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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주의 대학생 선교기관

천안UBF

성경66권강해서

갈라디아서 4장 강해 이부 바울은 애정과 논리로 은혜 신앙을 설득합니다.

작성자 : 오요한
작성일 : 2005-09-30 00:00:00
조회수 : 4,279

문제지풀이(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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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라디아서 4장 강해 이부 바울은 애정과 논리로 은혜 신앙을 설득합니다.
말씀 갈라디아서 4장 12-갈라디아서 4장 31
요절 갈라디아서 4장 15 너희의 복이 지금 어디 있느냐 내가 너희에게 증언하노니 너희가 할 수만 있었더라면 너희의 눈이라도 빼어 나에게 주었으리라

바울은 지금까지 갈라디아 성도들에게 은혜 신앙에서 율법주의의 종으로 돌아가지 말라고 말했습니다. 바울은 오늘 말씀에서도 율법주의에 돌아가지 말라고 계속하여 설득합니다. 사랑으로 설득하고 성경 말씀으로 설득합니다. 우리가 예수님 안에서 자유를 누렸다면 다시 율법주의나 인본주의 신앙으로 돌아가서는 안 됩니다.

(바울은 애정을 가지고 설득합니다.)

12절을 보십시오. “형제들아 내가 너희와 같이 되었은즉 너희도 나와 같이 되기를 구하노라 너희가 내게 해롭게 하지 아니하였느니라”

지금까지 율법주의를 책망하고 지적하였습니다. 이제는 이성에 호소하지 않고 감성적으로 호소합니다. 애정에 호소하여 말합니다. 본래 가졌던 지극한 사랑을 일깨워줍니다. 사랑 속에서 율법주의를 비판합니다. 그들의 신앙을 변화시키려고 합니다. 애정 속에서 그들에게 충고합니다. 가슴이 뜨거워질 때 충고하는 그 말을 쉽게 수용합니다. 사랑의 말이 아니고는 아무리 논리적으로 설명해도 생각만 따라가지 가슴은 따라가지 않습니다.
오늘 본문에 애정에 넘칩니다. 내가 너희와 같이 되는 것이 사랑입니다. 저가 내게 오는 것이 아니라 내가 저에게 가는 것입니다. 성육신적인 사랑입니다. 그리스도의 가슴으로 사랑합니다. 율법 없는 자에게나 율법 있는 자에게나 부자에게나 가난한 자에게나 그와 같아졌습니다. 그것이 사랑입니다. 내가 그와 같아진다면 그도 나와 같아지는 것입니다.
이차 세계대전 때 일입니다. 과부가 삼대독자를 키웠습니다. 군대에서 부상하여 눈도 멀고 귀도 멀었습니다. 의식을 회복하니 어머니를 만나고 쉽다고 말합니다. 어머니가 왔으나 듣지 못합니다. 보지 못합니다. 어머니를 보여 달라고 소리 지릅니다. 옆에 있는 어머니를 이해하지 못합니다. 어머니가 가슴에 안고 젖을 먹였습니다. 그러자 어머니의 사랑을 알고 안심하며 죽었습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내가 너희와 같아지는 것이 사랑입니다. 전에는 내가 너희와 같아졌지만 너희가 나와 같아지기를 원합니다. 이제는 논리적으로 따지지 말라고 합니다. 진정으로 사랑하는 것을 알았다면 율법을 벗어나라고 합니다. 꼭 따져야합니까? 저분이 옳다고 하면 옳은 것입니다. 저분이 믿는 것은 믿는 것입니다.
교회가 부흥할 때입니다. 성도들은 목사를 신뢰하고 존경합니다. 어떤 성도가 와서 다른 교회로 가자고 해도 성도는 안 갑니다. 우리 목사님이 믿는 것을 믿습니다. 다른 교회로 가자고 한 그 사람이 전도관입니다. 전도관이 잘못된 것이 나중에 드러났습니다. 안 간 사람이 자랑스러워집니다.
사도 바울이 말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내가 설명하는 것을 못받아 들이냐 율법주의가 틀렸다면 틀린 것이라는 것입니다. 내가 너희와 같았으니 너희도 나같이 율법에서 자유를 가지라고 합니다. 아직 납득이 안 가는 부분도 언젠가는 될 것이라고 합니다. 언젠가는 확실히 알게 됩니다. 그것을 애정을 가지고 말합니다. 그래서 예전에 사랑의 관계를 상기시킵니다.

