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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주의 대학생 선교기관

천안UBF

성경66권강해서

갈라디아서 6장 강해 이부 그리스도의 십자가외에는 자랑할 것이 없다.

작성자 : 오요한
작성일 : 2016-06-27 00:00:00
조회수 : 1,784
갈라디아서 6장 강해 이부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는 결코 자랑할 것이 없다
말씀 갈라디아서 6장 11-갈라디아서 6장 18
요절 갈라디아서 6장 14절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

숲속에 사슴이 물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면서 자신의 뿔을 보고 자랑하였습니다. 그때 사자가 나타났습니다. 사슴을 도망가다가 뿔이 수풀에 걸려서 죽음을 당하였습니다. 사슴은 죽으면서 내가 자랑하는 뿔 때문에 내가 죽는다고 말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아야하는 인간이 자신을 자랑하는 인간이 되었습니다. 사람은 하나님에게서 받을 수 있는 존재가치를 잃어버렸습니다. 다른 사람들에게 자신의 존재를 인정받고자 몸부림치게 되었습니다. 사회적인 명예를 추구하는 사람은 자신의 자존감이 적은 사람입니다. 그렇다고 사람이 자랑이 나쁘다는 것은 아닙니다. 사람은 바른 자랑이 있어야합니다. 자긍심과 자존감이 있어야합니다. 이 자랑은 사람에에게서 얻는 자랑이 아니라 하나님에게서 얻는 자랑입니다. 우리는 하나님 안에서 나의 자랑을 충족할 수 있습니다. 나를 만들고 심히 기뻐하신 하나님, 나를 위해서 죽으신 예수님을 만날 때 나는 참된 자랑을 배울 수 있습니다. 이것이 갈라디아서의 결론입니다.

(친필을 썼습니다.)

11절을 보십시오. “내 손으로 너희에게 이렇게 큰 글자로 쓴 것을 보라”

바울은 말하고자 하는 바를 강조하기 위해서 이제는 자기 손으로 큰 글자로 썼습니다. 바울은 부활의 주님 빛가운데 보았습니다. 그 후에 봉사가 되고 눈을 떴지만 그 후부터 눈이 좋지 않습니다. 그는 편지를 주로 대필하였습니다. 하지만 11절부터는 친필로 썼습니다. 그는 친히 큰 글씨로 글을 씁니다. 그는 친필로 써서 앞으로 쓰는 말씀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매우 중요한 결론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박해를 면하고자 합니다.)

12,13절을 보십시오. “12. 무릇 육체의 모양을 내려 하는 자들이 억지로 너희에게 할례를 받게 함은 그들이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박해를 면하려 함뿐이라”

바울은 지금까지 할례를 받아야 구원을 받고자 하는 사람들의 근본동기를 분석하면서 비판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바울은 할례를 주장하는 율법주의자들의 본질을 두 가지로 꼬집고 있습니다. 첫째로 율법주의자들은 할례를 행함으로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인해 받을 핍박을 면하려 하였습니다. 유대교는 공인된 종교로 로마사람들에게 인정받았습니다. 그러나 기독교인이 믿는 예수는 로마정부에서 사형선고를 받았습니다. 할례를 받으면 유대교의 분파로 인정되어 로마의 정치적인 핍박을 피할 수 있었습니다. 또한 유대인에게도 사회적 경제적인 핍박을 피할 수 있었습니다. 핍박을 피하고자 할례를 하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육체를 자랑하고자 합니다.)

