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바로가기
메인메뉴 바로가기
컨텐츠 바로가기

복음주의 대학생 선교기관

천안UBF

성경66권강해서

갈라디아서 2장강해 이부 그리스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

작성자 : 오요한
작성일 : 2016-06-27 00:00:00
조회수 : 1,431
갈라디아서 2장 이부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

말씀 갈라디아서 2장 11-21


오늘 말씀은 많은 신앙 생활의 고민을 해결해주는 말씀입니다. 선교지나 교회에서 가강 갈등하는 것이 인간관계입니다. 이런 인간 관계의 갈등을 어떻게 해결하는가 하는 문제를 가르쳐줍니다. 그리고 우리가 신앙 생활할 때 가장 빠지기 쉬운 것이 율법주의입니다. 뭘했느냐 안 했느냐를 가지고 많이 피곤한 신앙 생활을 합니다. 우리가 어떻게 하면 율법주의에서 벗어날 수 있는가하는 문제도 가르쳐주십니다. 또한 그러면 도대체 신앙생활이란 어떻게 사는 것인가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안디옥 교회에서 있었던 한 사건을 통해서 복음의 본질에 대해서 말합니다.


제일장 바울은 베드로를 책망하였습니다.


11-13절을 보십시오. “게바가 안디옥에 이르렀을 때에 책망 받을 일이 있기로 내가 그를 대면하여 책망하였노라. 야고보에게서 온 어떤 이들이 이르기 전에 게바가 이방인과 함께 먹다가 그들이 오매 그가 할례자들을 두려워하여 떠나 물러가매 남은 유대인들도 그와 같이 외식하므로 바나바도 그들의 외식에 유혹되었느니라.” 안디옥 교회는 사도행전에서 세계선교를 중심으로 한 교회입니다. 안디옥교회는 이방인 교회입니다. 안디옥은 바울과 바나바의 사역지입니다. 베드로는 예루살렘 교회를 중심으로 사역하였습니다. 베드로가 안디옥교회를 격려하기 위해서 방문한 것 같습니다. 베드로는 안디옥에서 이방인들과 식사를 하고 있었습니다. 당시에는 식사를 하고 성만찬을 하고 성만찬하고 식사를 하였습니다. 식사는 성만찬의 의미가 있습니다. 베드로는 이방인들과 성만찬을 하면서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평등하다는 복음을 받아들였습니다. 우리 생각에 유대인과 이방인이 식사하는 것은 너무 자연스러운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당시 대부분 유대인들의 생각은 달랐습니다. 유대인들은 이방인과 식사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유대인만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생각하고 이방인은 개와 돼지라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들은 이방인과 식사하지 않았고 잠도 자지 않고 사업도 하지 않고 결혼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유대인이 이방인이나 죄인과 식사하면 신랄하게 비판하였습니다 그러나 기독교인은 예수님 안에서 평등하다는 것을 믿고 함께 식사하였습니다. 베드로가 이방인과 식사하는데 예루살렘에서 온 유대인들이 들어왔습니다. 그러자 베드로가 예루살렘에서 온 사람들을 두려워하여 식사를 하다가 일어나 나갔습니다. 그는 하나님보다 사람들을 두려워하였습니다. 이것은 바리새인처럼 외식하는 신앙입니다. 그러자 바나바도 베드로를 따라서 일어나고 함께 식사하는 많은 유대인도 일어나 나갔습니다 이로 인하여 이방인들은 큰 부끄러움을 당하였습니다. 이방인들이 유대인들에게 무시를 당하였습니다. 이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유대인이니 이방인은 평등하다는 복음의 진리를 깨뜨리는 큰 죄악입니다. 이것을 방치하면 안 됩니다. 유대인과 이방인의 차별의식이 생겨서 이방인이 복음을 믿고자 하지 않을 것입니다


