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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주의 대학생 선교기관

천안UBF

성경66권강해서

갈라디아서 2장 강해 이부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작성자 : 오요한
작성일 : 2005-09-25 00:00:00
조회수 : 4,666

문제지풀이(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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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라디아서 2장 강해 이부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말씀 갈라디아서 2장 11-갈라디아서 2장 21
요절 갈라디아서 2장 20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복음의 전제는 무엇입니까? 복음의 전제는 모두가 평등하다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이 죄인이라는 점에서 평등합니다. 사람은 전적으로 타락한 것입니다. 키가 커도 나이가 많아도 별것 아닙니다. 지위가 높아도 부자도 별것 아닙니다. 이들은 모두 죄인입니다. 이전에 부정한 클린턴 대통령을 욕했습니다. 한국에서 클린턴과 같이 대통령이 스캔들이 있다면 당장 대통령에서 쫓겨납니다. 그러나 미국에서 클린턴의 인기는 올라갑니다. 더 내려갈 수 없어서 진실하다고 합니다. 그는 끝까지 떨어졌으므로 위대하다고 합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의 잘못을 보고 무슨 욕을 합니까? 한 마디로 같은 죄인인 우리는 말할 자격이 없습니다. 내가 죄인이고 모두가 죄인입니다. 그러므로 아무 말도 할 수 없습니다. 의인이 없고 하나도 없습니다. 나의 의를 생각하는 것도 죄입니다. 자기 의가 됩니다. 죄 아닌 것이 없습니다.
또한 우리는 오직 그리스도 예수님을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는 점도 평등합니다. 예수님을 배우거나 예수님을 따라서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구원 받습니다. 오직 십자가 은혜로 구원받습니다. 그의 은혜로 죄사함 받고 구원 받습니다.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어야하고 깨달아야합니다. 깨달으면서 지식이 구원 받습니다. 죄를 슬퍼하면서 감성이 구원 받습니다. 의지가 구원 받을 때 행할 수 있습니다. 복음을 알고 구원 받은 후에 우리는 겸손하고 순종하고 감사하게 됩니다. 그 다음에는 사랑하게 됩니다. 누구도 미워할 수 없고 사랑하게 됩니다. 서로를 내 자녀같이, 형제같이, 부모님같이 대합니다. 복음에 대한 하나님의 사람의 응답이 여기에 있습니다. 오늘 말씀은 예수님이 그리스도라는 복음이 나옵니다. 그리스도 예수님이 지금 여기 내 안에 살아계십니다

(외식하는 베드로)

11-13절을 보십시오. “게바가 안디옥에 이르렀을 때에 책망 받을 일이 있기로 내가 그를 대면하여 책망하였노라. 야고보에게서 온 어떤 이들이 이르기 전에 게바가 이방인과 함께 먹다가 그들이 오매 그가 할례자들을 두려워하여 떠나 물러가매 남은 유대인들도 그와 같이 외식하므로 바나바도 그들의 외식에 유혹되었느니라.”

