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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66권강해서

창세기 33장 강해 야곱과 에서의 화해

작성자 : 오요한
작성일 : 2007-01-21 00:00:00
조회수 : 4,182

문제지풀이(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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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33장 강해 야곱과 에서의 화해

창세기 331-창세기 3320

요절 창세기 334절 에서가 달려와서 그를 맞아서 안고 목을 어긋맞기고 그와 입맞추고 피차 우니라

 

오늘 말씀은 야곱이 에서와 화해하는 장면입니다. 야곱은 에서의 장자권을 팥죽 한 그릇에 샀습니다. 자신이 에서인 것처럼 속여서 장자의 축복을 빼앗았습니다. 에서는 야곱을 죽이고자 하였습니다. 그러나 부모님이 살아계셔서 죽이지 못했습니다. 야곱은 이런 에서를 피해서 밧단아람으로 도망쳤습니다. 이제 야곱이 20년만에 돌아온다고 하자 에서는 400명의 군사를 이끌고 왔습니다. 에서는 분명히 야곱과 그 가족을 죽이고자 하였습니다. 야곱은 죽음의 위협 앞에서 두렵고 답답했습니다. 만약 이런 에서와의 분쟁이 지속되면 야곱은 자신의 생명을 잃고 죽음을 당하게 됩니다. 그가 얻은 아내, 자녀들, 재물도 다 잃게 됩니다.

분쟁이나 싸움은 파멸입니다. 역사 속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분쟁을 해결하지 못하고 서로 망했습니다. 일차 세계 대전으로 일천만 명이 죽었습니다. 이차 세계대전으로 우리나라 인구보다 더 많은 6천만 명이 죽었습니다. 한국전쟁으로 2백만 명이 죽었습니다. 참으로 비극적인 일입니다. 이런 큰 희생이 분쟁을 해결하지 못해서 생긴 것입니다. 이차 세계 대전은 세르비아 청년이 오스트리아 황태자를 저격함으로 생긴 것입니다. 이런 작은 일을 화해하지 못했을 때 엄청난 피해를 당하게 됩니다. 이번에 현대차 노조가 파업하자 현대차 불매운동을 벌이고 현대차에 대한 비난 여론이 높습니다. 현대차는 87년 노조가 생긴 이래 10105천억 원 정도의 손실을 입었다고 합니다. 가정의 분쟁으로 자녀들과 부부가 상처를 입습니다. 20일 오전 열한 시 경기도 성남에서 부부가 싸우다가 남편이 불을 질러 어머니, 아내 그리고 딸이 죽음을 당했습니다. 교회가 분쟁하면 많은 성도들이 불신에 빠져 교회와 사명을 떠나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무엇보다 화해해야 합니다. 우리가 어떻게 화해할 수 있을까요?

 

(하나님과의 관계성 회복)

 

우리가 분쟁을 해결하려면 하나님과의 관계성을 회복해야 합니다. 야곱은 에서를 만나기 전에 얍복 나루에서 하나님과 기도했습니다. 그는 자기중심적인 죄악, 극한 이기심의 죄를 회개했습니다. 그는 죄사함을 받고 하나님 중심으로 바꾸었습니다. 자신을 의지하는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을 의지하였습니다. 교만을 회개하고 겸손하게 되었습니다. 그의 마음 속에 하나님을 주인으로 영접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얼굴을 대면하여 보았습니다. 잠언 167절에 보면 사람의 행위가 여호와를 기쁘시게 하면 그 사람의 원수라도 그로 더불어 화목하게 하시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싸우는 원인은 자기중심성에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중심으로 바꾸면 누구와도 화목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 중심으로 바꾸는 것이 서로가 이기는 윈윈 전략입니다. 하나님과 관계성이 회복되면 사람과의 관계성도 회복됩니다.

