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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주의 대학생 선교기관

천안UBF

성경66권강해서

히브리서 10장 강해 이부 새로운 살 길

작성자 : 오요한
작성일 : 2012-10-23 00:00:00
조회수 : 4,438
히브리서 10장 강해 이부 새로운 살 길
말씀 히브리서 10장 19-히브리서 39
요절 히브리서 10장 20절

이제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는 사람은 어떤 삶을 살아야하는지 가르쳐줍니다. 하나님은 제사제도를 통해서 우리에게 십자가를 계시하여주셨습니다. 양이나 염소가 하나의 종교적인 언어입니다. 우리가 사는 삶에서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언어로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통하여 하나님의 마음을 읽어야합니다. 성전과 제사 속에 담긴 하나님의 뜻을 읽어야합니다. 양이나 염소를 통하여 그리스도가 우리를 위하여 무엇을 하였느냐 그리스도는 우리와 어떤 관계인가를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아버지라면 우리는 아들입니다. 예수님이 그리스도라면 우리는 구원받은 자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서 무엇을 했느냐는 것을 알게 될 때 우리가 무엇을 할 것인가를 알게 됩니다. 그리스도께서 피값으로 우리를 사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 나를 위해서 죽으셨으므로 나는 소중한 존재가 됩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서 많이 사랑하고 봉사하셨습니다. 우리는 서로 사랑하며 봉사하며 살아야합니다. 우리가 원수되었을 때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원수된 자를 서로 사랑해야합니다.

(예수의 피를 힘입어)

19절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 그러므로는 예수님이 속죄를 이루셨으므로 우리가 얻은 은혜를 말합니다. 오늘 말씀에서 예수님이 우리에게 어떤 길이 되시는가 말씀하십니다. 옛날에 성소와 지성소 사이에 휘장으로 길을 막았습니다. 아무도 하나님께로 나갈 수 없었습니다. 대제사장만이 일년에 한번씩 피를 흘려서 지성소에 나갈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육체를 찢으심으로 휘장을 찢으셨습니다.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길을 열어 놓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생명의 길을 열어놓았습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위하여 하신 핵심적인 일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이름으로 하나님께 나가게 하셨습니다.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지금 여기서 우리와 함께 하실 수 있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의 이름이라는 신용카드를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이름만으로 하나님께 나갑니다. 묘에 이름을 쓰지 않는 사람이 있습니다. 묘에 성도라는 말만 써도 충분합니다. 그것으로 끝입니다. 우리는 거룩한 무리요. 그리스도의 사람입니다. 우리는 예수의 이름으로 담대하게 하나님 앞에서 나가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앞에서 영원한 제사장으로 존재합니다. 우리를 위해서 중보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맞아주십니다. 어떤 사람이나 예수님을 의지하여 하나님 앞에 갈 수 있습니다. 우리는 천국에 담대히 나갑니다. 우리는 물론 죄인입니다. 죄인이라 함부로 거룩하신 하나님께 나갈 수 없습니다. 함부로 나가면 죽으므로 사람들은 두려워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께 내가 저사람을 위해서 죽었습니다. 우리는 죄악되지만 담대히 하나님 나라에 갈 수 있습니다.

(새롭고 산 길)

20절을 보십시오.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로운 살 길이요 휘장은 곧 그의 육체니라” 하나님께서 나가는 길은 성소와 지성소 사이에 휘장 가운데로 열어놓으신 새로운 살 길입니다. 지금까지 없었던 새로운 길입니다. 에덴 동산에 있었던 생명 나무 열매를 향하여 나가는 길입니다. 생명을 주는 길입니다. 천국을 향하여 나가는 길입니다. 그 휘장은 그의 육체입니다.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습니다. 우리도 담력을 얻고 하나님 나라에 가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양심의 가책이나 저주의식에 매여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피를 힘입어 하나님께 나갈 수 있습니다. 어느날 마귀가 찾아와서 루터의 죄를 지적하며 지옥가야 한다고 합니다. 루터는 그보다 더 많은 죄가 있다고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께서 나를 위해서 죽으시고 나를 위해서 기도한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니 마귀가 도망갑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받는 자로 용기를 얻습니다. 부모가 어린아이를 사랑합니다. 어린 아이는 부모가 자신을 사랑한다는 것을 믿습니다. 그러므로 아이는 용기가 있습니다. 우리는 담대함으로 하나님께 계속적으로 나가야합니다. 예배를 드려야합니다.

