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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주의 대학생 선교기관

천안UBF

성경66권강해서

창세기 7장 강해 홍수 침례

작성자 : 오요한
작성일 : 2005-04-18 00:00:00
조회수 : 3,007

문제지풀이(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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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7장 강해 홍수 세례

창세기 71- 창세기 724

요절 창세기 723 지면의 모든 생물을 쓸어버리시니 곧 사람과 가축과 기는 것과 공중의 새까지라 이들은 땅에서 쓸어버림을 당하였으되 오직 노아와 그와 함께 방주에 있던 자들만 남았더라

 

오늘 말씀 보면 하나님은 실제로 홍수심판을 내리셨습니다. 이 심판은 하나님의 죄에 대한 분노가 실감나게 묻어나는 무섭고 철저한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죄를 정말 미워하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의로웠던 노아와 그 가족들은 방주에서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와 함께 다른 동물도 구원받았습니다. 우리가 오늘 말씀을 통해 노아의 경외심을 배우고 홍수 심판 속에 나타난 침례의 복음에 대해 배울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의로운 자를 구원하심)

 

1절을 보십시오. "여호와께서 노아에게 이르시되 너와 네 온 집은 방주로 들어가라 이 세대에서 네가 내 앞에 의로움을 내가 보았음이니라.“

 

노아시대 사람들은 자기들이 좋아하는 사람들과 자유연애를 즐기고 시집가고 장가가는데 정신이 없었습니다. 그들의 관심은 오직 자신의 육신의 소원과 욕심을 좇아사는 것이었습니다. 더욱 심각한 것은 그들이 죄를 죄로 여기지 않고 자랑하는 것입니다. 인류의 죄악은 정말로 물이 오를 대로 올라 죄가 온 땅에 가득 차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이들에게 므두셀리와 노아를 통하여 심판을 경고하였습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의 경고를 받고 경외심으로 살아가기는커녕 하나님의 말씀에 콧방귀도 뀌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자신이 만든 사람들을 사랑하심으로 그토록 오래 참으셨지만 그들은 회개하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은 죄가 주는 즐거움으로 날이 갈수록 더 타락했습니다. 육체적, 찰나적 쾌락과 죄의 세력에 완전히 넋이 나가버렸습니다.

하나님은 이제는 더 이상 참으실 수가 없으셨습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육체가 되어버린 사람들과 도저히 함께 하실 수가 없으셔서 그들에 대한 소망을 끊으셨습니다. 그들을 모두 다 쓸어버리겠노라고 선포하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노아의 의로움을 보았습니다. 노아는 하나님의 살아계심과 상주심을 믿음으로 살았습니다. 노아는 하나님의 심판과 구원을 믿고 말씀에 절대 순종하는 자였습니다. 하나님은 노아의 믿음 보시고 방주로 들어가라고 합니다.

 

(동물을 보존하게 하심)

 

2-3절을 보십시오. “너는 모든 정결한 짐승은 암수 일곱씩, 부정한 것은 암수 둘씩을 네게로 데려오며 공중의 새도 암수 일곱씩을 데려와 그 씨를 온 지면에 유전하게 하라

 

하나님은 노아뿐 아니라 동물도 구원하십니다. 하나님은 구체적으로 어떤 동물을 준비시켜야 하는가 말씀하십니다. 정결한 짐승은 암수 일곱씩 부정한 것은 둘씩 준비하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은 정결한 짐승을 더 많이 보존하기를 원했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생물을 보존하기를 원하십니다. 노아의 사명은 생명을 보존하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믿음을 지켜서 생명을 보존하게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마지막 날에도 우리의 믿음을 보시고 식물과 동물들과 같은 모든 피조물을 구원하실 것입니다.

