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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주의 대학생 선교기관

천안UBF

성경66권강해서

창세기 32장 강해 2부 네이름이 무엇이냐

작성자 : 오요한
작성일 : 2006-12-17 00:00:00
조회수 : 3,042

문제지풀이(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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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32장 강해 2부 네 이름이 무엇이냐?

말씀 창세기 3221-창세기 3232

요절 창세기 3227절 그 사람이 그에게 이르되 네 이름이 무엇이냐 그가 가로되 야곱이니이다.

 

여러분 진정한 복이 무엇입니까? 진정한 복음이 무엇입니까? 저는 복음을 깨달은 후에 복음에 대해서 많은 말씀을 전하였습니다. 그 복음을 알리고자 힘을 썼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복음을 전하여도 스스로 깨닫지 않으면 복음을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복음을 나의 것으로 깨닫고 나의 것으로 만들어야 합니다. 나의 것으로 생활화해야 합니다. 그리고 매일 매일 복음을 누려야합니다.

오늘 말씀에 보면 야곱이 복음을 깨닫는 과정입니다. 야곱이 복음을 깨닫는 과정은 그의 인생이 파란만장한 것같이 아주 극적입니다. 오늘 말씀을 통하여 진정한 복음을 소유하는 자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아주 이기적인 야곱)

 

21-23을 보십시오. “그 예물은 그의 앞서 행하고 그는 무리 가운데서 경야하다가 밤에 일어나 두 아내와 두 여종과 열 한 아들을 인도하여 얍복 나루를 건널 쌔 그들을 인도하여 시내를 건네며 그 소유도 건네고

 

야곱은 예물도 아내와 자녀도 다 얍복강을 건너보냈습니다. 야곱은 홀로 얍복 강에서 밤을 보냅니다. 그의 내면은 밤과 같이 어두웠습니다. 그는 자신을 죽이고자 오는 에서로 인하여 심히 두렵고 답답했습니다.

뒤에 야곱이 형 에서를 만나는 과정을 보면 지금 가족들이 어떤 순서로 에서를 향해서 가는지 알 수 있습니다. 332절에 보면 맨 앞에는 여종과 자식을 두었습니다. 다음에는 레아와 자식을 두었습니다. 그 다음에는 라헬과 요셉을 두었습니다. 그리고 맨 나중에는 자신이 있었습니다. 그는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들의 순서대로 뒤에 있게 합니다. 야곱은 에서가 가족을 죽이면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일수록 늦게 죽게 하고자 하였습니다. 자신이 맨 뒤에 있었던 것은 자신을 가장 사랑하였다는 것입니다. 가족들이 죽는 것을 보면 자신은 홀로 도망가고자 하였습니다.

야곱은 아주 이기적인 사람입니다. 진짜 사나이라면 가장 앞에 서서 이렇게 말해야 옳습니다. “형님, 저를 죽여 주십시오. 저의 아내와 자녀는 죄가 없으니 살려 주십시오.” 이렇게 말하면 얼마나 멋있습니까? 그러나 야곱은 반대였습니다. “형님, 가족은 다 죽이십시오. 그러나 나는 살아야 하겠습니다.” 가족들은 다 죽고 자신 혼자만 살려고 하다니 참으로 이기적인 사람입니다. 지독한 이기주의자입니다.

 

(인생은 결국 혼자 가는 것)

 

24a를 보십시오. “야곱은 홀로 남았더니

 

이는 매우 시적인 표현입니다. 그는 죽음 앞에서 홀로 하나님 앞에서 서 있습니다. 죽음 앞에서는 장자의 명분도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돈도 사랑하는 아내도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우리는 혼자 왔습니다. 비록 야곱이 쌍둥이로 태어났을지라도 하나씩 나왔지 둘이 함께 나온 것은 아닙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죽을 때도 혼자 죽는 것이지 둘이 함께 죽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 홀로 서서 자신의 죽음을 생각해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일대일로 서서 자신의 죽음을 생각해보아야 합니다.

제가 아는 목사님은 이백 명 이상의 제자를 양성한 교회의 목회자였습니다. 그는 고혈압으로 죽음 바로 직전에까지 갔습니다. 그분은 그때 아내도 양도 물질도 생각나지 않고 오직 한 가지만 생각났다고 합니다. 내가 지금 죽으면 천국에 갈 수 있느냐 지옥에 갈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우리는 죽음 앞에서 홀로 서서 나의 죄 문제를 고민해 보아야 합니다. 그때는 부모나 아내의 덕으로 천국에 갈 수 없습니다.