 

(가족에 대한 책임감이 생긴 야곱)

 

1-3a를 보십시오. “야곱이 눈을 들어 보니 에서가 사백 인을 거느리고 오는지라 그 자식들을 나누어 레아와 라헬과 두 여종에게 맡기고 여종과 그 자식들은 앞에 두고 레아와 그 자식들은 다음에 두고 라헬과 요셉은 뒤에 두고 자기는 그들 앞에서 나아가되

 

분쟁을 해결하려면 분쟁의 원인자는 책임감을 가져야 합니다. 야곱의 가족들이 에서를 만나는 장면을 보면 재미있습니다.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은 에서를 늦게 만나게 합니다. 맨 앞에 종과 아들 다음에 레아와 그 아들, 마지막으로 야곱이 가장 사랑하는 라헬과 그 아들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야곱 자신이 있었습니다. 그는 여차 하면 사랑하는 사람이 도망가서 살게 하고자 하였습니다. 적어도 가장 사랑하는 자기만은 살고자 하였습니다. 그는 무책임하였습니다. 그는 극단적인 이기주의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만난 후에 달라진 것이 있습니다. 야곱이 맨 뒤에 있었지만 이제는 맨 앞에 있습니다. 야곱은 환도뼈가 위골되어 불구자입니다. 에서가 공격하면 도망 갈 수도 없습니다. 그런데 그가 맨 앞에 선 것은 책임감을 가지고 나온 것입니다. 이기적인 자가 희생적인 자가 되었습니다. 그는 가족을 대표하여 모든 책임감을 지고자 하였습니다.

우리가 화해할 때 자신의 잘못에 대해서 책임을 전가해서는 안 됩니다. 가족을 핑계대거나 상황을 핑계대서는 안 됩니다. 물론 야곱은 어머니를 핑계댈 수 있습니다. 어머니가 거짓말하라고 방향을 주었기 때문에 그렇게 한 것입니다. 야곱도 거짓말을 했다가 혹시 저주 받을지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에 축복을 빼앗는 것을 주저했습니다. 그때 어머니 리브가는 당시에 모든 책임을 자신이 지겠다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그는 어머니 리브가에게 모든 책임을 돌릴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하면 회개가 아닙니다. 어머니가 방향을 주었어도 어머니 말씀에 순종한 것은 야곱이요. 거짓말한 것은 야곱입니다. 자신의 일에 대해서 당당히 책임을 지는 자세가 중요합니다.

 

(겸손한 야곱)

 

3b을 보십시오. "몸을 일곱 번 땅에 굽히며 그 형 에서에게 가까이 하니"

 

우리가 분쟁을 해결하려면 겸손해야 합니다. 야곱은 몸을 땅에 일곱 번 굽혔습니다. 우리는 몸을 단 한번 땅에 굽히기가 어렵습니다. 교만한 사람일수록 몸을 뻣뻣이 합니다. 그러나 겸손한 사람은 몸을 굽히는 사람입니다. 땅에 닿기까지 굽히는 사람입니다. 일곱 번까지 굽히는 사람이 겸손한 사람입니다. 분쟁의 원인은 교만에 있습니다. 다툼과 허영심에 있습니다.(2:3) 그러므로 분쟁을 해결하려면 겸손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우리 인간과 하나 되기 위해서 하나님으로서 사람의 몸을 입고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몸을 땅에 굽히기까지 낮아지셨습니다. 십자가에 죽기까지 낮아지셨습니다. 이런 겸손함을 갖고 상대방을 나보다 낫게 여겨야 합니다. 그럴 때 상대방은 마음이 움직이고 하나될 수 있습니다. 잘난 사람만이 교만한 것이 아닙니다. 못난 사람도 교만합니다. 못난 사람이 자신의 열등감을 보상 받기 위해서 남을 무시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겸손한 사람이 되려면 먼저 열등감을 치료받아야 합니다. 마음에 하나님을 소유하고 넉넉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마음에 하나님의 자녀로서 긍지와 자부심이 있어야 합니다. 잘난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이 얼마나 죄악된 자인가 발견해야합니다. 자신이 죄인의 우두머리라는 것을 알아야합니다. 그때 우리는 마음으로 겸손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겸손을 테스트하는 방법은 그 사람을 무시하는 말을 해서 반응을 보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수로보니게 여인에게 개라는 모욕적인 말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여자는 웃으며 개라도 상에서 부스러기를 먹는다고 하였습니다. 여인은 겸손한 믿음이 있다고 칭찬을 받았습니다. 물론 우리가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할 때는 화를 내야 하지만 자신을 모욕할 때는 웃을 수 있는 여유가 있어야 합니다. 이런 겸손이 있을 때 우리는 하나 될 수 있습니다.

