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바로가기
메인메뉴 바로가기
컨텐츠 바로가기

복음주의 대학생 선교기관

천안UBF

성경66권강해서

갈라디아서 3장 강해 일부 우리를 위해 저주 받으신 예수님

작성자 : 오요한
작성일 : 2005-09-25 00:00:00
조회수 : 4,336

문제지풀이(2)

    iconB_09305A.hwp  (23.50KB)

    iconB_09305B.hwp  (32.00KB)

갈라디아서 3장 강해 일부 우리를 위해서 저주 받으신 예수님
말씀 갈라디아서 3장 1-갈라디아서 3장 14
요절 갈라디아서 3장 13절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 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예수님을 믿은 감격이 오래 가지 못합니다. 어떤 분은 예수님을 통하여 병이 낫고 감격합니다. 하나님을 뜨겁게 사랑합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 자연히 나은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사랑은 식어집니다. 우리가 지속적인 은혜를 위해서 감성적인 은혜와 함께 지식적인 은혜가 있어야합니다. 이것이 굉장한 은혜라는 것이 체계적이고 합리적으로 정리 되어야합니다. 다음에 실천해야합니다. 사랑을 깨닫고 지식을 갖고 행동으로 옮겨야합니다. 의지화되고 실천으로 옮겨질 때 그 감격 속에 오래오래 지속할 수 있습니다. 사랑을 느끼지만 말고 합리적으로 생각하고 실천해야합니다. 머릿속에서 왔다갔다하면 꿈으로 환상으로 끝나는 것입니다. 의지화될 때 확실한 믿음의 열매를 맺게 됩니다. 감성은 사라지고 깨달은 것은 의심이 생기면 없어집니다. 정말로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면 행동으로 옮겨야합니다.

(십자가를 보아야 합니다.)

1절을 보십시오. “어리석도다 갈라디아 사람들아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 너희 눈 앞에 밝히 보이거늘 누가 너희를 꾀더냐”

갈라디아 사람들은, 왜 그렇게 어리석습니까?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이 그들의 눈앞에 생생하게 나타나 있는데 누가 그들을 미혹시켰단 말입니까? 갈라디아 성도들은 십자가를 보고 감격하고 깨달았으나 행동으로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신학화 과정이 중단되고 믿음이 사라졌습니다. 생활 속에서 완전히 체계화되지 못하여서 믿음이 현실에서 나타나지 못합니다. 그들은 선행하고 수고하면서 율법주의가 되었습니다. 믿음으로 구원 받았는데 행위로 살고자 합니다. 사람들은 믿음으로 출발하였지만 사람의 믿음을 평가할 수 없습니다. 그러니 믿음의 결과인 선행으로 사람을 평가합니다. 선행을 하고 교만해지고 선행을 하지 못하면 자기 불의에 빠집니다. 그러나 신앙이 중요한 것이지 행위가 중요한 것은 아닙니다. 행위는 믿음의 열매입니다. 우리가 행위를 보고 믿음을 평가할 수는 없습니다. 율법주의자들이 행위에 대해서 평가를 하게 됩니다. 할례중심의 율법주의로 갑니다. 바울은 어리석은 갈라디아 성도라고 책망합니다.
욥이 재난을 당하였습니다. 율법주의 친구들은 재난을 당하였으니 죄인이라고 말합니다. 여기에 문제가 있습니다. 죄로 인하여 재난을 당할 수도 있지만 죄를 짓지 않아도 재난을 당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땅에 물이 젖어 있으니 비가 왔다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들의 말은 맞을 수도 있고 틀릴 수도 있습니다. 바울은 먼저 십자가의 은헤에 대해서 말합니다. 바울은 누가 너희를 꾀더냐 라고 묻습니다. 꾄다는 뜻은 마술을 건다는 뜻입니다. 혹은 신들린다는 뜻입니다. 영어로 위치 크렙트인데 무당이 혼을 빼는 것입니다. 십자가를 보라고 합니다. 이 당시 사람들은 십자가를 본 사람들이 많습니다. 십자가만 똑바로 보면 되는 데 이제 세상을 바라보느냐는 것입니다. 십자가는 더불 이미지가 있습니다.

