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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주의 대학생 선교기관

천안UBF

성경66권강해서

창세기 9장-11장 강해 무지개 언약

작성자 : 오요한
작성일 : 2005-05-01 00:00:00
조회수 : 3,892

문제지풀이(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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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9장 강해 일부 무지개 언약

말씀 창세기 91-창세기 929

요절 창세기 917절 하나님이 노아에게 또 이르시되 내가 나와 땅에 있는 모든 생물 사이에 세운 언약의 증거가 이것이라 하셨더라

 

영국의 유명한 낭만주의 시인 워즈워스의 무지개라는 시의 일부를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하늘의 무지개를 볼 때마다/내 가슴 설레느니,/나 어린 시절에 그러했고/다 자란 오늘에도 매한가지./쉰 예순에도 그렇지 못하다면/ 차라리 죽음이 나으리라

시인은 무지개를 볼 때마다 가슴이 뛴다고 말합니다. 그것은 나이가 들어서도 마찬가지라고 말합니다. 만약 쉰, 예슨에도 가슴이 뛰지 않으면 차라리 죽는 것이 낫다고 말합니다.

오늘 말씀에 보면 무지개에는 하나님의 사랑이 나타나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통해서 만들어 놓은 사랑의 무지개를 볼 때마다 가슴이 뜁니다. 우리의 가슴이 뛰지 않고 감동을 느끼지 않는다면 차라리 죽는 것이 나을 것입니다. 이 시간에 무지개에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을 배우고 가슴이 뛸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을 번성하라)

 

91절을 보십시오. "하나님이 노아와 그 아들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하나님은 노아에게 두 번이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온 지구에 노아 한 가족만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온 세계에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들이 가득하기를 원하셨습니다. 다만 정복하고 다스리라는 명령은 하지 않았습니다. 인간과 동물의 관계가 깨어진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그리스도의 사람들이 온 세상에 가득하게 해야합니다.

 

(고기를 식물로 주신 하나님)

 

2-3절을 보십시오. “땅의 모든 짐승과 공중의 모든 새와 땅에 기는 모든 것과 바다의 모든 고기가 너희를 두려워하며 너희를 무서워하리니 이들은 너희 손에 붙이웠음이라. 무릇 산 동물은 너희의 식물이 될찌라. 채소 같이 내가 이것을 다 너희에게 주노라.”

 

하나님은 인류에게 처음으로 육식을 허락하셨습니다. 우리 가운데 고기를 좋아하는 분들이 있는데 하나님의 은혜로 인간은 고기를 먹게 되었습니다. 불교에서는 고기를 먹지 못합니다. 유대교나 이슬람교에서는 고기를 먹되 돼지고기나 오징어 낙지를 먹지 못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고기를 먹을 수 있습니다. 고기를 먹으라고 하신 것은 하나님께서 동물의 생명을 경히 여기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동물보다 우리 인간을 더욱 사랑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동물도 사랑하시지만 동물보다 인간을 더욱 사랑하셔서 동물을 먹이로 주셨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에 감사함으로 고기를 먹어야 합니다.

 

(생명의 존엄성을 가르치신 하나님)

 

4-7절을 보십시오. “그러나 고기를 그 생명 되는 피 채 먹지 말 것이니라. 내가 반드시 너희 피 곧 너희 생명의 피를 찾으리니 짐승이면 그 짐승에게서, 사람이나 사람의 형제면 그에게서 그의 생명을 찾으리라. 무릇 사람의 피를 흘리면 사람이 그 피를 흘릴 것이니 이는 하나님이 자기 형상대로 사람을 지었음이니라. 너희는 생육하고 번성하며 땅에 편만하여 그 중에서 번성하라. 하셨더라

 

고기를 먹을 때 단지 주의할 것이 있습니다. 고기를 먹으면서도 생명의 소중함을 잊지 말아야합니다. 고기를 피채는 먹지 말아야합니다. 동물을 죽이다가 사람의 생명까지 경시해서는 안 됩니다.

특별히 사람의 생명을 죽여서는 안 됩니다. 사람의 생명은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었습니다.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을 입은 존엄한 존재입니다. 하나님은 세 번째로 반복하여 생육하고 번성하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사람을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해야 합니다. 이 지구 중에서 번성해야합니다.

 

(구원의 언약을 세우신 하나님)

 

8-11절을 보십시오. "하나님이 노아와 그와 함께한 아들들에게 일러 가라사대 내가 내 언약을 너희와 너희 후손과 너희와 함께한 모든 생물 곧 너희와 함께한 새와 육축과 땅의 모든 생물에게 세우리니 방주에서 나온 모든 것 곧 땅의 모든 짐승에게니라. 내가 너희와 언약을 세우리니 다시는 모든 생물을 홍수로 멸하지 아니할 것이라. 땅을 침몰할 홍수가 다시 있지 아니하리라.“

 

하나님은 다시는 홍수로 모든 생물을 멸하지 않겠다고 언약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인류를 구원을 하시겠다는 언약을 하셨습니다. 언약은 약속과 달리 일방적인 것입니다. 약속은 조건적입니다. 우리가 무엇을 하면, 무엇을 해주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언약은 어떤 상태에서든지 지키시겠다는 절대적인 것입니다. 우리의 행위와 상관없이 은혜로 지키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인간을 구원하시겠다고는 절대적인 약속을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이 죄악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아들을 보내사 구원하시고자 약속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창조주로 인간에 대해 일방적으로 책임을 지셨습니다. 인간을 무조건적으로 사랑하셨습니다. 언약에는 증거가 필요합니다. 하나님이 주신 증거는 무엇입니까?

 

(언약의 증거 무지개)

 

12-17절을 보십시오. "하나님이 가라사대 내가 나와 너희와 및 너희와 함께하는 모든 생물 사이에 영세까지 세우는 언약의 증거는 이것이라. 내가 내 무지개를 구름 속에 두었나니 이것이 나의 세상과의 언약의 증거니라. 내가 구름으로 땅을 덮을 때에 무지개가 구름 속에 나타나면 내가 나와 너희와 및 혈기 있는 모든 생물 사이의 내 언약을 기억하리니 다시는 물이 모든 혈기 있는 자를 멸하는 홍수가 되지 아니할찌라. 무지개가 구름 사이에 있으리니 내가 보고 나 하나님과 땅의 무릇 혈기 있는 모든 생물 사이에 된 영원한 언약을 기억하리라. 하나님이 노아에게 또 이르시되 내가 나와 땅에 있는 모든 생물 사이에 세운 언약의 증거가 이것이라 하셨더라.“

 

하나님이 인간과 함께 있는 숨 쉬는 모든 생물 사이에 대대로 세우는 언약의 표는, 바로 무지개입니다. 하나님이 무지개를 구름 속에 두셔서 무지개가 하나님과 땅 사이에 세우는 언약의 표가 될 것입니다. 하나님이 구름을 일으켜서 땅을 덮을 때마다, 무지개가 구름 사이에서 나타나면, 하나님은, 인간과 숨쉬는 모든 짐승, 곧 살과 피가 있는 모든 것과 더불어 세운 그 언약을 기억하십니다. 다시는, 홍수를 일으켜서 살과 피가 있는 모든 것을 물로 멸하지 않으십니다. 무지개가 구름 사이에서 나타날 때마다, 하나님이 그것을 보고, 여호와 하나님이, 살아 숨쉬는 모든 것들, 곧 땅 위에 있는 살과 피를 지닌 모든 것과 세운 영원한 언약을 기억하십니다. 하나님이 노아에게 반복하여 무지개가 하나님이 땅 위의 살과 피를 지닌 모든 것과 더불어 세운 언약의 표라고 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구원하시겠다는 언약의 증거로 무지개를 주셨습니다.