(온전한 마음과 믿음의 제사)

21,22절을 보십시오. “또 하나님의 집 다스리는 큰 제사장이 계시매 우리가 마음에 뿌림을 받아 악한 양심으로부터 벗어나고 몸은 맑은 물로 씻음을 받았으니 참 마음과 온전한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자” 또 하나님의 집 다스리는 큰제사장 예수님이 우리에게 계십니다. 우리가 마음에 피뿌림을 받아 악한 양심에서 벗어났습니다. 몸은 맑은 물로 씻음을 받았습니다. 제사드린 피를 우리에게 뿌렸습니다 우리에게 맑은 물로 뿌렸습니다. 피를 뿌리는 것은 문둥병 환자와 유사합니다. 제사장은 문둥병 환자가 병이 나은 것을 감사합니다. 문둥병에서 나은 자에게 피를 뿌려서 정결케 합니다. 병이 나은 자는 피를 뿌리고 새사람이 되어서 하나님께 나갈 수 있습니다. 문둥병자와 같은 사람이 깨끗함을 얻고 새사람이 됩니다. 주님만이 우리를 깨끗하게 합니다. 우리는 십자가 앞에서 악한 양심이라는 것을 깨닫습니다. 우리는 십자가 앞에서 무궁무진한 사랑을 느낍니다. 매를 맞으면서 무서워서 회개하는 것은 가짜입니다. 사랑을 느끼면서 회개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사랑을 느낄 때 감사합니다. 감사하는 것이 회개입니다. 우리는 회개와 순종과 감사와 사랑으로 주님께 나가야 합니다. 우리의 삶에서 주님의 임재를 누려야합니다. 하나님과 사람들과 관계를 회복해야합니다. 손자가 할아버지에게 나오면 할아버지가 무엇이든지 주고자 합니다. 그런데 손자가 할아버지에게 나오는 것보다 스마트폰에게 나갑니다. 자신이 잘못하여 팔을 뿌려뜨리고 자의식으로 하나님께 나가지 못합니다. 미인에게 남자들이 받아주지 않을까봐 나가지 못합니다. 용감한 사람이 미인에게 나갑니다. 양들이 스텝목자들에게 나가고자 하지 않습니다. 전요한목자님이 어려워 목자님께 잘 나가지 못합니다. 이와같이 하나님께 나가지 못합니다. 하나님도 우리에게 항상 도와주고자 나오기를 기대하십니다.

(사랑에 기초한 헌신)

우리는 힘들 때만 나가지 말고 평상시에도 나가야합니다. 서울의 소망 교회는 새벽기도는 안 될 것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곽목사는 나 혼자라도 해야겠다도 생각하였습니다. 이렇게 새벽기도에 많이 나올줄 몰랐습니다. 대부분 가난하고 병든 사람이 새벽 기도에 나옵니다 그러나 부부사이에 잘 살고 건강하고 직장도 좋으면서 새벽 기도에 나오는 것이 진짜입니다. 병들어서 새벽기도나오는 것보다 건강해서 새벽기도에 나오는 것이 진짜입니다. 대학입시를 두고 나오지만 대학 들어가서도 나와야 합니다. 회개를 해도 십자가의 사랑을 느끼며 해야합니다. 하나님의 사랑 앞에서 회개해야합니다. 그 회개가 진짜 회개입니다. 우리는 이제 그의 피로 새 사람이 되었으니 참 마음과 온전한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가야합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고 합니다. 목수가 어부에게 그물을 내리라고 합니다. 밤새 실패했는데 그물을 내리라고 합니다. 베드로는 아무 기대없이 그물을 내렸습니다. 그러나 그물을 내려보니 많이 잡았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주님으로 발견하고 자신은 죄인이라고 합니다. 그는 예수님을 불신한 것을 회개합니다. 은혜에 감격하며 회개합니다. 베드로는 양심에 깨끗함을 받아서 죄씻음을 받습니다. 우리가 죄씻음을 받으면 영혼이 깨끗해집니다. 이런 가운데 우리가 할 일은 무엇입니까?

(소망을 굳게 잡고)

23절을 보십시오. “또 약속하신 이는 미쁘시니 우리가 믿는 도리의 소망을 움직이지 말며 굳게 잡고 ” 또한 약속하신 하나님은 미쁘신 분이십니다. 약속을 반드시 지키시는 신실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우리가 믿는 도리인 그리스도를 굳게 잡아야합니다. 우리의 소망인 예수그리스도를 움직이지 말고 굳게 잡아야합니다. 부모가 어린아이를 사랑합니다. 그 애들은 부모의 사랑을 믿습니다. 그들은 용기가 있습니다. 우리도 그리스도 안에서 흔들리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 나라와 영생의 소망을 굳게 잡아야합니다

(서로 격려하며)