 

(인내하며 순종한 노아)

 

4,5절을 보십시오. “지금부터 칠 일이면 내가 사십 주야를 땅에 비를 내려 내가 지은 모든 생물을 지면에서 쓸어버리리라 노아가 여호와께서 자기에게 명하신 대로 다 준행하였더라

 

하나님은 구체적으로 지금부터 칠 일 후에 사십주야를 비를 내려서 땅에 있는 모든 생물을 쓸어버리겠다고 하셨습니다. 노아는 지금까지 하나님의 말씀대로 다 준행하였습니다. 노아는 그 시대에 믿음으로 사는 의인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노아를 아주 귀하게 보시고 120년 동안 방주를 만들게 하셨습니다.

노아는 그 시대에 죄악된 문화와 정면으로 충돌하였습니다. 노아는 방주를 만들면서 많은 비난과 따돌림을 받고 정신병자 취급을 받았을 것입니다. 그럴 때 노아는 자신도 사람인지라 힘들고 외로웠을 것입니다. 노아자신도 홍수라는 것을 한 번도 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홍수심판이 실감도 안 났습니다. 120년 동안 자신이 뜬구름 잡는 시간만 보내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하였을 것입니다. 그만큼 120년 동안 묵묵히 하나님만을 믿으며 순종하는 데에 사단의 도전과 시험과 유혹도 만만치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노아는 그 길고도 험한 시간들을 오직 살아계신 하나님의 말씀만을 붙들고 그대로 다 순종했습니다. 그는 믿음으로 생명을 보존하는 역할을 했습니다. 하나님은 노아의 이런 순종하는 믿음을 보시고 노아의 의로움을 보았다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노아의 의로움을 보시고 노아를 구원하십니다. 노아뿐 아니라 그 시대 생물들도 구원하십니다.

 

(하나님을 경외한 노아)

 

노아가 이렇게 말씀에 절대적으로 순종할 수 있었던 비결은 무엇입니까? 히브리서 117절은 말씀합니다. "믿음으로 노아는 아직 보지 못하는 일에 경고하심을 받아 경외함으로 방주를 예비하여 그 집을 구원하였으니 이로 말미암아 세상을 정죄하고 믿음을 좇는 의의 후사가 되었느니라.“

우리는 여기서 노아의 휼륭한 점을 발견합니다. 노아는 자신을 구원하실 사랑의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심판하시는 공의의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그는 심판하시는 하나님을 믿고 두려워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떨림으로 마음에 새겼습니다. 그는 마음과 목숨과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였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경외심은 하나님과의 사랑의 관계성을 떼어놓고는 얘기할 수 없는 것입니다. 노아는 하나님의 사랑을 신뢰하는 사랑의 관계성 속에서 하나님을 두려워하였습니다. 노아는 지치고 힘들 때마다 말씀 그대로 행하시는 두려우시고 크신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그는 믿음으로 마음에 오는 모든 시험과 환난을 이겨내고 방주를 성실하고 끈기 있게 만들어내었습니다.

경외심은 어떤 하나님의 말씀이라도 그대로 믿고 순종하는 것으로 표현됩니다. 경외심은 하나님의 말씀 앞에 두려워하고 떨며 기쁨으로 순종하는 것입니다. 그는 이런 순종을 통하여 육신으로 사는 사람들을 정죄하였습니다. 믿음으로 사는 조상들의 믿음을 계승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하나님의 사랑과 말씀을 그대로 믿고 순종하는 노아를 의롭게 여기셨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경외하여 자신의 독자 이삭을 드리라는 말씀에 순종하였습니다. 우리는 그 어느 것보다 크시고 두려우신 하나님을 먼저 앞세울 때 경외심을 가질 수 있습니다.

