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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주의 대학생 선교기관

천안UBF

성경66권강해서

히브리서 8장 강해 내법을 그들의 생각에 두고

작성자 : 오요한
작성일 : 2012-10-19 00:00:00
조회수 : 2,422

문제지풀이(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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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브리서 8장 강해 내 법을 그들의 생각에 두고
말씀 히브리서 8장 1-히브리서 8장 13
요절 히브리서 8장 6절

히브리서는 철저하게 히브리인의 종교문화의 배경에서 말하는 기독론입니다. 예수님이 누구냐는 것입니다. 십자가에 피흘려 죽으신 예수님을 설명합니다. 그 예수님을 통하여 우리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음을 말씀하십니다. 구약에서도 피의 언약을 하였습니다. 예수님은 그 피의 언약으로 우리의 죄와 불법을 기억하지 않으십니다. 우리 마음에 하나님의 법을 두고 하나님의 법을 기록하십니다. 우리의 기억과 생각을 새롭게 포맷하십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피는 우리를 새롭게 변화시킵니다. 앞서 예수님은 대제사장의 자격이 있음을 말하였습니다. 오늘 말씀은 대제사장 에수님의 중보 사역을 말씀하십니다. 자신의 몸을 제물로 드리는 십자가의 피의 제사로 중보하십니다. 구약의 제사와 예수님의 제사를 비교하면서 설명합니다.

(하늘에 계신 대제사장)

1절을 보십시오. “지금 우리가 하는 말의 요점은 이러한 대제사장이 우리에게 있다는 것이라 그는 하늘에서 지극히 크신 이의 보좌 우편에 앉으셨으니” 지금 우리에게는 멜기세덱의 차례를 따르는 대제사장이 있습니다. 그분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은 참제사장이요 영원한 제사장이십니다. 예수님은 하늘에서 지극히 크신 이의 보좌 우편에 앉으셨습니다. 예수님의 현재 모습은 부활승천하여 하나님의 우편에 계십니다. 예수님은 그곳에서 우리를 위해서 기도하십니다. 원수를 발아래 둘 때까지 그곳에서 왕노릇하십니다.

(하늘에 있는 성전)

2절을 보십시오. “성소와 참 장막에서 섬기는 이시라 이 장막은 주께서 세우신 것이요 사람이 세운 것이 아니니라” 제사를 드리려면 성전이 있어야합니다. 예수님의 성전은 하늘에 있습니다. 영원한 집 하늘의 성전이 있습니다. 하늘 성소와 참 장막에서 하나님을 섬기고 계십니다. 이 장막은 주님이 친히 세우신 장막입니다. 사람이 세우신 장막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세우신 하나님의 집입니다. 참장막이 영원합니다. 예수님은 12살 때 성전에 올라갑니다. 아버지 어머니가 집에 가는 줄도 모르고 율법선생들과 지냅니다. 그는 아버지 집에 있는 것이 행복해서 지냅니다. 그러나 지상의 성전은 하나님의 집의 모형입니다. 참아버지 집은 영원한 것입니다. 거기에 우리의 진정한 집이 있습니다. 하늘의 성소가 리얼리티입니다. 지상의 성소는 그림자입니다. 우리가 사는 이곳의 성전은 모형입니다. 성전에는 하나님의 사랑이 계시됩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납니다. 예수님은 하늘 성전에서 우리의 죄사함을 위해서 중보기도하십니다. 그의 피로 사단을 물리치십니다.

(자신을 제물로 드린 대제사장)

