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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주의 대학생 선교기관

천안UBF

성경66권강해서

욥기 31장 강해 하나님 앞에서 당당한 욥

작성자 : 오요한
작성일 : 2010-04-13 00:00:00
조회수 : 3,332

문제지풀이(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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욥기 31장 강해 하나님 앞에서 당당한 욥

말씀 욥기 311-욥기 3140

요절 욥기 3135절 누구든지 나의 변명을 들어다오 나의 서명이 여기 있으니 전능자가 내게 대답하시기를 바라노라 나를 고발하는 자가 있다면 그에게 고소장을 쓰게 하라

 

욥의 마지막 변론의 종결부인 욥기 31장은 지금까지의 모든 변호의 말을 집약하고 있습니다. 오늘 말씀은 욥이 하나님 앞에서 얼마나 당당한 삶을 살았는지를 보여줍니다. 욥은 고난 받기 전이나 고난 받은 후에나 변함없이 하나님 앞에서 당당하게 살았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살아계신 하나님 앞에서 당당하게 살아야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순결한 욥)

 

내가 내 눈과 약속하였나니 어찌 처녀에게 주목하랴 그리하면 위에 계신 하나님께서 내리시는 분깃이 무엇이겠으며 높은 곳의 전능자께서 주시는 기업이 무엇이겠느냐 불의한 자에게는 환난이 아니겠느냐 행악자에게는 불행이 아니겠느냐 그가 내 길을 살피지 아니하시느냐 내 걸음을 다 세지 아니하시느냐”(1-4)

 

욥은 처녀에게 음욕을 품고 주목하지 않고자 눈과 약속하였습니다. 만약 약속대로 이행하지 않을 경우에는 제물로 바쳐진 동물이 둘로 쪼개어진 것과 같은 대가를 치르겠다는 피의 맹세를 합니다. 구약 성경에서 이 약속은 민족들 사이의 조약과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엄숙한 계약에 사용되었습니다. 특히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약속은 계약 수행에 대한 축복과 파기에 대한 저주가 동시에 명시된 약속입니다. 인간 편에서 이 약속은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서원의 의미를 가집니다. 욥은 눈으로 보는 것을 조심하여 자신의 속 마음까지 정결하게 살기로 서원하는 약속을 하였습니다. 눈은 마음의 생각과 연결되어 있으므로 욥은 눈과 언약을 하였습니다. 욥은 여자를 주목하여 봐서 성적인 욕망이 일어나지 않게 하였습니다. 욥은 자신이 눈으로 보는 것을 통해서 마음에 음욕을 품는 정도까지 죄를 짓지 않았습니다.

만약에 처녀를 보고 음욕을 품었다면 하나님이 주시는 분깃을 얻지 못해도 당연하다고 합니다. 그는 하나님의 상과 심판을 생각하며 순결하게 살았습니다. 예수님도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 자는 간음한 자라고 하셨습니다. 눈이 범죄케 하면 눈을 빼어버리라고 단호하게 말씀하셨습니다.

엘리바스는 세 번째 변론 과정에서 욥이 하나님을 세상 일에 전혀 관여하지 않으시는 분으로 여긴다고 책망한 적이 있습니다. 그러나 욥은 하나님이 초월적인 분일 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의 행위를 감찰하시는 분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사실 욥이 고난에 직면하기 전까지는, 선악간 행위에 대한 하나님의 철저하고도 현실적인 보응을 믿었습니다. 그러나 욥이 엄청난 재난에 몰리자, 욥은 자신과 같은 의인이 고난을 당하고 악행자들이 오히려 번성하는 모순된 현실에 알게 되었습니다. 욥은 하나님의 공의에 대해 원칙론적으로는 동의하지만, 선한 자신에 대해서 고난을 주신 하나님의 공의를 인정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욥은 자신의 결백을 하나님 앞에 호소하고 있습니다.

