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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주의 대학생 선교기관

천안UBF

성경66권강해서

갈라디아서 4장 강해 일부 아들이 종으로 돌아가서는 안 됩니다.

작성자 : 오요한
작성일 : 2005-09-27 00:00:00
조회수 : 4,799

문제지풀이(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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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라디아서 4장 강해 일부 아들이 종으로 돌아가서는 안 됩니다.
갈라디아서 4장1-갈라디아서 4장 11
요절 갈라디아서 4장 9어찌하여 다시 약하고 천박한 초등학문으로 돌아가서 다시 그들에게 종 노릇 하려 하느냐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우리는 과거 죄의 종이었으나 이제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우리는 자녀로서 자유와 축복을 누립니다. 그런 우리가 다시 엣날로 돌아가서는 안 됩니다. 애굽에서 나온 이스라엘 백성이 다시 애굽으로 돌아가서는 안 됩니다. 개가 토하였던 것을 다시 먹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이제 하나님의 자녀로서 새로운 삶을 살아야합니다.

(어렸을 때는 종과 다름없다)

1-3절을 보십시오. “내가 또 말하노니 유업을 이을 자가 모든 것의 주인이나 어렸을 동안에는 종과 다름이 없어서 그 아버지가 정한 때까지 후견인과 청지기 아래에 있나니 이와 같이 우리도 어렸을 때에 이 세상의 초등학문 아래에 있어서 종 노릇 하였더니”

바울이 말하려는 것은 이것입니다. 상속자는 모든 재산의 주인이지만 그가 어릴 때는 종이나 조금도 다를 것이 없습니다. 그래서 자기 아버지가 정해 둔 때가 올 때까지 보호자와 관리자의 지시를 받습니다. 이와 같이 우리도 신앙이 어렸을 때에는 자연 숭배에 얽매여 종노릇을 하고 있었습니다. 구약은 율법이요 신약은 은혜가 아닙니다. 구약시대나 신약시대나 신앙이 어린 사람은 율법적이고 신앙이 성숙한 사람은 은혜에 속합니다. 아브라함은 은혜의 신앙입니다. 어렸을 동안에라는 말은 재미 있는 표현입니다.
이스라엘에서는 12살이 되면 아버지는 아들을 성전에 데리고 가서 예배를 드리며 율법의 아들이 되는 성인의식을 합니다. 통곡의 벽이나 회당에서 성인식을 합니다. 성인식은 중요합니다. 지금까지는 아버지의 지도를 받아서 살아옵니다. 이후부터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책임을 다합니다. 예수님도 12살 때 성전에 올라갑니다. 성인식을 한 다음에는 달라집니다. 회중 앞에서 성경을 읽습니다. 잘못 읽으면 다시 읽으라고 합니다. 회당장이 30분 정도 성경을 읽게 합니다. 어떤 수준에 도달하면 성인으로 인정합니다. 그렇지 못하면 불합격이고 내년에 다시 성인식을 합니다. 성경을 다 읽은 다음에 아버지가 아들을 축복합니다. 소년은 하나님을 향한 의무를 하겠다고 합니다. 헬라 사람들은 18살에 군인학교에 입학하며 성인의식을 합니다. 로마사람은 25살이 되면 재산권을 갖습니다. 우리나라는 19살에 성인이 됩니다.
어렸을 때는 종과 다름없습니다. 유치한 때는 후견인의 도움을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옛날에 어린 왕은 어머니나 주위 친척이 섭정합니다. 후견인의 지배하게 됩니다. 엄연히 주인이나 주인의 권리를 갖지 못합니다. 구자경 회장은 구인회 회장의 아들입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회사에 평사원으로 입사하였습니다. 그곳에서 십년 이상을 평사원으로 사람들이 모르게 일하였습니다. 다른 노동자와 같이 꼭 같이 십년을 일하고 회사의 전무가 되고 나중에는 회사를 맡았습니다. 그냥 회장을 맡기면 감당할 수 없습니다. 이런 과정을 겪지 못하므로 문제가 많습니다. 당당한 주인이나 훈련인 지배아래 둡니다.
초동학문 아래 둔다는 말이 중요합니다. 그 수준에 맞게 합니다. 초등학생은 초등학교 교재를 공부합니다. 종의 지배를 받습니다. 어렸을 때는 종과 다름없습니다. 어렸을 때는 종노릇할 수밖에 없습니다. 신앙이 어릴 때는 율법이 필요합니다. 그 후에 어느 순간에 주인이 됩니다.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떤 돈 많은 주인 할아버지에게 아들 삼형제가 있습니다. 막내가 7살입니다. 큰 형들이 동생을 무시합니다. 아버지가 세상을 떠날 때 걱정이 됩니다. 형들이 동생의 재산을 빼앗을 것 같습니다. 큰 형은 집을, 둘째 형은 땅을 가지라고 합니다. 셋째는 병풍 하나만 가지라고 합니다. 그는 이곳저곳에서 얻어 먹었습니다. 어느 집에서 얻어 먹는데 주인이 보니 친구의 아들입니다. 아무개 아들이 아니냐 묻습니다. 아들이 말합니다. 형들 집에 가니 쫓겨났습니다. 친구가 병풍을 찢어보니 땅문서가 들어있습니다. 아버지가 아들이 성장하기까지 그대로 둡니다. 일곱 살 때는 땅문서가 무엇인지 모릅니다.
우리가 어렸을 때는 은혜나 복음이나 축복이나 자유가 무엇인지 모릅니다. 복을 주어도 모릅니다. 어린 아이들은 시야가 좁습니다. 편견에 빠집니다. 스스로 판단하지 못합니다. 유혹에 쉽게 넘어집니다. 그래서 율법 아래 놓일 수밖에 없습니다. 성숙하여 스스로 판단할 때 율법에서 자유합니다.
두 승려가 있었습니다. 시내로 나와서 출타를 했다가 다시 절간으로 건너갑니다. 내를 건너갑니다. 아주 예쁘게 생긴 색시가 내를 건너지 못하고 물가에 앉아 있습니다. 중 중에 하나가 예쁜 색시를 업어 건넜습니다. 다시 절이 있는 산으로 올라갑니다. 업지 않은 중이 업은 중을 비난합니다. 어떻게 중이 여자를 업고 건너냐고 합니다. 업었던 중이 이렇게 합니다. 나는 여자를 내려 놓는 순간 다 잊어버렸는데 너는 지금도 업고 있느냐? 성숙한 수준에서 자유할 수 있습니다.

