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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주의 대학생 선교기관

천안UBF

성경66권강해서

이사야 53장 강해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작성자 : 오요한
작성일 : 2012-01-18 00:00:00
조회수 : 7,283

문제지풀이(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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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야 53장 강해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이사야 531-이사야 5312

요절 이사야 535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째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이사야서를 가리켜 구약의 복음서라고 말합니다. 특히 53장은 복음의 진수라고 불리워집니다.. 이사야서는 예수님이 태어나기 700년 전에 예수님의 십자가를 눈에 보는 것 같이 생생하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십자가에 못박히시는 의미를 성경의 어느 곳보다 분명하게 말해주고 있습니다. 이사야는 외칩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이 시간 대속의 십자가를 깊이 영접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믿을 수 없는 일들)

 

1절을 보십시오. "우리의 전한 것을 누가 믿었느뇨? 여호와의 팔이 뉘게 나타났느뇨?"

 

이사야가 자신이 본 왕을 전합니다. 고난의 왕을 전합니다. 사람들이 믿기 어려운 복음입니다. 우리의 전한 것은 이사야를 비롯한 선지자들이 전한 십자가의 복음을 말합니다. 여호와의 팔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시고 권능으로 부활하시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사야는 예수님이 오시고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신 사건을 누가 믿었느가? 이 사건이 누구에게 나타났느뇨? 탄식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십자가의 복음을 영접하는 것이 얼마나 믿기 힘든 일인가 보여줍니다. 합리적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일들입니다. 하나님이 십자가에 죽으셨다는 것은 우리의 상식이나 이성을 초월한 사건입니다. 우리가 복음을 믿게 된 것은 하나님의 큰 은혜입니다.

우리는 가끔 다른 사람을 위해 목숨을 버린 사람들의 놀라운 소식을 듣게 됩니다. 몇 년 전 결혼 날짜까지 받아 놓았던 시골 노총각이 강에서 어린이 둘을 구하다가 죽은 사건이 있었습니다. 다른 사람을 위해 살신성인하는 그의 모습은 많은 사람에게 감동을 주었습니다. 단대에 최덕수 열사가 자신의 몸에 불을 지르고 분신 자살을 하며 독재 정권에 항거한 것도 단대 학생은 물론 많은 다른 대학 학생들에게 놀라움을 주었습니다. 이렇게 옳은 일을 위해 목숨을 바치는 사람들은 가끔 있습니다.

그러나 세상 어디에서도 원수를 위해 자기 외아들을 속죄제물을 내어 주었다는 말은 없습니다. 이런 일은 인간 세상에서는 상상할 수도 없는 이야기입니다. 자기를 미워하는 사람을 양자로 삼었다는 말도 들을 수 없는 이야기입니다. 더구나 하나님이 육신을 입고 오셔서 십자가에 피조물을 위해서 죽으신 것도 놀라운 일입니다. 하나님께서 자기를 배반하고 거역한 죄인들을 위해서 자신의 독자를 대신 죽게 하셨습니다. 어떻게 하나님께서 죄인들을 위해서 자신의 외아들을 대신 죽게 하실 수 있단 말입니까? 이것은 인간이 생각하지 못한 것이요 사탄도 생각하지 못한 것입니다. 이것을 안 이사야는 외치고 있습니다. "우리의 전한 것은 누가 믿었느뇨? 여호와의 팔이 뉘게 나나탔느뇨?" 그러면 하나님이 보내신 예수님의 모습은 어떠합니까?

 

(볼품 없는 예수님)

 

2절을 보십시오.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줄기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의 보기에 흠모할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

 

