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바로가기
메인메뉴 바로가기
컨텐츠 바로가기

복음주의 대학생 선교기관

천안UBF

성경66권강해서

창세기 40장 강해 죄인들의 목자 요셉

작성자 : 오요한
작성일 : 2008-01-12 00:00:00
조회수 : 3,773

문제지풀이(2)

    iconA_01477A.hwp  (27.00KB)

    iconA_01477B.hwp  (27.50KB)

창세기 40장 강해 죄인들의 목자 요셉
말씀 창세기 40장 1-창세기 40장 23
요절 창세기 40장 4절 친위대장이 요셉에게 그들을 수종들게 하매 요셉이 그들을 섬겼더라. 그들이 갇힌 지 여러 날이라.

어느 대학에서 리더십 강좌를 개설하였습니다. 소수만이 그 강좌를 수강 신청을 했다고 합니다. 대부분 자신이 리더가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한 가정의 아버지 어머니가 되는 순간에 리더가 되는 것입니다. 직장에서 진급하면 리더가 됩니다. 캠퍼스의 목자들도 리더입니다. 둘 이상만 모이면 하나는 리더입니다. 리더가 좋아야 그 공동체는 건강한 공동체가 됩니다. 우리가 어떻게 하면 좋은 리더가 될 수 있을까요? 리더는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 진다는 말이 있습니다.
오늘 말씀에 보면 하나님께서 요셉을 애굽의 총리로 쓰시고자 훈련하십니다. 과연 하나님이 원하시는 지도자의 자질은 무엇일까요?

(요셉과 술 맡은 자와의 만남)

1-3절을 보십시오. “그 후에 애굽 왕의 술 맡은 자와 떡 굽는 자가 그들의 주인 애굽 왕에게 범죄한지라. 바로가 그 두 관원장 곧 술 맡은 관원장과 떡 굽는 관원장에게 노하여 그들을 친위대장의 집 안에 있는 옥에 가두니 곧 요셉이 갇힌 곳이라.”

요셉은 순결하게 살려고 하다가 강간범으로 누명을 쓰고 감옥에 갇히게 되었습니다. 시편 105편 18절에 보면 요셉은 그 발에 차꼬를 차고, 그 목에는 쇠칼을 쓰고 있었다고 합니다. 그 후에 조금 자유를 얻어서 죄수들을 섬기게 되었을 것입니다. 요셉이 감옥에서 간수장의 은혜를 입어 죄인들의 대표가 되었을 때였습니다.
바로의 술 맡은 자와 떡 굽는 자가 바로에게 범죄하였습니다. 당시에는 술맡은 자와 떡 굽는 자는 높은 지위의 관리였습니다. 이들은 왕의 음식을 책임지는 자들입니다. 음식에 독을 넣어서 왕을 독살하는 위험이 있으므로 왕은 신뢰하는 자에게 음식을 맡게 하였습니다. 느헤미야도 왕의 술관원입니다. 이들이 바로의 술과 떡을 빼돌리는 죄를 범했는지 모릅니다. 어쨌든 그들은 바로에게 죄를 지었습니다. 바로는 그 둘에게 크게 노하여 요셉이 있는 감옥에 그들을 가두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요셉과 이들의 만남이 이루어졌습니다.
요셉이 감옥에 갇힌 것은 지도자가 되는 꿈에서 점점 멀어져 가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하나님 편에서 보면 꿈으로 점점 가까이 가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요셉을 바로의 두 관원장과 만나게 하심으로 애굽의 주류사회로 점점 이끌고 계십니다.

(죄인을 섬기는 요셉)

4절을 보십시오. “친위대장이 요셉에게 그들을 수종들게 하매 요셉이 그들을 섬겼더라. 그들이 갇힌 지 여러 날이라.”

