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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주의 대학생 선교기관

천안UBF

성경66권강해서

이사야 40장 강해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

작성자 : 오요한
작성일 : 2008-09-23 00:00:00
조회수 : 6,696

문제지풀이(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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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야 40장 강해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

이사야 401-이사야 4031

요절 이사야 4031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 독수리 날개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요 달음박질하여도 곤비치 아니하겠고 걸어가도 피곤치 아니하리로다."

 

이사야 40장부터는 이사야의 후반부입니다. 이사야를 전반부와 후반부로 나눕니다. 전반부는 북이스라엘, 아람, 앗수르왕의 침략을 기록합니다. 이것을 기초로 하여 앞으로 있을 하나님 나라를 기록합니다.

후반부는 바벨론 포로와 그 포로 해방을 통하여 하나님이 어떻게 일하시는지 포로당하는 사람들에게 위로의 말씀을 하십니다. 후반부는 바벨론과 유다의 관계로 말씀을 전하고 있습니다. 바벨론 포로가 끝날 때를 배경으로 합니다. 큰 환난과 역경이 미리 선포됩니다. 그와 함께 이 사건 후에 있을 축복의 말씀을 하십니다. 심판과 구원을 동시에 말하고 지금 어떻게 살아야하는지를 말합니다.

이런 복음을 받는 기본자세는 불신자에게 하나님의 심판이 있다는 것을 믿어야합니다. 우리가 죄가 있을 때 반드시 심판하신다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확실한 구원의 역사를 믿고 따라가야 합니다. 채찍 속에 사랑이 있고 채찍 후에 구원이 있습니다.

이사야 40-568은 포로 말기 혹은 포로귀환 초기에 쓴 것으로 보입니다. 39장에서 바벨론 포로가 예언되었습니다. 포로로 잡혀간 것을 확신하고 그들에게 위로와 힘을 주는 예언을 준 것입니다. 우리는 때로 죄로 인하여 슬플 때가 있습니다. 피곤하고 지칠 때가 있습니다. 무기력할 때가 있습니다. 오늘 말씀은 이런 자들에게 주시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슬픈 자에게 위로를 주시고 피곤한 자에게 새 힘을 주십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서 위로와 힘을 얻을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내 백성을 위로하라)

 

1절을 보십시오. “너희 하나님이 이르시되 너희는 위로하라 내 백성을 위로하라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위로하라. 내 백성을 위로하라" 청자는 심판 받는 유다 백성입니다. 매를 맞고 고난을 받는 백성을 선지자의 말로 위로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70년 동안 바벨론 포로생활하는 백성을 위로합니다.

어떻게 위로하고 어떻게 위로 받습니까? 유대인들은 하나님을 섬기기보다 우상을 숭배하다가 바벨론에 망했습니다. 바벨론에 의해서 왕은 눈이 뽑힌 채로 끌려가고 남자들은 전쟁터와 노동판으로 끌려가고 여자들은 정신대로 끌려갔습니다. 그들은 바벨론의 침략으로 인해 슬퍼서 울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바벨론 포로 생활한지 70년이 지났습니다. 70년은 고통의 연속이었습니다. 눈물이 마를 때가 없었습니다. 시편 1371절에는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바벨론의 여러 강변 거기에 앉아서 시온을 기억하며 울었도다

이제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을 위로해 주십니다. 채찍으로 치지만 끝이 아니고 심판이 목적이 아니고 구원이 목적입니다. 심판 속에 계시가 있고 구원이 있습니다. 바벨론에 수만 명이 포로로 잡혀가지만 그곳 바벨론에서 정치가가 됩니다. 그들이 바벨론 나라를 지배합니다. 그들이 여호와를 경외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오묘한 뜻은 엄청난 사건 속에서 이루어집니다. 하나님의 은헤로 이들이 예루살렘에 돌아옵니다. 그들을 바벨론의 포로에서 돌아오게 하십니다.

하나님은 내 백성이라고 하십니다. 내 백성이므로 하나님이 친히 인도하십니다. 하나님이 친히 그들을 위로해주십니다. 그들은 그 심판 속에 하나님의 사랑이 있고 하나님의 뜻이 있다는 것을 믿어야 위로가 됩니다. 그 믿음으로 사건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하나님의 구원하는 사건이 있을 때 위로가 됩니다. 하나님이 그들을 위로해 주시는 이유는 그들의 복역의 때가 끝났고 죄악이 용서 받았기 때문입니다.

 

(죄악의 사함을 받았느니라)

 

2절을 보십시오. "너희는 정다이 예루살렘에 말하며 그것에 외쳐 고하라. 그 복역의 때가 끝났고 죄악의 사함을 받았느니라. 그 모든 죄를 인하여 여호와의 손에서 배나 받았느니라 할지니라

 

정다이란 마음 깊이 새기라는 뜻입니다. 복역의 때가 끝났다는 말은 바벨론 포로 생활로부터 해방되었다는 말입니다. 군복무, 교도소 생활이 끝났다는 뜻입니다. 그들은 죄로 인하여 바벨론의 감옥에서 복역을 하고 끝이 났습니다. 그들에게 무엇보다 가장 큰 위로는 죄사함을 받고 사면복권 되었습니다. 그들이 복역을 한 것은 정치적인 것이고 죄사함을 받은 것은 종교적인 것입니다. 바벨론 포로는 죄 때문에 있었던 것입니다. 정치적인 것은 정치 문제만 있는 것이 아니라 거기에는 도덕적 영적인 문제가 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무시하고 우상숭배의 죄를 지었습니다. 죄는 사람을 짓누릅니다.

바벨론 포로로 갔다가 돌아온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대부분 포로로 간 사람들의 자녀들이 돌아옵니다. 그들은 자녀들에게 소망을 줍니다. 하나님역사는 말씀대로 이루어진다는 것을 믿어야합니다.