(아들을 보내사 우리를 아들 삼으셨다)

4,5절을 보십시오.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에 나게 하신 것은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을 속량하시고 우리로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그러나 때가 찼을 때 하나님께서 당신의 아들을 보내시어 여자의 몸에서 나게 하시고 율법의 지배를 받게 하시었습니다. 예수님은 율법의 지배를 받고 사는 사람을 구원해 내시고 또 우리에게 당신의 자녀가 되는 자격을 얻게 하셨습니다. 때가 차매 약속이 이루어지고 율법에서 자유합니다. 이제는 로마 헬라 히브리 사상이 물러가는 것을 말합니다. 아들을 보내사 예수님이 오십니다. 성령이 강림하십니다. 이제는 은혜 아래 살게 됩니다.
예수님이 여자에서 났는다는 것은 구약의 약속이 이루어졌다는 말입니다. 율법 가운데 나신 것은 율법의 값을 속량하시기 위해서입니다. 예수님은 징벌을 받을 필요가 없으나 징벌을 받았습니다. 율법을 지킬 필요가 없으나 율법을 지켰습니다. 예수님은 율법대로 할례를 받으시고 율법대로 제사를 드렸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율법을 다 이루셨습니다. 우리가 이 예수님을 받아들이면 이제는 성령을 따라서 살아야합니다.

(아빠 아버지라 부르다)

6,7절을 보십시오. “너희가 아들이므로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아빠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느니라 그러므로 네가 이 후로는 종이 아니요 아들이니 아들이면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유업을 받을 자니라”

이제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으므로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마음속에 당신의 아들의 성령을 보내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제 종이 아니라 자녀입니다. 자녀라면 하나님께서 세워주신 상속자인 것입니다. 아바는 아랍말입니다. 아빠는 어렸을 때 부르는 말입니다. 어려서는 아빠, 좀 커서는 아버지, 어른이 되어서는 아버님이라고 합니다. 아빠라는 말이 가장 가까운 것입니다. 아버님 하면 일년에 한두 번 듣습니다. 30살이 넘어서도 아빠라고 합니다. 서로 좋아합니다. 기도하면서 하나님 아빠라고 하라는 말은 아닙니다. 하나님과 친근하라는 말입니다. 아무나 아버지라고 할 수 없습니다. 내가 아버지라고 할 수 있는 사람이 누구입니까? 나를 아들이라고 하는 사람입니다. 네가 내 아들이라 내가 너를 사랑하는 아들이라고 할 때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주기도문에 보면 하나님 여호와라고 하지 않습니다. 아버지라고 부릅니다. 아들의 영을 받은 사람들만이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내가 아들이라는 사실이 믿어져야합니다. 우리가 성령께서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확신시켜 주십니다. 성령을 받은 사람은 불안하거나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요한복음에 예수님이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하여서 죽이고자 합니다. 아버지는 아무나 부를 수 없는 소중한 것입니다. 자녀가 되면 종의 법에서 자유합니다. 정체의식이 없으면 다시 법의 지배를 받습니다.
아들은 아무리 일을 많이 해도 월급을 주지 않고 칭찬하지 않습니다. 맏아들이 아버지에게 아무것도 주지 않았다고 하는 것은 아들의 권리를 포기하는 것입니다. 탕자의 비유에서 큰 아들은 왜 아버지는 나에게 염소새끼도 주지 않았다고 합니다. 아들 되기를 포기하는 것입니다. 아버지는 내 것이 다 네 것인데 무엇을 주어야 하느냐고 합니다. 아들이라는 것이 확실한 순간 가난하거나 부하거나 상관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자녀요. 하나님의 모든 것이 내 것입니다.