24절을 보십시오.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며” 우리가 하나님과 교제를 한 후에 성도 간에 서로 교제해야합니다. 우리가 서로 서로 돌보며 사랑해야 합니다. 우리는 서로 선행을 격려해야합니다. 서로를 도와야합니다. 리더는 양들의 사랑과 선행을 격려해야합니다. 어떤 정치가가 휴양지에서 일년동안 쉬면서 해변을 거닐었습니다. 꽃게 잡이하는 사람들이 게를 잡아서 바구니에 넣습니다. 그런데 뚜껑을 덮지 않습니다. 게가 밖으로 겨 나가는데 투껑을 닫지 않습니까? 물었습니다. 이 게는 정치가와 같아서 위로 올라가면 밑에서 잡아당긴고 합니다. 우리는 게와 같이 잡아당기지 말고 밀어주어야합니다.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는 책이 있습니다. 주제가 칭찬하고 격려하라는 것입니다. 칭찬이 모든 것의 우선이라고 합니다. 사업도 안 되고 가정도 잘 안 될 때 씨월드를 구경갔습니다. 고래도 있고 물개도 있습니다. 삼톤이나 범고래를 데리고 공중쇼를 하는 것을 봅니다. 삼톤짜리가 위로 올라갔다가 펑펑 떨어집니다. 저렇게 무서운 범고래를 어떻게 훈련시켰느냐 물어봅니다. 범이나 인간관계나 마찬가지라고 합니다. 잘한다고 칭찬하면 더 잘한다고 합니다. 잘못할 때는 잘못한데서 생각을 돌려 다른 것을 보라고 합니다. 그는 칭찬의 열계명을 썼습니다. 칭찬할 일이 있을 때 즉시 칭찬하라고 합니다. 다음에 칭찬 하고자 하면 칭찬을 못합니다. 잘한 점을 구체적으로 칭찬하라고 합니다. 추상적으로 하면 아첨입니다. 대충대충하면 거짓말입니다. 가능하면 공개적으로 칭찬해야합니다. 결과보다 과정을 칭찬하라고 합니다. 일본의 한 목사님이 공부를 못했습니다. 성적표를 나누줄 때마다 학생은 부끄럽습니다. 그런데 어느날 선생님이 오늘 처럼만 잘하라고 머리를 쓰다듬었습니다. 그날도 꼴찌하였습니다. 그런데 성적이 향상되었습니다. 오늘처럼만 열심하라고 말해서 열심히 공부하여 목사가 되었습니다. 공부못할 바에는 나가 죽으라고 합니다. 잘못된 말입니다. 결과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과정이 중요합니다. 사랑하는 마음으로 창찬해야합니다. 거짓없이 진실하는 마음으로 칭찬해야합니다. 긍정적으로 관점을 전환하면 칭찬할 일이 언제나 보입니다. 본이 없을 때는 때는 더욱 칭찬해야합니다. 잘못된 일이 있으면 관심을 다른 데도 돌려야합니다. 가끔씩은 자신을 칭찬합니다. 서로 격려해야합니다. 선행을 칭찬해야합니다.

(모이기를 힘쓰자)

25절을 보십시오.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 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 말세가 가까워 올수록 모이기를 폐하는 자들이 있습니다. 장작불이 모여야 잘 탑니다. 서로 모여야 영성을 유지할 수 있습니다. 철이 철을 날카롭게 하듯이 서로 모여야 사랑이 많아집니다. 예수님은 두 세사람이 모인 곳에 나도 함께 한다고 하였습니다. 두세 사람이 합심하여 기도하면 하나님은 모든 일을 다 이루십니다. 서양은 교회에 일년에 세 번 간다고 합니다. 우리는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아야합니다 오직 권하여 재림의 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모이기를 힘써야합니다 성도들 간에 모이는 것이 반가워해야합니다 죽음이 가까울수록 그렇게 해야 합니다. 교회에 나오는 발걸음이 반가워야합니다. 격려해야합니다. 그리스도에게 주는 교훈입니다.

(고의적으로 짓는 죄)

