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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주의 대학생 선교기관

천안UBF

성경66권강해서

창세기 4장 강해,, ,5장 강해 가인과 아벨

작성자 : 오요한
작성일 : 2005-04-07 00:00:00
조회수 : 3,293

문제지풀이(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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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4장 강해 가인과 아벨

말씀 창세기 41-창세기 4

요절 창세기 415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그렇지 아니하다 가인을 죽이는 자는 벌을 칠 배나 받으리라 하시고 가인에게 표를 주사 그를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서 죽임을 면하게 하시니라

 

창세기 2,3장에는 아담과 이브의 이야기입니다.

4장에는 아담과 이브의 후손인 가인과 아벨이 나오고 그 후손들이 나옵니다. 하나님은 아벨의 제사를 받으시고 가인의 제사를 받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은 가인도 사랑하시고 표를 주셨습니다. 그러나 가인이 회개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죽은 아벨 대신에 셋을 주시고 계속하여 구원역사를 이루어가십니다. 하나님은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도 구원의 역사를 이어가십니다. 하나님은 꺼져 가는 등불을 끄지 않으시고 상한 갈대를 꺾지 않으시는 소망의 하나님이십니다. 우리가 이런 소망의 하나님을 배울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아멘!

 

(가인과 아벨의 탄생)

 

1,2절을 보십시오. "아담이 그 아내 하와와 동침하매 하와가 잉태하여 가인을 낳고 이르되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 하니라 그가 또 가인의 아우 아벨을 낳았는데 아벨은 양 치는 자이었고 가인은 농사하는 자이었더라.“

 

하나님은 아담에게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고 하셨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범죄했을 때는 그의 후손 가운데서 메시야가 오신다고 약속해주셨습니다. 아담과 하와는 그 약속의 말씀을 붙잡고 자식을 낳았습니다. 하와는 잉태하는 고통을 맛보고 가인을 해산하는 수고를 하였습니다. 인류에게 처음으로 생명이 탄생했습니다. 아담과 하와는 기쁨이 가득했습니다. 결혼한 부부가 아기를 낳지 못하다가 처음으로 아기를 낳았을 때의 기쁨보다도 훨씬 더 컸을 것입니다. 두 아들은 자라서 가인은 농사하는 농부가 되었고 아벨을 양을 치는 목동이 되었습니다.

 

(가인과 아벨의 첫 예배)

 

3-4a절을 보십시오. "세월이 지난 후에 가인은 땅의 소산으로 제물을 삼아 여호와께 드렸고 아벨은 자기도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드렸더니"

 

가인과 아벨은 처음으로 하나님께 제사를 지냅니다. 제사는 예배의 다른 표현입니다. 인간은 범죄로 하나님과 관계성이 단절되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예배를 통해서 하나님과 다시 만날 수 있는 길을 열어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예배를 통해서 우리에게 말씀하실 수 있고 인간은 예배를 통해서 하나님께 가까이 나갈 수 있습니다. 우리는 예배를 통하여 하나님과 교제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예배를 드릴 수 있다는 것은 큰 은혜입니다.

제사는 하나님을 높이고 신뢰하고 순종하고 감사하고 사랑한다는 표시로 드리는 것입니다. 자신의 죄에 대해서 회개하며 나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죄값을 치르기 위해서는 자기 희생이 필요합니다. 제사는 죄악된 자기를 죽이는 희생입니다.

 

(최상을 받으시는 하나님)

 

4b5a을 보십시오.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 제물은 열납하셨으나 가인과 그 제물은 열납하지 아니하신지라

 

가인은 농사를 다 지은 후에 곡식 중에서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아벨은 양과 그 첫새끼를 드렸습니다. 그들은 속죄제로 드린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감사제를 드렸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습니다. 아벨의 제사는 하나님이 받으시고 가인의 제사는 받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은 받으시는 제사도 있고 받지 않으시는 제사도 있습니다. 어떤 제물은 하나님께서 기쁘게 받으시고, 어떤 제물은 하나님이 가증히 여기십니다. 하나님은 제물에 문제를 삼으시는 것이 아니요. 제물을 드리는 사람에게서 문제를 찾으십니다.

하나님은 가인의 제사만 받지 않은 것이 아닙니다. 가인 자신도 받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은 아벨의 제물만 받으신 것이 아니라 아벨도 받으셨습니다.

가인은 그냥 땅의 소산 중에서 제물을 드렸습니다. 가인은 그냥 쓰던 것 중에서 드렸습니다. 그러나 아벨은 양의 첫 새끼와 첫새끼의 가장 기름진 것으로 구별하여 드렸습니다. 아벨은 첫새끼를 구별하여 최상의 것을 드렸습니다.

하나님은 출애굽기 2319절에서 말씀하셨습니다. “네 토지에서 처음 거둔 열매의 가장 좋은 것을 가져다가 너의 하나님 여호와의 전에 드릴지니라. 너는 염소 새끼를 그 어미의 젖으로 삶지 말지니라.”