요한 웨슬리는 성직자의 아들이 되어서 목사가 되었습니다. 요한웨슬리는 보수적인 신앙을 가졌습니다. 감옥을 방문하고 기도하고 성경공부하고 금식하고 명상하였습니다. 일하고 봉사하는 일을 열심히 하고 기쁨이 없습니다. 그 후에 그는 중생합니다. 나는 종교적인 행위라는 감옥에 갇혀 있었다고 합니다. 나는 아들의 믿음이 아니고 종의 믿음을 가지고 있다고 말합니다.
종의 의식을 가진 사람을 불평이 많습니다. 왜 축복해주지 않느냐 십일조하는 데 장사가 안 되냐 불평합니다. 하나님의 자녀는 감사하는 생활을 합니다. 가난해도 병들어도 충분합니다. 하나님 아버지 하는 순간, 하나님이 나를 사랑한다는 말씀이 들려옵니다. 내 것이 다 네 것이라는 말씀이 들려옵니다. 너무 감사합니다. 재산 신분 지위 모든 것을 상속받습니다. 우리는 하나님 나라를 상속받습니다. 그러면 자유합니다. 우리를 아바 아버지라고 부르라는 것은 엄청난 은혜인 것입니다.

(하나님을 알고 아신 바 되었다)

8-9a절을 보십시오. “그러나 너희가 그 때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여 본질상 하나님이 아닌 자들에게 종 노릇 하였더니 이제는 너희가 하나님을 알 뿐 아니라 더욱이 하나님이 아신 바 되었거늘”

갈라디아 성도들이 하나님을 모르고 있을 때에는 본래 하나님이 아닌 신들의 종노릇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여러분이 하나님을 알고 있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알고 계십니다. 율법과 은혜를 정리하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것은 여러 가지로 풀이할 수 있습니다. 교회다니는 것이다 성경읽는 것이다 기도하는 것이다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내용적인 면에서는 그리스도를 주로 섬기는 것입니다. 크리스찬은 기독교인이라는 것은 예수님을 주로 고백한 사람입니다. 이제 나의 주인은 그리스도입니다. 그분이 내영혼의 주인이요 나의 가치관 생활 소유의 주인입니다. 그런 사람이 그리스도인입니다. 내 하나님으로 고백한 자입니다.
이런 사람은 하나님이 그를 알고 그도 하나님을 알게 됩니다. 하나님과 깊은 사랑의 관계성을 맺게 됩니다. 예수님을 주로 알고 섬기면서 내가 주로 섬기던 것을 다 버립니다. 그동안 돈을 좋아하던 사람, 자기 얼굴만 들여다보고 몸을 가꾸던 사람, 자신의 명예, 자존심을 소중히 여기는 사람도 그것이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압니다. 돈을 우상으로 섬기는 사람이 많습니다. 자기 철학을 숭상합니다. 이들은 예수님을 영접지 못합니다. 그것을 다 부정해야합니다. 아무 것도 아닌데 그것을 버리지 못합니다.
예수님을 영접지 못하는 불쌍한 사람이 많습니다. 임종이 가까우면 그제야 깨닫습니다. 예수님을 알게 됨으로 그가 내 길이 됩니다. 그가 인도하고 보여주시는 대로 살아갑니다. 그가 가신 길이 좋은 길이요. 아름다운 길이요. 행복한 길이라는 것을 깨닫습니다. 나름대로 살던 것을 떠납니다. 예수님처럼 사는 것이 가장 행복합니다. 예수님의 길을 선택하고 따라서 갑니다. 예수님의 능력과 지혜를 압니다. 나의 나약함을 이길 지혜와 능력을 얻습니다. 사랑을 알고 방황하지 않고 곧게 따라갑니다. 다시는 죄의 사슬에 매일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죄에서 사망에서 자유합니다. 예수님의 진리 되심을 알고 있습니다. 거짓을 버립니다. 그가 진리이므로 헛된 지식에 매이지 않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보는 책이 시시합니다. 성경이 좋고 예수님이 진짜라는 것을 압니다. 예수님께 심취하면서 다른 것을 버리게 됩니다. 예술도 신령한 예술을 좋아합니다.
더 중요한 것을 알면 거짓을 버립니다. 내가 나를 부정하여 그리스도를 긍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진리를 긍정하니 모든 거짓을 부정합니다. 예수님이 열두 제자에게 너희도 가려느냐고 합니다. 베드로는 영생의 말씀이 있는데 어디로 가느냐고 합니다. 주님이 진리라는 것을 알면 다른 것을 알 필요없습니다. 예수 믿는 것은 은혜를 아는 사람입니다. 교회 오는 것, 이 만큼 사는 것도 은혜입니다. 그것을 알 때 율법에서 자유합니다. 예수님이 목적이요. 중심입니다. 모든 면에서 그리스도 중심으로 생각합니다. 옛날 일들을, 자기 중심적인 것을 버립니다.