26,27절을 보십시오. “우리가 진리를 아는 지식을 받은 후 짐짓 죄를 범한즉 다시 속죄하는 제사가 없고 오직 무서운 마음으로 심판을 기다리는 것과 대적하는 자를 태울 맹렬한 불만 있으리라” 저자는 예수님을 대제사장으로 말했습니다. 예수님을 구주로 믿고 배신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진리를 아는 지식을 받았습니다. 고의적으로 죄를 범하면 다시 속죄하는 제사가 없습니다. 하나님께 나가는 것을 소홀히 하고 서로 모이기를 힘쓸 때 죄를 범할 가능성이 있습니다. 죄인 줄 알고 벌받을 줄 알면서도 죄를 짓는 경우가 많습니다. 지속적으로 죄를 짓는 경우가 있습니다. 담배는 해롭다는 것을 알면서도 담배를 피웁니다. 담배가 나쁜 것을 압니다. 여러 가지 건강에 나쁩니다. 담배 피우는 사람은 사회에서도 핍박을 받습니다. 비행기 탈 때 담배를 못피우니 배를 타고 가는 사람도 있습니다. 우리의 죄도 알고 짓는 죄가 많습니다. 죄를 떠날 수 있는 능력도 있는 데도 죄를 짓는 경우가 있습니다. 끌려가지 않을 수 있는데 끌려갑니다. 죄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고 합니다. 부정해서라도 출세하고 컨닝을 해서라도 입학하겠다고 합니다. 입학 때만 되면 돈을 얼마든지 낼테니 입학시켜달라고 합니다. 돈내고 입학하면 시집가고 장가갈 때 자기 아들 딸에게 무엇을 말합니까? 정직을 말할 수 없습니다. 일생을 망칩니다. 그래도 좌우간 합격해달라고 합니다. 입학시키지 않으면 죽는다고 합니다. 죽어도 안 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죄를 경시하고 출세를 소중히 여기고 소득을 중시여깁니다. 죄를 짓는 사람의 논리에는 몇가지가 있습니다. 죄인줄 알면서도 죄를 짓습니다. 변명하며 죄를 짓습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고 합니다. 책임을 전가합니다. 나는 피해자라고 합니다. 그 사람의 죄에 내가 끌려간 것이라고 합니다. 죄를 정당화합니다. 정치적인 죄라고 합니다. 죄를 지어 결과적으로 큰일을 할 수 있다고 합니다. 거짓말을 하면서도 남북통일을 하면 된다고 합니다. 북한에 돈을 주지 않았다고 하다고 요즘에는 돈을 주었다고 합니다. 몇 달라냐 이것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관심은 정직입니다. 정치가는 정치 논리로 괜찮다고 합니다. 결과만 좋으면 수단은 정당화될 수 있다고 합니다. 큰일을 했다고 합니다. 하나님이 그것을 허락하느냐는 것이 중요합니다. 어떤 죄도 회개 없는 죄는 사함받을 수 없습니다. 죄인데도 불구하고 죄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회개할 기회를 주어도 거부합니다. 지식을 버리고 기회를 버립니다. 회개를 하지 않기로 결심합니다. 이런 것은 속죄하는 제사가 없습니다. 구원의 사역에 대해서 모독하는 것을 말합니다. 오직 무서운 마음으로 심판을 기다리는 것이 있습니다. 대적하는 자들을 태울 맹렬한 불만 있습니다

(보혈을 욕되게 하는 자)

