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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주의 대학생 선교기관

천안UBF

성경66권강해서

갈라디아서 3장 강해 이부 율법을 싸고 있는 언약

작성자 : 오요한
작성일 : 2005-09-27 00:00:00
조회수 : 4,672

문제지풀이(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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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라디아서 3장 강해 2부 율법을 싸고 있는 언약
갈라디아서 3장 15-갈라디아서 3장 29
요절 갈라디아서 3장 17 내가 이것을 말하노니 하나님께서 미리 정하신 언약을 사백삼십 년 후에 생긴 율법이 폐기하지 못하고 그 약속을 헛되게 하지 못하리라

오늘 말씀에는 확실한 언약, 은혜의 약속이 나옵니다.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것을 말합니다. 인간적인 것을 통해서 이것을 논증하고 있습니다. 1장에서는 엄한 명령을 하고 갈라디아 성도들을 책망도 하였습니다. 이제는 인간적인 이성에 호소합니다. 근본은 믿음으로 은혜로 긍휼로 구원받는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율법보다 먼저입니다. 400년 전에 모세보다 아브라함에게 주어집니다. 아브라함에게 주신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보다 원초적이고 근본적인 것입니다. 그래서 은혜에 대한 교리가 율법보다 휠씬 먼저 있었습니다. 그 후에 다시 언약의 예수님이 옵니다. 율법을 언약이 싸고 있습니다. 그러면 여기서 생각해보아야 합니다. 여기에 약속과 언약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이 언약들을 믿음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면 은혜에 들어간 사람들이 율법을 어떻게 보아야 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신학적으로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갖습니다.

(하나님은 언약을 폐하지 않습니다.)

15,16절을 보십시오. “형제들아 내가 사람의 예대로 말하노니 사람의 언약이라도 정한 후에는 아무도 폐하거나 더하거나 하지 못하느니라 이 약속들은 아브라함과 그 자손에게 말씀하신 것인데 여럿을 가리켜 그 자손들이라 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한 사람을 가리켜 네 자손이라 하셨으니 곧 그리스도라“

사도바울은 형제들에게 세상의 관례를 들어서 말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맺은 계약도 한번 맺은 다음에는 아무도 그것을 무효로 만들거나 무엇을 덧붙이거나 할 수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더욱 약속을 폐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약속을 지키는 신실하신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과 그의 후손에게 약속하실 때에 많은 사람을 가리키는 "후손들에게"라는 말 대신 한 사람만을 가리키는 "네 후손에게"라는 말을 쓰셨습니다. 그 한 사람이란 그리스도를 가리킵니다. 약속은 에팡길리온이라고 말합니다. 먼저 내걸았다는 말과 소식의 복합어입니다. 먼저 내건 소식입니다. 오늘 될 일을 가지고 미래에 대해서 말합니다. 과거의 일을 약속하지 않습니다. 현재의 일도 약속할 필요가 없습니다. 약속은 쌍방적인 것입니다.

