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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주의 대학생 선교기관

천안UBF

성경66권강해서

역대하 26장 강해 웃시야 왕의 형통과 실패

작성자 : 오요한
작성일 : 2014-09-06 00:00:00
조회수 : 2,996

문제지풀이(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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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대하 26장 강해 웃시야 왕의 형통과 실패
역대하 26장 1-역대하 26장 23
요절 역대하 26장 5하나님의 묵시를 밝히 아는 스가랴가 사는 날에 하나님을 찾았고 그가 여호와를 찾을 동안에는 하나님이 형통하게 하셨더라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히 행한 웃시야)

1,2“유다 온 백성이 나이가 십육 세 된 웃시야를 세워 그의 아버지 아마샤를 대신하여 왕으로 삼으니 아마샤 왕이 그의 열조들의 묘실에 누운 후에 웃시야가 엘롯을 건축하여 유다에 돌렸더라”

온 유다 백성이 십육 세밖에 되지 않은 웃시야를 택하여 왕으로 세웠습니다. 웃시야는 열왕기에서는 주로 아사랴(왕하 14:21)로 쓰고 있습니다. 이처럼 두 개의 이름을 사용하는 것에 대해서는 명확히 밝혀져 있지 않으나, 통상 웃시야는 공식적인 왕명으로, 아사랴는 본명으로 쓰였다고 생각합니다. 솔로몬의 경우에도 솔로몬이라는 이름은 공식적인 왕명이 었으며, 또 다른 이름으로는 여디디야라고 불리웠습니다(삼하 12:24,25). 유다 온 백성이 왕위 계승 사건의 주체로 등장하고 있습니다. 유다 온 백성은 아마샤에 대하여 모반(謨叛)을 일으킨 무리들을 지칭합니다.(25:27), 역대기 기자는 웃시야의 즉위가 모든 백성의 환호를 받았음을 시사해 줍니다.
일반적으로 왕위 계승 문제를 백성들이 결정짓는 것은 아니었지만, 역대기에는 직접적으로(23장), 또는 간접적으로 백성들이 왕위 계승에 관여하였습니다. 백성들이 왕위 계승에 대하여 가지고 있던 태도들이 자주 나타나고 있습니다(22:123:21왕하11:20). 웃시야가 아버지 아마사의 뒤를 잇게 하였습니다. 웃시야는 부왕이 세상을 떠난 다음 엘롯을 되찾아 유다의 성으로 다시 세웠습니다. 엘랏(왕하 14:22)이라고도 불리우는 엘롯은 다윗 시대 이래로 유다에 복속된 에돔 땅이었습니다(8:17). 여호람 때에 에돔의 반란으로 잃었다가(21:8-10), 웃시야의 부친 아마샤에 의해 다시 찾은 땅입니다(25:14). 그리고 유다가 이스라엘과의 전쟁에서 패한 이후로 이 땅은 거의 방치 상태에 있다가 웃시야에 의해 비로소 건축되고 유다 성읍의 일부가 된 것입니다.

(웃시야의 50년 간 통치)

3-4“웃시야가 왕위에 오를 때에 나이가 십육 세라 예루살렘에서 오십이 년 간 다스리니라 그의 어머니의 이름은 여골리아요 예루살렘 사람이더라 웃시야가 그의 아버지 아마샤의 모든 행위대로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하게 행하며”

웃시야는 십육 세에 왕위에 올라 예루살렘에서 오십이 년간 다스렸습니다. 웃시야가 통치한 기간은 B.C.791년부터 739년까지입니다. 그의 부친 아마샤가 24년간 웃시야와 함께 통치했고, 웃시야는 그의 아들과 함께 12년을 통치했습니다. 따라서, 웃시야가 단독으로 통치했던 기간은 16년 정도가 됩니다. 그의 어머니는 예루살렘 출신으로서 이름을 여골리야라고 하였습니다. 이 이름의 뜻은 여호와께서 강하게 만드신다 입니다. 그는 부왕 아마샤 못지않게 여호와 보시기에 옳은 일을 하였습니다 왕하 15:4에서는 그가 정직히 행하였으나 오직 산당(山堂)은 제하지 아니하였으므로 백성이 오히려 그 산당에서 제사를 드리며 분향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역대기 기자는 웃시야의 실수들을 후반에 기록하여 둠으로써(16절), 웃시야가 전반적으로 선한 왕이었음을 강조하는 듯합니다.