28절을 보십시오. “모세의 법을 폐한 자도 두세 증인으로 말미암아 불쌍히 여김을 받지 못하고 죽었거든” 모세의 법을 어긴 자도 두세 증인으로 말미암아 불쌍히 여김을 받지 못하고 죽임을 당하였습니다. 신명기 17장 말씀입니다. 율법을 배웠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우상을 섬깁니다. 우상을 섬긴 것이 있으면 돌로 쳐 죽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을 모독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여 악을 끊으라고 합니다. 하물며 하나님의 아들을 짓밟은 자들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사람으로 오셨습니다. 그 하나님의 아들을 사람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가 종의 형체를 가지고 오셨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을 종으로만 봅니다. 예수님이 병을 고쳤다고 의사로 보고 죄인과 식사한다고 죄인의 친구로 봅니다.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을 모독합니다. 누구의 말처럼 예수님은 정치 운동을 하다가 음모에 걸려서 죽었다고 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우리의 죄를 대신하여 죽으신 것입니다. 십자가에 죽었으니 무능한 것입니다. 무지한 존재로 인정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가 우리의 죄를 위해서 죽은 계시적인 사건인데 실패한 정치운동이나 혁명으로 몰아부칩니다. 이것이 큰 죄입니다. 아버지가 세상을 뜨므로 어떤 어머니가 유복자를 키웁니다. 많은 어려움 속에서 키웠는데 말을 듣지 않습니다. 내가 그렇게 살았는데 너는 그렇게 살 수 있느냐고 합니다. 아들은 내가 잘못했습니다 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누가 낳으라고 했습니까? 누가 시집가지 말라고 하였습니까? 아들은 어머니의 사랑을 발로 짓이겨 버리는 것입니다. 그것은 용서받을 수 없습니다. 이런 죄는 사함을 받지 않습니다. 사랑을, 희생을 모독하는 것입니다. 신앙적으로 이런 일이 있으면 용서받을 수 없습니다. 중국에 한 때 선교사에 큰 사건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을 잡아놓고 죽을 구실을 찾습니다. 십자가를 놓고 밟고 지나가면 살려준다고 합니다. 하나 둘 여섯이 지나갑니다. 일곱 번째 어린 아이가 지나갑니다. 그는 십자가를 밟지 않고 지나가는 용기를 달라고 합니다. 그는 총살을 당합니다. 그후에 92명이 순교합니다. 십자가는 막대기에 불과합니다. 예수님을 상징하는 십자가입니다. 이것이 순교입니다.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을 발로 밟는 것 같은 죄를 지었을 때 사하심을 받지 못합니다. 자기를 거룩하게 한 언약의 피를 부정하게 여기는 자들이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피로 죄사함 받았습니다. 피를 모독하는 죄는 사함 받지 못합니다. 나치 독일이 멸망의 위기에 왔을 때 일입니다. 한 병사가 부모에게 편지를 보냅니다. 독일 사람이 이상하다고 합니다. 부상당한 독일군이 영국군이 있는데 와서 치료받습니다. 수혈을 받아야하는데 의사나 간호원들 가운데 혈액형이 같은 사람이 있으면 수혈해달라고 합니다. 독일군이 죽어서 수혈한다고 하니 누구의 피냐고 묻습니다. 영국 사람의 피라고 합니다. 그는 영국 사람의 피는 안 받겠다고 합니다. 그는 수혈을 거부하다가 죽습니다. 그것을 편지에 써서 보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피로 구원받습니다. 예수님의 피를 거절하는 것은 내 선행으로 구원 받겠다고 합니다. 내가 고행으로 구원을 받겠다고 합니다. 이것은 십자가의 보혈의 피를 무시하는 것입니다. 아무의 선행도 구원받지 못합니다. 죄를 씻을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의 피외에 다른 길이 있다고 말하는 것은 보혈을 무시하는 것입니다.

(성령을 모독하는 죄)

29절을 보십시오. “하물며 하나님의 아들을 짓밟고 자기를 거룩하게 한 언약의 피를 부정한 것으로 여기고 은혜의 성령을 욕되게 하는 자가 당연히 받을 형벌은 얼마나 더 무겁겠느냐 너희는 생각하라” 예수님의 피로 죄사함을 받는 것이 신앙의 핵심이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어떻게 살아야하느냐를 말합니다. 우리는 신앙을 배반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신앙을 배반하면 구원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죄를 용서하신 예수님의 피를 무시하는 자는 속죄하지 못합니다. 은혜의 성령을 욕되게 하는 자가 있습니다. 성령은 내적인 역사입니다. 우리를 감동케하는 역사입니다. 예수님의 역사를 모독하면 사함 받지 못합니다. 성령을 훼방하는 자는 용서받지 못합니다. 예수님이 눈멀고 귀신들린 자를 내어쫓습니다. 이들을 악령의 역사라고 합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알고 있습니다. 이것을 억지로 부정하려고 바알세블을 힙었다고 합니다. 구약적인 맥락에서 성령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성령은 진리 자체나 진리에 대한 이해력을 말합니다. 진리를 감동케하는 성령의 역사를 말합니다. 귀신들려서 방어리된 사람이 깨끗하게 나았습니다. 모두가 이것은 성령의 역사를 것을 획실히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바리새인들은 이것이 사단의 역사라고 합니다. 이것을 억지로 부정합니다. 이것이 성령을 훼방한 자입니다. 예수님을 미치광이 귀신들린 자로 여겼습니다. 우리 마음 속에 성령이 감동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일이라고 합니다. 이것을 억지로 부정합니다. 이런 자는 사함받지 못합니다. 성령이 임하는 데 이것을 아니라고 부정합니다. 이런 자는 못된 자입니다. 어떤 술주정꾼이 행동이 못되었습니다. 저녁에 아내를 손찌검하고 아이들을 발길질합니다. 어느날 술에 취하여 소리 소리칩니다. 어머니와 자녀는 가정예배를 드립니다. 어머니는 예수님이 오시면 양과 염소가 갈라진다고합니다. 양은 구원받고 염소는 심판받습니다. 아버지가 술먹고 들어오니 아이는 아버지는 염소라고 합니다. 아버지는 이 말을 듣고 찔림을 받았습니다. 그날부터 통회자복하고 훌륭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때 무릎을 꿇어야합니다. 성령이 사랑하라 용서하라고 하면 사랑하고 용서해야합니다. 하나님의 아들을 밟아버리는 자는 용서받지 못합니다. 우리 말씀을 교회론적으로 설명합니다. 초대교회는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강하게 경고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이 교회론적인 고백을 잘 들어야합니다. 이 세 가지 죄는 용서받을 수 없습니다. 다시 속죄하는 제사가 없습니다. 이들은 당연히 받을 형벌은 돌로치는 것보다 더 무겁습니다. 그들은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들어갈 것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이 무섭습니다.)