이사야는 예수님의 외모와 인간 조건이 어떠했는가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근본 하나님이십니다. 예수님은 만왕의 왕이십니다. 예수님은 만백성들로부터 영광과 존귀를 받기에 합당하신 분이십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어떤 모습으로 오셨습니까? 예수님은 가난한 목수 요셉과 비천한 마리아에게서 태어났습니다. 당시는 로마의 가이사 아구스도가 유대를 식민 통치하고 있었습니다. 가이사 아구스도를 세금을 걷기 위해 로마 전역에 호적명령을 내렸습니다. 요셉과 마리아는 갈릴리 나사렛에 살았지만 호적을 하러 유대 베들레헴으로 갔습니다. 그러나 그곳에 누구도 빈방을 내어주지 않았습니다. 그만큼 예수님은 가난하고 힘없는 자의 모습으로 오셨습니다.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거들떠 보지도 았았고 세상 사람들은 예수님이 오시는 줄도 몰랐습니다. 다만 목동 몇 명과 동방에서 온 현자 몇 사람이 다녀갔을 뿐입니다. 그렇게 예수님은 인정과 존귀와 영광을 받지 못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외모는 연한 순과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줄기 같았습니다. 순은 연합니다. 원래 옻나무의 잎파리는 뻣뻣하여 먹지 못합니다. 그러나 옻이 처음 나올 때는 순하되 순하여 삶아서 간장이나 된장에 묻혀 먹어도 됩니다. 예수님은 연한 순과 같은 어린 아기의 모습으로 오셨습니다. 만왕의 왕 하나님께서 천군 천사의 호위 아래 백마를 타고 불로서 오시지 않으시고 어린 아기의 모습으로 오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마른 땅에서 자라는 줄기처럼 자라셨습니다. 마른 땅에서 나온 줄기는 수분과 영양분을 충분히 공급받지 못해서 비비 틀어져 있습니다. 볼픔 없고 초라합니다. 예수님은 가난한 집에서 자라나셔서 치킨 소세지 햄버거 피자를 드실 수 없었습니다. 당시에 가난한 사람들은 하루에 한끼 정도 먹었다고 하니 예수님도 삼순구식하며 근근히 입에 풀칠하며 사셨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잘 못드셔서 빼빼 마르셨습니다. 옷도 여기 저기 기운 옷을 입으셨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이 치인표나 정우성과 같이 키가 크고 핸썸해서 인기가 있었을 것처럼 생각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고운 모양도 풍채도 없었습니다. 인간적인 모습은 약골처럼 보였습니다. 예수님이 이렇게 오신 이유는 가난하고 연약한 자들의 친구가 되시기 위해서입니다. 인간의 아픔과 연약함을 체험하시기 위해서입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체휼하지 아니하는자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 같이 시험을 받은 자로되 죄는 없으시니라."(4:15)

 

(버림 받으신 예수님)

 

3절을 보십시오. "그는 멸시를 받아서 사람에게 싫어 버린 바 되었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에게 얼굴을 가리우고 보지 않음을 받는 같아서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십자가를 볼 때 감동을 받는 것입니다. 십자가를 보며 내가 이미 받은 사랑이 얼마나 놀라운가를 깨닫는 것입니다. 사도요한은 예수님과 삼년 동안 동행하고 십자가를 보았습니다. 예수님을 보니 하나님의 아들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다고 하였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십자가를 보며 하나님의 사랑을 생각합니다. 하나님은 십자가를 보며 내가 이처럼 내가 너를 사랑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십자가를 통하여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구체적으로 깨닫습니다. 내 죄가 이만큼 크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동시에 너를 살리기 위해서 내가 값을 지불했다고 하십니다. 내가 이만큼 희생했다고 하십니다.

남편이 죽고 유복자를 낳았습니다. 회사에 아이를 숙직실에 놓고 일을 하였습니다. 어머니는 불이 나자 숙직실에 들어가 아이를 안고 나왔습니다. 25살도 안 된 여자가 곰보가 되었습니다. 아이가 크면서 보니까 우리 엄마는 못생겼습니다. 그는 왜 아이는 곰보냐고 합니다. 초등학교 다니는 아이가 아이들과 싸우는데 다른 아이가 네 엄마가 곰보라고 합니다.

엄마는 자초지종을 말합니다. 아이는 이 말을 듣고 다른 아이가 엄마를 욕하면 우리의 엄마가 최고 예쁘다고 합니다. 아이는 엄마의 곰보 얼굴을 보면 어머니의 사랑을 느낍니다. 우리는 십자가를 보면서 부끄러워하지 않고 자랑합니다. 십자가를 통하여 나의 죄를 발견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느낍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이 병을 고쳐주고 빵을 주실 때는 좋아하고 따라다녔습니다. 예수님을 왕으로 추대하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그들을 로마의 억압에서 해방시켜 주지 않으시고 그들에게 계속하여 빵을 주시지 않자 예수님을 멸시하고 싫어 버렸습니다. 여기서 싫어버린 바 되었다는 것은 문둥이가 진 밖으로 쫓겨나듯이 쫓겨난 것을 의미합니다. 사람들은 중풍병자나 소경에게는 일말의 동정심을 갖습니다. 그러나 문둥병자는 조금도 동정하지 않습니다. 문둥병자를 보면 돌을 던지고 소금을 뿌립니다. 예수님이 문둥병자처럼 사람들에게 버림 받는다는 것은 큰 고통입니다. 이지매를 당하는 학생들 중에는 견디지 못하고 자살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처럼 예수님은 사람들에게 버림 바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간고 곧 가난의 고통을 아셨습니다. 예수님은 사글세방도 없이 노숙자의 삶을 사셨습니다. 예수님은 질고 곧 질병의 고통도 아셨습니다. 예수님은 문둥병자나 죽은 청년을 살리실 때 불쌍히 여기셨다고 나옵니다. 이는 그들의 고통에 동참하셨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의 식사를 섬겨드리는 사람이 특별히 있었던 것도 아닙니다. 예수님은 가난한 자의 슬픔, 병든 자의 슬픔을 아시는 분이십니다.

