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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주의 대학생 선교기관

천안UBF

성경66권강해서

창세기 25장 강해 야곱과 에서

작성자 : 오요한
작성일 : 2006-06-18 00:00:00
조회수 : 3,980

문제지풀이(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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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25장 강해 야곱과 에서

말씀 창세기 251-창세기 2540

요절 창세기 2534절 그 아들들이 그의 태 속에서 서로 싸우는지라 그가 이르되 이럴 경우에는 내가 어찌할꼬 하고 가서 여호와께 묻자온대

 

우리는 미래를 알지 못합니다. 당장 내일 있을 대한민국과 프랑스와의 축구경기도 어떻게 될지 아무도 모릅니다. 그래서 때로는 불안하고 두려워집니다. 절망을 할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말씀을 보면 우리의 미래를 알 수 있는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미래를 예정하시고 인도하시는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미래를 영광스럽게 하십니다.

하나님이 인도하신다고 해서 우리는 로버트와 같이 가만히 있으면 되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자유의지를 존중하며 인도하십니다. 우리는 미래를 위해서 영적인 가치관을 가지고 적극적으로 순종하고 도전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우리의 미래는 하나님의 주권과 섭리 그리고 우리의 믿음을 통하여 신비롭게 이루어집니다. 오늘 말씀에는 야곱과 에서에 두신 하나님의 섭리가 나옵니다. 또한 야곱과 에서의 가치관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

 

(아브라함의 후처)

 

1-4절을 보십시오. “아브라함이 후처를 취하였으니 그 이름은 그두라라. 그가 시므란과 욕산과 므단과 미디안과 이스박과 수아를 낳았고 욕산과 스바와 드단을 낳았으며 드단의 자손은 앗수르 족속과 르두시 족속과 르움미 족속이며 미디안의 아들은 에바와 에벨과 하녹과 아비다와 엘다아니 다 그두라의 자손이었더라.”

 

이 말씀에는 아브라함의 후처에 대해서 나옵니다. 저는 지난 해 창세기 말씀 공부를 하다가 이곳에서 멈췄습니다. 아브라함이 사라가 죽은 후에 후처를 다시 얻었다는 것이 마음에 영접이 안 되었기 때문입니다. 사라가 죽은 후에 그냥 살지 꼭 후처를 얻을 이유가 무엇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 말씀을 생각하느라고 육 개월이 지났습니다. 그러나 이 말씀을 묵상하며 몇 가지 깨달은 바가 있었습니다.

아브라함이 후처를 얻은 것을 성경에 기록한 것은 성경이 진실하다는 점을 보여줍니다. 성경은 모든 믿음의 영웅들의 빛과 그림자를 다 기록해 놓습니다. 성경은 아브라함의 모든 실수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두 번에 걸쳐서 아내를 누이라고 속인 것, 첩을 얻은 것, 사명의 땅을 두 번이나 떠난 것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사람들의 위대한 점만 기록하지는 않았습니다. 다윗의 살인, 간음 사건, 모세의 살인 사건, 혈기를 부린 사건을 다 사실적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들의 훌륭함보다는 하나님의 은혜가 드러나게 됩니다.

아브라함이 후처를 얻은 것은 그가 사라를 사랑했음을 역설적으로 보여줍니다. 아내를 사랑하는 사람이 아내가 죽은 후에 혼자 살지 못한다고 합니다. 아브라함은 사라 없이는 살 수 없어서 후처를 얻었습니다.

대전의 한 목사님은 아내를 무척이나 사랑하였습니다. 아내가 죽은 지 일 년도 안 되어 다른 아내를 얻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어떻게 그럴 수 있느냐고 했지만 그분의 아내에 대한 진심을 아는 사람들은 그것을 이해하였습니다.

아브라함의 후처 소생 중에는 모세의 장인 이드로와 같이 휼륭한 사람이 있습니다. 그를 통해서 모세의 후손이 태어났습니다. 이스라엘을 공격한 미디안 족속과 같이 죄악된 자도 있습니다. 미디안 족속은 이스라엘을 약탈하고 이스라엘을 괴롭힙니다. 우리는 아브라함이 후처를 얻은 것을 일방적으로 정죄할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연약함을 감당하며 모든 것을 통하여 선을 이루셨습니다.