 

(야곱과 씨름하신 하나님)

 

24b를 보십시오. “어떤 사람이 날이 새도록 야곱과 씨름하다가

 

어떤 사람이 야곱과 씨름하고 있었습니다. 어떤 사람은 하나님이 사람의 모습으로 찾아오신 분입니다. 그분은 야곱과 씨름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야곱을 넘어뜨리고자 하고 야곱은 하나님을 넘어뜨리고자 하였습니다. 하나님이 왜 야곱을 넘어뜨리고자 했을까요? 야곱이 도망가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은 야곱이 가족에 대해서 책임감 있는 사람이 되기를 원하셨습니다. 뒤로 물러나는 자가 아니요. 앞으로 나아가는 자가 되기를 원했습니다. 하나님은 야곱이 하나님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 벧엘로 나아가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는 앞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여기서 야곱이 위대한 것은 하나님이 씨름을 걸자 하나님과 씨름을 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는 도망가려고 하지 않고 하나님을 붙잡고 씨름하였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붙잡고 하나님께 나아가 자신의 죽음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였습니다. 여기서 야곱이 하나님과 씨름했다는 것은 위대한 것입니다. 우리는 씨름을 하며 살아갑니다.

야곱은 지금까지 에서와 씨름하여 장자의 명분을 얻었습니다. 라반과 씨름하여 아내 라헬을 얻었고 양과 씨름하여 거부가 되었습니다. 이제는 하나님과 씨름합니다. 우리가 죽음의 문제를 해결하고 죄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하나님과 씨름해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하는 씨름은 밤새 말씀 소감을 쓰기 위해서 투쟁하는 것입니다. 밤이 맟도록 하나님과 기도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를 부르실 때나 십자가를 지실 때 하나님과 씨름하였습니다. 우리도 인생의 심각한 고민이 있을 때 사람들과 다투지 말고 하나님과 씨름해야 합니다.

한나는 아이를 갖지 못할 때 첩 브닌나로부터 많은 괴롬을 당했습니다. 이때 한나는 사람들과 씨름하지 않았습니다. 한나는 하나님과 씨름을 하였습니다. 그래서 위대한 주의 종 사무엘의 어머니가 되었습니다. 우리도 사람과 씨름하기보다는 하나님과 씨름을 해야 합니다. 회사의 사장과 씨름하기보다는 하나님과 씨름해야 합니다. 집의 남편이나 아내와 씨름하기보다는 하나님과 씨름을 해야 합니다.

 

(야곱에게 져주신 하나님)

 

25a절을 보십시오. “그 사람이 자기가 야곱을 이기지 못함을 보고

 

그 사람은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과 야곱과 씨름하여 이기지 못했습니다. 야곱이 하나님과 씨름하여 이겼습니다. 어떻게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질 수 있습니까? 하나님이 야곱에게 진 것이 아니라 져주신 것입니다. 자녀가 부모님들에게 간절히 울고 떼를 쓰면 져주시는 경우가 있습니다.

저는 초등학교 6학년 때 서울로 수학여행을 갔습니다. 가난한 우리 집은 나를 수학여행 보내 줄 형편이 못 되었습니다. 나는 풀이 죽어서 학교에서도 책상 위에 퍼져 있었습니다. 친구들이 이 모습을 부모님께 말씀 드리자 부모님은 수학 여행을 가도록 허락해주셨습니다. 부모님이 나에게 져 주신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은 야곱의 강한 인간성을 인해 야곱에게 져주셨습니다. 야곱이 하나님과의 싸움에서 이겼다는 것은 기도의 응답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야곱의 위대한 점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기도하며 응답이 있어도 좋고 없어도 좋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야곱은 집념의 사람입니다. 어찌하든지 이루고자 하는 간절한 소망이 있습니다. 그는 지금까지 사람과의 싸움에서 싸워 이겼지만 이제 하나님과의 싸움에서 이겼습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이 다 해 주실 것인데 가만히 있으라고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간절히 찾고 구하고 두드리는 자에게 일하십니다. 우리가 신입생 한 양을 섬기고자 하는 소원을 가지고 밤새 기도할 때 주님은 양을 주십니다. 우리는 감나무 밑에서 감 떨어질 때를 기다리지 말고 감이 떨어지지 않으면 감나무를 흔들고 그래도 안 되면 감나무에 올라가기라도 해야 합니다. 그런 극성스러움이 있을 때 하나님은 일하십니다.