친위대장은 요셉에게 술 맡은 관원장과 떡 굽는 관원장을 섬기게 하였습니다. 요셉은 죄인들을 섬겼습니다. 여기서 섬기다는 말은 원어로 샤라트라입니다. 주로 하나님을 섬길 때 쓰는 단어입니다. 요셉은 하나님을 섬기듯이 죄인들을 섬겼습니다. 죄인 하나하나를 주께 하듯이 섬겼습니다. 하나님은 요셉에게 죄인들을 섬기는 훈련을 시키셨습니다.
죄인들은 섬기기 어렵습니다. 죄인들은 인생의 벼랑에 몰린 사람들입니다. 죄인들은 분수를 모르는 탐욕을 가지고 있습니다. 인내심이 없고 혈기를 부립니다. 다른 사람들을 무시하고 교만합니다. 죄인들은 잔인하고 강포합니다. 죄인들은 게으른 사람이 많습니다. 이들은 사나운 욕을 말합니다. 이런 자들이 살인, 강도, 강간의 죄를 짓습니다. 이들은 감옥에 갇혀서도 내가 잘못했다고 생각하지 않고 항상 남이 잘못했다고 생각합니다. 자신이 감옥에 들어온 것은 다만 내가 재수가 없어서라고 말을 합니다. 이런 죄인들을 섬기는 것은 참으로 어렵습니다. 이런 자는 판단하고 정죄하고 포기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요셉은 이들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으로 섬겼습니다. 하나님께서 왜 요셉에게 이런 죄인을 섬기는 훈련을 시키셨을까요?

(섬기는 지도자 훈련)

세상적으로 보면 섬기는 자가 낮은 자입니다. 명령하고 지시하는 자가 크고 위대한 자입니다. 그러나 예수님 안에서는 반대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누가 크냐고 다투었습니다. 서로가 더 크고 더 높은 지위를 얻고자 권력 다툼을 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이들에게 섬기는 자가 크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지도자가 되려면 다른 사람의 종이 되어야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리더십입니다. 하나님은 요셉에게 섬기는 생활을 통해서 리더십 훈련을 시키셨습니다.
과거 요셉은 형들을 섬기기보다 형들의 잘못을 고자질하였습니다. 형들을 섬기는 내면성이 없었습니다. 지금 이명박 정부가 출범을 하였습니다. 이명박 정부는 창조적 리더십, 섬기는 리더십으로 국민을 섬기겠다고 하였습니다. 그는 섬기는 리더십은 상놈이 되고 머슴이 되어 국민을 주인으로 섬기는 것이라고 말하였습니다. 통합 민주당의 손학규 대표도 정부 조직 개편안을 통과 시키면서 국민을 섬기는데 최선을 다하겠다고 말하였습니다. 박근혜 대표도 21세기는 섬기는 리더십이 바람직하다고 말하였습니다.
이경숙 인수위원장도 2007년 12월 31일 삼청동 금융연수원에서 한 기자간담회에서 섬기는 리더십은 배려하고 존중하고 동기 부여함으로써 잠재력을 자발적으로 끌어내게 하는 리더십이라고 말했습니다. 이 위원장은 섬기는 리더십의 특징으로 4C (Care 배려, Credibility 신뢰, Cooperation 협력, Creativity 창조성)를 제시하기도 했습니다.
예수님도 섬기는 리더십을 가르치시고 실천하셨습니다. 예수님을 제자들의 발을 씻겨 주셨습니다. 십자가에서 인류의 죄를 씻어주시기 위해서 목숨을 내어 놓으셨습니다. 우리는 섬기는 리더십을 마냥 종이 되는 것이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섬기는 리더십은 권위기 뒷받침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도 하나님의 아들로서 권위가 있었기 때문에 십자가까지 낮아져 섬길 수 있었습니다. 섬기는 리더십은 무조건 섬기는 것은 아닙니다. 섬기는 리더십은 다른 사람의 죄문제를 회개하고 거룩하게 살며 그를 행복하게 하고 생명을 주기 위해서 섬기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을 예수님 안에서 성공시켜주는 것입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을 섬기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아이러니컬 하게도 열등감 때문입니다. 높은 자존감을 가진 자만이 낮아질 수 있습니다. 낮은 자는 비굴하여 더 낮아질 수 없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황공주요. 황태자라는 확신이 있을 때 우리는 낮아져 섬길 수 있습니다.
예수님도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확신이 있었기 때문에 낮아져 제자들의 발을 닦아줄 수 있었습니다. 요셉은 하나님의 종으로서 긍지와 자부심이 있었기 때문에 죄인들을 섬길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높은 자존감이 있을 때 남을 섬길 수 있습니다. 그때 다른 사람도 신뢰할 수 있고 다른 사람을 배려할 수 있고 다른 사람과 협동할 수 있고 창조적으로 일을 할 수 있습니다.
감옥에 갇혀 있는 사람만이 죄인이 아닙니다. 성경에는 모두가 죄인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우리 주위에 있는 사람이 죄인이라는 것을 알아야합니다. 법적인 죄를 범하지 않았지 하나님 앞에서 보면 다 죄인입니다. 사람들은 서로를 불신하며 이기적입니다. 교만하고 탐심이 있습니다. 그 마음에 가시가 있어서 서로를 찔러 댑니다. 고슴도치와 같습니다. 우리의 남편 아내 부모 자녀들 친구들 모두가 죄인입니다. 우리 모두가 사형수입니다. 하나님이 사형집행날을 미루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우리 주위의 사람들이 의인이라는 착각을 하고 살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그들을 섬기려하기보다 그들의 섬김을 받고자 합니다. 그들을 도와주려고 하기보다 그들을 의지하고자 합니다. 우리는 우리 주위 사람들이 본래 죄인인 것을 알고 섬기는 삶을 살아야합니다. 감옥은 우리의 좋은 훈련 장소입니다. 김대중 김영삼 이명박 대통령도 감옥에 갔습니다. 존번연은 감옥에서 천로역정을 썼습니다. 바울은 감옥에서 옥중 서신을 썼습니다.