(스가랴의 도움을 받은 웃시야)

“5하나님의 묵시를 밝히 아는 스가랴가 사는 날에 하나님을 찾았고 그가 여호와를 찾을 동안에는 하나님이 형통하게 하셨더라”

그의 곁에는 하느님을 공경하도록 깨우쳐주는 사람 스가랴가 있었습니다. 스가랴 선지자에 관해서는 전혀 알려진 바가 없으며, 단지 본절을 근거로 하여 그가 웃시야 왕의 조언자였음을 짐작할 수 있을뿐입니다. 묵시는 70인역과 다른 고대 역본들은 본절을 해석할 때 하나님을 두려워 하는 교훈을 주는 자 스가랴로 해석합니다. 스가랴 생전에 그는 하나님을 찾았고, 여호와를 찾았습니다. 그는 다른 신이나 우상을 찾지 않았습니다. 자신의 영광을 찾지도 않았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믿고 하나님의 상주심을 믿고 하나님을 찾는 생활을 하였습니다. 그가 믿음으로 하나님을 찾는 동안 하나님께서는 그가 하는 일을 성취시켜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도움으로 강성해진 웃시야)

6-7“웃시야가 나가서 블레셋 사람들과 싸우고 가드 성벽과 야브네 성벽과 아스돗 성벽을 헐고 아스돗 땅과 블레셋 사람들 가운데에 성읍들을 건축하매 하나님이 그를 도우사 블레셋 사람들과 구르바알에 거주하는 아라비아 사람들과 마온 사람들을 치게 하신지라“

웃시야는 불레셋 사람들을 치려고 출동하여 갓 성과 야브네 성과 아스돗 성을 허물고는 아스돗을 비롯한 불레셋 지역에 성읍들을 세웠습니다. 웃시야는 여호람 때에 유다를 침공하며 예루살렘을 약탈하였던(21:16,17) 블레셋과 아라비아 사람들을 응징하기 위해 출전하였습니다. 이 전쟁에서 블레셋의 주요 성읍 가드, 야브네, 아스돗성을 함락시켰습니다. 가드성은 본래 블레셋의 주요한 다섯 성읍들 가운데 하나로(삼상 6:17), 초기 이스라엘 역사 속에서 자주 등장합니다(대상 7:21). 이곳은 예루살렘에서 30여 km밖에 떨어지지 않은 기름진 평야 지대이기 때문에 르호보암 때에는 가드가 전략적으로도 중요하게 취급되었습니다(11:8). 야브네는 단지 이곳에서만 언급되어 있으며, 수 15:11의 얍느엘이 동일 지명인 것으로 추측됩니다. 오늘날은 예브나로 알려져 있으며 욥바의 남쪽 19.2km 지점에 위치해 있습니다. 헬라어 지명은 얌니아로 알려져있는데 유대 역사상 마카비 시대 이후에 부각되어 나타납니다(마카비상 4:15). 또한 예루살렘 몰락후(A.D. 70년) 산헤드린이 이곳으로 옮겨옴으로써 유대인의 종교적 민족적 중심지가 되었습니다.
아스돗성은 욥바와 가사 중간에 있는 유명한 블레셋 성읍으로 오늘날에는 에스돗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해안에서 4.8km 정도밖에 떨어지지 않은 해안 도시로 개역 성경의 행 8:40에는 아소도로 표기되어 있습니다. 아스돗 땅과 블레셋 땅 여러 지역에 새롭게 성읍을 건축하였는데, 이는 웃시야가 블레셋을 완전히 정복하였음을 보여줍니다. 그는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아 불레셋인들과 구르바알에 사는 아랍인들과 므운인들을 쳤습니다.
아스돗 땅과 블레셋 사람 가운데 성읍들을 웃시야는 정복한 후에 이 지역을 다스리고 또 더 나아가 이 지역에 성읍들을 건축하여 전초 기지로 삼았습니다. 블레셋의 다른 지역에서 애굽으로 통하는 길을 차단하고, 그 통로를 장악하였습니다. 아람어 성경에는 이 지명이 게랄로 번역되어 있고 70인역에는 에돔 족속의 수도인 페트라(Petra)로 번역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페트라보다는 오히려 탈무드가 제시한 대로 게랄(그랄, 창20:1)이라 할 수 있습니다ler). 한편, 구르바알의 뜻은 바알의 거처인데 이곳에 바알의 신전이 있었기 때문에 붙은 별명인 것으로 추측됩니다. 마온 사람은 사해의 남동쪽, 에돔의 동쪽 변방에 거주했던 사람들로서(대상4:41), 세일 산 사람들과 깊은 관계를 맺고 있어서 세일 산 사람과 동일시 되는 경우도 많았습니다(20:1).

