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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주의 대학생 선교기관

천안UBF

성경66권강해서

욥기 24장 강해 구더기가 악인을 달게 먹을 것이라

작성자 : 오요한
작성일 : 2010-04-07 00:00:00
조회수 : 2,514

문제지풀이(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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욥기 24장 강해 구더기가 악인을 달게 먹을 것이라

말씀 욥기 241-욥기 2425

요절 욥기 2420절 모태가 그를 잊어버리고 구더기가 그를 달게 먹을 것이라. 그는 다시 기억되지 않을 것이니 불의가 나무처럼 꺾이리라.

 

욥기 24장은 욥기 23장에 이어서 엘비바스의 변론에 대한 욥의 대답이 계속됩니다. 이전에 욥은 하나님이 자신을 아시나니 순금같이 연단한다고 하였습니다. 계속하여 욥이 엘리바스에 대해서 변론합니다. 욥은 자신은 고난을 통하여 연단 받지만 악인들은 어떻게 되는가를 묵상하다가 그들이 결국 심판을 받을 것을 믿고 있습니다.

 

(성도는 심판의 때를 알지 못한다)

 

어찌하여 전능자는 때를 정해 놓지 아니하셨는고? 그를 아는 자들이 그의 날을 보지 못하는고?”(1)

 

욥은 전능하신 분께서는, 심판하실 때를 정하여 두지 않으셨다고 말합니다. 그를 섬기는 사람들이 어찌하여 악인을 정당하게 판단하시는 날을 정하지 않으셨냐고 묻습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정의롭게 심판할 날을 알지 못하여 답답해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때는 악인을 향한 하나님의 심판이 시행되는 날입니다. 그 날은 악인을 위해 준비해 둔 형벌이 쏟아집니다. 천년왕국 후에 예수님이 백보좌 심판하실 때입니다. 하나님은 반드시 악인을 심판하여 악인을 불과 유황이 타는 못으로 집어넣습니다.

그러나 그 때는 아무도 모릅니다. 하나님은 심판의 때를 정하여 놓지 않으신 것 같습니다. 하나님을 아는 자들이 하나님의 심판의 날을 보지 못하고 죽을 때가 있습니다. 스데반도 악인의 심판을 보지 못하고 죽었고, 아벨도 악인의 심판을 보지 못하고 죽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재림하여 심판하는 때를 알지 못합니다.

욥은 악인에게 곧장 심판이 임하지 않는 사실로 인해 심각한 딜레마에 빠져 있습니다. 이러한 사실은 욥에게 두 가지 의문을 갖게 했을 것입니다. 첫째는 악인들이 더욱 기세등등하게 활보하고 다니는 것입니다. 둘째는 하나님의 공의를 믿고 신실하게 생활허던 자들이 낙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통치가 편파적이고 비일관적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이처럼 욥이 현재로서는 하나님의 심판을 이해할 길이 없었으나 후에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는 그 딜레마를 극복할 수 있게 됩니다. 하나님의 공의의 시행은 기계적으로 시행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깊으신 뜻에 따라 시행되는 것을 알게 됩니다.

 

(악인들의 번영)

 

어떤 사람은 땅의 경계표를 옮기며 양 떼를 빼앗아 기르며 고아의 나귀를 몰아 가며 과부의 소를 볼모 잡으며 가난한 자를 길에서 몰아내나니 세상에서 학대 받는 자가 다 스스로 숨는구나 그들은 거친 광야의 들나귀 같아서 나가서 일하며 먹을 것을 부지런히 구하니 빈 들이 그들의 자식을 위하여 그에게 음식을 내는구나. 밭에서 남의 꼴을 베며 악인이 남겨 둔 포도를 따며 의복이 없어 벗은 몸으로 밤을 지내며 추워도 덮을 것이 없으며 산중에서 만난 소나기에 젖으며 가릴 것이 없어 바위를 안고 있느니라.”(2-8)

 

악인들은 죄를 짓지만 심판이 곧바로 임하지 않습니다. 이제 욥은 악인이 오히려 번영하고 있는 사실을 구체적인 예를 들어 말하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땅의 경계표를 옮져서 자기 땅을 넓힙니다. 지계표는 이웃하는 땅의 경계를 담이나 울타리를 쌓지 않고, 돌이나 바위 등을 경계선 자리에 놓아 표시한 것입니다. 이러한 지계표를 옮김으로써 이웃의 토지를 부당하게 빼앗는 자가 있었습니다.