 

(야곱의 환도뼈를 치신 하나님)

 

25b를 보십시오. “야곱의 환도뼈를 치매 야곱의 환도뼈가 그 사람과 씨름할 때에 위골되었더라.”

 

하나님께서는 야곱에 대한 기도의 응답으로 야곱의 환도뼈를 쳐서 위골되게 하셨습니다. 환도뼈는 대퇴골이라고 합니다. 환도는 군인들이 차는 칼을 말합니다. 환도 칼은 보통 골반이 있는 곳에 찹니다. 그래서 환도뼈를 골반뼈라고도 합니다. 사람들에게 허리는 힘을 지탱하는 중심입니다. 골반뼈가 무너지면 힘을 쓸 수 없습니다. 특히 씨름할 때는 가장 중요한 부분입니다. 환도뼈가 중요한 것은 환도뼈가 위골되면 생명을 잃을 수도 있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환도뼈를 치신 것은 야곱이 더 이상 자신을 의지하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야곱이 자신을 의지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만 의지하기를 원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자신에 대해서 포기하고 하나님만 의지할 때 우리를 도우실 수 있습니다.

물에 빠진 사람은 막 구해달라고 발버둥칩니다. 그를 구하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물에 더욱 쳐 넣어서 완전히 힘을 빼게 해야 합니다. 힘이 남아 있을 때 물에 빠진 사람을 건지면 그 사람이 건지려는 사람을 붙들고 함께 물속에 들어갑니다. 그러나 힘이 다 빠졌을 때 구하면 순순히 따라오게 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으려면 자신에 대해서 완전히 포기하고 하나님의 도우심만을 구해야 합니다.

 

(한 마음을 갖게 하신 하나님)

 

야곱의 또 다른 문제는 두 마음을 품고 있는 것입니다. 그는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선물도 보냈습니다. 하나님의 도우심을 갈망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만약을 생각했습니다. 하나님이 만약 도와주시지 않으면 그는 튼튼한 허리와 두 다리로 도망가고자 하고 있었습니다. 두 마음을 품고 기도하면 하나님이 아무리 능력이 있어도 도우실 수 없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배수진을 치고 한 마음으로 기도해야 합니다. 사람은 자신이 힘이 있을 때는 교만하여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지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겸손하게 하나님만을 의지하도록 그 사람의 의지하는 환도뼈를 치십니다.

 

(환도뼈를 맞은 사람들)

 

조용기 목사님은 페병과 심장병으로 생명의 환도뼈를 맞았습니다. 최자실 목사님은 사업이 부도가 나서 물질의 환도뼈가 부러지고 곽선희 목사님은 아버지가 총살 당하고 어머니와 헤어지는 가족 상실의 환도뼈를 맞으셨습니다. 빅토리 위고는 외동딸이 죽는 환도뼈를 맞았습니다. 우리 가운데 간호사 국가고시 시험이 떨어지는 환도뼈를 맞고 신앙생활을 하는 분도 있습니다. 어떤 분은 아들이 죽는 환도뼈를 맞고 선교사로 가신 분도 있습니다. 이 분들은 환도뼈가 부러진 후에 온전히 하나님을 의지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선민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을 의지하도록 환도뼈를 치셨습니다. 6-700백년을 이방민족의 침략을 받게 하셨습니다. 그래도 이들은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어쩔 수 없이 자신의 외아들의 환도뼈를 치셨습니다. 환도뼈 뿐만 아니라 목뼈도 치시고 생명을 끊으셨습니다. 이는 예수님의 십자가를 보며 온전히 하나님을 의지하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우리도 예수님의 십자가를 보면서 하나님만을 온전히 의지해야 합니다. 우리의 성실은 좋은 것입니다. 그러나 성실로 인하여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으면 문제가 됩니다.

 

(영생을 구하는 야곱)

 

26절을 보십시오. “그 사람이 가로되 날이 새려하니 나로 가게 하라 야곱이 가로되 당신이 내게 축복하지 아니하면 가게 하지 아니하겠나이다.”