(강성해진 웃시야)

8-10 “암몬 사람들이 웃시야에게 조공을 바치매 웃시야가 매우 강성하여 이름이 애굽 변방까지 퍼졌더라 웃시야가 예루살렘에서 성 모퉁이 문과 골짜기 문과 성굽이에 망대를 세워 견고하게 하고 또 광야에 망대를 세우고 물 웅덩이를 많이 파고 고원과 평지에 가축을 많이 길렀으며 또 여러 산과 좋은 밭에 농부와 포도원을 다스리는 자들을 두었으니 농사를 좋아함이었더라”

암몬인들에게서 조공을 받게 되니, 그의 명성이 이집트 땅에까지 떨쳤습니다. 웃시야가 정복한 지역은 블레셋과 아라비아와 마온인데 조공을 바친 족속은 그와 반대편인 요단강 동편에 있는 암몬 족속으로 언급되어 있습니다. 그들은 웃시야가 요단강 동편에 있는 암몬 족속까지 정복하였기 때문에 그들이 조공을 바치게 되었습니다. 그 증거로 10절에 평지가 나오는데 이곳은 본래 르우벤 지파의 땅으로서 이스라엘이 모압과 암몬에게 빼앗긴 것을 웃시야가 다시 정복한 곳입니다. 그는 매우 막강해졌습니다. 또 웃시야는 예루살렘 모퉁이 성문과 골짜기 성문과 성 귀퉁이에 망대를 튼튼히 세웠습니다. 본절은 웃시야가 나라를 더욱 견고하게 하기 위해서 성채의 벽과 문들에 망대를 세워 예루살렘을 더욱 요새화하였음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성 모퉁이 문은 성벽의 북서쪽 모퉁이에 있는 문입니다(25:23). 골짜기 문은 일반적으로 성의 서쪽 야파문이라고 봅니다. 성굽이는 모퉁이(corner) 또는 모서리들(angles)을 가리킵니다. 여기서는 특정한 한 지역을 가리키는 듯하며, 동북쪽 모퉁이일 것으로 보입니다. 거친 땅은 사해 서편에 있는 유다 광야를 가리키며, 망대가 세워진 곳은 목초지가 있는 곳으로 추측됩니다. 웃시야 왕은 국가의 주요 소득원이 되는 가축을 주위 유목민들의 강탈로부터 지키기 위하여 망대들을 이곳에세웠는데, 이 망대는 전시(戰時)에 피난처로도 용이하게 사용되었습니다. 그는 야산 지대나 평야에 많은 짐승을 놓아 먹였습니다. 그는 또 흙을 사랑하는 사람이었으므로 사람들을 시켜 산악 지대나 기름진 땅에 농사를 짓고 과수도 가꾸게 하였습니다. 그러느라고 광야에도 망대들을 세우고 저수지들도 많이 파게 하였습니다. 물 웅덩이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샘을 가리키는데 여기서는 사람과 동물들을 위하여 인공적으로 만든 물저장 탱크를 가리키는 듯합니다. 여기서 평야는 지중해 근방에 있는 저지대를 가리키며(1:159:27대상 27:28) 평지는 아르논과 요단 동편의 헤스논 사이에 있는 평평한 지역을 가리킵니다(신 3:104:43수 13:9렘 48:8,21).
웃시야가 암몬 족속이 차지한 이 땅의 많은 부분을 빼앗았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여기서 좋은 밭에 해당되는 히브리어는 고유 명사로 갈멜 산을 가리키기도 하고(수 12:22암 1:2), 보통 명사로 비옥한 땅을 뜻하기도 합니다(사 29:1732:15), 여기서는 비옥한 땅을 뜻합니다. 웃시야 왕은 산과 밭에 농사 짓기를 크게 장려하였는데, 이같이 강력한 중농 정책(重農政策)을 실시한 왕을 다윗 가계의 왕들 중에서는 거의 찾아볼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기이한 도우심을 입은 웃시야)