죄는 사람의 뼈를 상하게 합니다. 죄는 사람을 고통스럽게 합니다. 죄는 사람을 미치게 합니다. 죄의 삯은 사망입니다.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들어가야 합니다. 사람이 아무리 좋은 집에서 좋은 음식을 먹어도 죄를 지은 사람은 행복할 리 없습니다. 감옥에 갇힌 죄수가 행복이 없는 것과 같습니다. 진정한 위로는 죄사함으로부터 옵니다. 죄사함을 받을 때 성령이 우리에게 오시고 성령께서 우리를 회복시켜주십니다.

 

(예수님을 통한 위로)

 

이스라엘 사람들은 바벨론 포로 생활을 통하여 그들의 죄로 인한 벌을 배나 받았습니다. 이사야는 궁극적으로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을 예언하고 있습니다. 이사야 53장에 보면 종이 벌을 받는 고난을 통하여 구원하여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을 십자가에서 심판하심으로 이스라엘의 죄를 배나 갚아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의 죄를 대신 하셔서 십자가에서 그 죄값을 치르심으로 그들을 용서해 주셨습니다. 이제 이스라엘의 죄를 용서하시고 이스라엘을 위로해 주십니다.

인간은 위로를 받아야 될 존재입니다. 어린 아이는 부모의 위로를 받아야 합니다. 갓난 아기가 부모의 위로를 받아야 할 존재인 것처럼 우리가 험악한 세상을 살다보면 위로해 줄 자를 절실히 찾게 됩니다. 시험에 실패했을 떄, 몸이 병들었을 때, 교통사고를 만났을 때, 사람들로부터 비난을 받았을 때, 일을 많이 해서 지쳤을 때, 애매한 고난을 받을 때 우리는 위로를 받고 싶어집니다. 자식이 커도 때로 부모의 위로를 받고 싶을 때가 있습니다. 저는 자식을 둔 아버지지만 때로 어머니의 따뜻한 위로를 받고 싶을 때가 있습니다. 남편들은 아내들로부터 위로를 받고 싶어 합니다. 피곤한 직장에서 돌아왔을 때 시원한 냉수라도 따라주며 따뜻한 위로의 말이라도 해주기를 원합니다. 아내들은 남편들로부터 위로의 말을 듣고 싶어 합니다. 퇴근하여 좁은 방에서 아기를 키우느라고 얼마나 수고가 많았느냐며 손이라도 잡아줄 때 큰 위로가 됩니다. 양들은 목자의 위로를 받고 싶어 합니다. 목자 또한 양들로부터 위로를 받고 싶을 때가 있습니다.

사람들은 이렇게 사람들로부터 위로를 받을 뿐만 아니라 엉뚱한 데서 위로를 받고자 합니다. 어떤 사람은 술에서 위로를 받고자 술을 퍼마시고 어떤 사람들은 스트레스를 받으면 정욕으로 해결하고자 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노래방에서 디스코텍에서 위로를 받고자 합니다. 그러나 세상의 어떤 것도 우리를 진정으로 위로해 주지는 못합니다. 설령 위로해줄지라도 그 위로는 일시적입니다. 이런 데서 위로를 구한 자는 언젠가는 낙심하여 더 상처를 받습니다. 세상의 쾌락과 정욕에서 위로를 얻고자 하는 자는 쾌락과 정욕으로 망하게 됩니다.

어떤 분은 아내로부터 위로를 받으며 살았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아내가 죽게 되었습니다. 그는 더 이상 위로를 받을 수 없게 되자 자기도 따라 죽었다고 합니다. 어떤 분은 힘들 때마다 술을 한 잔씩 마셨습니다. 그는 나중에 알콜 중독자가 되어서 폐인이 되었습니다.

우리를 위로하여 주실 분은 진정 하나님 한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위로의 하나님이십니다.(고린도후서1:1-3)" 하나님은 850명의 바알 아세라 선지자와 싸우고 지쳐 있는 엘리야를 위로하여 주셨습니다. 엘리야를 위로하사 어루만져 주시고 떡을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예수님의 십자가 후에 실패의식 가운데 지쳐 있는 제자들을 위로하시고 그들에게 해변의 파티를 마련해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우리의 고통을 아시고 체험하시고 우리를 위로해주셨습니다. 그러면 이스라엘이 위로를 받기 위해서 해야 할 일이 무엇입니까?

 

(대로를 평탄케 하라)

 

3,4절을 보십시오. "외치는 자의 소리여 가로되 너희는 광야에서 우리 하나님의 대로를 평탄케 하라. 골짜기마다 돋우어지며 산마다 작은 산마다 낮아지며 고르지 않은 곳이 평탄케 되며 험한 곳이 평지가 될 것이요."

 

하나님은 먼저 하나님의 사랑을 가르치고 회개를 돕습니다. 천국이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라고 합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그리스도를 맞이하기 위해서 대로를 평탄케 해야 합니다. 이는 회개하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우리 죄를 회개할 때 우리는 죄사함을 받고 위로를 받을 수 있습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우리의 죄를 비유적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이사야 시대의 사람들은 우상숭배의 죄를 지었습니다. 강대국을 의지하는 죄를 지었습니다. 선지자의 책망을 무시하였습니다. 이를 회개해야합니다. 그러면 모든 것을 회복시켜주십니다. 어떤 사람은 골짜기 같은 죄를 가진 사람이 있습니다. 이는 마음이 움푹 패어진 사람을 의미합니다. 사람들에게 상처를 받은 후 마음이 패어진 사람이 있습니다. 실패로 마음이 패어진 사람이 있습니다. 다른 사람과의 비교의식으로 인한 열등감으로 마음이 패어진 사람도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자기를 비하하고 자학하기를 잘합니다. 다른 사람은 자신을 무시하지 않았는데 자기 스스로 자신을 무시했다고 생각합니다. 힘든 일을 만나면 나는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며 포기하고 절망하기를 잘 합니다. 우리나라 사람 가운데 마음이 패어진 사람들이 많습니다. 이런 사람이 회개하고 성령을 받으면 성령께서 하나님 앞에서 존귀한 자로 변화시켜주십니다.