30,31절을 보십시오.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 하시고 또 다시 주께서 그의 백성을 심판하리라 말씀하신 것을 우리가 아노니 살아 계신 하나님의 손에 빠져 들어가는 것이 무서울진저” 하나님은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또다시 주께서 그의 백성을 심판하시리라 말씀하셨습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의 손으로 심판을 받는 것이 무섭습니다. 사람의 심판이 무서운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심판은 인정사정이 없습니다. 그것이 십자가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심판하십니다. 십자가를 믿지 않는 자는 지옥불에서 영원히 고통하게 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믿어야합니다.

(첫 사랑을 생각해야함)

32절을 보십시오. “전날에 너희가 빛을 받은 후에 고난의 큰 싸움을 견디어 낸 것을 생각하라” 우리가 예수님을 알면 하나님을 알게됩니다. 하나님을 알면 그 안에서 나를 알게 됩니다. 우리의 여러 가지 경제 문제도 해결됩니다. 내가 처한 처지를 해석합니다. 예수님은 대제사장이요 자기의 피를 뿌려서 우리를 사하신 분이십니다. 그 속에서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설명합니다. 하나님은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셨습니다. 예수를 믿는 사람 대제사장으로 섬기는 사람은 어떻게 살아야하느냐가를 말합니다. 전날에 히브리 성도들은 빛을 받은 후에 고난의 큰 싸움을 견디어냈습니다. 지금까지 인내를 잘 해왔습니다. 그들은 그것을 기억해야합니다. 히브리서 저자는 생각하라고 합니다. 처음 믿을 때 가졌던 그 감격의 시간을 생각하라고 합니다. 전데 살던 과거의 스타일이 있습니다. 옛날의 공동체에서 벗어나야합니다. 옛날의 인간관계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인도네시아 아프리카에서 예수님을 믿는 것은 어렵습니다. 가족관계에서 제명됩니다. 직장도 끊어집니다. 모든 것이 차단됩니다. 가정에서 쫓겨납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옛관계에서 벗어나 새로운 관계를 맺는 것입니다. 초기에 예수님을 믿는 것을 얘기합니다. 삼대 독자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장사하다가 송촌에서 선교사를 만나서 예수 믿고 세례를 받았습니다. 예수 믿자 마자 상투를 잘랐습니다. 빡빡 머리가 되어 왔습니다. 몽둥이로 패로 한 달만에 집에 들어갔습니다. 요즘은 예수 믿고 칭찬을 받습니다. 예전에는 큰 고난과 싸움이 있습니다. 예수 믿음으로 많은 싸움이 있습니다. 손해도 많이 봅니다. 그러나 그렇게 할 때 즐거웠습니다. 처음믿는 일이기 때문에 불과 같이 뜨겁습니다. 예수를 믿어서 죽여주지 못해서 순교를 못하지만 순교라도 할 것 같은 자로 변화되었습니다. 큰 고난의 싸움을 싸웠습니다. 고난을 기뻐했습니다. 감옥에 갇힌 자를 동정하였습니다. 크리스찬이 순교한 것을 보면서도 순교하고자하는 마음을 가졌습니다. 첫사랑에 뜨거움을 가졌습니다. 세월과 함께 식어집니다. 핍박이 있을 때는 강합니다. 핍박이 없으면 해이해집니다. 안일해집니다. 옛날 믿음이 어디갔는지 사라집니다. 핍박이 없으면 점점 해이해지고 약해집니다. 세속화됩니다. 곽씨라는 세 사람이 신학교에 있었습니다. 형되는 사람이 아내를 위해서 동생되는 사람에게 기도해달라고 합니다. 보통시험이 아니라고 합니다. 젊었을 때 예수님을 믿었습니다. 자신이 핍박을 해도 예수님을 믿었습니다. 자신이 감동해서 예수님을 믿고 신학생이 되었습니다. 아내가 교회를 나가지 않습니다. 그는 밤예수는 안 믿는다고 합니다. 낮에는 나오지 밤에는 교회에 나오지 않습니다. 낮에만 예배를 나옵니다. 핍박을 받을 때는 열심히 믿더니 남편이 예수 믿으니 안 믿겠다고 합니다. 핍박이 있으면 잘이깁니다. 세상의 유혹을 받습니다. 많은 환난과 역경을 겪어온 민족입니다. 우리는 어려움을 이기는 능력이 있습니다. 그러나 부와 축복을 감당하지 못합니다. 돈 몇푼갖지 명예를 얻자 믿음을 버립니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입니다. 순교사에 보면 어떤 교인이 순교를 하는데 로마 교인이 때리니 할렐루야 합니다. 정배를 보내면 하나님과 교제한다고 합니다. 죽이면 순교자가 되었다고 좋아합니다. 사단은 할 수 있으면 돈을 많이 주어서 타락하게 하라고 합니다. 출세좀하고 사업좀 잘되면 교회에 안 나옵니다. 사업이 너무 잘되서 못나옵니다. 사업이 망해야겠다고 합니다. 조금만 형통하면 세속화됩니다.처음 믿을 때를 생각합니다. 재산을 몰수 당할 때 순교를 즐거워하고 고난받는 자를 부러워했습니다. 핍박이 없자 어째서 이런 모양이 되었느냐고 합니다. 계시록에서 이 말씀을 주십니다. 첫사랑을 회복하라고합니다. 처음에 뜨거웠던 신앙을 버렸습니다. 율법주의 나오고 바르게 살자고 진리를 수호한다고 하면서 예수님을 버렸습니다. 가정생활도 그렇습니다. 부부생활도 그렇습니다.

