자가 아니고 성공하는 자가 승리자인 것입니다. 참 안타까운 현실이 아닐 수 없습니다.

 

(예측불허의 사회)

 

셋째로 베데스다 연못은 예측불허의 사회입니다. 아쉽게도 천사는 병자들이 그토록 바라던 매일매일 베데스다 연못에 내려오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렇다고 병자들에게 날짜를 알려주고 내려 온 것도 아니었습니다. 예고 없이 내려왔습니다. 예측불허인 상황에 병자들은 초초하고 불안한 나날을 보냈을 것입니다. 화장실도 가도 가는 게 아니요. 잠을 자도 자는 게 아니요. 식사를 해도 식사를 하는 것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예측불허는 이처럼 인간을 초초하고 불안하게 만듭니다. 그들은 대박을 기대합니다.

현재 세계 경제는 또 한 번의 위기를 맞이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를 시작으로 남유럽(PIGS)을 거쳐 전 세계에 파장을 일으키고 있는 유럽 경제 위기가 글로벌 금융시장을 뒤흔들고 있습니다. 그리스에 대한 구제금융 지원이 늦어지고 있는데다 국제신용평가기관들이 남유럽 국가의 국가신용등급을 본격적으로 하향조정하고 있는 것이 새로운 악재(惡材)로 부상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세계는 경제공황의 위기를 맞이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속에서 살고 있습니다. 그들은 로또 복권과 같은 대박을 막연히 기대합니다.

 

(네가 낫고자 하느냐)

 

5,6절을 보십시오! “거기 서른여덟 해 된 병자가 있더라 예수계서 그 누운 것을 보시고 병이 벌써 오래된 줄 아시고 이르시되 네가 낫고자 하느냐

 

그곳에 38년 된 병자가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그 많은 병자 중에서 특별히 38년 된 병자를 주시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예수님이 태어나기 전부터 병을 앓고 있었습니다. 그는 끝까지 베데스다를 떠나지 않고 소망을 갖고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이때 예수님이 그를 찾아오시고 그에게 나타나서 물으셨습니다. “네가 낫고자 하느냐? 예수님은 왜 그에게 이런 질문을 하셨을까요?

 

(강한 소원이 믿음임)

 

첫째, 예수님을 통해 그에게 낫고자 하는 강한 소원을 심어주기 위해서입니다. 그는 자신의 병을 고치기 위하여 물이 움직일 때 물에 들어가려고 노력 했으나 혼자서 제대로 움직일 수 없는 관계로 항상 남에게 기회를 빼앗기는 안타까운 삶이었습니다. 그의 인생을 도와주는 자도 물로 인도해 주는 자도 없었습니다. 무려 38년 동안 실패자로 살았습니다. 38년이면 강산이 거의 네 번 바뀔 정도로 엄청 오랜 시간입니다.

4년마다 열리는 지구촌 축제인 월드컵을 한 번 기다리기도 힘든데 무려 9번 열리고 2년이 더 지난 시간입니다. 이렇게 긴 시간동안 그는 실패자와 패배자로 살았습니다. 너무나 오랫동안 병이 지속되어 낫고자 하는 소원도 소망도 희미해졌습니다. 그는 병에 동화되어 있었습니다. 어쩌면 이렇게 고통 받고 사는 것보다 차라리 죽는 게 낫겠다는 생각이 들었을지도 모릅니다. 이렇게 실패가 거듭 반복되어 결국 자신감이 상실되어 자연스럽게 실패를 받아들였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병자의 마음을 훤히 꿰뚫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병자의 입장에서 다가갔습니다. 결국 예수님은 이 병자에게 강한 소원을 심어주어 그에게 용기와 희망을 주고자 했습니다.

 

(완치자 예수님)

 

둘째, 예수님께 소망을 두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예수님이 38년 병자에게 질문을 던진 이유는 무엇입니까? 장난입니까? 아님 진심이었습니까? 38년 동안 큰 고통을 받으며 살아가는 이 병자에게 어느 누가 감히 이런 질문을 던질 수 있겠습니까? 장난을 치기엔 이 병자의 인생이 얼마나 불쌍하고 초라하였습니까? 불난 집에 부채질 하는 것도 아니고 지금 이 병자의 인생에서 가장 큰 관심사인 자신의 병의 치유를 가지고 어느 누가 감히 장난을 칠 수 있겠습니까?

그렇다면 정말로 이 병자를 고칠 수 있는 분만이 이런 질문을 던질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렇습니다. 만인의 왕이시고 우리의 모든 문제를 해결해 주시는 예수님만이 바로 이런 질문을 던질 수 있는 자격이 있습니다. 예수님만이 이 병자의 문제를 해결 해 주시는 유일한 구원자이십니다.