다음으로 산과 같이 마음이 높아져 있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자기 의가 강합니다. 주로 성실하고 도덕적인 사람이 자기 의가 강합니다. 이런 사람은 자신의 도덕적인 산보다 낮은 사람을 무시하고 판단하고 정죄합니다. 이런 사람은 다른 사람을 판단하는 기준이 자신의 생각입니다. 이런 사람이 회개하면 성령께서 이런 사람을 겸손한 사람으로 만들어주십니다.

또한 고르지 않은 것은 길이 곧지 않고 고불고불한 것을 의미합니다. 고르지 않은 것은 평탄하지 않고 울퉁불퉁한 것을 의미합니다. 길은 만들었지만 잘 닦아지지 않아서 울퉁불퉁한 길을 가려면 힘이 듭니다. 길이 고르지 않은 사람은 마음이 험악한 사람들을 말합니다. 거칠고 혈기가 있는 사람입니다. 이들은 험악하기 때문에 무섭습니다. 다른 사람에 대해서 혈기를 부립니다. 신경질을 잘 부립니다. 다른 사람과 다투기를 좋아합니다. 이런 사람은 거칠은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이 회개하면 성령께서 이들을 부드럽고 온유한 사람으로 만들어주십니다.

길이 굽어진 사람이 있습니다. 이들은 마음이 삐뚤어진 사람입니다. 마음에 편견이 있는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은 다른 사람이 순수한 마음으로 말해도 왜곡하여 항상 삐뚤게 받아들입니다. 순수하게 사랑을 해주어도 자신을 이용하려고 하는 것이 아닌가 이상한 방향으로 생각합니다. 평상시 다른 사람에게 사기를 많이 당해서 다른 사람의 말을 한번 뒤집어 생각합니다. 사랑해 하는 말을 순수하게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나를 사랑한다고? 평상시 얼마나 미워했으면 나를 사랑한다고 할까?’ 하며 오히려 사랑을 의심합니다. 매사가 이런 식입니다. 이런 사람이 회개하면 성령께서 이런 사람들을 순수한 사람, 순종적인 사람으로 변화시켜 주십니다.

 

(여호와의 영광을 보리라)

 

5절을 보십시오. “여호와의 영광이 나타나고 모든 육체가 그것을 함께 보리라 이는 여호와의 입이 말씀하셨느니라

 

회개하여 길을 닦으면 여호와의 영광이 나타나서 우리를 위로하십니다. 하나님이 친히 임재하십니다. 하나님은 출애굽 때에 하나님이 시내산에서 임하셨습니다. 구름과 번개와 지진과 나팔 소리 속에서 임하였습니다. 그렇게 하나님은 친히 살아계심을 드러내십니다. 사랑의 하나님이 나타나셨습니다. 능력의 하나님을 드러내십니다. 주권의 하나님을 나타내십니다.

이스라엘이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오는 것을 통하여 그들에게 메시야가 오시는 것을 바라봅니다. 하나님이 육신의 모습을 입고 이 세상에 오십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이 성령으로 우리의 마음 속에 오십니다. 성령은 위로의 영이십니다. 회개한 모든 육체는 우리 안에 계시는 성령을 보게 됩니다. 성령께서 우리의 마음 속에 오셔서 우리를 위로해 주십니다. 우리는 고난 가운데 확실한 소망을 가져야합니다. 모든 육체가 영광의 날을 함께 보아야합니다.

 

(애통하는 자는 위로를 받을 것이요)

 

이상에서 우리가 위로를 받기 위해서는 회개해야 함을 배웠습니다. 예수님은 산상보훈에서 말씀하셨습니다.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우리가 죄에서 위로를 받기 위해서는 죄에 대해서 애통하는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문제를 인해서 애통하며 나아갈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위로해 주십니다. 우리가 양들의 문제로 슬퍼할 때 하나님은 양들의 문제를 해결해 주십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자신의 죄로 인해서 눈물을 흘리며 회개했습니다. 예수님은 그녀의 죄를 다 용서해 주셨습니다. 다윗은 자신의 죄로 인하여 눈물로 침상을 적시며 울며 회개했습니다. 하나님은 그의 모든 죄를 다 용서해 주셨습니다.

한나는 자신이 자식 하나 없는 문제를 갖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서 울며 기도했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는 한나에게 사무엘을 주셨습니다.

저는 저의 큰형이 병이 들었을 때 기도하는데 눈물이 나왔습니다. 초췌해진 아버지를 위해서 기도하는데 통곡이 나왔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형을 치료해 주셨습니다. 아버지가 예수님을 믿게 해주셨습니다.