“13. 할례를 받은 그들이라도 스스로 율법은 지키지 아니하고 너희에게 할례를 받게 하려 하는 것은 그들이 너희의 육체로 자랑하려 함이라”

둘째로 율법주의자들은 할례를 받은 양들을 자기들의 자랑거리로 삼고자 하였습니다. 할례를 행하면 종교적인 권위와 정통을 가진 사람으로 생각됩니다. 어떤 사람이 처음 예수 믿었습니다. 그 사람에게 어떤 사람이 와서 우리 집은 오대째 예수님 믿고 많은 목사와 장로가 있다고 자랑합니다. 이런 사람이 종교적인 권위를 자랑하는 사람입니다.
할례는 아브라함의 자손이 받고 남자가 받는 것입니다. 할례는 선민이라는 특권을 보이는 것입니다. 그들은 할례 속에 있는 위험을 보지 못하였습니다. 할례 속에는 율법주의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인간의 의가 들어가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완전성을 부정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구원을 위해서 할례를 절대 받으면 안 됩니다.
유대인들이 할례에 집착하는 것처럼 현대인도 자신의 자랑을 합니다 자기의 의를 포기하지 않습니다. 나의 몸부림을 통해서 하나님께로 갑니다. 재산, 학벌, 자녀와 집과 자동차를 갖고 자랑합니다. 이런 모든 것보다 종교적인 자랑을 합니다. 내가 잘 믿고 경건하고 신령하고 능력 있는 것처럼 보이고자 합니다. 이런 것이 바리새인과 같은 자랑입니다. 이런 종교적인 자랑에 붙들려서 망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요단강에 가면 플라스틱에 물을 넣어 팔면서 이 물로 세례를 주라고 합니다. 이 물을 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 물로 세례를 주면 세례 받은 사람이 요단강파로 자랑한다고 합니다. 그들은 한강물로 세례 받은 자를 무시합니다. 종교적인 자랑에 빠지면 하나님이 보이지 않고 사람만 보이는 것입니다. 그러다 보면 진실을 잃고 껍데기만 남게 됩니다. 이런 사람들이 오늘날의 할례주의자입니다. 이를 볼 때 갈라디아인들에게 할례를 강요한 율법주의자들의 의도는 전혀 영적이지 않고 인간적이고 보잘 것 없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의 자랑거리는 무엇이었습니까?

(십자가만이 진정한 자랑입니다.)

14절을 보십시오. "14.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

바울은 십자가 외에는 아무 것도 자랑할 것이 없다고 했습니다. 그의 마음에는 십자가만이 있었습니다. 십자가 플러스 알파가 있었던 게 아니라 오직 십자가만이 있었습니다. 바울은 자신의 일곱 가지 자랑거리가 빌립보서에 있었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믿은 후에 그 자랑거리를 배설물로 여겼습니다. 그 자랑거리가 사람을 교만하게 만듭니다. 인간적인 자랑은 하나님의 은혜를 거부하게 만듭니다. 사람 사이에 장벽을 만듭니다. 그러므로 모든 인간의 자랑거리가 아무것도 아닙니다. 우리의 자랑은 오직 십자가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이는 예수님의 십자가만이 하나님께로 이르는 유일한 구원의 길이기 때문입니다. 초대교회에 인류의 삼대 자랑거리가 있습니다. 유대교의 유일신, 헬라의 철학, 로마의 정치를 자랑하였습니다. 이런 것은 십자가를 거부합니다. 이런 것은 인류를 구원하지 못합니다. 십자가는 죄사함을 주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합니다. 나를 변화시키는 능력이 있고 하나님의 사랑이 있고 인간의 가치를 발견하게 합니다. 모든 자랑거리가 십자가 앞에서는 아무 것도 아닙니다. 십자가를 알기까지는 자랑할 것이 많으나 십자가를 알고 나서 모든 것을 내려 놓습니다. 바울은 자기에게 있던 모든 보화를 팔아 이 십자가를 샀습니다.
바울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바울에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바울이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였습니다. 세상의 모든 것이 나에게 무가지하게 되었습니다. 십자가에서 세상의 자랑거리가 무의미하게 되었습니다. 바울도 십자가 앞에서 세상의 모든 것이 별것이 아닌 것을 깨닫습니다. 세상에 끌리는 마음이 들 때 십자가 앞에서 그것을 못 박습니다. 그때마다 십자가가 세상적인 욕망을 버리게 하고 하나님의 사랑으로 이끌어가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은 십자가를 자랑하지 않습니다. 십자가는 인간의 자랑을 부정합니다. 인간 스스로 자신을 구원할 수 있는 존재라는 것을 부정합니다. 자신의 극대화를 추구하는 인간은 십자가를 사랑하지 않습니다.
십자가는 예수 안에 있는 자와 없는 자를 구분하는 것입니다. 진정한 그리스도인은 십자가의 의미를 아는 사람입니다. 십자가 앞에서 자신의 자랑거리를 깨끗이 내려 놓는 사람입니다. 십자가 앞에서 내가 얼마나 사랑받는 자인가 깨닫는 사람입니다. 그 사람이 그리스도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갈 때 하나님이 네가 어떻게 왔느냐고 물으실 것입니다. 그날 우리는 십자가의 공로로 왔다고 말해야합니다. 나는 죄인이나 나를 위해서 죽으신 십자가를 붙들고 왔다고 하는 것입니다. 결국은 남는 것은 나의 의미를 주고 소망을 주는 바로 십자가입니다. 이 세상의 자랑거리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십자가 붙들고 사는 사람은 할례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십자가는 우리의 자랑입니다. 고린도후서에서 사도바울은 자신이 받은 고난을 자랑합니다. 우리가 십자가를 진 것도 자랑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통하여 일하신 것도 우리의 자랑입니다. 우리는 십자가를 자랑하고 하나님을 자랑해야합니다.