11-15“웃시야에게 또 싸우는 군사가 있으니 서기관 여이엘과 병영장 마아세야가 직접 조사한 수효대로 왕의 지휘관 하나냐의 휘하에 속하여 떼를 지어 나가서 싸우는 자라 족장의 총수가 이천육백 명이니 모두 큰 용사요 그의 휘하의 군대가 삼십만 칠천오백 명이라 건장하고 싸움에 능하여 왕을 도와 적을 치는 자이며 웃시야가 그의 온 군대를 위하여 방패와 창과 투구와 갑옷과 활과 물매 돌을 준비하고 또 예루살렘에서 재주 있는 사람들에게 무기를 고안하게 하여 망대와 성곽 위에 두어 화살과 큰 돌을 쏘고 던지게 하였으니 그의 이름이 멀리 퍼짐은 기이한 도우심을 얻어 강성하여짐이었더라”

웃시야에게는 언제든지 싸우러 나갈 수 있는 상비군이 있었습니다. 그 상비군은 비서장 여이엘과 병적관 마아세야가 수를 세며 병적에 올려 부대를 편성하였습니다. 왕의 직속 지휘관 중의 한 사람인 이름이 애굽 변방까지 퍼졌다는 것은 웃시야의 세력과 영향력이 얼마나 확대되었는가를 나타내 보여줍니다. 군사는 하나니야의 지휘를 받았습니다. 이 군사를 뽑는 일은 서기관 여이엘과 영장 마아세야의 임무였으나, 이 군대의 지휘는 하나냐에게 맡겨졌습니다. 그 군대를 거느릴 각 가문 수령들은 모두 이천육백 명이었고 그들의 지휘 아래 왕을 도와 적을 무찌를 이 강력한 군대의 수는 모두 삼십만 칠천오백 명이나 되었습니다. 유다나 이스라엘의 군대 편성은 가계별로 이루어졌으며, 한 가계의 지휘는 족장의 손에 맡겨졌습니다(대상 9:33). 모두 큰 용사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용감한 용사, 영웅을 뜻하기도 하지만 재산이 많아 권력이 있는 사람들을 가리키기도 합니다.
족장이 단순히 용감한 용사를 가리킨다고 보기는 어려우므로 여기서는 한 가계(家系) 내(內)의 영향력 있는 지도자를 가리킨다고 볼 수 있습니다. 족장의 수는 2600명이고 군대 수는 307,500명이었습니다. 이것은 아마샤의 군대보다 7,500명이 더 많은 수입니다(25:5). 웃시야는 그들 전군에 방패, 창, 투구, 갑옷, 활, 물매를 마련해 주었습니다. 활과 물매 돌은 주로 베냐민 사람들이 사용하던 무기였으며 이들은 간편한 차림으로 전쟁에 참여했습니다(14:8삿 20:16대상 12:2). 활을 쏘고 큰 돌을 던지는 무기를 기술자에게 고안시켜서 예루살렘 성 망대들과 성 귀퉁이마다 설치해 놓게 하였습니다. 