우리가 위로를 받지 못하는 것은 울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야고보서 저자는 말합니다. "너희에게 임할 고생을 인하여 울고 통곡하라"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박히시려 가시는 길에 자신을 따르며 우는 여인들을 보았습니다. 그때 예수님은 여인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를 위해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들을 위해 울라." 우리에게 무슨 문제가 있습니까? 우리가 이 문제를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가서 울며 기도해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로해 주실 것입니다. 남을 정죄하고 판단하는 사람은 불행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의 문제를 통해서 자신의 문제를 발견하고 회개하는 사람은 행복한 사람입니다. 하나님은 외치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하다)

 

6-8절을 보십시오. "6. 말하는 자의 소리여 이르되 외치라 대답하되 내가 무엇이라 외치리이까 하니 이르되 모든 육체는 풀이요 그의 모든 아름다움은 들의 꽃과 같으니 7. 풀은 마르고 꽃이 시듦은 여호와의 기운이 그 위에 붊이라 이 백성은 실로 풀이로다 8.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드나 우리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히 서리라 하라"

 

이사야 선지자는 사람과 하나님의 말씀을 대비하여 말씀하십니다. 사람들은 풀과 같이 일시적입니다. 지진이 나면 사람이 만든 것이 다 무너집니다. 일본 고베 지진은 옆으로 흔드는 것을 대비하였지만 아래 위로 흔들려 다 무너졌다고 합니다. 브라질은 지진이 없는 나라라고 하였습니다. 우리는 인종차별이 없어서 지진이 없다고 하였습니다.

모든 영광은 풀과 같고 그영광이 풀의 꽃과 같습니다. 하나님의 기운이 가면 다 무너집니다. 앗수르도 무너지고 북이스라엘도 무너지고 바벨론도 무너집니다. 우상도 무너집니다.

이스라엘을 위로하라 하신 말씀은 사람이 한 말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기운이 불고 하나님의 말씀만 서게 됩니다. 하나님이 친히 하신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위로는 반드시 이루어집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합니다. 우리는 영원한 말씀으로 위로를 받아야합니다.

바벨론도 영원하지 않습니다. 바벨론의 세력이 크지만 시들게 될 것입니다. 바벨론의 영광도 풀의 꽃과 같이 시들게 될 것입니다. 풀과 같고 꽃과 같은 자신의 힘으로 위로를 받을 수 없습니다. 내가 다른 사람을 위로해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진정한 위로가 됩니다. 사람들이 우리에게 진정한 위로를 줄 수 없음을 가르쳐 줍니다. 사람들은 슬프고 피곤하면 사람들에게서 위로를 구합니다. 누가 나에게 따뜻한 위로의 말 한 마디라도 해주기를 바랍니다. 아니면 풀과 같은 술이나 오락이나 정욕적인 죄를 통해서 위로를 받고자 합니다. 그러나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듯이 이런 위로는 영원하지 못합니다. 우리는 슬프고 피곤할 때 우리를 위로해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위로를 받아야 합니다. 우리 하나님의 말씀은 영영히 섭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통하여 위로를 얻는 사람도 영원히 서게 됩니다.

 

(너희 하나님이 오신다)

 

9절을 보십시오. “아름다운 소식을 시온에 전하는 자여 너는 높은 산에 오르라 아름다운 소식을 예루살렘에 전하는 자여 너는 힘써 소리를 높이라 두려워하지 말고 소리를 높여 유다의 성읍들에게 이르기를 너희의 하나님을 보라 하라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는 자는 높은 산에 올라서 힘써 소리를 높여 외치라고 말합니다. 아름다운 소식은 예수 그리스도가 육체로 오셔서 우리를 위로해주신다는 것입니다. 회개한 자에게 성령께서 오셔서 우리를 위로해주신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다시 오셔서 영원한 위로를 해주신다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에게 큰 소리로 외쳐야합니다. 복음을 전하라고 하십니다. 두려워 말고 소리를 높여 외치라고 말합니다. "너희 하나님을 보라." 공동번역에는 너희의 하느님께서 저기 오신다.” 하나님이 임재하시는 것이 복음입니다. 우리는 슬픔의 순간에 회개하고 눈을 들어 하나님을 바라봐야 합니다.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보아야합니다. 하나님은 그들에게 임하십니다. 여호와의 영광이 나타납니다. 위로의 하나님이 오십니다. 우리가 바라볼 하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친히 다스리는 하나님을 보라)

 

10,11절을 보십시오. “보라 주 여호와께서 장차 강한 자로 임하실 것이요 친히 그의 팔로 다스리실 것이라 보라 상급이 그에게 있고 보응이 그의 앞에 있으며 그는 목자같이 양 떼를 먹이시며 어린 양을 그 팔로 모아 품에 안으시며 젖 먹이는 암컷들을 온순히 인도하시리로다

 

하나님은 오셔서 강한 팔로 다스리시는 분입니다. 믿음으로 사는 자에게 상급을 주십니다. 승리자가 노획물과 공물을 남은 백성에게 나누어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부활하여 승리하신 후에 많은 은사를 나누어 주십니다. 믿음으로 사는 자들을 양무리같이 먹이시는 목자가 되시며 어린 양을 그 팔로 품에 안으시며 젖먹이는 암컷들을 온순히 인도하시는 목자가 되십니다. 사랑의 팔로 안아서 양들을 인도하여주십니다. 성령께서 우리의 삶에 인도자가 되십니다.

하나님은 전능하신 하나님이시고 사랑의 하나님이십니다. 목자가 상처난 양들을 치료하듯이 하나님은 우리의 아픈 상처를 치료해주십니다. 이 하나님을 바라볼 때 우리는 위로를 얻을 수 있습니다.

또한 하나님을 불신하고 대적하는 자에게 심판을 하십니다. 하나님은 심판의 주요 사랑의 주로 임하십니다. 예수님은 사단과 싸우시는 강한 자요, 사랑으로 우리를 다스리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이 다스리면 하나님 나라가 이루어집니다. 이사야는 보라 주 여호와를! 라고 외칩니다. 우리는 눈을 들어 임하시는 우리를 다스리시는 하나님을 보아야합니다.