(십자가가 만큼 죄인입니다)

첫째는 십자가만 만큼 내가 죄인입니다. 칼바르트는 십자가는 아르키메스의 원리라고 하였습니다. 목욕탕에 물을 넣고 내가 물에 들어가면 내 몸무게 만큼 물이 나갑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돌아가셨다는 것은 그만큼 내가 죄인이라는 것입니다. 내가 교만할 수 없습니다. 흔들리지 않습니다. 왜 하나님이 복을 안 줄까 잘 안 될까 생각하면 흔들립니다. 십일조 바쳤는데 장사 안 되나 열심히 기도하였는데 응답하지 않았나 하며 율법적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모든 것은 하나님이 은혜로 주십니다. 십자가를 보면 흔들리지 않습니다. 나의 죄를 깊이 발견하고 하나님의 은헤와 긍휼만을 구합니다

(십자가가 만큼 사랑하였습니다.)

둘째는 하나님은 십자가만큼 우리를 사랑하였습니다. 30만원 주고 옷을 삽니다. 돈을 아까워하지 않습니다. 그 옷이 좋기 때문입니다. 급하게 구하여 가지고 오면서 기쁜 것입니다. 옷이 그만한 가치가 있어서 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에 죽으셨다는 것은 값을 지불한 것입니다. 우리 인간은 십자가만큼 가치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십자가를 보면 절망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죽고 싶다고 해서는 안 됩니다 나는 십자가 안에서 자신을 소중히 여겨야 합니다. 거기에 십자가 중심의 가치관을 가져야합니다. 인정하든 않든 예쁘다고 하든 아니든 상관 없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이 죽으신 만큼 나를 사랑하십니다. 사랑을 확증하여 주셨습니다. 흔들려서는 안 됩니다.
방직 공장이 있습니다. 남편이 죽었는데 아이를 숙직실에 놓고 아이에게 젖을 먹이며 일하였습니다. 숙직실에 불이 났습니다. 엄마는 숙직실에 들어가서 아이를 데리고 나왔습니다. 엄마가 아이를 구하다가 불을 맞아서 곰보가 되었습니다. 아이가 커서 보니 엄마가 곰보입니다 다른 아이들이 싸울 때 너희 엄마는 곰보라고 욕합니다. 철없는 아이가 엄마는 곰보가 되었냐고 웁니다. 커서 엄마가 왜 곰보가 되었느냐고 물어보았습니다. 엄마는 내가 곰보가 되지 않았으면 너는 죽었다고 말합니다. 그 사실을 안 후에 아이는 변화되었습니다. 아이는 다른 아이들이 엄마를 곰보라고 말하면 그는 우리 엄마는 최고라고 합니다. 십자가를 볼 때마다 내가 큰 죄인이고 내가 소중함을 압니다 십자가 중심의 믿음을 가지면 우리는 흔들리지 않습니다. 십자가만 보라고 합니다 .그러면 아무 시험에 빠질 것이 없습니다.

(믿음으로 성령을 받는다)

2절을 보십시오. “내가 너희에게서 다만 이것을 알려 하노니 너희가 성령을 받은 것이 율법의 행위로냐 혹은 듣고 믿음으로냐”