공교한 공장으로 기계를 창작(創作)한 것은 분명히 새로운 형태의 무기가 기술자에 의해 제작되었음을 말합니다. 이 무기는 망대나 성곽 위에 세워진 일종의 투석기(投石機)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에는 이전에 이러한 무기가 사용된 적이 없으며 성경에도 그런 언급이 없습니다. 이것은 분명히 유다 나름대로의 독창적인 무기였을 것입니이다. 벤징거는 이 무기들이 주로 방어용으로 쓰였을 것이라고 합니다. 이렇게 하여 그의 명성은 널리 떨쳤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기이한 도우심을 받아 매우 강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웃시야가 군대를 강하게 하고 군사 시설을 잘 정비함으로 인하여 이후 유다 역사에 많은 영향을 끼쳤습니다. 그 예로서 히스기야가 블레셋을 크게 장악할 수 있었던 것도 웃시야의 강력한 군사 정책의 결과였습니다. 앗수르가 예루살렘을 공격해 왔을 때, 히스기야가 잘 막아낼 수 있었던 것은 웃시야에 의해 만들어진 강력한 방어 시설 덕택이었습니다. 이사야의 예언들을 살펴보면, 아하스 당시에 유다가 상당히 번영한 것으로 나타나 있는데, 이것 또한 웃시야의 영향입니다. 역대기 기자는 웃시야가 이루어 놓은 이러한 업적의 결과들이 여호와의 기이한 도우심에 의한 것이라는 해석을 전제로 덧붙이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도우심은 기이합니다. 하나님이 도우실 때 우리는 얼마든지 강해질 수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도우심을 얻으려면 하나님 앞에서 정직히 행하고 믿음으로 하나님을 찾는 삶을 살아야합니다. 아멘

(강성해지자 교만해진 웃시야)

16-18 “그가 강성하여지매 그의 마음이 교만하여 악을 행하여 그의 하나님 여호와께 범죄하되 곧 여호와의 성전에 들어가서 향단에 분향하려 한지라 제사장 아사랴가 여호와의 용맹한 제사장 팔십 명을 데리고 그의 뒤를 따라 들어가서 웃시야 왕 곁에 서서 그에게 이르되 웃시야여 여호와께 분향하는 일은 왕이 할 바가 아니요 오직 분향하기 위하여 구별함을 받은 아론의 자손 제사장들이 할 바니 성소에서 나가소서 왕이 범죄하였으니 하나님 여호와에게서 영광을 얻지 못하리이다“