 

(멸시 받으신 예수님)

 

예수님이 받는 멸시와 고난은 십자가를 앞두고 더욱 심해졌습니다. 시기심 많은 대제사장과 서기관들은 예수님을 신성모독죄로 사형 판결을 내렸습니다. 그 때 하속들은 예수님의 머리를 툭툭치며 빈정거렸습니다. "얼어죽을, 네가 무슨 그리스도냐?" 어떤 자들은 가래침을 뱉었습니다. "에이 재수 없어!" 이를 지켜보고 있다가 개선 장군처럼 뛰어 나온 한 사람은 예수님의 뺨을 철석철석 갈겼습니다. 예수님은 얼굴을 가리우고 보지 않음을 받는 자가 멸시를 받듯이 많은 멸시를 받았습니다. 삽시간에 벌떼처럼 모여든 무리들은 "죽여라. 죽여라" 소리를 쳤습니다.

예수님은 무리들로부터 간고를 많이 겪었습니다. 종교지도자들의 모임인 산헤드린 집단에서 예수님을 사형판결하고 예수님을 로마 총독 빌라도에게 넘겼습니다. 빌라도는 무리에게 만족을 주고자 예수님께 채찍질을 하여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도록 넘겨 주었습니다. 당시에 채찍은 여섯 개의 가죽 끈으로 되었고 그 끝에는 납조각과 쇠조각이 달려 있어서 채찍에 맞을 때마다 살점이 떨어져나가고 피가 흘렀습니다. 로마 군병들은 온몸에 피가 낭자한 예수님을 브라드리온이라는 뜰로 데리고 갔습니다. 그리고 입고 있던 옷을 벗겨내고 자색옷을 입혔습니다. 머리엔 굵은 가시가 촘촘히 달려 있는 탱자나무로 만든 가시관을 씌웠습니다. 가시에 찔린 예수님의 이마에는 붉은 피가 흘러 내렸습니다. 또 어떤 군병들은 갈대로 예수님의 머리를 내리치며 희롱했습니다. "짜식아 네가 메시야냐!" 함께 희롱하던 또 한 군병은 닦지도 않은 군화발을 예수님의 어깨에 올려 놓고 코를 잡아당기며 수염을 만지작 거리며 희롱했습니다. 함께 있었던 여러 군병들도 예수님을 군화발로 툭툭 찼습니다. 그들은 연약한 자를 무시했습니다. 이처럼 예수님은 간고를 많이 겪고 멸시를 많이 당하셨습니다.

저자는 우리도 귀히 여기지 않았다고 합니다. 제자들까지도 가난하게 오신 예수님을 멸시하였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받을 멸시를 대신 받으셨습니다. 베드로도 예수님이 십자가를 가르칠 때는 예수님을 책망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왜 이런 슬픔을 겪으셨습니까?

 

(우리의 슬픔을 당하신 예수님)

 

4절을 보십시오.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셨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서 하나님에게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사람들은 예수님이 예수님 자신의 죄 때문에 고난을 당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자신의 죄로 하나님에게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아무 죄가 없으신 분이십니다. 빌라도는 예수님이 죄가 없다고 세 번이나 공식적으로 말했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죄 때문이 아니라 우리의 질고와 슬픔을 위하여 고난을 당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채찍에 맞고 침뱉음을 당하고 구둣발에 채이면서 우리의 고난과 슬픔을 깊이 이해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질고와 슬픔을 체험하셨기 때문에 우리를 도우실 수 있습니다.