14절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나는 그들이 복음의 진리를 따라 바르게 행하지 아니함을 보고 모든 자 앞에서 게바에게 이르되 네가 유대인으로서 이방인을 따르고 유대인답게 살지 아니하면서 어찌하여 억지로 이방인을 유대인답게 살게 하려느냐 하였노라.” 11절에 보면 바울은 이런 베드로를 대면하여 얼굴을 보고 책망하였습니다. 모든 사람이 보는데서 책망하였습니다. "당신은 유대 사람인데도 유대 사람처럼 살지 않고 이방 사람처럼 살면서, 어찌하여 이방 사람더러 유대 사람이 되라고 강요합니까?“(표준 새번역) 이것은 여러 사람들에게 베드로를 비방한 것이 아닙니다. 주의 종을 비방해서는 안됩니다. 미리암이 모세를 비방하다가 문둥병이 났습니다. 노아의 아들 함이 노아를 비방하다가 저주를 받았습니다 바울은 베드로를 사람들 앞에서 비방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죄악을 책망한 것입니다. 은밀히 책망할 수도 있지만 주위에 영향을 받은 사람들을 고치고 이방인에게 위로를 주기 위해서 공개적으로 책망하였습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의 허물이나 실수를 뒤에서 비방해서는 절대 안됩니다. 옛날 말로는 호박씨 깐다고 하고 요즘 말로는 뒷담화한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뒤에서 비방하는 사람들이 앞에서는 말을 못합니다. 우리는 뒤에서 비방하지말고 그 사람 앞에서 말해야합니다. 다른 사람을 향하여 말하지 말고 그 사람을 향하여 말해야 합니다. 가능하면 은밀하게 만나서 말하는 것이 좋습니다. 그러나 그 죄가 전체적인 영향력을 미치는 것이라면 공개적으로 책망할 수 있어야합니다.


바울은 베드로가 복음의 진리를 따라 살지 않음을 책망하였습니다. 유대인으로 우월감을 책망하고 외식하는 죄를 책망하였습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을 책망할 때 문화적인 것은 책망해서는 안 됩니다. 옷 입는 것이나 화장하거나 장식하는 것은 문화적인 것이 많습니다. 사람에 따라서 시각이 다른 것을 책망해서는 안 됩니다 내가 다른 사람보다 우월하다는 생각을 갖고 사사건건 책망해서는 안 됩니다. 이런 책망은 사람을 피곤하게 합니다. 예전에 교회에는 절대 신발을 신고 들어가면 안됩니다. 그래서 의자도 놓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요즘에 교회에 의자 놓고 신발 신고 들어가는 것이 보편화되었습니다. 옛날에는 남자와 여자가 같이 않지 못하였습니다. 그런데 요즘은 아주 자연스럽게 같이 앉습니다. 옛날에는 우리 유비에프 안에서도 자매들이 귀거리를 하지 못하였습니다. 미국에서는 히피들이 신발을 벗고 교회 들어온다고 못들어오게 하였습니다. 먹는 문제도 너무 에민해서는 안 됩니다. 왜 고기를 못먹느냐 왜 개고기를 먹느냐는 것으로 책망하지 말아야합니다. 옷을 입는 문제도 가능한 관대해야합니다 너무 치마의 길이가 짧다 민소매다라고 말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이런 문화적인 것에 대해서는 관대해야합니다. 그러나 복음의 진리를 훼손하는 것은 분명히 책망해야합니다. 마음에 불신이 있는 것은 책망해야합니다. 하나님을 무시하는 죄악에 대해서는 책망해야합니다. 하나님을 무시하는 교만에 대해서 책망해야 합니다. 예수님도 제자들의 허물과 실수는 다 감당하여주었습니다. 심지어 베드로가 예수님을 세 번 부인하고 물고기 잡으러 가고 도망간것도 용서하여 주었습니다. 그러나 부활의 예수님을 믿지 않을 때는 책망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이 첩을 얻고 아내를 누이라고 속인 것도 책망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믿지 않는 불신에 대해서 책망해야합니다