결혼이란 사회 계약입니다. 우리 둘이 신랑신부로 한평생 살겠다는 약속입니다. 약속은 잘 지키는 사람과 결혼해야합니다. 데이트할 때 약속 안 지키는 사람과 결혼해서는 안 됩니다. 약속을 지키는 체질 훈련을 보고 결혼을 약속합니다. 아무리 능력이 많아도 약속 안 지키는 사람과 결혼하지 않는 것입니다. 약속을 지키지 않는 사람과 결혼하는 것은 맹추 일호입니다. 약속을 하고 성취하는데서 약속에 대한 신용도를 결정하는 것입니다.
어린 아이들에게 약속과 성취를 훈련시키는 것입니다. 울어도 힘써도 안 줍니다. 그 약속을 믿어야 주는 것입니다. 약속을 했으면 아이들은 약속을 잊어도 부모는 약속을 지켜주어야 합니다. 약속을 실천해야합니다. 그 후에 아이들이 달라고 하면 이틀 후에 사흘 후에 일주일 후에 한 달 후에 일년 후에 주겠다고 약속합니다. 일 년 후에 준다고 하면 아이들은 알았습니다 라고 해야 합니다. 부모가 약속을 안 지지키면 떠드는 아이에게 아무리 많은 약속을 해도 안 믿습니다. 말 못하는 아이에게도 약속과 성취에 부도가 난 것입니다. 이렇게 하면 나중에 불행해집니다. 어머니가 말해도 아이는 믿지 못하고 두고 봐야 알지라고 말합니다. 교육의 기본은 믿음이요. 그 전제는 약속입니다. 약속과 성취가 훈련 체질이 되어야합니다. 준다고 하고 안주고, 때린다고 하고도 안 때리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것은 불행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약속을 통하여 믿음의 사람으로 훈련시켰습니다. 그에게 큰 민족을 주시겠다고 하고 그것을 믿도록 25년 동안 훈련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약속을 믿었을 때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이삭을 주셨습니다. 아브라함은 큰 민족이 이루어진 것을 보지 못하고 죽었습니다. 그는 이삭을 통하여 큰 민족이 이루어질 것을 믿고 죽었습니다. 이제 성경에 나타난 대로 복음은 쌍방적으로 이루어졌습니다.
복음은 유앙갤리온인데 복된 소식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네 자손으로 말미암아 천하만민이 복을 얻는다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자손이라는 말은 너의 그 자손입니다. 정관사가 있습니다. 한 사람을 의미합니다. 직접적으로는 이삭입니다. 이삭은 그리스도의 예표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지칭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약속을 하시고 이천년 후에 예수님을 보내심으로 그 약속을 지켰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그 이삭 곧 그리스도를 통해서 이루어진 것입니다. 모든 약속이 그리스도인과 관련된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리스도를 보내심으로 약속을 지키는 신실한 분이심을 드러내셨습니다. 우리의 신앙은 그 약속하신 하나님을 믿는 믿음에 뿌리 박고 있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믿을 때 약속 안에 있는 모든 축복이 우리에게 오는 것입니다. 약속을 믿는 믿음으로 그리스도를 믿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통하여 의롭다함을 믿는 약속을 믿어야합니다.

(하나님은 일방적으로 언약을 지키십니다.)

17절을 보십시오. “내가 이것을 말하노니 하나님께서 미리 정하신 언약을 사백삼십 년 후에 생긴 율법이 폐기하지 못하고 그 약속을 헛되게 하지 못하리라”

바울이 말하려는 것은 이것입니다. 하느님께서 미리 맺어주신 언약이 사백삼십 년 후에 율법이 생겼다 해서 소멸되거나 그 약속이 무효가 될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바울은 약속이라는 말을 쓰다가 이제는 언약이라는 말을 쓰고 있습니다. 언약은 약속과 다릅니다. 언약은 디아데케입니다. 죽으면서 마지막 하는 말 곧 유언이 언약입니다. 이것은 일방적입니다. 죽는 사람이 산 사람에게 유언합니다. 이것은 살아있는 사람에게 물어보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사람들에게 예수 믿으라고 합니다. 우리는 일방적으로 말합니다. 유언은 변할 수 없습니다. 쌍방적인 것이라면 전화해서 편지해서 약속을 바꾸거나 취소할 수 있습니다. 언약은 변할 수 없는 약속입니다. 사람의 언약이라도 정한 후에는 폐하거나 더하지 못합니다. 쌍방적인 약속이라면 취소하면 됩니다. 의견을 바꾸면 됩니다. 그러나 언약을 바꾸지 못합니다. 언약한 자가 죽은 후에는 폐하거나 더하지 못합니다. 약속한 사람이 죽었으니 지키는 수밖에 없습니다. 정한 후에는 절대로 고치지 못하는 약속입니다. 이것을 언약이라고 번역하고 있습니다. 유언은 유언한 자가 살아 있는 동안에는 효력이 없습니다. 죽은 후에 효력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죽은 후에 효력을 발휘합니다.
히브리서 9장 16,17절입니다. 이 언약은 지키는 자에게만 효력을 발생합니다. 유언을 따라서 직업을 물려받아야, 유산을 준다는 것을 물려받아야 효력이 생깁니다. 유언이라는 약속을 놓고 설명합니다. 하나님과 아브라함과 관계는 일방적인 언약입니다. 본토 친척 아비집을 떠나면 큰 민족을 주마 하나님은 약속하였습니다. 아브라함이 본토 친척 아버지 집을 떠났어야 그 약속은 효력이 있습니다. 약속을 믿고 일단 떠납니다. 그는 떠남으로 약속의 축복을 받는 것입니다. 일방적이고 은혜를 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하나님이 선택하고 주도적입니다. 불변합니다. 하나님 스스로 약속을 지켜갑니다. 아브라함이 이 약속을 지키도록 훈련하십니다. 하나님의 훈련은 감상적인 것이거나 조건적인 것이 아닙니다. 좋은 사람이 되어야 착한 사람이 되라 그러면 복을 준다고 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약속을 따라서 살도록 역사하십니다. 창조적으로 사랑합니다. 사랑할만한 자로 만들어가는 것입니다. 키워봐서 아들을 삼는 것이 아닙니다. 잘하면 되고 못하면 버리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으로 일방적으로 만들어가는 것입니다. 여기에 하나님의 섭리가 있고 지혜가 있고 능력이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약속을 잘 못 지킵니다. 가나안 땅을 떠나고 첩을 얻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아브라함이 약속을 지키도록 강권적으로 일하십니다. 하나님은 전능하신 하나님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휘청거리지 말라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끝까지 붙들어서 하나님의 약속을 받는 자로 만들어갑니다. 하나님은 원하시는 작품을 만들었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그 자체가 능력이요. 섭리입니다. 우리는 약속을 지킬 능력이 없습니다. 우리는 실망했다 팔자다 끝났다 말합니다. 우리는 마치 바보 온달과 같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마치 평강공주가 시집가서 바보 온달을 왕자로 만들어가듯이 아브라함을 만들어갑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이 그 약속을 지키도록 일하십니다. 다만 아브라함이 한 것은 그것을 믿음으로 받아들인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오직 믿음입니다. 하나님을 믿어드리는 것입니다.