(더 낫고 영구한 하나님 나라)

33,34절을 보십시오. ‘혹은 비방과 환난으로써 사람에게 구경거리가 되고 혹은 이런 형편에 있는 자들과 사귀는 자가 되었으니 너희가 갇힌 자를 동정하고 너희 소유를 빼앗기는 것도 기쁘게 당한 것은 더 낫고 영구한 소유가 있는 줄 앎이라“ 처음 믿을 때 혹은 비방과 환난으로서 사람에게 구경거리가 되었습니다. 혹은 이런 형편에 있는 자들과 사귀는 자가 되었습니다. 그들은 갇힌 자들과 고통을 함께 나누었습니다. 그들은 예수 믿는다는 이유로 자신들의 소유를 빼앗기는 것도 기쁘게 당하였습니다. 그들은 현실에서 얻은 것이 없었습니다. 좋은 성과를 얻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온전한 믿음으로 살았습니다. 그들은 더 낫고 영구한 소유가 있는 하나님 나라를 알았기 때문입니다. 소망을 굳게 세우라고 합니다. 재산을 빼앗길 때 영원한 집을 바라봅니다. 그것을 바라보면 잘 이길 때가 있었습니다. 잠시 잠간 후에 주님이 곧오십니다. 재림하십니다. 그 주님을 생각하며 오늘을 살아가야 합니다. 우리의 삶은 순례자의 길입니다. 우리가 여기서 머물러서는 안 됩니다. 다 빼앗겨도 하늘의 보물이 큽니다. 우리의 보물을 하늘에 쌓아두라고 합니다.

(큰 상 줄 것을 바라봄)

35절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너희 담대함을 버리지 말라 이것이 큰 상을 얻게 하느니라” 그러므로 핍박을 받을 때 담대한 믿음함을 버리지 말아야합니다. 믿음으로 살면 큰 상을 얻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상을 바라며 믿음으로 살아합니다. 수도사가 추수하는 곳을 지나갑니다. 너무 배가 고파서 먹을 것을 달라고합니다. 빈둥빈둥 놀면서 땀흘린 것을 달라고 하느냐고 합니다. 그 농부가 비툴어지 마늘 하나를 주었습니다. 그가 죽어 천국 창고에 가니 마늘하나가 있다고 합니다. 그것을 붙잡고 천국에 갔다는 말이 있습니다. 우리의 보화를 하늘에 쌓아야합니다. 땅에 쌓는 것보다 하늘에 쌓는 것이 많게 해야합니다. 이 땅에 많은 재산을 남기지 않게 해야합니다. 영원한 소망 불변한 소망을 보라고 합니다 비씨 170년에 에피파네스가 예루살렘을 침공합니다. 팔만명을 죽이고 십만명을 포로로 하였습니다. 우상의 전각을 만듭니다. 성전마당에 창녀가 죄를 짓게 합니다. 성소에 돼지피를 뿌립니다. 마카오가 울분으로 싸워서 쫓아냅니다. 일곱 형제를 가죽벗기고 찔러죽입니다. 마지막에 막내가 형들이 죽는 것을 보면서 믿음을 지키다가 죽었습니다. 이들은 영원한 하나님 나라가 있는 것을 믿으니 기쁨으로 떠납니다. 그렇게 죽는 것을 영광으로 여깁니다. 재림 예수님에 대한 소망을 가져야합니다.