아브라함이 후처를 얻은 것은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놀랄만한 건강을 주셨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사라는 127세에 죽었습니다. 현재 아브라함의 나이는 137세가 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삭을 낳은 후 아브라함을 회춘하게 하셔서 아브라함이 137세가 넘도록 아브라함을 강건하게 하시고 생명력이 넘치게 축복하여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믿음으로 사는 자를 영혼이 잘 됨같이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게 하십니다.

 

(명품 제자의 양성)

 

5,6절을 보십시오. “아브라함이 이삭에게 자기 모든 소유를 주었고 자기 서자들에게도 재물을 주어 자기 생전에 그들로 자기 아들 이삭을 떠나 동방 곧 동국으로 가게 하였더라.”

 

아브라함은 자기의 모든 소유를 이삭과 모든 서자들에게 나누어 주었습니다. 그러나 서자들은 이삭을 떠나 동방으로 가게 했습니다. 아브라함은 이삭 한 사람만을 자신의 계승자로 인정하였습니다. 아브라함의 종도 믿음이 있었고 이스마엘도 믿음이 있었습니다. 후처의 아들들도 믿음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이삭만이 약속의 땅에 거하게 하였습니다. 이삭만을 진품으로 인정하고 참된 자신의 계승자로 인정하였습니다. 아브라함은 이삭 한 사람만을 후계자로 인정함으로 철저한 제자 양성을 하였습니다. 명품 제자양성을 하였습니다.

 

(아브라함의 죽음)

 

7-10절을 보십시오. “아브라함의 향년이 일백 칠십 오세라. 그가 수가 높고 나이 많아 기운이 진하여 죽어 자기 열조에게로 돌아가매 그 아들 이삭과 이스마엘이 그를 마므레 앞 헷족속 소할의 아들 에브론의 밭에 있는 막벨라 굴에 장사 하였으니 이것은 아브라함이 헷 족속에게서 산 밭이라. 아브라함과 그 아내 사라가 거기 장사되니라.”

 

아브라함은 175세까지 살았습니다. 75세에 믿음으로 출발하여 100년을 믿음으로 살았습니다. 그는 믿음으로 살다가 믿음으로 죽었습니다. 그는 죽어서 열조에게로 돌아갔습니다. 죽음은 끝이 아닙니다. 우리는 하늘나라에서 와서 하늘나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죽어서 믿음으로 약속의 땅 막벨라 굴에 묻혔습니다. 그의 아내 사라와 함께 묻혔습니다. 그는 고향인 메소포타미아 지방으로 돌아가지 않고 약속의 땅에 묻히기를 원하였습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약속의 땅을 자손들에게 주실 것을 믿었습니다. 약속의 땅 하나님 나라를 소망하며 죽었습니다.

 

(아브라함의 복을 계승하는 이삭)

 

11절을 보십시오. “아브라함이 죽은 후에 하나님이 그 아들 이삭에게 복을 주셨고 이삭은 브엘라해로이 근처에 거하였더라.”

 

아브라함이 죽은 후에 하나님은 이삭에게 복을 주셨습니다. 이삭은 아브라함의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복의 근원은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을 소유한 사람이 복받은 사람입니다. 아브라함은 자신이 믿은 하나님을 이삭에게 물려주었습니다. 자신의 믿음을 이삭에게 물려주었습니다. 아브라함은 죽었으나 하나님은 죽지 않으셨습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복을 주었듯이 이삭에게도 복을 주셨습니다.

 

(이스마엘의 열두 방백)

 

12-18절에 보십시오. “12. 사라의 여종 애굽인 하갈이 아브라함에게 낳은 아들 이스마엘의 족보는 이러하고 13. 이스마엘의 아들들의 이름은 그 이름과 그 세대대로 이와 같으니라 이스마엘의 장자는 느바욧이요 그 다음은 게달과 앗브엘과 밉삼과 14. 미스마와 두마와 맛사와 15. 하닷과 데마와 여둘과 나비스와 게드마니 16. 이들은 이스마엘의 아들들이요 그 촌과 부락대로 된 이름이며 그 족속대로는 열두 지도자들이었더라 17. 이스마엘은 향년이 백삼십칠 세에 기운이 다하여 죽어 자기 백성에게로 돌아갔고 18. 그 자손들은 하윌라에서부터 앗수르로 통하는 애굽 앞 술까지 이르러 그 모든 형제의 맞은편에 거주하였더라