사람들은 새의 눈을 가진 사람이 있고 벌레의 눈을 가진 사람이 있습니다. 벌레의 눈을 가진 사람은 항상 벌레같이 땅엣것만 바라봅니다. 사람들과 물질들과 정욕적인 것만을 봅니다. 반면에 새의 눈을 가진 사람은 높고 푸른 하늘을 바라봅니다. 이들은 넓은 하나님의 세계를 바라봅니다. 우리는 새의 눈을 가지고 하나님을 바라볼 때 위로를 받을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보고 성령을 볼 때 위로를 얻을 수 있습니다.

 

(위로의 하나님)

 

12절에서 26절까지는 우리를 위로하시는 하나님이 얼마나 크시고 광대하신 분이신가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들의 세계관을 말합니다. 찬송가 가사에서 오늘 본문이 나옵니다. 시를 지을 때 오늘 말씀을 인용하기도 합니다. 믿음의 사람이 세상을 어떻게 보느냐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보고 은혜 안에 있는 사람이 어떻게 보느냐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똑바로 보면 세상일은 작아 보입니다. 하나님의 경륜, 지혜 능력을 깨달아으면 그 경륜아래 내가 흡수됩니다. 나의 세계가 작게 느껴집니다. 은혜에 크게 감사하는 사람은 나의 문제가 아무 것도 아닌 것으로 느껴집니다. 우리는 위로 볼 수 있어야합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앞뒤 옆이 막혔으면 위를 보라고 합니다. 위를 보아야 앞을 보면 문제가 풀립니다. 땅만 보면 땅도 하늘도 잃어버립니다. 하늘을 보고 하늘의 뜻을 알면 땅의 문제가 풀어집니다.

 

(절대 주권자 하나님)

 

12-14절을 보십시오, "누가 손바닥으로 바닷물을 헤아렸으며 뼘으로 하늘을 쟀으며 땅의 티끌을 되에 담아 보았으며 접시 저울로 산들을, 막대 저울로 작은 언덕들을 달아 보았으랴 누가 여호와의 영을 지도하였으며 그의 모사가 되어 그를 가르쳤으랴 그가 누구와 더불어 의논하셨으며 누가 그를 교훈하였으며 그에게 정의의 길로 가르쳤으며 지식을 가르쳤으며 통달의 도를 보여 주었느냐?"

 

하나님은 바다 물과 하늘과 땅과 산들을 친히 창조하신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스스로의 지혜로 천지 만물을 만드신 지혜자가 되십니다. 하나님은 광대한 우주를 만드시고 다양한 생물들을 만드셨습니다. 아무도 하나님께 지도할 수 없고 충고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 의롭게 살았다고 요구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절대주권자이십니다. 모사는 충고하는 자입니다.

기도하는 내용을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님 왜 이렇게 하십니까 요렇게 해야지!’ 라고 기도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모사 노릇을 하는 기도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받아들이는 것이 기도입니다. 하나님 이렇게 하면 안 된다고 하나님께 잔소리를 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께 협박합니다. 몇 시간 기도하고 가버립니다. 나에게 소원이 있지만 그렇게 되어야 좋다고 누가 보장합니까? 내 뜻대로 안 되는 것을 감사합니다. 내가 기도한 것이 있는데 지금 보니 그것이 잘 안 된 것입니다. 내 뜻대로 안 되고 내 기도대로 안 되는 것을 감사합니다. 하나님이 모든 것을 자세히 이루어가십니다.

달은 지구를 타원형으로 돕니다. 그로 인하여 바닷물의 움직임이 나타납니다. 그래야 바다가 파도가 일고 물고기가 살아남고 정화됩니다. 하나님께 왜 이렇게 만들었습니까? 말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은 놀랍고 위대한 일입니다. 이것을 깨닫고 인류역사를 봅니다. 아무도 하나님의 의논 상대가 될 수 없습니다. 아무도 하나님께 정의의 길을 가르치거나 지식을 가르치거나 통달의 도를 보여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스스로 계신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스스로 구원역사를 이루시는 절대주권자이십니다. 하나님은 지혜가 풍성하십니다.

 

(바벨론은 아무것도 아니라)

 

15-17절을 보십시오. “보라 그에게는 열방이 통의 한 방울 물과 같고 저울의 작은 티끌 같으며 섬들은 떠오르는 먼지 같으리니 레바논은 땔감에도 부족하겠고 그 짐승들은 번제에도 부족할 것이라 그의 앞에는 모든 열방이 아무것도 아니라 그는 그들을 없는 것 같이, 빈 것 같이 여기시느니라

 

하나님 앞에서 열방은 통에 한 방울 물같고 저울에 적은 티끌같고 섬들은 떠오르는 먼지 같습니다. 이스라엘은 열방으로 고생합니다. 한국 상황과 비슷합니다. 한국 교회에서는 구약 성경을 우리나라 역사처럼 읽었습니다. 이스라엘이 그렇습니다.

하나님을 보고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것을 믿을 때 열방은 물방울과 같습니다.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알고 열방을 보면 물과 같이 있으나 마나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섭리 속에 있는 것입니다. 그 앞에서는 모든 열방이 아무것도 아닙니다. 하나님은 그들을 없는 것 같이 빈 것 같이 여기십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가장 인구가 많은 13억 중국 사람들도 먼지처럼 작게 여기십니다. 세계에서 땅이 가장 큰 러시아도 물방울처럼 여기십니다. 하나님 앞에서 바벨론은 물방울과 같습니다.

우리는 이 크고 두려우신 하나님을 믿을 때 세상이 두렵지 않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 앞에 설 때 나의 문제가 작게 보입니다. 아브라함이 뭇별을 만드신 하나님을 바라보았을 때 자신의 자녀 없는 문제가 아무 것도 아닌 것처럼 생각되었습니다. 욥이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을 바라봤을 때 자신의 질병 문제와 자녀 문제가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생각되었습니다. 우리에게도 많은 문제들이 있습니다. 건강 문제, 물질 문제, 학과 공부 문제, 자녀 문제, 양들의 문제가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을 바라볼 때 우리의 문제가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없는 것처럼 생각될 것입니다.