(율법을 주신 것도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8절을 보십시오. “만일 그 유업이 율법에서 난 것이면 약속에서 난 것이 아니리라 그러나 하나님이 약속으로 말미암아 아브라함에게 주신 것이라”

만일 율법의 행위를 근거로 해서 상속을 받는 것이라면 그것은 벌써 약속된 것을 받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약속에 따라 은혜에 따라서 아브라함에게 상속의 선물을 주신 것입니다. 우리는 약속을 주실 것을 믿습니다. 나 자신은 못 믿어도 하나님은 믿습니다. 나는 실수도 있지만 하나님은 실수가 없습니다. 이것이 나의 신앙적인 응답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폐기되지 못합니다. 은혜와 율법을 대조하여 생각하면 됩니다. 은혜는 폐기될 수 없습니다. 헛되게 하지 못합니다. 율법도 은혜로 주어진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람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사람답게 만들기 위해서 주신 것이 율법입니다. 율법을 주신 동기가 은혜입니다.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안식일을 지키라고 합니다. 예수님은 사람을 위하여 안식일을 만드셨다고 하십니다. 안식일은 우리에게 복받으라고 주신 것입니다. 쉬라고 하는 명령처럼 고마운 것이 없습니다. 쉬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보장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안식일 전날 이틀 먹을 만나를 주시면서 쉬라고 하십니다. 옆집에 비슷한 두 사람이 살고 있습니다. 한 사람은 예수 믿고 주일 문을 닫고 한 사람은 주일도 일합니다. 에수 안 믿는 옆 사람은 예수 믿는 사람이 하루씩 문 닫고 놀으면 밥 잘 먹고 잘 살아가지 못할 것처럼 보입니다. 예수 안 믿는 사람은 믿는 사람을 보고 미련한 놈이라고 하였습니다. 십년 지나고 보니 문 닫은 사람이나 안 닫은 사람이나 별로 다른 것이 없다고 합니다. 문을 닫은 그 사람이 똑똑한 사람입니다. 안식일은 쉬라는 계명입니다. 놀며 은혜 받으라는 계명입니다.
모든 계명이 우리를 위해서 주신 것입니다. 은혜로 계명을 수용해야합니다. 믿음으로 지킬 때만이 계명을 지킬 수 있습니다. 믿음이 없으면 계명을 지키는 것도 형식입니다. 마음에서 감사하는 마음으로 율법을 지켜야합니다. 은혜에 응답하는 마음으로 지켜야합니다 물 한 그릇을 떠다 대접해도 정성을 다해서 대접해야합니다. 물을 가져오라고 하면 당신 손은 뭐하고 나에게 갖다 달라고 하느냐 말하면 마음으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마음과 정성이 있어야 율법을 지킬 수 있습니다. 은혜에서 율법을 완성해야합니다. 십자가 앞에서 율법이 완성되는 것입니다. 십자가를 통하여 율법의 요구가 다 완성되는 것입니다. 십자가를 믿고 받아들여야 율법을 지킨 바가 되는 것입니다. 율법이 은혜를 폐하지 못합니다. 율법이 은혜를 더 은혜되게 합니다.