욥은 불의자에게는 당연히 환난이 있다고 합니다. 불의자는 당연히 지켜야 할 하나님의 법을 거부하는 사람입니다. 주로 하나님을 거역하는 자를 가리킵니다. 환난은 종말론적인 파멸을 의미합니다. 그는 심판자 하나님 앞에서 의롭게 살았습니다. 욥은 행악자에게는 불행이 있다고 말합니다. 행악자는 하나님의 마음에 고통과 슬픔을 주는 자입니다. 욥은 불의와 행악을 용납하지 않으시는 공의로운 하나님 앞에서 거리낌 없이 살았습니다. 욥은 하나님 앞에서 한 점 부끄럼 없이 살았습니다. 욥은 자신의 길을 살피시고 걸음을 다 세시는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살피시는 것은 하나님이 주시하고 인정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노아에게 그의 의로움을 보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처럼 욥은 자신의 모든 행동을 주목하여 지켜보시는 하나님을 알았습니다. 그는 자신을 살피시는 하나님이 자신의 결백을 인정하실 것으로 믿었습니다. 성경에는 하나님이 모든 인생의 길과 걸음을 살피신다고 여러 곳에 나옵니다. 하나님이 욥의 걸음을 다 세고 계신다는 말씀은 살피신다는 말씀보다 한층 더 세심한 표현입니다. 길 대신 걸음을, 보는 대신 세어보고 계시는 하나님의 눈을 말하고 있습니다. 욥은 자신의 행동뿐 아니라 생각과 마음의 계획까지도 분별하시는 하나님의 초월적 지혜를 고백하면서 바로 이 하나님이 자신의 순결을 증명하실 것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정직한 욥)

 

5-12절을 보십시오. “만일 내가 허위와 함께 동행하고 내 발이 속임수에 빨랐다면 하나님께서 나를 공평한 저울에 달아보시고 그가 나의 온전함을 아시기를 바라노라 만일 내 걸음이 길에서 떠났거나 내 마음이 내 눈을 따랐거나 내 손에 더러운 것이 묻었다면 내가 심은 것을 타인이 먹으며 나의 소출이 뿌리째 뽑히기를 바라노라 만일 내 마음이 여인에게 유혹되어 이웃의 문을 엿보아 문에서 숨어 기다렸다면 내 아내가 타인의 맷돌을 돌리며 타인과 더불어 동침하기를 바라노라 그것은 참으로 음란한 일이니 재판에 회부할 죄악이요 멸망하도록 사르는 불이니 나의 모든 소출을 뿌리째 뽑기를 바라노라"

 

욥은 허위와 동행하지 않았습니다. 허위는 물질적으로나 윤리적으로 실재하지 않는 무엇을 뜻합니다. 욥이 당한 가장 고통스러운 것 중의 하나는 친구들로부터 위선자로 취급받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욥의 과거의 선행들마저 모두 거짓된 것으로 돌려버렸습니다. 그가 만약 남을 속였다면 하나님이 판단하시기를 원합니다. 하나님이 공평한 저울로 자신을 달아주시기를 원합니다. 하나님은 공평한 저울로 편견과 속임수 없이 정확하게 판단하십니다. 거짓 저울에 대해서는 성경에서 자주 정죄되고 있습니다.(11:120:10), 공평한 저울이란 인간의 마음을 조금의 오차도 없이 정확하게 측정하시는 하나님의 판결을 가리킵니다. 욥은 자신의 결백함을 입증하기 위해서는 기꺼이 하나님의 공의의 심판대 앞에 서리라고 공언하고 있습니다. 정직함은 더 이상 흠잡히거나 비난받을 것이 없는 완전함을 의미합니다(아론의 흉패에 넣었던 둠밈도 같은 어근을 가집니다. 8:8참조).

욥은 부정직한 자에게는 두려움이 될 하나님의 심문이 자신에게는 천사와 영예를 가져오리라고 확신하고 있습니다. 그는 살아계신 하나님 앞에서 진실하게 살았습니다. 욥이 만약 눈의 소원을 따라서 거짓의 죄를 지었다면 하나님이 욥을 달아서 그의 소출을 다른 사람이 먹어도 좋다고 합니다. 욥은 하나님의 자녀가 마땅히 걸어가야 할 인생의 행로를 알았으며, 또 그것을 먼저 깨달은 후 다른 사람들에게 가르치기도 했습니다. 그는 충성의 대상을 옮기는 배교를 하지 않았습니다. 욥은 하나님을 배신하지 않았습니다.