우리는 아무리 인간적으로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이라도 두려워말고 책망할 수 있어야합니다. 당시에 베드로는 교회의 기둥이요. 반석이었습니다. 에수님이 직접 삼년이나 키운 수제자입니다. 바울은 나중에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을 잠깐 빛으로 보았습니다. 그는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하는 전도자에 불과하였습니다. 지금으로 비유하면 교황과 신부의 관계입니다. 신부가 교황을 책망한 것입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복음은 사람을 두려워하지 않고 하나님 앞에서 누구든지 책망할 수 있는 것입니다. 김수환추기경이 존경을 받는 것은 독재시절에 대통령의 죄를 책망하였기 때문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박정희 전두환 대통령을 만나서 할 말을 못했습니다. 그러나 김수환 추기경만은 할말을 하였습니다. 세레요한은 헤롯을 두려워하지 않고 제수씨를 아내로 삼은 것을 책망하였습니다. 우리는 어떤 사람이라도 두려워하지 않고 죄를 책망해야합니다 아부만 해서는 안 됩니다.


베드로도 바울의 책망을 받고 회개하였습니다. 베드로는 책망을 듣고 회개하였습니다. 바울을 너는 뭐 잘났느냐고 되받아 치지 않았습니다. 나를 여러 사람 앞에서 모욕한다고 자존심 상해하지 않았습니다. 베드로는 회개하고 나중에 바울을 칭찬하는 말을 그의 편지에서 합니다. 베드로는 잠시 습관적으로 죄를 지었지만 하나님 앞에서 회개하고 바울의 책망을 받아들입니다. 그리고 당시에 교회에서는 잠시 죄에 빠진 베드로를 아무도 무시하지 않습니다. 모두가 베드로를 변함없이 존경합니다. 얼마나 멋있습니까? 이렇게 책망하고 회개하는 것이 하나님 앞에서 사는 멋진 삶입니다.


예전에 산정현 교회의 주기철 목사님은 나이 많은 스승인 조만식 선생이 그 교회에 장로로 있었다고 합니다. 대표기도를 맡은 조만식 장로님이 예배에 늦었다고 합니다. 주기철 목자님은 조만식 장로를 책망하여 뒤에 서 있게 하였습니다. 예배가 끝난 뒤에 대표기도를 시켰습니다. 그러자 조장로는 눈물을 흘리면서 회개기도를 하였다고 합니다. 책망한 주목사도 훌륭하고 회개한 조장로도 훌륭합니다. 이들은 모두가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하나님 앞에서 사는 사람들입니다.


제이장 우리는 행위가 아닌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습니다.


바울은 이제 베드로의 외식한 문제에서 근본으로 돌아가서 구원의 문제를 생각합니다. 이를 통하여 구원의 문제를 생각합니다. 구원을 받는 것이 믿음이냐 행위냐는 것입니다.