모세의 율법에서도 이런 죄악은 저주받는 죄로 금지하였습니다. 지혜서와 선지자들에 의해서도 지계표를 옮기는 것은 하나님의 진노를 받는 일로 죄악시되었습니다. 이러한 조작 행위는 개인의 소유를 약탈하는 행위였을 뿐만 아니라 공동체의 질서를 파괴시키는 죄악입니다.

악인은 다른 사람의 양떼를 빼앗아 자기 양처럼 기릅니다. 악인들은 양떼를 강제로 탈취했을 뿐만 아니라 아주 뻔뻔스럽게도 탈취한 양떼를 공개적으로 방목하기까지 했습니다. 그들은 연약한 고아와 과부의 나귀나 소를 빼앗아 볼모로 잡습니다. 부모를 잃은 고아에게는 나귀가 그의 유일한 재산이자 유일한 노동력이나 다름없습니다. 고아의 나귀를 약탈하는 행위는 고아의 생명을 위협하는 것이었습니다.

원문에는 소 앞에 멍에 메인이라는 수식어가 있습니다 소는 농경에 필요한 황소를 가리킵니다. 볼모잡다는 담보물로 속박하다는 뜻으로 과부의 생활 밑천인 황소를 저당물로 빼앗음을 의미합니다. 악인은 아주 적은 부채를 이유로 과부의 전 재산을 강제로 압류하였습니다. 그들은 의지할 곳 없는 과부의 소유도 빼앗았습니다. 사회적 약자 내지는 소외층인 고아와 과부에 대해서, 율법은 그들의 송사를 억울하게 하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또한 그들의 재산을 전당잡지 말도록 규정하고 있습니다. 함무라비 법전에 따르면 이러한 약한 자들을 탈취하는 행위에는 벌금이 부과되었습니다. 특히 과부와 고아의 물건을 빼앗는 경우엔 두 배의 벌금을 내도록 되어 있습니다.

가난한 자들의 가지고 있는 권리를 빼앗으니 세상에서 학대받는 자가 숨어삽니다. 악인은 빈궁한 자들을 자기들이 다니던 길로부터 밀어내어 방황하도록 만듭니다. 약탈 행위로 인하여 그 길을 마음대로 다닐 수 없게 만듭니다. 가난한 자들은 압제자들에 의해 길에서마저 쫓겨 다녀야했습니다. 그들은 압제를 피하여 땅에서 숨을 곳을 찾았습니다. 이는 사회적 약자들에 대한 지배자의 억압이 얼마나 심했는가를 깨닫게 합니다. 그들은 그 억압과 착취를 피하기 위해 은둔의 삶을 살아야 했던 것입니다.

이렇게 죄를 짓는 자들이 심판을 받지 않고 오랫동안 잘만 사는 것 같습니다. 학대하는 자들이 있으면 학대받는 자들이 있습니다. 학대받는 자들은 거친 광야의 들나귀 같아서 나가서 뼈빠지게 일합니다. 먹을 것을 부지런히 구해야 겨우 먹고 삽니다. 먹을 것이 없어 빈들에서 곡식을 거두고 남은 것을 주워 먹으며 살아갑니다.

욥은 피압제자들의 상황을 묘사합니다. 험난하고 메마른 스텝 지역에서 소량의 먹이를 찾기 위해 헤매고 다니는 들나귀의 모습에다 비겨 생생하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광야는 건조한 땅 사막을 말합니다. 가난한 자들은 배고파서 칭얼대는 자식들의 음식을 구하기 위해 찾아 나설 곳이라고는 광야 밖에 없었습니다, 약자들이 사회의 공동체에서 소외되었을 뿐만 아니라, 생존에 필요한 음식조차도 마음대로 구할 수 없는 참혹한 현실에 허덕이고 있었습니다. 분명 욥의 눈에는 이런 비참한 상황이 사악한 자들의 압제로 인한 결과로 보였습니다.

자신이 그들과 비슷한 처지에 있다고 생각한 욥은 그러한 불의를 가만히 두고 계시는 하나님에 대해서 불평하고 있는 것입니다.