(바울을 사랑했던 갈라디아 성도들)

13-14절을 보십시오. “내가 처음에 육체의 약함으로 말미암아 너희에게 복음을 전한 것을 너희가 아는 바라 너희를 시험하는 것이 내 육체에 있으되 이것을 너희가 업신여기지도 아니하며 버리지도 아니하고 오직 나를 하나님의 천사와 같이 또는 그리스도 예수와 같이 영접하였도다”

그리고 갈라디아 성도들이 아는 바와 같이, 바울이 그들에게 처음으로 복음을 전하게 된 것은, 바울의 육체가 병든 것이 그 계기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바울의 몸에는 그들에게 시험이 될 만한 것이 있는데도, 그들은 바울을 멸시하지도 않고, 외면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들은 바울을 하나님의 천사와 같이, 그리스도 예수와 같이 영접해 주었습니다. 이 말씀은 바울이 갈라디아 갈 때에 뜨거운 사랑을 생각나게 합니다.
아들이 가출하였습니다. 한 달만에 찾았습니다. 찾아가보니 지하실에서 자취를 하고 있습니다. 방이 엉망입니다. 냉장고는 아무 것도 없습니다. 방을 청소하고 냉장고에 음식을 가득 채워 놓았습니다. 돌 사진을 붙여 놓았습니다. 아들이 이것을 보았습니다. 이것을 보자 어머니가 자신을 사랑한 것이 떠오릅니다. 어머니 잘못되었습니다. 하고 아들이 돌아왔습니다. 붙잡고 너 죽고 나죽자 해서는 안 됩니다. 돌아온 아들에게 부모의 뜨거운 사랑을 일깨워 주어야합니다. 그때의 일을 생각나게 합니다. 가슴이 뜨거운 부분이 있습니다.
바울은 육체가 약하기 때문에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바울로 말하면 그도 건강하다면 복음을 전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9장 16절에 보면 바울은 복음을 전하지 않으면 화가 있다고 말합니다. 바울이 복음을 전하지 않으면 병이 심해집니다. 견딜 수 없는 육체적인 고통이 있습니다. 정신도 육체도 견딜 수 없습니다. 질병 가운데 복음을 전한 것을 갈라디아 성도들이 알고 있습니다. 이것은 바울을 업신여길 수 있는 것이 됩니다. 저주 받을까봐 화가 임할까봐 전합니다. 바울은 진실합니다. 솔직합니다. 자신의 병을 솔직히 말합니다. 너희들이 나의 연약함을 알고 있다고 말합니다.
그래도 갈라디아 성도들은 바울을 천사와 같이 대접합니다. 약점을 다 알고 있으면서 사랑합니다. 나의 허물 약점을 알고도 사랑합니다. 어느 것으로 비교할 수 없습니다. 그는 육체의 가시가 있습니다. 발작적인 두통이 있다고 합니다. 눈이 좋지 않았다는 말도 합니다. 간질병이 열병이 있었다고 합니다. 이 병을 가지고 복음을 전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입니까? 이 문제에 대해서 너희 믿음을 시험할 만한 것이 있었다고 합니다. 키가 작다고 시험할 만한 것이 아닙니다. 지식이 부족하다고 해서 그런 것이 아닙니다. 결정적인 병이 있습니다.
목사님이 병들어서 밤낮 병원에 갑니다. 시무한지 이년인데 절반은 병원에 갑니다. 목사가 교인을 위해서 기도해야지 교인이 목사를 위해서 기도하느냐는 것입니다. 목사직을 사표냈습니다. 전설에 의하면 바울은 간질이라고 합니다. 악마가 주는 병이라고 합니다. 영적인 병이라고 합니다. 악령이 붙어서 생긴 병이라고 합니다. 쓰러져서 거품을 물고 뒹굴다가 일어납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것을 보고 시험에 듭니다. 이 병은 오늘은 납득이 안 가지만 나중에는 납득이 간다고 합니다.
갈라디아 성도들은 바울을 천사와 같이 그리스도와 같이 영접하였습니다. 그 당시에 있었던 뜨거운 사랑을 상기시킵니다. 고마웠던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내가 권면하는 말을 왜 귀담아 듣지 않느냐고 합니다. 만해 한용운 시입니다. 당신의 백발을 사랑합니다. 눈물도 사랑합니다. 죽음도 사랑합니다. 젊었다고 건강하다고 사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병들어도 실수해도 사랑합니다. 사랑은 허다한 허물을 덥습니다. 베드로전서 4장 8절입니다. 그렇게 갈라디아 성도들은 바울을 사랑하였습니다. 천사와 같이 그리스도와 같이 바울을 대하였습니다.