계시록 43절에는 하나님의 보좌에는 무지개가 하나님의 보좌를 둘렀다고 나옵니다. 하나님은 무지개를 보면서 언약을 기억하십니다. 사람들은 무지개를 보면서 심판의 두려움에서 벗어나게 됩니다. 하나님은 아름다운 무지개를 만들기 전에 홍수로 수십억의 인구를 죽게 하셨습니다. 수많은 문화재가 유실되게 하셨습니다. 이런 심판 속에 피어 오른 구원의 무지개는 아름답습니다. 빨주노초파남보 형형색색으로 아름답습니다. 아치형으로 우리를 감싸 안으시는 하나님의 아름다운 팔과 같습니다. 무지개는 사랑의 무지개요. 구원의 무지개요. 긍휼의 무지개입니다.

 

(영원한 언약의 증거 예수님)

 

하지만 이 무지개는 한계적입니다. 잠깐 있다가 없어집니다. 무지개가 우리의 내면의 죄를 제거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다시 새로운 무지개를 만드셨습니다. 그것은 피의 무지개입니다.

무지개를 영어로 레인보우라고 합니다. 비로 만든 활이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활을 자신의 쪽으로 향하여 자신에게 활을 겨누셨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에서 피를 흘려죽으셨습니다. 피의 언약을 맺으셨습니다. 피를 증거로 삼아서 하나님은 우리 인간과 영원한 언약을 맺으셨습니다.

마가복음 1423,24절 말씀이십니다. "또 잔을 가지사 사례하시고 저희에게 주시니 다 이를 마시매 가라사대 이것은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 박히기 전에 포도주를 제자들에게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그 포도주가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바 예수님의 피 곧 언약의 피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인간에게 그 피로 죄사함을 주시겠다고 언약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아버지가 되고 우리는 그의 자녀가 되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그 언약을 견고히 하시고자 십자가에 피 흘려 죽으셨습니다.

고대에는 약속을 할 때 짐승을 죽여서 피를 뿌렸습니다. 이는 약속을 지키지 않으면 죽여 버리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언약을 어긴 우리를 죽이는 대신 자기 외아들의 생명을 죽이시고 우리의 죄를 사해 주시고 우리의 하나님이 되실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에수님은 우리의 죄로 우리가 죽어야 하는데 우리를 대신 하여 예수님을 피 흘려 죽으셨습니다. 예수님이 피 흘리심으로 이 약속을 변치 않는 약속이 되었고 우리는 심판과 저주를 받지 않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피 흘리심으로 예수님의 생명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피 흘려 죽으신 예수님을 사흘만에 부활하셔서 죄사하심을 받은 우리에게 새 생명을 주십니다. 예수님의 피는 죄사함의 피요. 구원의 피요 축복의 피요. 생명의 피가 되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경외할 수 있는 힘을 주십니다. 우리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영원한 속죄를 이루시는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가슴이 뛰게 하는 피의 무지개)

 

워즈워즈는 무지개를 보면서 가슴이 뛴다고 하였습니다. 어려서나 늙어서는 가슴이 뛴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무지개를 보면서 우리의 가슴이 뛰는 이유는 더 깊은 데 있습니다. 이 무지개를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보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아들을 죽인 하나님의 사랑을 보기 때문입니다. 우리 죄를 영원히 용서하시고 하나님이 우리의 아버지가 되신 것을 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무지개를 통하여 하나님의 사랑을 발견할 때 가슴이 더욱 뜁니다. 요즘의 무지개는 오염으로 잘 보이지도 않습니다. 하나님이 만드신 피를 통한 구원의 무지개도 사람들의 죄악으로 잘 보이지 않을 때도 있습니다. 우리는 성령의 안약을 바르고 피의 무지개를 보아야 합니다. 무지개는 7가지 색입니다. 그리스도의 피를 믿고 죄사함을 받는 자에게 주시는 성령은 아홉 가지 성품을 가지고 있습니다. 성령은 무지개처럼 우리에게 아홉 가지 빛을 비추십니다.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의 성품을 주십니다. 우리가 피의 무지개, 성령의 무지개를 보면 우리의 심장이 뛰고 감격하게 됩니다. 우리에게 두려움이 사라지고 힘이 솟아날 것입니다. 우리가 성령의 아홉 개 아름다운 열매를 나타내는 이 시대의 무지개로 살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아멘!

창세기 9장 강해 일부 무지개 언약

말씀 창세기 91-창세기 929

요절 창세기 917절 하나님이 노아에게 또 이르시되 내가 나와 땅에 있는 모든 생물 사이에 세운 언약의 증거가 이것이라 하셨더라

창세기 9장 강해 끝입니다.

 

창세기 9장 강해 이부 노아의 허물을 덮어준 셈과 야벳

창세기 918-창세기 929

요절 창세기 923 셈과 야벳이 옷을 가져다가 자기들의 어깨에 메고 뒷걸음쳐 들어가서 그들의 아버지의 하체를 덮었으며 그들이 얼굴을 돌이키고 그들의 아버지의 하체를 보지 아니하였더라

 

하나님은 인류의 죄를 홍수로 심판하셨습니다. 인간은 심판 후에 하나님을 경외하고 사랑해야 했지만 그렇게 하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본성이 악하여 다시 반복하여 죄를 짓습니다. 노아는 술을 먹고 아들 함은 아버지의 죄를 드러내어 비난합니다. 그러나 셈과 야벳은 아버지의 허물을 덮어줌으로 복을 받습니다. 하나님은 함의 아들 가나안을 심판하시고 셈의 후손을 통하여 구원역사를 이루어가십니다. 셈의 후손 가운데 아브라함을 택하고 메시야를 보내사 구원의 역사를 이루십니다. 우리는 부모와 윗사람의 허물을 덮어주어야 합니다.

 

(새 인류의 조상 노아)

 

918,19절을 보십시오. "방주에서 나온 노아의 아들들은 셈과 함과 야벳이며 함은 가나안의 아비라 노아의 이 세 아들로 좇아 백성이 온 땅에 퍼지니라.“

 

노아는 새로운 인류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노아에게 생육하고 번성하라고 하셨습니다. 그에게서 지금의 인류가 다 퍼져 나갔습니다. 믿음의 중심을 지킨 노아를 새로운 믿음의 조상으로 축복하여 주셨습니다. 온 인류는 노아를 한 조상으로 모신 그분의 자녀들입니다. 온 인류는 예수님 안에서 한 가족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이제 한 가족처럼 서로 사랑해야 합니다.

 

(아버지의 허물을 알린 함)

 

20-22절을 보십시오. "노아가 농업을 시작하여 포도나무를 심었더니 포도주를 마시고 취하여 그 장막 안에서 벌거벗은지라. 가나안의 아비 함이 그 아비의 하체를 보고 밖으로 나가서 두 형제에게 고하매"

 

노아는 심판 후에 큰 충격에 사로 잡혔음을 알 수 있습니다. 홍수 후에 기후가 많이 변화되었습니다. 농사짓기가 더 힘들어졌습니다.

우리가 전쟁이나 지진이나 쓰나미와 같은 해일을 겪고 나서도 큰 충격을 받습니다. 이런 것을 외상성 장애라고 합니다. 어떤 사람은 많은 사람이 죽은 모습을 보며 구토를 합니다. 어떤 사람은 정신병에 걸립니다. 하물며 모든 인류가 다 죽는 것을 본 노아의 마음은 얼마나 고통스러웠겠습니까? 죽은 사람들은 바로 노아의 이웃이요. 친척들이었습니다.