욥은 마음이 자신의 눈을 따라 가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의 범죄가 행해지는 일반적인 경로는 눈입니다. 욥은 눈으로 봄으로써 마음 속에 일어나는 음란한 죄를 짓지 않았습니다. 욥은 눈을 통해서 마음에 생기는 악한 정욕을 스스로의 의지로 눌렀습니다. 욥은 이스라엘의 정결법에 따라서 손에 더러운 것을 묻히지 않았습니다. 그는 손으로 죄를 짓지 않았습니다. 전체적으로 욥은 자신의 신체를 범죄 가능성을 지닌 하나의 연합체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자신이 그 몸을 충분히 통제하고 있음을 주장합니다.

욥은 자신의 말이 거짓이라면 자기가 땀흘려 수확한 곡물을 일하지 않은 타인이 먹는 억울함을 당해도 좋다고 말합니다. 욥의 소산이 뿌리까지 뽑히는 것이 마땅하다고 합니다. 욥은 전반절보다 더 강력한 표현으로 자기의 결백을 주장하고 있습니다. 자기 말이 거짓이라면 자기가 심은 농산물이 결실하여 거두어 들여지기도 전에 멸절하여 농사를 망치는 형벌도 받겠다고 합니다. 단지 곡물의 피해만이 아니라, 욥과 관련된 모든 것이 저주를 받아 망하겠다고 합니다. 그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진실되게 따랐습니다.

욥은 그가 만일 이웃 여인을 유혹하였다면 자신의 아내가 다른 사람과 동침을 해도 상관없다고 합니다. 이전에 욥은 마음의 음욕에 대해서 철저히 자신을 지켰다고 고백했습니다. 이제 욥은 더욱 구체적이고 직접적으로 성적 범죄를 짓지 않았다고 말합니다. 그는 육체적, 사회적으로 성숙한 여성에게도 유혹되지 않았습니다. 타인의 아내이기에 더욱 성적으로 경계했습니다. 이웃의 문을 엿보는 것은 성 관계를 의미합니다. 문은 이웃의 딸이나 아내의 순결 혹은 성기를 언급합니다. 간음은 필경 파멸로 이끌 것입니다. 타인의 매를 돌릴 때 다른 사람의 맷돌을 돌리는 일은 일반적으로 그의 종이 되어 종살이하는 것을 뜻합니다. 욥은 자신이 죄를 지었다면 타인이 자신의 아내에게 심한 노동이나 성적인 능욕을 해도 좋다고 합니다. 남편인 자신에 대해 극심한 수치와 저주를 당해도 좋다고 합니다. 욥은 성적인 문제에서 아주 깨끗하게 살았습니다. 욥이 거짓되다면 재판에 회부되어 하나님이 하시는 심판에 의해서 그의 모든 소출이 뿌리채 뽑혀도 좋다고 말합니다.

간음은 사형에 해당할 만큼 추잡하고 의도적이며 극악스러운 죄입니다. 간음은 한 사회의 기초가 되는 가정을 와해시켜 버리는 중죄입니다. 율법에서도 간음자는 사형의 징벌을 당하도록 규정하였습니다. 욥 시대에는 아직 율법이 주어져 있지는 않았으나 욥은 경건하게 살았습니다. 간음이 멸망하도록 사르는 불이라고 할 때 욥은 간음죄의 파격적인 힘을 불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간음죄는 멸망의 지옥에 가는 죄로 강조합니다.

 

(약자를 보호한 욥)

 

13-18절을 보십시오. “만일 남종이나 여종이 나와 더불어 쟁론할 때에 내가 그의 권리를 저버렸다면 하나님이 일어나실 때에 내가 어떻게 하겠느냐 하나님이 심판하실 때에 내가 무엇이라 대답하겠느냐 나를 태 속에 만드신 이가 그도 만들지 아니하셨느냐 우리를 뱃속에 지으신 이가 한 분이 아니시냐 내가 언제 가난한 자의 소원을 막았거나 과부의 눈으로 하여금 실망하게 하였던가 나만 혼자 내 떡덩이를 먹고 고아에게 그 조각을 먹이지 아니하였던가 실상은 내가 젊었을 때부터 고아 기르기를 그의 아비처럼 하였으며 내가 어렸을 때부터 과부를 인도하였노라