(나를 사랑하였으니 나의 말을 들으라)

15,16절을 보십시오. “너희의 복이 지금 어디 있느냐 내가 너희에게 증언하노니 너희가 할 수만 있었더라면 너희의 눈이라도 빼어 나에게 주었으리라 그런즉 내가 너희에게 참된 말을 하므로 원수가 되었느냐”

그런데 여러분의 그 감격이 지금은 어디에 있습니까? 바울은 갈라디아 성도들에게 증언합니다. 여러분은 할 수만 있었다면, 여러분의 눈이라도 빼어서, 내게 주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바울이 진실을 말한다고 해서 나를 원수로 여기는 것입니까? 갈라디아 성도들은 초기에 할 수 있으면 눈이라도 빼어주고자 하였습니다. 바울이 눈이 안 좋습니다. 별로 책도 안 보는 사람은 눈이 좋습니다.
바울은 갈라디아 성도들이 바울을 그렇게 사랑한다고 믿고 있다고 합니다. 성도들의 사랑을 받아들이는 바울의 마음이 행복합니다. 어려움 당하면 도와줄 사람이 많습니다. 내가 어려움 당하면 나를 도울 사람 희생할 사람 많습니다. 그런 사람이 없다고 말해서는 안 됩니다. 희생할 사람이 많다고 말해야합니다. 그 사람이 행복할 사람입니다. 나는 당신의 사랑을 믿고 있습니다고 말해야합니다. 사랑이 가득한 충고는 갈라디아 성도들의 신앙을 바르게 인도하였습니다. 너희가 나를 그렇게 사랑하였으니 내 말을 들으라고 합니다. 바울이 참된 말을 하는데 나를 원수로 여기느냐고 합니다. 바울을 사랑하는 것을 믿으니 사랑하는 사람의 말로 복음을 들으라고 합니다.

(율법주의자들도 열심을 냅니다.)

17-18절을 보십시오 “그들이 너희에게 대하여 열심 내는 것은 좋은 뜻이 아니요 오직 너희를 이간시켜 너희로 그들에게 대하여 열심을 내게 하려 함이라. 좋은 일에 대하여 열심으로 사모함을 받음은 내가 너희를 대하였을 때뿐 아니라 언제든지 좋으니라”

