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바로가기
메인메뉴 바로가기
컨텐츠 바로가기

복음주의 대학생 선교기관

천안UBF

성경66권강해서

창세기 38장 강해 유다와 다말

작성자 : 오요한
작성일 : 2008-01-11 00:00:00
조회수 : 6,056

문제지풀이(2)

    iconA_01475A.hwp  (29.50KB)

    iconA_01475B.hwp  (30.00KB)

창세기 38장 강해 유다와 다말
말씀 창세기 38장 1-창세기 38장 40절
요절 창세기 38장 26절 유다가 그것들을 알아보고 이르되 그는 나보다 옳도다, 내가 그를 내 아들 셀라에게 주지 아니하였음이로다. 하고 다시는 그를 가까이 하지 아니하였더라

창세기 38장에는 성경 중에서 가장 치욕적인 사건 중에 하나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성경을 읽다가 시아버지와 며느리가 관계를 맺었다는 이 부분의 이야기를 읽고 성경책을 덮었다는 말도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성경을 19금의 책이라고 말한 사람도 있습니다. 왜 이런 이야기를 창세기 38장 한 장에 걸쳐서 기록했을까요? 창세기 저자는 이를 통하여 우리에게 무엇을 말하고자하는 것일까요?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입니다. 치욕스러운 사건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풍성한 복음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

(유다의 며느리 다말)

1-6절을 보십시오. “그 후에 유다가 자기 형제들로부터 떠나 내려가서 아둘람 사람 히라와 가까이 하니라 유다가 거기서 가나안 사람 수아라 하는 자의 딸을 보고 그를 데리고 동침하니 그가 임신하여 아들을 낳으매 유다가 그의 이름을 엘이라 하니라 그가 다시 임신하여 아들을 낳고 그의 이름을 오난이라 하고 그가 또 다시 아들을 낳고 그의 이름을 셀라라 하니라 그가 셀라를 낳을 때에 유다는 거십에 있었더라 유다가 장자 엘을 위하여 아내를 데려오니 그의 이름은 다말이더라”

유다 가정에 며느리로 들어온 다말을 소개해 주고 있습니다. 유다는 우리가 잘 알다시피 야곱의 네 번째 아들입니다. 야곱의 아내 레아는 유다를 네 번째로 낳고 너무 기뻐서 하나님을 찬송하였습니다. 유다라는 이름의 뜻은 하나님을 찬송한다는 뜻입니다.
창세기 저자는 지금까지 유다에 대해서 별반 기록을 하지 않았습니다. 요셉을 애굽에 팔 때 주동자가 유다였다는 것 정도가 전부였습니다. 그러다가 저자는 창세가 37장에 걸쳐서 유다에 대해서 상세한 기록을 하고 있습니다. 그 기록은 차라리 성경에서 빼고 싶을 정도로 수치스러운 사건입니다.
유다는 자신의 형제들이 있는 약속의 땅을 떠나서 이방인인 아둘람 사람, 친구 히라와 가까이 지냈습니다. 유다는 아둘람에서 가나안 사람 수아의 딸과 결혼을 하였습니다. 그를 통하여 아들을 낳았는데 첫째 이름이 엘이고 둘째 아들의 이름이 오난이고 셋째 아들의 이름이 셀라였습니다. 첫째 며느리를 얻었는데 그가 오늘의 주인공인 다말이었습니다.

(두 명의 남편을 잃은 슬픈 다말)

7-10절을 보십시오. “유다의 장자 엘이 여호와가 보시기에 악하므로 여호와께서 그를 죽이신지라 유다가 오난에게 이르되 네 형수에게로 들어가서 남편의 아우 된 본분을 행하여 네 형을 위하여 씨가 있게 하라 오난이 그 씨가 자기 것이 되지 않을 줄 알므로 형수에게 들어갔을 때에 그의 형에게 씨를 주지 아니하려고 땅에 설정하매 그 일이 여호와가 보시기에 악하므로 여호와께서 그도 죽이시니”