(오직 새로 지으심을 받는 것이 중요하다)

15,16절을 보십시오. “15. 할례나 무할례가 아무 것도 아니로되 오직 새로 지으심을 받는 것만이 중요하니라 16. 무릇 이 규례를 행하는 자에게와 하나님의 이스라엘에게 평강과 긍휼이 있을지어다”

십자가는 정치와 문화가 율법이 하지 못하는 것을 하였습니다. 십자가를 보면 나의 구원을 알게 하고, 나의 가치를 알게 하고, 나의 소망을 알게 합니다. 나의 진정한 자랑거리는 십자가뿐이 없습니다. 학벌, 자식, 재산을 자랑하면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 신앙 연조나 직분을 자랑하는 것도 십자가를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런 자랑이 십자가를 거부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십자가 앞에서 죽은 자가 되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에는 할례에 대한 결론을 내립니다. 그러므로 할례나 무할례가 아무 것도 아니며 오직 새로 지으심을 받은 자만이 중요합니다. 할례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서울에 오면 서울로 가는 것을 안내하는 안내판이 소용없습니다. 극장에 가면 극장 표가 중요하지 않습니다. 십자가를 만나면 할례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무릇 십자가의 규례를 행하는 자에게와 하나님의 이스라엘에게 평강과 긍휼이 있을 것입니다.

바울에게는 과거 자랑거리가 많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만난 후 그것들을 모두 배설물로 여겼습니다. 그에게는 버린 것과 남은 것이 분명했습니다. 남은 것은 십자가와 새로 지으심을 받은 자신이었습니다. 한 마디로 말하면 바울에게 예수님의 십자가만이 남았습니다. 그는 이 십자가만을 자랑하였고 이 십자가 안에서 새로 지으심을 받은 새 인생을 살았습니다. 그러므로 그는 고백합니다. 할례와 율법은 그림자입니다. 십자가가 본체입니다. 본체가 오면 그림자는 없어지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제 지켜야 되는 규례가 하나 남아 있는 것이 십자가의 규례입니다. 십자가의 복음만이 의미가 있습니다. 이제는 십자가 안에서는 하나가 되었습니다. 하나님께 인정받는 사람은 복음을 붙잡는 사람입니다. 이들이 참된 이스라엘 사람입니다. 십자가를 통해서 거듭난 사람이 진정한 이스라엘 사람입니다. 이들에게 평강과 긍휼이 있습니다. 진정한 평강은 율법주의자에게 없습니다. 율법주의자들의 마음에는 내 힘과 노력으로 살아가는 자들입니다. 나는 믿을만 하지 않습니다. 이들에게는 마음에 평강이 없습니다. 십자가의 은혜는 견고합니다. 안심할 수 있고 평강이 있습니다. 이런 자에게만 진정한 긍휼이 없습니다. 내 의로 나가는 자는 긍휼이 없고 남을 판단하고 정죄합니다. 십자가의 은혜를 붙잡는 자들에게만 긍휼이 있습니다. 뉴턴이 죽으면서 이런 기도를 하였습니다. 나는 열두제자나 사도바울의 특권과 능력을 구하지 않는다고 하였습니다. 다만 십자가의 강도에게 베푼 긍휼을 구한다고 하였습니다. 믿음으로 십자가 앞에 서는 자에게만 평강과 긍휼이 있습니다.

