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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주의 대학생 선교기관

천안UBF

성경66권강해서

욥기 30장 강해 어찌 도움을 부르짖지 아니하리이까

작성자 : 오요한
작성일 : 2010-04-12 00:00:00
조회수 : 3,127

문제지풀이(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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욥기 30장 강해 어찌 도움을 부르짖지 아니하리이까?

말씀 욥기 301-욥기 3031

요절 욥기 3024절 그러나 사람이 넘어질 때에 어찌 손을 펴지 아니하며 재앙을 당할 때에 어찌 도움을 부르짖지 아니하리이까

 

오늘 말씀은 욥의 긴 변론의 결론 파트입니다. 욥은 병으로 고통합니다. 주위 사람들의 비난으로 마음도 괴롭습니다. 욥은 고통 가운데 탄식하며 하나님께 부르짖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응답이 없습니다.

그래도 욥은 부르짖어 기도할 수밖에 없습니다. 욥은 부르짖으며 인내의 시간을 지나고 있습니다. 그의 모습은 십자가 위에서 부르짖는 예수님의 모습과 비슷합니다. 그가 이런 고통의 시간에 기도하고 인내하면서 부활의 영광에 이르게 됩니다. 우리도 고통 중에 인내할 때가 있습니다. 우리는 이때 욥처럼 부르짖어 기도함으로 고난을 인내해야합니다.

 

(비천한 자들이 욥을 조롱한다)

 

그러나 이제는 나보다 젊은 자들이 나를 비웃는구나. 그들의 아비들은 내가 보기에 내 양 떼를 지키는 개 중에도 둘 만하지 못한 자들이니라. 그들의 기력이 쇠잔하였으니 그들의 손의 힘이 내게 무슨 소용이 있으랴 그들은 곧 궁핍과 기근으로 인하여 파리하며 캄캄하고 메마른 땅에서 마른 흙을 씹으며 떨기나무 가운데에서 짠 나물을 꺾으며 대싸리 뿌리로 먹을거리를 삼느니라”(1-4)

 

욥의 과거는 영광스러웠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달라졌습니다. 1절에 이어 9절과 16절에서도 반복되고 있는 그러나 이제는의 서두는 욥의 이전 상황과 현재의 상황을 아주 적절하게 대조하여 말합니다. 그러나 이제는 이라는 이 짧은 한마디가 주는 반전(反轉)으로 인해 그의 고난 당하기 전과 고난당한 후의 욥의 모습이 달라졌음을 알 수 있습니다.

욥은 고난 당하기 전에 19장에서 하나님의 관심과 보호 속에서 최고의 형통함을 누렸습니다. 그는 공의를 베풀었던 지도자로서의 의롭게 살았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그는 과거의 영광과 극적인 대조를 시켜며 자신의 현재 비참한 처지를 말합니다. 욥이 3장에서는 갑작스러운 고난 자체에 대해 격한 감정을 표출했던 것에 비해 여기에서는 그 고난의 비중을 사회적, 영적 측면에서 합리적으로 설명합니다.

욥은 30장의 서두를 일부러 긴 탄식으로 시작하여 이후로 언급하고자 하는 비참한 현실 상황에 대하여 깊은 숨을 내쉬게 합니다. 욥보다 나이가 어린 젊은 이들이 욥을 비웃습니다. 욥기 298에서 그들의 아버지는 욥을 경외하여 숨기도 했습니다. 그들의 아버지들은 마치 양을 지키는 개들만큼도 취급받지 못할, 정도로 그들은 천박한 자들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의 자녀요, 욥보다도 젊은 자들이 현재는 욥을 조롱하고 있습니다. 욥은 그들의 조롱을 받으며 고통하고 있습니다. 2-8절에 이어지는 내용은 아비의 젊은 자녀들에 대한 추가 설명입니다. 이러한 긴 보조 설명을 통해, 욥은 자신에게 수모를 주는 자들을 설명합니다.