(근심하는 자를 돕는 삶)

5-7절을 보십시오. “옥에 갇힌 애굽 왕의 술 맡은 자와 떡 굽는 자 두 사람이 하룻밤에 꿈을 꾸니 각기 그 내용이 다르더라. 아침에 요셉이 들어가 보니 그들에게 근심의 빛이 있는지라. 요셉이 그 주인의 집에 자기와 함께 갇힌 바로의 신하들에게 묻되 어찌하여 오늘 당신들의 얼굴에 근심의 빛이 있나이까?”

술 맡은 자와 떡 굽는 자가 하룻밤에 서로 다른 꿈을 꾸었습니다. 아침에 요셉이 들어가 보니 그들에게 근심 빛이 있었습니다. 섬기는 요셉은 이를 보고 그냥 지나치지 않았습니다. “어찌하여 오늘 당신들의 얼굴에 근심의 빛이 있나이까?” 섬기는 사람은 상대방의 얼굴 빛 하나에도 관심을 갖습니다. 목자는 관심을 가져야합니다. 대통령 경호원들은 주위에 부는 바람 소리도 놓치지 않는다고 합니다. 요셉은 죄수들의 근심을 놓치지 않았습니다. 그들의 알고 해결해주고자 하였습니다. 죄수도 바로 왕도 다 근심이 있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다 나름대로 근심을 갖고 있습니다. 목자는 양들의 상태가 어떤지를 알아야합니다. 근심하는지 기뻐하는지 근심하면 왜 근심하는지를 알아야합니다. 무조건 말씀만 주어서 변화되는 것이 아닙니다. 양들을 잘 알고 그에 맞는 말씀을 주어야합니다. 목자는 양들의 문제를 알고 어찌하든지 해결해 주고자 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소개하는 요셉)

8절을 보십시오. “그들이 그에게 이르되 우리가 꿈을 꾸었으나 이를 해석할 자가 없도다 요셉이 그들에게 이르되 해석은 하나님께 있지 아니하니이까? 청하건대 내게 이르소서”

그들은 꿈을 꾸었으나 해석을 하지 못하였습니다. 뭔가 불길한 꿈과 같아서 그들은 근심이 되었습니다. 요셉도 자신의 힘으로는 이들의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없었습니다. 그들의 꿈을 해석해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요셉은 이들의 문제를 해결해 주실 수 있는 하나님을 소유하고 있었습니다. 요셉은 이들에게 해석은 하나님께 있지 않습니까? 하며 하나님을 소개합니다. 요셉이 믿는 하나님은 꿈을 주시는 하나님이시며. 꿈을 해석해 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요셉은 술맡은 자의 인생을 해석할 수 있었던 것은 성령의 도우심으로 하나님 편에서 그 인생을 바라보았기 때문입니다.
요셉은 자신의 인생도 꿈에 기초하여 하나님 펀에서 해석할 수 있었습니다. 그때 형들이나 보디발처를 미워하지 않고 소망을 갖고 고난을 감당할 수 있었습니다. 그는 고난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보았습니다. 순천 ubf의 한 형제가 있습니다 형이 자살하였습니다. 무당은 씻김굿을 해야한다고 해석하였습니다. 목자는 하나님을 믿도록 해석하였습니다. 그 형제는 목자의 해석을 따랐습니다.
신약에 사는 우리는 하나님뿐 아니라 예수님도 있고 성령님도 있습니다. 우리는 세상에서 번민하는 자들에게 예수님과 성령님도 소개시켜 주어야합니다. 인생의 죄의식과 질병과 실패의식으로 고통하는 자에게 “예수님이 있지 않습니까?” 하며 예수님을 소개해야합니다. 우리의 죄와 저주와 질병을 대신하여 죽으시고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소개해야합니다. 또한 우리는 기쁨과 평화가 필요하고 위로가 필요하고 지혜가 필요하고 능력이 필요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고독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들에게 “우리와 함께 하시는 성령님이 있지 않습니까?” 하며 지혜와 능력의 성령님을 소개해 주어야합니다.