잘못된 신앙에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는 예수그리스도의 복음에 대한 신앙을 추상화하고 지식화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라는 것을 알았으니 된 것으로 생각합니다. 가슴과 의지에 신앙이 없습니다. 추상적인 지식을 신앙으로 착각합니다. 신앙을 문화화하고 관념화합니다. 이들의 신앙은 죽은 신앙입니다. 이들은 성육신을 부정하는 영지주의 이단입니다. 이들의 문제는 삶 속에서 행함이 없습니다.
두 번째 문제는 위선적으로 행하는 것입니다. 안 믿으면서 믿는척하는 것입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자신의 재산을 다 헌금했다고 거짓말하다가 죽었습니다. 위선죄는 죽을 죄입니다. 믿지 않으면서 믿는 척하였습니다. 봉사하지 않으면서 봉사하는 척합니다. 헌금할 때 다른 사람 헌금한 것을 보고 자신은 그것보다 조금 더 써냅니다. 이것은 위선입니다. 이것은 내가 최고라고 하는 것합니다. 이것이 율법주의 신앙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잘못된 바리새인의 죄입니다. 봉사할 마음이 없으면서 보이기 위해서 봉사합니다. 봉사하러 갈 때는 전화하고 갑니다. 갔다 와서도 봉사갔다 왔다고 전화합니다. 거짓 신앙으로 믿음 있는 척합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이런 것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사람 앞에 사는 인본주의가 믿음의 적입니다. 이것이 습관이 되어서 체질이 됩니다. 이것이 율법주의 신앙입니다. 믿음으로 구원받으면서 행함으로 구원받는 것으로 둔갑됩니다. 내가 금식하고 고행하고 무엇을 해서 구원에 이르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믿음이 타락한 것입니다.
베드로가 이런 무서운 위선 죄에 빠졌습니다. 베드로의 활동지는 예루살렘입니다. 안디옥은 바울의 활동 중심입니다. 베드로가 시찰하러 안디옥에 간 것 같습니다. 베드로가 교인과 같이 식사하러 갔습니다. 베드로가 이방인과 한참 식사하는데 유대인들이 들어왔습니다.
오늘 말씀에 나오는 식사는 지금의 식사가 아닙니다. 당시는 식사와 성찬이 구별되지 않았습니다. 식사할 때마다 성찬하고 성찬하다 식사합니다. 성찬식을 하면 두둑하게 먹었습니다. 작은 떡을 먹으면 입에 넣은 것이냐 눈에 넣는 것이냐 하며 그들은 처음부터 푸짐하게 먹었습니다. 먹는데 취하여 누가 술을 더 마시고 누가 떡을 더 먹느냐고 따집니다. 고린도전서에서 보면 성찬을 할 때 서로 기다리라고 합니다. 처음에 다 먹지말고 서로 기다리라고 합니다. 애찬이라는 것은 그냥 먹는 식사입니다.
유대인 크리스찬이 이방인과 식사하니 유대사람이 많이 비판합니다. 당시에 유대인들이 이방인과 식사하는 것은 위법이라고 하였습니다. 유대인만 거룩하고 유대인만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합니다. 이방인은 개나 짐승과 같다고 하였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방인과 식사하지 않고 잠도 자지 않고 사업도 같이 하지 않고 결혼하지 않습니다. 이런 풍속이 천년을 이어져 내려왔습니다. 이런 풍속에서 오래 살다 유대인이 이방인과 같이 먹으려하니 어려운 것입니다. 이런 문화 속에서 베드로가 실수하게 되었습니다.
베드로는 하나님의 환상을 보고 이방인 고넬료와 식사하였습니다. 이방인 고넬료와 식사하는 것을 비판하는 사람들에게 자신이 왜 이방인과 식사했는지 설명하였습니다. 그는 지식적으로나 의지적으로 이방인을 영접하였습니다. 그러나 그의 감정과 무의식은 변화되지 못하였습니다. 그는 이방인과 식사하다가 유대인이 오니 베드로가 유대인들이 겁이 나서 밖으로 나갔습니다. 베드로는 순간적으로 그리스도 예수님을 높이지 못하고 유대인들을 높였습니다.
기독교의 대표자가 이방인을 개나 짐승과 같이 무시하는 것으로 생각되었습니다. 베드로가 확고한 신앙을 갖지 못하였습니다. 확고한 믿음을 가지려면 계시를 받아야합니다. 성경을 많이 알아야합니다. 체험이 있어야합니다. 더 나아가 생활 속에서 체험을 해서 그것을 체계적인 지식으로 가져야 흔들리지 않습니다. 이런 점에서 베드로는 부족하였습니다. 이방 사람들을 평등하게 대해야 한다고 하는 것이 있어야 하는데 베드로에게는 그것이 없습니다. 베드로는 유대문화가 습관화되고 문화화되어 본의 아닌 위선자가 되었습니다.
이방인과 형제라고 하다가 유대인이 오니까 나가면 어떻게 됩니까? 그렇게 하면 이방인들도 유대인이 되어 개종하고 그 율법을 함께 지켜야한다는 것입니다. 유대인이 이방인에게 자기 우월감을 나타냅니다. 교회에 온 것도 내가 선배다 내가 잘났다고 합니다. 바나바도 베드로를 따라서 외식하여 나갔습니다. 바나바도 덕이 많습니다. 덕이 많은 사람은 선명하지 못합니다. 바나바가 흔들렸습니다. 다른 유대인들도 따라서 흔들렸습니다. 이를 통하여 기독교인이 유대인과 이방인을 차별대우한다는 이미지를 심었습니다.
기독교가 힘있게 전파된 것 중에 하나는 노예를 사람으로 취급한 것입니다. 그러나 로마시대에는 기독교가 국교가 되니 교만해져서 귀족화되었습니다. 기독교는 노예를 받아 주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차별대우하면서 복음이 전파되지 않았습니다. 바울은 이런 위선적인 베드로를 보고 크게 책망합니다.