이때 기도를 하고 성령 충만함으로 극복하면 좋았겠지만 노아는 그렇게 하지 못했습니다. 의인 노아도 인간의 연약함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는 방주를 짓고 구원 받은 후에 영적인 긴장이 풀어졌던 것 같습니다. 그는 술을 너무 많이 먹고 필름이 끊겨 발가벗고 누웠습니다. 거의 알콜 중독 수준입니다.

이런 모습은 롯에게도 나타납니다. 그도 소돔과 고모라의 심판을 보고 술을 먹어 알콜중독이 됩니다.

둘째 아들 함은 아비가 발가벗고 누워 있는 하체를 보았습니다. 그 후에 밖으로 나가서 두 형제에게 고하였습니다. 고하였다는 것은 떠벌렸다는 것입니다. 요즘으로 하면 핸드폰으로 찍어서 인터넷에 올렸을 것입니다. 성서학자들은 가나안의 아비 함이라는 것을 강조하는 것으로 보아서 가나안이 이를 먼저 보고 아버지 함에게 고하고 함이 다시 형제들에게 고하였다고 말합니다. 하여튼 함은 아버지의 허물과 연약함을 즐기고 소문을 퍼뜨렸습니다. 그는 형제 두 명에게 말했지만 사실은 당시의 전 인류에게 말을 한 것입니다. 이것을 들은 셈과 야벳은 달랐습니다.

 

(아버지의 허물을 덮어준 셈과 야벳)

 

22-23절을 보십시오. "셈과 야벳이 옷을 취하여 자기들의 어깨에 메고 뒷걸음쳐 들어가서 아비의 하체에 덮었으며 그들이 얼굴을 돌이키고 그 아비의 하체를 보지 아니하였더라."

 

셈과 야벳은 뒷걸음쳐서 들어가 아비의 하체를 덮어 드렸습니다. 이들은 아비의 하체를 보지 않았습니다. 이들은 아버지 노아의 허물과 연약함을 덮어 주었습니다. 죄를 은폐했다기보다는 감당하여준 것입니다. 그들은 아버지의 아름다운 덕을 간직하기를 원했습니다.

우리 인간이 살다보면 이렇게 어른들의 허물과 연약함을 보는 때가 있습니다. 우리 인간은 이런 허물과 연약함을 다른 사람들에게 말하고 싶은 충동이 있습니다. 그것을 말하면서 일종의 쾌감을 느낍니다.

어느 이발사가 임금님 귀가 당나귀 귀인 것을 알았습니다. 그는 이것을 말하고 싶은 충동을 억제 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대나무 숲에 가서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라고 말을 하였습니다. 그러자 바람이 불 때마다 대나무 숲에서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라는 말이 들려 왔다고 하는 설화가 있습니다. 그러나 사랑은 허다한 허물을 덮는 것입니다. 우리가 진정 사랑을 한다면 우리는 다른 사람의 허물을 감당해 줄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아담이 죄를 지었을 때 가죽옷을 지어 가려주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죄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피로 덮어주셨습니다.

마리아의 남편 요셉은 정혼한 아내가 임신한 것을 알았습니다. 그는 마리아가 부정하다는 확실한 증거를 갖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요셉은 이것을 사람들에게 말하지 않았습니다. 드러내지 않고 가만히 끊고자 하였습니다. 이런 허물과 실수는 가까이 있는 사람들이 먼저 봅니다. 가족들, 공동 생활하는 분들의 허물과 실수를 봅니다. 우리는 이런 것을 덮어줄 줄 알아야 합니다.

그렇다고 죄를 묵인하라는 말은 아닙니다. 그 사람에게 가서 일대일로 인격적으로 말하여 그것을 고치도록 도와주어야 합니다. 남에게 가서 가까운 사람들의 약점을 말하지 말아야 합니다. 어른의 죄를 보았을 때는 기도 많이 하고 먼저 자신의 죄가 없나 살펴보고 회개해야합니다. 다음에 개인적으로 가서 온유함과 겸손함으로 말해야합니다.

 

(가나안을 저주한 노아)

 

24-27절을 보십시오. "노아가 술이 깨어 그 작은 아들이 자기에게 행한 일을 알고 이에 가로되 가나안은 저주를 받아 그 형제의 종들의 종이 되기를 원하노라. 또 가로되 셈의 하나님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 가나안은 셈의 종이 되고 하나님이 야벳을 창대케 하사 셈의 장막에 거하게 하시고 가나안은 그의 종이 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하였더라."

 

노아는 술이 깨어서 제 정신을 차리고 함을 저주하여 형제들의 종이 되기를 원했습니다. 반면에 셈과 야벳에게는 복을 주어 가나안의 주인이 되고 창대하게 되도록 하였습니다. 우리는 노아가 자신의 잘못은 회개하지 않고 너무 심하게 자식을 저주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노아는 함이 회개하고 새로운 사람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저주한 것입니다. 함은 회개하지 않아서 그 아들 가나안 사람들이 하나님의 저주를 받게 되었습니다. 셈의 후손에게는 축복하셔서 그 집에서 메시야가 태어나게 하셨습니다.

이렇게 윗사람의 허물을 말하고도 회개하지 않아서 저주를 받은 예는 여기만 있지 않습니다. 성경에서 이런 예를 또 찾아 볼 수 있습니다. 모세는 구스 여자를 아내로 취하였습니다. 그 때 가장 가까이 있는 형 아론과 누나 미리암이 모세를 공개적으로 비난하였습니다. 많은 회중이 있는 곳에서 모세를 비난하였습니다. 이방인 구스여자와 결혼한 것은 분명 모세의 허물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모세를 벌 주지 아니하시고 미리암에게 문둥병이 걸리게 하셨습니다. 성경에서는 하나님의 세우신 권위자들을 공개적으로 비난하는 일에 대해서 엄히 징계하십니다. 왜 하나님께서 노아 편에 서서 노아를 감당하여 주셨을까요?

 

(전체적으로 보시는 하나님)

 

하나님은 노아나 모세를 전체적으로 보았기 때문입니다. 노아는 잠시 실수를 하였지만 그의 전 인생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가 순종하지 않았다면 그의 아들들뿐 아니라 모든 동물들도 후손을 보존하지 못하였을 것입니다. 노아는 그 시대 사람들이 다 악한 가운데서도 홀로 하나님을 경외했습니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노아는 너무나 사랑스러웠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노아의 연약함과 허물을 감당해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중심을 하나님께 두고 사는 자들의 한두 가지 실수를 감당하여주십니다. 그들을 복의 근원 삼으십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실수를 감당해주시고 다윗의 실수를 감당하여주셨습니다. 모세도 마찬가지입니다. 모세는 순종을 통하여 이스라엘은 출애굽을 하였습니다. 모세는 바로의 공주의 아들로서 자신을 버리고 노예백성과 함께 하였습니다. 순종하여 이집트 왕 바로와 싸워 이겼습니다. 믿음으로 피를 통하여 구원받는 예를 세웠습니다. 믿음으로 홍해를 육지같이 건넜습니다. 하나님과 사십 일을 함께 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었습니다. 그는 하나님과 직접 대면하여 볼 만큼 하나님과 친밀한 관계성을 맺었습니다. 이런 모세를 형이나 누나라도 감히 공개적으로 책망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그 사건 하나만 보는 것이 아니라 인생을 전체적으로 본다는 사실을 알아야합니다.