다말이 슬픈 운명의 여인이 되는 과정이 나옵니다. 다말의 첫 번째 남편 엘이 죽음을 당합니다. 엘은 왜 죽었습니까? 엘이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였습니다. 우리는 그 악이 무엇인지는 모릅니다.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엘이 악을 행하였고 하나님이 그의 악을 인하여 엘을 죽이셨다는 것입니다. 엘의 죽음은 다말과는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엘의 죽음으로 다말은 졸지에 과부가 되고 말았습니다. 다말은 가해자가 아니라 피해자입니다.
이스라엘 지방에는 수혼법이라는 것이 있었습니다. 다말이 있던 당시에 이것은 사회적인 하나의 관습이었습니다. 그들은 형이 아들이 없이 죽을 경우에 동생이 형수에게 들어가서 첫 아들을 낳아서 형의 이름을 잇게 하였습니다. 이것이 기업무르는 법입니다. 하나님께서 생명의 역사를 계승하시기 위해서 수혼법을 허락하셨습니다. 우리나라에서 양자제도와 유사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관습으로 내려오다가 모세의 때에 성문법으로 만들어졌습니다.
수혼법에 따라서 엘이 아들이 없이 죽자 유다는 엘의 동생 오난을 형수 다말에게 들어가도록 하였습니다. 유다의 둘째 아들 오난은 새색시와 결혼하고 싶었습니다. 유부녀와 결혼하는 것, 그것도 형수와 결혼하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 더구나 아기를 낳아도 자신의 아들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 싫었습니다. 그는 형수와 결혼을 거절할 수 있습니다. 수혼법을 거절하면 신발을 벗기고 침뱉음을 당하면 됩니다.
오난은 아버지의 말씀에 따라서 형수의 방에 들어갔지만 마음으로 순종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가식적이었습니다. 오난은 형수의 방에 들어가서 자연 피임을 하고자 하였습니다. 하나님이 보실 때 이는 악한 죄악입니다. 형과 형수에 대한 사랑이 없는 자였습니다. 생명의 계승역사를 중시 여기지 않는 자였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오난도 죽이셨습니다. 졸지에 다말은 두 명의 남편을 잃었습니다. 다말은 슬픈 여자가 되었습니다. 이번에도 다말은 가해자가 아닌 피해자입니다. 이 사건을 시아버지 유다는 어떻게 받아들였습니까?

(다말을 액운 낀 여자로 보는 유다)

11절을 보십시오. "유다가 그의 며느리 다말에게 이르되 수절하고 네 아버지 집에 있어 내 아들 셀라가 장성하기를 기다리라 하니 셀라도 그 형들 같이 죽을까 염려함이라 다말이 가서 그의 아버지 집에 있으니라"

유다는 셀라가 장성하면 다말에게 주겠다고 하며 다말을 친정에 가 있으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사실은 셀라를 다말에게 주지 않고자 하였습니다. 셀라를 다말에게 주면 셀라도 다말로 인하여 죽을까 염려하였습니다. 유다는 자신의 두 아들이 죽은 이유가 며느리 다말 때문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액운이 낀 며느리가 들어와서 자신의 아들들을 잡아간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사람들은 죽은 자의 책임을 산자에게서 묻는 못된 버릇이 있습니다. 다른 사람의 죄를 엉뚱한 사람에게서 묻는 악한 마음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너무나 섣부르게 남을 판단합니다.
우리는 지난 주에 욥기 양식을 마쳤습니다. 욥기 양식에 친구들이 욥에게 하는 말을 통해서 우리에게 말하고자하는 한 가지가 무엇입니까? 잘 알지도 못하면서 섣부르게 남을 판단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인과응보적인 생각으로 불행을 보지 말라는 것입니다.
두 아들이 죽은 것은 자신들의 죄 때문이지 다른 사람의 죄 때문이 아닙니다. 역사를 읽다 보면 이와 같이 엉뚱한 사람에게 죄를 덮어 씌워서 많은 사람들을 죽게 하는 것을 많이 봅니다. 예를 들어서 로마의 화재 원인을 크리스찬에게 덮어 씌워 크리스찬을 죽입니다. 일본에서도 광동 대지진의 원인을 조선사람에게 덮어 씌워 많은 조선인을 죽였습니다. 우리는 이런 오류를 범하지 말아야합니다.
다말 자신도 이런 분위기 속에서 자기 때문에 두 남편이 죽지 않았느냐는 생각에 시달렸을 것입니다. 이것이 사단이 주는 생각입니다. 우리도 때로는 다말과 같이 슬픈 운명을 만날 때가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가면 재수가 없어서 되는 일도 안 될 때가 있습니다. 불운이 연속하여 일어날 때도 있습니다. 계속하여 제자양성을 했는데 실패한 사람도 있습니다. 직장에서 계속적으로 실패할 때도 있고 학과 공부에 실패할 때도 있습니다. 질병으로 오래 고생할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이때 남의 탓을 해서는 안 됩니다. 그렇다고 자신을 자책해서도 안 됩니다. 이를 통하여 어떻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는가 생각해야합니다. 그 가운데 계시는 하나님의 섭리를 보아야합니다.