(베드로를 책망한 바울)

14절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나는 그들이 복음의 진리를 따라 바르게 행하지 아니함을 보고 모든 자 앞에서 게바에게 이르되 네가 유대인으로서 이방인을 따르고 유대인답게 살지 아니하면서 어찌하여 억지로 이방인을 유대인답게 살게 하려느냐 하였노라.”

바울과 베드로를 비교하면 베드로가 큽니다. 베드로는 교회의 총지도자입니다. 예수님께 총애를 받고 직접 위임받은 지도자입니다. 그는 교회의 반석입니다. 바울은 이제 전도자로 시작하였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리스도를 크게 높였습니다. 그에게는 그리스도가 왕이었습니다. 베드로도 그리스도 앞에서 죄인이었습니다. 바울은 베드로를 대면하여 정면적으로 책망합니다. 너는 이방인과 같이 율법에서 자유하게 살면서 왜 이방인을 유대인처럼 율법을 지키게 하느냐고 책망하였습니다. 바울은 이방인에게 용기를 주고자 합니다. 비밀리에 충고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에 부끄려워하는 이방인에게 용기를 주어야 합니다. 아무리 위대한 사도이지만 잘못된 것입니다.
바울이 베드로를 책망한 것을 사람들 앞에서 베드로를 비방한 것으로 오해해서는 안됩니다. 주의 종을 사람들 앞에서 비방해서는 안 됩니다. 노아의 아들이 노아를 비방하거나 미리암이 아 모세를 비방한 것은 잘못입니다. 바울은 하나님 앞에서 베드로를 책망한 것입니다. 바울은 그 만큼 하나님을 높이고 있었습니다. 바울은 그리스도의 복음진리에 대한 확고한 믿음이 있었습니다. 바울은 이방인의 사도로서 절대적인 권위가 있습니다. 바울은 문화적인 것을 책망하지 않고 신앙적인 것을 책망하였습니다.
베드로는 바울의 책망을 듣고 회개합니다. 사람들은 여전히 베드로를 존경합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권위에 순종하는 사람이었습니다. 베드로는 나중에 편지에서 바울을 높이고 있습니다. 자존심이 상했다고 바울과 싸우지 않았습니다. 너는 잘한 것이 있느냐고 하지 않았습니다. 이런 점에서 책망한 바울도 위대하지만 책망을 받은 베드로도 위대합니다.
산정현 교회에 주기철 목사님이 시무하고 있었습니다. 조만식 선생이 장로로 있었습니다. 조선생은 나이가 많았습니다. 주기철 목사는 젊었습니다. 목사와 장로는 고등학교 때 스승과 제자 관계입니다. 조장로님은 예배시간에 대표기도를 맡았는데 예배에 늦어졌습니다. 에배 드리는 도중에 왔습니다. 주 목사님은 거기 뒤에 서 계시라고 하였습니다. 예배 끝나고 나서 주목사님은 조장로님에게 기도하라고 하였습니다. 나라를 위해서 일한다고 돌아다니다 죄를 지었습니다. 목사님의 마음을 아프게 했다고 울며 회개하였습니다. 책망하는 주목사도 대단하고 훈련받는 조장로도 대단하였습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을 책망할 때 문화적인 문제를 책망해서는 안 됩니다 신앙적인 문제를 책망해야합니다. 당시에는 두 문화권이 있었습니다. 헬라말이 통하는 교회와 히브리어로 통하는 교회가 있었습니다. 문화와 신앙의 관계는 이렇습니다. 문화신학을 말합니다. 문화적인 요소와 복음적인 요소를 구별해야합니다. 문화를 신앙화 해도 안되고 신앙을 문화화해도 안 됩니다.
서양 사람들은 예수를 믿는지 안 믿는지 정확히 모릅니다. 어떤 사람은 헌금은 보냅니다. 그리고 일년에 두 번 부활절날 성탄절날 교회에 갑니다. 어떤 사람은 평생 세 번 교회에 갑니다. 유아세례 받을 때, 결혼식날 그리고 장례식날 교회에 합니다. 그들은 메리크리스마스 해피 이스터라고 합니다. 그러나 이들은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는 깊은 내용은 없습니다. 이들은 문화지 신앙은 아닙니다. 문화와 복음이 별도입니다.
문화는 시대마다 변화합니다. 옛날에는 방바닥에 앉았는데 지금은 의자에 앉습니다. 그후에 절반만 의자에 앉고 반은 땅에 앉았습니다. 신발 벗고 교회에 들어와야지 신발신고 들어와서는 안 된다고 하였습니다. 의자를 조금씩 놓기 시작하더니 나중에는 다 의지를 놓았습니다. 신발 벗으니 냄새가 났습니다. 발냄새가 올라옵니다. 골치가 아픕니다. 그래서 신발을 신고 교회에 들어옵니다. 이것을 가지고 복음이나 진리를 말하면 안 됩니다. 주일날 강단에 구두를 신고 올라가서는 안 된다고 합니다. 강단에 올라갈 때 구두를 벗고 슬리퍼를 신고가라고 합니다. 이것을 문화라고 합니다. 이것은 문화지 복음은 아닙니다.