우리는 각자 질고와 슬픔이 있습니다. 어떤 분은 자극성 있는 음식을 먹거나 음식을 불규칙적으로 먹어서 위와 장을 버린 사람이 있습니다. 술을 고래처럼 먹어서 간경화에 걸리거나 줄담배를 피워서 폐암에 걸린 사람도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산업사회에서 인간관계 파괴로 고독의 병을 앓고 있는 사람도 있고 경쟁 사회에서 시달리다가 노이로제나 우울증이나 공황장애와 같은 정신적인 질병에 걸린 사람도 있습니다. 어떤 분은 사랑하는 사람과 이별하고 상사병에 걸린 사람도 있습니다. 뿐만아니라 이를 닦지 않아서 치통으로, 발을 닦지 않아서 무좀으로, 도서관에 너무 오래 앉아 있어서 치질로 고통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 외에도 수많은 병이 있습니다.

또한 우리에게는 슬픔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학과성적이나 취업 실패로 인한 슬픔을 가진 사람도 있습니다. 극한 가난으로 인해 눈물 젖은 빵을 먹으며 슬픔을 당한 사람도 있습니다. 또한 아버지나 어머니가 일찍 돌아가시거나 부모가 이혼하여 슬픈 사람도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어렸을 때 죄의 상처로 슬퍼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예기치 않은 사고로 사랑하는 사람을 잃고 슬퍼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사고로 장애를 당하여 고통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맞벌이 하시는 부모님들로 인하여 부모님의 사랑을 받지 못하고 슬퍼하는 자녀도 있습니다. 남자친구나 여자 친구가 없어서 슬퍼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양들에게 버림 받아서 슬퍼하는 목자도 있고 목자로부터 사랑을 받지 못해 슬퍼하는 양도 있습니다. 키가 작거나 못생긴 외모로 슬퍼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여러 가지 이유로 슬퍼하고 고통스러워합니다.

과연 누가 우리의 병과 슬픔을 치료해 줄 수 있습니까? 친구나 부모님이 해결해 줄 수 있습니까? 남편이나 아내가 해결해 줄 수 있습니까? 친구가 해결해 줄 수 있습니까? 해결은 고사하고 이해도 잘못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우리의 고통과 슬픔을 이해하시고 해결해 주실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의 이런 질고를 지고 슬픔을 당하셨습니다. 이제 우리는 예수님 안에서 건강한 사람, 기쁜 사람이 되었습니다. 예수님만이 우리의 질병과 슬픔의 진정한 치료자가 되십니다.

예수님의 고난은 이것으로 그친 것이 아닙니다. 통일교는 예수님의 십자가가 실패하였다고 합니다. 통일교는 메시야는 부자여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들은 십자가를 모독합니다. 그들은 십자가를 비웃습니다. 그러므로 통일교는 기독교가 아닙니다. 참사랑이 비웃음을 당합니다. 사랑하는 마음으로 참는데 능력이 없어서 몰라서 참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사랑 때문에 멸시를 받습니다. 멸시를 받고 불만이 있으면 사랑이 아닙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서는 아무리 멸시를 받아도 좋습니다. 더 못 참으면 사랑이 아닙니다. 사랑받는 자 편에서는 사랑하는 자를 멸시하면 사랑이 아닙니다. 나를 잘 되게 하기 위해서 참는 것을 이해해야 합니다. 그때 사랑의 생명력이 작동합니다.

홀어머니는 아버지 없이 키우며 고생을 많이 합니다. 자식된 도리에서는 어머니를 볼 때마다 감사해야합니다. 그것이 모자간의 사랑입니다. 사랑이 없는 사람은 왜 나를 낳았느냐 왜 낳고 고생하느냐고 합니다. 그는 패륜아입니다. 십자가의 예수님을 보고 저주를 받았다고 하면 그는 사랑을 모르는 패륜아입니다. 우리의 모든 죄악은 그가 담당하셨다는 것을 믿고 깨달아야합니다. 그때 사랑이 능력이 있습니다.

 

(상하신 예수님)

 

5절을 보십시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을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이 말씀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예언한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로마 군병들과 무리들의 멸시와 조롱을 다 받으신 후에 사형장으로 자신이 못박힐 십자가를 지고 가셨습니다. 70Kg이나 되는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을 한 발짝 한 발짝 오르셨습니다. 마침내 한 로마 군병이 큰 망치와 굵은 대못을 가지고 왔습니다. 그리고는 예수님을 발가벗기고 십자가에 뉘었습니다. 로마 군병들은 예수님의 팔과 다리 그리고 머리카락을 움켜잡았습니다. 로마 군병은 망치를 휘두르며 예수님의 팔목과 발목에 굵은 대못을 박았습니다. 예수님의 손목과 발목은 으스러졌습니다. 예수님의 얼굴은 고통으로 일그러졌습니다. 사지가 뒤틀리고 온몸에 경련이 일어났습니다. 피가 분수처럼 솟구치고 피비린내가 코를 진동했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물과 피를 다 쏟으셨습니다. 예수님이 운명하시자 로마 군병이 창으로 예수님의 옆구리를 찔러서 죽은 것을 확인했습니다. 예수님의 옆구리에서는 물과 피가 나왔습니다. 예수님께서 왜 못과 창과 가시에 찔리고 온몸에 상처를 받으셨습니까?