 

(미움을 녹이는 울음)

 

4절을 보십시오. “에서가 달려와서 그를 맞아서 안고 목을 어긋맞기고 그와 입맞추고 피차 우니라

 

에서는 미움이 가득차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의 미음을 사랑으로 바꾸어 주셨습니다. 에서는 반갑게 달려왔습니다. 그는 야곱을 끌어 안았습니다. 그리고 목을 어긋 맞추었습니다. 엉엉 울었습니다. 이 울음은 회개하는 울음입니다. 미워했던 죄를 회개하고 거짓말한 죄를 회개하는 것입니다. 이 울음을 통하여 에서의 마음 속에 미움이 녹았습니다. 야곱의 마음 속에 두려움이 사라졌습니다. 야곱도 자신을 돌보신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하며 감격적으로 울었습니다.

하나님은 야곱이 회개했을 때 에서의 마음도 바꾸어 주셨습니다. 우리가 먼저 하나님 앞에서 회개하면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미워하는 사람들의 마음을 바꾸어 주십니다. 어느 딸이 집을 나갔습니다. 다른 소년들과 어울려 다니며 창녀처럼 살았습니다. 아버지는 딸을 버렸습니다. 독실한 기독교 신자인 아버지는 딸에게 분노하고 자신의 딸이 아니라고 선언했습니다. 그러나 그분이 하나님 말씀을 듣고 딸을 미워한 죄악을 회개하였습니다. 딸을 위해서 밤새 회개의 기도를 하였습니다. 딸에 대한 긍휼의 마음이 생겼습니다. 그날 새벽에 딸이 들어왔습니다. 딸은 몰래 돌아와서 옷만 가지도 다시 나가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뛰어나와 끌어안고 우는 아버지를 보고 딸은 회개하였습니다. 변화되어 거룩하고 아름다운 자매가 되었습니다.

 

(가족들과의 화해)

 

5-7절을 보십시오. “에서가 눈을 들어 여인과 자식들을 보고 묻되 너와 함께한 이들은 누구냐 야곱이 가로되 하나님이 주의 종에게 은혜로 주신 자식이니이다 때에 여종들이 그 자식으로 더불어 나아와 절하고 레아도 그 자식으로 더불어 나아와 절하고 그 후에 요셉이 라헬로 더불어 나아와 절하니

 

에서는 야곱의 아내들과 자식들을 보고 누구냐고 물었습니다. 에서가 미움에 가득차 있었을 때는 야곱의 가족들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에서가 사랑의 사람으로 바뀌었을 때 한 사람 한 사람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가족들이 소중하게 보였습니다. 깊은 관심과 애정을 가지고 그들의 안부를 물었습니다. 야곱의 처와 자녀들은 차례대로 나와서 에서에게 인사를 하였습니다. 아내들은 시아주버니를 만나는 것이요. 아이들은 큰 아버지를 만나는 것입니다 에서는 자신의 제수씨를 만나고 조카들을 만나는 것입니다. 이렇게 야곱과 에서가 화해하자 그 가족들도 다 화해하게 되었습니다. 얼마나 아름다운 광경입니까?

 

(은혜로 드리는 예물)

 

8-9절을 보십시오. “에서가 또 가로되 나의 만난바 이 모든 떼는 무슨 까닭이냐 야곱이 가로되 내 주께 은혜를 입으려 함이니이다. 에서가 가로되 내 동생아 내게 있는 것이 족하니 네 소유는 네게 두라

 

야곱은 에서에게 선물을 바칩니다. 강권하여 바칩니다. 그 이유는 두 가지로 볼 수 있습니다. 예물을 드리는 것은 은혜를 입었기 때문입니다. 본문에는 은혜라는 말이 세 번 반복되어 나옵니다. 선물을 줄 수 있는 것도 은혜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하나님이 물질을 축복하셨고 주고자 하는 마음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야곱은 에서에게도 은혜를 입었습니다. 야곱은 에서에게 장자권을 받는 은혜를 입었습니다. 에서에게 용서의 은혜를 입었습니다. 우리는 살면서 많은 은혜를 입었습니다. 이런 은혜는 선물로 갚아야합니다. 하나님은 선물을 드리는 자에게 하나님이 은혜를 주십니다. 우리가 화해하려면 좋은 선물을 드릴 수 있어야합니다.

 

(에서의 얼굴이 하나님의 얼굴처럼 보임)

 

10-11절을 보십시오. “야곱이 가로되 그렇지 아니하니이다. 형님께 은혜를 얻었사오면 청컨대 내 손에서 이 예물을 받으소서. 내가 형님의 얼굴을 뵈온즉 하나님의 얼굴을 본 것 같사오며 형님도 나를 기뻐하심이니이다. 하나님이 내게 은혜를 베푸셨고 나의 소유도 족하오니 청컨대 내가 형님께 드리는 예물을 받으소서. 하고 그에게 강권하매 받으니라.”