15-16절을 보십시오. “우리는 본래 유대인이요 이방 죄인이 아니로되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로 말미암음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알므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로써가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라. 율법의 행위로써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 바울은 율법의 행위와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대조하여 말합니다. 유대인들도 율법의 행위로 의롭다함을 받은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는다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 받은 후에 율법을 지키는 것이지 구원받기 위해서 율법을 지키는 것이 아닙니다.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구원받은 후에 하나님은 율법을 주셨습니다. 그들이 십계명을 지켜서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백성답게 살려고 십계명을 지키는 것입니다. 루디아가 공부를 잘해야 마가목자님의 딸로 인정해주는 것이 아닙니다. 공부를 잘해도 딸이고 못해도 딸입니다. 마가목자님의 딸답게 살려고 공부를 열심히 하는 것입니다. 마찬 가지로 우리는 믿음으로 하나님의 자녀가되었습니다. 우리는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에 감사하여 감사함으로 율법을 지켜야 합니다.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려고 율법을 지키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배에 나오고 십일조를 드리고 양을 치는 것은 구원을 받기 위해서 하는 것이 아닙니다. 구원을 받은 자로서 감사하여 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 받은 것입니다. 그 뒤에 나타나는 율법적인 행위들은 구원 받은 자로 합당하게 사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믿음은 눈에 보이지 않고 행위는 눈에 보이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믿음보다 행위에 대해서 민감합니다 예배에 나왔느냐 나오지 않았느냐 십일조를 드렸느냐 드리지 않았느냐 이런 것을 가지고 판단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생각해야할 것은 어떤 마음으로 예배에 나왔느냐는 것입니다. 어떤 마음으로 예배에 나오지 않았느냐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그런 마음의 중심과 동기가 더 중요한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예배에 나왔는데 빚받으러 예배에 나왔습니다. 자기가 좋아하는 여자 꼬시러 예배에 나왔습니다. 어떤 사람은 도둑질하여 번돈으로 십일조를 드렸습니다. 이 사람이 신앙 생활 잘하는 사람입니까? 어떤 사람은 강도 만난 사람을 돌보다 예배를 나오지 못하였습니다. 이 사람이 신앙 생활을 잘 못하는 사람입니까? 우리는 어려워도 행위보다 중심을 보아야합니다. 저는 언어 지문에서 읽은 두 스님 이야기가 마음에 남습니다 두 스님이 길을 가다가 개울을 건너지 못한 한 여자를 보았습니다. 한 스님이 업으라고 하여 건네 주었습니다. 두 스님은 여인과 헤어져서 한 십리쯤 걸어갔습니다. 업어주지 않은 한 스님이 업어준 다른 스님에게 물었습니다. 그때 기분이 어땠니? 여인을 업어준 스님은 모든 것을 다 잊고 가고 있었습니다. 다만 불쌍해서 업어준 것입니다. 그러나 업어주지 않은 스님은 온갖상상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어떤 스님이 과연 바른 스님입니까? 우리는 행위보다 먼저 생각을 회개해야합니다. 마음을 청결하고 깨끗하게 해야합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을 볼 때 이런 눈에 보이은 행위보다 내면의 믿음을 보아야합니다 우리는 그 사람이 진정 하나님을 사랑하고 경외하는 지를 보아야합니다. 율법적인 행위보다 믿음을 보아야합니다.


율법은 사람 앞에서 사는 것입니다. 우리는 사람 앞에서 살지 말고 하나님 앞에서 살아야합니다. 율법저인 의는 사람들 앞에서 보이기 위해서 사는 것입니다. 상대적인 의입니다. 누구보다 낫고 누구보다 못하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의는 하나님과의 수직적 관계에서 오는 것으로 절대적인 것입니다. 바리새인이 세리보다 비교하여 낫다고 하는 것은 율법적인 의입니다. 세리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죄를 발견하고 회개하는 것은 하나님의 의입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과 비교하지 말아야합니다 오십보 백보라는 말이 있습니다 오십보 도망가나 백보 도망가나 도망간 것은 마찬가지라는 말입니다. 사람들 앞에서 조금 저 의롭고 조금 더 죄를 짓고 그것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 앞에서 다 죄인이라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러므로 사람과 비교하지 말고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죄를 깊이 회개해야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믿음으로 살아야합니다.


믿음은 하나님 중심이고 율법은 나 중심입니다. 은혜는 하나님이 하시는 것이고 율법은 내가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하신 일을 받아들이는 것이 은혜입니다 하나님이 하신 일을 그냥 은헤로 공짜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러나 내가 무엇을 해서 하나님께 나가고자 하는 것은 율법입니다. 우리는 오직 하나님이 예수님을 통해서 구원 받은 것을 받아들여야합니다. 그러면 아무 일을 하지 않아도 구원받습니다. 나가 제주대학 교수이신 박사무엘 목자님의 초청으로 제주도에 다녀왔습니다. 그분이 숙박이나 안내를 다 공짜로 해주셨습니다. 나는 섬김 받기만 하였습니다. 그것이 은혜입니다. 나는 그에 감사하여 박디모데 목자님을 대합니다. 우리는 이런 은혜속에서 살아야합니다. 하나님이 나를 구원해주시기 위해서 에수님을 십자가에 죽게 하셨습니다. 그것을 그냥 받아들여야합니다. 그리고 감사함으로 살아야합니다.