우리의 삶은 어떻습니까? 살다 보면 38년 병자와 같이 마치 끝이 보이지 않는 앞이 컴컴한 어두운 통로를 가고 있을 때가 있습니다. 어느 정도 지나면 그 어두운 통로 속에서 벗어나야 하는데 모 광고의 생각대로 T도 아니고 생각대로 되지 않습니다. 앞으로 전진을 해야 하는데 다람쥐 쳇바퀴 돌듯이 헛걸음질만 할 때도 있습니다. 지금 세상을 둘러보십시오! 온갖 각종 복잡한 문제로 가득 차 있습니다. 먹는 문제, 입는 문제, 자는 문제, 공부하는 문제, 교통사고 화재사고 가뭄 홍수 등 천재지변, 낳고 살고 늙고 병들고 죽는 문제 온통 문제투성이입니다. 이런 생각을 할 땐 정말 앞이 캄캄하고 절망스럽습니다. 평생 패배자로 살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누가 계십니까? 주변에 누가 보이십니까? 예수님이십니다. “이는 선지자 이사야로 하신 말씀에 우리 연약한 것을 친히 담당하시고 병을 짊어지셨도다 함을 이루려 하심이더라(마태 8:17)” 예수님은 근본적으로 우리의 죄 사함을 위하여 오신 분이시지만 우리의 영혼 뿐 아니라 우리의 모든 문제를 해결하려 오신 분이십니다. 단순히 우리의 문제를 내세적으로 해석하시는 분이 아니라, 문제를 직접 해결하시는 주님이십니다. 우리의 삶의 주인, 책임자. 문제의 해결자, 그분이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우리는 우리의 죄만 아뢰지 말고 우리의 모든 문제를 아뢰고 그분께 맡겨서 우리의 미래가 꿈과 희망이 없는 게 아니라 언제나 소원과 소망이 가득차야 합니다. 아멘

 

(병자의 대답)

 

7절을 보십시오! “병자가 대답하되 주여 물이 움직일 때에 나를 못에 넣어 주는 사람이 없어 내가 가는 동안에 다른 사람이 먼저 내려가나이다.”

 

만인의 왕이시고 우리의 문제를 해결해 주시는 예수님이 앞에 서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여전히 베데스다 연못의 물만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이 병자의 문제점은 과연 무엇일까요?

 

(원망과 절망)

 

첫째, 그는 원망과 절망으로 일관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는 못 속에 먼저 들어 갈 수만 있다면 자신의 병이 나을 줄 알았으므로 자신을 부축해서 못 속으로 넣어 줄 자를 찾았습니다. 예수님의 네가 낫고자 하느냐?”라는 질문에 그는 천사가 간혹 내려와 베데스다 호수의 물을 요동치게 함을 기다리고 있다고합니다. 어느 누구도 자신을 그 물 속에 넣어 줄 자가 없다고 원망합니다. 사람을 의지하면 원망 불평합니다.

뿐 만 아니라, 다른 사람이 먼저 물속에 들어 가버린다고 절망을 토해내었습니다. 그는 다른 사람과 경쟁에서 패배하고 깊은 패배주의에 물들었습니다. 그 못가에는 다섯 행각이 있었고, 그 행각 안에는 절름발이, 혈기마른 자, 맹인 등 많은 병자들이 누워 있었습니다. 그가 정확하게 무슨 질병에 걸렸으며 몇 년 동안 그런 기회가 자신의 것이 되기를 기다려 왔는지는 알 수 없으나, 분명한 것은 앞으로도 기회를 상실하고 말 것이라는 것입니다. 낫기 위해서는 예수님이 아니라 자신을 못 속에 제일 먼저 넣어 줄자가 필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예수님을 보지 않음)

 

둘째, 그는 예수님을 알지 못했습니다. 38년 된 병자는 예수님의 질문에 뜻밖의 대답을 하였습니다. 낫고 싶으면 YES 아니면 NO 라고 답해야 하는데 그는 답변 대신 오로지 주변 환경과 자신이 처한 현실에 대한 부정적인 생각만 늘어놓았습니다. 그는 만인의 왕이시고 우리의 문제를 해결해 주시는 예수님이 앞에 서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여전히 베데스다 연못의 물만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 병자의 모습을 보면서 나약한 존재인 우리의 인생을 돌아보게 됩니다. 우리들도 살아가면서 진실로 필요한 예수님들이 앞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베데스다 연못 같은 다른 곳에서 삶의 문제에 대한 해결책을 찾으려고 하고 있습니다. 또한 남의 말만 듣고, 소문만 듣고 예수님을 외면하며 자신의 생각과 자신의 경험을 중시하며 세상을 살아가고 있지는 않은지 돌이켜 보게 됩니다. 해결책은 바로 우리 앞에 계시는 예수님뿐이십니다. 이곳에 있는 여러분들도 위대한 예수님을 통해서 모든 문제를 해결 하는 정말 승리한 삶을 살 수 있길 간절히 기도드립니다.