하나님은 구별하여 가장 소중히 드리는 정성과 사랑을 받으십니다. 제물보다 중요한 것은 사람의 마음입니다. 하나님은 정성 없이 드리는 제물은 받지 않으십니다. 죄에 대해서 회개하지 않고 드리는 예배도 받지 않으십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부유하신 분이십니다. 천하의 양이나 염소나 곡식이 다 하나님의 것입니다. 하나님은 제물의 부족을 느끼시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제물을 드리는데 나타난 믿음과 마음을 받으십니다. 히브리서 저자는 아벨은 하나님을 믿음으로 제사를 드려서 하나님이 그 제물을 받으셨다고 말씀하십니다. 아벨은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최상의 것을 하나님께 드렸고 하나님은 그 마음을 받으셨습니다.

 

(예배로 하나님을 높여야함)

 

말라기서에 보면 사람들은 좋은 양이나 소는 자신이 먹거나 팔아 먹었습니다. 사람들은 병들고 다리를 절고 눈먼 양이나 소를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이 하나님을 경멸히 여긴다고 책망하십니다. 하나님은 이런 제물을 총독이나 왕에게 드려보라고 하십니다. 당장 곤장을 맞습니다.

우리 역사에도 보면 백성들은 왕에게 진상하는 물건은 최상의 것을 바칩니다. 왕에게 눈 빠진 양을 진상해보십시오. 그는 왕을 무시한다고 혼납니다. 우리 하나님은 총독보다 더 크고 높으신 분이십니다. 천지를 창조하신 가장 높으신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가장 좋은 것을 드려야 합니다.

우리가 예배드리고 기도를 드리고 헌금을 드립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드릴 수 있다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은혜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최상의 것을 진심으로 드려야합니다. 하나님께 드릴 때 자신의 일을 다하고 시간이 남을 때만 예배를 드리는 사람이 있습니다. 예배도 습관적으로 늦게 오는 사람이 있습니다. 기도시간의 구별이 없이 자신의 시간을 다 쓰고 쓰레기 시간을 드리는 사람이 있습니다. 헌금도 자신의 쓸 것 다 쓰고 호주머니에 남은 돈이나 드리며 그것이 자신의 전부인 두 렙돈이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런 것은 하나님이 받으시지 않으십니다. 우리는 무엇보다 살아계신 하나님을 마음에 첫 자리에 높이고 부모님을 높이고 회사의 상관을 놓이듯이 가장 귀한 것으로 드려야 합니다.

 

(하나님께 분노하는 가인)

 

5b를 보십시오. “가인이 심히 분하여 안색이 변하니

 

하나님이 가인의 제사를 받지 않으신 이유는 가인이 회개하기를 바라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가인은 제사를 받지 않으시자 분하여 안색이 변했습니다. 그는 자기 의가 있었습니다. 하나님께 드리고 나서 하나님이 받지 않으시는 것에 불평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이 예배를 받지 않으셔도 감사해야합니다.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해 드려야합니다. 하나님의 주권이 사랑과 공의에 기초한 것을 인정해야합니다.

하나님이 제사를 받지 않으실 때는 나에게 무슨 문제가 없는가 나에게서 죄를 찾고 회개해야합니다. 나의 죄에 대해서 상하고 통회하는 심정으로 나가야합니다. 그러나 가인은 예배가 상달되지 않은 책임을 하나님께 찾고 하나님께 분노하였습니다.

 

(다윗의 감사기도)

 

다윗은 밧세바와 범죄하여 아들을 낳았습니다. 그 아들이 심히 앓았습니다. 다윗은 하나님께 칠일 동안 금식하며 철야 기도하였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아들을 데려가셨습니다. 다윗의 기도를 받지 않으셨습니다. 사람들은 아들이 죽으면 다윗이 안색이 변하여 하나님을 불신할까 염려했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일어나서 오히려 하나님께 경배하고 감사기도를 드렸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다윗을 축복하시고 다윗에게 솔로몬이 태어나게 하셨습니다. 가인도 하나님이 제사를 받지 않았을 때 다윗처럼 하나님께 감사 기도를 드려야 했습니다.

 

(선을 행하지 않은 가인)

 

6,7a절을 보십시오.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가 분하여 함은 어찜이며 안색이 변함은 어찜이뇨?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하나님은 가인에게 분하여 하고 안색이 변한 것이 잘못되었음을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그가 선을 행하지 아니하여 지금 낯을 들지 못한다고 하셨습니다. 선을 행하면 선한 마음을 품었으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는냐는 말입니다. 다른 번역에서는 그가 선을 행하지 않아서 하나님이 제물을 받지 않으셨다고 말씀하십니다. 가인은 선을 행하지 않았습니다. 선은 하나님을 인정하고 하나님을 가장 사랑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주인으로 모시는 것이 선입니다. 가인은 하나님을 가장 사랑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자신을 사랑하는 마음 없이 드리는 제사를 받지 않으셨습니다.

 

(공격은 최대의 방어)

 

7b절을 보십시오. “선을 행치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리느니라. 죄의 소원은 네게 있으나 너는 죄를 다스릴찌니라.”