 

욥이 만일 남종과 여종과 싸우고 그들의 인권을 져버렸다면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서 마땅하다고 합니다. 종들을 억압하고 혹사시키는 일은 고대 세계에서 흔했습니다. 앞에서 엘리바스는 욥 또한 그의 종들에게 횡포를 부렸다고 몰아붙였습니다. 그러나 욥은 그들을 학대하기는 커녕 오히려 그들의 입장에 서서 그 말을 충분히 들어주었다고 합니다. 다른 고대 근동 지역에 비해 이스라엘 사회에서는 종들도 인간으로서 법적인 권리를 보장받았습니다.

일어서는 것은 사건을 논술하거나 판결을 선포할때 혹은 증거를 제출할 때 법정에서 일어서는 행위를 가리킵니다. 욥 자신이 종들의 권리를 무시하여 공의를 저버렸다면 하나님께서 저들을 변호하시기 위해 일어나셔서 자신을 정죄하실 것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이 국문하시는 것은 욥이 그의 가솔들을 어떻게 대했는가를 하나하나 물어보시고 그 정죄 여부를 가리신다는 의미입니다. 욥은 하나님을 공의로운 심판자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욥은 자신이 만약 종들을 공정하게 대하지 않았으면 하나님께 어떤 변명도 할 수 없다고 합니다. 욥은 하나님을 믿고 종들을 인격적으로 대하였습니다.

욥은 자신을 만든 하나님이 종도 만들었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는 종도 자신과 동등하게 사랑하였습니다. 하나님은 각 사람들을 동등한 인격체로 창조하셨으므로 종도 동등하게 대해야합니다. 욥 자신과 종이 하나님의 법 앞에 동등함을 우리라는 말로 더욱 분명히 표현하고 있습니다.

욥은 아브라함의 이전 세대의 사람으로 평등의식을 갖고 있었습니다. 욥은 가난한 자의 소원을 막지 않았고 과부의 눈을 실망하게 하지 않았습니다. 소원을 막는다는 것은 생계를 위한 기본적인 필요를 무시하는 것입니다. 떡을 하면 고아도 나누어 주었습니다. 욥은 공동체 내에서 특별한 보호 대상인 사람들에게 호의적인 태도를 가졌습니다. 욥은 도움을 간절히 바라고 있는 과부의 눈길을 존중하여 원조를 해주었습니다. 욥은 하나님의 자비를 베풀었습니다.

앞에서 엘리바스는 욥이 가난한 자를 돌보지 않았다고 비난하였으며, 욥은 이 비난에 대해 극구 반박한 바 있습니다. 욥은 계속해서 절대적인 도움이 필요한 자들을 언급합니다. 욥은 자신이 음식을 먹을 때마다 고아들에게도 음식을 제공했습니다. 욥은 결코 자신의 배만 채우지 않고 자기 논밭의 풍부한 수확물을 불행한 이들과 기꺼이 나누었습니다. 그는 고아나 과부를 자신의 아이나 아내처럼 도와주었습니다.

욥은 인간애가 있었습니다. 욥은 젊은 시절부터 아버지처럼 그를 양육하였습니다. 젊었을 때부터는 욥이 어린 시절부터 그의 아버지가 어려운 사람들을 돕는 것을 보고 배우며 자랐을 것입니다. 그때부터 욥은 계속된 구제를 하나의 생활 습관처럼 오래도록 자연스럽게 행했습니다. 욥은 고아가 어렸을 때부터 마치 그의 아버지처럼 보살펴주었습니다. 과부에 대하여 매우 오랫동안 계속 긍휼을 베풀어 구제하였습니다. 욥이 자신의 성품 속에 선천적으로 온화하고 동정적인 면모를 가지고 있었으며, 자신이 기억할 능력이 생긴 이후부터 선을 행하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삶을 산 욥)

 