 

(우리의 허물 때문에)

 

5절을 다시 한번 보십시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을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예수님은 우리의 허물 때문에 로마 군병의 창에 찔리셨고 우리 죄악 때문에 대못으로 상함을 받으셨습니다. 우리는 누구나 허물과 죄악이 있습니다. 허물은 그릇된 과실이나 실수 또는 흉을 말합니다. 어떤 사람은 아침에 일찍 일어나지 못하고 방안을 뒹구는 게으름의 허물이 있습니다. 다른 사람들을 전혀 생각지 못하고 자신만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여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주는 자기중심적인 허물이 있습니다. 또한 건망증이 심하여 돈을 꾸었는지, 시험을 언제 보는지도 알지 못하는 허물이 있습니다. 사람들의 눈치 보느라고 분명히 행하지 못하는 우유부단한 성격으로 고통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허물을 인하여 찔리셨습니다.

또한 우리에게는 죄악이 있습니다. 정욕의 죄악으로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주고 자기 자신도 괴로워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불신으로 인하여 부정적인 생각 가운데 살아가는 사람도 있습니다. 미움으로 자신도 악령에 시달리고 다른 사람들의 삶을 황페케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폭풍의 언덕이라는 소설에 보면 미움을 가진 히드클리프에 의해 두 가문이 쑥대밭으로 변하는 사건이 나옵니다. 이기심의 죄악으로 자신의 이익만 생각하다가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는 사람도 있습니다. 도둑질로 양심의 가책을 느끼며 살아가는 사람도 있습니다. 교만으로 다른 사람을 무시하며 다른 사람의 자존심을 상하게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중풍병자와 같이 불평과 무기력의 죄악 가운데서 살아가는 사람도 있습니다. 탐심으로 감사하기보다 원망하고 불평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하나님보다 세상과 자기를 사랑하여 하나님의 마음에 못을 박는 사람도 있습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을 멸시하고 죄를 가볍게 생각하고 함부로 죄를 짓습니다. 죄를 오락이나 취미로 생각하고 죄를 즐깁니다. ‘나만 그런가 다 그런거지하며 죄를 합리화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해서 죄가 얼마나 무서운가를 알아야 합니다. 죄의 삯은 사망입니다. 그 후에는 무서운 심판이 있습니다.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들어가야 합니다. 아무 죄없는 예수님은 이런 죄문제로 인하여 팔과 이마와 허리가 상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찔리신 것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예수님이 상하신 것은 우리의 죄악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대신하여 하나님께 심판을 받으셨습니다. 하나님은 내가 받아야할 모든 죄의 대가를 예수님께 뒤집어 씌웠습니다.

이 시간 우리 대신에 나를 넣어서 5절 말씀을 암송해 보겠습니다. "그가 찔림은 나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나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내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내가 나음을 입었도다." 이 시간 우리의 죄를 대속하신 고난의 주 예수님을 찬양합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고난 받으심으로 우리가 누리게 된 축복은 무엇입니까?

 

(평화를 누리고)

 

첫째로 평화를 누리게 됩니다. 하나님을 떠난 인간에게는 참평화가 없습니다. 죄를 지은 인간에게는 두려움과 불안이 있습니다. 죄와 벌에 보면 라스콜리니코프는 살인의 죄를 지은 후에 극도의 신경과민과 두려움을 앓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통하여 죄사함의 은혜를 받은 사람은 마음에 하나님과 평화를 누리게 됩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을 용서하면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도 평화를 누릴 수 있습니다.

 

(나음을 얻고)

 

둘째로 나움을 입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내 대신 채찍에 맞으셨음으로 질병에서 치료를 받을 수 있습니다. 육신의 질병이 걸렸을 때 이미 나음을 입었다는 약속의 말씀을 의지하여 우리는 치료함을 받을 수 있습니다. 또한 마음의 상처도 내 대신 채찍에 맞으신 예수님을 믿음으로 우리는 치료함을 받을 수 있습니다. 7-9절에는 고난 받으시는 예수님의 자세가 나옵니다.