욥을 비웃는 젊은 자들은 젊어서 손에 힘이 있을 듯하지만, 기력이 쇠하여서 쓸모가 없는 자들입니다.(표준) 그들의 힘이 욥에게 아무 도움이 되지 못하였습니다. 그들은 궁핍과 기근으로 파리하게 마르며 캄캄하고 메마른 땅에서 마른 흙을 씹는 자들입니다. 파리하다는 말은 열매를 맺지 못한다는 말입니다. 그들은 굶주림으로 인하여 안색이 굳어지고 생기가 없습니다. 마른 흙은 먹을 만한 채소를 찾을 수 없는 황폐한 상태를 의미합니다. 욥을 비웃는 젊은 자들은 극도의 기아 상태에서 흙덩이를 입에 집어 넣고 씹는 비참한 자들입니다. 그들은 이로 인하여 기력이 쇠하게 되었습니다. 이들은 떨기나무 가운데서 산나물을 먹고 대싸리 뿌리를 먹을거리로 삼는 자들입니다. 짠나물은 염분이 섞인 늪지에서 자라나는 당아욱의 일종입니다. 그 어린 잎은 부드럽고 약간의 영양가도 있어 먹을 수는 있다고 합니다. 대싸리 뿌리는 빗자루로 사용되는 초목의 뿌리로, 이 또한 보통 식용으로 사용되지는 않으나 먹을 수는 있습니다. 그들은 일반적인 식량을 사용하지 않는 식물들로서 끼니를 삼을 정도로 생활이 매우 궁핍하였습니다. 그런 궁핍한 자들이 지금 욥을 조롱하고 있습니다. 욥은 그들보다 더 못한 처지가 되었습니다.

 

(공동체에서 쫓겨난 자들이 욥을 조롱한다)

 

무리가 그들에게 소리를 지름으로 도둑 같이 사람들 가운데에서 쫓겨나서 침침한 골짜기와 흙 구덩이와 바위 굴에서 살며 떨기나무 가운데에서 부르짖으며 가시나무 아래에 모여 있느니라. 그들은 본래 미련한 자의 자식이요 이름 없는 자들의 자식으로서 고토에서 쫓겨난 자들이니라”(5-8)

 

욥은 자신을 비웃은 자들을 계속하여 소개합니다. 그들은 무리가 그들에게 소리를 지름으로 도둑처럼 사람들 가운데에서 쫓겨난 자들입니다. 소리지름은 보통 적군의 침략을 급히 알리는 경보(6:54:19) 또는 백성들의 환호등을 나타낼 때는 명사형이 사용됩니다. 사람들이 마치 도둑을 몰아내거나 잡기 위해 지르는 것과 같은 급박하고 강한 소리로 그들에게 위협을 주고 있습니다. 마을은 사람들이 모여 사는 생활 공동체, `인간 사회를 뜻합니다. 결국 그들은 도둑이 받는 수모와 함께 마을에서 쫓겨나는 신세가 될 정도로 비참한 무리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침침한 골짜기와 흙구덩이와 바위 굴에서 살아갑니다. 그들이 살았던 곳이 두려운 곳이었습니다. 그들은 인간 사회에서 쫓겨나 공포와 소외감을 느끼며 험난한 골짜기에 거주하였습니다. 그곳에서 그들은 흙을 파낸 구덩이나 바위 틈 사이의 암혈 속에서 마치 들짐승과 같이 살았습니다. 그들은 전혀 자신들의 의사와는 관계없이 억지로 쫓겨나 살았던 것입니다. 그들은 떨기나무 가운데서 부르짖으며 가시나무 가운데서 살았습니다. 그들은 굶주림에 의한 심한 위기로 부르짖었습니다.

이렇게 빈곤한 자들이 욥을 조롱합니다. 그들은 욥을 자신보다 더 못하게 보고 욥을 고통 중에 몰아넣고 있습니다. 욥을 비방하는 자들은 본래 미련한 자의 자식이요. 이름 없는 자들의 자식이요. 그들의 고향 땅에서 쫓겨난 자들입니다. 미련한 자는 몰지각하고 어리석은 자입니다. 지혜 문학에서 미련한 자는 비천하고 버릇없는 태도와 함께 도덕적으로 무감각하며 심지어 하나님께 대해 무관심할 정도로 판단력이 마비된 사람을 가리킵니다. 비천한 자는 이름이 없는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이스라엘 사회에서 이름은 가문의 명예를 상징합니다. 또한 이름은 소유권, 보호권을 나타내기도 합니다. 이름은 그 사람의 인격과 품위를 나타냅니다. 따라서 이들은 지극히 천한 부류의 사람임을 뜻합니다. 고토는 사람들의 거주지, 고향을 가리킵니다. 고향에서 쫓겨난 비천한 무리들이 욥을 조롱합니다. 욥은 고향에서 쫓겨난 자보다 더 못한 자가 되었습니다.