(두명의 아들과 아내를 잃은 슬픈 유다)

12절을 보십시오. “얼마 후에 유다의 아내 수아의 딸이 죽은지라 유다가 위로를 받은 후에 그의 친구 아둘람 사람 히라와 함께 딤나로 올라가서 자기의 양털 깎는 자에게 이르렀더니”

다말이 시아버지와 잠을 자서 임신하는 사건이 나옵니다. 유다는 두 아들을 잃었는데 아내까지 죽었습니다. 유다의 슬픔은 컸습니다. 그는 아내를 잃은 슬픔을 위로 받은 후에 친구 히라와 함께 딤나에 양털 깎는 자에게 갔습니다. 사람들이 양털을 깎을 때는 큰 축제를 벌였습니다. 사람들은 축제 때 방탕하게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유다도 축제 때 슬픈 마음이 더하여 방탕하게 되었습니다.

(시아버지를 찾은 다말)

13-14절을 보십시오. “어떤 사람이 다말에게 말하되 네 시아버지가 자기의 양털을 깎으려고 딤나에 올라왔다 한지라 그가 그 과부의 의복을 벗고 너울로 얼굴을 가리고 몸을 휩싸고 딤나 길 곁 에나임 문에 앉으니 이는 셀라가 장성함을 보았어도 자기를 그의 아내로 주지 않음으로 말미암음이라”

이때 다말은 친정집에 가 있었습니다. 다말은 아버지가 셋째 셀라가 자라면 남편으로 준다는 약속을 믿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셋째 셀라가 장가갈 만큼 장성하였지만 유다는 셀라를 다말에게 주지 않았습니다. 이제 다말은 평생을 과부로 소박맞아 친정집에서 늙어죽어야 했습니다. 무엇보다 그녀는 생명의 열매가 없었습니다. 유다와 그의 남편 엘의 이름으로 이을 생명이 없습니다. 엘과 다말은 슬픈 운명의 주인공이었습니다.
다말은 이때 시아버지에게 말하여 셋째를 달라고 요구할 수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시아버지가 셋째도 죽을 것을 두려워하는 것을 알기 때문에 요구할 수 없었습니다. 당시에 며느리가 시아버지에게 자신의 의견을 말하기 어려운 분위기였습니다. 이때 다말은 비상수단을 썼습니다. 어떤 사람이 다말에게 시아버지가 양털을 깎으러 딤나로 간 것을 알려 주었습니다. 다말은 시아버지의 당시 심리를 잘 알고 있었습니다. 시아버지는 시어머니를 잃고 허전한 마음을 달래고자 창녀 집을 찾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아니면 평상시에도 창녀집을 찾은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유다는 다말이 보기에 창녀집을 찾는 사람이었습니다.

(기업을 잇고자하는 다말)

14절을 다시 보십시오. "그가 그 과부의 의복을 벗고 너울로 얼굴을 가리고 몸을 휩싸고 딤나 길 곁 에나임 문에 앉으니 이는 셀라가 장성함을 보았어도 자기를 그의 아내로 주지 않음으로 말미암음이라"

다말은 과부의 의복을 벗었습니다. 너울로 얼굴을 가리고 너울로 온 몸을 휩싸서 자신을 창녀로 변장하였습니다. 그는 창녀로 변장하여 시아버지를 유혹하고자 하였습니다. 창세기 저자는 그 이유가 유다가 셀라가 장성하였어도 셀라를 다말에게 주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다말은 어찌하든지 생명을 잇고자 하였습니다. 이렇게 생명의 역사를 이루고자 하는 것은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남편 엘을 위하여 생명을 이어주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하나님은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사람들을 어찌하든지 많이 번성하게 해야합니다. 하나님의 생명의 역사를 어찌하든지 계승해야합니다. 하나님은 여자의 후손에게서 메시야를 보낸다고 하셨습니다. 다말은 그 역사에 쓰임 받고 싶었습니다.