약자들은 밭에서 소가 먹는 꼴을 베어 먹고 살아갑니다. 가난한 자들이 허기를 견디지 못해 도둑질을 하게 되는 상황에까지 이릅니다. 남의 것을 혼합된 가축 사료로 해석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가난한 자들은 먹을 것이 없어 가축 사료로나마 배를 채워야 했습니다. 약자는 악인이 남겨둔 포도를 따서 먹으며 겨우 입에 풀칠합니다. 가난한 자들이 심지어 악인의 밭에 남겨진 것을 먹어야 할 정도로 비참한 꼴이 되었습니다.

가난한 자들을 위해 수확을 얼마 남겨두는 규정은 율법에도 있습니다. 그러나 악인이 가난한 자를 위해 열매를 남겨 두지 않았습니다. 약자들이 악인의 곡식을 모아봤자 가족의 굶주림을 해결할 만큼 충분하지는 못했을 것입니다. 더구나 악인이 가난한 자들을 착취하고 괴롭힌 자들이었다는 점에서 그들의 괴로움이 더욱 가중되었습니다. 약자들은 의복이 없어 벗은 몸으로 밤을 춥게 지내야합니다. 추워도 덮을 이불이 없습니다.

6절에 이어 본절과 8절에서는, 인간생활에 있어 가장 기본적으로 필요한 의식주 문제가 해결되지 않음으로 인해 비참하게 살아가는 모습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가난한 자들은 먹을 음식뿐만 아니라 의복이 없어서 추위에 몸을 떨면서 밤을 지새워야 했습니다. 그들은 악인들에게 볼모잡힌 것을 돌려받지 못한 때문에 추위에 떨어야 했습니다. 산중에서 소나기를 만나도 우산이 없어 옷이 젖습니다. 그들은 집도 없고 소나기를 피할 곳은 바위 밑밖에 없습니다. 그들은 마땅한 은신처가 없어서 산으로 피하지만 거기에서도 소나기에 흠뻑 젖어 어찌할 바 모릅니다. 소나기는 맹렬하고 거센 폭풍우를 가리킵니다. 약자들은 편안히 쉴 곳이 없어서 바위라도 의지하여 추위와 소나기를 피하여야 했습니다. 약자들이 찬 바람과 산중 소나기로부터 보호해 줄 구석을 찾는 것입니다. 이처럼 바위 밑에 몸을 숨기는 것은 아마 그들이 바위 밑에 천막을 치고 살거나 아니면 바위 밑 동굴에 거주하였기 때문인 듯합니다.

의인은 이렇게 고통을 당해도 하나님은 의인을 지켜주시지 않는 것처럼 보입니다. 이 세상의 현실만 보면 하나님이 공의롭지 않은 것처럼 보입니다. 악인은 떵떵 거리며 잘 살고 의인은 고통합니다.

 

(악인의 횡포들)

 

어떤 사람은 고아를 어머니의 품에서 빼앗으며 가난한 자의 옷을 볼모 잡으므로 그들이 옷이 없어 벌거벗고 다니며 곡식 이삭을 나르나 굶주리고 그 사람들의 담 사이에서 기름을 짜며 목말라 하면서 술 틀을 밟느니라.”(9-12)

 

욥은 계속하여 악인의 횡포와 약자의 고통을 고발합니다. 어떤 악인은 가난한 자가 빚을 갚지 않는다고 자녀를 어머니 품에서 빼앗습니다. 어미 품은 어미의 젖가슴을 의미합니다. 빼앗다는 벗기가 잡아채다 강탈하다의 뜻입니다. 악인들은 아직도 어려서 어미의 젖을 먹고 있는 아이를 강제로 빼앗습니다. 무자비한 채권자들이 아비 없는 아이를 그 어미가 빚을 갚을 시간도 주지 않고 담보물로 빼앗아 갔습니다.

고대에는 어린아이들이 가치 있는 재산으로 인식되었는데, 채권자들은 아직 젖도 떼지 아니한 아이들을 데려다가 노예로 삼고 돈을 버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이것은 괴로운 처지에 있는 자들로부터 부당한 이득을 취하는 포악한 행위로서 그들에게 고통을 더 가중시켰습니다. 잠잘 때 덮고 자는 옷을 볼모 잡기도합니다. 옷은 가난한 자의 아이로 번역하는 곳도 있습니다(KJV). 가난한 자가 돈이나 곡물로 부채를 갚기도 전에 채주들은 그들의 유아들을 담보물로서 압류한다는 의미가 적당합니다. 볼모잡는 것은 압류 탈취하다의 뜻 뿐 아니라 파괴하다 멸망하다의 뜻이 있습니다. 본문을 사악한 자들이 자기들의 이익만을 위하여 가난한 고아와 과부들의 삶을 파괴시키는 것입니다.