 

(욥을 곤고하게 하신 하나님)

 

이제는 그들이 나를 노래로 조롱하며 내가 그들의 놀림거리가 되었으며 그들이 나를 미워하여 멀리 하고 서슴지 않고 내 얼굴에 침을 뱉는도다. 이는 하나님이 내 활시위를 늘어지게 하시고 나를 곤고하게 하심으로 무리가 내 앞에서 굴레를 벗었음이니라”(9-11)

 

지금까지 욥은 자신을 모욕하는 사람들이 어떤 부류인가를 적나라하게 설명했습니다. 한마디로 이들은 깡패들입니다. 9절부터는 15절까지에서 욥 자신이 이들에게 당하는 멸시와 수모에 대해 열거하고 있습니다. 이제는 그들이 욥을 노래로 조롱하며 욥은 그들의 놀림거리가 되었습니다. 그렇게 고귀했던 욥이 하루아침에 사람들의 입에 조롱거리로 올려지게 되었습니다. 욥은 물리적 고통 위에 극한 정신적 쓰라림이 더해지게 되었습니다. 욥은 잿더미 위에 앉게되어 오히려 사람들에게 조롱하는 노래의 소재가 되었습니다. 욥의 재난에 대해 많은 얘기들이 오고 갔습니다. 그들은 결코 욥을 동정하거나 위로하지 않고 오히려 비방하고 비웃었습니다. 존경받던 욥은 이제 사회적으로 공공연한 저주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그들이 욥을 미워하여 멀리하고 서슴지 않고 욥의 얼굴에 침을 뱉었습니다.

미워하다는 말은 감정적인 면보다는 제의적이고 윤리적인 이유로 혐오하고 배제하는 뜻입니다. 그들은 욥이 받은 재난을 불경건과 불의로 인한 하나님의 심판을 받는다고 생각하고 조롱하고 있습니다. 욥을 본 사람들은 가증스럽고 부정한 물건을 피하듯 욥을 멀리했습니다. 욥을 벌레 대하듯이 하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전에는 욥을 미소로 대하던 자들이 이제는 바로 그 얼굴에 침을 뱉으며 저주했습니다. 욥으로서는 최악의 사회적 냉대와 멸시를 받았습니다. 그들은 욥의 내면을 보지 않고 외면만 보고 무시하였습니다.

욥을 무시하는 자들은 십자가 밑의 무리들과 같습니다. 무시 받는 욥은 십자가 상의 예수님과 같습니다. 하나님은 욥에게 활을 쏘지 못하도록 활 시위를 늘어지게 하시고 욥을 곤고하게 하셨습니다.

욥은 사람들의 이런 멸시와 핍박이 왜 일어나게 되었는가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이전에 자신과 함께 하셔서 축복하셨던 하나님께서 이제는 자신을 멸시자들의 손에 넘겨주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자신을 적대적으로 대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활은 생명력 혹은 생식력을 상징합니다. 줄이 늘어진다는 표현은 건강이 악화되어 죽음이 임박했다는 뜻입니다.

욥은 자신의 핍박자들에 대해 무력하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굴레 벗은 말처럼 욥에게 덤벼듭니다. 그들은 의무나 억압에서 벗어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욥의 박해자들로 하여금 존귀한 자에 대한 의무에서 벗어나 제멋대로 행동하는 악한 용기를 갖게 하셨습니다. 친구들은 욥을 돕고자 하였습니다. 그러나 친구들은 율법주의 신앙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런 율법주의 신앙을 가진 자는 미련한 자요. 의인의 얼굴에 침을 뱉는 자입니다. 이런 자들이 바리새인처럼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은 자들입니다. 율법주의자는 이해의 대상이 아니라 책망의 대상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바리새인을 책망하였습니다, 바울은 율법주의 신앙을 저주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런 율법주의자들도 하나님의 허락 안에 있는 것입니다.