 

가인은 마음 첫 자리에 하나님을 두지 않자 죄가 문에 엎드립니다. 사자가 사슴을 잡으려고 엎드리고, 뱀이 개구리를 잡으려고 엎드리는 것과 같습니다. 죄는 가인을 잡기 위해서 움크리고 있습니다. 문은 공격하는 장소입니다. 가인의 마음에는 죄의 소욕이 일어났습니다. 미움과 시기와 분노가 일어났습니다. 아담이 범죄한 후에 인간의 내면에는 죄가 들어왔습니다. 죄는 가인을 잡아먹고자 원하고 있습니다.

우리에게도 때로는 죄의 소원이 우리의 마음 속에 일어납니다. 이런 죄의 소원을 이기는 길은 성령의 소원이 더 크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 마음 속에 성령님이 충만하고 하나님을 경외할 때는 죄의 소욕이 약해집니다. 우리는 죄를 다스려야합니다. 우리가 적극적으로 선을 행하면 우리는 죄를 다스릴 수 있습니다. 마음의 첫 자리에 하나님을 두고 우리의 마음과 몸을 하나님께 드려야 합니다. 마음과 목숨과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해야 합니다. 성령을 따라서 행해야합니다. 성령이 주시는 생각을 해야합니다. 그러면 죄의 소욕이 사라집니다. 공격은 최대의 방어입니다.

 

(최초의 살인자 가인)

 

8절을 보십시오. "가인이 그 아우 아벨에게 고하니라. 그 후 그들이 들에 있을 때에 가인이 그 아우 아벨을 쳐 죽이니라.“

 

가인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회개해야 했습니다. 그는 겸손하게 아벨에게서 배워야 했습니다. 아벨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을 배워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우선인 죄를 회개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선하신 주권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아벨에 대한 시기심이 생겼습니다. 그는 아벨의 선이 자신의 악을 더 드러낸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아벨을 죽이면 자신의 악이 드러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는 욱하는 마음이 있었습니다. 그는 분노를 통제하지 못하였습니다.

그는 아담을 들로 가자고 꾀어 나갔습니다. 그는 아벨과 들에 있을 때에 아벨을 돌로 쳐 죽였습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인간을 처음으로 죽였습니다. 그는 아버지 되신 하나님의 마음에 못을 박았습니다. 하나님의 주권에 대해서 정면으로 도전하였습니다. 가인은 안 좋은 많은 역사의 예를 남겼습니다. 그는 최초의 살인을 했고, 친족 살인을 했고, 시체를 유기하였습니다.

 

(가인을 위한 대속제물이 된 아벨)

 

그러면 아벨의 죽음은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하나님은 왜 아벨의 죽음을 내버려 두셨습니까? 우리 주위에도 의인이 핍박받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순교를 당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예수님도 의인이지만 십자가에 죽으셨습니다. 하나님은 아벨을 아끼사 하나님 나라에서 쉼을 갖도록 일찍 부르셨습니다.

아벨의 죽음을 통하여 가인의 죄를 깨닫게 하셨습니다. 아벨은 아벨 자신의 죄로 인하여 죽은 것이 아닙니다. 가인의 죄를 대신하여 죽은 것입니다. 하나님은 아벨의 죽음을 통해서 가인이 죄를 깨닫고 회개하기를 바라셨습니다. 하나님은 아벨의 생명을 죽이면서까지 가인을 사랑하셨습니다. 아벨의 죽음은 대속의 죽음입니다. 우리는 나로 인하여 고통하는 사람들을 보면서 나의 죄를 회개해야합니다. 나를 위해서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님을 생각하며 회개해야 합니다.

 

(가인에게 인격적으로 오신 하나님)

 

9절을 보십시오.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 그가 가로되 내가 알지 못하나이다.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니이까?“

 

하나님은 살인자 가인을 찾아오셨습니다. 하나님은 가인이 살인자인 것을 알고 계셨습니다. 가인을 찾아오신 하나님은 "이놈, 네가 사람을 죽였지?" 라고 묻지 않았습니다. 가인에게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 물으심으로 스스로 죄를 깨닫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살인자를 곧바로 벌주지 않으셨습니다. 먼저 회개의 기회를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죄인을 곧바로 벌주지 않으십니다. 죄를 짓고도 회개하지 않을 때 그를 벌주십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예수님은 죄인을 부르러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죄인을 회개시키려 오셨습니다. 죄를 인정하고 회개하면 어떤 자든지 다 영접해 주십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여 독자 예수님을 의인으로 보내셨습니다. 사람들은 자신들의 죄가 드러나자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여 죽였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물으십니다. 너희의 주인 예수님은 어디 있느냐 물으십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를 보면서 회개해야합니다.

하나님이 회개를 촉구하는 음성에도 가인은 회개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이 사랑으로 책망하는 것을 무시하고 하나님께 반항하였습니다. 내가 아우를 지키는 자냐고 뻔뻔하게 말하였습니다.