(술 맡은 자의 전직 회복 예언)

9-13절을 보십시오. “술 맡은 관원장이 그의 꿈을 요셉에게 말하여 이르되 내가 꿈에 보니 내 앞에 포도나무가 있는데 그 나무에 세 가지가 있고 싹이 나서 꽃이 피고 포도송이가 익었고 내 손에 바로의 잔이 있기로 내가 포도를 따서 그 즙을 바로의 잔에 짜서 그 잔을 바로의 손에 드렸노라. 요셉이 그에게 이르되 그 해석이 이러하니 세 가지는 사흘이라. 지금부터 사흘 안에 바로가 당신의 머리를 들고 당신의 전직을 회복시키리니 당신이 그 전에 술 맡은 자가 되었을 때에 하던 것 같이 바로의 잔을 그의 손에 드리게 되리이다.”

먼저 술 맡은 관원장이 자신의 꿈을 이야기하였습니다. 그는 세 가지를 가진 포도나무를 보았습니다. 그 세 가지에 싹이 나고 꽃이 피고 열매가 맺혔습니다. 술 맡은 자는 그 포도를 따서 즙을 짜서 포도주를 바로에게 바쳤습니다. 요셉은 꿈을 들을 때 하나님이 주시는 지혜로 꿈을 해석하였습니다. 요셉은 성령이 충만했습니다. 성령께서 꿈을 해석하는 지혜를 주셨습니다. 세 가지는 사흘입니다. 포도즙을 짜서 바친다는 것은 전직이 회복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 꿈은 술 맡은 자가 사흘 후에 전직이 회복된다는 것입니다.

(자신의 억울함을 호소하는 요셉)

14,15절을 보십시오. “당신이 잘 되시거든 나를 생각하고 내게 은혜를 베풀어서 내 사정을 바로에게 아뢰어 이 집에서 나를 건져 주소서. 나는 히브리 땅에서 끌려온 자요 여기서도 옥에 갇힐 일은 행하지 아니하였나이다.”

요셉은 술 맡은 자가 감옥에서 나갈 것을 확신하였습니다. 술맡은 자가 나가면 요셉을 생각하고 바로에게 아뢰어 자신을 감옥에서 건져 달라고 하였습니다. 그는 술 맡은 자에게 자신이 히브리종이고 아무 잘못도 한 것이 없다고 말합니다. 억울하게 갇혔으니 그 억울함을 풀어달라고 하였습니다. 지금은 요셉이 도움을 주지만 앞으로는 술관원장이 요셉을 도와달라고 하였습니다.

(심판의 메시지도 전하는 요셉)

16-19절을 보십시오. “떡 굽는 관원장이 그 해석이 좋은 것을 보고 요셉에게 이르되 나도 꿈에 보니 흰 떡 세 광주리가 내 머리에 있고 맨 윗광주리에 바로를 위하여 만든 각종 구운 음식이 있는데 새들이 내 머리의 광주리에서 그것을 먹더라. 요셉이 대답하여 이르되 그 해석은 이러하니 세 광주리는 사흘이라. 지금부터 사흘 안에 바로가 당신의 머리를 들고 당신을 나무에 달리니 새들이 당신의 고기를 뜯어 먹으리이다 하더니”