 

하나님은 이스마엘에게서 12방백을 낳게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과거 아브라함이 이스마엘이나 후계자로 살기를 바란다고 하였을 때 하갈을 통하여 이스마엘이 12방백을 낳을 것을 약속하여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약속대로 이스마엘의 후손을 축복하여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약속을 지키시는 신실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아브라함은 허물과 실수로 이스마엘을 낳았지만 하나님은 그 연약함과 허물을 감당하여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후손들을 축복하여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율법을 주셨으나 전혀 율법적이지 않습니다. 사랑과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이스마엘의 후손들들도 다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 받기를 원하십니다.

 

(기도의 사람 이삭과 리브가)

 

19-21절을 보십시오, “아브라함의 아들 이삭의 후예는 이러하니라. 아브라함이 이삭을 낳았고 이삭은 사십세에 리브가를 취하여 아내를 삼았으니 리브가는 밧단 아람의 아람 족속 중 브두엘의 딸이요, 아람 족속중 라반의 누이였더라. 이삭이 그 아내가 잉태하지 못하므로 그를 위하여 여호와께 간구하매 여호와께서 그 간구를 들으셨으므로 그 아내 리브가가 잉태하였더니.”

 

이삭은 믿음의 결혼을 통하여 리브가를 아내로 얻었습니다. 이삭이 결혼한 나이는 40세였습니다. 그런데 40이 지나고 오십이 가까워 와도 리브가는 아기를 갖지 못했습니다. 아버지 아브라함도 자녀를 낳지 못하였는데 이삭도 자식을 낳지 못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사랑하는 자를 시련을 통하여 훈련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은 사라가 아들을 낳지 못하자 문제에 빠져서 하나님께 불평하기도 하였습니다. 신앙 생활에 피해의식에 빠진 적도 있었습니다. 첩을 얻어서 서자 이스마엘을 낳기도 하였습니다. 사명을 떠나서 13년을 살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삭은 이런 아브라함의 실패를 반복하지 않았습니다. 이복형 이스마엘은 12 아들을 낳았는데 자신은 아들을 낳지 못했다고 하나님의 사랑을 불신하지 않았습니다. 이삭은 오직 하나님의 사랑과 능력과 주권을 믿음으로 살았습니다. 변함없이 리브가를 사랑했습니다. 이삭은 하나님을 절대적으로 신뢰했습니다. 낙망치 않고 기도하였습니다. 변함없이 기도하였습니다. 이삭은 믿음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아브라함이 믿은 하나님을 잘 계승하며 믿었습니다. 하나님은 이삭의 믿음을 받으시고 리브가에게 쌍둥이를 잉태하게 도우셨습니다. 우리에게도 한 사람의 제자양성의 열매가 없는 분이 있습니다. 이분들도 이삭처럼 변함없이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때에 제자의 열매를 주실 것을 믿습니다.

 

(기도를 생활화한 리브가)

 

22절을 보십시오 아이들이 그의 태 속에서 서로 싸우는지라. 그가 가로되 이같으면 내가 어찌할꼬? 하고 가서 여호와께 묻자온대

 

리브가가 쌍둥이를 잉태하였을 때 아이들이 배에서 싸움을 벌였습니다. 그들은 서로 먼저 나오려고 싸움을 벌였습니다. 리브가는 복통을 임산부의 당연한 현상으로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리브가는 배가 아픈 데도 그 가운데 하나님의 무슨 뜻이 있는가를 여쭈었습니다. 리브가는 이 작은 사건을 통해서도 하나님의 뜻을 찾았습니다.

리브가는 기도가 생활화되어 있었습니다. 리브가의 기도는 추상적이지 않습니다. 매우 현실적이고 구체적입니다. 우리가 배가 아플 때, 마음이 아플 때, 이가 아플 때, 이런 모든 때에 기도해야 함을 배웁니다. 우리의 생활을 통하여 하나님과 깊은 사랑의 관계를 맺어야 함을 배웁니다. 우리는 그린 축제 때 기도하자 하나님이 일하심을 체험했습니다.