누가복음 124,5절은 말씀합니다. "내가 내 친구 너희에게 말하노니 몸을 죽이고 그 후에는 능히 더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라. 마땅히 두려워할 자를 내가 너희에게 보이리니 곧 죽인 후에 또한 지옥에 던져 넣는 권세 있는 그를 두려워하라.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를 두려워하라.“

우리는 종종 하나님보다 사람을 더 두려워할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자가 사람을 두려워합니다. 우리는 오직 지극히 크시고 두려우신 하나님만을 두려워해야 합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을 두려워할 때 사람에 대한 두려움은 사라집니다. 마음에 담대함이 생기고 죄를 짓지 않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영혼까지 심판하시는 하나님을 두려워해야합니다. 우리를 위해서 자신의 목숨까지 버리신 사랑을 영접해야합니다.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을 갖기 위해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자주 듣고 마음속에 새겨야 합니다. 하나님과 기도로서 살아있는 교제를 나누어야 합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함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순종하고자 하는 자는 하나님 보시기에 정말 귀한 자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얼마나 많이 듣고 있습니까? 우리 중에 귀는 정말 많이 들어서 커져 있는데 순종의 손과 발은 도마뱀 앞 다리같이 거의 퇴화되어서 움직임이 없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나 복음의 능력은 순종에 있습니다. 많이 듣지만 말고 그렇게 살아보십시오. 순종하지 않으면 그것들이 아무런 능력을 발휘하지 못합니다. 날마다 새벽에 하나님이 주시는 음성을 듣고 자신에게 와 닿는 말씀을 붙들고 순종하여 나갈 때 하나님께서 친히 우리의 삶을 의롭다고 하여 주실 줄을 믿습니다.

 

(경외심이 없는 사람들)

 

경외심이 없는 대표적인 사람은 롯의 사위들입니다. 롯의 사위들은 존엄한 심판의 메시지를 농담으로 여길 정도였습니다.(19:14) 롯의 아내 또한 그러합니다. 소돔과 고모라에 유황과 불이 비같이 내렸을 때입니다. 거의 모든 백성들이 멸망을 당하고 있는데 천사가 돌아보거나 들에 머물지 말라고 하였지만 롯의 처는 이 또한 가볍게 무시하고 뒤를 돌아봅니다. 이들은 노아와 정반대의 삶을 살았습니다. 마치 한 마리 서글픈 청개구리처럼 그들도 그러하였습니다.

우리가 오직 살 길은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을 갖는 것입니다. 신약시대를 사는 우리는 무엇을 두려워해야 합니까? 우리는 우리 안에 계시는 성령님을 두려워해야 합니다. 우리는 성령 앞에서 마음속 깊은 곳에서부터 두렵고 떨리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성령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자는 무엇을 두려워합니까? 바로 눈에 보이는 사람입니다. 이 모든 것이 사람에 의해 만들어지고 움직여지고 사람이 주관하고 있다는 것을 맹신하고 있습니다. 눈에 보이는 것은 두렵고 떨림이 생기는데 보이지 않는 것은 시시하고 별로 대수롭지 않게 보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분명히 해둬야 할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예수님도 성령도 보이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육신에 속한 자. 육신의 지배를 받는 자, 육신적인 삶을 사는 자에게는 결코 성령님에 대해서 두렵고 떨림이 생기지 않습니다. 보이지 않지만 성령님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고 고백한 사람의 마음속에 살아계십니다. 우리는 이 성령을 인정하고 믿고 그 어느 것보다도 높여야합니다.

 

(심판하기 전에 구원하시는 하나님)

 

하나님은 홍수를 내리기 칠일 전에 노아를 방주에 들어가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은 노아와 생물들을 먼저 구원하시고 다음에 홍수를 내리셨습니다. 하나님은 구원 전에 먼저 믿음과 순종을 원하십니다. 믿음이 먼저고 다음에 구원을 하십니다. 하나님은 노아를 방주에 들어가게 하시고 홍수를 내리셨습니다. 하나님은 대환난이 일어나기 전에 먼저 크리스찬을 구원하십니다. 먼저 공중으로 들림 받아 예수 그리스도를 맞이하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 안에서 깨어 있는 자들은 대환난을 보지 않을 것입니다.