(담보물을 요구한 다말)

15-17절을 보십시오. “그가 얼굴을 가리었으므로 유다가 그를 보고 창녀로 여겨 길 곁으로 그에게 나아가 이르되 청하건대 나로 네게 들어가게 하라 하니 그의 며느리인 줄을 알지 못하였음이라 그가 이르되 당신이 무엇을 주고 내게 들어오려느냐 유다가 이르되 내가 내 떼에서 염소 새끼를 주리라 그가 이르되 당신이 그것을 줄 때까지 담보물을 주겠느냐”

다말의 예측대로 유다는 창녀에게로 들어와 잠을 잤습니다. 유다는 잠을 잔 화대(花代)로 자신이 키운 염소 떼에서 염소새끼를 주고자 하였습니다. 염소의 털을 깎은 후에 주고자 하였습니다. 유다는 화대를 외상으로 하고자 하였습니다. 당시는 창녀와 잠자는 것을 외상으로하는 것이 허용되었던 것 같습니다. 다말은 외상을 갚을 것이라는 담보물로 유다의 도장과 끈과 지팡이를 요구하였습니다. 유다는 잠을 자고 그것들을 담보물로 주었습니다. 이를 통하여 며느리와 시아버지가 잠을 자는 희대(稀代)의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임신한 다말)

18,19절을 다시 보십시오. "유다가 이르되 무슨 담보물을 네게 주랴 그가 이르되 당신의 도장과 그 끈과 당신의 손에 있는 지팡이로 하라 유다가 그것들을 그에게 주고 그에게로 들어갔더니 그가 유다로 말미암아 임신하였더라 그가 일어나 떠나가서 그 너울을 벗고 과부의 의복을 도로 입으니라”

다말은 시아버지와 잠을 자서 임신을 하였습니다. 성경에는 시아버지와 자면 시아버지와 며느리 둘 다 죽이라고 엄히 명하였습니다.(레18:14-16) 성경 말씀에서 말씀을 하지 않아도 우리가 양심적으로 생각하여도 이것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압니다. 근친상간은 불륜의 큰 죄입니다. 그런데도 다말이 시아버지와 잠을 잔 이유는 무엇일까요?
다말은 졸지에 두 아들과 그리고 시아버지와 잠을 잔 여인이 되었습니다. 다말이 시아버지와 잠을 잔 것은 육적인 쾌락을 즐기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방탕함이나 음욕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음욕이 있었다면 다른 남자와 바람을 피웠을 것입니다. 다말에게도 시아버지와 잠을 자는 것은 고통스러운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남편 엘을 위하여 생명의 역사를 어찌하든지 이루고자하는 간절한 소원이 있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마음입니다. 그녀는 엘에 대해서 신실하였습니다. 자신의 운명을 극복하고자 하였습니다. 하나님이 이런 다말의 죄에 대해서 책임을 묻지 않고 있습니다. 다만 하나님은 생명의 역사를 이루고자 하는 다말의 간절한 소원을 받아 주셨습니다. 그녀를 통하여 메시야가 태어나게 하셨습니다.

(생명의 역사를 이루는 것이 중요함)

우리는 여기서 생명의 역사를 이루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배웁니다. 하나님은 운명을 극복하고 생명의 역사를 이루고자 하는 그 믿음을 받으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인도를 개척한 월리엄캐리는 구두 수선공을 하는데 시원찮았습니다. 목회자가 되었는데 그것은 구두수선보다 더 시원치 않았습니다. 그는 믿음으로 인도에 갔지만 두 아들이 죽었습니다. 아내는 우울증에 걸렸습니다. 선교비는 함께 간 동역자가 가지고 도망갔습니다. 인도서 복음을 전하고 단지 7년 동안 한 사람의 세례 교인을 얻었습니다. 8년 동안 성경을 번역하였는데 강아지가 촛불을 차서 재가 되고 말았습니다. 하지만 그는 강아지를 발길질 한번하지 않고 믿음으로 다시 성경을 번역하고 복음역사에 도전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이를 그를 세계 선교의 아버지로 귀하게 쓰셨습니다.
다말은 임신한 후에 너울을 벗고 다시 과부의 의복을 입었습니다. 이는 다말이 창녀로 산 것이 아니라 단 한 번 시아버지와 잠을 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유다는 담보물을 찾지 못함)