(하나님은 스스로 중보자가 되셨습니다.)

19-20절을 보십시오. “그런즉 율법은 무엇이냐 범법하므로 더하여진 것이라 천사들을 통하여 한 중보자의 손으로 베푸신 것인데 약속하신 자손이 오시기까지 있을 것이라 그 중보자는 한 편만 위한 자가 아니나 하나님은 한 분이시니라”

그러면 율법은 무엇 때문에 있게 되었습니까? 그것은 약속된 그 후손이 오실 때까지 죄가 무엇인지 알게 하시려고 덧붙여주신 것입니다. 그리고 이 율법은 천사들을 통하여 중재자의 손을 거쳐 제정된 것입니다. 율법은 중재자 모세를 통하여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주어진 것입니다. 인간은 율법을 지키지 못하면 피의 제사를 지내서 하나님의 의를 이루고 하나님은 우리의 죄를 사하실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약속은 중재자를 내세우지 않고 하느님 한 분의 생각으로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친히 중재자가 되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친히 중재자가 되고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인간의 죄를 대속하셨습니다. 우리 인간은 제사를 드리지 않아도 됩니다. 하나님이 친히 모든 죄를 책임지고 해결하셨습니다. 그리고 성령을 보내서 율법을 지키게 하십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우리에게는 오직 믿음만을 요구합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율법과 반대되지 않습니다.)

21,22절을 보십시오. “그러면 율법이 하나님의 약속들과 반대되는 것이냐 결코 그럴 수 없느니라 만일 능히 살게 하는 율법을 주셨더라면 의가 반드시 율법으로 말미암았으리라 그러나 성경이 모든 것을 죄 아래에 가두었으니 이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약속을 믿는 자들에게 주려 함이라”

그렇다면 율법은 하나님의 약속과 반대되는 것이겠습니까?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만일 사람에게 주어진 율법이 사람을 살릴 수 있는 것이었다면 사람은 율법에 의해서 하느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을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성서는 온 세상이 죄에 갇혀 있다고 말합니다. 따라서 율법으로 다른 사람을 살릴 수 없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만이 그 믿음으로 약속된 선물을 받아 살게 하셨습니다. 약속이 율법과 반대되는 것이 아니라 약속이 율법을 싸고 있는 것입니다.
지난 번에 율법의 제 삼 용법을 말하였습니다. 첫째는 율법 자체를 지키는 것이 있습니다. 둘째는 율법을 해석해야 합니다. 다윗이 골리앗을 죽인 것은 살인하지 말라는 계명을 어긴 것이 아닙니다. 셋째는 율법을 준 의미를 생각하며 사랑으로 받는 것입니다. 여기서는 제삼용법을 말하는 것입니다. 율법은 높은 이상을 말합니다. 율법은 하나님의 뜻입니다. 실천하지 못하지만 하나님의 뜻을 알아야합니다.
부모를 공경하는 것은 나에게 생명을 주신 그분을 소중히 여기는 것입니다. 내가 자식에게 공경을 받는 것입니다. 모든 율법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두신 뜻이 무엇인지 어떻게 살기를 바라는지 나타나 있습니다. 우리가 다 율법을 지키면 편합니다.
우리나라도 살기 괜찮은 편입니다. 뉴욕에서 밤 6시만 되면 밖에 못나갑니다. 차를 타고 다니지만 걸어다니지 못합니다. 핸드백 가지고 다니면 팔까지도 짤립니다. 율법을 지키지 않으니 불행합니다. 그러나 모두가 율법을 지키면 행복합니다. 항상 기뻐하고 범사에 감사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이렇게 해야 행복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복을 주시고 행복을 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돈 보따리를 주시는 것이 아니고 계명을 주십니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뜻이 계명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율법은 우리를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합니다. 율법을 지켰다고 교만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다 죄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앞에서 무릎을 꿇고 율법을 지킬 수 있는 은혜를 주시도록 기도해야합니다. 하나님의 은헤 속에서만 율법을 지킬 수 있습니다. 이제는 무서워서가 아니고 기쁜 마음으로 감사하는 마음으로 지켜야합니다. 이것이 율법의 제삼용법입니다. 구원받기 위해서 지키는 것이 아니라 구원받았으므로 감사함으로 지키는 것입니다. 십계명을 주시기 전에 먼저 구원의 은혜를 말합니다. 대전제가 있습니다. 내가 너희를 인도하여 냈으므로 율법을 지키라고 합니다. 구원해 놓고 율법을 지키라고 합니다. 율법을 지키면 구원한다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사람이 되었으니 약속을 지킵니다. 사랑의 마음으로 율법을 지키는 것입니다.