바울은 갈라디아 성도들에게 한 가지만 물어보고 있습니다. 그들이 율법을 지켜서 성령을 받았습니까? 복음을 듣고 믿어서 성령을 받았습니까? 당연히 믿음을 통해서입니다. 성령을 체험했습니까? 성령을 주셔서 십자가를 알게 합니다. 하나님을 알게 합니다. 그리스도를 알게 합니다. 그리스도를 영접한 후에 우리 안에 성령이 충만히 임합니다. 성령이 언제 임했느냐는 것입니다. 십자가를 볼 때 성령이 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 성령이 오십니다. 가슴이 뜨거워집니다.
우리가 우리의 선을 통해서 예수님께 나가면 가슴이 싸늘해집니다. 내 의로 하면 싸늘해집니다.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봉사하면 가슴이 뜨거워집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익명적인 봉사를 해야 성령이 오십니다. 주님을 믿음으로 해야 기쁨이 있습니다. 어느 시골교회에서 교회를 건축한다고 합니다. 물질이 없어서 도와줄 사람을 찾고 있습니다. 한 장로님이 교회를 돕고 싶다고 목사에게 말하였습니다. 목사는 개인의 이름으로 하지말고 교회의 어느 성도가 했다고 익명으로 하자고 하였습니다. 그 돈을 가져오라고 목사가 익명으로 주겠다고 합니다. 아무도 돈을 낸 사람은 모릅니다. 교회의 한 성도 이름으로 주었습니다. 돈을 준 목사만 누가 주었는지 압니다. 그 돈으로 교회를 지었습니다. 돈을 낸 사람이 건축 예배에 참석하고 돌아오다가 목사의 손을 잡더니 오늘 처음 행복하다고 합니다. 눈물이 핑돕니다.
교회도 지었으니 내 이름으로 하고 표창장 받고 박수치고 교회에 이름을 새기고 하면 성령이 주시는 기쁨이 없습니다. 뒷처리가 좋지 않습니다. 깨끗하게 주님만을 기쁘시게 하고 나니 행복합니다. 이런 때에 성령님이 역사하십니다. 십자가를 이해하게 하고 우리의 사죄의 은총을 확실하게 하십니다. 성령은 에수그리스도의 복음을 듣고 복음을 믿음에서 옵니다. 성령이 우리를 강하게 하고 충만하게 합니다.
성령이 어느 때에 오셨느냐는 것입니다. 율법을 지킬 때 온 것이 아닙니다. 율법에는 시기, 질투가 있고 절망이 있습니다. 오히려 성령의 역사가 떠납니다. 조금 심각한 이야기를 하려고 합니다. 기도 많이 했으니 세 시간 했으니 금식하였으니 철야했으니 하나님이 꼼짝없이 들어줄 것이라고 합니다. 그에게서 성령이 떠났습니다. 얼굴이 굳어집니다. 철야하다가 하루 안하면 아이가 감기 걸린다고 합니다. 신비주의는 율법주의입니다. 믿고 성령을 받았는데 다시 율법으로 가느냐는 것입니다.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 육체로 마치겠느냐)

3-5절을 보십시오. “너희가 이같이 어리석으냐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 이제는 육체로 마치겠느냐 너희가 이같이 많은 괴로움을 헛되이 받았느냐 과연 헛되냐 너희에게 성령을 주시고 너희 가운데서 능력을 행하시는 이의 일이 율법의 행위에서냐 혹은 듣고 믿음에서냐”

갈라디아 성도들이 그렇게도 어리석은 사람들이냐고 묻습니다. 성령의 힘으로 시작한 일을 지금 와서 인간의 힘으로 마치려 드는 것이냐고 묻습니다. 그들이 겪은 그 모든 경험이 다 헛일이었단 말이냐고 반문합니다. 바울은 설마 그렇지는 않을 것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께서 갈라디아 성도들에게 성령을 주시고 그들 가운데서 기적을 행하신 것이 그들이 율법을 지켰기 때문입니까? 그렇지 않으면 복음을 듣고 믿었기 때문입니까? 물어봅니다. 당연히 복음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 믿으며 욕먹으면 기분이 좋습니다.
북한에서 중학교에 주일날 가면 할 일이 없습니다. 그런데도 주일날 교회 못가게 하려고 학교에 나오라고 합니다. 주일날 교회에 가면 월요일 날은 하루 종일 벌섭니다. 월요일 벌 서면 바울이 고난을 받는 것 같습니다. 벌을 받으면 더욱 신바람이 납니다. 처음부터 핍박받으려고 교회에 갔다는 생각이 듭니다. 하나님의 훈장을 받은 것이라고 합니다.
바울은 그렇게 예수님을 믿고 나서 핍박 받은 것이 헛되냐고 묻습니다.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고 육체로. 은혜로 시작했다가 율법으로, 믿음으로 시작했다가 행위로 성령으로 시작했다가 인간적으로 가서는 안 됩니다. 성령을 주시고 능력을 행하시는 일이 율법의 행위에서 시작된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듣고 믿음에서 시작된 것입니다. 우리는 믿음을 가질 때 하나님이 능력을 행하시는 것을 잊지 말아야합니다. 시종일관 은혜로, 사랑으로, 믿음으로 가야합니다. 변질되면 안 됩니다. 바울이 다시 말합니다. 그럴 수 없습니다.