그렇다고 믿음이 있다고 율법적인 행위를 무시하라는 것은 아닙니다 진실한 믿음은 행위를 수반하는 것입니다. 행위는 믿음에 부차적으로 따라서 오는 것입니다. 그냥 믿는다고만 하고 행하지 않은 믿음은 죽은 믿음이고 거짓된 믿음입니다. 열매를 보면 나무를 알 수 있듯이 행위를 보면 믿음을 알 수 있습니다. 김인호목자님이 성희목자님을 사랑하니&#57858 시간도 물질도 투자합니다. 만약 사랑한다고 하면서 만나지도 않고 전화도 걸지 않는다면 거짓말인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면 그 표현이 따라아야합니다. 우리가 잘 알듯이 아브라함은 허물과 실수가 많습니다 두 번이나 아내를 누이라고 속이고 사명의 땅을 떠났습니다. 첩을 얻었습니다. 13년 사명을 떠나 소시민적으로 살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았습니다. 그는 살아 있는 믿음을 가졌기 때문에 아들 이삭을 번제로 드릴 수 있었습니다.


17-19절을 보십시오.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의롭게 되려 하다가 죄인으로 드러나면 그리스도께서 죄를 짓게 하는 자냐 결코 그럴 수 없느니라. 만일 내가 헐었던 것을 다시 세우면 내가 나를 범법한 자로 만드는 것이라. 내가 율법으로 말미암아 율법에 대하여 죽었나니 이는 하나님에 대하여 살려 함이라.” 이 말씀은 이미 그리스도 안에서 의롭게 된 사람이 다시 율법적인 생활을 해서 죄인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말씀입니다. 이미 우리는 율법에 대해서 죽은 자이므로 지속적으로 은헤로 주시는 믿음 안에서 살아야합니다. 우리가 오랫동안 습관화된 것을 벗어나기가 쉽지 않습니다 오랫동안 가난하게 산 사람은 돈 쓸 줄을 모릅니다. 남자에게 한번 불신이 생긴 사람은 남자를 믿지 못합니다. 무당을 하던 사람이 예수님을 믿으면 그 무당하던 그 방식으로 춤추고 시끄럽게 장구치면서 예수님을 믿고자 합니다. 이스라엘이 애굽의 생활을 하루에 벗어버리지 못합니다 베드로가 이방인과 식사하지 않던 습관을 하루에 벗어버리지 못합니다 그래서 옛날로 돌아갑니다. 하지만 우리는 옛날로 돌아가서는 안됩니다. 이미 예전에 우리는 죽었으므로 돌아갈 수 없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홍해를 건너서 애굽으로 다시 돌아갈 수 없는 것과 같습니다. 개가 토하였던 것을 다시 먹어서는 안 됩니다. 다시 예전으로 돌아가면 예수님이 죄를 짓는 자로 만드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제 지속적으로 은혜 속에 살아야합니다. 앞을 향하여 나가야합니다. 젖과 꿀이 흐르는 하나님 나라를 향하여 담대히 나가야 합니다.


제삼장 에수님은 내 안에 살아계십니다.


20절을 보십시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이것은 아주 중요한 말씀입니다. 기독교 복음의 핵심이 담긴 말씀입니다. 이 말씀을 잘 묵상하면 복음이 무엇인지 잘 알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나의 모든 죄에 대해서 완전 책임을 지시고 죽으셨습니다. 우리는 죄를 범하여 죽어야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대신 죽으셨습니다. 우리가 죄를 지었어도 벌금을 물든지 징역을 살면 율법을 지킨 것으로 인정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교통법규를 위반하였습니다. 그러나 딱지를 떼고 벌금을 내면 법을 지킨 것으로 인정해줍니다 내가 벌금을 못내면 누가 대신 내주어도 됩니다 대신 벌금을 냈다고 무효라고 하지 않습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이 대신 우리의 죄값을 치러주셨습니다. 우리의 죄값을 다 갚아주셨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믿으면 우리가 율법을 다 지킨 것으로 인정하여주십니다. 우리는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을 수 있습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습니다. 나도 못박히고 사람도 못박히고 율법적인 행위도 못박혔습니다. 예수님이 죽을 때 우리의 인간적인 정과 탐욕도 죽었습니다. 이기심도 명예심도 죽었습니다. 이제 우리는 새로운 삶을 살게 됩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죽기까지 사랑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십자가에서 끝까지 참아 주셨습니다. 십자가에서 우리를 믿어주시고 소망을 가지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 사랑에 대해서 반응하며 사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내가 죽였으므로 내가 주님께 너무 죄송합니다. 주님이 나를 사랑하셨으므로 나도 주님의 사랑을 믿고 순종합니다. 주님께 감사하고 사랑합니다. 렘브란트는 예수님의 십자가를 그리면서 그 옆에 자신을 그려넣었습니다. 내가 예수님을 죽였고 나를 위해서 죽은 것을 영접한 것입니다. 마틴루터가 성베드로 성당의 계단을 기어올라가서 죄사함을 받고자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예수님이 자기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올라간 것을 알고 일어나 걸어서 올라갔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죽음으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사흘만에 부활하여 그리스도가 되셨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영접하면 에수님이 내 안에 성령으로 들어오십니다. 예수님이 내 안에 살아계십니다. 예수님이 나의 왕이 되십니다. 나의 생명이 되십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나를 희생하시고 믿어주시고 기뻐하고 사랑하시는 것을 믿음으로 사는 것입니다. 살아나신 예수님의 소원을 따라서 사는 것입니다. 나는 왕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종입니다. 크리스찬이라는 말이 예수님의 종이라는 말입니다. 이제는 내 마음대로 살지 않습니다 .내 마음대로 살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이제는 에수님의 뜻에 절대순종하며 사는 것입니다.