 

(제자들의 편을 들어주신 예수님)

 

제자들은 예수님을 위해서 자신의 모든 것을 버리고 따랐습니다. 예수님을 중심으로 살았습니다. 제자들은 때로는 손을 닦지 않고 밥을 먹었고 안식일에 밀 이삭을 비벼 먹었고 금식하는 날에 식사를 하기도 하였습니다. 이로 인하여 바리새인들의 비난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제자들을 책망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바리새인들을 책망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의 편을 들어주셨습니다. 이들의 허물과 실수를 감당하여 주었습니다.

성경에는 이런 예가 많이 나와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본토 친척 아버지 집을 떠나서 말씀에 순종하였습니다. 그는 두 번이나 아내를 누이라고 속였습니다. 이는 분명히 아브라함이 잘못한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두 번 다 오히려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를 취한 바로와 아비멜렉을 책망하시고 벌주셨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종이라도 중심이 어긋나고 회개치 않으면 엄히 징계하십니다. 하나님은 사울의 중심이 어긋났을 때 그를 불레셋 사람을 통하여 징계하셨고 엘리가 중심이 잘못되었을 떼 목이 부러져 죽게 하셨습니다.

 

(지도자의 편을 들어주시는 하나님)

 

하나님은 세우신 종의 편을 들어서 하나님 안에서 영적인 질서를 세우기를 원하십니다. 함이 아버지의 노아의 잘못을 보고 직접 가서 일대일로 말을 한다면 좋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을 다른 사람들에게 말하면 노아에 대해서 불신이 생기고 그러면 하나님이 노아를 통해서 일을 못하시게 됩니다. 하나님의 구속 역사가 단절됩니다.

모세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들이 모세에 대해서 불신하면 모세는 리더십을 상실하고 이백만 이스라엘을 이끌 수 없습니다. 모세 한사람의 권위가 손상되는 것이 아니라 이백만 이스라엘 모두가 하나님과의 관계성이 파괴되어 방황하게 됩니다. 모세를 대체할 다른 사람이 있지 않는 한 하나님은 모세를 징계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역사 원칙입니다.

우리 안경 쓰는 사람들에게 물어 보겠습니다. 우리의 눈이 더 나빠져서 안경이 눈에 맞지 않는다고 안경을 버립니까? 아닙니다. 안경을 벗으면 더 안 보이기 때문입니다. 새 안경을 맞춘 후에야 옛날의 안경을 버립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새 지도자가 나타나기 전에 이전의 지도자는 버리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가 에어컨이 잘 돌아가지 않는다고 에어컨을 버립니까? 아닙니다. 에어컨에 들어간 돈이 얼마인데요? 고치려고 노력을 합니다. 아무리 고쳐도 안 될 경우는 버립니다.

우리는 여기서 아주 중요한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주의 종이 잘못한다고 해서 곧바로 교체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오래 참고 기다리십니다. 그래도 말을 안 들으면 하나님이 직접 교체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지도자가 잘못했으면 지도자에게 직접 가서 말을 하고 그래도 안 되면 몇사람에게 말하여 충고하고 그래도 안 되면 하나님 손에 맡겨 드려야 합니다. 떠벌리고 다녀서는 안 됩니다.

사무엘은 엘리가 죄를 범했을 때 직접 가서 말을 했습니다. 하지만 엘리의 말에 절대적으로 순종하였습니다. 다윗은 사울이 죄를 범했을 때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대했습니다. 사울을 판단하거나 정죄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사울을 죽이는 자, 욕하는 자를 죽이고 처단하였습니다. 이를 통하여 다윗은 복의 근원이 되었습니다.

 

(노아의 죽음)

 

28,29절을 보십시오. "홍수 후에 노아가 삼백 오십년을 지내었고 향년이 구백 오십 세에 죽었더라." 노아는 믿음으로 인생을 마쳤습니다. 그의 삶은 의미 있고 가치 있는 삶이었습니다.

창세기 9장 강해 이부 노아의 허물을 덮어준 셈과 야벳

창세기 918-창세기 929

요절 창세기 923 셈과 야벳이 옷을 가져다가 자기들의 어깨에 메고 뒷걸음쳐 들어가서 그들의 아버지의 하체를 덮었으며 그들이 얼굴을 돌이키고 그들의 아버지의 하체를 보지 아니하였더라

창세기 9장 강해 이부 끝입니다.

 

창세기 10장 강해 노아의 후손들

말씀 창세기 101-창세기 1032

요절 창세기 101절 노아의 아들 셈과 함과 야벳의 족보는 이러하니라 홍수 후에 그들이 아들들을 낳았으니

 

노아의 아들들 계보를 기록합니다. 불신자는 온 세계로 퍼져가지만 하나님은 그 가운데 아브라함으로 흘러가는 믿음의 후손을 주목하여 보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세계역사에서 믿음으로 사는 사람들을 주목하고 계십니다. 복음역사를 중심으로 세계역사를 이루어가십니다.

 

(노아의 후손들)

 

10장에는 노아의 후손들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1. 노아의 아들 셈과 함과 야벳의 족보는 이러하니라 홍수 후에 그들이 아들들을 낳았으니 2. 야벳의 아들은 고멜과 마곡과 마대와 야완과 두발과 메섹과 디라스요 3. 고멜의 아들은 아스그나스와 리밧과 도갈마요 4. 야완의 아들은 엘리사와 달시스와 깃딤과 도다님이라 5. 이들로부터 여러 나라 백성으로 나뉘어서 각기 언어와 종족과 나라대로 바닷가의 땅에 머물렀더라

 

다음은 노아의 아들들의 족보입니다. 노아의 아들은, 셈과 함과 야벳입니다. 홍수가 난 뒤에, 그들이 아들들을 낳았습니다. 야벳의 자손은, 고멜과 마곡과 마대와 야완과 두발과 메섹과 디라스입니다. 고멜의 자손은, 아스그나스와 리밧과 도갈마입니다. 야완의 자손은, 엘리사와 달시스와 깃딤과 도다님입니다. 이들에게서 바닷가 백성들이 지역과 언어와 종족과 부족을 따라서 저마다 갈라져 나갔습니다. 야벳의 족속들은 지중해 족, 북서 유럽족, 북동 유럽족, 알프스족, 힌두족, 드라비다족입니다.

 

(함의 후손들)

 

“6. 함의 아들은 구스와 미스라임과 붓과 가나안이요 7. 구스의 아들은 스바와 하윌라와 삽다와 라아마와 삽드가요 라아마의 아들은 스바와 드단이며

 

함의 자손은, 구스와 이집트와 리비아와 가나안입니다. 구스의 자손은, 스바와 하윌라와 삽다와 라아마와 삽드가입니다. 라아마의 자손은 스바와 드단입니다 함의 족속들은 주로 이집트, 가나안, 남아라비아, 에디오피아 등지에 정착했습니다. 오늘날의 기준으로 하면 주로 아프리카 지역입니다.