 

(죽은 아벨의 호소)

 

10-12절을 보십시오. "가라사대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 네 아우의 핏소리가 땅에서부터 내게 호소하느니라. 땅이 그 입을 벌려 네 손에서부터 네 아우의 피를 받았은즉 네가 땅에서 저주를 받으리니 네가 밭 갈아도 땅이 다시는 그 효력을 네게 주지 아니할 것이요, 너는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되리라."

 

하나님은 회개치 않는 가인에게 벌을 주십니다.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지만 동시에 공의의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가인이 아벨을 죽이자 아벨의 피가 땅에서 하나님께 억울함을 호소한다고 하셨습니다. 아벨은 가인이 회개하도록 죽어서 호소하고 있습니다. 히브리서 저자는 아벨이 죽어서 믿음으로 말한다고 말하였습니다. 그는 죽었지만 그의 영혼은 하나님께 가서 자신의 억울함을 하소연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억울한 아벨의 호소를 들으시고 가인에게 벌을 주십니다. 하나님이 가인을 벌주시는 것도 회개하기를 바라시는 사랑의 징계입니다. 가인이 땅에 아벨의 피를 흘렸으므로 가인은 땅에서 저주를 받습니다. 그는 무생물과 식물과 다른 동물들과 관계성이 끊어지게 됩니다. 그가 열심히 농사를 져도 효력을 내지 않고 열매 없는 인생이 됩니다. 그는 땅에서 정착을 하지 못하고 항상 불안하며 유리방황하는 삶을 살게 됩니다. 하나님이 가인이 이런 고통을 통하여 죄를 깨닫고 회개하기를 원하셔서 벌을 주셨습니다. 그는 김삿갓처럼 방랑하며 죄를 깨닫고 회개하는 삶을 살아야합니다.

 

(사망권세에 시달리는 가인)

 

13,14절을 보십시오. "가인이 여호와께 고하되 내 죄벌이 너무 중하여 견딜 수 없나이다. 주께서 오늘 이 지면에서 나를 쫓아 내시온즉 내가 주의 낯을 뵈옵지 못하리니 내가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될찌라. 무릇 나를 만나는 자가 나를 죽이겠나이다.“

 

가인은 벌을 받고야 자신의 고통을 호소합니다. 가인은 양심이 살아 있었습니다. 그는 마음에 죄책감이 생겼습니다. 죄의 짐을 지게 되었습니다. 그는 주님의 낯을 뵈옵지 못합니다. 그는 하나님과의 관계성이 단절되었습니다. 하나님은 그에게서 떠나셨습니다. 그의 마음 속에는 성령이 떠나고 악령이 역사했습니다. 그는 땅에서 쉼이 없이 방랑합니다. 그는 자연과도 관계도 파괴되었습니다. 그 죄인들은 마음에 안식이 없습니다.

박하사탕이라는 영화에 보면 광주 항쟁에서 여고생을 죽인 군인이 평생을 고통하다가 자살합니다. 죄와 벌에 보면 죄를 지은 라스콜리니코프가 지속적인 고통을 느낍니다. 한국에서 범법자들이 필리핀으로 도피하지만 그곳에서도 방황한다고 합니다.

가인은 무엇보다 사단이 심는 죽음의 공포를 느꼈습니다. 자신이 다른 사람을 죽이자 다른 사람도 자신을 죽일 것 같은 두려움에 사로잡혔습니다. 그는 인과응보적인 생각에 사로 잡혔습니다. 죄를 짓고 회개하지 않는 사람은 마음에 고통이 찾아옵니다. 자연 속 살면서도 고통을 느낍니다. 이런 고통을 느끼는 것은 좋은 것입니다. 우리는 이런 고통을 느껴야 회개할 수 있습니다,

 

(가인에게 사랑의 표를 주신 하나님)

 

15절을 보십시오.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그렇지 않다 가인을 죽이는 자는 벌을 칠배나 받으리라 하시고 가인에게 표를 주사 만나는 누구에게든지 죽임을 면케 하시니라."

 

가인이 만나는 자마다 나를 죽일 것이라고 하자 하나님은 그렇지 않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가인의 생각을 전면 부정하셨습니다. 하나님이 가인을 쫓아내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가인을 사랑하여 회개하기를 원하십니다. 가인은 인과응보적인 생각을 하였습니다. 하나님은 그렇지 않다고 강하게 부정하시므로 은혜를 베풀어주셨습니다.

하나님은 가인이 죄를 범하였어도 다른 사람들이 그에게 똑 같이 살인하는 것을 원치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은 가인을 죽이는 자는 벌을 칠 배나 받게 하셨습니다. 다른 사람들도 가인에게 복수하지 못하게 하십니다. 다른 사람들을 복수하는 죄를 짓지 못하도록 막아주십니다. 복수는 하나님만이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가인에게 사랑의 징표로 표를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죽음의 공포의 시달리는 가인에게 표를 주셔서 죽음의 위협에서 벗어나게 하셨습니다. 사람들이 표를 보면 가인을 죽인 자는 벌을 받을 것이라는 것을 알게 하십니다. 가인은 그 표를 통하여 자신이 살인자이지만 하나님이 사랑하신다는 것을 알고 살게 하십니다,. 하나님은 은혜의 하나님, 사랑의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죄인에게 벌을 주시지만 회개하기를 바라십니다.