(믿음을 갖기 전에는 율법에 갇힌 바 됩니다.)

23절을 보십시오. “믿음이 오기 전에 우리는 율법 아래에 매인 바 되고 계시될 믿음의 때까지 갇혔느니라”

믿음의 시대가 오기 전에는 우리가 율법의 감시를 받았으며 믿음이 나타날 때까지 갇혀 있었습니다. 그러나 믿음이 오면 율법에 갇혀 있는데서 해방됩니다. 믿음은 은혜요. 축복입니다. 믿어야 잘 자고 편안하고 새로운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의심할 수밖에 없잖아 하지만 의심은 병입니다. 믿음은 선물입니다.
사사건건 의심하는데 어떻게 합니까? 남편을 믿으면 늦게 들어와도 사고가 났나 걱정합니다. 남편을 못 믿으면 어디서 노닥거리더니 어제 밤 꿈이 이상하더니 전화가 끊어지면 그렇게 되었다고 합니다. 들어오면 썅하고 말합니다. 의부증, 의처증은 고치지 못합니다. 하나님을 믿는 것은 더욱 그렇습니다. 나를 위해서 지은 십자가를 봅니다. 십자가만 보면 눈물이 납니다. 십자가만 보면 통곡하여 울었습니다. 울면서 성경을 읽습니다. 우는 것은 예수님과 내가 동시성을 갖기 때문입니다. 이 믿음은 선물입니다. 믿어져야 믿는 것이고 믿는 것은 선물입니다.
어거스틴은 말합니다. 그리스도와 관련이 없는 종교는 미신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리스도적인 믿음이 아니면 믿음이 아닙니다. 믿음이 자신에게 있는가 하나님에게서 있는가가 중요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믿습니다. 하고 끝납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믿음이어야합니다. 병이 꼭 나을 것이라고 믿어집니다. 믿음을 가지면 이대로 죽어도 좋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으로 가득차면서 몸이 뜨거워집니다. 그러면 병도 낫게 됩니다. 계시적인 믿음이 다릅니다. 믿음의 속성에 문제가 있습니다.
바울이 믿음이 오기 전에 라고 말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가 오셔서 예수님을 향한 구원에 이르는 믿음을 오기 전에라는 말입니다 신학적으로 생각하면 은혜 가운데서 은혜로 주시는 믿음, 예수님이 십자가에 돌아가시는 믿음이 오기 전에는 율법 아래 매이게 됩니다. 예수 십자가에 대한 바른 믿음이 오기 전에는 율법의 시대입니다. 죄를 지었으니 사망입니다. 감기만 걸려도 시험만 떨어져도 져주 받아서 그렇다고 합니다. 부인은 남편에게 당신이 예수님을 안 믿고 밖으로 나도니까 재앙이 왔다고 말합니다. 율법에 매여 있습니다. 은혜적인 믿음을 갖지 못하면 율법에 매이고 율법에 갇히게 됩니다. 율법에서 예수님을 보지 못합니다. 율법에 노예가 됩니다.
아주 큰 범죄는 율법에서는 오는 것입니다. 동생이 형님 댁에서 돈을 몰래 가져 나옵니다. 조카가 삼촌을 알아보고 삼촌하고 불렀습니다. 돈은 가지고 나오는 것을 조카가 보았습니다. 삼촌은 조카를 죽였습니다. 도덕적인 가책입니다. 율법이 그 아이를 죽이게 만들었습니다. 율법이 없다면 죽일 수 없습니다. 가책 때문에 죽입니다. 잘못된 것을 회개하지 않을 때 더 큰 범죄를 짓습니다. 큰 범죄는 도덕적인 가책에서 오는 것입니다. 율법에 갇혀서 그렇습니다. 불안과 저주의식에서 오는 것입니다. 사망에 이르게 됩니다. 형벌 의식에서 영혼이 자유함이 없습니다. 그래서 많은 죄를 범하게 됩니다. 내가 잘못하고 원치 않는 죄를 짓습니다. 회개하지 않으면 더 큰 죄를 짓습니다. 믿음을 받아들이기 전에는 율법에 갇힌 바 됩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은혜를 믿으면 이런 율법에서 자유를 얻습니다. 죄를 짓고도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하고 하나님께로 나옵니다. 선을 행하면 하나님이 선을 행할 수 있는 은혜를 주신 것에 감격하게 됩니다.