 

(믿음으로 방주에 들어간 노아)

 

6-10절을 보십시오. "홍수가 땅에 있을 때에 노아가 육백세라. 노아가 아들들과 아내와 자부들과 함께 홍수를 피하여 방주에 들어갔고 정결한 짐승과 부정한 짐승과 새와 땅에 기는 모든 것이 하나님이 노아에게 명하신대로 암수 둘씩 노아에게 나아와 방주로 들어갔더니 칠 일 후에 홍수가 땅에 덮이니."

 

노아가 육백세 때입니다. 노아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홍수가 일어나기 칠일 전에 방주로 들어갔습니다. 홍수라는 사건이 눈에 보이지 않지만 그는 홍수를 믿음으로 방주에 들어갔습니다. 믿음은 아직은 눈에 보이지 않지만 끝까지 순종하는 것입니다.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기고 행동하는 것입니다.

그럴 때 전혀 열리지 않을 것 같던 문이 그 앞에 서면 열리는 자동문과 같이 때가 되면 하나님은 친히 구원하십니다. 믿고 순종하는 것이 하나님과 사랑의 관계성을 견고히 맺을 수 있는 길이 됩니다. 노아와 함께 그의 아들 샘, , 야벳과 처와 세자부가 다 방주에 들어갔고 모든 들짐승이 그 종류대로, 모든 육축이 그 종류대로 땅에 기는 모든 것이 그 종류대로, 모든 새가 그 종류대로 즉 모든 숨을 쉬는 육체가 둘씩 노아에게 나아와 방주로 들어갔습니다.

 

(재림을 기다리며 깨어 있어야 한다)

 

하나님의 심판은 홀연히 우리에게 임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은 인간의 상식과 관행을 뛰어넘어 갑자기 들이닥칠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우리에게 경고합니다. "그러므로 깨어 있으라. 너희는 그날과 그 시를 알지 못하느니라."

우리는 예수님이 오지 않을 것처럼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어리석은 시한부 종말론자들처럼 하나님의 나라가 인간이 계산한 특정한 날과 시간에 온다고 착각해서도 안 됩니다.

성경은 예수의 재림을 기다리는 우리의 자세가 어떠해야 하는지를 말해줍니다. 우리는 성령의 기름을 우리 안에 가득히 채워서 늘 깨어서 기도하며 예수님이 오시기를 기다려야 합니다. 우리에게 맡기신 사명을 충실히 감당해야합니다. 우리가 흔히 버스 지나간 후 손 흔들면 뭐하냐는 말이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버스가 지나갔는데 뒤늦게 손을 흔들면 운전하는 아저씨가 볼 수 없습니다. 예수님이 다시 오신 후에는 깨어 있어야 소용없습니다.

최근에 양양 일대 큰 불이 일어나 주위 사람들을 안타깝게 하였습니다. 그 가운데 천년 고찰이고 해돋이로 유명한 낙산사가 완전히 불에 타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국가의 보물이 많이 소실이 되었고 특히 동종이 불에 녹아 더욱더 안타깝게 되었습니다. 불은 아무것도 봐주지 않고 예외 없이 다 불태우고 가버렸습니다. 백년의 고찰, 그리고 울창한 산림도 한순간 잿더미로 변화되었습니다. 이것은 우리의 재림의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날에는 불심판이 있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소중히 품고 간직했던 것들이 있더라도 그날에는 모두 불에 타버려 영원히 사라질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세상에 소망을 두지 말고 영원하신 하나님과 말씀에만 소망을 두어야 합니다.