 

(도울 자가 없는 욥)

 

그들이 내 오른쪽에서 일어나 내 발에 덫을 놓으며 나를 대적하여 길을 에워싸며 그들이 내 길을 헐고 내 재앙을 재촉하는데도 도울 자가 없구나 그들은 성을 파괴하고 그 파괴한 가운데로 몰려드는 것 같이 내게로 달려드니 순식간에 공포가 나를 에워싸고 그들이 내 품위를 바람 같이 날려 버리니 나의 구원은 구름 같이 지나가 버렸구나”(12-15)

 

친구들은 오른쪽에서 일어나 욥의 발에 덫을 놓았습니다. 욥의 대적들이 오른편에서 일어나는 것은 마치 재판정에서의 원고(原告)들을 연상케 합니다. 그들은 욥을 대항하는 자들이며 법정에서 원고처럼 욥의 오른쪽에 위치했습니다. 그들은 욥이 설자리가 없도록 몰아넣는 악행을 하였습니다. 그들은 욥을 사냥하려고 이리저리로 추적하는 자들처럼 공격했습니다. 그들은 마치 성을 공격하는 대규모 군대의 모습과도 같습니다. 그들은 거대한 토성을 쌓는 것처럼 욥을 멸망시킬 길을 만들고 있습니다. 그들의 태도는 소극적으로 욥을 비웃고 조롱하는 것에서(9, 10) 이제는 욥을 파멸시키려고 적극적으로 달려들고 있습니다. 욥을 대적하여 길을 에워싸고 길을 헐고 재앙을 재촉하였습니다.

아무도 욥을 돕지 않았습니다. 도울 자는 군사적인 지원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명칭이 결합하여 하나님의 도우심을 뜻하는 단어를 만들기도 합니다. 아세렐-하나님이 도와주셨다. 아사랴-여호와께서 도와주셨다. 하나님의 도움이 종종 군사적인 성격을 지니기 때문입니다. 욥 자신이 도움을 받을 사람이 없습니다. 그들의 계속되는 악행에 홀로 대항하고 있는 욥이 그들의 공격으로부터 구원해 줄 구속자(deliver)가 없음을 한탄하고 있습니다.(LB, I have no one to help me).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을 때 아무도 예수님을 도와주지 않았습니다. 조롱하는 자들의 정체가 나옵니다.

욥을 조롱하는 그들은 성을 파괴하고 몰려드는 자와 같았습니다. 욥은 자신을 괴롭히는 자들의 행동을 성을 공략하기 위한 적군의 공격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적들의 집요하고 엄청난 공격에 마침내 성문이 파괴되었습니다. 그 무너진 틈 사이로 적군이 물밀듯이 들어오듯 그들은 욥에게 몰려들어와 노략하였습니다. 어떤 힘을 가진 물체가 강하게 욥에게 들이 닥쳤습니다. 거친 파도가 밀물처럼 덮쳐오듯이 그 젊은 무리들이 욥에게 행악하기 위해 몰려 들어옵니다. 욥에게는 순식간에 공포가 에워싸고 욥의 품위를 바람처럼 날려버렸습니다. 욥의 구원은 구름처럼 사라졌습니다.

그들의 공격으로 인해 욥 자신이 받은 심리적 충격을 받습니다. 자신의 생활에 변화가 일어납니다. 욥은 그 공격자들의 배후에 영원한 사망의 세력이 있음을 감지하고 있습니다. 영광과 복록은 이전에 욥이 누렸던 특권과 존경받는 지위를 표현한 것입니다. 욥에게 영광과 구원은 사라졌습니다. 어쨌든 욥은 이제 성을 정복 당해 포로가 된 왕의 치욕적인 모습으로 자신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율법적으로 사람을 돕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가를 배웁니다. 마치 덫으로 사람을 죽이고 양에게 재앙을 주는 자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바리새인들을 그렇게 책망하였습니다.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의 시기심으로 십자가 형을 당하였습니다.