 

(니므룻 이야기)

 

108-14절을 보십시오. “구스가 또 니므롯을 낳았으니 그는 세상에 첫 용사라 그가 여호와 앞에서 용감한 사냥꾼이 되었으므로 속담에 이르기를 아무는 여호와 앞에 니므롯 같이 용감한 사냥꾼이로다 하더라 그의 나라는 시날 땅의 바벨과 에렉과 악갓과 갈레에서 시작되었으며11. 그가 그 땅에서 앗수르로 나아가 니느웨와 르호보딜과 갈라와 12. 및 니느웨와 갈라 사이의 레센을 건설하였으니 이는 큰 성읍이라 13. 미스라임은 루딤과 아나밈과 르하빔과 납두힘과 14. 바드루심과 가슬루힘과 갑도림을 낳았더라 (가슬루힘에게서 블레셋이 나왔더라)”

 

구스는 또 니므롯을 낳았습니다. 니므롯은 세상에 처음 나타난 장사입니다. 그는 주께서 보시기에도, 힘이 센 사냥꾼이었습니다. 그래서 "주께서 보시기에도 힘이 센 니므롯과 같은 사냥꾼"이라는 속담까지 생겼습니다. 니므롯이 다스린 나라의 처음 중심지는, 시날 지방 안에 있는 바빌론과 에렉과 악갓과 갈레입니다. 그는 그 지방을 떠나 앗시리아로 가서, 니느웨와 르호보딜과 갈라를 세우고, 니느웨와 갈라 사이에는 레센을 세웠습니다. 그것은 아주 큰 성입니다. 이집트는 리디아와 아남과 르합과 납두와 바드루스와 가슬루와 크레타를 낳았습니다. 블레셋이 바로 크레타에게서 나왔습니다.

특기사항은 구스의 아들 니므롯이 기록된 것입니다. 니므롯이라는 이름은 대적자’ ‘반역자라는 뜻입니다. 그는 세상의 첫 용사입니다. 그는 여호와 앞에서 용감한 사냥꾼이 되었습니다. 당시 사냥은 생계 유지에 필요한 수렵 수준을 넘어 힘의 단련이요 전쟁 연습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당시 전쟁 영웅을 사냥꾼의 제자라고 칭했습니다. 니므롯은 호전적인 침략자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여기 "여호와 앞에서"란 용어를 70인역 성경에서는 여호와께 대적하는 이라고 번역했습니다.

니므룻은 하나님의 권위를 무시하며 자기 힘만을 믿고 자행자지하는 폭군이나 압제자를 암시합니다. 그는 사람까지 잡아서 노예화 시키는 포악한 사람들입니다. 가인의 후예에 라멕과 같은 사람입니다. 그는 아주 강한 자였습니다. 니므룻 같이 용감한 사냥꾼이라는 관용어가 있을 정도였습니다. 그는 그 힘으로 시날 땅에 바벨탑을 세우고,(10) 하나님을 대적하는 나라와 성읍들을 세웠습니다. 니므롯이 바벨탑을 쌓는 일을 주도하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들이 앗수르와 바벨론 왕국을 만들었습니다. 세상 문화의 주류가 되었습니다.

 

(가나안 족속들)

 

“15. 가나안은 장자 시돈과 헷을 낳고 16. 또 여부스 족속과 아모리 족속과 기르가스 족속과 17. 히위 족속과 알가 족속과 신 족속과 18. 아르왓 족속과 스말 족속과 하맛 족속을 낳았더니 이 후로 가나안 자손의 족속이 흩어져 나아갔더라 19. 가나안의 경계는 시돈에서부터 그랄을 지나 가사까지와 소돔과 고모라와 아드마와 스보임을 지나 라사까지였더라 20. 이들은 함의 자손이라 각기 족속과 언어와 지방과 나라대로였더라

 

가나안은 맏아들 시돈을 낳고, 그 아래로, 헷과 여부스와 아모리와 기르가스와 히위와 알가와 신과 아르왓과 스말과 하맛을 낳았습니다. 그 뒤에, 가나안 족은 사방으로 퍼져 나갔습니다. 가나안의 경계는 시돈에서 그랄을 지나서, 멀리 가사에까지 이르렀고, 거기에서 소돔과 고모라와 아드마와 스보임을 지나서, 라사에까지 이르렀습니다. 이 사람들이 종족과 언어와 지역과 부족을 따라서 갈라져 나간 함의 자손입니다. 함 족속에서 블레셋 족속과 가나안 족속이 생겨났습니다. 가나안 족속은 하나님의 저주를 받습니다. 한 사람이 영향력이 후손에게 미치는 영향력은 매우 큽니다. 또한 회개치 않는 후손은 조상의 저주를 대물림하게 됩니다.

 

(구약에서 구원역사의 압축)

 

“21. 셈은 에벨 온 자손의 조상이요 야벳의 형이라 그에게도 자녀가 출생하였으니 22. 셈의 아들은 엘람과 앗수르와 아르박삿과 룻과 아람이요 23. 아람의 아들은 우스와 훌과 게델과 마스며 24. 아르박삿은 셀라를 낳고 셀라는 에벨을 낳았으며 25. 에벨은 두 아들을 낳고 하나의 이름을 벨렉이라 하였으니 그 때에 세상이 나뉘었음이요 벨렉의 아우의 이름은 욕단이며 26. 욕단은 알모닷과 셀렙과 하살마웻과 예라와 27. 하도람과 우살과 디글라와 28. 오발과 아비마엘과 스바와 29. 오빌과 하윌라와 요밥을 낳았으니 이들은 다 욕단의 아들이며 30. 그들이 거주하는 곳은 메사에서부터 스발로 가는 길의 동쪽 산이었더라 31. 이들은 셈의 자손이니 그 족속과 언어와 지방과 나라대로였더라

 

야벳의 형인 셈에게서도 아들딸이 태어났습니다. 셈은 에벨의 모든 자손의 조상입니다. 셈의 자손은 엘람과 앗수르와 아르박삿과 룻과 아람입니다. 아람의 자손은 우스와 훌과 게델과 마스입니다. 아르박삿은 셀라를 낳고, 셀라는 에벨을 낳았습니다. 에벨은 두 아들을 낳았는데, 한 아들의 이름은, 그의 시대에 세상이 나뉘었다고 해서 벨렉이라고 하였습니다. 벨렉의 아우 이름은 욕단입니다. 욕단은 알모닷과 셀렙과 하살마웻과 예라와 하도람과 우살과 디글라와 오발과 아비마엘과 스바와 오빌과 하윌라와 요밥을 낳았습니다. 이 사람들이 모두 욕단의 자손입니다. 그들이 사는 곳은 메사에서 스발에 이르는 동쪽 산간지방입니다. 이 사람들이 종족과 언어와 지역과 부족을 따라서 갈라져 나간 셈의 자손입니다.

21절은 구속사가 전개될 이스라엘 민족의 태동을 보여주는 것으로 본 족보가 구속사적인 족보임을 시사하고 있습니다. 이 간략한 문구 속에 창세기 11장을 해석하고 창세기와 기타 성경의 많은 부분을 해석할 수 있는 키가 있습니다. 이 말씀 속에는 이스라엘 민족의 기원과 나아가 메시야 예수 그리스도의 언약적인 줄기가 다 들어있습니다. 여기 에벨이란 셈의 3대 손입니다. 그런데 다른 족보와는 달리 셈 자손을 거론하기 전 서문에 셈은 에벨 온 자손의 조상이요 라고 하면서 3대 손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에벨이라는 인물에 주시해야 합니다. 에벨에서 히브리라는 말이 나왔듯이 에벨은 히브리 민족의 조상입니다. 그 증거로 아브라함의 아비 데라가 강 건너에서 우상을 섬겼다고 했습니다. 에벨이란 건너온 자라는 의미로 유브라데스 강 건너에 정착했습니다. 히브리는 강을 건너온 자라는 뜻입니다. 11장을 보면 이 에벨의 자손에게서 아브람이 나타납니다.

에벨의 족보는 구속사적 족보입니다. 이 족보의 다른 특이점은 장자인 셈의 후예가 먼저 나오지 않고 야벳이 먼저 나오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성경의 구속 역사상 함과 셈의 후예에 비해 야벳의 자손이 차지하는 비중이 가장 경미하기 때문입니다. 함의 경우 셈족인 이스라엘과의 대립적인 존재로 그 비중을 차지합니다.