 

(철저한 하나님의 심판)

 

11,12절을 보십시오. “노아가 육백 세 되던 해 둘째 달 곧 그 달 열이렛날이라 그 날에 큰 깊음의 샘들이 터지며 하늘의 창문들이 열려 사십 주야를 비가 땅에 쏟아졌더라

 

칠 일 후에 하나님의 말씀대로 드디어 홍수가 났습니다. 사람들은 그때도 술 마시고 노래방에서 러브호텔에서 즐겼습니다. 빠찡꼬에 가서 노름을 하였습니다. 정치인들은 부정부패를 하였습니다. 캠퍼스에서는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도 동거하며 희희낙락 즐겼습니다. 노아가 육백세 되던 해 이월 십칠일에 하늘이 열려라 참깨하면 바위가 열리듯이 하늘문이 열리더니 우르릉 쾅쾅 쾅쾅 하며 굵은 비가 사정없이 쏟아졌습니다. 땅에서는 큰 샘들이 터지며 물이 정신없이 불어났습니다. 쓰나미가 갑자기 몰아닥칠 때처럼 사람들은 정신없이 높은 곳, 높은 곳으로 올라갔습니다. 배를 타고 피난하였습니다.

그러나 비는 하루 이틀 끝난 것이 아니고 사십일을 쏟아졌습니다. 산에 올라간 자도 잠겼습니다. 배를 탄 자들도 배가 침몰되어 죽었습니다. 널빤지를 의지하여 떠돌던 사람도 다 죽었습니다. 심판은 정말 철저했습니다. 우리도 반드시 하나님의 보좌 앞에 나가서 심판 받을 때가 있습니다.

 

(방주의 문이 닫힐 때가 있다)

 

13-16절을 보십시오. “곧 그 날에 노아와 그의 아들 셈, , 야벳과 노아의 아내와 세 며느리가 다 방주로 들어갔고 그들과 모든 들짐승이 그 종류대로, 모든 가축이 그 종류대로, 땅에 기는 모든 것이 그 종류대로, 모든 새가 그 종류대로 무릇 생명의 기운이 있는 육체가 둘씩 노아에게 나아와 방주로 들어갔으니 들어간 것들은 모든 것의 암수라 하나님이 그에게 명하신 대로 들어가매 여호와께서 그를 들여보내고 문을 닫으시니라

 

노아의 가족이 다 방주에 들어갔습니다. 모든 들짐승과 모든 가축과 새와 생명이 있는 모든 것이 다 노아에게 나와서 방주로 들어갔습니다. 하나님이 모든 것을 들여보내고 문을 닫으셨습니다. 하나님은 비로소 방주의 문을 닫으셨습니다. 드디어 방주의 문이 닫히고 구원의 때는 끝이 났습니다.

이를 볼 때 우리는 구원은 받을 때가 있고 이미 구원받은 자도 구원의 날에 항상 깨어있어야 함을 배웁니다. 우리는 구원의 문이 닫히기 전에, 늦기 전에 방주에 들어가야 합니다. 우리가 죽는 날이나 예수님이 다시 오시는 날은 방주의 문이 닫히는 날입니다.

마태복음 251절에서 13절에는 열 처녀의 비유가 나옵니다. 다섯 처녀는 기름을 예비하여 천국 잔치에 참석하였습니다. 그러나 다섯 처녀는 기름을 준비하지 못하였습니다. 그들이 기름을 가져왔을 때는 천국 문이 닫혔습니다.

예수님이 다시 재림하시는 때를 알 수 있다면 그전까지는 흥청망청 놀고 마시고 멋대로 살다가 그때에 이르러 회개하면 된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오시는 때는 인간이 아무리 정확하게 예상을 하려고 해도 그것은 인간의 능력 밖의 문제입니다. 재림의 때는 인간의 계산을 뛰어넘습니다.

보통 결혼식은 초저녁에 시작되기 때문에 사실 여분의 기름이 필요가 없었습니다. 다섯 처녀는 상식과 관행대로 조금의 기름만을 준비하였습니다. 하지만 신랑은 예상을 넘어 예정된 시간에 오지 않았습니다. 충분한 기름을 준비하지 못한 다섯 처녀는 기름을 다시 사러 갔고 그럴 동안에 신랑을 맞이하지 못하였습니다. 그렇지만 혹시 뜻밖의 상황 때문에 신랑이 늦게 올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지혜로운 다섯 처녀는 충분한 기름을 준비하였기 때문에 신랑을 맞이할 수 있었습니다.