20-23절을 보십시오. “유다가 그 친구 아둘람 사람의 손에 부탁하여 염소 새끼를 보내고 그 여인의 손에서 담보물을 찾으려 하였으나 그가 그 여인을 찾지 못한지라 그가 그 곳 사람에게 물어 이르되 길 곁 에나임에 있던 창녀가 어디 있느냐 그들이 이르되 여기는 창녀가 없느니라 그가 유다에게로 돌아와 이르되 내가 그를 찾지 못하였고 그 곳 사람도 이르기를 거기에는 창녀가 없다 하더이다 하더라 유다가 이르되 그로 그것을 가지게 두라 우리가 부끄러움을 당할까 하노라 내가 이 염소 새끼를 보냈으나 그대가 그를 찾지 못하였느니라”

유다는 아둘람 사람에게 물어서 화대로 염소새끼를 보내고자 지팡이와 도장과 끈을 담보물을 준 여인을 찾고자 하였습니다. 그러나 아둘람 사람들은 그런 여인이 없다고 하여 찾을 수 없었습니다. 그 동네에는 창녀가 없다고 하였습니다. 유다는 더 이상 창녀를 찾는 것을 포기하였습니다. 여인을 찾을수록 자신의 부끄러움만 드러나기 때문에 포기하고 조용히 이 문제가 덮어지기를 원하였습니다.

(머느리를 태워죽이려는 유다)

24절을 보십시오. "석 달쯤 후에 어떤 사람이 유다에게 일러 말하되 네 며느리 다말이 행음하였고 그 행음함으로 말미암아 임신하였느니라. 유다가 이르되 그를 끌어내어 불사르라"

유다가 창녀와 잔 지 석 달쯤 지난 후였습니다. 어떤 사람이 수절하라고 보낸 다말이 행음하여 임신하였다는 말을 전하여 주었습니다. 이를 보고 유다는 크게 분노하였습니다. 그를 끌어내어 당장 불사르라고 엄명하였습니다. 자신은 창녀와 잤으면서도 며느리의 죄에 대해서는 엄격하였습니다. 유다는 자신에 대해서는 관대하고 다말에 대해서는 칼같이 철저하였습니다. 마치 자신은 남의 아내를 빼앗고 충신을 죽인 후에 양한 마리를 뺏은 사람을 당장 죽이라고 하는 다윗과 비슷합니다.

(망가진 유다의 인생)

25절을 보십시오. "여인이 끌려나갈 때에 사람을 보내어 시아버지에게 이르되 이 물건 임자로 말미암아 임신하였나이다 청하건대 보소서 이 도장과 그 끈과 지팡이가 누구의 것이니이까 한지라"

다말은 자신을 임신시킨 남자가 누구인가를 알려주기 위해서 자신이 받은 담보물로 도장과 끈과 지팡이를 유다에게 보내었습니다. 그를 통해서 유다는 자신이 바로 다말을 임신시킨 장본인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유다는 염소 피로 요셉이 죽었다고 아버지 야곱을 속였는데 유다는 며느리 다말에게 속임을 당하였습니다. 이 때 유다의 마음이 어떠했을까요?
유다는 하늘이 노랬을 것입니다. 유다는 참으로 망가진 인생입니다. 그는 동생을 은 삼십에 팔았습니다. 그는 두 아들을 잃었습니다. 자신의 아내도 잃었습니다. 바람을 피웠는데 그것이 며느리와 잠을 잤습니다. 거기에 임신까지 하였습니다. 유다는 아이의 아버지요. 할아버지입니다. 다말의 시아버지요. 남편입니다.
이렇게 망가진 인생은 차라리 사무라이처럼 배를 가르고 자살하는 것이 명예로울 수도 있습니다. 그것이 그의 삶을 깨끗하게 정리하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렇게 명예가 손상될 때 자살하여 죽습니다. 가룟유다나 사울은 자신의 명예를 지키기 위해서 자살한 대표적인 예입니다. 우리나라의 정몽헌 회장도 명예를 지키기 위해서 자살하였습니다. 노무현 대통령도 자살하였습니다. 그러나 유다는 자살하지 않았습니다. 유다는 자신의 죄를 회개하였습니다. 이것이 유다의 위대한 점입니다.