(어찌하여 종이 되려하느냐)

9b11절을 보십시오. “어찌하여 다시 약하고 천박한 초등학문으로 돌아가서 다시 그들에게 종 노릇 하려 하느냐 너희가 날과 달과 절기와 해를 삼가 지키니 내가 너희를 위하여 수고한 것이 헛될까 두려워하노라”

그런데 왜 또다시 그 무력하고 천한 자연 숭배로 되돌아가서 그것들의 종노릇을 하려고 합니까? 여러분이 날과 달과 계절과 해를 숭상하기 시작했다고 하니 여러분을 위한 바울의 수고가 허사로 돌아가지나 않았나 염려됩니다. 그렇게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 다시 세상으로 갈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중심에서 세상이나 자신을 중심으로 살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은혜에서 율법으로 갈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옛날에는 종으로 끌려갔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은혜를 아는 자가 다시 옛날로 돌아갈 수 없습니다. 이제는 자유인입니다. 담배의 종으로 사는 사람도 있습니다. 담배도 중요한 상전입니다. 안 피우면 되지 그렇게 쉽게 말할 수 없습니다. 담배의 노예가 됩니다. 공항에서 구석에서 담배를 피웁니다. 원숭이 같습니다. 입에 냄새가 나서 다시 피우지 않는다고 합니다. 끊었다가 다시 피우면 멍청한 사람입니다. 그 노예로 돌아가느냐고 합니다.
우상을 섬기다가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우상 섬기는 것 복잡합니다. 이사하는 것, 빨래너는 것, 결혼하는 것을 다 따져야 합니다. 아무 때나 할 수 있습니다. 이런 사람이 불쌍한 사람입니다. 우상을 섬기다 하나님을 섬기므로 행복한 삶믈 살다가 다시 우상을 섬기면 불쌍한 사람입니다. 다시 율법주의에 빠지면 어떻게 됩니까? 예수님을 잘 믿어보려고 하다가 율법주의가 됩니다. 전에는 무지하다가 지식을 얻었습니다. 그런데 다시 유치하게 살려느냐는 것입니다. 유치한 데서 성숙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성숙한 성인이 다시 유치원에 들어간다면 불쌍한 일입니다. 진짜 행복을, 진짜 자유를 몰라서, 참진리 은혜를 몰라서, 다시 옛날로 갑니다. 다시 돌아가는 것은 진리를 온전히 깨닫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예수 믿던 사람이 다시 우상을 섬깁니다. 우상은 공포 협박과 부자유함을 줍니다. 다시 옛날로 돌아가서는 안 됩니다. 탕자가 나가보니 속박이 있었습니다. 주려죽게 되었습니다. 탕자는 다 벗어버리고 아버지 집에 왔습니다. 다음에 형과 다투고 다시 집을 나갔다면 정말 불쌍한 사람입니다. 아버지의 사랑을 깨달았으면 집을 나갈 수 없습니다. 내가 하나님께 알려졌습니다. 탕자는 돌아와서 아버지가 이렇게 사랑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내가 방황할 때도 하나님이 같이 계셨습니다. 내가 죄인 되었을 때에 예수님이 나를 위해서 죽으셨습니다.