 

야곱은 에서의 얼굴이 하나님의 얼굴과 같이 보였습니다. 야곱의 마음 속에는 하나님이 계십니다. 그러니 모두가 하나님처럼 보였습니다. 우리는 마음 속에 무엇이 있는지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돼지의 눈에는 돼지만 보이고 하나님의 눈에는 하나님만 보이는 것입니다. 주위 사람들이 다 밉게 보이는 사람은 자신의 마음에 미움이 있는 것입니다. 눈에 똥만 보이는 자는 똥개입니다. 우리가 초막에 있고 채소만 먹어도 천국처럼 보이는 사람은 마음에 천국이 있는 사람입니다. 또한 야곱은 에서의 얼굴에서 친히 일하신 하나님을 보았습니다. 에서의 마음 속에 사랑을 주신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셔서 그 마음을 바꾸어주셨습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을 볼 때 그에게 역사하신 하나님을 보아야 합니다. 그러면 모든 사람이 사랑스럽게 보입니다. 우리 눈에 보이는 것은 우리 마음의 눈의 거울입니다.

 

(화해를 위한 대가를 치르신 예수님)

 

우리는 여기서 복음을 배웁니다. 화해는 맨입으로 안 된다는 것입니다. 화해를 위해서는 대가가 필요합니다. 한 사람이 남의 자동차를 박아서 찌그려뜨렸습니다. 아니면 사람을 쳐서 죽게 하였습니다. 그런데 잘못했다는 말만 가지고 화해가 됩니까? 아닙니다. 보상을 해야 합니다. 잠언 2114절에 보면 은밀한 선물은 노를 쉬게 하고 품의 뇌물은 맹렬한 분을 그치게 하느니라 고 나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도 화해하기 위해서는 대가가 필요합니다.

죄에 대해서 우리가 지불해야 하는 대가는 생명이요. 피입니다. 하나님은 이런 대가를 치르기 위해서 예수님을 십자가에 죽게 하셨습니다. 에베소서 216절에 보면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원수 된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라고 나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피 외에는 화해의 길이 없습니다. 우리 예수님의 피로 화목하기를 기도합니다. 예수님은 화목이 얼마나 중요한지 예배드리다가 원망 받을 일이 있으면 화목하고 와서 예배를 드리라고 하였습니다. 먼저 피해를 준 사람에게 손해배상을 해야합니다. 그렇습니다. 예배 전에 화목해야 합니다. 그만큼 화목은 중요합니다. 절대적입니다. 화목하지 않으면 상대방이 고소하고 죄가 있으면 지옥에 가야합니다. 우리는 생명을 잃기 전에 먼저 화목해야합니다.

 

(약자를 배려하는 야곱)

 

12-14절을 보십시오. “에서가 가로되 우리가 떠나가자. 내가 너의 앞잡이가 되리라. 야곱이 그에게 이르되 내 주도 아시거니와 자식들은 유약하고 내게 있는 양떼와 소가 새끼를 데렸은즉 하루만 과히 몰면 모든 떼가 죽으리니 청컨대 내 주는 종보다 앞서 가소서. 나는 앞에 가는 짐승과 자식의 행보대로 천천히 인도하여 세일로 가서 내 주께 나아가리이다

 

에서는 먼저 앞장 설 테니 따라오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야곱은 어린 자녀와 연약한 아내 그리고 어린 양들 때문에 함께 살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야곱은 약자에 대한 배려심이 생겼습니다. 지도자는 약자를 배려해야합니다. 특히 교회지도자는 더욱 그렇습니다. 교회 자도자는 항상 약자를 배려하고 교회를 이끌어가야 합니다. 약자를 구박하고 무시하면 교회는 무너집니다.

 

(화해 후에는 일정한 거리를)

 

15-17절을 보십시오. “에서가 가로되 내가 내 종자 수인을 네게 머물리라. 야곱이 가로되 어찌하여 그리 하리이까? 나로 내 주께 은혜를 얻게 하소서. 하매 이 날에 에서는 세일로 회정하고 야곱은 숙곳에 이르러 자기를 위하여 집을 짓고 짐승을 위하여 우릿간을 지은고로 그 땅 이름을 숙곳이라 부르더라.”