3,4절을 보십시오. “대제사장마다 예물과 제사 드림을 위하여 세운 자니 그러므로 그도 무엇인가 드릴 것이 있어야 할지니라 예수께서 만일 땅에 계셨더라면 제사장이 되지 아니하셨을 것이니 이는 율법을 따라 예물을 드리는 제사장이 있음이라” 대제사장마다 예물과 제사 드림을 위하여 세운 자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도 제사장으로서 무엇인가 드릴 것이 있어야합니다. 예수님이 땅에 계셨다면 제사장이 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땅에는 율법을 따라서 예물을 드리는 제사장이 있기 때문입니다 제사장은 제물을 하나님께 드려서 섬기는 자입니다. 예수님은 자기 자신을 제물로 바칩니다. 재밌는 일화가 있습니다. 청년들과 성경 공부합니다. 청년이 목사에게 질문합니다. 사랑의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아들을 잡아 제사지내라고 한다는 것이 마음에 안 든다고 말합니다. 목사가 질문했습니다. 하나님이 이삭이 죽은 것을 기뻐했느냐고 묻습니다. 아니라고 대답합니다. 아브라함과 이삭의 제물 중 누구를 원했느냐고 물었습니다. 청년은 아브라함이라고 잘 대답하였습니다. 아버지의 입장에서 아들이 자신의 생명보다 더 소중합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이삭보다 하나님을 더 사랑하는 마음을 원합니다. 우리가 자기를 사랑하는 마음 곧 내가 집착하는 것을 드리기 원합니다. 우리 자신을 바치면 없어지니 양이나 염소를 대신 드리라고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양이나 염소가 아니라 바로 나 자신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자신을 드립니다. 내가 십자가를 볼 때마다 나를 하나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내가 완전히 죽으면 편하고 행복합니다. 피흘림이 없이는 사함이 없습니다. 내가 죽어야 용서를 받습니다. 나 자신이 제물이 되는 것입니다. 내가 의로워야 제물이 될 수 있습니다. 나도 죄인인데 남을 대신 죽을 수 없습니다. 우리는 스스로 죽어도 죄인이 죽으므로 제물로서 의미가 없습니다. 죄없는 사람이 죽어야 의미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죄가 없는 의인입니다. 의인이 죄인처럼 죽었습니다. 한 쪽에 놀고 먹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면 한쪽에 일하고 굶은 사람이 있습니다. 이것이 균형입니다. 죄인이 죄인처럼 살아야 마땅합니다. 그런데 죄인이 의인처럼 산다면 의인이 죄인처럼 죽는 사람이 있음을 의미합니다. 완전한 의인이 죄인처럼 죽어야 죄인이 의인처럼 살 수 있습니다. 죄인은 다른 사람의 죄를 대신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의 대속이 될 수 없습니다. 죄없는 예수님이 대속의 자격이 있습니다. 우리가 복을 받기 위해서는 죄없는 예수님이 저주 받은 자처럼 죽어갑니다.

(하늘 성전이 참성전)

5절을 보십시오. “그들이 섬기는 것은 하늘에 있는 것의 모형과 그림자라 모세가 장막을 지으려 할 때에 지시하심을 얻음과 같으니 이르시되 삼가 모든 것을 산에서 네게 보이던 본을 따라 지으라 하셨느니라" 땅의 성소에서 그들이 섬기는 것은 하늘에 있는 것의 모형과 그림자입니다. 모세는 장막을 지으려 할 때에 하나님이 모세에게 성소 지을 것을 지시하셨습니다. 산에서 모세에게 보이던 하늘나라 성소의 본을 따라서 성소를 지으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이 땅의 성전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하늘나라의 성전이 중요한 것입니다. 하늘의 성전이 실체이고 지상의 성전은 그림자입니다.

(중보자의 역할)