 

(가인의 회개를 원하시는 하나님)

 

하나님은 회개만 하면 모든 죄를 용서하십니다. 아담에게 벌을 주셨을 때 아담이 회개하고 아내의 이름을 산자의 어미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아담을 너무 사랑하셔서 아담과 그 아내에게 가죽옷을 지어 입히셨습니다. 하나님은 가인이 이제라도 회개하기를 원하셔서 표를 새겨주셨습니다. 아마 살인자 M(murderer) 자를 새겨 주신 것 같습니다. 가인은 다른 사람에게서 M자로 보호를 받지만 자신은 살인자라는 표를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그가 살인자로서 자신을 인식하고 평생을 뉘우치며 살기를 바라셨습니다. 그가 죄를 깨닫고 회개하면 그는 성자가 될 것입니다.

주홍글씨라는 소설에 보면 헤스터에게 A자를 붙여 간음자(adultery)라는 표시를 줍니다. 하지만 헤스터는 그 표를 잊지 않고, 더욱 겸손하고, 더욱 성실하고, 더욱 열심히 살았을 때 변화됩니다. 그는 간음자의 표시가 유능(able)의 표시가 되고, 천사(angle)의 표시로 인식됩니다. 사도바울이 위대한 것은 자신이 과거 교회를 핍박하고 예수 믿는 자를 살인한 것을 잊지 않았다는데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평생 살인자로 자를 이마에 새기고 살았습니다. 그는 자 성자가 되었습니다. 다윗의 위대한 점은 자신이 간음자요. 살인자를 잊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저도 이 말씀을 볼 때 과거 정욕과 자기 영광에 가득찼던 자임을 고백합니다. 내가 목자로 산다는 것 자체가 큰 은혜입니다. 제가 이 은혜를 잊지 않고 살기를 기도합니다.

 

(싸우는 후손들)

 

16-17절을 보십시오. "가인이 여호와의 앞을 떠나 나가 에덴 동편 놋 땅에 거하였더니 아내와 동침하니 그가 잉태하여 에녹을 낳은지라 가인이 성을 쌓고 그 아들의 이름으로 성을 이름하여 에녹이라 하였더라."

 

가인은 하나님의 앞을 떠났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사랑에도 불구하고 회개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아들을 낳고 아들의 이름을 에녹이라고 지었습니다. 에녹은 성()이라는 뜻입니다. 성을 쌓았다는 것은 서로 싸우고 막는 생활을 의미합니다. 그의 마음이 불안하고 두려웠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가인에게 유랑하는 삶을 살도록 하셨습니다. 그러나 가인은 유랑하지 않고 정착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가인이 회개하지 않았을 때 가인과 후손은 다른 사람들과 서로 싸우며 살 수밖에 없었습니다. 우리가 쌓아야 할 성은 돌로 쌓는 성이 아닙니다. 우리의 진정한 성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일부다처제가 됨)

 

18-22절을 보십시오. "에녹이 이랏을 낳았고 이랏은 므후야엘을 낳았고 므후야엘은 므드사엘을 낳았고 므드사엘은 라멕을 낳았더라. 라멕이 두 아내를 취하였으니 하나의 이름은 아다요 하나의 이름은 씰라며 아다는 야발을 낳았으니 그는 장막에 거하여 육축 치는 자의 조상이 되었고 그 아우의 이름은 유발이니 그는 수금과 퉁소를 잡는 모든 자의 조상이 되었으며 씰라는 두발가인을 낳았으니 그는 동철로 각양 날카로운 기계를 만드는 자요, 두발가인의 누이는 나아마이었더라."

 

여기는 가인의 후손들이 기록 되어 있습니다. 이들에게서 육축치는 목축업과 수금과 통소를 부는 음악과 각양 날카로운 기계를 만드는 기계공학이 생겨났습니다. 그들의 후손 가운데 가장 대표적인 사람이 라멕입니다. 그는 처음으로 일부다처제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살인을 노래하는 자들)

 

23,24절을 보십시오. “라멕이 아내들에게 이르되 아다와 씰라여 내 목소리를 들으라 라멕의 아내들이여 내 말을 들으라 나의 상처로 말미암아 내가 사람을 죽였고 나의 상함으로 말미암아 소년을 죽였도다 가인을 위하여는 벌이 칠 배일진대 라멕을 위하여는 벌이 칠십칠 배이리로다 하였더라

 

라멕은 자신의 죄를 노래합니다. 그의 노래를 들어보면 그가 사람을 죽인 것을 자랑합니다. 더구나 소년을 죽입니다. 가인은 죄를 짓고 나서 죄책감을 느꼈습니다. 하지만 라멕은 죄의식도 없습니다. 사람들이 타락하면 자신만 죄를 지을 뿐 아니라 죄짓는 자를 옳다합니다. 그는 하나님이 가인을 죽이는 자는 벌을 칠 배나 받는다고 하자 라멕은 자신을 죽이면 벌을 77배나 받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는 하나님의 사랑을 이용하여 심판에 대한 두려움도 없이 죄를 짓습니다. 이런 자들은 심판을 받아야 마땅합니다. 하나님은 이런 자들을 노아시대에 홍수로 심판하십니다.