(아브라함은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았습니다.)

6-9절을 보십시오.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그것을 그에게 의로 정하셨다 함과 같으니라 그런즉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들은 아브라함의 자손인 줄 알지어다 또 하나님이 이방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로 정하실 것을 성경이 미리 알고 먼저 아브라함에게 복음을 전하되 모든 이방인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받으리라 하였느니라. 그러므로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는 믿음이 있는 아브라함과 함께 복을 받느니라.”

성서에도 기록되어 있듯이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믿었고 하나님께서는 그의 믿음을 보시고 그를 올바른 사람으로 인정해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믿음으로 사는 사람만이 아브라함의 참 자손이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방인들도 믿기만 하면 당신과 올바른 관계를 가지게 해주시리라는 것을 성서는 미리 내다보았습니다. 그래서 성서는 아브라함에게 "너로 말미암아 만백성이 복을 받으리라." 는 복음을 미리 전해 주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으로 사는 사람들은 믿음의 사람 아브라함과 함께 복을 누리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한 실수는 너무나 많습니다. 아브라함의 실수를 모아서 말하니 아브라함을 난도질해도 되느냐고 합니다. 그러니까 믿는다고 하면서 첩을 얻고 이스마엘을 만들고 흉년들고 애굽으로 내려가 마누라를 동생이라고 합니다. 그것도 두 번이나 하였습니다. 99세때도 그렇게 하였습니다. 13년 성경에 기록되지 않은 때도 있습니다. 아브라함의 하는 짓이 그렇습니다. 그가 어떻게 하나님의 사람이 되느냐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위대한 점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말씀만 하면 네, 해보겠습니다. 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아들을 준다고 하면서 아들을 주지 않습니다. 말씀으로만 아들을 준다고 하십니다. 그러면서 하늘의 뭇별을 보라고 하시고 네 자손이 이와 같다고 말씀하십니다. 이름을 큰 민족의 조상이라고 바꾸어주시고 부르라고 하십니다. 땅을 준다고 하면서 발붙일 만큼의 땅도 주시지 않습니다. 430년 후에 후손에게 주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믿습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아니 그는 하나님을 믿는다고 합니다. 25년을 속았는데 그래도 믿습니다. 그가 하나님을 믿으니 의로 여기십니다. 나머지 행위는 덮어 줍니다. 사랑은 믿음입니다. 사랑하면 믿어집니다. 자식이 그렇게 거짓말을 해도 믿습니다. 몇번 실수 하면 자식에게 못 믿는다고 합니다. 뱃속에 들어갔다가 나왔다고 합니다. 이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그 사람을 믿을 수 없습니다. 물론 그 사람 자신을 믿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안에서 신뢰할 수 있습니다. 신뢰가 사랑입니다. 자신의 부족함을 생각지 않고 하나님을 믿습니다.
이스마엘이 태어났고 자격이 없지만 하나님을 믿습니다. 사랑의 하나님, 능력의 하나님을 믿습니다. 이것이 엄청난 믿음입니다. 위대한 믿음입니다. 그는 하나님을 믿음으로 나중에는 사랑하는 아들까지 번제로 드립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믿음을 의로 여기셨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로 선택받은 백성으로 삼았습니다. 복의 근원이 되리라고 합니다.
아브라함은 모세 이전의 사람입니다. 모세 있기 전에 아브라함입니다. 율법이 있기 전에 믿음입니다. 유대인 이방인을 통털어 믿음의 조상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믿고 쓸데없는 율법적인 생각을 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면 우리도 아브라함과 함께 복을 받습니다. 우리는 이 믿음 안에서 율법을 행해야합니다. 믿음으로 순종해야합니다.