6절을 보십시오. "그러나 이제 그는 더 아름다운 직분을 얻으셨으니 그는 더 좋은 약속으로 세우신 더 좋은 언약의 중보자시라” 제사장은 아름다운 직분입니다. 이제 예수님은 이 땅의 제사장보다 더 아름다운 직분을 얻으셨습니다. 예수님은 구약과 달리 더 좋은 약속으로 세우신 더 좋은 언약의 중보자이십니다. 이 중보자는 생명을 살리는 중보자이십니다. 중보자는 세상의 조단위의 돈을 주어도 바꿀 수 없는 아름다운 직분입니다. 중보자는 두 인격 사이에서 두 인격이 만나게 하고 화해하게 하고 하나되게 하는 것입니다. 영영 만날 수 없는 사람이 만나서 하나되게 합니다. 원수의 관계를 사랑의 관계로 바꿉니다. 우리는 죄로 인하여 하나님께 나갈 수 없으니 예수의 이름으로 나갑니다. 죽어서도 하나님께 갈 수 있습니다. 중보자가 없이는 양자가 만날 수 없습니다. 중보자를 통해서 만납니다. 양자가 다 중보자를 믿고 사랑해야합니다. 중보자는 양쪽을 잘 알아야합니다. 어떤 집에 두 분이 결혼하여 좋은 가정을 이루었습니다. 첫아이를 낳았습니다. 남편이 탈선하고 집을 나갔습니다. 부인은 아들을 낳고 혼자 일을 하며 키웠습니다. 아들이 스무살이 되었습니다. 아버지가 밖으로 돌다가 병이 나서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부엌에서 설거지하는 아내가 남편을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왜 섰느냐 들어오라고 하였습니다. 저녁에 아들이 들어와 나는 아버지가 없다고 합니다. 아버지 얼굴을 보지도 못했고 사랑을 받은 적도 없다고 합니다. 어머니가 설득해도 아버지를 내쫓으라고 합니다. 어머니를 괴롭히려고 왔느냐고 합니다. 어머니가 후에 병이 들어 죽게 되었습니다. 어머니의 양쪽에 남편과 아들이 있습니다. 죽어가면서 어머니가 아들에게 아버지라고 부르라고 합니다. 아들이 아버지라고 부릅니다. 남편에게 내 아들아 부르라고 하여 불렀습니다. 두 손을 마주잡고 가슴에 쥐고 죽었습니다. 어머니는 남편의 죄를 감당하였습니다. 그후에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가 회복되었습니다. 이것이 중보자입니다. 아버지와 아들은 영영 원수입니다. 중간에 어머니가 둘을 사랑하고 애타게 하나되라고 소원하며 죽습니다. 우리와 죄로 인하여 하나님을 만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우리 죄를 위해서 죽으셨습니다. 제사장은 곧 중보자이십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위하여 영원한 중보자가 되십니다. 예수님은 영원히 제사장이십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과 우리를 영원히 화해시키십니다.

(화해의 언약)

중보에는 약속이 있어야합니다. 서로가 화해하고 받아들이겠다는 약속이 있습니다. 서로 사랑한다는 약속이 있습니다. 죄사함을 주시고 하나님 나라로 인도하시겠다고 하는 약속이 있습니다. 언약은 하나님이 말로한 약속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하신 약속이 언약입니다. 약속은 수평적이고 취소할 수 있습니다. 언약은 취소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일방적으로 약속하셨으므로 바꿀 수 없습니다. 언약은 유언입니다. 유언은 죽어가는 사람이 산 사람에게 약속합니다 자녀에게 논밭을 나누어줍니다. 부모가 죽었기 때문에 그 약속을 고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싸인한 언약입니다. 그리고 성령을 주십니다. 하나님이 약속하심으로 화해에 대한 중보가 됩니다. 이 언약이 우리의 믿음의 기초입니다. 루터가 이상한 꿈을 꾸었습니다. 마귀가 찾아와 루터의 죄목을 제시하고 지옥으로 가자고합니다. 루터가 그 이상 또 없소? 라고 묻습니다. 다음에 그 죄목 기록한 위에 예수님의 보혈이 내 죄를 씻었다고 썼습니다. 예수님이 죄를 씻었다는 언약을 하였습니다. 그랬더니 마귀가 지나갔습니다. 오직 예수의 보혈로 구원받고 그 중보로 하나님께 나갑니다. 우리는 중보자 예수님을 통하여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죄에 대해서 화해에 힘써야합니다. 하나님과 화해하고 하나님과 바른 관계성을 맺어야합니다. 중보자를 통하여 하나님 나라를 누리고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야합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약속에 기초한 믿음)