19-28절을 보십시오. “만일 내가 사람이 의복이 없이 죽어가는 것이나 가난한 자가 덮을 것이 없는 것을 못본 체 했다면 만일 나의 양털로 그의 몸을 따뜻하게 입혀서 그의 허리가 나를 위하여 복을 빌게 하지 아니하였다면 만일 나를 도와 주는 자가 성문에 있음을 보고 내가 주먹을 들어 고아를 향해 휘둘렀다면 내 팔이 어깨 뼈에서 떨어지고 내 팔 뼈가 그 자리에서 부스러지기를 바라노라 나는 하나님의 재앙을 심히 두려워하고 그의 위엄으로 말미암아 그런 일을 할 수 없느니라 만일 내가 내 소망을 금에다 두고 순금에게 너는 내 의뢰하는 바라 하였다면 만일 재물의 풍부함과 손으로 얻은 것이 많음으로 기뻐하였다면 만일 해가 빛남과 달이 밝게 뜬 것을 보고 내 마음이 슬며시 유혹되어 내 손에 입맞추었다면 그것도 재판에 회부할 죄악이니 내가 그리하였으면 위에 계신 하나님을 속이는 것이리라

 

욥은 의복 없는 가난한 사람을 도와주었습니다. 그런 사람들을 양털로 그의 몸을 따뜻하게 입혀서 그가 욥을 위해서 복을 빌게 하였습니다. 욥은 음식뿐만 아니라 저들의 의복까지도 세심한 관심을 가지고 보살펴 주었습니다. 욥은 그들에게 관심을 갖고 어느 방면에나 소홀함이 없이 보살폈습니다. 일교차가 심했던 근공 지역에서는 헐벗음으로 동사(凍死)하는 사례도 있었습니다. 덮을 것은 밤과 낮의 기온 차가 큰 기후 때문에 생긴 의복의 일종입니다. 이것은 밤에 추의를 막기 위해 덮고 자는 이불과 같은 역활을 하는 겉옷입니다. 욥은 의복과 덮을 것에 대해 자신의 양털로 따뜻하게 했습니다. 양털은 훌륭하고 따뜻하며 질긴 옷감이었습니다. 욥은 가난한 자들이 전인격으로 자신을 위하여 복을 빌게 했습니다.

욥이 순전한 마음으로 선행을 하자 그들이 마음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감사와 함께 욥에게 하나님의 축복이 임하시길 기원했습니다. 욥이 주위 사람들을 믿고 고아를 무시하였다면 어깨뼈가 빠지는 벌을 받아도 좋다고 합니다. 욥이 공회의 일원이었으므로 상당한 권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욥은 자기의 권력을 남용하여 다른 사람을 해할 수 있는 위치에 있었습니다. 고아는 자기를 보호할 힘이나 법정에 영향력을 행사할 만한 아무런 방법도 없는 무력한 사람입니다. 손을 드는 것은 공적인 힘을 이용하여 약한 자를 늑탈하여 권력을 남용하는 것입니다. 욥은 당시 사회에서 빈번히 일어나고 있던 이런 악행을 결코 행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공의를 집행해야 할 권력을 남용했다면 어깨가 빠지고 팔뼈가 부러지는 징벌을 기꺼이 받아들이겠다고 합니다. 성경에서 종종 하나님이 팔의 힘을 꺾으시는 분으로 언급 됩니다. 욥은 하나님의 재앙을 심히 두려워하여 죄를 지을 수 없었습니다. 욥은 하나님의 재앙을 심히 두려워하며 불우한 자들을 끊임없이 도왔습니다.

그는 단지 사람들과의 관계만 생각할 뿐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Coram Deo) 인정받는 삶을 살고자 했습니다. 재앙을 두려워하는 것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입니다. 욥은 하나님의 위엄에 압도되어 자발적으로 선을 실천하였습니다.

욥은 하나님보다 재물을 의지하지 않았습니다. 재물이 풍부한 것을 기쁨으로 삼지 않았습니다. 욥은 재물과 관련하여 자신의 결백을 주장해 나갑니다. 욥은 금으로 자기의 소망을 삼는 어리석음을 범하지 않았습니다. 고대 사회에서 금과 정금은 현대와 마찬가지로 한 개인의 부를 평가하는 기준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욥은 결코 자신의 삶을 물질적 부에 의탁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오직 하나님만을 의지하였습니다. 사람들은 보통 자기의 재산을 자랑하지만 욥은 자기의 재물은 하나님의 은혜임을 알았습니다.