(율법은 그리스도에게 인도하는 초등교사입니다)

24절을 보십시오. “이같이 율법이 우리를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초등교사가 되어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게 하려 함이라”

율법은 그리스도께서 오실 때까지 우리의 후견인 구실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오신 뒤에는 우리가 믿음을 통하여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게 되었습니다. 초등교사는 하이다아고라고 합니다. 어린애를 인도하는 자라는 뜻입니다. 하이다는 아이를 말합니다. 아고라는 인도하는 뜻입니다. 어린 아이를 인도하는 것이 초등교사라는 말입니다. 옛날 양반들은 어린 아이를 키울 때 어린 아이부터 공부 많이 하고 예절있는 분을 선생으로 두었습니다. 어려서 그 법도를 배웠습니다. 그 가정교사입니다. 왕자든가 귀족에게 두는 선생입니다. 선생은 왕의 아들이든 귀한 아들이든 때립니다. 아이들은 하고 싶은 것이 많습니다. 초등교사는 그것을 하지 말라고 합니다. 어머니는 95%는 하지 말라고 합니다. 아이들이 말을 잘 듣는다면 뭘 하지 말라고 하지 않습니다. 율법은 초등교사와 같습니다. 십계명은 하지 말라는 것은 일곱 가지 입니다. 하라는 것이 세 가지입니다. 부모를 공경하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것이 초등교사입니다. 이것이 율법적인 것입니다. 이것은 부정적인 것에 대해서 말하고 소극적으로 말하는 것입니다. 못된 것을 하지말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수준이 그 정도에 있습니다.
그러나 은혜에 들어오면 하지 말라는 것이 하라는 것으로 바뀝니다. 어거스틴은 하나님은 사랑하고 네 마음대로 하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고 하였습니다. 하지 말라는 것은 우리의 행위를 금하는 것입니다. 우리 인간은 못된 버릇을 가진 것이 있습니다. 나를 내버려두면 어떻게 합니까? 한없이 타락합니다. 율법은 자신을 매질하는 것입니다. 목사님은 새벽 기도하는데 피곤하지 않아요. 자신이 피곤하면 목사도 피곤합니다. 피곤해도 쉬고 싶은 것에 브레이크를 걸어야합니다. 공부도 재미 있을 때도 있고 없을 때도 있습니다. 하다 보면 좋아집니다. 양식이 맛이 없다고 합니다. 자꾸 먹으면 맛이 있어집니다. 좋아서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자신을 바른 길로 길들이는 것입니다. 몽학선생이 우리를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옷을 입었습니다)

25-27절을 보십시오. “믿음이 온 후로는 우리가 초등교사 아래에 있지 아니하도다 너희가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으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기 위하여 세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 입었느니라”