 

(우상은 아무것도 아니다.)

 

18-21절을 보십시오. “그런즉 너희가 하나님을 누구와 같다 하겠으며 무슨 형상을 그에게 비기겠느냐 우상은 장인이 부어 만들었고 장색이 금으로 입혔고 또 은사슬을 만든 것이니라 궁핍한 자는 거제를 드릴 때에 썩지 아니하는 나무를 택하고 지혜로운 장인을 구하여 우상을 만들어 흔들리지 아니하도록 세우느니라 너희가 알지 못하였느냐 너희가 듣지 못하였느냐 태초부터 너희에게 전하지 아니하였느냐 땅의 기초가 창조될 때부터 너희가 깨닫지 못하였느냐

 

하나님과 우상을 비교하여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바벨론이 섬기는 어떠한 우상과도 비교할 수 없습니다. 유일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우상은 장인이 형틀에 부어서 만들고 장색이 금으로 입힌 것입니다. 우상은 죽어있는 돌덩이나 쇠덩어리에 불과합니다. 썩지 않는 나무로 만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땅 위 궁창에 앉으셔서 천지를 창조하신 살아계신 하나님입니다. 우주를 만드신 분이십니다. 북극성에서 지구를 오는데 빛이 오백년 걸립니다. 그러나 우상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귀신에게 바치는 밥을 보면 꺼림찍합니다. 굿하는 것을 보면 신비합니다. 대를 잡고 신내림을 합니다. 대가 딱 멎으니까 이 가운데 예수 믿는 사람 들어왔다고 합니다. 예수 믿는 꼬마가 왔는데 대가 멈추고 귀신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우상을 섬기느라고 고생합니다. 이사 날짜도 무당하게 묻습니다. 다리를 크게 만들고 소대가리를 놓고 빌고 있습니다. 그것을 벗어나지 못하고 벌벌 떱니다. 우상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우상을 하나님과 비교하려하는 것은 하나님을 욕되게 하는 것입니다. 우상은 절대로 삼기지 않을 뿐 아니라 무시하며 살아야 합니다.

 

(메뚜기 같은 사람들)

 

22-24절을 보십시오. “그는 땅 위 궁창에 앉으시나니 땅에 사는 사람들은 메뚜기 같으니라 그가 하늘을 차일같이 펴셨으며 거주할 천막같이 치셨고 귀인들을 폐하시며 세상의 사사들을 헛되게 하시나니 그들은 겨우 심기고 겨우 뿌려졌으며 그 줄기가 겨우 땅에 뿌리를 박자 곧 하나님이 입김을 부시니 그들은 말라 회오리바람에 불려 가는 초개 같도다

 

하나님은 하늘을 차일같이 치셨으며 거추할 천막같이 치셨습니다. 크신 하나님 앞에서 인간은 메뚜기처럼 작은 존재입니다. 하나님은 땅의 거민들을 메뚜기 같이 여기시고 귀인과 사사들을 헛되게 여기십니다. 그들은 겨우 심기고 뿌려졌으며 줄기는 겨우 뿌리를 박았습니다. 그들은 회오리바람에 불려가는 지푸라기 같습니다.

 

(우주의 통치자 하나님)

 

25,26절을 보십시오. “거룩하신 이가 이르시되 그런즉 너희가 나를 누구에게 비교하여 나를 그와 동등하게 하겠느냐 하시니라 너희는 눈을 높이 들어 누가 이 모든 것을 창조하였나 보라 주께서는 수효대로 만상을 이끌어 내시고 그들의 모든 이름을 부르시나니 그의 권세가 크고 그의 능력이 강하므로 하나도 빠짐이 없느니라

 

하나님은 누구와도 비교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천지 만물을 창조하시고 각각 그 이름을 불러 인도하시는 권세가 크고 능력이 강하신 분이십니다. 모든 별들을 만드시고 이름을 불러 인도하십니다. 하나님은 우주의 통치자이십니다. 하나님의 권세가 크고 능력이 강하므로 하나도 빠짐없이 인도하십니다. 예루살렘 성전 마당에서 우상을 섬깁니다. 하나님이 성전을 헐어버리십니다. 하나님을 보라고 합니다. 창조주를 보라고 합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은 경배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보아야합니다. 하나님을 보는 마음으로 세상을 보면 아름답습니다. 하나님이 역사하시는 것을 봅니다. 그리고 이방 나라들을 봅니다. 악령의 세계도 무서워할 것이 없습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자는 자유합니다. 이것이 신앙생활입니다.

 

(피곤할 때 야곱의 원망)

 

27절을 보십시오. “야곱아 어찌하여 네가 말하며 이스라엘아 네가 이르기를 내 길은 여호와께 숨겨졌으며 내 송사는 내 하나님에게서 벗어난다 하느냐

 