(율법의 행위에 속한 자들은 저주를 받습니다)

10절을 보십시오. “무릇 율법 행위에 속한 자들은 저주 아래에 있나니 기록된 바 누구든지 율법 책에 기록된 대로 모든 일을 항상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성서에 "율법서에 기록된 모든 것을 꾸준히 지키지 않는 사람은 저주를 받을 것이다."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법을 지키는 것에 의존하는 사람은 언제나 저주의 위협을 받고 있습니다 오늘 말씀은 율법과 은혜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구약은 율법에 속한 사람이고 예수님 오신 후에는 은혜에 속했다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구약은 율법이고 율법으로 구원받고 행함으로 구원받고 신약은 은혜로 성령으로 믿음으로 구원 받는다고 생각합니다. 예수님을 기점으로 율법과 은혜로 나누는 것은 잘못입니다. 아브라함 모세 다윗도 믿음으로 구원 받았습니다. 신약에도 바리새인들은 율법으로 살다가 구원받지 못하였습니다.
믿음으로 구원 받는 흐름과 율법으로 저주 받는 흐름이 있습니다. 두 존재 양식이 있습니다. 구약에 있는 사람들도 믿음으로 구원 받는 사람이 있고 율법으로 저주 받은 사람도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는데도 율법적인 존재양식이 있는 사람이 있습니다. 사울이 그렇고 엘리가 그렇습니다. 율법적인 존재양식을 가진 이들은 얼굴이 썩었습니다. 율법 앞에서 발발 떱니다. 감기만 들려도 사업만 망해도 자동차 사고 나도 십일조 하지 않고 주일 빠져서 그렇다고 합니다. 기복신앙은 율법주의입니다.
갈라디아서는 읽기만 하고 뜻을 몰랐습니다. 율법주의에서 벗어나야합니다. 문제의 핵심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문제입니다. 정체성의 문제입니다. 자기 정체의 문제입니다. 존재의 문제로 연결됩니다. 율법적인 존재양식 은혜적 존재양식이 문제입니다.
이런 믿음은 마음이나 말로만 되는 것은 아닙니다. 진정한 믿음은 열매로 나타납니다. 나무는 항상 열매가 있지는 않습니다. 포도나무는 삼년이 되면 열매가 열리고 열매는 가을철에 한번 열리는 법입니다. 우리는 열매를 보면 나무를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열매가 없다고 나무가 잘못되었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나무는 열매와 상관없이 나무입니다. 믿음은 믿음인 것입니다.
가정에서도 그렇습니다. 할아버지 어머니도 자녀를 사랑합니다. 율법적인 사고방식의 자녀는 공부를 잘하면 좋고 못하면 미안합니다. 성적 안 나오고 꾸중들고 매를 맞아도 어머니는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부모는 공부 못하면 나가 죽으라고 합니다. 자녀는 나가 죽어야지 말하고 내가 살아있으면 나중에 이자까지 붙여서 부모에게 갚는다고 합니다. 율법적인 관계는 서로 관계가 깨어집니다. 율법적인 사람은 자기중심적인 것입니다. 자기 의가 기본이 되어 있습니다. 이것을 에로스적인 신앙입니다.
오늘은 율법 신앙에 대해서 말합니다. 율법주의는 율법을 다 지켜야합니다. 다지키다가 하나만 안 지켜도 안 됩니다. 좋은 일 많이 했어도 한 번 잘못하면 교도소에 갑니다. 한평생 의를 행하다가 한 번 죄를 지으면 죄인입니다. 죄를 지어서 이것 때문에 저주받는다고 생각합니다. 한 번 죄를 지은 것은 은혜를 떠나서 그런 것이 아닙니다. 은혜 아래 있지 않았으면 더할 사람들입니다. 예수 안 믿었으면 더 죄를 지을 사람들입니다. 덴스 홀에 가 있을 사람이 감옥에 가 있을 사람이 많습니다. 아무리 죄인이라도 예수님 안에 머물러 있어야합니다. 율법에 속한 사람은 선을 행하면서 번민이 많습니다. 은혜에 속한 사람은 죄를 지으면서도 감사가 많습니다. 이것이 은혜적 존재양식에 사는 사람입니다.
우리가 한번만 죄를 지어도 영원한 죄인입니다. 실제로 의인은 없습니다. 죄인을 의인이라고 하는 것은 불가능한 것을 가능하게 하는 것입니다. 율법적인 차원에서 의인은 없습니다. 율법적인 사람은 외식에 빠집니다. 형식적인 의를 말합니다. 교회를 갔으니 의를 행했다고 합니다. 가서 졸다 왔습니다. 형식주의에 빠집니다. 바리새교인이 외식에 빠집니다. 갔느냐 안 갔느냐 드렸느냐 안 드렸느냐가 문제 아닙니다.
한국 사람이 미국 교회에 다닙니다. 헌금때 세숫대야를 돌립니다. 돈을 내야하는데 일불짜리를 내야하는데 거스름돈이 없어서 오불을 내었습니다. 미국 사람이 오불을 내었습니다. 미국 사람은 오불을 내더니 사불을 거슬러 가져갑니다 마음으로 아차, 하였습니다. 그 사람은 나도 거슬러 가질 걸 괜히 오불을 내었다고 하였습니다. 그 사람은 오불 헌금한 것입니까? 아닙니까?