율법주의 사람들이 갈라디아 성도들에게 열성을 보이는 것은 결코 선의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성도들을 바울에게서 떼어내어 성도들로 하여금 율법주의자들에게 열성을 품도록 하려는 술책입니다. 그들이 좋은 동기로 여러분에게 열성을 보인다면야 얼마나 좋겠습니까? 바울이 성도들과 함께 있을 때뿐만 아니라 언제나 좋은 동기로 열성을 보였으면 좋겠습니다. 우리의 복음은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는 것입니다. 바울은 율법과 은혜의 신앙의 차이점을 가르쳐줍니다. 율법 신앙은 처음에는 열심을 내나 끝이 은혜롭지 못합니다. 율법주의자가 더 열심을 냅니다. 그들은 열심히 있으나 서로를 이간질시킵니다.
은혜 중심의 신앙은 율법 중심의 신앙과 다릅니다. 율법과 은혜의 관계서 은혜가 근본이요. 본래적이고 영원합니다. 율법은 은혜로 은혜되게 하는 것입니다. 율법은 참 은혜의 사람이 되게 하기 위해서 있습니다. 율법은 우리를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고 있습니다. 은혜는 율법을 사랑으로 받게 합니다. 은혜 속에서 율법을 행해야 율법은 진리가 됩니다. 바울은 은혜와 율법의 관계를 자세하고 놀랍게 설명합니다. 우리는 율법에 속한 자냐 은혜에 속한 자냐는 것을 물어야합니다. 우리는 은혜로 열심을 내야합니다. 이것은 좋은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루기까지 해산의 수고를 합니다.)

19,20절을 보십시오. “나의 자녀들아 너희 속에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루기까지 다시 너희를 위하여 해산하는 수고를 하노니 내가 이제라도 너희와 함께 있어 내 언성을 높이려 함은 너희에 대하여 의혹이 있음이라”

바울은 갈라디아 성도들에게 그리스도의 형상이 이루어지기까지 해산의 수고를 하고자 합니다. 언성을 높여 율법주의를 회개하고 은혜 신앙으로 돌아가라고 합니다. 다시 그들이 믿음의 사람 은혜의 사람이 되기를 원합니다. 바울은 그들에게 어머니같은 사랑으로 해산의 고통을 겪으며 말합니다. 바울은 어머니의 사랑으로 그들이 다시 은혜 신앙으로 돌아가도록 말합니다. 율법주의에 있는 사람을 은혜의 사람으로 만드는 것은 많이 힘든 일입니다. 마치 이단에 빠진 자를 다시 복음신앙으로 데리고 오는 것처럼 어렵습니다. 해산의 고통이 따릅니다. 포기하고 싶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이들이 다시 은헤 신앙을 갖기까지 고통을 인내하면서 그들을 돕고 있습니다. 바울은 역사적인 사건을 통해서 비유로 말합니다. 율법에 속한 자와 은혜에 속한 자가 어떤 운명을 가지고 있는지 말합니다.

(이삭은 약속을 따라서 난 아들입니다.)

21-23절을 보십시오. “내게 말하라 율법 아래에 있고자 하는 자들아 율법을 듣지 못하였느냐 기록된 바 아브라함에게 두 아들이 있으니 하나는 여종에게서, 하나는 자유 있는 여자에게서 났다 하였으며 여종에게서는 육체를 따라 났고 자유 있는 여자에게서는 약속으로 말미암았느니라”