 

(꺼져가는 등불을 살리신 하나님)

 

25,26절을 보십시오. "아담이 다시 아내와 동침하매 그가 아들을 낳아 그 이름을 셋이라 하였으니 이는 하나님이 내게 가인의 죽인 아벨 대신에 다른 씨를 주셨다. 함이며 셋도 아들을 낳고 그 이름을 에노스라 하였으며 그 때에 사람들이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

 

의인 아벨의 죽음으로 하나님의 구원역사는 끊어진 것처럼 보입니다. 사단은 아벨이 죽고 가인의 후손들은 죄를 짓자 회심의 미소를 지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실패하지 않으십니다. 아벨의 순교는 헛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죽은 아벨 대신의 셋을 주셨습니다. 셋의 아들인 에노스는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며 하나님과 교제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셋의 후손을 통하여 구원 역사를 이루고 계십니다.

창세기 4장 강해 가인과 아벨

말씀 창세기 41-창세기 4

요절 창세기 415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그렇지 아니하다 가인을 죽이는 자는 벌을 칠 배나 받으리라 하시고 가인에게 표를 주사 그를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서 죽임을 면하게 하시니라

창세기 4장 강해 끝입니다.

 

 

창세기 5장 강해 하나님과 동행한 에녹

창세기 51-창세기 532

요절 창세기 522 므두셀라를 낳은 후 삼백 년을 하나님과 동행하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5장에는 아담과 셋의 족보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창세기 저자는 이들의 족보를 통하여 하나님께서 여자의 후손 가운데 구원역사를 어떻게 계승하여 가시는지 보여줍니다. 하나님이 노아시대의 심판을 어떻게 준비하고 계시는지 나옵니다. 하나님은 이미 심판을 예고하고 그 구원을 준비하고 있으셨습니다. 심판에서 구원을 받은 대표적인 사람이 에녹입니다. 우리는 에녹을 통하여 우리가 어떻게 휴거하여 공중에서 예수님을 만날 수 있는지 배울 수 있습니다.

 

(아담의 후손 셋)

 

“1. 이것은 아담의 계보를 적은 책이니라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실 때에 하나님의 모양대로 지으시되 2.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셨고 그들이 창조되던 날에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고 그들의 이름을 사람이라 일컬으셨더라 3. 아담은 백삼십 세에 자기의 모양 곧 자기의 형상과 같은 아들을 낳아 이름을 셋이라 하였고 4. 아담은 셋을 낳은 후 팔백 년을 지내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5. 그는 구백삼십 세를 살고 죽었더라

 

창세기 저자는 다시 아담부터 인류역사를 기록합니다. 아담의 역사는 이러합니다.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실 때에,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만드셨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을 남자와 여자로 창조하셨습니다. 그들을 창조하시던 날에, 하나님은 그들에게 복을 주시고, 그들의 이름을 사람이라고 하셨습니다.

아담의 후손 중에 가인은 하나님의 형상을 닮지 않았습니다. 짐승의 형상을 가졌습니다. 아담은 백서른 살에, 자기의 형상 곧 자기의 모습을 닮은 아이를 낳고, 이름을 셋이라고 하였습니다. 아담은 믿음으로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였습니다. 아담이 낳은 셋은 믿음으로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며 살아갔습니다. 아담은 셋을 낳은 뒤에, 팔백 년을 살면서, 아들딸을 낳았습니다. 아담은 모두 구백삼십 년을 살고 죽었습니다.

 

(셋에서 에녹까지)

 

“6. 셋은 백오 세에 에노스를 낳았고 7. 에노스를 낳은 후 팔백칠 년을 지내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8. 그는 구백십이 세를 살고 죽었더라 9. 에노스는 구십 세에 게난을 낳았고 10. 게난을 낳은 후 팔백십오 년을 지내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11. 그는 구백오 세를 살고 죽었더라 12. 게난은 칠십 세에 마할랄렐을 낳았고 13. 마할랄렐을 낳은 후 팔백사십 년을 지내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14. 그는 구백십 세를 살고 죽었더라 15. 마할랄렐은 육십오 세에 야렛을 낳았고 16. 야렛을 낳은 후 팔백삼십 년을 지내며 자녀를 낳았으며 17. 그는 팔백구십오 세를 살고 죽었더라 18. 야렛은 백육십이 세에 에녹을 낳았고 19. 에녹을 낳은 후 팔백 년을 지내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20. 그는 구백육십이 세를 살고 죽었더라

 