(내가 예수의 흔적을 가졌노라)

17절을 보십시오. "이 후로는 누구든지 나를 괴롭게 말라. 내가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가졌노라.“

어떤 분이 이런 질문을 했습니다. 아내가 교회다니면서 골프장에 가는 남편을 따라가지 않았습니다. 그러면서 남편과의 관계가 멀어졌습니다. 아내는 목사님에게 가정의 화목을 위해서 골프장 따라가면 안 되느냐고 물었습니다. 목사님은 남편이 구원받기 원하느냐고 물었습니다. 남편을 따라가면 남편이 예수님을 믿을 기회는 멀어진다고 하였습니다. 핍박이 없기를 바라는 마음은 좋은 마음이 아닙니다. 지불해야할 대가를 지불해야 합니다. 골프보다 예수님을 믿는 것이 좋다는 것을 보여주라고 하였습니다.
어거스틴은 예수님을 믿고 고난이 없으면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아니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을 화평을 주러 온 것이 아니라 검을 주러왔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가치관이 다르고 소속이 다르므로 불화가 생길 수 있습니다. 당분간 있어야할 문제를 당연히 받아들여야합니다. 이것을 잘 해쳐나가야 복음이 증거되고 나의 믿음이 성장하는 것입니다. 율법주의자들의 몸에는 할례의 흔적이 있었습니다. 이 흔적은 그들에게 아무런 구원의 능력을 베풀지 못하는 무가치한 흔적이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의 몸에는 예수님의 흔적이 있었습니다. 나를 괴롭히지 말라고 합니다. 흔적은 낙인입니다. 불로 지져서 새긴 흔적은 없어지지 않습니다.
예수의 흔적은 세 가지로 해석합니다. 첫째는 사도 바울의 손과 발에 십자가의 못자국이 있다고 합니다. 초대교회에 기도하면 십자가의 흔적이 생겼다고 합니다. 이런 것이 확인된 것만 320회 정도 있었다고 합니다. 프란시스코는 고난을 알게 해달라고 하였다고 합니다. 기도 후에 손과 발에 피가 흘러서 닦으니 십자가의 흔적이 있었다고 합니다.
둘째는 사도바울의 마음 속에 새겨진 나는 그리스도의 종이라는 자의식이라고 합니다.
셋째는 사도 바울이 전도하면서 받은 박해로 보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십자가 복음을 전하기 위해 많은 고난을 받았습니다. 그는 사람들에게 핍박과 무시를 받고 구경거리가 되고 주리고 목마르고 헐벗고 매맞으며 정처없이 돌아다녔습니다. 고된 노동을 하고 박해와 비방을 받아 결국 세상의 더러운 것과 만물의 찌끼같이 되었습니다.(고전4:9-13) 예수님을 따라가며 겪은 고난의 흔적이라고 합니다.
광진구에 강나루 신학교가 있습니다. 마펫홀이 있습니다. 마펫이 복음을 전하는데 어떤 사람이 병을 깨서 얼굴을 찔렀습니다. 그의 얼굴에는 흉터가 남았습니다. 그 흉터를 이용하여 전도하였습니다. 그 흉터를 보고 사람들이 헌금하였습니다. 세상사람들이 볼 때는 부끄럽고 고통스러운 것이지만 하나님 편에서는 영광스러운 흔적입니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그의 몸과 마음에는 예수님의 흔적이 뚜렷이 새겨졌습니다. 버림 받고 무시 받고 매맞은 예수님의 고난의 흔적이 그의 몸과 마음에 깊이 새겨졌습니다. 무엇보다 예수님의 십자가만이 구원의 길임을 믿는 믿음의 흔적이 남았습니다. 그는 이 십자가의 흔적을 자랑하였습니다. 십자가의 흔적은 다른 사람을 구원하는 흔적이므로 자랑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바울을 괴롭히지 말아야합니다. 그러므로 나는 할례자라고 하지 말고 예수님을 위해서 고난을 받으라고 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만날 때 고난의 흔적을 사랑의 증거로 보여주어야합니다.