옛날에는 남녀가 따로 앉았습니다. 용감한 여자가 남자 있는데 함께 앉았습니다. 옛날에는 기역자로 방을 지어서 들어오고 나오는 것이 달랐습니다. 그것을 복음이라고 하면 되지 않습니다. 문화의 문제는 변할 수 있는 것입니다. 소매없는 것을 입고 짧은 치마를 입고 교회에 옵니다. 이런 것 입고 오지 말라고 광고하라고 합니다. 문화이므로 걸림돌 될 필요는 없습니다.
1960년대 히피들은 신발을 벗고 다녔습니다. 이들은 교회에 올 수 없다고 막았습니다. 유일하게 갈보리 채플에서 이들을 환영하였습니다. 이들이 변화되어 목사가 되었습니다. 지금은 긴 옷을 입고 있으나 나중에는 더 짧은 옷을 입고 올 수 있습니다. 립스틱 바른 것도 쥐를 잡아먹었다고 책망하였습니다. 귀고리도 하면 안 되었습니다. 이것은 문화지 복음이 아닙니다. 이것으로 그렇다 아니다 할 수 있습니다. 문화와 복음을 구별해야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복음을 전할 때 문화를 통해서 복음을 전할 수 있습니다. 문화적인 요소를 선택적으로 해야합니다. 순화된 좋은 언어를 사용해야합니다. 아무 말이나 해서는 안 됩니다. 교회 나갈 때는 선택적으로 옷을 입어야합니다. 술집에 나가는 옷을 입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신앙 생활에서 선택적인 문화가 있습니다. 교회 올 때는 이런 옷을 입는다고 문화가 있습니다. 아무렇게나 입어서는 안 됩니다. 말도 마찬가지입니다. 지극히 경건한 것을 선택해야합니다. 노래를 부르는데 찬송가에 외국 민요가 많습니다. 다른 나라 국가도 있습니다. 이런 것은 모르고 부르니 별 영향이 없습니다. 그런데 아리랑에 찬송가를 부르면 괴로운 아리랑 고개로 넘어가는 아리랑 가사가 생각나서 찬송가가 아리랑과 같습니다. 그것을 부르면 안 됩니다. 교회에서 사용하는 언어는 종교적인 언어를 쓰는 것은 좋지 않습니다. 신앙 생활에 도움이 되는 언어를 써야합니다. 복음 전파를 위해서 복음 이해를 위해서 문화를 사용하는 것입니다.
구원이라는 말을 하면 세상에서 잘못 알아듣습니다. 구원이 뭡니까? 십원보다 부족한 것이라고 합니다. 이것을 시대에 따라서 바꿉니다. 구원을 자유라는 말로 많이 씁니다. 죄와 사망에서 자유라고 하는 말을 합니다. 죄에서 자유하였다는 말은 이해되나 구원 구속이라는 말은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적절한 말을 사용하여 복음을 전해야합니다.
유대 사람들은 히브리 말을 합니다. 할례하고 안식일 지키는 것을 문화화합니다. 예수 믿고도 할례하고 안식일을 지킵니다. 우리가 추석지키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 문화는 스스로 벗어나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방인은 율법과 안식일을 모르고 할례를 모릅니다. 이들에게 예루살렘 공회에서는 유대인의 율법을 지키지 않아도 된다고 결정하였습니다. 다만 음행하지 말고 우상 제물 먹지 말라고 말합니다. 이것만은 금하라고 합니다. 이것은 문화적인 문제가 아니라 신앙적인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것이 우상 섬기는 예식 중에 들어있습니다.
종교문화적인 요소는 수용해서는 안 됩니다. 예수 믿으면서 이방종교 요소를 수용해서는 안 됩니다. 이 두 종교의 문화가 교회에서 만났습니다. 베드로가 유대인을 대표하는 기독교 지도자로 안디옥에 와서 식사를 합니다. 그가 일어서서 밖으로 나갑니다. 이것은 문화적인 문제가 아니라 신앙적인 문제입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구원받는다는 복음진리를 훼손하는 것으로 심각하게 다루어야합니다. 그래서 바울은 사람들 앞에서 공개적으로 베드로를 책망했습니다. 우리는 문화적인 것을 책망하지 말고 신앙적인 것을 책망해야합니다.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얻는다)