그가 갑작스런 재난으로 재산과 자녀들을 잃었을때 , 주신 자도 여호와시요 취하신 자도 여호와시라고 고백하였습니다. 욥은 하나님 대신 재물에 의지한다고 말한 엘리바스의 비난에 대해 논박하고 있습니다. 욥은 해나 달을 우상으로 섬기지 않았습니다. 그는 하나님 앞에서 모든 죄에 대해서 떳떳하였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을 기쁨으로 삼았습니다.

26절에서부터 28절까지에서 욥은 우상 숭배에 대해 얘기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태양이 찬란한 광명으로 자신을 다스린다고 생각하였습니다. 태양과 달을 신으로 섬겼습니다. 사람들은 숭배의 대상이 멀리 하늘에 있어서 직접 그것에 입을 맞추지 못하고 자신의 손에 입을 맞추는 것으로 대신하였습니다. 그러나 욥은 태양과 달을 숭배하지 않았습니다. 우상숭배는 재판장에게 벌 받을 죄악입니다. 신명기 17:2-5에 의하면 우상 숭배는 돌로 쳐 죽일만큼 중죄였습니다. 구약 성경에 보면 예언자들은 이스라엘의 우상 숭배를 하나님에 대해 간음죄를 짓는 것이라고 경고하고 있습니다. 욥이 우상 숭배와 간음죄를 동일한 맥락의 중죄로 간주하고 있습니다. 욥은 여자를 바라보거나, 천체를 바라봄으로써 짓는 그 어떤 죄도 범하지 않았습니다. 그 자신은 눈과 언약을 세워 순결하게 살았습니다.

 

(나그네를 대접한 욥)

 

29-32절을 보십시오. “내가 언제 나를 미워하는 자의 멸망을 기뻐하고 그가 재난을 당함으로 즐거워하였던가 실상은 나는 그가 죽기를 구하는 말로 그의 생명을 저주하여 내 입이 범죄하게 하지 아니하였노라 내 장막 사람들은 주인의 고기에 배부르지 않은 자가 어디 있느뇨 하지 아니하였는가 실상은 나그네가 거리에서 자지 아니하도록 나는 행인에게 내 문을 열어 주었노라

 

욥은 자신을 미워하는 자의 멸망을 기뻐하거나 그가 재난을 당하는 것을 즐거워하지 않았습니다. 원수가 죽기를 바라는 저주하는 말을 하지 않았습니다.

29-34절은 앞 구절들과는 조금 다른 구조를 갖습니다. 죄에 대한 언급만 있을 뿐 그에 따르는 형벌이나 저주가 없습니다. 자기의 원수에게 재앙이 닥친 모습을 보며 마음 깊은 곳에서 터져나오는 쾌감과 흥분을 갖지 않았습니다. 인간 본성에서 나오는 어쩔 수 없는 부정적인 쾌감도 부인하였습니다.

성경에서 원수에 대한 태도는 보통 두 가지로 나타납니다. 시편의 저주 시는 신앙을 훼방하는 무리들에 대한 저주를 하나님께 맡기고 있습니다. 또 하나의 태도는 원수에 대한 사랑입니다. 욥은 원수를 하나님처럼 사랑하였습니다. 그는 원수를 사랑한 자신의 삶에 따라서 복을 주시도록 기도합니다.

그는 장막에 거하는 사람들에게 고기를 배부르게 주었습니다. 그는 나그네에게 자신의 집에서 잠을 자도록 도와주었습니다. 장막의 사람들은 외지에서 온 친족 내지는 부인, 자녀 등 가족이나 하인을 의미합니다. 욥이 하인과 친척, 가솔들을 후히 대접하였으며, 그로 인해 욥에 대한 저들의 칭송이 자자했습니다. 욥의 손님 대접의 모습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32절은 나그네를 극진히 접대한 아브라함과 롯을 연상케 합니다. 욥은 여행객들이 도시의 광장이나 넓은 공지에서 쉴 곳을 찾을 때, 그들을 자기 집으로 초대하여 머물도록 했습니다. 욥의 집 대문은 나그네들에게는 언제나 열려 있었습니다. 욥이 동성 연애와 같은 흉악한 범죄를 예방하기 위해서 나그네를 집에 재웠습니다. 욥의 시대도 소돔 성과 동일하여 광장에서 동성애를 하였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당당히 나가는 욥)