모든 것에는 때가 있습니다. 구원에도 때가 있음을 우리는 항상 명심해야 하겠습니다. 우리가 아무 때나 구원받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지금 예수님의 구원의 방주에 타지 못하신 분들은 하루속히 예수님을 믿어 구원의 방주에 올라타야 합니다. 이미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은 분들도 방심하지 말고 살아있는 동안 항상 성령 충만하고 성령을 좇아 행하며 힘써 복음을 증거해야 합니다. 오늘은 육신대로 살고 내일부터 새롭게 살겠다는 것은 위험한 발상입니다. 우리가 항상 주님과 동행하며 깨어있어 모두가 구원받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방주 안과 밖의 차이)

 

17-20절을 보십시오. "홍수가 땅에 사십일을 있었는지라 물이 많아져 방주가 땅에서 떠올랐고 물이 더 많아져 땅에 창일하매 방주가 물위에 떠다녔으며 물이 땅에 더욱 창일하매 천하에 높은 산이 다 덮였더니 물이 불어서 십오 규빗이 오르매 산들이 덮인지라.“

 

하나님의 홍수심판은 그 당시 가장 높은 산보다 8m더 높이 물을 채우시고 그 물이 무려 150일간 머물러 있을 정도로 철저하고 무서웠습니다. 그 어느 것도 살아남을 수가 없었고 모두 땅에서 쓸어버림을 당하였습니다. 결혼하고서도 애인생각에 몰두했던 갑식이도 물에 애인과 함께 떠내려갔습니다. 방에 꼭꼭 숨겨두었던 등기문서, 통장등도 여지없이 집과 함께 쓸려갔습니다. 결혼식 날 입으려고 만들었던 예쁜 옷도 아름다운 집도 모두 쓸려갔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심판을 생각할 때 막연할 수 있고 애매모호하게 느낄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개미새끼 하나라도 살아남을 수 없는 분명하고 완벽한 심판을 내리셨습니다.

홍수가 나기 전에는 방주 안과 방주밖에 있는 것이 차이가 없습니다. 홍수가 내렸을 때는 방주 안와 밖은 생명은 생명과 죽음 차이입니다. 타이나틱 호가 좌초되었을 때 구명보트를 서로 타려고 싸웠습니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구원의 방주 예수님 안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침례의 홍수심판)

 

사도베드로는 홍수심판의 영적 의미를 말하고 있습니다. 베드로전서 320-21절을 보십시오. "그들은 전에 노아의 날 방주 예비할 동안 하나님이 오래 참고 기다릴실 때에 순종치 아니하던 자들이라 방주에서 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은 자가 몇 명뿐이니 겨우 여덟 명이라. 물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이제 너희를 구원하는 표니 곧 세례라 육체의 더러운 것을 제하여 버림이 아니요 오직 선한 양심이 하나님을 향하여 찾아 가는 것이라.“

 

여기서 홍수심판은 바로 침례를 뜻하고 있숩니다. 물침례란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의 침례를 의미합니다. 물침례만으로 사람이 변화되지 않습니다. 십자가를 통한 성령의 침례만이 사람을 변화시킵니다. 우리는 십자가의 침례를 통하여 과거의 나의 옛사람이 예수님의 십자가와 함께 죽고 이제 부활하신 예수님과 함께 태어나 새로운 생명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물은 두 가지 기능을 합니다. 사람을 죽게 하고 배를 뜨게 합니다. 물은 십자가의 죽음이고 부활의 생명을 의미합니다. 우리 과거의 거짓되고 더럽고 추악한 옛사람은 예수님의 십자가와 함께 이미 모두 죽었습니다. 이제 우리는 부활의 주님과 함께 새생명을 얻었습니다. 우리는 전혀 새로운 나로서 변화되었습니다.