 

야곱은 하나님을 붙잡고 가지 못하게 매달렸습니다. 환도뼈를 맞고는 더욱 간절히 매달렸습니다. 축복하지 아니하면 보내지 않겠다고 하였습니다. 호세아 123,4절에 보면 울면서 매달렸다고 말합니다. 환도뼈를 맞은 후에 야곱의 자세가 완전히 바뀌었습니다. 지금까지는 만약에 하나님이 도와주시지 않으면 도망가고자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한 마음으로 하나님께 기도하였습니다. 전에는 교만하게 기도하였지만 이제는 겸손히 기도하였습니다. 이제는 하나님이 떠나고자 하고 야곱이 매어달렸습니다. 이제 야곱은 하나님이 도와주시지 않으면 죽음뿐이 없습니다. 야곱은 한 마음으로 기도하였습니다. 절대적인 자세로 기도하였습니다. 하나님이 야곱의 환도뼈를 치신 이유는 바로 이것을 원하였기 때문입니다. 야곱의 훌륭한 점은 환도뼈를 맞고 하나님께 매어달린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환도뼈를 맞고 마음에 더 쓴 뿌리가 생긴 사람이 있습니다. 내가 잘못했어도 하나님이 어떻게 환도뼈를 치신다는 말인가 하나님께 불신과 원망을 갖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환도뼈가 위골 되었지만 절대적인 자세로 하나님께 매어달리는 것입니다.

그러면 야곱이 울면서 축복해 달라고 한 것은 무엇입니까? 그는 지금 물질도 얻었고 사랑도 얻었고 명예도 얻었습니다. 그는 우리가 얻기를 바라는 축복을 다 얻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갖지 못한 것이 하나 있었습니다. 그것은 생명입니다. 영생입니다. 하나님 자신입니다. 죽음 앞에서는 이런 모든 것이 쓸데없습니다. 그는 마지막으로 영생을 얻기를 원했습니다. 하나님은 야곱에게 복주시기를 원하셨습니다. 어떻게 복을 주셨습니까?

 

(야곱의 이름을 바꿔주신 하나님)

 

27-28절을 보십시오. “그 사람이 그에게 이르되 네 이름이 무엇이냐 그가 가로되 야곱이니이다. 그 사람이 가로되 네 이름을 다시는 야곱이라 부를 것이 아니요, 이스라엘이라 부를 것이니 이는 네가 하나님과 사람으로 더불어 겨루어 이기었음이니라.”

 

하나님은 야곱을 축복하시기 위해서 이름을 물으셨습니다. 야곱은 자신의 이름이 야곱이라고 하였습니다. 야곱은 다리를 잡은 자, 빼앗는 자, 속이는 자의 이미지가 있습니다. 야곱은 이기적인 자입니다. 자신이 강해서 어지간히 힘들어서는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는 자입니다. 이것이 야곱의 죄입니다. 죄는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자신을 의지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중심이 아니라 자기 중심인 것입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을 믿지 못하는 불신입니다. 내가 주인이 되고 왕이 되는 것입니다.

야곱은 이런 죄악으로 에서와 갈등을 하였고 라반과도 갈등을 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마음을 몰랐고 다른 사람들의 마음을 몰랐습니다. 사람들이 언제 고통하는지 하나님이 언제 슬퍼하는지를 몰랐습니다. 이런 죄 문제를 해결해야 영생을 얻을 수 있습니다.

영생이란 무엇입니까? 영생이란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을 소유하는 것입니다. 언제든지 하나님을 믿음으로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 안에 살아계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나의 삶에 주인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자신을 의지하는 마음을 회개해야 합니다. 오로지 하나님만을 의지함으로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야곱의 이름을 아스라엘로 바꾸어 주셨습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과 겨루어 이긴 자라는 뜻입니다. 기도의 응답을 받은 자라는 뜻입니다. 의역하면 하나님이 다스린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생명을 소유하였다는 말입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백성, 하나님의 황태자라는 뜻이 있습니다. 야곱은 사깃꾼에서 하나님의 황태자로 거듭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생명을 얻고 진정한 복을 받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하나님만이 나의 진정한 복인 것을 깨닫고 하나님으로 사는 사람이 복음을 아는 사람입니다. 어느 때든지 하나님을 의지하며 믿음으로 사는 사람이 복음으로 사는 사람입니다.

 

(야곱을 축복하신 하나님)

 

29절을 보십시오. “야곱이 청하여 가로되 당신의 이름을 고하소서. 그 사람이 가로되 어찌 내 이름을 묻느냐? 하고 거기서 야곱에게 축복한지라.”