율법으로 살기를 원하는 사람들에게 바울은 한 가지 물어 봅니다. 여러분은 율법을 들어보지 못했습니까? 바울은 율법서인 모세오경에 있는 기록을 말합니다. 아브라함이 아들 둘을 두었는데 하나는 여종의 몸에서 났고 하나는 종이 아닌 본부인의 몸에서 났습니다. 여종에게서 난 아들은 인간적인 육정의 소생이었고 본부인에게서 난 아들은 하느님의 약속으로 얻은 아들이었습니다. 바울은 애정으로 설명하다 이제는 역사적으로 설명합니다.
이에치 카는 정보를 아는 것이 역사가 아니라고 말합니다. 원인을 연구하는 것이 역사라고 하였습니다. 왜 이런 일이 있었느냐는 것입니다. 나라가 망했다 왜 망했느냐 경제가 실패했다 왜 실패했느냐 실패를 반복하지 말아야합니다. 공부를 많이 해본 사람들이 먼저 실수를 반복하지 않습니다. 공부를 통하여 경험하였습니다. 우리는 역사를 연구하면서 원인을 연구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오늘 나에게 주는 의미가 무엇이냐는 것입니다. 성경은 수천년 전에 기록된 것입니다. 왜 이런 일이 있었느냐 원인 연구를 해야합니다. 오늘 나에게 무슨 의미를 가지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앞차가 사고 났으면 뒷차는 그것을 보고 사고 나지 말아야합니다. 앞사람이 넘어지면 뒷 사람은 넘어지지 말아야합니다.
사도 바울은 아브라함의 가정에 있었던 일을 놀랍게 연구하여 설명합니다. 너무 너무 감동스럽게 말합니다. 사람들을 바울을 보고 종교적인 천재라고 합니다. 우리도 알 수 없는 말을 합니다. 고인이 된 목사님은 큰 소리로 성경책을 읽습니다. 무릎을 치면서 참 잘 썼다고 합니다. 감동이 됩니다. 이천년 전에 이렇게 쓸 수 있느냐고 합니다.
사라와 하갈의 이야기는 알레고리라고 합니다. 비유는 알레고리와 다릅니다. 알레고리는 우화라는 말입니다. 내용은 역사적인 사건입니다. 이 사건이 있었고 이 사건의 의미를 부여하는 것입니다. 좀더 높이 올라가면 우리에게 말씀하시기 위해서 계시적인 사건으로 주셨습니다. 우리에게 교훈을 주시기 위해서 계시적인 의미로 해석합니다. 만들어진 이야기가 아닙니다. 사건 자체입니다. 계시적인 의미로 말씀을 주셨습니다. 역사적인 사건이 말하는 바가 무엇입니까?
아브라함과 본처 사라의 아들 이삭과 후처 하갈의 아들 이스마엘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계집종 하갈과 아이 이스마엘을 내어쫓으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땅과 자식을 약속으로 주십니다. 흉년이 되어도 약속의 땅을 지켜야합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농사가 안 된다고 가나안 땅을 떠나서 애굽에 가는 실수를 합니다. 자식을 준다고 하였는데 십년을 기다렸습니다. 사라가 단산하게 되니 다른 방법을 쓰고자 합니다. 하갈을 첩으로 주어 이스라엘을 낳습니다. 하갈이 사라를 무시합니다. 사라는 아브라함에게 원망합니다. 사라가 일을 꾸며내고 아브라함에게 나쁘다고 합니다. 하나님은 이스마엘은 편법으로 낳은 아들이므로 아브라함의 자식이 아니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허락을 받고 하나님의 약속에서 이루어진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에게는 누구 씨냐가 중요하지 않습니다. 약속했느냐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삭은 하나님이 약속하시고 그 약속하신 것에 따라서 태어났습니다. 그러나 인간적인 방법으로 얻은 이스마엘은 약속의 자녀가 아닙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음으로 살았으면 이스마엘은 태어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완전히 신뢰하지 않아서 이스마엘이 태어납니다. 필요악입니다. 은혜에 서 있지 않으면 은혜를 잊어버립니다. 사도 바울이 설명합니다. 하나는 사라에서 태어난 약속의 자녀입니다. 다른 하나는 육체의 정욕으로 태어난 자식입니다.

(이삭은 은혜의 자녀입니다.)

24-26절을 보십시오. “이것은 비유니 이 여자들은 두 언약이라 하나는 시내 산으로부터 종을 낳은 자니 곧 하갈이라 이 하갈은 아라비아에 있는 시내 산으로서 지금 있는 예루살렘과 같은 곳이니 그가 그 자녀들과 더불어 종 노릇 하고 오직 위에 있는 예루살렘은 자유자니 곧 우리 어머니라”