가난한 사람들은 옷이 없어서 벌거벗고 다닙니다. 이미 7절에서 비천한 자의 헐벗는 모습을 묘사한 바 있는데, 7절이 추위를 막을 따뜻한 옷의 결핍을 말한다면, 10절에서는 노동자들이 안전사고에 대비한 작업복마저 입지 못하는 형편을 가리킵니다. 욥은 압제자의 비정한 착취의 한 단면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압제자들은 그들의 일을 억압적으로 가난한 자들에게 시켰지만 그에 필요한 어떠한 대가나 보호해줄 의무에 대해서는 무관심하였습니다. 곡식 이삭을 나르는 노동을 하면서도 그 곡식을 먹지 못하여 배를 곯습니다. 그들은 굶주림을 당하면서도 곡식단을 날라야만 하였습니다. 압제자들은 짐승들에게도 금지해서는 안 될 일을 가난한 자들에게 행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노동의 삯을 주지 않고 일을 시키는 것입니다.

이러한 불의는 성경에서 매우 중요하게 취급하여 정죄하고 있습니다. 약자들은 압제자들의 담 안에서(KJV, within their walls) 올리브 기름을 짜며, 포도주 틀을 밟고 있습니다. 압제자들의 매우 철저하고 혹독한 감독이 시행되고 있는 그들의 정원 안에서 비천한 자들이 학대를 당하고 있습니다. 이들은 비록 포도주의 틀을 밟고 있지만 가장 가깝게 있는 포도즙으로 갈증을 해소시킬 수 없을 만큼 혹독한 탄압을 받았습니다. 성 중에서 죽어가는 사람들이 신음하며 상한 자가 부르짖으나 하나님이 그들의 참상을 보지 아니합니다.

이제 욥은 도시 가운데서 행해지는 강포와 불의에 대해 언급합니다. 사람들은 압제자의 횡포로 인해 거의 죽게 되었습니다. 치명적인 상처를 입은 자가 신음하며 부르짖어 외치고 있습니다. 상한 자가 부르짖는 것은 히브리어 원문을 직역하면 부상당한 자의 영혼이 부르짖는 것입니다. 상한 자는 단순한 부상이 아닌 치명적인 상처로 거의 죽게 된 자를 가리킵니다. 억울하게 습격당하여 거의 죽게 된 자들이 매우 처절하게 도움을 호소하고 있습니다. 참상(불의)은 어리석은 짓을 뜻합니다. 여기서는 사악한 범죄 행위, 또는 도덕 질서를 깡그리 무시해 버리는 행위를 뜻합니다. 사악한 자들이 도덕 질서, 또는 신적 법칙을 조롱하고 비웃고 있습니다. 그들은 그런데도 징벌을 당하지 않은 채 이 땅에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약자들의 기도를 들은 체도 않으십니다. 결국 욥은 이 땅에 폭력과 억압이 계속되고 정의가 짓밟히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잠잠하시다는 것을 항변하고 있는 것입니다. 욥은 이러한 성읍 내에서의 불의와 압제의 현실을 고발하고 있습니다. 성중에서 죽어가는 사람들이 고통하며 신음하며 부상을 당한 자가 아파서 부르짖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그들의 참상을 돌아보지 않습니다. 욥은 하나님이 심판의 때를 정하지 않아서 어느 때에 심판하는지를 모른다고 합니다. 한시적으로 보면 이 세상은 불공평한 것처럼 보입니다. 의로운 욥은 고난 가운데 있고 악한 사람들은 잘 살아가는 것이 현실입니다.

 

(밤을 좋아하는 악인들)

 

또 광명을 배반하는 사람들은 이러하니 그들은 그 도리를 알지 못하며 그 길에 머물지 아니하는 자라. 사람을 죽이는 자는 밝을 때에 일어나서 학대 받는 자나 가난한 자를 죽이고 밤에는 도둑 같이 되며 간음하는 자의 눈은 저물기를 바라며 아무 눈도 나를 보지 못하리라. 하고 얼굴을 가리며 그들은 아침을 죽음의 그늘 같이 여기니 죽음의 그늘의 두려움을 앎이니라.” (13-17)

 

악인 가운데는 광명을 배반하고 어둠을 좋아하는 자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공의를 행하지 않고 불의를 행하는 자들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도리를 알지 못하며 하나님의 길에 머물지 않는 자들입니다. 이제 욥은 앞서 언급한 사악한 자들 외에 또 다른 부류의 악인들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빛을 반역하고 어두움을 사랑하는 자들입니다. 이들은 십계명의 제 6, 7, 8,계명을 어기는 살인자들, 간음자들, 밤도둑들입니다.