 

에서는 종자 몇사람을 야곱에게 머물게 하고자 하였습니다. 야곱을 보호해 주고자 하는 의도입니다. 그러나 야곱은 거절하였습니다. 왜냐면 하나님의 사자가 자신을 지켜주시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 에서와 일정한 거리를 두는 것이 서로의 평화에 좋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고슴도치의 사랑입니다. 고슴도치는 사랑하기 때문에 너무 가까이 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마음 속에는 고슴도치같은 이기심의 가시가 있습니다. 죄악의 가시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느 정도의 거리를 두어야 합니다. 하나님을 사이에 두고 만나야 합니다. 소금되신 예수님을 두고 화목해야합니다. 부부간에도 예의를 지키고 존댓말을 써야 합니다. 서로를 배려해야합니다. 함부로 말을 해서는 안 됩니다. 화목하기 위해서 거리를 두는 것은 역설적인 진리입니다.

 

(야곱의 불완전한 감사)

 

18-20절을 보십시오. “야곱이 밧단아람에서부터 평안히 가나안 땅 세겜 성에 이르러 성 앞에 그 장막을 치고 그 장막 친 밭을 세겜의 아비 하몰의 아들들의 손에서 은 일백개로 사고 거기 단을 쌓고 그 이름을 엘엘로헤이스라엘이라 하였더라.“

 

야곱은 큰 하나님의 은혜를 입었습니다. 그는 거의 죽음의 위기 가운데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친히 에서에게서 보호해 주셨습니다. 과거 하나님은 라반에게서도 보호해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야곱이 한 서원을 받으시고 약속대로 야곱을 보호해 주셨습니다. 이제는 야곱이 서원을 갚을 차례입니다. 야곱은 과거에 하나님이 자신을 위험 가운데서 지키사 고향으로 돌아가게 하시면 벧엘에서 단을 쌓고 하나님을 예배하겠다고 하였습니다. 그가 온전히 서원을 갚기 위해서는 벧엘로 올라가야합니다. 그러나 야곱은 벧엘로 가지 않고 세겜에서 단을 쌓고 예배드렸습니다. 그는 하나님께 감사를 드렸지만 그는 온전히 서원을 갚지 않았습니다. 그는 세겜에 머물고자 장막친 밭을 하몰의 아들들의 손에서 은 일백개로 샀습니다. 그는 세겜에 아주 머물고자 한 것 같습니다.

 

(현실에 안주하는 야곱)

 

야곱이 벧엘로 가지 않은 이유가 무엇일까요? 문제를 해결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잊었기 때문입니다. 화장실 갈 때 마음하고 나올 때 마음이 다릅니다. 돈 꿀 때 마음과 돈을 갚을 때 마음이 다릅니다. 다음으로 자식들을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세겜은 자녀들을 교육하기에 좋습니다. 세겜은 문화적으로 발달한 곳입니다. 그러나 벧엘은 삭막한 곳입니다. 이런 현실적인 이유로 타협해서는 안됩니다. 세겜에 남았을 때 오히려 자녀들에게 큰 문제가 생깁니다. 야곱은 절대적인 자세로 벧엘로 올라가 서원을 갚아야 합니다.

이상에서 우리가 화해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화해를 유지하는 것도 중요한 것을 배웁니다. 우리는 화해를 유지하기 위해서 사람과는 일정한 거리가 필요하고 하나님과는 더욱 친밀해져야 합니다. 그것이 생명의 길입니다. 야곱은 온전히 하나님과 친밀하지 않았습니다. 다음 장에 나오지만 야곱이 세겜에 머물자 많은 문제가 발생합니다. 야곱은 다말이 성폭행을 당하고 아들들이 살인과 약탈을 합니다. 세겜 사람과는 다시 원수 관계를 맺게 됩니다.

 

(화해의 우선성)

 

결론적으로 가화만사성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가정이 화목해야 모든 일이 잘 된다는 말입니다. 이는 모든 경우에 적용됩니다. 직장이 화목해야 직장이 발전합니다. 교회가 화목해야 새 양들이 성장합니다. 국가가 화목해야 나라가 발전합니다. 세계가 화목해야 인류가 평화합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대로 모든 사람과 화목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아멘.

창세기 33장 강해 야곱과 에서의 화해

창세기 331-창세기 3320

요절 창세기 334절 에서가 달려와서 그를 맞아서 안고 목을 어긋맞기고 그와 입맞추고 피차 우니라

창세기 33장 강해 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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