 

(우리의 죄악을 담당하신 예수님)

 

“6.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예수님을 믿는 다는 것은 나의 짐을 대신 지셨다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우리의 무리의 죄를 그에게 담당시키셨다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대신 죽으셨습니다. 여기에 복음의 핵심이 있습니다. 아무도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서 고난당한 것을 몰랐습니다. 가룟유다는 예수님께 불만이 많았습니다. 가룟유다가 예수를 팔려고 할 때 십자가를 지게 하는 여건으로 몰아놓으면 하나님이 큰 역사를 할 것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빌라도 법정에서 빌라도에게 벼락을 내릴 줄로 생각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아무 말없이 죽습니다. 가룟유다의 생각에는 예수님의 능력으로 왜 죽는지 알지 못합니다. 죽은 자를 살리고 광풍을 잔잔케 하신 예수님이 왜 죽었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는 압니다.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는 죽어야합니다. 예수님을 아무도 알아보지 못하지만 예수님은 우리의 죄를 담당하십니다.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

 

7절을 보십시오.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양과 털깎는 자 앞에 잠잠한 양같이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

 

십자가의 사건을 설명할 때 인용하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의 고난에 대해서 우리는 생각해야합니다. 우리 대신 고난을 당하고 속죄함을 위해서 고난을 당하십니다. 예수님이 우리 죄를 대신한다는 것이 복음의 핵심입니다. 이것이 없으면 구원을 받지 못합니다. 대신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그래서 대속합니다. 이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준 것이 제사입니다. 우리 대신 양이나 염소나 소를 죽입니다. 죄의 값은 사망입니다. 죄를 지으면 벌을 받아야합니다. 전혀 살아날 수 없습니다. 구원받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 죄를 다른 사람에게 담당시키셨습니다. 내가 너를 사랑하기 위해서 이만큼 희생한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오늘날도 이것을 말씀하십니다. 일하지 않고 먹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면 일하고도 못 먹는 사람이 생깁니다. 다른 사람이 대신 고난을 당합니다. 놀고 먹는 사람이 있으면 일하고 못먹는 사람이 있습니다. 만유균형의 법칙이 있습니다. 의인의 고난이 없으면 죄인의 평안은 없습니다. 죄를 지었는데도 평안하면 다른 누군가가 고난을 당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공의입니다.

우리가 죄인임에도 행복한 삶을 사는 것은 누군가가 불행을 당한 것입니다. 그가 대신 고난 당하시고 불행을 담당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죄를 지으면서 평안히 사는 사람이 있는 것입니다. 믿음은 누군가가 대신 고난당한 사람이 있고 내가 있다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자녀들이 일하지 않고 공부하면 나 대신 부모님이 뜨거운데서 일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을 알아야 공부를 잘 합니다. 우리는 거져 받은 은혜 속에서 살아갑니다. 그 은혜를 알아야 새로운 생명력이 작동합니다. 너희를 위해서 많은 고난을 당하는 자가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합니다. 그래야 그의 수고가 의미가 있습니다.

이사야는 고난당하는 자의 모습을 말합니다. 평소에 말이 없고 겸손하고 온유한 사람도 억울하게 고난을 받는다 싶으면 거칠어집니다. 양들을 위해 조금 고난을 받을 때 우리는 알아주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억울하게 고난을 당하여 괴로울 때조차도 그 입을 열지 아니하셨습니다. 자신의 무죄함을 변명하지 않으셨습니다. 우리도 대신 다른 사람을 위해서 고난 당할 때가 있습니다. 자녀나 형제나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서 고난을 당합니다. 그를 높이기 위해서 수고합니다. 고난당하는 입장에서 말이 없어야합니다. 묵묵히 수고해야합니다. 자식들이 철이 나면서 압니다. 부모님이 고생하고 기도하는 것을 은근히 깨닫습니다. 말이 많은 부모는 내가 너를 기도하고 있다’ ‘수고하고 있다고 말을 합니다. 그러면 자녀가 고생하지마세요’ ‘나도 싫어요라고 말합니다. 침묵이 사랑입니다. 덕이 있는 사람이 되려면 말을 하지 않으면 됩니다. 말만하지 않으면 오십 프로는 덕이 됩니다. 사람들은 조금하고 많이 했다고 말합니다. 어떤 분은 양로원 고아원 방문합니다. 그러나 그분은 꼭 전화하고 가고, 갔다 와서 전화합니다. 그 이야기를 하지 않으면 가만히 있지 못합니다. 선에 덕이 있어야 합니다. 은근하게 말이 없어야합니다. 말없는 수고를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입을 열지 않았다고 합니다. 빌라도가 여러 말을 합니다. 군인들이 조롱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을 생각하며 말이 없습니다. 말이 없어서 빌라도가 답답해합니다. 한 마디만 하면 빌라도에게 굽히는 것이 됩니다. 말을 하면 용서해주겠다고 합니다. 그래도 예수님은 말을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빌라도가 두려워합니다. 왜 말 안하고 죽느냐고 합니다. 빌라도가 이 사람을 보라고 합니다. 침묵 속에 힘이 있고 진리가 있습니다.