15-16절을 보십시오. “우리는 본래 유대인이요 이방 죄인이 아니로되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로 말미암음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알므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로써가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라. 율법의 행위로써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

바울은 이제 근본으로 돌아가서 구원의 문제를 생각합니다. 이를 통하여 구원의 문제를 생각합니다. 구원을 받는 것이 믿음이냐 행위냐는 것입니다. 바울은 율법의 행위와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대조하여 말합니다. 우리는 율법의 행위가 아니라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는다는 것을 말합니다. 기독교는 율법을 초월합니다. 율법이나 도덕을 무용시하는 것은 기독교뿐이라고 합니다. 진정한 기독교는 도덕의 폐기를 주장합니다.
우찌무라 간조가 말했습니다. 모두가 다 죄인입니다. 오직 믿음으로 의롭함을 받고 도덕적 인간이 되는 것입니다. 도덕적 인간이 되어서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을 이야기합니다. 아브라함은 실수를 많이 합니다. 개인적, 가정적, 신앙적으로 실수합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을 믿습니다. 의롭다함을 받은 의인입니다. 도덕성이 깨끗하고 행위가 거룩하여 의인이 아닙니다.
스스로 거룩하게 살려고 하는 노력을 하다보면 사람은 절망합니다. 율법주의는 다른 사람의 관계에서 상대적인 의를 주장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의는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오는 절대적인 의입니다. 하나님과의 수직적인 관계가 중요합니다. 율법적이고 도덕적인 사람은 자신이 다른 사람보다 낫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자신이 죄인이라는 것을 잊습니다. 바리새인은 세리와 같지 않음을 감사합니다. 건방집니다. 하나님 앞에서 모두가 죄인입니다. 오십보 백보입니다. 오십보나 백보나 도망한 것은 마찬가지입니다. 좀더 나으면 어떻고 못하면 어떻게 됩니까? 다른 사람보다 낫다는 것을 가지고 교만하고 멸시하고 자기 의를 내세웁니다. 자기 의로 구원하는 것은 율법적이고 형식적입니다.
믿음은 내적이고 영적입니다. 우리는 믿음으로 구원 받는 것입니다. 우리는 주위에 믿음 없는 행위를 봅니다. 어떤 집사님이 주일 휴업이라고 쓰고 놀러갑니다. 어떤 사람은 교회에 나왔는데 빚 받으러 나옵니다. 이들을 교회에 나왔다는 형식으로 판단해서는 안 됩니다. 사람들은 외적으로 파악합니다. 믿음은 내적이고 진실하고 영적입니다. 행위는 내가 중심이 되고 믿음은 하나님이 중심이 됩니다. 믿음은 하나님의 의로움을 내가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마음을 비우고 겸손하게 사랑을 받아들이면 엄청난 기쁨이 있습니다. 우리는 한평생 은혜를 받으며 사는 것입니다. 우리가 은혜로 하나님께 거져 받는 것을 거절하면 율법주의입니다. 하나님의 의를 그대로 수용하는 것이 믿음입니다. 신구약을 막론하고 믿음이 중요합니다. 구약은 행함이고 신약은 믿음인 것이 아닙니다. 둘 다 믿음으로 구원받는 것입니다.
율법은 세 가지로 나눕니다. 첫째는 민법입니다. 민법은 유대 문화적으로 해석됩니다. 둘째는 제사법이 있습니다. 속죄제 화목제 번제 소제를 드리는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제사를 지냄으로 완성됩니다. 셋째 도덕법은 살아 있는 법입니다. 도덕법의 대표가 십계명입니다. 십계명은 절대적입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기 위해서 율법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로 율법을 지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구원하신 후에 율법을 주셨습니다. 점수가 잘 나온 것을 보고 아들이라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아들이라고 부르고 아들로 키워나가는 것입니다. 아들은 본질적이고 아들답게 키우는 것은 다음의 문제입니다. 자녀가 되었으므로 은혜로 율법을 지키는 것입니다. 그뿐 아닙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선한 일을 해서 복받는 것이 아닙니다. 은혜를 주셔서 선한 일을 하는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이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율법에 대해서 자세히 설명합니다.
로마서 10장 4절에 예수님은 율법의 마침이 되었다고 합니다.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십자가로만 구원을 받습니다. 부활의 주님은 우리에게 사랑을 주십니다. 사랑은 율법을 완성하는 것입니다. 율법의 핵심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사랑 속에서 율법을 지켜야합니다. 예수님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 것은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율법에 대해서 죽었다)