술 맡은 자의 꿈 해석이 좋은 것을 보고 떡 굽는 자도 자신의 꿈을 이야기했습니다. 꿈에 떡 굽는 자의 머리에는 흰 떡 세 광주리가 있었습니다. 맨 윗 광주리에는 바로를 위하여 구운 여러 떡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새들이 와서 그 떡을 먹었습니다. 요셉은 꿈을 해석하여 주었습니다. 떡 세 광주리는 술맡은 자와 마찬가지로 사흘입니다. 새들이 광주리에서 떡을 먹는다는 것은 새들이 떡맡은 자의 고기를 먹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요셉은 떡굽는 자가 사흘 후에 사형을 당할 꿈이라고 알려 주었습니다. 그러면 새들이 당신의 시체를 뜯어 먹을 꿈이라고 했습니다.
참으로 이 꿈은 해석하여 주기 어려운 꿈입니다. 그러나 요셉은 상대방을 배려하여 잘 모르겠다고 말하지 않고 솔직하게 말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진실하게 알려주었습니다. 그 사흘동안 회개하고 회복하기를 원했습니다. 아니면 하나님을 믿고 죽음을 준비하기를 원했습니다. 우리는 항상 죽을 준비를 해야합니다. 요셉은 사람을 기쁘게 하기보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신본적인 신앙을 갖고 있었습니다. 요셉은 사람의 종이 아니라 하나님의 종이었습니다.

(양들의 삶를 해석해주는 목자)

요셉이 어떻게 이들의 목자가 될 수 있었습니까? 요셉이 이들의 꿈을 해석해줄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요셉은 성령이 충만하여 양들의 꿈을 해석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알았습니다. 우리도 이 시대 고통하는 양들을 도우려면 그들에게 두신 하나님의 뜻을 알아야합니다. 그들에게 두신 하나님의 뜻을 인격적으로 전할 수 있어야합니다. 하나님은 성경 말씀을 통하여 하나님의 뜻을 계시하여주셨습니다.
우리는 말씀에 기초하여 다른 사람들에게 두신 하나님의 뜻을 해석해줄 수 있습니다. 양들은 문제투성입니다. 사람들은 육체적인 질병, 정신적인 질병을 앓고 있습니다. 특히 요즘은 환경병이 많습니다. 우리 교회에도 전에 조사해보니 비염환자가 열 명이 넘습니다. 어린이들은 아토피성 피부병을 앓고 있습니다. 대학생들은 인생의 무의미 허무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대부분 외아들 외동딸로 자라나서 인간관계를 잘 맺지 못하고 소외된 삶은 살고 있습니다. 학교나 직장에서 잘 적응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정욕의 영향으로 죄를 짓고 많은 죄의식에 시달립니다. 알콜, 니코틴, 도박, 게임 중독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이들을 어떻게 도울 수 있습니까? 이들의 문제를 나의 문제로 여기고 불쌍히 여기는 심정이 필요합니다. 이들을 위한 간절한 기도가 필요합니다. 이들의 도울 수 있는 말씀 연구가 필요합니다. 이들의 문제를 도우실 수 있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이들의 마음 속에 말씀을 통하여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심어야합니다. 하나님 편에서 그들의 문제를 볼 수 있도록 해석해 주어야 합니다. 그들의 문제를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하나님 나라를 체험하도록 도와야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친히 말씀으로 이들의 문제를 도우실 것입니다.

(예언의 말씀의 성취)

20-22절을 보십시오. “제삼일은 바로의 생일이라. 바로가 그의 모든 신하를 위하여 잔치를 베풀 때에 술 맡은 관원장과 떡 굽는 관원장에게 그의 신하들 중에 머리를 들게 하니라. 바로의 술 맡은 관원장은 전직을 회복하매 그가 잔을 바로의 손에 받들어 드렸고 떡 굽는 관원장은 매달리니 요셉이 그들에게 해석함과 같이 되었으나”

꿈을 해석해준 지 삼일이 지났습니다. 그날은 바로의 생일이었습니다. 바로는 성대한 생일 잔치를 벌였습니다. 바로는 요셉이 꿈을 해석해 준 대로 술 맡은 관원장은 전직을 회복하였습니다. 떡굽는 자는 나무에 매달아 사형에 처하였습니다. 요셉이 꿈을 해석해준 것이 진실함이 증명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현실에서 진실됨이 증명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한 말씀도 땅에 떨어지지 않고 다 그대로 됩니다. 우리는 말씀에 확신을 갖고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야합니다.

(요셉을 잊은 술맡은 자)

23절을 보십시오. “술 맡은 관원장이 요셉을 기억하지 못하고 그를 잊었더라.”