 

(은혜의 복음)

 

23절을 보십시오.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두 국민이 네 태중에 있구나. 두 민족이 네 복중에서부터 나누이리라. 이 족속이 저 족속보다 강하겠고 큰 자는 어린 자를 섬기리라. 하셨더라.”

 

하나님은 리브가의 기도를 들으시고 하나님의 뜻을 계시하여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두 아이를 통하여 두 국민을 만드십니다. 둘째가 더 강해지고 첫째는 둘째를 섬기게 됩니다. 우리는 이 말씀에서 약간의 충격을 받습니다. 야곱과 에서가 아무 선을 행하지 않았습니다. 이들은 어떤 의지도 가지고 있지 않았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하나님을 야곱을 택하시고 야곱을 사랑하셨습니다.

우리는 이를 보면 하나님을 편애하시는 분이 아닌가 생각하기 쉽습니다. 하지만 여기에는 하나님의 깊은 복음의 비밀이 숨어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를 통하여 복음을 계시하셨습니다. 하나님은 태중에서 야곱을 택하신 것을 통하여 은혜의 복음을 계시하여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행위에 기초하여 부르지 않습니다. 우리의 노력이나 공로에 의해서 부르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의 절대적인 섭리와 주권에 기초하여 부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부르심은 절대적입니다. 우리의 부르심이 창세 전에 뿌리를 내리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흔들리지 않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절대적인 주권을 영접해야 합니다.

우리의 삶 가운데는 우리의 의지가 들어가지 않고 하나님의 절대주권에 속한 것들이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절대주권 가운데 황인종으로 한국에서 태어났습니다. 남자나 여자로 태어난 것도 하나님의 주권입니다. 우리의 키, 얼굴 형태, 성격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다만 믿고 순종함으로 받아들여야합니다. 하나님의 선하신 뜻으로 영접해야합니다.

우리의 구원과 부르심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이 우리가 어미 태에 있을 때부터 계획하시고 우리를 부르셨습니다. 우리는 처음에 구원받고자 하는 소원도 없었고 타락해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우리를 찾아오사 우리에게 소원을 주시고 우리를 인도해 주셨습니다. 우리가 구원 받은 것은 절대적인 은혜입니다. 우리는 오직 예수그리스도의 피의 은혜로 구원받았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았으므로 우리의 구원은 변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조금 잘못했다고 하나님은 버리지 않으십니다. 아들이 잘못했다고 부모가 아들을 호적에서 파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는 사랑의 하나님을 믿음으로 구원의 확신을 가질 수 있습니다. 우리 부모님은 내어나고자 하는 아무 소원도 의지도 없는 나를 이 세상에 태어나게 하셨습니다. 우리는 다만 태어난 사실을 받아들였습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이 우리를 먼저 창조하셨습니다. 우리는 창조주 하나님을 다만 믿음으로 영접해야합니다. 부모를 선택할 수 없듯이 우리는 하나님을 선택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천안 유비에프 교회를 선택했습니까?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의 절대적인 주권과 섭리로 우리를 인도해주셨습니다. 우리가 부부를 선택했습니까? 아닙니다. 하나님이 부부를 짝지워 주셨습니다. 우리가 부부를 선택했다면 우리는 싫어지면 버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짝지어 주셨으므로 우리는 다만 영접하고 감사해야 합니다. 따라서 부부 간에 이혼은 없습니다.

그러면 어떤 사람은 이는 너무 운명적이고 답답하다고 생각하시나요? 그렇지 않습니다. 이것은 사단이 주는 생각입니다. 운명과 섭리는 전혀 다릅니다. 운명은 우리를 망하도록 결정한 것입니다. 사단은 우리를 망하게 합니다. 사단은 인간의 자유 의지도 인격도 무시합니다. 운명적으로 생각하면 우리는 답답합니다. 운명은 인간의 의지가 전혀 들어가지 않는 결정론입니다. 하지만 섭리는 다릅니다. 하나님은 인격적으로 우리의 자유의지를 존중하시며 인도하십니다. 우리를 영광스럽게 하십니다. 우리를 잘 되도록 예정하셨습니다.