 

야곱은 하나님의 이름을 물어보았습니다. 하나님은 여호와 하나님이십니다. 스스로 계신 하나님이십니다. 야곱을 사랑하시는 은혜로우신 하나님이십니다. 야곱을 아시고 뱃속에서 선택하신 분이십니다. 야곱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야곱을 변화시키시고 치료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좋으신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이름을 알려주시지 않고 야곱을 복주셨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복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시기를 원하시고 지키시기를 원하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야곱에게 영생을 주셨습니다.

 

(야곱에게 해가 돋음)

 

30,31절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야곱이 그곳 이름을 브니엘이라 하였으니 그가 이르기를 내가 하나님과 대면하여 보았으나 내 생명이 보전되었다 함이더라. 그가 브니엘을 지날 때에 해가 돋았고 그 환도뼈로 인하여 절었더라.”

 

야곱은 그곳 이름을 브니엘이라고 하였습니다. 브니엘의 뜻은 하나님의 얼굴이라는 뜻입니다. 그는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하나님을 소유하였습니다. 사랑의 하나님, 복주시는 하나님을 소유하였습니다. 은혜로우신 여호와 하나님을 소유하였습니다.

야곱이 브니엘을 지날 때에 해가 돋았습니다. 마음에 두려움과 답답함이 사라지고 영생이 주시는 기쁨과 평화가 생겨났습니다. 새로운 세계가 열렸습니다. 어둠의 자식에서 빛의 자녀로 사단의 자식에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사실 지금도 에서는 300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오고 있습니다. 환경은 바뀌지 않았지만 야곱의 내면이 바뀌니 모든 것이 달라져 보였습니다. 그는 에서가 와도 지금이 너무 행복하였습니다. 그는 에서가 사랑스럽게 보였습니다. 이것이 복음을 깨달은 자의 삶입니다. 야곱이 외적으로 바뀐 것은 다리를 저는 것입니다. 그것은 야곱이 자신을 의지하지 않고 하나님을 의지하는 겸손한 사람이 된 것을 의미합니다. 야곱은 평생을 절며 살았습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십자가를 지고 살았습니다. 이 십자가가 야곱을 평생 겸손하게 하고 하나님을 의지하게 하였습니다. 약하고 두렵고 떨림으로 성령을 의지하였습니다.

사도 바울은 질병이 있었습니다. 이 병을 고쳐 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하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병을 고쳐주시지 않았습니다. 이는 사도바울의 받은 은사가 커서 교만해 지지 않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환도뼈를 꺾고 약점을 주실 때도 있습니다. 이는 하나님 한 분을 의지하라고 주신 하나님의 십자가입니다. 우리는 이 십자가를 지고 절룩거리며 하나님을 의지하며 살아야 합니다.

 

(이스라엘 후손에게 주는 교훈)

 

32절을 보십시오. "그 사람이 야곱의 환도뼈 큰 힘줄을 친고로 이스라엘 사람들이 지금까지 환도뼈 큰 힘줄을 먹지 아니하더라."

 

이후부터 야곱의 후손들은 환도뼈 큰 힘줄을 먹지 않습니다. 야곱이 환도뼈가 부러진 것은 환상이나 꿈이 아닙니다. 역사적인 사실입니다. 이를 통하여 이스라엘 자손은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자신을 의지하면 환도뼈를 치신다는 좋은 교훈을 받게 되었습니다.

 

(내면의 변화가 중요함)

 

결론적으로 우리는 위기의 상황을 만날 때가 있습니다. 우리는 이 환경을 바꾸고자 안간힘을 씁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것은 복음을 알고 하나님 한분을 소유하고 마음에 참평안을 찾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아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믿어주시고 지켜주시고 복주시고자 하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나의 허물을 감당하시고 나를 칭찬하여주시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우리 자신이 회개하고 믿음으로 변화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인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변화되면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날지라도 하나님 안에서 행복을 얻을 수 있습니다. 에서와 같이 400명의 군사가 와도 온세상이 하나님 나라와 같이 변화됩니다. 우리는 예수님 안에서 지금 여기서 하나님 나라를 알고 하나님 나라를 누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아멘!

창세기 32장 강해 2부 네 이름이 무엇이냐?

말씀 창세기 3221-창세기 3232

요절 창세기 3227절 그 사람이 그에게 이르되 네 이름이 무엇이냐 그가 가로되 야곱이니이다.

창세기 32장 강해 이부 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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