 

(욥을 진흙같이 던지신 하나님)

 

이제는 내 생명이 내 속에서 녹으니 환난 날이 나를 사로잡음이라 밤이 되면 내 뼈가 쑤시니 나의 아픔이 쉬지 아니하는구나 그가 큰 능력으로 나의 옷을 떨쳐 버리시며 나의 옷깃처럼 나를 휘어잡으시는구나 하나님이 나를 진흙 가운데 던지셨고 나를 티끌과 재 같게 하셨구나 내가 주께 부르짖으나 주께서 대답하지 아니하시오며 내가 섰사오나 주께서 나를 돌아보지 아니하시나이다”(16-20)

 

욥은 자신의 현재의 비참한 모습을 설명함에 있어서 지금까지와 다른 각도에서 표현하고자 합니다. 15절까지는 사람들로부터 받은 고난을 얘기했다면, 16절부터는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고난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제 욥의 생명은 욥의 속에서 녹았습니다. 욥의 영혼이 그 속에서부터 쏟아져 나왔습니다. 욥은 너무 큰 괴로움과 원망으로 인해 희망을 잃고 망연자실하고 있습니다. 욥의 영혼이 이제 그에게서 아주 떠나가 버렸습니다. 환난이 욥을 사로잡았습니다. 밤이 되면 그의 뼈가 쑤셔서 아픔이 쉬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큰 능력으로 욥을 옷깃처럼 휘어 잡으셨습니다. 밤이 되면 자신의 뼈를 찔러대었습니다. 상처는 밤이 되면 그 통증이 더 심해지기 마련입니다. 욥에게 있어서도 밤은 더욱 큰 고통이었습니다. 그 아픔은 마치 밤 자체가 살아서 자신의 뼈를 찔러 고통을 주는 것과도 같았습니다. 밤이면 더욱 심해지는 상처의 쓰라림으로 인해 뜬 눈으로 밤을 지새워야 했습니다. 졸음에 겨워 잠깐 잠이 들어도 격통과 경련으로 인해 다시 깨어버리는 상황은 상상만해도 고통스럽습니다. 더욱이 육체적 고통뿐만이 아니라 마음 속에 일어나는 갈등과 격정의 고통 또한 너무 커 욥은 잠시도 평안을 누릴 수 없었습니다.

16절에서 욥은 내적인 고통을 겪고 있고 17절에서 욥은 악창이 든 피부가 압박되는 듯한 외부적인 통증을 겪고 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큰 능력으로 하나님이 그에게 옷입히시는 것처럼 되었습니다(NIV), 하나님의 능력이 그를 움켜잡았습니다(70인역, KJV) 욥을 향해 내리시는 하나님의 징벌(RSV, violence)로 인해 온몸에 악창이 나서 그 고름이 옷에 말라 붙어 그 자체가 옷처럼 되었습니다. 온몸의 피부가 죄어드는 듯한 느낌은 마치 하나님께서 욥을 움켜잡고 있는 것처럼 여겨진 것입니다. 십자가에서 육체적인 고통을 당하는 예수님의 모습과 같습니다.

하나님이 욥을 진흙 가운데 던지셨습니다. 진흙은 죽음을 면하지 못할 유한한 인간의 본질을 비유적으로 나타낸 표현입니다. 또한 노략자들에게 짓밟히는 거리의 진흙을 뜻하는 것으로, 욥은 현재의 고난 속에서 자신이 쓸모없는 질그릇으로 파괴당하는 듯한 느낌을 갖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욥을 티끌과 같게 하셨습니다.