 

(일어나 걸어가라)

 

8,9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이르시되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하시니 그 사람이 곧 나아서 자리를 들고 걸어 가니라!”

 

예수님은 자신의 말씀을 통해 그 병자의 병이 낫기를 간절히 바라셨습니다. 예수님은 자신만이 이 세상 모든 문제를 해결해 주시는 주관자임을 알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래서 그 병자에게 명령을 내리셨습니다.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그 말씀이 들리자 그 병자는 즉시 나았습니다. 하나님의 한 말씀이 한 사람을 살립니다.

한 선교사는 항상 부정적인 삶을 살았습니다. 그런데 고린도전서 15장 말씀을 받고 캠퍼스에 남고자 결단하고 양을 치고 있습니다. 말씀 자체가 생명이 있어서 사람을 살릴 수 있습니다. 베데스다의 방법이 아니고 예수님의 방법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세계도 있습니다. 믿음의 방법이 있습니다. 말씀을 듣는 방법이 있습니다. 병자는 자신의 처지를 훌훌 털어 버리고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자신 있게 자리를 박차고 걸어갔습니다. 한분이 학원 선생을 하였는데 학생들이 다 떨어져나갔습니다. 그는 절망하다가 말씀을 암송하였습니다. 말씀을 통해서 살아나서 학생들이 모여들었습니다. 그분이 쿰민에 가서 외국인 학교를 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후에 과연 어떤 일이 벌어졌습니까? 38년 된 병자는 이제까지의 삶에서 벗어나 그 자리에서 일어나 걸었습니다. 실패자와 패배자의 삶으로 살아야만 했던 삶이 예수님 한 분으로 180도 바뀌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역사입니까? 이처럼 예수님의 말씀엔 힘이 있고 권세가 있습니다. 말씀대로 행하면 능치 못할 일이 없습니다. 할 수 있다는 자신감과 믿음이 생깁니다. 말씀을 듣는 것이 우리의 할 일입니다.

(짝짝짝! 대한민국~ 지난 6월은 지구촌 축제인 월드컵에 우리는 너무나도 행복했습니다. 축구공 하나에 우린 어느새 한 마음 한 뜻이 되었습니다. 전국의 거리는 온통 붉은 물결로 가득 찼고 승리의 함성은 늦은 새벽까지 이루어졌습니다.) 특히 우리는 조 예선을 통과하며 사상 처음으로 원정 16강이라는 엄청난 수확을 얻었습니다. 무엇보다도 우리의 실력을 낮게 보았던 세계는 우리를 다시 보게 되었습니다. 큰 찬사가 쏟아졌습니다. 우리의 결과는 뻔할 것이라는게 지배적이었지만 우리는 상대에 두려워하지 않고 세계의 강호들과 당당히 맞서 싸웠습니다. 우리는 이번 월드컵을 통해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얻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삶이 바로 이렇습니다. 실패와 패배에 두려워하지 않고 예수님 안에서 자신감으로 도전하고 도전하는 것입니다. 설사 실패가 38년이 된다 하더라도 다시 오뚝이처럼 일어나 도전하는 것이 바로 승리의 믿음인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예수님이 38년된 병자에게 주고자 하신 것이 무엇입니까? 병의 치료입니까? 그렇다면 왜 그곳에 있는 모든 병자를 치료하지 않으셨습니까? 예수님이 주시고자 하신 것은 병 치료가 아닙니다. 삼십팔년된 병자도 치료하실 수 있는 예수님 자신이십니다. 생명의 주님이십니다. 하나님 나라입니다. 그분을 믿으면 루저에서 위너로 변화됩니다. 예수님을 소유한 사람이 진정한 승리자입니다. 우리는 너무나 많이 현실을 변화시키고자 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예수님을 영접하고 우리의 내면이 변화되기를 원하십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생명을 얻고 하나님 나라에 갑니다. 예수님을 소유하면 진정한 행복을 얻게 됩니다. 진정한 베데스다 되신 예수님을 소유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아멘!

 

요한복음 5장 강해 일부 진정한 베데스다 예수님

요한복음 51-요한복음 59

요절 요한복음 56절 예수께서 그 누운 것을 보시고 병이 벌써 오래된 줄 아시고 이르시되 네가 낫고자 하느냐

요한복음 5장 강해 일부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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