(회개하는 유다)

26절을 보십시오. "유다가 그것들을 알아보고 이르되 그는 나보다 옳도다, 내가 그를 내 아들 셀라에게 주지 아니하였음이로다. 하고 다시는 그를 가까이 하지 아니하였더라"

이 사실을 알고 유다는 그는 나보다 옳도다라고 말하였습니다. 유다는 다말을 불에 태워죽이고자 하였습니다. 그런데 지금 다말이 자신보다 옳다고 하였습니다.
유다는 진실하였습니다. 그는 자신이 불에 타 죽을 자라는 것을 인정하였습니다. 다말이 시아버지와 자서라도 엘 가문의 생명을 계승하는 것은 옳은 일입니다. 유다의 죄가 무엇입니까? 아들 셀라를 다말에게 주지 않았습니다. 그는 죄없는 다말을 죄인으로 몰았습니다. 자신이 창녀와 잠을 잤습니다.
그를 통해서 손자가 아들이 되고 며느리가 아내가 되는 기구한 일이 일어났습니다. 이 모든 이야기가 친족에게 퍼져나갔습니다. 눈뜨고 집밖에 나갈 수 없습니다. 그러나 유다는 이 상황에서 명예를 지키기 위해서 자살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사랑을 신뢰하였습니다. 이런 큰 죄를 깊이 회개하였습니다. 죄를 회개하며 인생을 살아냈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회개를 받으시고 야곱의 넷째 아들 유다를 메시야의 조상으로 쓰셨습니다. 회개하는 자를 쓰시는 것이 복음입니다.

(메시야의 조상이 된 유다)

야곱의 아들들은 참으로 파란만장합니다. 첫째 아들 르우벤은 서모 빌하와 잠을 잤습니다. 둘째와 셋째인 시므온과 레위는 집단 살인극을 범합니다. 넷째 유다는 인신매매를 하고 창녀와 잠을 잤습니다. 그 누구도 믿음의 조상으로 자격이 없습니다.
그런데 이 네 명 가운데 오직 유다만이 그리스도의 조상으로 쓰임 받았습니다. 유다의 죄가 첫째나 둘째 셋째보다 적기 때문입니까? 아닙니다. 유다가 하나님의 사랑을 믿고 회개하였기 때문입니다. 평생 회개하며 살아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죄의 경중보다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신뢰와 회개를 더욱 중히 보십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신뢰하고 회개하는 마음으로 사는 것을 기뻐하십니다.

우리는 사울과 다윗에 대해서 잘 알고 있습니다. 다윗은 메시야의 그림자라고 하고 사울은 악한 왕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삶을 보면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사울은 불순종을 했지만 효심이 있었고 사람들 앞에서 예의를 아는 자였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살인과 간음과 거짓말을 한 자입니다. 그러면 두 사람의 차이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은 사울에게 두 번이나 회개할 기회를 주었지만 사울은 회개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다윗은 자신의 죄를 지적받고 하나님의 사랑을 신뢰하며 눈물로 침상을 적시며 회개하였습니다. 평생을 죄를 회개하면서 살았습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회개하고 새롭게 된 사람을 쓰십니다.

(쌍둥이를 낳은 다말)

27,28절을 보십시오. “해산할 때에 보니 쌍태라 해산할 때에 손이 나오는지라 산파가 이르되 이는 먼저 나온 자라 하고 홍색 실을 가져다가 그 손에 매었더니”

다말은 쌍둥이를 낳았습니다. 하나님은 다말의 믿음을 두 배로 축복하여주셨습니다. 후대에 사람들은 자손의 축복을 빌 때 베레스와 세라와 같이 되기를 바란다고 축복하였습니다. 쌍둥이 중에 먼저 손을 내미는 자가 있었습니다. 그에게 표시를 하기 위해서 산파는 홍색실을 매어 놓았습니다.

(구원역사에 쓰임 받은 베레스)

29,30절을 보십시오. "그 손을 도로 들이며 그의 아우가 나오는지라 산파가 이르되 네가 어찌하여 터뜨리고 나오느냐 하였으므로 그 이름을 베레스라 불렀고 그의 형 곧 손에 홍색 실 있는 자가 뒤에 나오니 그의 이름을 세라라 불렀더라"