예수님은 그리스도요 우리의 죄를 위해서 죽으시고 부활하셨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통해서 하나님께 나갈 수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를 누릴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하나님이 되십니다. 이것이 언약의 핵심이요. 우리의 믿음의 기초입니다. 사실 믿음이라는 것은 약속에 대한 바른 응답입니다. 약속이 없는 믿음은 성서적인 신앙이 아닙니다. 소원을 신앙화할 때가 많습니다. 잘 될 줄로 믿습니다. 약간 협박조로 믿는다고 말해서는 안 됩니다. 가장 경건한 자세로 해야합니다. 변조하여 격한 감정으로 하는 것은 좋지 않습니다. 병나을 것, 시험 잘 볼 것, 사업 잘 될 것을 믿는 것은 성서적인 신앙이 아닙니다. 내 소원입니다. 주관적인 신앙을 신앙으로 착각해서는 안 됩니다. 믿습니다. 소리를 지를수록 의심이 많은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고 성서를 믿는 것은 약속을 믿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일어나라고 하시면 그 말을 듣고 일어나는 것입니다. 말씀이 먼저고 약속이 먼저입니다. 약속을 진실하게 수용해야합니다. 약속에 대한 바른 응답을 믿는 것입니다. 약속은 미래적입니다. 내일 준다고 합니다. 아이들에게 네가 크면 준다고 합니다. 믿음은 보지못하는 것의 증거요 바라는 것의 실상입니다. 약속을 하시면 현재 가진 것과 마찬가지로 믿는 것입니다. 약속에서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약속을 누가 주었느냐는 것입니다. 약속을 믿을 만한 사람의 약속이냐는 것입니다. 누가 내게 말씀하시느냐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분에 대한 말씀이라면 믿어 그 분이 말씀하면 문제는 끝이라고 합니다. 존재와 인격에 대해서 그분을 믿는 것입니다. 그 약속하신 분의 능력을 믿습니다. 내가 돈을 꾸었다가 갚기로 약속하였는데 돈이 없어서 약속 대로 못 갚습니다. 능력을 가진 분이라야 약속은 의미가 있습니다. 우리가 믿는 대상에 대한 능력 지혜 사랑을 믿는 것입니다. 정말로 나를 사랑하는 분이라는 것을 알 때 그 약속을 믿을 수 있습니다. 전지전능하고 십자가를 지시는 분이십니다. 항상 나와 함께 하시는 분이십니다. 그 약속은 초월성을 갖고 있습니다. 세상이 변해도 약속은 변하지 않습니다. 나는 변해도 그분은 변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약속을 합니다. 아브라함은 불신으로 헤맸습니다. 흔들렸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약속을 일방적으로 지켰습니다. 지키도록 역사하셨습니다. 나는 못믿어도 그는 믿는 것입니다. 아이가 부모에게 깨워달라고 하는 것입니다. 자신이 깰 것을 못믿으니 어머니에게 부탁합니다. 우리의 믿음의 대상은 확실히 믿을 수 있습니다. 약속은 디아테케와 쓴다케가 있습니다. 디아데케는 수직적 관계의 약속입니다. 아버지와 아들에게 할아버지가 손자에게 약속합니다. 이것은 잠깐 너에게 줄 것이라고 합니다. 내 말을 지키면 이렇게 해주겠다고 약속합니다. 수평적인 약속이 있습니다. 쓴데케입니다. 친구 사이에 연인사이에 약속하는 것입니다. 시간 조율할 때 합의점을 찾습니다. 몇시에 어디서 만나자고 합니다. 이 약속은 취소할 수 있습니다. 잘못된 것이 아닙니다. 수직적인 관계에서 하는 약속은 취소하지 못합니다. 그분은 위에 높은데 있어서 취소하거나 변경하지 못합니다. 성경의 약속은 디아데케입니다. 하나님은 수직적인 약속을 말씀합니다.

(하나님 나라의 복음)

우리는 이 약속의 메시지를 전해야합니다. 이 약속은 그 피로 우리를 하나님 나라로 인도하신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해야합니다. 독일의 헬무트 틸리히의 목사님이 계십니다. 그는 영국에서 스펄전 목사님을 만나고 변화됩니다. 목사님이 거듭나고 설교가 거듭나서 독일에 영향을 끼친 목사가 되었습니다. 그는 스펄전 목사님과의 만남이라는 책을 썼습니다. 복음을 받아들이면 생활이 해결된다고 스펄전 목사님이 설교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것은 기독교 실용주의라고 합니다. 스펄전 목사님의 말씀은 구원론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습니다. 예수님을 통해서 구원받고 구원 받은 후에 하나님께 나가게 됩니다. 하나님 나라를 누리게 됩니다. 이것을 받은 후에 설교가 바뀌었습니다. 틸리케 목사는 구원을 강조하는 복음 외에 모든 설교는 물탄 복음이라고 합니다. 예수 믿고 복을 받는다는 것은 물탄 복음이라는 것입니다.