욥은 하나님께 부르짖었으니 대답하지 않았습니다. 욥은 하나님 앞에 서 있지만 하나님은 돌보지 않았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향해 공의의 판결을 청하였습니다. 그에 대한 즉각적인 행동을 요구하였습니다. 욥의 이 부르짖음도 도움이나 구원을 청하는 것이라기보다는 정의 법에 대한 공식적인 청원을 하는 것입니다. 욥은 하나님의 공의로운 판결을 간절히 기다리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침묵과 무관심에 대한 욥은 불평합니다. 욥이 법적인 탄원을 했음에도 하나님이 그것을 기각하셨습니다. 욥은 자신에 대한 공의를 거절하신 하나님을 향해 거듭하여 항변하고 있습니다. 욥은 하나님의 판결과 구원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욥에게 잔혹하게 하신 주님)

 

주께서 돌이켜 내게 잔혹하게 하시고 힘 있는 손으로 나를 대적하시나이다나를 바람 위에 들어 불려가게 하시며 무서운 힘으로 나를 던져 버리시나이다 내가 아나이다 주께서 나를 죽게 하사 모든 생물을 위하여 정한 집으로 돌려보내시리이다”(21-23)

 

하나님은 욥을 잔혹하게 하시고 힘 있는 손으로 욥을 대적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예상할 수 없었던 것을 뒤바꾸시었습니다. 뒤바뀌는 것은 긍정적이거나 부정적이거나 당황과 충격을 불러일으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욥의 공의를 인정해주시다가(29) 이제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자신에게 가혹히 대하시고 있습니다. 욥은 자신에 대한 하나님의 변화된 행동을 구체적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욥은 하나님이 자신에 대하여 동정심이 없이 핍박하는 사단의 역사를 방관하고 계심을 탄식하고 있습니다. 욥은 자신의 고통이 하나님에게서 오는 것을 알았습니다. 하나님은 지금 욥을 고난 중에 보고 지켜보십니다. 하나님의 지켜보심 가운데는 욥에 대한 깊은 신뢰가 담겨 있습니다.

그러나 욥은 그런 하나님을 알지 못하였습니다. 마치 십자가의 예수님이 하나님께 버림 받았듯이 버림 받는 느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욥을 바람에 불려서 던져진 자와 같게 하셨습니다. 욥은 계속해서 시적 언어를 사용하면서 풍자적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바람은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을 구원하러 오실 때에 타고 오시는 바람날개를 연상케 합니다. 그런데 욥에게 그 바람은 구원이 아니라 자신을 높이 달아 올려져 그 곳에서 떨어지게 하는 부정적인 바람입니다. 하나님의 강력으로 말미암아 존재의 본질이 파괴되는 완전한 쇠망을 표현합니다.

욥은 자신의 죽음을 예상하고 있습니다. 욥은 하나님을 잘못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결국은 죽음으로 인도하실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사단에게 욥을 죽이지는 말라고 하였습니다. 앎은 체험에서 비롯된 분명한 인식입니다. 그런데 1925에서는 신앙적 확신과 관련된 앎이지만, 여기서는 절망과 공포로부터 아는 것입니다. 모든 생물에게 필연적으로 죽음이 닥칩니다. 신자들에게 죽음은 새롭고 완전한 생()의 시작이지만 욥은 자신의 죽음을 다분히 냉소적인 의미로써 완곡히 표현하고 있습니다. 욥에게 죽음은 다른 장소로의 이동을 의미하며 그 귀환은 인간의 근원인 먼지(10:9)에로의 귀환(죽음)이기에 욥은 매우 비꼬는 어조를 띠고 말합니다.

 

(하나님께 도움을 부르짖는 욥)

 

그러나 사람이 넘어질 때에 어찌 손을 펴지 아니하며 재앙을 당할 때에 어찌 도움을 부르짖지 아니하리이까 고생의 날을 보내는 자를 위하여 내가 울지 아니하였는가 빈궁한 자를 위하여 내 마음에 근심하지 아니하였는가내가 복을 바랐더니 화가 왔고 광명을 기다렸더니 흑암이 왔구나 내 마음이 들끓어 고요함이 없구나 환난 날이 내게 임하였구나 나는 햇볕에 쬐지 않고도 검어진 피부를 가지고 걸으며 회중 가운데 서서 도움을 부르짖고 있느니라”(24-28)

 

욥은 하나님이 기도의 응답을 하지 않는 것을 알지만 넘어질 때는 어찌 손을 펴서 기도하지 않을 수 있느냐고 반문합니다. 욥은 다시 초점이 하나님에서 사람들로 바뀌어 말합니다. 특히 이 부분은 다른 사람들의 핍박을 서술하기보다 욥 자신의 처지를 슬퍼하는 일종의 애가(哀歌)입니다.