그런데 왜 비중이 큰 셈족을 뒤에 위치하게 할까요? 이 족보의 목적이 셈의 후손이 어떻게 그의 다른 형제들의 후손들과 분리되어 나가는가를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이 족보는 약속된 메시야에 초점이 맞추어진 특수한 족보 형태입니다. 다음 장에서 셈의 후손들이 재언급되고 그것이 결국 아브라함의 선택과 연관됩니다. 특별히 성별된 후손을 통하여 구원을 이루어 가시는 주의 섭리를 보여줍니다.

구약에는 민족들은 확장되어 가지만 구속사의 줄기는 가장 경건한 자손을 찾아 압축됩니다. 많은 사람들이 썩고 부패하면 그 가운데 하나를 택하시고, 또 많은 사람들이 썩으면 다시 하나를 선택합니다. 이어지는 언약의 줄기는 예수 그리스도가 성경이 예언한 바로 그 구세주임을 강조합니다. 더 중요한 점은 여러 언약의 줄기를 거치는 동안 장차 구원자가 될 구원의 성격을 계속하여 첨가해 간다는 점입니다.

아브라함을 통해서는 믿음 구원을, 이삭을 통해서는 언약 구원을, 야곱을 통해서는 선택 구원을, 다윗을 통해서는 왕권 구원을 보여줍니다. 이처럼 마태복음 1장의 족보는 구원이라는 복음을 다각도로 말씀해 줍니다. 이렇게 구약은 메시야 언약의 줄기가 좁혀지고 좁혀지면서 구원진리의 의미를 첨가하고 첨가하면서 흘러갑니다. 구약은 메시야 출현을 위해서 모든 것이 집중되었습니다.

 

(신약에서 구원역사의 확산)

 

신약에서는 그 형태가 바뀌어 하나님의 백성들이 확장되어 나갑니다. 우리 예수 믿는 성도들은 예수의 생명을 온 세상에 퍼뜨릴 메시야 언약의 줄기가 됩니다. 마치 그 모양이 나무와도 같습니다. 구약의 많은 뿌리가 모아져서 하나의 예수 줄기로 나타나고 그 줄기에서 많은 가지가 세계로 뻗어 나갑니다. 이제는 성도 한 사람 한 사람이 예수님의 나무 가지가 되어 예수 생명을 퍼트리는 복음의 전달자입니다. 이 얼마나 귀하고 값진 일입니까?

신약의 성도들도 예수 언약의 복음을 전도함으로 예수님의 생명의 줄기를 뻗어가게 합니다. 구약에서 언약 줄기의 사명이 대단하여 그 언약의 줄기를 잇기를 거부하면 오난 사건에서처럼 죽음을 당합니다. 마찬가지로 예수의 복음을 위해 헌신하지 않으면 살아야 할 이유가 없습니다. 바울은 내가 복음을 전하지 않으면 화가 있다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온 땅에 하나님의 자녀들로 충만하기를 원하십니다. 구약과 동일하게 신약 성도들에게는 막중한 사명과 함께 특권이 있습니다. 우리는 나도 이젠 구속사의 줄기라는 자부심을 갖기를 바랍니다.

 

(셈족속)

 

마지막으로 셈족속에 대해서 기록되어 있습니다. 셈족 가운데 북부 셈족은 앗수르인, 아람인, 이스라엘인, 에돔인들이고, 남부셈족은 아랍인들입니다. 셈족들은 대체로 황색인종들입니다. 노아의 자손들이 세계로 퍼져나가서 오늘날의 인류가 되었습니다. 근본적으로 인류는 하나며, 형제애를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자기 민족만 위하는 것은 옳지 못합니다. 자기 민족에 대해서 정체성과 자부심을 갖는 것은 좋지만 모두가 노아의 자손인 만큼 형제애를 가지고 다른 민족과 다른 나라 사람들을 사랑하고 섬기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흩어진 노아의 후손들)

 

32절에 "이들은 노아 자손의 족속들이요 그 세계와 나라대로라 홍수 후에 이들에게서 땅의 열국 백성이 나뉘었더라" 했습니다.

 

본 족보를 보면서 신기한 것은 자손을 낳으면 모두 각기 독립하여 나라를 형성했다는 점입니다. 야벳의 일곱 아들이 모두 일곱 나라가 되고 여기 나타나는 그의 손자 일곱이 모두 일곱 나라가 됩니다. 함의 후손 역시 그렇습니다. 30명의 자손들이 모두 흩어져서 민족을 이룹니다. 70명의 자손들이 모두 민족을 이룹니다. 이처럼 성도가 믿음의 자녀를 낳으면 나라를 낳고 족속을 낳고 왕을 낳는 것입니다.

베드로전서 29"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 했습니다. 계시록 16에도 "그 아버지 하나님을 위하여 우리를 나라와 제사장으로 삼으신 그에게" 라고 하셨습니다.

우리 안에 하나님 나라가 있습니다. 민족이란 우리 성도가 하나님의 자손된 하늘의 족속임을 뜻합니다. 왕이란 그리스도 안에서 주신 세상과 자아와 사단과 죄를 다스리는 권세자를 뜻합니다. 중요한 것은 나라가 나라를 낳고 민족이 민족을 낳고 왕이 왕을 낳는다는 점입니다. 이처럼 우리는 전도하여 우리 영의 자손들로 충만해야합니다. 같은 혈통의 부모 형제 자매가 흩어지는 일이 쉬운 문제가 아닙니다. 그들은 흩어지기가 싫어서 바벨탑을 쌓으면서 강하게 뭉칩니다. 하나님께서는 특별하신 섭리로서 이런 그들을 흩으셨습니다. 하나님은 바벨탑 사건을 중지시키시기 위해서 강력한 언어 혼잡을 주셔서 흩으셨습니다.

11장의 바벨탑 사건은 그 연대로 보면 10장 족보에 포함된 사건입니다. 이들이 모두 나라와 족속이 되었으니 하나님께서 가족을 가르시고 가르셔서 철저히 흩으셨습니다. 우리 안의 자아의 바벨탑을 허물고 흩어지고 흩어져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결코 나 혼자로서 끝나고 맙니다.

그럼 어떻게 자아의 바벨탑이 무너지고 예수의 복음을 온 세상에 증거할 수 있을까요? 그것을 알려면 그 시대의 배경을 좀 더 알아야 합니다. 바벨탑 사건은 창1025에 나타난 대로 에벨이 두 아들을 낳은 그 때였습니다. 여기 벨렉은 분할이란 뜻도 있고 운하라는 뜻도 있습니다. 1110-16을 참고하면 그 때가 홍수 후 101년 째였습니다. 그러니까 바벨탑은 이미 건축되고 있었고, 100년이 차고 새 시대가 열리는 2세기가 시작되면서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을 언어 혼잡을 통해서 온 세상에 흩으셨습니다.

 

(노아의 후손을 기록한 이유)

 

앞에서 저자는 가인의 후손들을 기록하지 않았습니다. 셋의 후손 가운데도 메시야의 조상과 관련이 없는 사람들을 기록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10장에는 노아의 후손들을 모두 기록하고 있습니다. 노아의 후손들은 현재의 인류입니다. 이들은 우리가 복음을 전해서 구원을 해야 할 대상들입니다. 이들은 육신적으로는 형제지만 영적으로는 무지한 자가 많습니다. 타락하여 죄 가운데 있습니다. 우리도 이들 속에 있다가 구원 받았습니다. 구원받은 우리는 아직 구원받지 못한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여 구원해야합니다. 우리는 예수님 안에서 이들을 서로 사랑해야합니다.