(흠이 있는 처음의 언약)

7절을 보십시오. “저 첫 언약이 무흠하였더라면 둘째 것을 요구할 일이 없었으려니와 ” 첫언약이 흠이 없었다면 둘째 것을 요구할 일이 없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시내산에서 십계명을 주고 약속하셨습니다. 출애굽기 24장 일절에서 팔절에서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시고 하나님의 말씀에 준행하겠다고 약속합니다. 그 후에 피를 반은 하나님께 반은 백성에게 뿌립니다. 그것을 언약의 피라고 합니다 이렇게 약속이 이루어집니다. 이것인 낡은 약속입니다. 이 십계명은 애굽에서 주신 것이 아닙니다. 광야에서 주신 것입니다. 이 계명을 지켜면 구원하시겠다고 주신 것이 아닙니다. 이스라엘 백성을 이미 구원하셨습니다. 광야에 놓고 언약을 맺습니다. 애굽 땅에서 구원하신 후에 언약을 맺습니다. 그러므로 나만 섬기고 부모를 공경하라고 합니다. 이미 구원 받은 후의 시점입니다. 구원의 조건이 아니라 구원받은 자가 마땅히 지켜야할 도리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하나님의 언약에 지속적으로 순종하지 않았기 때문에 하나님은 그들을 돌보지 않으셨습니다.

(새로운 언약을 맺으심)

8,9절을 보십시오. “그들의 잘못을 지적하여 말씀하시되 주께서 이르시되 볼지어다 날이 이르리니 내가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과 더불어 새 언약을 맺으리라 또 주께서 이르시기를 이 언약은 내가 그들의 열조의 손을 잡고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던 날에 그들과 맺은 언약과 같지 아니하도다 그들은 내 언약 안에 머물러 있지 아니하므로 내가 그들을 돌보지 아니하였노라“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 언약을 지키지 못하였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다시 새언약을 맺으셨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을 말씀하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날이 이를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집과 유다집과 더불어 새 언약을 맺을 것입니다. 주님이 말씀하셨습니다. 이 언약은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조상들의 손을 잡고 애굽에서 인도할 때 시내산에서 맺은 첫 번째 언약과는 다릅니다. 질적으로 새로운 언약을 맺으십니다. 새롭다는 것은 시간적으로 새롭다는 말은 네오스를 씁니다. 또 하나는 카이노스라는 질적으로 새롭다는 말입니다 이 말은 시간과는 상관이 없습니다. 오늘 말씀은 질적으로 새로운 것입니다. 이천년 전과 지금의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율법적인 차원애서 말하면 그것은 옛것입니다. 복음도 율법적인 차원에서 말하면 옛것입니다. 은혜적인 차원에서 대하면 구약도 새것입니다. 말씀을 깨달아지는 그런 율법입니다. 율법이 누구를 위해서 있는 것이냐는 것입니다. 약속을 누구를 위해서 주셨느냐는 것입니다. 마음에 감동을 주는 것입니다.

(법을 마음에 기록하심)

10-11절을 보십시오. “또 주께서 이르시되 그 날 후에 내가 이스라엘 집과 맺을 언약은 이것이니 내 법을 그들의 생각에 두고 그들의 마음에 이것을 기록하리라 나는 그들에게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게 백성이 되리라 또 각각 자기 나라 사람과 각각 자기 형제를 가르쳐 이르기를 주를 알라 하지 아니할 것은 그들이 작은 자로부터 큰 자까지 다 나를 앎이라” 하나님은 이스라엘 집과 새로운 언약을 맺으십니다. 첫언약은 십계명을 돌판에 새깁니다. 돌판을 깨어질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법을 그들의 생각에 두고 그들의 마음에 기록하십니다. 이 법은 깨뜨릴 수 없습니다. 빼앗아갈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되고 이스라엘백성은 하나님의 백성이 됩니다. 각각 자기 나라 사람과 각각 자기 형제에게 주를 알라고 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들이 작은 자에서 큰 자까지 하나님을 알 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모든 사람이 다 하나님을 알게 됩니다. 우리가 죄사함을 받으면 성령을 주셔서 하나님을 알게 하십니다. 이것이 새언약입니다. 말씀으로 임하고 성령으로 임하는 것입니다. 이런 언약을 통하여 하나님도 매임이 되십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즐겨 환영하는 것입니다 주일을 안식일화합니다. 그러나 율법적으로 지키는 것이 아니라 감사함으로 지키는 것입니다. 유대인은 안식일에는 전화도 안받고 신문도 안보고 텔레비전도 컴퓨터도 안 켭니다. 하나님의 법을 지키는 것을 감사함으로 지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을 이해합니다. 죄를 기억지 않는다는 말씀을 들을 때 감사합니다. 창조적인 언약을 지키도록 일하십니다. 말씀과 성령으로 일하십니다. 병원에 입원시켜서 안식일을 지키게 하십니다. 이제는 인간을 정의할 때 내가 누구냐보다는 누구에게 속하였느냐는 것이 중요하다고 하였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에게 속했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러므로 새언약 안에서 나를 보는 것입니다. 그 약속 안에서 미래를 봅니다. 현재를 봅니다.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는 것을 봅니다.