환난 중에 있는 사람이 다른 이의 도움을 요청하는 것은 마치 하나의 본성처럼 자연스럽습니다. 욥 자신이 하나님의 공의를 기대하며 기도하는 것 또한 너무도 당연한 일입니다. 욥은 하나님의 도우심에 대한 기대가 오히려 또 다른 환난으로 나타난 사실로 인해 하나님의 선하심에 대한 확신이 흔들리고 있습니다. 욥은 그래도 하나님께 부르짖어 기도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지금 욥은 재산과 자녀를 잃고 여러 달 피부병으로 고통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 부르짖어 기도해도 하나님은 응답지 않았습니다. 그래도 욥은 어찌 손을 펴서 하나님께 기도지 않을 수 있느냐고 묻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응답하지 않아도 부르짖어 기도해야 합니다.

때가 되면 하나님은 반드시 응답하십니다. 지금 하나님이 응답하지 않는 것이 응답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응답하지 않으면서 욥을 정금처럼 단련하고 계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참고 훈련을 받으면 하나님은 당신의 때에 응답하십니다. 침묵의 터널은 반드시 끝이 있고 영광의 응답이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욥에게 아무 응답도 하지 않지만 하나님은 고요 속에서 응답하고 계신 것입니다. 정금같은 믿음으로 연단하고 계신 것입니다.

우리는 욥과 같이 고난 중에서 손을 펴고 하나님께 기도해야합니다. 우리 예수님도 십자가에서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부르짖으며 기도하였습니다. 다시 영화롭게 해달라고 기도하였습니다. 욥은 과거에 고생하는 자를 위하여 울며 슬퍼하였습니다. 빈궁한 자를 위하여 근심하였습니다.

고생은, 감당하기 힘든 무거운 멍에로 인해 받는 황소의 고통을 내포합니다. 이런 고난 중에 있는 사람은 분명 다른 도움의 손길을 기대할 것입니다. 욥은 그 간절한 기대에 응답하였습니다. 욥이 어떻게, 어느 정도로 그들의 요청에 충분히 응대했는가를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욥은 설의적 질문을 통해 자신에 대한 하나님의 처사를 은근히 원망하고 있습니다.

욥은 성읍의 존경받는 지도자로서 압박 당하는 자들을 위해 공의를 베풀었습니다. 그러나 온 세상만물의 통치자이신 하나님께서 그의 정당한 호소에 대해 무관심하심을 탄식하고 있습니다. 욥은 선을 행하면서 복을 바라고 광명을 바랐습니다. 그러나 그에게 화가 오고 흑임이 왔습니다. 욥은 하나님의 공의에 대해 강한 회의를 나타냅니다. 욥은 자신의 공의와 성실에 대한 보상으로 하나님의 축복을 기대했으나. 도리어 환난이 임했습니다. 광명은 생명이나 신적 호혜를 뜻하며, 흑암은 음부(underworld)의 음침한 어두움(10:22)을 의미합니다.

욥이 현재 죽음과 같은 절망의 어두움으로 표현할 만큼 충격적인 상황을 경험하고 있습니다. 그는 불평과 아울러 자조섞인 탄식을 하고 있습니다. 욥의 마음은 들끓어 고요함이 없습니다. 내장은 사람이 깊은 속 마음으로 겪는 번민을 느끼는 감정이 위치하는 자리를 나타냅니다. 욥은 렘 4:19과 같은 비통함을 토해 내고 있는 것입니다. 욥의 내면 세계가 혼란과 고통에 빠져 영혼의 안식을 전혀 갖지 못하고 있습니다. 욥에게 환난이 임하였습니다. 하나님은 때로 선한 자에게 고난을 당하게 하십니다. 아벨이나 스데반이 그렇게 고난을 당하였습니다. 많은 믿음의 선배들이 이런 고난을 받았습니다.