17-19절을 보십시오.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의롭게 되려 하다가 죄인으로 드러나면 그리스도께서 죄를 짓게 하는 자냐 결코 그럴 수 없느니라. 만일 내가 헐었던 것을 다시 세우면 내가 나를 범법한 자로 만드는 것이라. 내가 율법으로 말미암아 율법에 대하여 죽었나니 이는 하나님에 대하여 살려 함이라.”

이 말씀은 이미 그리스도 안에서 의롭게 된 사람이 다시 율법적인 생활을 해서 죄인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말씀입니다. 이미 우리는 율법에 대해서 죽은 자이므로 지속적으로 은헤로 주시는 믿음 안에서 살아야한다는 말씀입니다 인간은 과거의 경험을 잊어버립니다. 기억 속에서는 잊은 것 같으나 감성 속에 기억이 남아 있습니다. 성품 속에 잠재되어 있습니다. 이것을 잠재의식 무의식이라고 합니다. 이미 경험했던 것이 자리 잡고 우리의 틀을 움직입니다. 기억에서 사라졌으나 흠집이나 앙금이나 성품으로 남아 있습니다. 예컨데 가난하게 살던 사람들이 부자가 되었습니다. 이만하면 먹고 살만한 데 여전히 구두쇠입니다. 돈을 쓸 줄 모릅니다. 돈을 버는 사람과 쓰는 사람이 다르다고 합니다. 돈이 없을 때 고생한 것이 있어서 돈을 쓰지 못합니다. 남자에게서 배신당한 사람은 남자에 대한 불신이 있습니다. 말로는 남자를 믿겠다고 하면서도 속에서는 남자를 믿지 못합니다. 과거에 일이 다 사라졌지만 문화화되어 내 생각을 사로 잡는 경우가 있습니다.
현재에 목적은 선한 데 두었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라고 목적을 세웠습니다. 그러나 옛날 방법에 매입니다. 목적은 바꾸나 방법은 못 바꿉니다. 방법은 중생하지 못합니다. 예수를 믿었는데 무당식으로 믿습니다. 무당끼 있는 사람이 있습니다. 시끄러우면 정신이 드는데 설교 듣는데는 잠을 잡니다. 무당끼가 덜 빠져 있습니다. 예언기도하던 것은 무당에게 물어보던 것으로 생각합니다. 무언가 미래에 물어보고 싶은 것입니다. 이것을 예언기도라고 합니다. 그래서 점을 치려고 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이뤄려고 하기보다 소원 성취가 작용합니다. 옛생활에서 벗어나지 못하여서 그런 것입니다. 그 이성까지도 구원을 받아야합니다. 그러면 인간의 의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의 공로와 선행으로는 구원 받지 못합니다. 우리의 마음에서 나쁜 생각이 나옵니다. 곡식은 가꾸어도 잘 자라지 않고 잡초는 키우지 않아도 자랍니다. 나로서는 구제 불능입니다. 전적으로 타락합니다. 어거스틴이 말한 것처럼 죄 아닌 것이 없습니다. 은혜로 구원받으면서도 다시 선을 행하고 고행을 통하여 자기 의를 세우고자 해서는 안 됩니다. 자기 의에 의존하는 마음은 무서운 것입니다. 이것이 율법주의의 잔재입니다. 우리가 예수님 믿었다고 율법의 속박 협박 저주 형식주의에서 완전히 자유로운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바울은 율법 폐기주의를 주장합니다. 높은 차원의 율법을 말합니다.. 내가 율법을 폐기한다고 말합니다. 율법 폐기론자는 방종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더 효과적으로 삶을 이루어가는 것입니다. 바울의 논리대로 말하면 율법의 형벌과 공포에 떨면서 하나님의 의가 이루지는 것이 아닙니다. 자포자기해서 더 큰 죄를 범합니다. 자녀를 잘못한다고 다 때리면 아이들의 몸에서 피가 납니다. 그래서 잘못이 없어지느냐는 것입니다. 그러면 거짓말하고 가출합니다. 사랑을 베풀고 은혜를 베풀면 법없는 사람이 되면 어떻게 하나 걱정합니다. 그러나 경험적으로 보면 사랑이 효과적입니다. 경험 속에서 충분히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오직 율법의 모든 속박에서 자유하고 은혜 속에서 살아야합니다. 사랑 속에서 율법을 지켜야합니다. 그래야 거룩하고 진실한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 수 있습니다. 그룻된 것을 다시 세운다는 것은 옛날로 돌아가서 율법적인 생활을 한다는 것입니다.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20절을 보십시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이것은 아주 중요한 말씀입니다. 기독교 복음의 핵심이 담긴 말씀입니다. 이 말씀을 잘 묵상하면 복음이 무엇인지 잘 알 수 있습니다. 율법을 지키는 것은 세 가지 있습니다. 첫째는 십계명을 지킵니다. 그대로 지키는 것이 있습니다. 잘못하면 벌을 받습니다. 도적질 하면 사배를 갚아야합니다. 갚고 나면 끝난 것입니다. 벌을 받는 것이 법을 지키는 것입니다.
둘째는 해석입니다. 골리앗을 죽인 것도 살인으로 보입니다. 그래서 그것은 살인이 아니라고 해석이 중요합니다. 율법이 있고 율법에 대한 해석이 중요합니다.