(죄를 기억지 않음)

12절을 보십시오. “내가 그들의 불의를 긍휼히 여기고 그들의 죄를 다시 기억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피의 은혜 아래서 하나님을 알게 되는 언약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시고 우리의 죄값을 다 치르셨습니다. 우리에게는 어떤 행위도 요구하지 않습니다. 다만 우리외 죄값을 치루신 그 은혜를 영접하면 됩니다. 하나님이 그들의 불의를 긍휼히 여기십니다. 우리 사람은 자신의 죄를 기억하고 그 죄로 인하여 시달립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의 죄를 다시 기억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죄를 용서하십니다. 죄를 용서하는 것은 죄를 기억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을 완전히 포맷하십니다. 주홍같은 죄를 양털같이 진홍같은 죄를 흰눈과 같이 희게 하십니다.

(은혜 속에서 율법)

13절을 보십시오. “새 언약이라 말씀하셨으매 첫 것은 낡아지게 하신 것이니 낡아지고 쇠하는 것은 없어져 가는 것이니라” 하나님이 새언약이라고 말씀하신 것은 첫것은 낡아지게 하신 것입니다. 낡아지고 쇠하는 것은 없어지는 것입니다. 십계명을 가지고 바로 서는 것이 실패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실패한 원인을 설명합니다. 율법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지키지 않고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지킵니다. 율법 안에 그리스도의 피가 없습니다. 축복으로 주신 것을 저주처럼 받습니다. 지켜지 못하여 벌받을 것처럼 지킵니다. 예수님은 사람이 율법을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니라 율법은 사람을 위해서 있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율법은 우리를 복받으라고 주신 것입니다. 벌받을 것처럼 지켜서 실패하는 것입니다. 율밥을 지키면 그것을 공로화합니다. 선을 행하면 자랑하고 그렇지 못한 사람을 멸시합니다. 율법을 지켜서 하나님과 바른 관게를 맺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하나님 나라에 가는 계단처럼 생각하고 교만합니다. 내가 주일 지켰다고 주일 못지킨 사람을 멸시하였습니다. 이것이 영적으로 교만해졌습니다. 율법의 본뜻을 잃어버립니다. 율법을 형식적으로 지킵니다. 가게하는 사람이 주일 폐업하고 다른 데 놀러갔습니다. 교회에 나오기는 나왔는데 빚 받으러 나옵니다. 율법은 형식주의에 빠지기가 쉽습니다. 옛날 사람은 제사만 열심히 드리고 마음은 멀어집니다. 못지키면 아주 포기해버립니다. 절망합니다. 이왕 지옥 갈 것이라고 생각하고 마음대로 삽니다. 율법에서 의를 이루지 못합니다. 그래서 새로운 언약을 합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사랑을 확증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모든 것을 다 이루어주셨습니다. 십자가의 사랑편에서 언약을 보게 합니다. 은혜 속에서 율법을 보게 합니다. 우리는 단지 믿음을 가져야합니다.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결론적으로 예수님은 하늘 성소에서 자신의 몸을 제물로 드렸습니다. 자신의 피로 새 언약을 세우셨습니다. 우리의 모든 죄를 제거하시고 성령으로 우리 안에 율법을 세우십니다.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십계명을 보도록 하셨습니다. 우리는 사랑 안에서 계명을 볼 때 하나님을 알게 되고 하나님을 경외하게 됩니다.
히브리서 8장 강해 내 법을 그들의 생각에 두고
말씀 히브리서 8장 1-히브리서 8장 13
요절 히브리서 8장 6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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