마음이 정성이 중요합니다. 의를 행했다 십일조 냈다는 형식에 빠집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십일조를 내는데 좋은 것은 내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의와 인과 신은 버렸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율법주의에 빠지면 외식주의, 형식주의에 빠집니다. 내가 좀 했다는 사람을 보면 형식주의에 빠집니다. 율법주의에 빠지면 자신을 자랑합니다. 하나님의 사람으로 서 있는데 자기를 꼭 내세우려고합니다. 자존심이나 명예가 들어가면 안 합니다. 자기의가 들어가면 하나님의 의에 도전합니다. 교만해지고 자학하고 절망합니다. 전체냐 전무냐가 됩니다 교만하든지 절망합니다. 아무리 맹세해도 안 된다고 구원받지 못한다고 생각합니다. 나중에는 저주 아래 있습니다.
부자가 영생을 얻기 위해서 왔습니다. 그는 무엇을 행해야 영생을 얻느냐고 말합니다. 예수님은 율법을 지키라고 합니다. 그는 율법을 다 지켰다고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가난한 사람들에게 팔아주라고 하자 근심하며 들어갑니다. 그는 형식주의, 율법주의에 빠져 있습니다. 그는 거지와 굶어죽는 사람을 보며 살아갑니다. 그는 사랑의 율법을 지키지 못 했습니다 그는 죄를 알지 못하고 회개도 없습니다. 하박국 이장 4절에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살 수 있다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는 말은 무엇일까요?

(의인은 믿음으로 살 수 있습니다.)

11, 12절을 보십시오. “또 하나님 앞에서 아무도 율법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지 못할 것이 분명하니 이는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 하였음이라 율법은 믿음에서 난 것이 아니니 율법을 행하는 자는 그 가운데서 살리라 하였느니라”