21절을 보십시오. “내가 하나님의 은혜를 폐하지 아니하노니 만일 의롭게 되는 것이 율법으로 말미암으면 그리스도께서 헛되이 죽으셨느니라.” 바울은 예수님의 십자가의 은혜를 페기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율법적인 행위로 살지 않았습니다. 그는 지속적으로 은혜 속에서 믿음으로 살았습니다. 그리스도의 죽음을 온전히 믿음으로 살았습니다.


결론적으로 우리 안에 예수님만이 살아있게 해야합니다. 우리 가정에 교회에 직장에 나는 죽고 예수님이 살아있게 해야 합니다. 주위 사람들은 죽고 예수님이 살아 있게 해야합니다. 나의 율법적인 행위는 죽고 예수님을 믿는 믿음이 살아있어야 합니다. 에수님이 나에 대해서 모든 책임을 지고 죽은 것을 믿어야합니다. 예수님이 나를 완전 믿어주시고 완전 소망하는 것을 믿어야합니다. 에수님이 나를 인하여 기뻐하고 즐거움을 이기지 못하는 것을 믿어야합니다. 에수님이 나를 사랑하시는 것을 믿어야합니다. 그 안에서 우리는 작아지고 겸손해 질 수 있습니다. 우리는 에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다른 사람에 대해서 죄송하고 믿어주고 순종하고 감사하고 사랑하며 살 수 있습니다. 우리가 살아계신 예수님을 믿음으로 살기를 기도합니다. 아멘 6




번호 제목 작성자 작성일
12 [갈라디아서] 갈라디아서 2장강해 이부 그리스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 오요한 2016-06-27
11 [갈라디아서] 갈라디아서 6장 강해 이부 그리스도의 십자가외에는 자랑할 것이 없다. 오요한 2016-06-27
10 [갈라디아서] 갈라디아서 6장 강해 일부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 오요한 2016-06-27
9 [갈라디아서] 갈리다아서 5장 강해 이부 성령을 따라 행하라 오요한 2011-06-23
8 [갈라디아서] 갈라디아서 5장 강해 일부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하라 오요한 2005-10-01
7 [갈라디아서] 갈라디아서 4장 강해 이부 바울은 애정과 논리로 은혜 신앙을 설득합니다. 오요한 2005-09-30
6 [갈라디아서] 갈라디아서 4장 강해 일부 아들이 종으로 돌아가서는 안 됩니다. 오요한 2005-09-27
5 [갈라디아서] 갈라디아서 3장 강해 이부 율법을 싸고 있는 언약 오요한 2005-09-27
4 [갈라디아서] 갈라디아서 3장 강해 일부 우리를 위해 저주 받으신 예수님 오요한 2005-09-25
3 [갈라디아서] 갈라디아서 2장 강해 이부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오요한 2005-09-25
1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