은혜를 받으면 하나님이 부르셨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그것을 깨닫지 못하면 다시 옛날로 돌아갑니다. 먼저 그분이 나를 아셨다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는 것을 압니다. 그때 바르게 살 수 있습니다. 신비로운 사랑을 깨달을 때 옛날로 돌아갈 수 없습니다. 옛날을 버려야합니다.
미국 이민 가서 고생 많이 합니다. 얼굴은 여자인데 악수를 해보면 손은 남자처럼 거칩니다. 제일 어려울 때가 미국에 가서 삼년 동안입니다. 그 전에는 다시 한국에 오고 싶습니다. 삼년에 세 가지를 버려야합니다. 먼저, 체면을 버려야 합니다. 상당한 지위에 있는 사람도 구두 수선합니다. 명함을 버려야합니다. 사장 전무 박사 교수를 버려야합니다. 둘째, 신분 학벌을 버려야합니다. 박사 이백 명이 주요소에서 기름을 따릅니다. 옛날 신분을 버립니다. 셋째, 성질을 버려야합니다. 기분 나쁘면 못삽니다. 완전히 성격을 버려야합니다. 성질을 버려야 살 수 있습니다. 버릴수록 좋은 것은 빨리 버려야합니다. 아이엠에프 시대에도 그렇습니다. 우리도 예수님을 믿어서 그리스도의 사람이 되어서 살 때 깨끗이 과거를 버려야합니다. 예수님 믿기 전의 체면이나 학벌 그리고 성격을 버려야합니다.
바울은 갈라디아 성도들에게 약하고 천한 초등학문에 돌아가려느냐고 합니다. 대학까지 가서 고등교육을 받은 사람이 다시 초등학교에 가서 공부하려느냐고 합니다. 성숙한 인격이라면 옛날 일을 깨끗이 버려야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새사람으로 살아야합니다. 옛날로 돌아가고 시험에 빠지는 경우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안식일 월삭을 지킵니다. 안식일을 지키는 것이 형식주의에 빠집니다. 의미로 지키지 못하고 형식으로 지킬 때 자유를 빼앗습니다. 월삭도 그렇습니다. 안식년 희년 지키는 것도 그렇습니다. 안식일에 노예가 되고 율법주의에 빠집니다. 이것을 통해서 의를 힘 입으려고 해서는 안 됩니다. 이것이 구원의 조건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사람에게 보이려고 신앙생활해서는 안 됩니다. 형식적으로 외식적으로 사는 신앙인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한 목사님이 장로님과 에배에 빠진 여집사님을 심방갔습니다. 여 성도가 너무 살기 힘들어서 두 주일 예배에 빠졌습니다. 심방가서 장로님이 말을 함부로 합니다. 두 주일 빠졌다며 그래서 천당가나 호통을 쳤습니다. 그래서 여성도가 서서 웁니다. 목사님이 위로 하였습니다. 한 달 빠져도 천당갑니다. 한 번 예배에 빠졌다고 천당지옥 말하면 안 됩니다. 예배 나와도 졸다 갑니다. 이런 가운데 형식 율법주의에 빠집니다. 예배에 빠지라는 말이 아닙니다. 의무라도 나오는 것이 중요합니다. 졸면서라도 나와야 합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예배에 나오는 것입니다. 그것이 성숙한 신앙입니다. 예배에 나오는 것보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경외하는 마음이 더욱 중요하다는 말입니다.
어느 교회에 갔는데 주일을 안 지키서 방언을 못한다고 합니다. 자기가 만든 율법에 자기가 매여 있습니다. 복음으로 시작하였다가 율법에 매여 있습니다. 나는 방언 한다고 다른 사람을 비판하고 저주하면 안 됩니다. 형식주의, 율법주의에 빠지면 옛날로 돌아갑니다. 항상 주님의 거룩한 뜻에 감사하면 삽니다. 은혜에 충만하며 감사합니다.

결론적으로 우리는 믿음이 성숙하여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자유를 얻었습니다. 예수님이 주가 되고 예수님의 말씀에 다 순종하게 되었습니다. 은혜의 세계에 들어갔습니다. 그러면 이제 예전의 율법적인 세계로 돌아가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주신 자유를 지키고 점점 더 예수님 안에서 자유아 행복을 누릴 수 있어야 합니다. 아멘!

갈라디아서 4장 강해 일부 아들이 종으로 돌아가서는 안 됩니다.
갈라디아서 4장1-갈라디아서 4장 11
요절 갈라디아서 4장 9 어찌하여 다시 약하고 천박한 초등학문으로 돌아가서 다시 그들에게 종 노릇 하려 하느냐
갈라디아서 4장 강해 일부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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