셋째는 합리적으로 신앙적으로 율법을 어긴 것을 정당화되는 것이 있습니다. 안식일에 일하지 말라고 하지만 안식일에 병고치는 것이 죄가 아닙니다 구덩이에 빠진 양을 건진 것은 괜찮습니다. 안식일에 전철탄 것, 운전한 것 죄가 아닙니다. 안식일에 친구 만나서 밥 사먹었으나 이는 정당화되는 것입니다. 문자적으로 법을 어겼으나 정당화되는 것이 있습니다. 한 사람을 보고 죄를 지었다고 단순하게 말하지만 앞에서 말한 세 가지 원칙으로 보아야합니다.
바울은 여기서 첫 번째로 벌을 받아서 율법을 지키는 경우를 말합니다. 어떤 운전자가 교통신호를 어겼습니다. 경찰이 보고 달라갑니다. 운전자가 경찰에게 딱지를 끊었습니다. 운전자는 벌을 받음으로 법을 지킨 것입니다.
대신 벌은 받는 경우도 있습니다. 흥보놀부가 있습니다. 흥부가 매품팔이를 합니다. 죄는 다른 사람이 지었으나 대신하여 벌을 받았으니 의를 이룬 것입니다. 옛날부터 그런 말이 있습니다. 옛날에는 대신 죽는 경우도 있습니다 돈주고 사다가 대신 죽입니다. 이미 지은 죄를 어떻게 합니까? 죄를 해결하는 길은 벌을 받는 것입니다. 누가 대신 벌을 받는 것입니다.
제사지내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양에게 자신의 죄를 전가시킵니다. 회개의 기도를 드린 다음 양을 잡습니다. 양의 피를 뿌리며 꿇어 엎드려 있습니다. 내가 양과 하나가 됩니다. 그 후에 제사장이 축복기도를 합니다. 양을 통하여 옛날의 죄에서 자유를 얻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은혜로 제정해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이렇게 나타났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대신하여 죄값을 치르신 것입니다. 이제 겸손하고 진실한 마음으로 감사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 마음으로 사는 것이 예수 믿는 것입니다 피흘림이 없이는 사함이 없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돈 몇푼 바쳐서 죄사함 받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예수님 안에서 죽었다는 믿음으로 사는 것입니다. 복음은 십자가입니다. 십자가 위에 의가 나타납니다. 하나님의 진노가 십자가 위에 떨어집니다. 그것이 믿음의 골자입니다. 율법을 향하여 나는 죽었습니다. 죽었을 때 나는 율법에서 벗어납니다. 아무리 죄인이라도 죽으면 감옥에서 나갑니다. 죽으면 자유합니다. 내가 예수와 함께 완전히 죽었으므로 나는 자유한 것입니다. 네들란드 렘브란트 화가가 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그렸습니다. 십자가의 장면을 생생하게 그렸습니다. 마리아와 제자들이 울고 있는 모습을 그렸습니다. 한쪽 구석에서 유대인과 관계 있는 한 사람이 있습니다. 그 속에 자기 얼굴을 그렸습니다. 예수님이 죽으시는 현장에 자기가 거기 있다고 말합니다. 내가 예수님을 죽였다고 합니다. 예수님은 나를 위해서 죽었다고 합니다. 그것을 생각해야합니다.
율법을 향하여 나는 죽었다고 합니다. 내가 율법에 대해서 죽어야합니다. 우리는 하나님과 관계 속에서 살 수 있습니다. 마틴 루터가 기어올라간 로마에 성베드로 성당의 계단이 있습니다. 마틴루터는.그곳을 무릎으로 기어올라갔습니다. 그러나 그것으로 죄사함을 받지 못하였습니다. 예수와 함께 죽었다는 믿음을 가질 때 죄사함을 받습니다. 십자가는 나를 사랑하여 나를 위하여 죽으신 것에 대한 확증입니다. 그 사랑을 받아 들이며 살아갑니다. 율법과 사망과 정욕에서 자유랍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 안에서 정욕과 욕심도 죽었습니다. 명예를 위하는 마음도 미움도 죽었습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습니다. 내가 예수님의 십자가 안에서 영적으로 죽었습니다. 그리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영접하였습니다. 그런즉 이제 내가 사는 것은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사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가 목적이 되어 삽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삽니다. 그리스도가 성령으로 우리 안에 거하십니다. 그리스도가 주체가 되어 살아갑니다. 그리스도가 의사결정자가 되어 삽니다. 나는 이제 내 마음대로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나는 예수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입니다. 우리는 지식과 의지와 감정과 무의식까지도 변화되어야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폐하지 않습니다.)