요즘에 피알시대라고 자기를 자랑합니다. 명함에 많은 것을 써가지고 다니면 덕이 없어집니다. 수고가 의미가 없어집니다. 멸시를 당하여도 십자가에 죽어도 말이 없습니다. 그것이 하나님 앞에서 의가 됩니다. 반항하거나 악인들의 흉계를 저주하지 않으셨습니다. 채찍에 맞으시고 조롱을 당할 때도 순한 양처럼 잠잠하셨습니다. 양은 도살장에 끌려가도 말없이 순종한다고 합니다. 양의 털깎는 것을 보면 양들이 말이 없습니다. 털이 많은 양이 앙상하게 되어서 나갑니다. 양은 아무 말도 없이 자신을 맡깁니다. 예수님은 털깎는 자 앞에 양처럼 말이 없습니다. ‘나는 억울하다’ ‘분하다’ ‘한이 있다고 말을 하지 않습니다. 그 곳에 많은 말이 담겨 있습니다. 입을 열지 않으면 오해를 받습니다. 오해를 벗기 위해서 말을 합니다. 침묵은 오해를 낳았습니다. 그 오해까지 감수하는 것입니다. 내 진실은 하나님만이 아신다고 하고 고난을 받아야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에 양처럼 온순하게 순종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채찍에 맞으면서도 입을 열어서 반항하지 않으셨습니다. 못에 박히면서도 그들을 저주하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말없이 순종하신 예수님은 아름답습니다.

 

(알아주지 않아도)

 

8절을 보십시오. "그가 곤욕과 심문을 당하고 끌려갔으니 그 세대중에 누가 생각하기를 그가 산자의 땅에서 끊어짐은 마땅히 형벌 받을 내 백성의 허물을 인함이라 하였으리요."

 

그 세대의 아무도 예수님의 고난이 마땅히 형벌 받을 백성을 위한 대속의 고난임을 알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을 철저히 사람들로부터 소외당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고난의 십자가 앞에서 철저히 홀로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자신과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믿음으로 말없이 순종했습니다. 이렇게 말없이 순종하신 예수님의 모습은 참으로 아름답습니다. 당시에는 예수님이 많은 사람을 위해서 고난 받는 것을 알지 못합니다. 나중에 성령의 충만함을 받을 때 깨닫습니다. 사도 바울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습니다. 십자가를 영광의 십자가입니다.

그러나 그 현장에서는 그 십자가의 의미를 아는 사람이 없습니다. 탈랜트들이 십자가 목걸이를 매고 나오는 것은 아름답습니다. 당시는 부끄러운 십자가가 영광의 십자가로 바뀌었습니다. 본래는 그렇지 않았는데 영광의 십자가가 됩니다. 그 당시는 아무도 몰라도 그는 입을 열지 않습니다. 그때에 주님이 그를 높입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살아도 우리의 고난을 알아주는 사람이 없을 때 그 고난을 왜 감당해야 하는지 회의가 생깁니다. 고난을 그만 감당하고 싶습니다. 사람들에게 원망이나 불평을 하고 싶을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때 우리는 말없이 순종하신 예수님께 나아가야 합니다. 그러면 예수님으로부터 이해와 위로를 덧입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애매히 고난을 받아도 하나님을 생각함으로 참으면 아름답습니다.

 

(무덤이 악인과 함께)

 

9절을 보십시오. "그는 강포를 행치 아니하였고 그입에 궤사가 없었으나 그 무덤이 악인과 함께 되었으며 그 묘실이 부자와 함께 되었도다."

 

그리스도는 행동이나 말에 있어서 거짓이 없으십니다. 항상 온유하시고 강포를 행치 않으셨습니다. 아무 죄가 없으신 예수님께서 악인들과 함께 죽으셨고 악인과 함께 묻히셨습니다. 그 무덤은 부자인 아리마대 요셉의 무덤입니다. 묘지까지도 악인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이 무덤에 묻히심으로 우리의 옛사람도 함께 무덤에 묻히고 우리는 새사람이 되었습니다.