요셉은 술 맡은 관원장에게 나가면 자신을 생각하고 구원해달라고 하였지만 술 맡은 관원장은 요셉을 잊었습니다. 요셉은 일말의 희망이 끊어졌습니다. 이때는 새벽이 오기 전의 어둠과 같이 가장 요셉의 생애에 가장 어둘 때였습니다. 요셉은 감옥에 갇혀서 아무리 발버둥쳐도 나갈 수 없었습니다. 요셉은 기약 없는 감옥살이를 해야 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왜 이렇게 요셉을 버려두셨을까요?
요셉이 사람들을 의지하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요셉은 혈육인 형들에게 버림받았습니다. 자신에게 은혜를 베풀던 보디발과 그 처에게 버림받았습니다. 요셉이 은혜를 베풀어준 술 맡은 관원장에게 버림받았습니다. 어떤 사람도 요셉을 도와주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이를 볼 때 사람은 다 거짓되었습니다. 이것을 깨닫는 것이 복음입니다. 하나님은 요셉에게 이 복음을 깨닫게 하고자 하셨습니다. 우리는 그래도 사람들이 의지할 만하지 않은가 하는 일말의 기대가 있습니다. 이런 기대를 가진 사람들은 실망을 많이 합니다. 우리는 살면서 사람이 어떻게 그럴 수 있는가 하는 생각을 합니다. 어떤 사람은 짐승만도 못하다는 말을 합니다. 그런 사람에 대해서 분노합니다. 그런 사람들을 보면 뒤집어질 것 같다는 말을 합니다. 양들에게 배신 받으면 다시는 양들을 치고 싶지 않을 때도 있습니다. 목자에게 버림 받으면 모든 신앙이 무너집니다. 부부에게 배신을 당하면 다시는 그 사람과 살고 싶지 않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배신 당하면 사람들이 다 미워집니다. 그러나 우리는 어떤 사람이든 다 거짓되다는 것을 인정해야합니다. 이것이 복음을 깨닫는 시작입니다. 원래 사람들은 다 그런 것입니다. 성경은 만물 중에 가장 부패한 것이 사람의 마음이라고 합니다. 의인은 없나나 하나도 없다고 말합니다. 그들의 생각 말 행동 하나하나가 다 악하다고 말합니다. 우리가 이것을 알 때 사람들에게 실망하지 않습니다. 지금은 매우 존경하는 사람을 보아도 언젠가는 그 내면에 죄악이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그를 의지하지 않습니다. 부부간에도 싸우는 이유는 너무 많은 것을 상대에게 기대하기 때문입니다. 사람인데 예수님처럼 되어달라고 기대하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죄악되기 때문에 부부간에 안 싸우는 사람이 없습니다. 안 싸우는 사람이 이상한 집입니다. 남의 떡이 커 보인다고 남은 싸우지 않고 잘 사는 것 같으나 들어가 보면 다 싸웁니다. 간혹 사이좋게 지내는 사람들도 있지만 이들은 일찍 죽는 사람이 많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싸우면 우리 집은 오래 살겠거니 생각하고 위로를 삼아야합니다.

(요셉을 기억하시는 하나님)

하나님은 요셉이 사람들을 의지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 한 분만을 의지하게 하도록 훈련하셨습니다. 사람들은 요셉을 다 잊었지만 하나님은 요셉을 기억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요셉을 너무나 잘 알고 계십니다. 요셉을 지금 꺼내주면 총리가 되지 못합니다. 조금 있다 바로가 꿈을 꿀 때 꺼내주어야 총리가 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밥을 할 때 뜸이 들 때까지 참고 기다리고 계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좋으신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좋으신 하나님 한 분만을 의지하도록 돕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정확하십니다. 그러면 사람은 다 거짓되고 하나님은 참되시다고 하면 사람들에 대해서 불신을 품고 살아야하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사람은 믿을 수 없으나 하나님은 믿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 안에서 다른 사람을 신뢰할 수 있습니다. 사람들이 아무리 죄악되더라도 그들을 인도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악을 행해도 하나님은 그 악을 선으로 바꾸어주십니다. 하나님은 술맡은 자를 통하여 요셉을 감옥에서 내어 보내십니다. 우리가 주의 종을 신뢰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이 주의 종과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남편이나 아내를 신뢰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이 그들을 주관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좋으신 분이고 크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양들과 자녀를 신뢰할 수 있는 것도 그들과 신실하신 주님이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죽음의 시간- 삼년의 기다림)