이렇게 믿음의 때가 이미 왔으니 우리에게는 이제 후견인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모두 믿음으로 그리스도 예수와 함께 삶으로써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세례를 받아서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간 우리는 모두 그리스도를 옷 입듯이 마음에 영접하였습니다. 세례는 결혼식과 같습니다. 세례는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사람으로 인침을 받는 것입니다 공증인을 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로 옷 입었다는 것입니다.
옷은 간단하지 않습니다. 노예는 옷이 없었습니다. 동물과 같이 취급하였습니다. 노예는 옷도 신발도 없습니다. 옷을 입으면 신분이 달라집니다. 까만색과 밝은 색이 있는 것은 왕만 입는 것입니다. 중국에서 노란색과 빨간색은 왕이 입는 것입니다. 옷은 신분 인격 운명입니다. 새로운 존재입니다. 그리스도의 사람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신부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것입니다. 아주 중요한 의미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양반이 상민의 딸을 사랑합니다 평민이 귀족과 결혼합니다. 그러면 평민이 귀족이 됩니다. 그리스도의 사람이 되었다 그리스도의 운명, 그리스도의 신분이 되었다고 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평등합니다)

28,29절을 보십시오.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 너희가 그리스도의 것이면 곧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약속대로 유업을 이을 자니라”

유다인이나 그리스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아무런 차별이 없습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성도들은 모두 한 몸을 이루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에게 속했다면 우리는 아브라함의 자손이며 따라서 약속에 의한 상속자들입니다 우리는 모두가 평등합니다. 옛날에는 모든 사람이 하나가 아닙니다. 여자가 사람이냐 아니냐를 가지고 몇백년 토론하였습니다. 회교는 그렇습니다. 여자는 남자가 붙어야 합니다. 한 남자가 여러 여자와 결혼할 수 있습니다. 성경은 헬라인이나 모두가 하나라고 말합니다. 완전히 그리스도 안에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모두가 평등합니다. 그리스도에게 속하였다는 것과 그리스로 옷입었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후사가 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 안에 있는 율법)

결론적으로 율법이 있기 전에 언약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언약에 기초하여 에수님을 보내셨습니다. 우리는 언약의 씨이신 예수님을 믿음으로 신앙생활합니다. 율법은 우리를 더욱 예수님께로 인도합니다. 때로는 율법을 지키다 보면 하나님의 은혜를 알게 됩니다. 에수님 안에서 율법을 받아야합니다. 율법을 은혜로 받아야합니다. 모든 율법이 하나님이 나에게 주신 은혜로 보입니다. 우리는 은혜 속에서 율법을 지키고 더 수고해야합니다. 그러면 우리가 예수님 안에서 더욱 성숙할 수 있습니다. 아멘!
갈라디아서 3장 강해 2부 율법을 싸고 있는 언약
갈라디아서 3장 15-갈라디아서 3장 29
요절 갈라디아서 3장 17 내가 이것을 말하노니 하나님께서 미리 정하신 언약을 사백삼십 년 후에 생긴 율법이 폐기하지 못하고 그 약속을 헛되게 하지 못하리라
갈라디아서 3장 강해 이부 끝




번호 제목 작성자 작성일
12 [갈라디아서] 갈라디아서 2장강해 이부 그리스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 오요한 2016-06-27
11 [갈라디아서] 갈라디아서 6장 강해 이부 그리스도의 십자가외에는 자랑할 것이 없다. 오요한 2016-06-27
10 [갈라디아서] 갈라디아서 6장 강해 일부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 오요한 2016-06-27
9 [갈라디아서] 갈리다아서 5장 강해 이부 성령을 따라 행하라 오요한 2011-06-23
8 [갈라디아서] 갈라디아서 5장 강해 일부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하라 오요한 2005-10-01
7 [갈라디아서] 갈라디아서 4장 강해 이부 바울은 애정과 논리로 은혜 신앙을 설득합니다. 오요한 2005-09-30
6 [갈라디아서] 갈라디아서 4장 강해 일부 아들이 종으로 돌아가서는 안 됩니다. 오요한 2005-09-27
5 [갈라디아서] 갈라디아서 3장 강해 이부 율법을 싸고 있는 언약 오요한 2005-09-27
4 [갈라디아서] 갈라디아서 3장 강해 일부 우리를 위해 저주 받으신 예수님 오요한 2005-09-25
3 [갈라디아서] 갈라디아서 2장 강해 이부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오요한 2005-09-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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