우리는 피곤함의 이유가 무엇입니까? 몸이 피곤하고 돈이 없고 환경이 내 뜻대로 되지 않을 때 피곤합니다. 하나님이 사정을 모른다고 생각할 때 피곤합니다. 야곱은 하나님께 말했습니다. "내 사정은 여호와께 숨겨졌으며 원통한 것은 내 하나님께서 수리하심을 받지 못한다." 그들은 포로생활하면서 하나님의 사랑과 능력과 지혜를 불신하고 피곤하고 낙심해졌습니다. 하나님의 택한 백성이 이방 땅으로 붙잡혀 가고 그들의 손에 맞아 죽기도 하고 굶고 헐벗고 조롱받고 병들었는데 하나님께서 왜 이렇게 우리 사정을 몰라 주시나 원망합니다. 하나님은 자신들의 문제에 관심이 없고 무시하신다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도우심을 믿을수 없다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의 원통한 사정을 아신다면 갈길을 열어 주셔야 하는데 왜 길을 열어 주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우리도 마찬자기입니다. 내가 신앙 생활도 잘하고 십일조도 잘하고 헌신과 봉사를 많이 하는데 왜 우리에게 탁 트인 길을 열어 주지 않느냐고 원망하기도 합니다. 왜 나의 사정을 외면하느냐고 하나님을 원망합니다. 이사야는 이러한 이스라엘 백성에게 말씀을 주십니다. 아무리 기도해도 죄인이라 들으시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이 나를 버리셨다고 합니다. 불신은 우리를 피곤하게하는 가장 무서운 것입니다. 나는 하나님께 버리 받았다고 생각합니다. 나약하고 타락합니다. 하나님과 나의 사랑의 관계가 깨어질 때 피곤합니다.

사실은 버림 받은 것이 아닙니다. 나의 고통 정치 경제 상황이 어려워지니 버린 것 같다고 합니다.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이스라엘이 바벨론의 공격을 받는다고 버린 것이 아닙니다. 사랑하여 친 것입니다. 내가 고난당하는 것은 버림 받은 것이 아닙니다. 사랑하여 고난을 주신 것입니다. 시련을 통하여 기도를 응답하신 것입니다.

야곱이 에서를 피하여 도망갔습니다. 그는 버림 받았다고 생각하였습니다. 하나님이 복을 주셨는데 자신은 고독하고 외롭다고 생각하였습니다. 하나님이 이런 야곱을 찾아오시고 위로해주십니다. 그러자 그는 하나님이 과연 여기에 계셨다고 합니다. 야곱이 복을 받는 과정은 집을 떠난 것입니다. 집에 돌아올 때 대가족의 추장이 되어 돌아옵니다.

우리는 손바닥 펴고 복을 주시기 원하지만 하나님은 그렇지 않습니다. 많은 시련과 고난을 통하여 하나님의 때에 복을 주십니다. 하나님은 고난 받는 현재 기도의 응답하고 있습니다. 뺨을 맞아도 일이 잘 안 되어도 응답입니다. 결국은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에서 문제입니다. 우리는 도덕적으로나 율법적으로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은 이미 나의 기도를 들으십니다. 저 앞에 가서 , 그것이었구나알게 됩니다.

 

(피곤치 않으시는 하나님)

 

28,29절을 보십시오. "너는 알지 못하였느냐, 듣지 못하였느냐, 영원하신 하나님 여호와 땅끝까지 창조하신 자는 피곤치 아니하시며 곤비치 아니하시며 명철이 한이 없으시며 피곤한 자에게 능력을 주시며 무능한 자에게 힘을 주시니"

 

하나님은 지금까지 하나님이 사랑의 주님이시오 창조주이신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원망하는 그들을 향하여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영의 눈이 없어 보지 못하고 영의 귀가 없어 듣지 못한다고 책망하십니다. 하나님은 그들을 알고 이해하고 있습니다. 그들의 고통을 듣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런 후에 하나님이 어떤 분인가를 다시 말씀하여 주십니다.

하나님은 영원한 창조주이십니다. 하나님은 피곤치 않고 곤비치 아니하시는 분입니다. 자기 백성을 내버려둘 정도로 힘이 없으신 분이 아니십니다. 하나님은 명철이 한이 없으십니다. 이스라엘을 도우실 지혜가 없으신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능력은 믿지만 지혜를 믿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방법을 믿지 않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지혜를 구해야합니다.

그 뿐만 아니라 하나님은 피곤한 자와 무능한 자에게 힘을 더하십니다. 고학하면서 학생은 하나님 너무 하십니다. 지쳤습니다. 하나님의 일을 하는데 그렇게 하느냐?’고 묻습니다. 그러나 그 어려움 속에서 철학을 하고 신학을 합니다. 많은 사건과 고난 속에서 하나님을 직접 만났습니다. 오늘 하나님의 능력 안에 있다 하나님의 사랑 안에 있다는 것을 믿어야합니다. 마음에 들든 안들든 나에게 전개되는 일은 기도의 응답입니다. 하나님은 물질을 주시지 않고 능력을 주시고 힘을 주십니다. 생명의 힘을 주십니다. 기도응답을 들으면서 힘을 얻습니다.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

 

30,31절을 보십시오. "소년이라도 피곤하며 곤비하며 장정이라도 넘어지며 쓰러지되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 독수리의 날개 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오, 달음박질하여도 곤비치 아니하겠고 걸어가도 피곤치 아니하리로다."

 

어떤 사람이 힘이 넘칩니까? 사람이 젊다고 피곤하지 않은 것이 아닙니다. 성경은 소년이라도 피곤하며 곤비하며 장정이라도 넘어지며 자빠진다고 했습니다. 이들은 절망하는 사람입니다. 절망하면 청년이라도 피곤합니다. 지치고 누워 있습니다. 마음이 힘이 있어야합니다. 건강한 영이 있을 때 건강한 이성이 있고 건강한 감성이 있고 건강한 신체가 있습니다. 병은 자신이 만드는 것입니다. 감기가 걸려도 내성이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고 교인들이 다 사랑한다고 하면, 교회를 위해서는 죽어도 한이 없다고 하면 피곤하지 않습니다.

어떤 사람이 불신하고 불평하면 피곤합니다. ‘설교가 마음에 안든다’, ‘하는 일이 마음에 안 든다고 하면 감기가 돌면 감기에 걸립니다. 마음에 성령이 충만해서 하면 엔돌핀이 나옵니다. 그러면 암도 이길 수 있고 에이즈도 이깁니다.