쌍둥이 중에 동생이 첫째를 밀치고 먼저 나왔습니다. 먼저 나온 동생이 베레스입니다. 손에 홍색실을 맨 형이 세라입니다. 하나님은 누구를 통하여 구원역사를 이루셨을까요? 형을 밀치고 나온 베레스입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믿음으로 소원을 가지고 일하는 자를 구원역사에 사용하여 주십니다. 우리는 이상에서 예수님이 불가사의하게도 유다와 다말에게서 태어난 베레스를 통해서 오신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성경에서 베레스와 세라는 축복의 상징으로 쓰입니다. 룻을 축복할 때도 베레스와 세라와 같이 자녀를 가지기를 원한다고 하엿습니다. 마태복음 일장 사절입니다. "유다는 다말에게서 베레스와 세라를 낳고 베레스는 헤스론을 낳고 헤스론은 람을 낳고" 이 말씀이 예수님의 족복입니다. 그러면 이 가정에서 태어나신 예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운명을 섭리로)

예수님은 운명을 섭리로 바꾸어 주시는 분이십니다. 다말은 운명적인 여인입니다. 그에게만 오면 남자들은 죽었습니다. 그는 과부로 평생 늙어죽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믿음으로 생명의 역사를 이루고자 몸부림쳤습니다. 예수님은 그에게서 태어나시므로 그 운명을 섭리고 바꾸어 주셨습니다. 그를 메시야의 할머니로 귀히 쓰셨습니다. 예수님은 태어날 때부터 소경이나 앉은뱅이의 운명을 바꾸어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우리의 저주를 받으시고 우리의 운명을 축복의 인생으로 바꾸어 주십니다. 다말을 죽음의 운명에서 생명의 운명으로 바꾸어주셨습니다.

(망가진 인생의 회복)

예수님은 망가진 인생을 회복시켜 주십니다. 유다는 부끄럽고 망가진 인생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을 그의 인생을 회복시켜 주셨습니다. 그를 메시야의 조상으로 만들어주셨습니다. 그의 후손들을 남는 자로 축복하여 주셨습니다. 그에게서 갈렙이 나오고 다윗이 나오고 히스기야가 나오고 요시야가 나왔고 그리스도가 나왔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인생을 수선하여 주시는 분이 아닙니다. 우리의 인생을 완전히 새롭게 만들어 주십니다. 예수님은 망가진 기계를 새로운 기계로 바꾸어 주십니다. 우리는 예수님 안에서 과거를 지우고 새로운 삶을 살 수 있습니다.

(도전의 소중함)

이제 설이 지났습니다. 설이 지나면 실제적으로 한 해가 시작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도 새로운 신입생들이 들어오고 새로운 캠퍼스 제자양성이 시작됩니다. 우리 가운데 제자 양성에 실패한 사람도 있습니다. 나는 도저히 제자양성을 할 수 없다고 포기한 사람도 있습니다. 아예 제자양성에 관심이 없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해야할 일은 믿음으로 다시 도전하여 최선을 다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긍휼의 주님께서 우리에게도 베레스와 세례와 같이 한 번에 두 명의 제자양성을 하게 하는 은혜를 주실 줄 믿습니다. 우리를 통해서 캠퍼스에 새로운 생명의 역사 하나님 나라를 이루어주실 것을 믿습니다. 아멘 !
창세기 38장 강해 유다와 다말
말씀 창세기 38장 1-창세기 38장 40절
요절 창세기 38장 26절 유다가 그것들을 알아보고 이르되 그는 나보다 옳도다, 내가 그를 내 아들 셀라에게 주지 아니하였음이로다. 하고 다시는 그를 가까이 하지 아니하였더라
창세기 38장 강해 끝입니다.
3-1








번호 제목 작성자 작성일
42 [창세기] 창세기 40장 강해 죄인들의 목자 요셉 오요한 2008-01-12
41 [창세기] 창세기 39장 강해 요셉과 보디발의 아내 오요한 2008-01-12
40 [창세기] 창세기 38장 강해 유다와 다말 오요한 2008-01-11
39 [창세기] 창세기 37장 강해 꿈꾸는 요셉 오요한 2007-11-15
38 [창세기] 창세기 35장,36장 강해 전능한 하나님 오요한 2007-02-04
37 [창세기] 창세기 34장 강해 벧엘로 올라가라 오요한 2007-01-28
36 [창세기] 창세기 33장 강해 야곱과 에서의 화해 오요한 2007-01-21
35 [창세기] 창세기 32장 강해 2부 네이름이 무엇이냐 오요한 2006-12-17
34 [창세기] 창세기 32장 강해 1부 두렵고 답답할 때 오요한 2006-11-25
33 [창세기] 창세기 31장 강해 2부 증거의 돌무더기 오요한 2006-11-12
1 2 3 4 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