요셉은 술맡은 관원장에게 버림 받지만 삼 년 후에 감옥에서 나가게 됩니다. 요셉은 삼년을 감옥에서 더 머물게 됩니다. 요셉은 지금 감옥에서 기다리는 삼년의 기간이 마치 예수님이 무덤 속에 있었던 삼일과 같은 기간입니다. 이때는 완전한 절망의 시간입니다. 모든 것을 다 포기하는 시간입니다. 하나님은 요셉에게 십자가와 죽음의 터널을 지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요셉에게 왜 이런 절망의 터널을 지나게 하셨을까요?
하나님은 그를 통하여 그의 세상적인 것을 완전히 죽게 하셨습니다. 조금이라도 남아 있는 세상적인 정욕을 죽이셨습니다. 세상적인 명예욕도 죽이셨습니다. 인간적인 정도 죽이셨습니다. 인간적인 안일도 죽이셨습니다. 이를 통하여 새로운 요셉으로 거듭나게 되었습니다. 요셉은 이 삼 년을 거치면서 새로운 사람으로 태어났습니다. 요셉은 하나님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거룩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신본적인 사람이 되었습니다. 내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사람이 되게 하셨습니다. 자신의 이름이 아니라 하나님의 이름을 위하여 사는 자가 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도 이런 절망의 시간을 줄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각자에게 견딜 수 없는 고통을 주십니다. 하나님은 이를 통하여 우리의 믿음을 연단시키십니다. 믿음의 연단은 금보다 더 귀한 것입니다. 금을 만들려면 용광로에서 펄펄 끓입니다. 모든 불순물을 제거합니다. 이를 통하여 정금이 만들어집니다. 마찬가지로 아담의 후손으로 태어난 우리는 많은 불순물이 있습니다. 육신적인 정욕이 있습니다. 세상적인 명예욕이 있습니다. 편하게 살고 싶은 안일욕이 있습니다. 내 뜻대로 살고자하는 자기가 있습니다. 이런 것은 말씀만으로 해결되는 것이 아닙니다. 고난의 터널을 지나야합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죽음의 십자가를 거쳐야합니다. 그때 하나님은 우리를 새롭게 빚으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런 훈련을 겪을 때 우리를 지도자로 더욱 귀하게 쓰시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소망을 바라보아야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훈련시키사 귀하게 사용하실 것입니다. 박지성 허정무 정대세 이들의 공통점도 모두 처음에는 사람들에게 버림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 버림 받음이 이들을 더욱 강하게 만들었습니다.

(이 시대의 목자로 사는 길)

결론적으로 우리가 어떻게 이 시대 양들을 섬기는 목자가 될 수 있습니까? 무엇보다 이들이 죄인아라는 것을 알아야합니다. 나는 하나님의 사랑하는 자녀라로 확신을 가지고 낮아져서 섬겨야합니다. 그들을 고통을 나의 고통으로 여기고 해결해주고자 해야 합니다. 무엇보다 기도와 말씀으로 이들에게 하나님의 뜻을 알려주어야 합니다. 그들에게 성부 성자 성령님을 소개해주어야 합니다. 그들을 위해서 희생을 각오해야합니다. 우리가 모두 이 시대 좋은 목자가 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아멘!
창세기 40장 강해 죄인들의 목자 요셉
말씀 창세기 40장 1-창세기 40장 23
요절 창세기 40장 4절 친위대장이 요셉에게 그들을 수종들게 하매 요셉이 그들을 섬겼더라. 그들이 갇힌 지 여러 날이라.
창세기 40장 강해끝입니다.

3




번호 제목 작성자 작성일
42 [창세기] 창세기 40장 강해 죄인들의 목자 요셉 오요한 2008-01-12
41 [창세기] 창세기 39장 강해 요셉과 보디발의 아내 오요한 2008-01-12
40 [창세기] 창세기 38장 강해 유다와 다말 오요한 2008-01-11
39 [창세기] 창세기 37장 강해 꿈꾸는 요셉 오요한 2007-11-15
38 [창세기] 창세기 35장,36장 강해 전능한 하나님 오요한 2007-02-04
37 [창세기] 창세기 34장 강해 벧엘로 올라가라 오요한 2007-01-28
36 [창세기] 창세기 33장 강해 야곱과 에서의 화해 오요한 2007-01-21
35 [창세기] 창세기 32장 강해 2부 네이름이 무엇이냐 오요한 2006-12-17
34 [창세기] 창세기 32장 강해 1부 두렵고 답답할 때 오요한 2006-11-25
33 [창세기] 창세기 31장 강해 2부 증거의 돌무더기 오요한 2006-11-12
1 2 3 4 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