 

33-40절을 보십시오. “내가 언제 다른 사람처럼 내 악행을 숨긴 일이 있거나 나의 죄악을 나의 품에 감추었으며 내가 언제 큰 무리와 여러 종족의 수모가 두려워서 대문 밖으로 나가지 못하고 잠잠하였던가 누구든지 나의 변명을 들어다오 나의 서명이 여기 있으니 전능자가 내게 대답하시기를 바라노라 나를 고발하는 자가 있다면 그에게 고소장을 쓰게 하라 내가 그것을 어깨에 메기도 하고 왕관처럼 머리에 쓰기도 하리라 내 걸음의 수효를 그에게 알리고 왕족처럼 그를 가까이 하였으리라 만일 내 밭이 나를 향하여 부르짖고 밭이랑이 함께 울었다면 만일 내가 값을 내지 않고 그 소출을 먹고 그 소유주가 생명을 잃게 하였다면 밀 대신에 가시나무가 나고 보리 대신에 독보리가 나는 것이 마땅하니라 하고 욥의 말이 그치니라

 

욥은 자신의 악행을 숨기지도 않았습니다. 그는 하나님 앞에서 진실되게 죄를 회개하였습니다. 큰 무리와 종족의 수모가 두려워 밖으로 나가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아담처럼 자신의 죄를 피하기 위해 하나님의 낯을 피해 숨지 않았습니다. 욥이 자신의 죄가 드러날 것을 두려워하여 숨기지 않았습니다. 욥은 자신의 마음 속에 죄를 숨기고, 그 때문에 전전긍긍하며 사람들을 두려워하고 피하는 위선적인 죄를 범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언제나 자신의 행동이 당당하고 떳떳했습니다. 욥은 사람들과 하나님 앞에서 떳떳했습니다.

누구든지 자신의 죄를 고소하면 그것을 머리에 면류관처럼 쓰고 사람들에게 공개하겠다고 하였습니다. 지금까지 욥은 자신의 결백에 대해 모두 말했습니다. 이제 남은 것은 자신의 결백이 입증되고 공식적으로 선포되는 일입니다. 그래서 욥은 마지막으로 간절하게 그러한 판단자를 고대하고 있습니다. 그 사람은 35절 중에 이미 나타나듯 다름 아닌 하나님(전능자)이십니다. 욥은 하나님의 판결을 공식적으로 요청하고 있습니다. 욥이 하나님의 판결을 개인적인 말로 요구하지 않고, 공식적으로 요청하고 있습니다. 욥은 자신의 결백에 대한 주장들이 하늘로부터 어떠한 비난도 받지 않으리라고 확신하고 있습니다.

욥의 대적에 의해 제출된 서류는 바로 사면장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사면장을 어깨에 걸치고 자랑스럽게 전시하고 있습니다. 통치자는 자신의 어깨에 권위와 다스림을 메는 것으로 표현합니다. 면류관처럼 머리에 쓴다는 것도 어깨에 걸치는 것과 유사한 표현입니다. 면류관은 명예, 아름다움 및 축복을 상징합니다. 욥은 의의 옷을 입고 정의를 수행하는 지도자로서 머리에 면류관을 쓴 치리자로서 이전 지위와 명예를 회복할 것이라는 확신을 하고 있습니다.

욥은 고소자와 가까이 지내겠다고 합니다. 그는 고소자가 흠을 찾을 수 없을 정도로 정의로웠습니다. 걸음의 수효는 자신의 삶과 관련된 모든 행동 하나하나를 대유하는 표현입니다. 욥은 아무것도 꺼릴 것 없이 결백하므로 자기를 고소하는 자에게도 대담합니다. 욥은 왕족처럼 당당하게 나아가 고소자를 가까이 할 것이라고 합니다. 자신의 무죄에 대한 이토록 확고한 욥의 주장은 욥의 진술에 있어서 최고 절정을 이루고 있습니다.