그러니 율법을 통해서는 아무도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을 수 없다는 것이 분명합니다. 성서에도 "믿음을 통해서 하느님과 올바른 관계를 가진 사람은 살 것이다."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율법은 믿음에 기초를 둔 것이 아닙니다. 율법은 다만 "율법을 지키는 자는 그것을 지킴으로 산다."고 말합니다. 믿음으로 살리라는 말씀을 두 가지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믿음으로 의인이 될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또 하나는 의인은 믿음으로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말미암은 의인이 될 수 있다는 것은 교리적입니다. 의인은 믿음으로 살아야한다는 것은 윤리적인 것입니다. 중요한 세 단어는 의인과 산다는 것과 믿음이라는 말입니다. 세 단어를 어떻게 연결하여 해석하느냐를 보는 것이 중요합니다.
믿음이 어떤 종류의 의인이냐는 것입니다. 율법은 믿음에서 난 것이 아닙니다. 율법적인 사람은 율법을 행위적으로 이해합니다. 그러나 믿음의 사람은 율법을 은혜로 이해합니다. 율법도 은혜 차원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율법은 은혜 차원에서 볼 수 있고 인간차원에서 볼 수도 있습니다.
인자는 안식일의 주인이라고 생각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안식일을 지킨 것이 아니고 안식일이 이스라엘 백성을 지켰다고 합니다. 안식일을 지켜서 구원받으라고 주신 것이 아닙니다. 안식일을 통하여 은혜 받으라고 쉬라고 축복받으라고 행복하라고 주신 것입니다. 못 지키면 벌 받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율법은 무엇이냐는 것입니다. 사랑으로 율법을 이해하면 율법도 은헤입니다. 살인은 생명보존을. 간음은 순결을 지키고, 도적질하지 말라는 사유재산을 지키고, 거짓말하지 말라는 것은 인격을 지키는 것입니다. 율법을 놓고도 은혜로 받느냐 율법으로 받느냐는 것입니다. 나를 중심으로 받느냐 하나님 중심으로 받느냐는 것입니다.
포도원 농부가 있습니다. 농사짓고 나서 겨울이 우기입니다. 지중해 기후는 겨울이 우기입니다. 겨울이 오기 전에 포도를 따야합니다. 이때 사람이 모자랍니다. 새벽에 가서 사람을 부릅니다. 한데나리온씩 주겠다고 합니다. 열두 시, 세 시, 다섯 시에 노는 사람이 있습니다. 내 포도원에 가서 일하라고 합니다. 품삯을 줄 때 한 데나리온을 주었습니다. 아침에 온 사람은 다섯 데나리온을 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내 것을 가지고 내가 한 것이 잘못이냐고 합니다. 네 것이나 가지고 가라고 합니다. 왜 남의 이야기를 하느냐고 합니다. 하루 종일 일했으니 더 받아야한다고 하는 것은 율법입니다. 약속한 것은 한 데나리온입니다. 늦게 온 사람에게 주는 것은 은혜입니다. 아침부터 일한 사람은 게으르고 늦개 온 사람은 최선을 다하였을 것입니다. 일은 일대로 하고 은혜는 은혜대로 받아야합니다. 농부는 수고하지만 하나님이 열매를 주셨으니 은혜입니다. 이것이 은혜적인 존재양식입니다.
은혜는 어디서 오느냐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신 것이 은혜입니다. 이것이 은혜의 뿌리입니다. 내가 원수되었을 때에 주께서 나를 위해서 죽으셨습니다.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지 않을 이치가 없습니다. 원수되었을 때도 사랑하였는데 주님을 위해서 실수는 있어도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이런 은혜의 존재양식 속에서 믿음으로 살아야합니다. 지속적으로 믿음으로 살아야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으셨습니다.)

13-14절을 보십시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 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아브라함의 복이 이방인에게 미치게 하고 또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성령의 약속을 받게 하려 함이라”