어떤 분은 하나님이 불공평하다고 생각하시나요? 하나님은 온 세상 사람들을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셔서 구원 받기를 원하십니다. 우리가 찾고 구하기만 하면 하나님은 성령을 주시고 예수님을 믿도록 도와주십니다. 하나님은 세상 모든 사람을 사랑하는 공평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에서도 믿음으로 살면 그도 아브라함의 후손으로 삼아주십니다. 하나님의 뜻은 신비롭습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은 우리의 미래를 영광스럽게 인도하십니다. 로마서 830절입니다.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하나님은 태초에 우리를 미리 아시고 예정하셨습니다. 때가 되자 주의 종을 통해서 우리를 부르십니다. 부르신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의롭다하십니다. 이제 하나님은 예수님을 통하여 우리를 영화롭게 하십니다. 이것이 우리의 예정된 미래입니다. 우리는 영광스러운 미래로 인도하실 하나님을 믿어야합니다.

 

(에서와 야곱의 명명命名)

 

24-26절을 보십시오. “그 해산 기한이 찬즉 태에 쌍둥이가 있었는데 먼저 나온 자는 붉고 전신이 갖옷 같아서 이름을 에서라 하였고 후에 나온 아우는 손으로 에서의 발꿈치를 잡았으므로 그 이름을 야곱이라 하였으며 리브가가 그들을 낳을 때에 이삭이 육십 세이었더라.”

 

창세기 저자는 야곱과 에서의 이름을 어떻게 지었는지 말합니다. 첫째 아들 에서는 가죽처럼 털이 많은 털 사람이었습니다. 그 얼굴은 불그스름했습니다. 그래서 붉다는 뜻으로 첫째의 이름을 에서라고 붙였습니다. 둘째인 야곱은 형 에서의 발꿈치를 잡고 나왔습니다. 그는 집념과 투쟁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잡았다는 뜻으로 이름을 야곱이라고 붙였습니다. 한 사람은 외모를 보고 이름을 붙였고 한 사람은 내면을 따라서 이름을 붙였습니다.

 

(에서를 사랑한 이삭)

 

27, 28절을 보십시오. “그 아이들이 장성하매 에서는 익숙한 사냥꾼인고로 들사람이 되고 야곱은 종용한 사람인고로 장막에 거하니 이삭은 에서의 사냥한 고기를 좋아하므로 그를 사랑하고 리브가는 야곱을 사랑하였더라.”

 

에서는 야성미가 넘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운동신경이 발달하고 사냥을 잘 하는 사냥꾼이었습니다. 이삭은 미식가였습니다. 이삭은 에서가 밋있는 고기를 많이 해오자 에서를 사랑했습니다. 이삭은 육적인 것에 기초하여 에서를 사랑하였습니다.

하지만 야곱은 가정적인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조용한 사람이고 장막에 거하여 어머니를 주로 도와주었습니다. 리브가는 자신과 함께 있는 야곱을 사랑하였습니다. 무엇보다 리브가는 임신할 때 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기억했습니다. 리브가는 하나님의 말씀에 기초하여 야곱을 사랑했습니다.

 

(장자의 명분을 판 에서)

 

29-33절을 보십시오. “야곱이 죽을 쑤었더니 에서가 들에서부터 돌아와서 심히 곤비하여 야곱에게 이르되 내가 곤비하니 그 붉은 것을 나로 먹게 하라 한지라. 그러므로 에서의 별명은 에돔이더라. 야곱이 가로되 형의 장자의 명분을 오늘날 내게 팔라 에서가 가로되 내가 죽게 되었으니 이 장자의 명분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리요? 야곱이 가로되 오늘 내게 맹세하라. 에서가 맹세하고 장자의 명분을 야곱에게 판지라.”

 

이 말씀에는 야곱이 어떻게 장자의 명분을 사게 되었는지 나옵니다. 야곱은 태어날 때부터 형의 발꿈치를 잡고 태어났습니다. 그는 태어난 후에도 차자로 태어난 것에 대해서 한이 맺혀 있었습니다. 야곱은 장자의 명분을 빼앗고자하는 마음이 가득했습니다. 어느날 기회가 왔습니다.