21절을 보십시오. “내가 하나님의 은혜를 폐하지 아니하노니 만일 의롭게 되는 것이 율법으로 말미암으면 그리스도께서 헛되이 죽으셨느니라.”

바울은 하나님의 은혜를 페하지 않습니다. 그는 은혜로 의롭다함을 받았습니다. 유대의 혈통으로 구원받는 것이 아닙니다. 안식일을 지키고 할례를 해서 구원받는 것이 아닙니다. 그는 은혜의 복음을 견고히 세우고자 하였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율법으로 의롭다함을 받으려 한다면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은 헛된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은혜를 폐하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은혜로 율법을 페하는 것도 아닙니다.

결론적으로 우리 안에 예수님만이 살아있게 해야합니다. 우리 가정에 교회에 직장에 나는 죽고 예수님이 살아있게 해야 합니다. 사람들은 죽고 예수님이 살아 있게 해야합니다. 행위는 죽고 믿음이 살아있어야 합니다. 에수님이 나에 대해서 모든 책임을 지고 죽은 것을 믿어야합니다. 예수님이 살아나셔서 나를 믿어주시고 소망하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에수님이 나를 인하여 기뻐하고 즐거움을 이기지 못하는 것을 믿어야합니다. 에수님이 나를 사랑하시는 것을 믿어야합니다. 그 안에서 우리는 작아지고 겸손해 질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은혜와 공로와 살아계심을 믿지 않는 모든 것을 우리는 책망하고 내려놓게 해야합니다. 우리는 에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다른 사람에 대해서 죄송하고 잘했다고 믿어주고 그에게 순종하고 감사하고 사랑하며 살아야합니다. 예수 안에서 율법을 지켜야합니다. 아멘
갈라디아서 2장 강해 이부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말씀 갈라디아서 2장 11-갈라디아서 2장 21
요절 갈라디아서 2장 20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갈라디아서 2장 강해 이부 끝입니다




번호 제목 작성자 작성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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