창세기 10장 강해 노아의 후손들

말씀 창세기 101-창세기 1032

요절 창세기 101절 노아의 아들 셈과 함과 야벳의 족보는 이러하니라 홍수 후에 그들이 아들들을 낳았으니

창세기 10장 강해 끝입니다.

 

 

창세기 11장 강해 바벨탑을 허무신 하나님

말씀 창세기 111-칭세기 1132

요절 창세기 117절 자, 우리가 내려가서 거기서 그들의 언어를 혼잡하게 하여 그들이 서로 알아듣지 못하게 하자 하시고

 

니므룻은 자신의 힘을 의지하여 하나님을 대적합니다. 니므룻 후손의 가장 대표적인 죄는 바벨탑을 쌓은 것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나라를 세우는 바벨탑을 허무십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지 않는 그 어떤 나라도 허무십니다. 우리는 우리의 나라를 세우기보다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는 일을 해야 지속할 수 있습니다.

 

(인간의 나라를 건설하려는 사람들)

 

111-4절을 보십시오. "온 땅의 구음이 하나이요 언어가 하나이었더라. 이에 그들이 동방으로 옮기다가 시날 평지를 만나 거기 거하고 서로 말하되 자, 벽돌을 만들어 견고히 굽자 하고 이에 벽돌로 돌을 대신하며 역청으로 진흙을 대신하고 또 말하되 자, 성과 대를 쌓아 대 꼭대기를 하늘에 닿게 하여 우리 이름을 내고 온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자 하였더니

 

앞서 본 것처럼 바벨탑 사건은 셈의 손자 에벨의 때 이루어진 사건입니다. 당시는 언어가 하나였습니다. 그들은 동방으로 옮겨서 시날 평지에 거하였습니다. 전에는 돌과 진흙만 있었습니다. 그들은 벽돌을 발견하였습니다. 벽돌은 1300도 정도로 온도를 높이면 녹고 그것을 벽돌을 만들어서 식히면 단단해집니다. 그들은 벽돌을 만들어서 돌을 대신하고 역청으로 진흙을 대신하여 성과 대를 쌓았습니다.

그들은 그 성 위에 벨신을 섬기고자 하였습니다. 벨신은 주인, 풍요를 말합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주인으로 섬기지 않고 스스로 주인이 되고자 하였습니다. 성을 하늘 꼭대기에 닿게 하고자 하였습니다. 우리가 과학기술을 발전시키는 것은 좋습니다. 그러나 무엇을 위해서 쓰느냐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들은 벽돌 기술로 하나님의 위치까지 높아지고자 하였습니다. 그들은 자신의 이름을 내서 흩어짐을 면하자고 하였습니다. 그들을 힘없는 자들을 시켜서 탑을 짓고 그 지은 자의 이름을 널리 내고자 하였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나라보다는 자기의 나라를 건설하고자 하였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에 대해서 도전하고자 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아담에게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노아에게도 두 번이나 땅에 편만하게 퍼져 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온 땅에 펴져서 겸손하게 살라고 하십니다. 그러나 그들은 땅에 충만하라는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였습니다. 그들은 교만하여 창조주 하나님의 이름을 내지 않고 자신들의 이름을 내고자 하였습니다. 그들은 당을 지어서 하나님을 대적하였습니다.

계몽주의 이후에 인간은 이성으로 인간의 나라를 건설하고자 하였습니다. 하나님을 배제하고 인간의 왕국을 만들고자 하면 언젠가는 무너집니다. 거대 도시화 대형 교회는 하나님이 기뻐하지 않으십니다.

 

(언어를 혼잡케 하신 하나님)

 

5-9절을 보십시오. "여호와께서 인생들의 쌓는 성과 대를 보시려고 강림하셨더라.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이 무리가 한 족속이요 언어도 하나이므로 이같이 시작하였으니 이후로는 그 경영하는 일을 금지할 수 없으리로다. , 우리가 내려가서 거기서 그들의 언어를 혼잡케 하여 그들로 서로 알아듣지 못하게 하자. 하시고 여호와께서 거기서 그들을 온 지면에 흩으신고로 그들이 성 쌓기를 그쳤더라. 그러므로 그 이름을 바벨이라 하니 이는 여호와께서 거기서 온 땅의 언어를 혼잡케 하셨음이라. 여호와께서 거기서 그들을 온 지면에 흩으셨더라."

 

하나님은 인간의 언어를 혼잡하게 하여 바벨탑을 쌓는 사람들을 흩으셨습니다. 그들은 한 족속이요. 언어도 하나이므로 이들의 경영하는 일을 금할 수 없었습니다. 그들의 경영하는 일은 악을 도모하는 일입니다.

이들의 도모대로 두면 이들은 교만이 하늘을 찌르고 이들은 망하게 됩니다. 하나님은 이들을 사랑하셔서 망하지 않기를 원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언어를 나뉘게 하신 데도 그들을 보존하고자하는 사랑이 들어있습니다. 여기서부터 세계의 언어가 나뉘게 되었습니다. 언어는 세계 단일 조어에서 나왔다는 것이 학계의 정설입니다. 그들은 서로 다른 언어를 중심으로 흩어지게 되었습니다.

 

(인간 나라를 흩으시는 하나님)

 

하나님은 인류가 온 세계에 퍼져 살면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이 나라를 만들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을 왕으로 모시기를 원하십니다. 인간이 대도시를 형성하고 한 곳에만 모여 살고자 합니다. 도시를 형성하면 여러 면에서 편리하고 효율성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편에서 보면 좋지 않은 면도 있습니다. 전쟁이나 지진이니 화산이나 전염병과 같은 재앙을 만난다면 인간은 엄청난 피해를 받을 것입니다. 인간은 공산주의를 중심으로 뭉쳐서 하나님을 대적하고 주의 종들을 핍박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이들을 흩으셨습니다. 만약에 과학이나 자본주의도 하나님을 대적한다면 하나님께서 흩으실 것입니다. 신천지에서 이만회는 자신의 바벨탑을 쌓습니다. 하나님은 신천지를 흩으실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를 확장하는 교회)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은 승천하시면서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 나라가 온 세계에 퍼져나가기를 원하십니다. 흩어지는 것이 하나님 나라를 만드는 것입니다.

그러나 초대교회는 예루살렘에 모여 살고 흩어지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스데반의 순교와 핍박을 통하여 이들을 흩으셨습니다. 흩어진 사람들을 통하여 땅 끝까지 복음을 전하게 하셨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명령에 순종하여 적극적으로 세계선교를 해야 합니다. 우리가 대형교회를 만들기보다 개척하고 선교하는 것이 살 길입니다.

전요한 목자님은 이제 세계선교를 향해 시카고로 떠나십니다. 우리는 한국의 베스트 목자님을 세계선교에 드리는 것입니다. 고이사무엘 선교사님은 한국 국민의 삼분의 일이 세계선교에 나가자고 기도하셨습니다. 배사라 선교사님은 우리 유비에프에서 10만 선교사를 파송하자고 하셨습니다. 전요한 목자님은 한기총 세계선교부에서 마지막으로 말씀을 전하시며 한국교회가 천만 신도인데 십일조인 100만 선교사를 파송하자고 기도제목을 제시하셨습니다. 그 기도제목이 한국 교회의 기도제목으로 채택되었습니다. 이 가운데 유비에프가 10만을 파송하고 천안이 5천 선교사를 호서대가 이천 오백 선교사를 파송하고자 기도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이를 위하여 기도하고 힘써 지원을 해야겠습니다. 그때 우리 모임과 한국 교회를 더욱 축복해 주실 줄을 믿습니다.