 

(속건제물 예수님)

 

10절을 보십시오. "여호와께서 그로 상함을 받게 하시기를 원하사 질고를 당케 하셨은죽 그 영혼을 속건제물로 드리기에 이르면 그가 그 씨를 보게 되며 그날은 길 것이요 또 그의 손으로 여호와의 뜻을 성취하리로다"

 

하나님은 예수님에게 상함을 받게 하시기를 원하사 질병의 고통을 받게 하셨습니다. 십자가를 죽게 하신 분은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아버지가 자신의 외아들을 십자가에 죽게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여 자신을 속건제물로 드리셨습니다. 속건제물이란 우리가 하나님과 사람에게 정신적이나 물질적으로 피해를 끼쳤을 때 드리는 제물입니다. 부과된 죄값을 치러서 죄인을 자유롭게 놓아주는 목적으로 드려지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으로 하여금 그 씨를 보게 하셨고 자기 영혼의 수고한 것을 보게 하셨습니다. 그 씨를 본다는 것은 그리스도의 죽음이 죽은 자를 살리시고 그 수가 계속하여 증가한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을 통하여 하늘의 뭇별처럼 해변의 모래처럼 많은 생명의 열매가 맺힐 것을 의미합니다. 그날은 길다는 것은 그가 부활하여 영원히 산다는 말입니다.

 

(많은 사람을 의롭게 하며)

 

11절을 보십시오 가라사대 그가 자기 영혼의 수고한 것을 보고 만족히 여길 것이라 나의 의로운 종이 자기 지식으로 많은 사람을 의롭게 하며 또 그들의 죄악을 친히 담당하리라.”

 

예수님은 죄값을 치르심으로 하나님을 만족케 하셨습니다. 자기 영혼의 수고한 것을 본다는 것은 그리스도가 그의 고난이 여호와의 뜻이고 또 그 결과 많은 사람을 의롭게 할 것을 보시고 만족하신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불의하게 되심으로 많은 사람을 의롭게 하십니다. 그들의 죄악을 친히 담당하심으로 죄에 대해서 죽고 의에 대해서 살게 하십니다. 예수님은 고난을 받으신 후에 부활의 영광을 얻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죽은 지 삼 일만에 부활하심으로 영광의 주요, 승리의 주가 되셨습니다. 그 결과 많은 사람들이 죄사함을 입고 하나님의 백성이 되게 하셨습니다.

 

(범죄자 중에 하나로)

 

12절을 보십시오. "이러므로 내가 그로 존귀한 자와 함께 분깃을 얻게 하며 강한 자와 함께 탈취한 것을 나누게 하리니 이는 그가 자기 영혼을 버려 사망에 이르게 하며 범죄자 중 하나로 헤아림을 입었음이라. 그러나 실상은 그가 많은 사람의 죄를 지며 범죄자를 위하여 기도하였느니라 하시니라."

 

여기서 존귀한 자와 강한 자는 신자를 의미합니다. 예수님은 신자들과 함께 영생과 하나님 나라의 분깃을 얻게 되십니다. 예수님께서 자신의 몸을 버려서 십자가를 감당했기 때문에 하늘나라의 분깃을 줄 수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은 자신의 영혼을 버려 사망에 이르셨습니다. 예수님은 흉악한 범죄자 중에 하나로 여김을 받아 십자가에 죽으셨습니다. 그래도 그들을 저주하거나 심판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예수님은 그들을 위해서 중보기도를 드렸습니다.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하나이다." 하나님은 십자가를 지시는 예수님께 부활의 영광을 주셨습니다. 우리의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습니다.

 

(십자가의 은혜)

 

결론적으로 오늘의 요절 말씀을 다시 한 번 보겠습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지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움을 입었도다." 인간은 죄로 인하여 이 세상에서도 사망권세에 짓눌려 살고 죽어서도 영원하 유황불에 타는 못에 참예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의 허물을 인하여 예수님을 찌르시고 우리의 죄악을 예수님께 담당시키셨습니다. 이로 인하여 죄인들이 구원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우리는 질병이 치료되고 연약한 자가 강한 자가 되었습니다. 하나님 나라를 기업으로 얻게 되었습니다. 이 놀라운 십자가의 은혜를 찬양합니다. 아멘!

 

이사야 53장 강해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이사야 531-이사야 5312

요절 이사야 535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째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이사야 53장 강해 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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