(인내가 필요함)

36,37절을 보십시오. “너희에게 인내가 필요함은 너희가 하나님의 뜻을 행한 후에 약속하신 것을 받기 위함이라 잠시 잠깐 후면 오실 이가 오시리니 지체하지 아니하시리라” 히브리성도들에게 고난을 참고 견디는 인내가 필요합니다. 히브리성도들이 하나님의 뜻을 행한 후에 약속하신 것을 받기 위함입니다. 잠시 잠깐 후면 오실 그리스도가 오십니다. 지체하지 않고 오십니다. 그분이 우리에게 지극히 큰 상급을 주십니다. 우리의 죽음이 가까웠다는 의미도 있습니다. 인내를 해야합니다. 소망이 있으면 인내할 수 있습니다. 소망만 확실하면 어떤 고난도 참고 견딜 수 있습니다. 담대함을 버리지 말아야합니다. 스펄전 목사님이 학생에게 설교를 합니다. 젊은 선교사 지원생이 선교사 협회에서 심사합니다. 선교사로 갔다온 윌커스에게 심사를 부탁합니다. 어느날 일찍이 사무실로 올라오라고 합니다. 아침 여섯시에 오라고 합니다. 열시에 오라고 하고 선교사는 열한시에 나왔습니다. 늦게 온 이유를 설명하지 않는다고합니다. 늦은 것에 불평하지 않는 사람을 뽑습니다. 이더하기 이는 얼마냐 이 곱하기 삼이 얼마냐 묻습니다. 그에 대답하는 사람을 선교지부에 좋은 사람이라고 합니다. 시긴지키는 것은 성실이고 기다리는 것은 인내고 지성을 모독하는 말에 대답하는 것을 온유함을 보았다고 합니다. 그리스도인인은 소망을 갖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인내가 어렵지 않습니다. 어떤 수모라도 좋습니다. 어떤 모독도 참습니다. 하늘 나라에 소망을 갖고 사는 사람은 이 세상에서 어떻게 사는 것이 중요하지 않습니다. 성경하는 사람들의 일곱가지 비결 중에 하나가 무엇에 우선권을 두느냐는 것입니다.

(지속적으로 믿음으로 살아야함)

38,39절을 보십시오. “나의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또한 뒤로 물러가면 내 마음이 그를 기뻐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우리는 뒤로 물러가 멸망할 자가 아니요 오직 영혼을 구원함에 이르는 믿음을 가진 자니라” 하나님의 의인은 믿음으로 살아야합니다 그들은 뒤로 물러갈 충분한 이유가 있습니다. 유혹도 있고 핍박이 있습니다. 그러나 앞으로 나가야 합니다. 뒤로 물러가면 하나님의 마음은 기뻐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뒤로 물러가서 멸명할 자가 아닙니다. 우리는 배수진을 치고 싸우고 있습니다. 우리는 결과와 열매에 상관없이 계속하여 믿음으로 도전해야합니다. 앞에는 하나님의 상급이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에 영생의 상이 있습니다. 오직 영혼의 구원함에 이르는 믿음을 가진 자입니다. 하나님 나라에서 최후 승리를 믿고 기다려야합니다. 미리 가본 미래라는 책이 있습니다. 우리는 천국을 가보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미리 가보아야합니다. 우리는 이 시점에 살지만 나이가 많은 다음에 어떻게 될 것을 미리 가보아야합니다. 나이 많아지는 것을 어떻게 받아들여야하느냐는 것입니다. 오육십에 화장도 하고 맛사지도 하고 수술도 하지만 어느 순간에 포기해야합니다. 그것을 포기하는데 가슴이 찢어집니다. 안하는 것이 예쁜데 계속 바르면 예쁘지 않습니다. 나이가 들어 수술하면 피부의 구멍이 찢어집니다. 아무나 수술하는 것이 아닙니다. 늙었을 때를 미리 생각해야 합니다. 항상 젊어사는 것이 아닙니다. 오십되면 육십되고 다음에는 칠십됩니다. 유서를 쓰고 미리 준비해야합니다. 끝이 있다는 것을 알고 사는 것이 지혜로운 것입니다. 끝을 알고 가야 하는 것입니다. 오직 영혼을 구원함에 이르는 믿음을 가진 자입니다. 결국 육신은 사라지고 영혼 구원을 지향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오직 믿음으로 살아야합니다. 믿음은 미래에 대한 현재를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나라에 대한 그 믿음으로 살아야합니다. 하나님의 사람은 오직 믿음으로 오늘을 사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10장 강해 이부 새로운 살 길
말씀 히브리서 10장 19-히브리서 39
요절 히브리서 10장 20절
히브리서 10장 강해 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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