그러나 웃시야왕은 제 힘만 믿고 교만해졌다가 자멸하고 말았습니다. 접속사 우는 전(前)절과 역접 관계로 그러나라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KJV, NIV, RSV, NEB, JB). 이것은 지금까지의 웃시야의 선정과는 반대로 이제부터 교만하여 여호와께 불순종하는 삶이 시작되었음을 나타냅니다. 그러한 교만한 삶은 군사적, 경제적 권력을 얻게 되면서 시작됩니다. 따라서, 그는 그 권력을 과시하기 위해 종교까지 자신의 권력에 통합시키려 했던 것 같습니다. 그는 여호와의 성전 본관에 들어가 분향단에다 분향하려고 하였습니다.
분향하는 종교적 예배 행위는 성스러운 것으로 여겨졌었고, 아론의 자손들, 즉 제사장들만이 행할 수 있는 것이었습니다(출 30:1-10민16:4018:1-7). 그럼에도 불구하고 웃시야가 향단에 분향하려 하였습니다. 그는 왕직과 제사장직을 겸하려고 하였습니다. 당시 애굽이나 근동의 왕들은 왕직과 대제사장직을 겸하고 있었습니다. 웃시야가 보기에는 그것이 중앙집권을 강화하고 나라를 확고하게 하는 데, 유리하다고 생각되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웃시야는 두 직분을 겸함으로써 하나님이 세우신 나라를 이방의 나라와 같이 만들려고 했던 것입니다.
다윗과 솔로몬과 같은 대왕이 되려는 야욕이 있었습니다. 그는 이 두 왕들처럼 대제사장 직분까지도 행함으로써 스스로 위대한 왕이 되고자 했을 것입니다. 만일 이것이 옳다면 그는 다윗과 솔로몬의 대제사장직 사역을 잘못 이해하였음이 분명합니다. 다윗과 솔로몬은 자신들에게 맡겨진 특별한 사역에 따라 성전 봉헌 때의 봉헌 기도, 제사장의 반차 제정, 희생제 등과 같은 일들을 행하였을 뿐 분향이나 지성소의 출입과 같은 제사장들의 고유한 업무를 침해한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오해도 역시 그의 교만의 발로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웃시야왕이 분향한 것은 저를 보살펴 주시던 하나님 여호와를 거역하는 일이었습니다. 대제사장 아사랴와 여호와의 용감한 사제 팔십 명이 뒤따라 들어가 웃시야 왕을 가로막고 말하였습니다. 아사랴는 20절에 대제사장 이란 언급이 있는 것으로 보아 여호야다의 경우와 같이(24:6 주석 참조) 그의 역할상 대제사장이라는 존칭이 주어졌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제사장 아사랴가 이끌고 온 제사장 80인은 모두 용맹한 자라고 했는데, 여기서 용맹한(하일)의 의미는 제사장 가운데 신실한 자, 세력있는 자, 유지(有志)를 가리킵니다. 따라서 아사랴는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의 대표자들을 대동하여 웃시야 왕의 월권(越權) 행위를 막고자 했음이 분명합니다. 웃시야 왕을 막아에서 막아에 해당하는 히브리 본문의 원뜻은 웃시야의 얼굴을 대면하고 섰다입니다. 그들은 단순한 경고의 말을 한 것이 아니라 강력하게 저지하였습니다. 웃시야 왕이여, 여호와께 분향하는 일은 왕이 할 일이 아닙니다. 분향하는 일은 성별된 아론의 후손 사제들이 할 일입니다.
이 성소에서 나가십시오. 이렇게 하나님을 거역하셨으므로 여호와 하나님의 영광이 왕을 떠나시었습니다. 여호와의 영광이 떠나셨다는 말은 단순히 웃시야의 명예와 영광이 더 이상 하나님에 의해 증대되지 못할 것이라는 의미가 아닙니다. 웃시야의 모든 행위가 여호와에게서 옳다 인정함을 받지 못할 것이라는 적극적인 의미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나병이 걸린 웃시야)

19-20“웃시야가 손으로 향로를 잡고 분향하려 하다가 화를 내니 그가 제사장에게 화를 낼 때에 여호와의 전 안 향단 곁 제사장들 앞에서 그의 이마에 나병이 생긴지라 대제사장 아사랴와 모든 제사장이 왕의 이마에 나병이 생겼음을 보고 성전에서 급히 쫓아내고 여호와께서 치시므로 왕도 속히 나가니라”