셋은 백다섯 살에 에노스를 낳았습니다. 셋은 에노스를 낳은 뒤에, 팔백칠 년을 살면서, 아들 딸을 낳았습니다. 셋은 구백십이 년을 살고 죽었습니다. 에노스는 아흔 살에 게난을 낳았습니다. 에노스는 게난을 낳은 뒤에, 팔백십오 년을 살면서, 아들딸을 낳았습니다. 에노스는 모두 구백오 년을 살고 죽었습니다. 게난은 일흔 살에 마할랄렐을 낳았습니다. 게난은 마할랄렐을 낳은 뒤에, 팔백사십 년을 살면서, 아들딸을 낳았습니다. 게난은 모두 구백십 년을 살고 죽었습니다. 마할랄렐은 예순다섯 살에 야렛을 낳았습니다. 마할랄렐은 야렛을 낳은 뒤에, 팔백삼십 년을 살면서, 아들딸을 낳았습니다. 마할랄렐은 모두 팔백구십오 년을 살고 죽었습니다. 야렛은 백예순두 살에 에녹을 낳았습니다. 야렛은 에녹을 낳은 뒤에, 팔백 년을 살면서, 아들딸을 낳았습니다. 야렛은 구백육십이 년을 살고 죽었습니다.

이들의 족보를 보면 반복되는 말이 있습니다. 거의 800년 동안 자녀를 낳았고 죽었더라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죽었다는 말을 반복합니다. 이방인이든 선민이든 결국은 죽는다는 말입니다. 짧게 살든 길게 살든 죽어야합니다. 우리는 죽으니 하나님 나라를 소망하며 살아야 합니다.

창세기 저자는 이들이 죽었다는 말 외에는 쓸 말이 없었습니다. 이들의 신앙적인 업적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다만 노아로 이어지는 아들을 낳은 것만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것만이 예수님의 계보로 이어지는 의미 있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죽으면 우리의 영적 후계자만 족보에 남고 아무런 기록도 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영적인 자녀를 낳지 않거나 육적인 자녀도 신앙 교육을 시키지 않는다면 기록할 것이 없을 것입니다. 내가 죽은 후에 그냥 이름만 올라가서 몇 년을 살다 죽었더라고 기록될 것입니다. 이를 안다면 우리는 영적인 제자를 양성하기에 힘을 써야 함을 알 수 있습니다. 이를 위해서 기도해야 합니다.

 

(휴거한 에녹)

 

21-24을 보십시오. "에녹은 육십 오세에 므두셀라를 낳았고 므두셀라를 낳은 후 삼백년을 하나님과 동행하며 자녀를 낳았으며 그가 삼백 육십 오세를 향수하였더라.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더니 하나님이 그를 데려 가시므로 세상에 있지 아니하였더라."

 

에녹 한 사람만이 조금 길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에녹은 가인의 후손 에녹과 동명이인입니다. 그는 믿음의 후계자 므두셀라를 낳았고 또한 하나님과 동행했습니다. 참으로 오랜만에 볼 수 있는 말입니다. 그는 마음 속에 하나님을 모시고 하나님의 소원을 따라서 살았습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생각을 하며 살았습니다. 하나님과 보조를 같이 하였습니다. 하나님과 방향을 같이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생각이 멈추면 그의 생각도 멈추고 하나님의 생각이 떠나면 그의 생각도 떠났습니다. 예를 들어서 음란한 생각을 멈추고 거룩한 생각을 하였습니다. 그는 어둔 하늘에 홀로 빛나는 별과 같은 사람입니다. 하나님은 그를 기뻐하셔서 그를 죽음을 보지 않고 하늘로 올리셔서 별처럼 빛나게 하셨습니다. 그는 최초로 휴거를 하였습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믿음)

 

히브리서 저자는 히브리서 115,6절에서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믿음으로 에녹은 죽음을 보지 않고 옮기웠으니 하나님이 저를 옮기심으로 다시 보이지 아니하니라. 저는 옮기우기 전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라 하는 증거를 받았느니라.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찌니라.“

 

에녹은 믿음으로 살았습니다. 그는 믿음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였습니다. 구체적으로 그는 하나님이 살아계신 것과 하나님이 상주시는 것을 믿었습니다. 믿음이란 하나님이 살아서 믿음으로 사는 자에게 상주심을 믿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가장 좋은 상은 바로 하나님 자신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내가 지극히 큰 상급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믿음으로 상급되신 하나님을 소유해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다른 모든 것도 더하여 주십니다. 에녹은 믿음으로 사는 자에게 상을 주실 뿐 아니라 하나님을 떠나 사는 자를 심판하시는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에녹이 살던 시대는 악한 시대였습니다. 사람들은 돈을 따라 살고, 쾌락을 따라 살고, 사람들의 인정을 받기 위해서 살았습니다.