사라와 하갈은 비유로 한 말인데 그 두 여자는 두 계약을 가리킵니다. 하나는 시나이 산에서 나와서 노예가 될 자식들을 낳았습니다. 그것이 하갈입니다. 하갈은 아라비아에 있는 시나이 산을 가리키는데 그곳은 지금의 예루살렘에 해당하는 곳입니다. 현재 예루살렘은 그 시민들과 함께 종노릇을 하고 있으니 말입니다. 그러나 하늘의 예루살렘은 자유인이며 우리 어머니입니다.
바울은 여기서 생각합니다. 이삭은 은혜의 자녀입니다. 성령을 좇아났다고 말합니다. 이스마엘은 인간적인 것입니다. 인간의 실수로 태어난 것입니다. 오늘날도 보면 자녀가 둘이 있습니다. 적자가 있고 서자가 있습니다. 서자야 말로 고통스럽습니다. 일본의 목사 가가야도는 첩의 아들로 서자입니다. 그는 슬프게 살아갑니다. 그는 예수님 믿고 하나님의 자녀라고 삽니다. 서자는 태어나면서 불행합니다. 원하는 자녀나 원치 않는 자녀냐는 것입니다. 정당한 방법이냐 편볍이냐는 것입니다. 술이 만취되어 태어나면 유전자의 문제가 있습니다. 알콜중독의 유전입니다. 자녀의 입장에서는 원치 않는 자녀를 낳았느냐는 것입니다. 자녀는 기도하면서 태어나야합니다. 몰론 원치 않게 태어나도 가가야고처럼 예수님을 믿으면 변화됩니다. 그런 변화가 없으면 억지로 낳은 자녀는 억지로 키웁니다. 자라는 동안에 너는 왜 태어나서 말썽이냐고 말하는 것과 너를 낳기 위해서 십년을 기도했다고 하는 것은 다릅니다.
이삭은 기다리다가 약속으로 말미암은 성령의 자녀가 낳습니다. 그러나 이스마엘은 낳고 나서 후회가 많습니다. 나중에 이스마엘을 내어쫓습니다. 이삭과 이스마엘은 정신적으로 영적으로 언약적으로는 전혀 다릅니다. 생명의 본래성이 무엇이냐는 것입니다. 내가 어떻게 태어났느냐는 것이 중요합니다. 생명의 문제는 아주 중요합니다. 하나님은 오묘하게 역사합니다. 이삭은 메시야의 조상이 됩니다. 이스마엘은 어떻게 됩니까? 하나님은 하갈에게 큰 민족의 조상이 된다고 합니다. 아랍이 이스마엘의 후손입니다. 이스마엘은 들에서 자랍니다. 사도 바울은 이 문제를 놓고 이삭을 은혜의 대표자로 이스마엘을 율법의 대표자로 말합니다. 이스마엘을 율법의 대표라고 합니다.

(은혜의 자녀가 더 많습니다.)

27절을 보십시오. “기록된 바 잉태하지 못한 자여 즐거워하라 산고를 모르는 자여 소리 질러 외치라 이는 홀로 사는 자의 자녀가 남편 있는 자의 자녀보다 많음이라 하였으니”

성서에 이런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즐거워하여라. 아기 못 낳는 여인이여, 소리 높여 외쳐라. 해산의 고통을 모르는 여인이여, 홀로 사는 여인의 자녀가 남편 있는 여인의 자녀보다 더 많으리라." 바울은 이사야 54장 1절을 인용하여 말합니다. 잉태하지 못하는 자와 산고를 모르는 자는 사라를 말합니다. 그에게 즐거워하고 외치라고 말합니다. 이사야는 사라를 남편없이 홀로 된 자라고 말합니다. 아브라함이 남편이지만 아브라함의 힘으로 낳은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힘으로 낳은 것입니다. 아멘! 이것이 놀라운 것입니다. 하나님의 힘으로 사라가 자식을 낳았기 때문에 사라는 많은 자식을 낳습니다. 그를 통해서 이스라엘이 이루어지고 새 이스라엘이 이루어집니다. 하늘의 뭇별처럼 많은 사람이 예수님을 믿고 믿음의 후손이 됩니다. 이것이 은헤의 역사고 이것이 믿음의 역사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은헤 속에서 믿음을 가질 때 하나님이 친히 일하십니다. 우리는 일한 것이 없는데 하나님은 일한 것보다 더욱 놀라운 역사를 이루어주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을 믿어야 합니다.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을 믿어야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믿어야합니다. 우리를 위해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에수님을 믿어야합니다. 성령님을 믿어야합니다. 시기하기까지 사모하시는 성령님을 믿어야합니다. 그럴 때 주님은 감동하십니다. 놀라운 역사를 이루십니다. 은혜의 역사를 이루십니다. 우리가 한 일보다 더 많은 것을 주십니다. 하늘의 별처럼 바다의 모래처럼 번성하게 하십니다.