에서가 사냥에서 돌아와서 매우 배가 고팠습니다. 야곱은 이때를 노리고 에서를 위하여 팥죽을 쑤어서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야곱은 에서가 평상시 팥죽을 좋아한다는 것을 치밀하게 파악하고 있었습니다. 에서가 야곱에게 팥죽을 요구하자 대가로 장자의 명분을 팔라고 하였습니다. 에서는 말 합니다. ”내가 죽게 되었으니 장자의 명분이 무슨 유익이 있는가?“ 에서는 배고플 때는 장자의 명분이 아무 유익이 없다고 장자의 명분을 팝니다.

 

(장자의 명분을 경홀히 여긴 에서)

 

34을 보십시오. “야곱이 떡과 팥죽을 에서에게 주매 에서가 먹으며 마시고 일어나서 갔으니 에서가 장자의 명분을 경홀히 여김이었더라.”

 

창세기 저자는 이 사건에 대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에서의 가치관이 잘못되었음을 말합니다. 에서는 팥죽을 중시했고 명분을 경시했습니다. 그는 세상 것을 중시여기고 하나님을 경멸히 여겼습니다. 그는 실용주의적인 가치관을 가졌습니다.

이런 가치관은 현실적으로 많은 유익을 줍니다. 그러나 이런 가치관 때문에 그의 미래는 하나님의 구속 역사에서 제외되었습니다. 우리나라에서 장자권은 가문을 대표하는 기능이 있고 제사를 받드는 기능이 있습니다. 이스라엘서 장자권은 메시야의 조상으로 쓰임 받는 축복이 있습니다. 장자의 명분을 귀히 여기는 사람이 구속 역사에서 쓰임 받을 수 있습니다.

모세는 현실적 유익으로 살았다면 애굽의 왕자로 살아야 합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명분을 더 중시 여겼습니다. 그에게 하나님은 그 어떤 것보다 귀한 분이었습니다. 모세는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기 위해서 자신에게 이익이 되는 애굽의 왕자를 헌신짝처럼 버렸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가치관을 축복하셔서 모세를 출애굽의 지도자로 사용하셨습니다.

우리에게는 신자의 명분, 목자의 명분이 있습니다. 신자의 명분 즉 크리스찬으로 명분을 지키다가 목숨을 잃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들이 순교자들입니다. 그러나 자신의 유익을 위해서 신자의 명분을 버리는 사람도 있습니다. 현재는 명분을 파는 사람이 지혜롭게 보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죽은 후에는 명분을 지킨 자는 천국에 가고 명분을 판 자는 지옥으로 갑니다. 신자의 명분을 지킨 자들이 지혜로운 자들입니다. 우리에게 목자의 명분이 있습니다. 목자의 명분에는 의무와 희생이 따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 명분을 지키는 자에게 생명의 열매를 주십니다.

 

(영적 가치관의 중요성)

 

하나님은 우리의 미래를 영광스럽게 인도하십니다.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우리를 구원하시고 영화롭게 하십니다. 하지만 우리에게 단 한 가지 요구하시는 것이 무엇일까요? 그것은 영적 가치관이요 믿음입니다. 우리가 영적인 것을 경홀히 여긴다면 하나님의 섭리 속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우리는 태어나면서 사단이 다스리는 운명 속에서 살아가게 됩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섭리 속으로 들어가기만 하면 우리의 미래는 영광스럽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십니다. 우리가 믿음을 버린다면 우리는 슬픈 운명 속에 살 수밖에 없습니다. 에서와 같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믿음으로 살면 우리는 야곱과 같이 영광스럽게 살 것입니다. 우리와 프랑스와의 축구가 어떻게 될지 모르지만 하나님께서 합력하여 선을 이루실 것은 확신할 수 있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쪽으로 결과를 이루실 것입니다. 우리가 야곱과 같은 믿음으로 하나님의 섭리 속에 들어갈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영광스럽게 하시기를 기도합니다. 아멘!

창세기 25장 강해 야곱과 에서

말씀 창세기 251-창세기 25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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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25장 강해 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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