욥은 햇볕을 쬐지 않았지만 검어진 피부를 가지고 걸었습니다. 그는 고통으로 회중 가운데서 부르짖고 있습니다. 그는 슬픔과 고난에 의해 얼굴이 검게 변하였습니다. 욥은 티끌과 재로 온통 뒤덮인 채 슬퍼하고 있습니다. 어쨌든 욥은 슬픔과 관련되어 어둡게 되었습니다. 욥은 자신의 입장을 성문의 회중들 앞에서 설명하며. 도움을 구하고 있습니다. 욥의 부르짖음은 법에 대한 호소이며, 그가 일어선 것은 누군가 도와줄 사람이 있으리라는 기대감에서였으나 오히려 철저히 외면당했습니다.

 

(통곡하는 욥)

 

나는 이리의 형제요 타조의 벗이로구나 나를 덮고 있는 피부는 검어졌고 내 뼈는 열기로 말미암아 탔구나 내 수금은 통곡이 되었고 내 피리는 애곡이 되었구나”(29-31)

 

욥은 이리의 형제요. 타조의 벗이 되었습니다. 28절의 욥의 간구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의 탄식은 아무런 주의도 끌지 못한 일종의 짐승 소리였습니다. 또한 이는 욥의 일상 생활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합니다. 특히 이리의 울음 소리는 마치 우리나라 소쩍새처럼 어린아이의 울부짖는 소리처럼 서글프게 들리며, 타조 울음 역시 마치 목이 쉰듯 애절한 느낌을 자아냅니다. 결국 욥은 일반 대중들, 심지어는 가장 친했던 이들로부터조차 따돌림을 당해 마치 짐승처럼 버림받아 울부짖는 처지에 던져졌습니다. 욥을 덮고 있는 피부는 검어졌고 뼈는 열기로 말미암아 탔습니다. 마치 뼈가 타는 듯한 아픔은 상피병이 악화되면서 나타나는 증상입니다. 보통 상피병은 허리 부분과 엉덩이 부분에 심한 통증이 온다고 합니다.

그는 갈증을 겪고 고통하고 있습니다. 수금은 통곡이 되었고 피리는 애곡이 되었습니다. 30절에서는 지난날 기쁨과 흥을 돋구었던 수금이 이제는 제소리를 내지 못하고 도리어 슬픔의 소리로 들리는 형편으로 바뀌었습니다. 욥이 대적들의 고소와 비난에 맞서 공회에서 자신의 결백을 변호하는 주역에서 밀려나 이제는 그 성읍의 곡하는 자들과 같은 처지에 있게 되었습니다. 욥은 여러 악기들을 언급함으로써 자신의 비탄에 슬픔을 더욱 가중시켜 강조하고 있습니다. 애통함이 고조된 이 애가는 역설적으로 그로 하여금 31장의 결백에 대한 선서를 맹세하도록 충동시키고 있습니다.

 

(부르짖으며 구원을 기다리는 욥)

 

하나님은 욥을 고난 가운데 두십니다. 그의 기도에 응답하지 않고 지켜보십니다. 하나님은 때로 이렇게 지켜보실 때가 있습니다. 마치 십자가 위에서 예수님의 모습과 같습니다. 이때는 인내의 때입니다. 욥의 인내는 우리에게 위로를 줍니다. 십자가를 끝까지 참고 기다리면 정금과 같이 나올 것입니다. 새로워질 것입니다. 변화될 것입니다. 터널을 지날 때는 참고 견뎌야합니다. 터널의 끝은 있고 다시 밝은 햇빛이 비칠 것입니다. 어떤 때는 터널이 길게 느껴질 때가 있지만 그렇게 길은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이 정하신 때가 있습니다. 요셉은 감옥에서 나올 줄 알았지만 이년을 더 기다렸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잡고 고난의 때를 잘 인내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아멘!

욥기 30장 강해 어찌 도움을 부르짖지 아니하리이까?

말씀 욥기 301-욥기 3031

요절 욥기 3024절 그러나 사람이 넘어질 때에 어찌 손을 펴지 아니하며 재앙을 당할 때에 어찌 도움을 부르짖지 아니하리이까

욥기 30장 강해 끝입니다.





번호 제목 작성자 작성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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