이런 부류의 악인들이 가지는 공통된 특성은 광명을 미워하고 어두움으로 덮여진 은밀한 죄악을 남몰래 행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밤과 어두움이 그들의 악한 행위를 감춰줄 수는 있지만 하나님 앞에서는 아무것도 숨길 수 없음이 분명합니다. 광명을 배반하는 사람들은 자연의 빛, 율법의 빛, 양심의 빛을 배반하는 자들입니다. 세상의 빛으로서 하나님을 반역하는 자들입니다. 배반하는 것은 다른 사람을 대항하여 싸우는 것을 가리킵니다. 악인들은 빛을 싫어하는 자들뿐만 아니라 빛의 원수들을 말합니다. 악한 자들이 빛의 길에 익숙하지 못할 뿐 아니라 아예 그것에 대한 지식을 얻으려 하거나 그 유익에도 전혀 관심을 기울이지 않습니다. 악인들은 자기들의 사악한 범죄 행위가 드러나지 않도록 어두움 가운데서 계락과 음모를 꾸밀 뿐, 그것이 발각될 우려가 있는 밝은 곳은 어디든지 가까이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빛의 길에서 평안함을 느끼지 못하며 삶과 진리의 근본이 빛에 있음을 깨닫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설령 빛의 고상함과 의로움을 발견한다할지라도 그들은 돌이키지 아니합니다.

악인들은 밝을 때에 일어나서 가난한 자를 죽이고 밤에는 도둑같이 되어 남의 재산을 훔칩니다. 새벽은 동이 트기 전의 캄캄한 어둠의 때를 가리킵니다. 악인은 인적이 드물고 주위가 캄캄한 때를 골라, 생계를 해결하기 위해 일찍부터 기동하는 궁핍한 자들을 습격하여 약탈하고 죽입니다. 죄를 짓는 자는 밤을 좋아하고 낮을 싫어합니다. 간음하는 자, 남의 집에 들어가 밤에 도둑질하는 자는 아침을 싫어합니다. 간음하는 자의 눈은 저물기를 바랍니다. 악인들은 은밀하게 행하기를 원하는 음탕한 마음을 갖고 있습니다(7:9). 저물 때는 해질 무렵, 곧 땅거미가 지는 어스름한 황혼 무렵을 가리킵니다. 결국 본문은 음행의 수치와 그 죄를 감추기 좋은 어두움이 빨리 오기를 기다리는 간음자의 특성을 보여줍니다.

그는 얼굴을 가면으로 가려서 보이지 않게 하고 있습니다. 그는 자신을 위장합니다. 팔레스틴에서는 마스크 같은 것이 알려진 바 없다는 사실을 들어 기혼 여성들이 얼굴에 착용했던 베일로 볼 수도 있습니다. 간음자가 여자의 옷으로 변장하여 남의 눈에 띄지 않도록 했습니다. 이러한 위장은 밤에 더욱 용이했을 것입니다. 어둠을 틈타 집을 뚫는 자는 낮에는 잠그고 있으므로 광명을 알지 못합니다. 어둠을 좋아하는 자는 어둠을 틈타 온갖 죄를 짓습니다. 문을 잠근 것은 자물쇠로 문을 잠가두는 것을 의미합니다. 도적들이 낮에는 자신의 안전을 위하여 자기 집의 문을 잠그고 몰래 숨어 있습니다. 악인들은 빛과의 사귐 또는 교제가 전혀 없었습니다.(13절과 비교하라). 그들은 빛의 길에 익숙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빛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오히려 어두움 속에서 어두운 일을 행하며 어두움과 밀접한 교제를 나눕니다.