 

(홍수 심판을 통한 새로운 출발)

 

21-24절을 보십시오. “땅위에 움직이는 생물이 다 죽었으니 곧 새와 육축과 들짐승과 땅에 기는 모든 것과 모든 사람이라 육지에 있어 코로 생물의 기식을 호흡하는 것은 다 죽었더라. 지면의 모든 생물을 쓸어 버리시니 곧 사람과 짐승과 기는 것과 공중의 새까지라 이들은 땅에서 쓸어버림을 당하였으되 홀로 노아와 그와 함께 방주에 있던 자만 남았더라 물이 일백오십일을 땅에 창일하였더라.”

 

노아 전의 그 죄악되고 타락되었던 옛사람들은 다 죽었습니다. 과거에 죄악이 관영하고 완전 부패하여 음울했던 옛사람은 물에 씻겨 죽었습니다. 영원히 돌아올 수 없는 길로 가버렸습니다.

이제 그야말로 새사람, 새로운 인류, 그전 것은 배제된 새로운 인류역사의 서막이 열린 것입니다. 노아는 새 아담이 되었습니다. 이제는 전과는 완전히 다른 신세계가 시작되었습니다. 이러한 홍수심판을 통해서 인류는 자연스럽게 세대교체가 이루어지게 되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홍해를 건넜을 때도 그것은 단순히 물을 건너는 것이 아닌 옛사람은 죽고 새 인류가 태어났음을 상징하는 세례로 성경은 보고 있습니다.(고전10:1-2) 노예생활로 자유와 권리를 억압받았던 백성들이 이제는 진정한 거룩한 자유인으로 변화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특별한 사랑과 관심의 대상으로 변화된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던 사람들은 홍수로 묻고 거룩한 제사장 나라로 출발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십자가와 부활 속에 있는 복음입니다.

 

(십자가 안에서 새로운 삶)

 

그러면 이렇게 세례를 받은 우리는 이제 어떤 삶을 살아야 하겠습니까? 배에 타야합니다. 배는 예수님이고 성령님입니다. 66,7,8절은 말씀합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 옛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멸하여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 노릇하지 아니하려 함이니 이는 죽은 자가 죄에서 벗어나 의롭다 하심을 얻었음이니라.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그와 함께 살줄을 믿노니."

우리 옛사람이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멸하여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노릇하지 아니하려함입니다. 우리는 이미 죄에서 벗어나 의롭다함을 얻었습니다. 그러므로 새 생명을 얻은 우리는 이제 예수님과 연합하여 성령과 동행하여 살아가야 합니다. 과거의 죄악 된 나는 이미 죽었기에 다시는 그것으로 돌아가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가 다시 죄악에 거한다면 이것은 개가 그 토해놓은 것을 다시 먹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우리는 날마다 부활하신 예수님 즉 성령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날마다 예수님의 십자가 안에서 나를 죽은 자로 여기며 살아야합니다. 그분과 함께 먹고 마시며 호흡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이 있고 장차 새 하늘과 새 땅에 들어가게 하실 하나님을 믿습니다.

이 말씀은 오늘 메시지의 핵심 부분입니다. 우리 가운데에도 아직도 옛사람이 살아있다고 생각하시는 분들이 있습니까? 있다면 진정으로 복음을 모르는 것입니다. 세례를 모르는 것입니다. 복음은 과거의 자기는 십자가에서 온전히 죽었다는 것을 믿는 믿음에서 시작됩니다. 복음의 바탕은 옛날의 나는 죽었다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이 믿음이 필수입니다. 자기 의지로 하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하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과거의 자신과 단절되었다는 믿음의 바탕에서 예수님을 바라보면 우리 안에 복음이 임하게 됩니다. 성령이 임하고 성령이 일하시게 됩니다. 예수님은 배입니다. 우리 모임 안에 예수님을 믿고도 아직도 술과 정욕을 사랑하며 즐기는 분들이 있습니다. 이것은 바로 성령을 밀어내고 옛사람을 좇는 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이럴 때 성령께서 슬퍼하시고 분노하시며 우리 곁을 떠나시게 됩니다.