하지만 에녹은 그 시대의 조류를 따라 살지 않고 하나님과 동행하였습니다. 그의 마음 속에 살아계신 하나님을 모시며 살았습니다. 자신의 육신의 소원을 따라서 살지 않고 하나님의 소원을 따라서 살았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서 자신의 소원을 죽이며 살았습니다. 그는 경건한 삶을 살았고 거룩한 삶을 살았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며 살았습니다. 하나님은 그를 데려가심으로 노아시대의 심판을 보지 않게 하셨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하나님을 경외하며 믿음으로 살면 하나님은 우리를 하늘로 부르셔서 죽음을 보지 않게 하실 것입니다. 대환난의 고통을 보지 않게 하실 것입니다.

 

(심판의 예고자 므두셀라)

 

25-32절을 보면 족보가 이어집니다. “25. 므두셀라는 백팔십칠 세에 라멕을 낳았고 26. 라멕을 낳은 후 칠백팔십이 년을 지내며 자녀를 낳았으며 27. 그는 구백육십구 세를 살고 죽었더라

 

므두셀라는 백여든 일곱 살에, 라멕을 낳았습니다. 므두셀라는 라멕을 낳은 뒤에, 칠백팔십이 년을 살면서, 아들딸을 낳았습니다. 므두셀라는 구백육십구 년을 살고 죽었습니다. 므두셀라라는 이름의 뜻은 창을 던지는 자입니다. 고대 이스라엘 부족 사회에서는 창지기가 부족을 지키며 이끌었다고 합니다. 부족간 전쟁에서 그 비중은 특히나 큰 것인데, 창지기가 죽으면 그 부족은 멸망해 버립니다. 에녹은 그런 의미에서 그의 이름을 므두셀라라 지었다고 합니다. 인류 멸망을 미리 암시하는 이름입니다.

므두셀라는 혹은 죽다(므두)+보내다(셀라)의 결합이라는 설도 있습니다. "이 사람이 죽을 때에 내가 홍수 심판을 보내겠다."라는 뜻입니다. 창세기에 나오는 계보들을 짜집고 맞춰보면, 정확히 그가 죽은 해에 대홍수가 일어났습니다. 므두셀라의 죽음으로 대홍수가 일어났고, 노아 부부와 세 아들, 세 며느리 이렇게 여덟 사람과 방주에 탑승한 동물들을 빼면 세상에 살고있던 모든 사람들과 동물들은 홍수에 휩쓸려서 전멸되었습니다. 므두셀라가 죽고 나서 며칠 뒤 하나님이 홍수 심판을 내렸습니다. 에녹은 아들의 이름을 므두셀라라고 지음으로 심판을 경고하였습니다. 사람들이 회개하기를 바라셨습니다.

예수님의 재림 전에도 충분한 예고를 하십니다. 전쟁과 기근과 전염병과 성도의 핍박과 거짓그리스도가 생겨납니다. 만민에게 복음이 전파됩니다. 그 후에 그리스도가 다시 오십니다.

 

(위로자 노아)

 

“28. 라멕은 백팔십이 세에 아들을 낳고 29. 이름을 노아라 하여 이르되 여호와께서 땅을 저주하시므로 수고롭게 일하는 우리를 이 아들이 안위하리라 하였더라 30. 라멕은 노아를 낳은 후 오백구십오 년을 지내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31. 그는 칠백칠십칠 세를 살고 죽었더라 32. 노아는 오백 세 된 후에 셈과 함과 야벳을 낳았더라

 

라멕도 가인의 후손 라멕과 동명이인입니다. 그러나 그는 가인의 후손 라멕과 다른 삶을 살았습니다. 이름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삶이 중요합니다. 라멕은 백여든 두 살에 아들을 낳았습니다. 그는 아들의 이름을 노아라고 하고 "주께서 저주하신 땅 때문에, 우리가 수고하고 고통을 겪어야 하는데, 이 아들이 우리를 위로할 것이다" 하고 말하였습니다.

라멕은 노아를 낳은 뒤에, 오백아흔다섯 살을 살면서, 아들딸을 낳았습니다. 라멕은 모두 777 년을 살고 죽었습니다. 그는 아버지 므두셀라가 969살에 죽었습니다. 930에 죽은 아담은 노아가 태어날 때까지 살아있었습니다. 그는 살아서 노아에게 에덴동상의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노아에게 믿음을 심었습니다. 노아는 오백 살이 지나서, 셈과 함과 야벳을 낳았습니다. 므두셀라가 죽은 후에 홍수심판이 일어납니다.

노아는 땅을 저주하시므로 수고로이 일하는 인간을 위로해 주는 사람입니다. 노아가 위로자가 되는 근본적인 이유는 노아가 인류의 씨를 이어갔기 때문입니다. 그의 후손 가운데서 메시야 그리스도가 태어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수고로이 일하는 우리를 위로해 주시고 수고로이 일하는 우리에게 쉼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예수님이 다시 오시는 날 우리를 완전히 위로해주실 것입니다. 아멘

 

창세기 5장 강해 하나님과 동행한 에녹

창세기 51-창세기 532

요절 창세기 522 므두셀라를 낳은 후 삼백 년을 하나님과 동행하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창세기 5장 강해 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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