예수님은 세상의 빛이신 자신을 따르는 자는 어두움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는다고 하셨으며, 나아가 어두움에 붙잡히지 않도록 빛의 아들이 될 것을 교훈하셨습니다(12:35. 36). 그들은 아침을 죽음의 그늘과 같이 두렵게 여깁니다. 그들은 밤을 편하게 생각합니다. 그들은 아침이 오는 것을 죽음같이 여깁니다. 다른 사람들이 활동하는 낮은 그들에게 발각될 위협을 가져오지만, 다른 사람들이 잠드는 깊은 밤은 그들에게는 아침처럼 활동하기 좋은 환경이 됩니다. 도적들은 그들의 악한 행위를 숨겨주는 어둠이 올수록 기뻐하면서 비로소 활동을 시작합니다. 흑암을 죽음의 그림자(shadow of death)로 번역하여 간접적으로 도적들의 파멸적인 결과를 묘사하기도 합니다.

깊은 밤이 도적에게는 아침과 같기 때문에 그들은 밤의 위협적인 두려움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들은 밤에 너무나도 익숙하여 밤의 두려움에 놀라지 않고 도리어 그런 위험을 미리 예견하고 피하는 것에 능합니다. 그들은 어두움의 특성을 노련하게 이용하여 사람들의 집을 뚫고 재산을 훔치는 데 교묘하고 능란합니다. 이와 같이 어두움에 깊이 빠졌기 때문에 그들은 빛과의 사귐을 갖지 못하는 것입니다. 흑암의 두려움이라는 말을 볼 때 그들이 공개적으로 처벌을 받지 않더라도 끊임없는 공포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사망 또는 수치의 공포가 심판의 일부분으로서 그들에게 행해진다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욥은 하나님이 악한 자들을 어느 때에 심판하지 않으신다고 말했습니다. 의인은 고난을 받고 악인은 번성하는 것을 보며 욥은 고민합니다. 그는 불의한 하나님에 대하여 원망합니다. 그러나 욥은 말을 하다가 하나의 깨달음을 얻습니다. 하나님께 털어놓고 기도할 때 하나님이 깨달음을 준 것 같습니다.

욥의 고민은 하박국의 고민이기도 하였습니다. 왜 이스라엘의 죄악을 심판하지 않는가? 이스라엘을 심판하되 왜 하나님을 믿지 않는 이방인을 통해서 하는가? 라는 질문입니다. 하박국은 그런 질문 가운데 하나님을 알았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깨달았습니다. 하나님을 신뢰해야함을 알았습니다. 하나님의 심판과 구원을 믿음으로 기다리며 살아야한다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욥도 그런 깨달음을 얻고 있습니다. 그는 믿음으로 인내해야함을 깨닫고 있습니다.

 

(악인이 받을 저주)

 

18-20절을 보십시오. “그들은 물 위에 빨리 흘러가고 그들의 소유는 세상에서 저주를 받나니 그들이 다시는 포도원 길로 다니지 못할 것이라. 가뭄과 더위가 눈 녹은 물을 곧 빼앗나니 스올이 범죄자에게도 그와 같이 하느니라. 모태가 그를 잊어버리고 구더기가 그를 달게 먹을 것이라. 그는 다시 기억되지 않을 것이니 불의가 나무처럼 꺾이리라.”

 

이제부터 욥은 악인들이 받을 심판을 말합니다. 악인은 물 위에 떠내려 갑니다. 악인들의 존재는 물 위에 떠서 빨리 흘러가 보이지 않는 물체처럼 쉽게 잊혀지고 맙니다. 그들의 소유는 세상에서 저주를 받습니다. 그들은 포도원은 저주 받아서 다시 포도원 길로 다니지 못합니다. 가뭄과 더위가 눈 녹은 물을 빼앗듯이 범죄자도 죽음을 당합니다. 뜨거운 태양이 눈을 녹이고 물을 증발시키듯이 음부가 악인을 재빨리 채갑니다.

하나님은 악인을 반드시 심판하십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재림하시는 그날을 중심으로 악인을 보아야 합니다. 악인을 낳은 어머니도 그를 잊어버리고 구더기가 그를 달게 받아 먹을 것입니다. 본문의 어머니와 구더기가 서로 대조를 이루어 악인의 비참한 결말을 강조합니다. 악인은 맹목적이라 할 정도로 강렬한 어머니의 사랑으로부터조차 버림을 받으며 그를 가까이하고 달려들 자는 구더기밖에 없습니다. 지옥에는 구더기가 들끓습니다. 악인들은 지옥의 형벌을 당합니다. 그들은 다시 기억되지 않고 불의도 잘린 나무처럼 꺾어지고 말 것입니다.