우리 성도들도 옛사람 즉 질병, 어둠, 슬픔, 저주, 허무, 정욕, 불신, 열등감, 물질주의, 인본주의의 옛사람은 이미 홍수 심판으로 대단원의 막을 내렸습니다. 과거의 볼품없는 내가 아닌 새 생명을 가진 전혀 새로운 나로 변화되었습니다. 세상이 좋고 세상 것을 흠모하던 하던 자들이 기도하는 것을 좋아하고 말씀 연구하는 것을 즐겨하고 말씀을 생명처럼 귀하게 여기며 말씀대로 살기를 원하는 자로 사명을 기쁘게 감당하는 자로 거듭났습니다.

이젠 대단원의 1부가 끝나고 전혀 새로운 훨씬 더 신나고 재미있는 2부의 막이 올려졌습니다. 이제 우리들은 가슴 가슴마다 복음을 품고, 복음의 승리의 개가를 힘차게 부르며 이제 정말로 구원이 필요한 세상의 양들에게 말씀과 복음을 전하는 용사 중에 용사가 되었습니다. 지금 우리모임은 어느 때보다 많은 양들과 1:1을 하고 있습니다. 이때 우리는 더욱 더 새롭게 무장을 해야 합니다. 과거에 뒤로 처져 사단과 힘겨운 싸움을 하고 있었던 분들도 이제는 다시 나의 옛사람은 죽었다는 것을 명심하고 부활하신 예수님과 동행하는 새로운 나로 힘차게 태어나야 합니다. 우리가 기도와 말씀으로 무장하여 이 복음을 힘차게 전하기만 하면 놀라운 성령의 역사가 올해 가운데 일어날 줄로 믿습니다. 우리 각자가 과거의 옛사람이 죽었음을 철저 믿어드림으로 복음의 깊은 세계에 빠져보시길 소망합니다. 복음은 한마디로 이제 우리와 함께 하시는 성령님을 믿는 것입니다. 십자가 예수님이 나의 옛사람과 함께 못 박히시고 그 희생과 사랑 때문에 저희가 구원의 축복을 받은 것을 믿는 것입니다. 부활의 주님이 만든 배에 믿음으로 타는 것입니다. 이것이 복음의 핵심 키워드입니다. amen!

 

창세기 7장 강해 홍수 세례

창세기 71- 창세기 724

요절 창세기 723 지면의 모든 생물을 쓸어버리시니 곧 사람과 가축과 기는 것과 공중의 새까지라 이들은 땅에서 쓸어버림을 당하였으되 오직 노아와 그와 함께 방주에 있던 자들만 남았더라

 

창세기 7장 강해 끝입니다.

 





번호 제목 작성자 작성일
12 [창세기] 창세기 13장 강해 아브람의 가치관 오요한 2005-05-22
11 [창세기] 창세기 12장 강해 2부 아브람의 초기 신앙 생활 오요한 2005-05-15
10 [창세기] 창세기 12장 강해 1부 아브람의 꿈 오요한 2005-05-08
9 [창세기] 창세기 9장-11장 강해 무지개 언약 오요한 2005-05-01
8 [창세기] 창세기 8장 강해 노아를 기억하신 하나님 오요한 2005-04-24
7 [창세기] 창세기 7장 강해 홍수 침례 오요한 2005-04-18
6 [창세기] 창세기 6장 강해 구원의 방주 예수님 오요한 2005-04-16
5 [창세기] 창세기 4장 강해,, ,5장 강해 가인과 아벨 오요한 2005-04-07
4 [창세기] 창세기 3장 강해 3원시복음 오요한 2005-04-01
3 [창세기] 창세기 2장 강해 에덴 동산을 만드신 하나님 오요한 2005-03-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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