내가 진정한 그리스도인인가 내가 순수한 은혜의 복음인가를 구분할 수 있는 방법이 있습니다. 율법주의는 고난을 피하고 자랑하는 것입니다. 은혜신앙은 자신을 자랑하지 않고 십자가만을 자랑합니다. 예수님을 위해서 받은 고난의 흔적을 영광스럽게 생각합니다.
솔제니친은 러시아 혁명사를 50년 연구하였습니다. 러시아 혁명으로 6천만명이 죽었습니다. 그가 이를 연구하고 결론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잊어버렸기 때문이라고 하였습니다. 다른 답은 없다고 하였습니다. 그 혁명이 있을 때 그리스 정교가 가장 발달하였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하나님을 잊어버렸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성도는 많았지만 그리스도의 흔적이 없었습니다. 고난의 흔적이 없었습니다. 신앙을 자랑하고 자신을 자랑하였습니다.
어떤 분이 많은 특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는 후반부 인생을 후진국에 가서 복음을 전하고자 합니다. 가족과 많은 사람들이 반대하였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뜻을 알고자 기도하다 잠이 들었습니다. 그는 꿈에 목사님을 만났습니다. 목사님이 바로 대답하기를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말하였다고 합니다.
잘 산다는 것이 무엇인가 풍요한 인생을 산다는 것이 무엇인가? 풍요는 하나님 안에서 간증거리가 있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의 흔적이 많은 사람입니다. 이런 신앙은 다른 사람의 신앙에 불을 붙이는 것입니다. 사순절에 자신의 몸에 자해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보다 중요한 것은 살아오면서 예수님을 위해서 지불한 대가와 수고와 희생 상처입니다. 우리나라에 성도수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예수의 흔적을 가진 사람이 부족한 것입니다. 교회 수가 적은 것이 문제가 아닙니다. 예수의 흔적을 가진 교회가 부족한 것입니다. 갈라디아서를 마치면서 우리는 우리 몸에 어떤 흔적을 남기기 원하는지 생각해야 하겠습니다. 오직 믿음으로 사는가가 중요합니다. 오직 예수님을 믿음으로 사는가 생각합니다. 예수의 흔적이냐 할례의 흔적이냐, 십자가 고난의 흔적이냐 자기 영광의 흔적이냐. 우리가 자기 행위에 기초한 모든 율법적이고 형식적인 것들을 다 버려야 하겠습니다. 자기 영광을 구하는 마음, 세상의 플러스 알파를 구하는 마음의 흔적을 다 지워버려야 하겠습니다. 오직 예수의 흔적, 예수님의 십자가 고난의 흔적을 남기고 이것을 자랑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이제 후로는 누구든지 나를 괴롭게 말라. 내가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가졌노라."
갈라디아서 6장 강해 이부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는 결코 자랑할 것이 없다
말씀 갈라디아서 6장 11-갈라디아서 6장 18
요절 갈라디아서 6장 14절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
갈라디아서 6장 강해 이부 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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