 

(익인의 삼펀울 확신하는 욥)

 

그는 임신하지 못하는 여자를 박대하며 과부를 선대하지 아니하는도다. 그러나 하나님이 그의 능력으로 강포한 자들을 끌어내시나니 일어나는 자는 있어도 살아남을 확신은 없으리라. 하나님은 그에게 평안을 주시며 지탱해 주시나 그들의 길을 살피시도다 그들은 잠깐 동안 높아졌다가 천대를 받을 것이며 잘려 모아진 곡식 이삭처럼 되리라 가령 그렇지 않을지라도 능히 내 말을 거짓되다고 지적하거나 내 말을 헛되게 만들 자 누구랴”(21-25)

 

사악한 자의 생전에 저지른 죄악의 실상이 밝히 증거되고 있습니다. 욥이 불의한 현실을 명백하게 고발하고 있습니다. 악인은 임신하지 못하는 여자를 박대합니다. 과부를 선대하지 않습니다. 자식을 낳지 못하는 불쌍한 여인들을 학대하거나 약탈하고 과부를 긍휼히 여기지 않는 사악한 자의 불의한 죄악이야말로 반드시 형벌 받아야 마땅합니다.

물론 욥의 눈에 목격된 현실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의인들이 고난을 받고 악인들은 흥하고 있었습니다. 또한 욥 자신도 이런 체험을 하였습니다. 욥은 이런 현실을 보며 욥은 하나님의 심판을 기다리며 믿음으로 살아야한다는 결론에 이르렀습니다. 욥은 하나님의 공의가 반드시 실현될 것을 믿습니다. 욥은 하나님이 악인을 심판하실 것을 바라봅니다.

강한 자들은 자기 자신의 힘만 의지하는 교만하고 대담스러운 자들입니다. 그들은 자신의 힘만 믿고 하나님의 뜻을 완고하게 거역하는 자들입니다. 하나님은 이들을 끌어내십니다. 하나님이 한번 일어나시면 하나님의 심판 앞에서 살아남을 자는 없습니다. 하나님은 잠시 악인들에게 평안을 주시지만 그들의 길을 살피십니다. 그들은 잠깐 동안 높아졌다가 천대를 받습니다.

하나님이 잠시 악인들의 피난처가 되어 그들로 하여금 (악한 일에) 담대하게 하시며 또한 그들의 버팀목이 되어 그들을 평안하게 휴식하도록 만드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악인의 행위를 감찰하시고 공의로 심판하십니다.(KJV, yet his eyes are upon their ways). 그들은 잘려 모아진 곡식 이삭처럼 잘리게 될 것입니다. 그들은 높아져도 잠시간에 없어집니다. 하나님은 교만한 악인을 반드시 심판하십니다.

변론의 결론부에 해당합니다. 욥은 자신의 입장을 최종적으로 정리하고 있습니다. 이 변론(23, 24)이 진행되는 동안 욥은 악인의 번성과 의인의 고통이라고 하는 이해할 수 없는 하나님의 섭리로 인해 깊은 회의에 빠져들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욥은 하나님의 주권을 끝내 불신할 수 없었습니다. 욥은 악인의 멸망을 기대하는 강한 기대감으로 자신의 변론을 마무리하고 있습니다. 욥의 말처럼 악인이 현세에서 심판을 받지 않는다할지라도 욥의 말을 거짓되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심판을 내세까지 생각해야합니다. 진정한 심판은 예수님의 재림시에 완성됩니다.

욥은 지금까지 표명한 자신의 입장에 대한 자신감을 갖고 누구든지 공박할테면 해보라고 말합니다. 사실 욥은 그 친구들보다는 자기 자신에게, 또한 자기에게 고통을 주시는 하나님께 항변하며 호소하고 있습니다. 자기의 무죄를 변호해주실 분은 하나님이심을 믿고 있습니다. 또 이 고통의 신비를 깨닫게 하실 분도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인식하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욥의 현재의 소망은 극심한 고통에서 빨리 벗어나는 데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욥은 자신을 향한 하나님의 목적을 아는 것이었습니다. 동시에 자기의 무죄함을 하나님께서 증명해 주시리라고 믿고 있습니다. 반면에 참으로 악한 자들은 하나님이 반드시 심판하실 것을 믿고 있습니다.