 

(인간의 생명을 단축하신 하나님)

 

10-26절에는 셈의 후예가 나옵니다. “10. 셈의 족보는 이러하니라 셈은 백 세 곧 홍수 후 이 년에 아르박삿을 낳았고 11. 아르박삿을 낳은 후에 오백 년을 지내며 자녀를 낳았으며 12. 아르박삿은 삼십오 세에 셀라를 낳았고 13. 셀라를 낳은 후에 사백삼 년을 지내며 자녀를 낳았으며 14. 셀라는 삼십 세에 에벨을 낳았고 15. 에벨을 낳은 후에 사백삼 년을 지내며 자녀를 낳았으며 16. 에벨은 삼십사 세에 벨렉을 낳았고 17. 벨렉을 낳은 후에 사백삼십 년을 지내며 자녀를 낳았으며 18. 벨렉은 삼십 세에 르우를 낳았고 19. 르우를 낳은 후에 이백구 년을 지내며 자녀를 낳았으며 20. 르우는 삼십이 세에 스룩을 낳았고 21. 스룩을 낳은 후에 이백칠 년을 지내며 자녀를 낳았으며 22. 스룩은 삼십 세에 나홀을 낳았고 23. 나홀을 낳은 후에 이백 년을 지내며 자녀를 낳았으며 24. 나홀은 이십구 세에 데라를 낳았고 25. 데라를 낳은 후에 백십구 년을 지내며 자녀를 낳았으며 26. 데라는 칠십 세에 아브람과 나홀과 하란을 낳았더라

 

셈의 족보는 이러합니다. 셈은, 홍수가 끝난 지 이 년 뒤, 백 살이 되었을 때에 아르박삿을 낳았습니다. 셈은 아르박삿을 낳은 뒤에, 오백 년을 더 살면서, 아들딸을 낳았습니다. 아르박삿은 서른다섯 살에 셀라를 낳았습니다. 아르박삿은 셀라를 낳은 뒤에, 사백삼 년을 더 살면서, 아들딸을 낳았습니다. 셀라는 서른 살에 에벨을 낳았습니다. 셀라는 에벨을 낳은 뒤에, 사백삼 년을 더 살면서, 아들딸을 낳았습니다. 에벨은 서른네 살에 벨렉을 낳았습니다. 에벨은 벨렉을 낳은 뒤에, 사백삼십 년을 더 살면서, 아들딸을 낳았습니다. 벨렉은 서른 살에 르우를 낳았습니다. 벨렉은 르우를 낳은 뒤에, 이백구 년을 더 살면서, 아들딸을 낳았습니다. 르우는 서른두 살에 스룩을 낳았습니다. 르우는 스룩을 낳은 뒤에, 이백칠 년을 더 살면서, 아들딸을 낳았습니다. 스룩은 서른 살에 나홀을 낳았습니다. 스룩은 나홀을 낳은 뒤에, 이백 년을 더 살면서, 아들딸을 낳았습니다.

나홀은 스물아홉 살에 데라를 낳았습니다. 나홀은 데라를 낳은 뒤에, 백십구 년을 더 살면서, 아들딸을 낳았습니다. 데라는 일흔 살에 아브람과 나홀과 하란을 낳았습니다. 창세기 저자가 셈의 후예를 특별히 더 기록하는 것은 이 가운데서 메시야가 태어났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이들의 수명을 그 전에 비하여 많이 단축시켰습니다. 홍수 후에 지구의 환경이 나빠졌다고도 합니다. 중요한 것은 죽음을 가까이서 느끼고 빨리 회개를 촉구하는 음성입니다. 우리가 죽음을 앞두면 자신의 죄를 더 깊이 인식하고 회개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셈의 후손 중에서 새로운 생명의 역사를 이루십니다. 하나님은 은혜로 하나님의 구원역사를 이루십니다. 하나님은 꺼져가는 등불을 끄지 않으십니다.

 

(머뭇거린 데라)

 

27-32절을 보십시오. "데라의 후예는 이러하니라. 데라는 아브람과 나홀과 하란을 낳았고 하란은 롯을 낳았으며 하란은 그 아비 데라보다 먼저 본토 갈대아 우르에서 죽었더라. 아브람과 나홀이 장가 들었으니 아브람의 아내 이름은 사래며 나홀의 아내 이름은 밀가니 하란의 딸이요 하란은 밀가의 아비며 또 이스가의 아비더라 사래는 잉태하지 못하므로 자식이 없었더라. 데라가 그 아들 아브람과 하란의 아들 그 손자 롯과 그 자부 아브람의 아내 사래를 데리고 갈대아 우르에서 떠나 가나안 땅으로 가고자 하더니 하란에 이르러 거기 거하였으며 데라는 이백 오세를 향수하고 하란에서 죽었더라.“

 

본문에는 아브람의 아버지 데라에 대해서 나오고 있습니다. 그는 니므룻과 대조적입니다. 그는 갈데아 우르에 있을 때에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그는 그곳에서 우상을 섬기며 우상 장사를 하고 있었다고 합니다. 그곳에는 3000종류의 우상이 있었다고 합니다. 하나님은 데라를 통해서 새 역사를 이루기 위해서 가나안 땅으로 가라고 부르셨습니다. 데라가 순종하여 사명의 땅으로 갈 때에 모두가 다 함께 가지는 않았습니다. 데라의 아들은 아브람과 나홀과 하란이 있었는데 하란은 그곳에서 죽었고 나홀은 그냥 그곳에 머물렀습니다. 이삭의 때에 나홀이 하란에 있는 것을 볼 때 나중에 나홀도 하란으로 옮겨 간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데라를 따라 온 것은 아브람과 그 아내 사라와 손자 롯뿐이었습니다. ‘데라라는 이름은 머뭇거림이라는 뜻인데 가나안 땅까지 가지 못했고 하란 땅에 머뭇거리다 그곳에서 죽었습니다. 우리는 고향과 사명의 땅 사이에 머뭇거려서는 안 됩니다. 그는 끝까지 순종하지 못했습니다. 그는 시작이 좋았으나 끝이 좋지 않았습니다. 우리의 인생은 처음을 보고 평가하는 것이 아니라 끝을 보고 평가합니다. 우리는 시작도 중요하지만 끝의 마무리를 잘 지어야 합니다. 사울이나 가룟유다는 시작이 좋았으나 끝이 좋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바울이나 마태는 시작이 좋지 않았으나 끝이 좋았습니다.

 

(하늘로 가는 사다리)

 

하나님은 하늘로 가고자 하는 인류의 바벨탑을 흩으셨지만 친히 하늘에서 사다리를 내려 보내셨습니다. 그분이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 나라에 갈 수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이름을 드러내는 하나님 나라를 건설해야합니다. 나의 이름을 감추는 겸손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의 허물을 덮어주시고 우리를 영원히 사랑하여 주셨습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자신을 자랑하지 말고 하나님의 이름을 높여야하겠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이름이 높이 드러나는 하나님 나라를 건설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아멘

창세기 11장 강해 바벨탑을 허무신 하나님

말씀 창세기 111-칭세기 1132

요절 창세기 117절 자, 우리가 내려가서 거기서 그들의 언어를 혼잡하게 하여 그들이 서로 알아듣지 못하게 하자 하시고

창세기 11장 강해 끝입니다.

 

 

 





번호 제목 작성자 작성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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