(율법주의자를 쫓아내야 합니다.)

28-31절을 보십시오. “이삭과 같이 약속의 자녀라 그러나 그 때에 육체를 따라 난 자가 성령을 따라 난 자를 박해한 것 같이 이제도 그러하도다 그러나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냐 여종과 그 아들을 내쫓으라 여종의 아들이 자유 있는 여자의 아들과 더불어 유업을 얻지 못하리라 하였느니라 그런즉 형제들아 우리는 여종의 자녀가 아니요 자유 있는 여자의 자녀니라”

갈라디아 성도들은 이삭과 같은 약속의 자녀들입니다. 그러나 그 때 육정으로 난 자식이 성령으로 난 자식을 박해하였는데 지금도 꼭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성서에 무엇이라고 하였습니까? "여종과 그의 자식을 쫓아내어라. 종의 자식은 결코 본자식과 같은 상속자가 될 수 없다." 하지 않았습니까? 갈라디아 성도들은 여종의 몸에서 난 자녀가 아니라 자유인의 몸에서 난 자녀입니다. 육체로 난 자가 성령으로 난 자를 핍박합니다. 율법주의자를 쫓아내야합니다. 이스마엘은 이삭보다 열네 살 위에 있습니다. 이삭이 잘못하면 이스마엘이 쥐어박습니다. 이삭은 이스마엘에게 핍박을 받습니다. 사라는 기분이 나쁩니다. 사라는 아브라함에게 이스마엘을 내어쫓으라고 합니다. 고민하는 아브라함에게 하나님은 다시 사라의 말을 들어서 이스마엘을 쫓아내라고 합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이 하갈과 이스마엘을 내어쫓습니다. 육체로 난 자가 성령으로 난 자를 핍박합니다. 믿음 안에 굳게 서지 못하면 이스마엘의 핍박을 받습니다. 오늘도 믿음 생활하는 자가 성숙하지 못하면 율법주의자에게 핍박을 받습니다. 흔들립니다.
믿음이 약한 분은 율법주의자에게 핍박을 받습니다. 우상의 제물을 먹는 것이 문제가 됩니다. 믿음이 성숙하면 우상제물을 먹을 수 있습니다. 믿음이 약한 사람은 마음에 죄책감이 있습니다. 믿음이 약하여 흔들립니다. 믿음이 굳게 서면 율법주의 시험에 빠지지 않습니다. 은혜 안에 성장하면 자유하게 됩니다. 아프면 누가 찾아가서 한 마디 합니다. 죄지었다고 비밀한 죄가 있어서 병이 났다고 합니다. 욥의 친구들과 같습니다. 이것이 율법주의입니다. 그러나 은헤 신앙은 말합니다. 병들었으면 하나님의 사랑이구나 쉬게하구나 하면 됩니다. 누가 한마디 하면 흔들립니다. 이것이 육체를 따라서 난 자를 핍박합니다. 이삭이 어려서 그렇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런 율법주의 자의 말을 무시해야합니다. 우리 마음 속에 율법주의를 쫓아내야합니다. 우리는 이제 은헤 신앙 안에 들어갔습니다. 다시는 율법주의로 돌아가서는 안 됩니다. 이제는 믿음으로 살아야합니다. 온전히 은혜 속에서 살아야 합니다. 아멘!
갈라디아서 4장 강해 이부 바울은 애정과 논리로 은혜 신앙을 설득합니다.
말씀 갈라디아서 4장 12-갈라디아서 4장 31
요절 갈라디아서 4장 15너희의 복이 지금 어디 있느냐 내가 너희에게 증언하노니 너희가 할 수만 있었더라면 너희의 눈이라도 빼어 나에게 주었으리라
갈라디아서 4장 강해 이부 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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