욥은 의인으로 고난을 받습니다. 그는 의인이 현세에서 고난을 받고 악인이 잘 사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것을 보면서 친구들이 말하는 인과응보적인 신앙, 기복주의 신앙이 잘못되었음을 전하였습니다. 분명히 기복주의 신앙은 잘못된 것입니다. 그렇다고 하나님의 정의가 사라졌다고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심판은 당장 임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먼 역사적인 안목으로 보면 하나님은 반드시 심판하십니다. 이 세상에서 심판하지 않으면 내세에서도 심판하십니다. 하나님은 마지막 날 심판하십니다. 의인은 마지막 날 반드시 상을 주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공의의 하나님을 믿어야 합니다. 그 정의의 날을 기다려야합니다. 이런 정의가 승리힌 것을 보여주는 것이 예수님의 부활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신 것은 잠시 불의가 이기는 것 같이 보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부활하여 정의가 이긴다는 확실한 것을 보여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재림하는 날 완전한 정의를 세우실 것입니다. 믿음으로 사는 자는 하나님 나라에서 영생하고 죄악을 짓는 자는 지옥에서 영원히 고통할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부활과 하나님의 정의를 믿으며 살아야합니다.

 

(결론 -끝까지 믿음으로 사는 삶)

 

의인이 고난 받는 것은 사실입니다. 악인이 잘 살다 죽는 것도 사실입니다. 우리는 잘사는 자는 신앙생활 잘하고 못사는 자는 신앙 생활 못한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먼 역사적인 안목에서 영원한 세계에서 보면 반드시 의인이 잘되고 악인이 망하는 것이 사실입니다. 욥도 나중에 두 배의 축복을 받습니다. 성경에 영원히 기록되어 존경을 받습니다. 하나님 나라에 상이 있습니다. 악인에 대한 심판이 있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믿어야합니다. 우리는 상주시고 심판하시는 하나님을 믿고 정의가 실현되는 날을 기다려야합니다. 믿음은 보지 못하지만 참고 기다리는 것입니다. 그럴 때 끝까지 믿음으로 살 수 있습니다. 김일성과 김정일을 이 세상에서 행복하게 산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마음에 고통이 있었을 것입니다. 지옥의 심판이 그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우리는 때로 가난하게 살아도 마음에 평안이 있습니다. 마음에 하나님 나라를 맛보며 살아갑니다. 죽은 후에는 하나님 나라에 가게 됩니다. 우리는 이것을 믿어야합니다. 우리는 이것을 믿고 끝까지 믿음으로 살아야합니다. 우리는 아무것도 없고 병이 났을지라도 하나님을 믿고 기뻐하고 뛰놀아야합니다. 하나님을 통해서 힘을 얻어야합니다. 아멘!

 

내 인생에 깊은 문제가 실패의식입니다. 지금까지 하나님은 나에게 큰 은혜를 주셨습니다. 직장에서 승리하게 하시고 평신도로 개척을 섬기고 자립하고 선교사를 파송하고 개척센터를 내어보낼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지금 학생회 역사가 활짝 꽃이 피고 제자들이 굳게 서지 못하고 있습니다. 성경 강해를 끝냈으면 세계에서 말씀을 듣고자 몰려올 줄 알았는데 현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그러나 분명히 하나님은 나에게 이사야 5555절 말씀을 약속의 말씀으로 주셨습니다. "보라 네가 알지 못하는 나라를 네가 부를 것이며 너를 알지 못하는 나라가 네게로 달려올 것은 여호와 네 하나님 곧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이로 말미암음이니라 이는 그가 너를 영화롭게 하였느니라" 결국 성경 66권 강해를 완성했지만 제가 그 말씀대로 경외심을 갖지 못한 것이 문제였습니다. 하나님은 지금 나에게 경외심을 심고 있습니다. 지금은 매일 경외심을 갖고자 투쟁하고 있습니다 작은 일에 성령님을 존중히 여기며 주님의 이름을 높이고자 하였습니다. 이제 성령의 강물이 흐르고 있습니다. 이런 것이 시작이 되어 주님이 우리 가정과 교회에 주인이 되고 이곳에 천국의 모형을 만들고, 세계에서 양들이 몰려오게 하실 줄을 믿습니다. 아멘!

욥기 24장 강해 구더기가 악인을 달게 먹을 것이라

말씀 욥기 241-욥기 2425

요절 욥기 2420절 모태가 그를 잊어버리고 구더기가 그를 달게 먹을 것이라. 그는 다시 기억되지 않을 것이니 불의가 나무처럼 꺾이리라.

욥기 24장 강해 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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