"나무에 달린 자는 누구나 저주받을 자다."라고 성서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 달려 저주받은 자가 되셔서 우리를 율법의 저주에서 구원해 내셨습니다. 그리하여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복이 그리스도 예수를 믿는 이방인들에게까지 미치게 되었고 또 우리는 믿음으로 약속된 성령을 받게 되었습니다. 속량은 값으로 사냈다는 뜻입니다.
17살 흑인 소녀가 경매를 당합니다. 링컨이 보니가 너무 안 돼서 사고자 하였습니다. 1450불을 주고 샀습니다 내가 샀지만 일 시키려고 한 것이 아니라 저는 자유인이라고 합니다. 네 마음대로 살아라고 합니다. 소녀가 묻습니다. 분명히 샀습니까? 자유입니까? 내 마음대로 살아도 됩니까? 내가 주인의 집에서 주인을 섬기며 살겠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속량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유인입니다. 저주 율법에 매일 것이 없습니다.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매여야합니다. 죄의 값은 사망입니다. 저주받습니다. 그런데 죄없는 의인이 저주를 받았습니다. 예수님이 저주 받으셨습니다. 그러므로 죄인이 구원받았습니다. 의인이 죽었으니 우리는 살 수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저주받으심으로 가난의 저주, 질병의 저주, 실패의 저주에서 구원받았습니다. 우리는 성령의 약속을 받습니다. 성령을 받습니다. 진리의 영, 자유의 영입니다. 성령 받은 사람은 엄청난 자유룰 만끽합니다. 사랑도 봉사도 자유입니다. 율법에는 저주와 심판을 받습니다. 믿음으로 사는 사람은 자유를 누립니다.
올림픽을 하는 것을 보면 조마조마합니다. 이기면 신나게 좋아합니다. 그와 동일시합니다. 그의 승리는 나의 승리가 되기 때문입니다. 에수님을 믿고 사랑하는 사람은 예수님의 일이 나 자신의 일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율법에서 온전히 자유한 것입니다. 예수님이 우리 대신 저주 받았습니다. 우리의 질병 죄악 슬픔 가난을 다 가져갔습니다. 우리는 에수님 안에서 복을 받습니다. 이제는 건강하고 의로고 기쁘고 부유하게 살아갑니다. 그것이 복음입니다. 우리는 이런 복음을 누리며 살아갑니다. 아멘!

(은혜의 존재양식으로의 삶)

결론적으로 우리는 믿음으로 구원받고 성령을 받았습니다. 그러면 게속하여 믿음으로 살아야합니다. 은헤의 존재양식, 믿음의 존재양식을 갖고 살아야합니다. 매일 에수님의 십자가를 바라보며 살아야합니다. 복받은 자신을 보아야합니다. 그리고 주님을 위해서 자신을 희생하는 삶을 살아야합니다. 아멘!
갈라디아서 3장 강해 일부 우리를 위해서 저주 받으신 예수님
말씀 갈라디아서 3장 1-갈라디아서 3장 14
요절 갈라디아서 3장 13절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 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갈라디아서 3장 강해 일부
갈라디아서 3장 강해 일부 끝입니다.




번호 제목 작성자 작성일
12 [갈라디아서] 갈라디아서 2장강해 이부 그리스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 오요한 2016-06-27
11 [갈라디아서] 갈라디아서 6장 강해 이부 그리스도의 십자가외에는 자랑할 것이 없다. 오요한 2016-06-27
10 [갈라디아서] 갈라디아서 6장 강해 일부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 오요한 2016-06-27
9 [갈라디아서] 갈리다아서 5장 강해 이부 성령을 따라 행하라 오요한 2011-06-23
8 [갈라디아서] 갈라디아서 5장 강해 일부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하라 오요한 2005-10-01
7 [갈라디아서] 갈라디아서 4장 강해 이부 바울은 애정과 논리로 은혜 신앙을 설득합니다. 오요한 2005-09-30
6 [갈라디아서] 갈라디아서 4장 강해 일부 아들이 종으로 돌아가서는 안 됩니다. 오요한 2005-09-27
5 [갈라디아서] 갈라디아서 3장 강해 이부 율법을 싸고 있는 언약 오요한 2005-09-27
4 [갈라디아서] 갈라디아서 3장 강해 일부 우리를 위해 저주 받으신 예수님 오요한 2005-09-25
3 [갈라디아서] 갈라디아서 2장 강해 이부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오요한 2005-09-25
1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