웃시야는 그 때 손에 향로를 들고 있었습니다. 그가 사제들에게 화를 내려고 하자 나병이 그의 이마에 번졌습니다. 제사장들이 율법의 규례를 상기시키면서 죄악을 지적하였으나, 웃시야는 도리어 분노하면서 분향하는 일을 계속하려 하였습니다. 그는 결국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문둥병에 결리고 말았습니다.
이처럼 제사장의 권위에 도전하고 또한 성전을 모독하다가 비침한 최후를 맞이한 사람들로는 나답과 아비후(출6:23레 10:1,2), 고라 자손들(민 16:1-3,28-35), 웃사(삼하 6:6,7)등이 있습니다. 그 사제들 앞에서, 여호와의 성전 안에서 그것도 바로 분향단 앞에서였습니다. 대사제 아사랴와 온 사제들은 그의 이마에 나병이 생긴 것을 보고 왕에게 당장 나가라고 하였습니다. 왕도 여호와께서 자기를 치신 줄 깨닫고 급히 물러나왔습니다. 문둥병은 웃시야를 전에서 몰아낼 가장 확실한 구실이 되었습니다. 이스라엘 율법에 따르면 문둥병자는 항상 성 밖으로 격리 수용시켜서, 성전이든지, 사람들이 사는 마을이든지 일체 접근할 수 없도록 했기 때문입니다(레13:46). 이 시기에 이사야가 나타납니다.

(나병환자가 된 웃시야)

21-23“ 웃시야 왕이 죽는 날까지 나병환자가 되었고 나병환자가 되매 여호와의 전에서 끊어져 별궁에 살았으므로 그의 아들 요담이 왕궁을 관리하며 백성을 다스렸더라 웃시야의 남은 시종 행적은 아모스의 아들 선지자 이사야가 기록하였더라 웃시야가 그의 조상들과 함께 누우매 그는 나병환자라 하여 왕들의 묘실에 접한 땅 곧 그의 조상들의 곁에 장사하니라 그의 아들 요담이 대신하여 왕이 되니라”

웃시야 왕은 나병환자로 여생을 보내게 되었습니다. 여호와의 성전에 들어갈 수 없는 몸이 되었으므로 별궁에서 홀로 나병을 앓으며 지내야 했습니다. 문둥병자가 된 웃시야는 죽는 날까지 왕의 직분을 행사할 수 없었을 뿐만 아니라, 따로 특별히 마련된 별궁에 격리 수용되어 있었습니다. 그가 이처럼 별궁에 격리 수용된 것은 더이상 여호와의 전에 출입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래서 그의 아들 요담이 왕궁의 어른이 되어 나라를 다스리게 되었습니다. 웃시야의 나머지 역사는 처음부터 끝까지 아모스의 아들 예언자 이사야가 기록해 두었습니다. 선지자 이사야(사 1:16:1)는 주로 히스기야 왕 시대에 살고 있었기 때문에 웃시야의 행적에 관한 기록은 주로 전승이나 자료를 통해 썼을 것입니다. 웃시야가 세상을 떠나자 나병환자라고 하여 그를 왕실 묘지에 딸린 뜰에 묻었습니다. 그의 아들 요담이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습니다. 왕하 15:7에는 단순히 그가 그 열조와 함께 자매 다윗 성에 그 열조와 함께 장사되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본절에서는 보다 상세하게 열왕의 묘실에 접한 땅 곧 그 열조의 곁에 장사되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아마 그가 문둥병자였기 때문에 왕의 가족 묘실 안에 들어가지 못하고 따로 그 묘실 곁에 만든 묘실에 장사되었음을 가리킵니다. 이와 같은 그의 장사는 이전의 여호람(21:20)이나 요아스(24:25)의 경우처럼 불명예스러운 것은 아니었지만, 문둥이였기 때문에 다른 열왕들과는 달리 그 곁에 묻히게 되었습니다.
역대하 26장 강해 웃시야 왕의 형통과 실패
역대하 26장 1-역대하 26장 23
요절 역대하 26장 5하나님의 묵시를 밝히 아는 스가랴가 사는 날에 하나님을 찾았고 그가 여호와를 찾을 동안에는 하나님이 형통하게 하셨더라
역대하 26장 강해 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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