힐링미티스터리라는 책의 주제가 하나님이 충분히 건강하게 창조하셨다는 것입니다. 충분히 건겅하지 못한 것은 내 탓입니다. 모든 병균을 이길 수 있게 만들었습니다. 그러면 감기도 못 옵니다. 허약해진 것입니다.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습니다. 힘을 얻는다는 것은 히브리 원문에는 힘을 바꾼다는 표현입니다. 여호와를 힘의 원천으로 삼습니다. 사람은 같은 데 힘을 바꾸는 것입니다. 그때 새로워지는 것입니다. 영을 바꾸는 것입니다. 말씀으로 성령으로 힘이 가해질 때 소생함을 얻습니다. 말씀의 힘 하나님의 지혜로 성령의 역사로 모든 것을 하는 것입니다. 동력이 바뀌어야합니다.

앙망한다는 것은 우러러 보며 사모하며 기다리는 것을 말합니다. 앙망은 여호와를 믿고 바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타나는 때를 기다리는 것입니다. 여호와의 사랑을 생각합니다. 주님을 소망으로 삼는 사람입니다. 영어 성경에는 hope로 되어있습니다. 사람은 희망의 존재입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학생들이 희망이 없습니다. 희망이 없으니 방향이 없습니다. 방향이 없으니 방황할 수밖에 없습니다. 무기력할 수밖에 없습니다. 여러분은 무엇을 희망합니까? 들의 풀과 같고 꽃과 같은 세상 사람들을 희망할 때 우리는 실망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는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를 위로해 주시는 성령을 앙망해야합니다. 다시 오셔서 우리의 눈에 눈물을 닦아줄 하나님을 앙망해야 합니다. 정확하게 찾아오시는 하나님을 소망해야 합니다. 새 힘은 깨끗한 힘을 말합니다. 시그마6와 같이 깨끗한 에너지입니다. 세상에는 새 힘이 없습니다.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덧입고 위기를 극복하고 도전하고 새 역사를 창조할 수 있습니다. 위로를 받을 수 있습니다.

지금 한국은 미국을 앙망하며 경제 문화를 발전시키고자 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돈을 앙망합니다. 권세를 앙망합니다. 따뜻한 이성의 사랑을 앙망합니다. 우리가 이러한 것을 앙망하면 반드시 실망하게 됩니다.

우리가 힘을 얻는 길은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길밖에는 없습니다. 우리가 여호와를 앙망하며 새 힘을 덧입을 때 독수리가 날개치며 창공을 힘차게 오르듯 힘찬 삶을 살게 됩니다. 히브리서의 전승적인 이야기가 있습니다. 목자들이 양을 치면서 독수리를 보면 신기합니다. 독수리가 날개 치면서 올가는 것은 독수리가 새로운 세계로 가는 것입니다. 하늘에 가면 세상에 있는 것이 시시하게 보입니다. 높은데서 하늘과 관계를 맺고 살면 세상일은 점점 작아집니다. 하나님과 문제가 해결되면 나의 문제도 해결됩니다. 달음질해도 곤비치 않고 걸어가도 피곤치 않습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요동치 않게 됩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절망치 않게 됩니다.

 

(여호와를 사랑하는 자에게 새 힘을)

 

우리가 어떻게 여호와를 앙망할 수 있습니까? 여호와의 사랑을 믿어야합니다. 여호와의 신실하심을 믿어야 합니다. 여호와를 사랑해야 합니다. 우리가 누구를 사랑하면 그 사람에 대한 생각으로 가득차게 됩니다. 지금 사랑하다는 말이 고어에서는 생각하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사랑하면 그 사람에 대한 관심으로 가득 찹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을 앙망할 때 우리는 새 힘을 얻을 수 있습니다.

심룻목자님은 원자력 병원에서 최장시간 기록을 세우며 수술했습니다. 예배시간 한 시간 앉아있는 것도 힘이 들었습니다. 캠퍼스에 올라가는 것은 상상도 못했습니다. 그러나 이 말씀을 요절로 잡고 여호와를 바라보며 캠퍼스로 올라갔습니다. 그때 하나님은 힘을 주시고 건강을 주셨습니다. 학생회을 섬기며 지금은 센타에서 가장 기도를 많이 하는 기도의 종이 되었습니다. 저는 심룻목자님이 여호와를 앙망하는 가운데 최장수하고 모든 사람들을 위해 중보기도하는 기도의 종이 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유경외목자님은 과거 남자를 앙망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때 남는 것을 죄와 상처뿐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영접한 후에 예수님을 앙망하는 자로 바뀌었습니다. 그때 예수님의 향기를 발하는 자요 생명의 열매를 맺는 자요 더 나아가 천사도 흠모하는 세계선교사가 되었습니다. 경외목자님이 독일에 가서도 하나님을 앙앙하는 가운데 독수리 날개 치며 오르는 삶을 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세상은 늘 편안한 것이 아닙니다. 괴롭고 슬픈 일을 많이 겪게 됩니다. 이때 강하다고 하는 사람들도 넘어집니다. 그러나 여호와를 앙망할 때 새 힘을 얻어 슬픔을 이기고 절망을 이길 수 있습니다. 정확하신 하나님을 앙망할 때 하나님의 위로를 얻게 됩니다. 이때 벅찬 감격으로 하루하루를 살 수 있습니다. 여호와를 앙망하여 2000년도 새 힘을 얻고 승리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이사야 40장 강해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

이사야 401-이사야 4031

요절 이사야 4031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 독수리 날개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요 달음박질하여도 곤비치 아니하겠고 걸어가도 피곤치 아니하리로다." 이사야 40장 강해 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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