욥은 경작지를 합법적으로 사용하였습니다. 땅 자체에 관한 법으로 안식년의 규례를 지키며, 땅을 소유하고 경작하는 사람에 관한 법으로 면제의 규례(15)를 지켰습니다. 사람들이 하나님의 법에 불순종할 때에 땅이 그 죄로 인하여 탄식하게 될 것입니다.

욥이 밭을 살 때 불의한 값으로 사거나 품꾼의 품삯을 주지 않았다면 자신의 밭에 가시나무가 나고 독보리가 나도 좋다고 합니다. 그는 수확을 위해 일한 품꾼의 품삯을 제 때에 주었습니다. 욥은 땅의 소유주로서 자신의 의무에 충실하였기에 그 어떤 착취나 인색함도 없었습니다. 찔레와 잡풀은 선지자들이 선포한 바에 의하면, 당신의 백성들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의 상징들입니다. 경작지에서 이런 것들이 자라면 경제적인 기반을 잃게 됨으로 삶이 패망하는 결과를 초래합니다. 땅과 관련된 이 마지막 결백의 맹세는 욥이 서두에서 언급한 하나님과 맺었던 언약(1-3)과 연결됨으로 욥기 31장의 주제가 언약임을 재삼 상기시키고 있습니다. 욥은 하나님과 서약한 모든 것을 조금도 어긋나지 않게 다 수행했기 때문에 자신은 이 고난을 받아도 결백하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결론-우리의 의를 따라서 복주시는 하나님)

 

오늘 본문은 가정법을 쓰고 있습니다. 자신이 죄를 지었다면 그는 벌을 받아도 좋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는 그렇개 하지 않았으므로 자신은 은혜를 받는 것이 마땅하다고 합니다. 그는 하나님 앞에서 떳떳한 삶을 살았습니다. 욥의 삶이 의로울 수 있었던 것은 그가 하나님을 의식하고 두려워했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 살 때 의로운 삶을 삽니다. 사람들 앞에서 사는 사람은 상황윤리를 따라 위선적인 삶을 살 수 밖에 없습니다. 욥은 하나님 앞에서 살았기에 의롭게 살 수 있었고 고난의 때에도 사람이 아닌 하나님께 항변할 수 있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코람데오의 신앙입니다. 그는 믿음으로 살았으니 지금 받는 환난이 옳지 않다고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의를 따라서 복주시기를 기도합니다. 우리는 믿음으로 구원 받습니다. 그러나 정말 믿음이 있다면 행함이 있어야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의를 따라서 복을 주시도록 기도해야합니다. 하나님은 욥의 기도를 들으시고 욥을 넘치도록 축복하여주십니다. 아멘!

욥기 31장 강해 하나님 앞에서 당당한 욥

말씀 욥기 311-욥기 3140

요절 욥기 3135절 누구든지 나의 변명을 들어다오 나의 서명이 여기 있으니 전능자가 내게 대답하시기를 바라노라 나를 고발하는 자가 있다면 그에게 고소장을 쓰게 하라

욥기 31장 강해 끝입니다.

 





번호 제목 작성자 작성일
31 [욥기] 욥기 32장 강해 전능자의 숨결이 깨달음을 주시니 오요한 2010-04-14
30 [욥기] 욥기 31장 강해 하나님 앞에서 당당한 욥 오요한 2010-04-13
29 [욥기] 욥기 30장 강해 어찌 도움을 부르짖지 아니하리이까 오요한 2010-04-12
28 [욥기] 욥기 29장 강해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는 욥 오요한 2010-04-10
27 [욥기] 욥기 28장 강해 주를 경외함이 지혜요 오요한 2010-04-10
26 [욥기] 욥기 27장 강해 공의가 반드시 승리할 것을 믿은 욥 오요한 2010-04-09
25 [욥기] 욥기 25장 ,26장 강해 보석 같은 우리 인생 오요한 2010-04-08
24 [욥기] 욥기 24장 강해 구더기가 악인을 달게 먹을 것이라 오요한 2010-04-07
23 [욥기] 욥기 23장 강해 정금 같이 나오리라 오요한 2010-04-07
22 [욥기] 욥기 22장 강해 신학적인 도그마에 갇힌 엘리바스 오요한 2010-04-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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