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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주의 대학생 선교기관

천안UBF

성경66권강해서

고린도전서 11장 강해 2부(17-34) 나를 기념하라

작성자 : 오요한
작성일 : 2007-02-26 00:00:00
조회수 : 2,938

문제지풀이(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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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린도전서 11장 강해 2부 나를 기념하라

말씀 고린도전서 1117-고린도전서 1134

요절 고린도전서 1124 축사하시고 떼어 이르시되 이것은 너희를 위하는 내 몸이니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 하시고

 

고린도전서 10장부터 바울은 교회의 질서 문제를 가르칩니다. 지난 번은 남자와 여자의 질서를 가르쳐주셨습니다.

오늘 말씀은 성만찬 할 때에의 질서를 가르쳐주십니다. 성경은 한 분에 대해서 줄기차게 말씀하십니다. 그 분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한 가지 사건에 대해서 집중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십자가입니다. 십자가는 한 단어로 요약됩니다. 그것은 바로 피입니다. 이 십자가의 피를 기념하는 사건이 바로 성만찬입니다. 예수님은 부활하셔서 우리에게 이 시간도 예수님의 피를 증거하고 계십니다. 이 시간 예수님의 피의 의미를 깨닫는 시간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칭찬하지 이나하노니)

 

17절을 보십시오. “내가 명하는 이 일에 너희를 칭찬하지 아니하나니 이는 저희의 모임이 유익이 못되고 도리어 해로움이라.”

 

사도바울의 표현은 멋이 있습니다. 그냥 책망하노니 하면 되는데 칭찬하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긍정적인 말을 통하여 잘못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모임이 해롭다고 하면 되는데 유익이 되지 못하고 도리어 해롭다고 말합니다. 모임이 유익이 되면 칭찬할 수 있는데 유익이 되지 못하여 칭찬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도 이런 식의 표현을 써도 좋을 것입니다. 너 잘못했어. 하지 말고 너 잘한 것이 아냐, 음식 맛이 너무 짜 하지 말고 적절히 맛있는 것은 아니야 너 게을러 하지 말고 부지런하지 않아. 너 공부가 너무 못했어. 하지 않고 너 공부 잘한 것은 아니야. 얼마나 상대방을 배려하는 말투입니까? 그러면 고린도 성도들의 모임이 칭찬 받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분쟁을 대강 믿노니)

 

18절을 보십시오. “첫째는 너희가 교회에 모일 때에 너희 중에 분쟁이 있다 함을 듣고 대강 믿노니

 

바울이 칭찬하지 못하는 이유는 그들이 교회에 모일 때에 분쟁이 있기 때문입니다. 잘 사는 사람과 못하는 사람이 분쟁하였습니다. 사회적으로는 항상 분쟁이 있습니다. 인종 간에 갈등이 있습니다. 민족 간에 갈등이 있습니다. 지역 간, 계층 간의 갈등이 있습니다. 이익 집단들끼리의 갈등이 있습니다. 우리나라는 남북의 갈등이 있습니다. 남한에서는 동서간의 갈등이 있습니다. 호남과 영남의 갈등이 심각합니다. 그리고 보수와 진보의 갈등이 있습니다. 같은 보수 안에서도 박근혜와 이명박을 따르는 사람들의 갈등이 있습니다. 같은 안서동에서도 대림 아파트 사는 사람들과 고운 아파트 사람들과 개인주택에 사는 사람들 사이에 갈등이 있습니다.

문제는 이런 갈등이 교회에서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이 문제를 그렇게 부정적으로 보지 않습니다. 사도 바울은 그들의 분쟁을 대강 믿는다고 하였습니다. 대강은 자세한 것은 아니고 핵심만 믿는다는 것입니다. 그들의 분쟁을 인정하지만 전적으로 믿지는 않는다는 말입니다. 사단은 부정적인 말을 들으면 작은 것을 전부로 확대해서 생각합니다. 그러나 믿음으로 사는 사람은 부정적인 것을 그렇게 크게 보지 않습니다. 부정적인 것은 대강 그렇게 있다고 보면 됩니다.

 

(옳다 인정함을 받는 사람이 나타나리니)

 

19절을 보십시오. “너희 중에 편당이 있어야 너희 중에 옳다 인정함을 받은 자들이 나타나게 되리라.”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의 분쟁을 통해서 옳다 인정함을 받은 자들이 나타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잘 사는 사람들과 못 사는 사람들의 분쟁하는 것을 통하여 어떻게 애찬과 성만찬을 해야 옳은가 하는 것이 나타나게 됩니다. 바울은 부정적인 것을 통해서 긍정적인 것을 보고 있습니다. 바울은 그늘을 통하여 그늘을 만드는 태양을 바라봅니다. 세상에 있는 것은 모두 양면성이 있습니다. 다른 사람들과 사교성이 부족한 사람은 강직한 성격을 가진 사람이 많습니다. 우유부단한 사람은 온유하고 겸손한 사람이 많습니다. 골이 깊은 곳에 산이 높고 호랑이가 삽니다. 외양간이 더러운 곳에 소가 삽니다. 집안이 시끌법적한 곳에 애들이 삽니다. 우리 가운데 사단의 역사가 있을 때는 더 큰 성령의 역사가 있습니다.

이렇게 우리는 부정적인 것을 통하여 긍정적인 것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지난 주에 독서 심포지움을 한 강영우 박사는 소경이었기 때문에 캄캄한 밤에도 책을 읽을 수 있습니다. 소경이기 때문에 복지 분야에서 미국의 차관이라는 지위까지 올라 갈 수 있었습니다. 그가 소경이 아니었다면 그는 시골에서 농사짓는 생활을 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강박사나 그 자녀들은 강박사가 소경으로 사는 것에 대한 긍지와 자랑이 있습니다. 그러면 이들의 모임에서 어떤 분쟁이 있었을까요?

 

(애찬시의 문제)

 

20,21절을 보십시오. “그런즉 너희가 함께 모여서 주의 만찬을 먹을 수 없으니 이는 먹을 때에 각각 자기의 만찬을 먼저 갖다 먹으므로 어떤 이는 시장하고 어떤 이는 취함이라.”

 

본문에 보면 주의 만찬과 자기 만찬이 나옵니다. 주의 만찬은 성만찬이고 자기 만찬은 애찬입니다. 이들은 성만찬을 하기 전에 애찬을 하였습니다. 애찬은 성만찬을 하기 전에 집에서 음식을 가지고 와서 함께 먹는 것입니다.

애찬은 eating fellowship 을 나누는 것입니다. 식사를 하면서 사랑의 교제를 나눌 수 있습니다. 사랑의 교제는 식사할 때가 가장 좋습니다. 하지만 고린도에서는 이런 애찬으로 인하여 더 분쟁이 생겼습니다. 부자들은 비싼 차를 타고 화려한 옷을 입고 교회에 왔습니다. 그들은 맛있는 갈비와 값비싼 포도주를 가지고 와서 배부르고 취할 만큼 먹었습니다.

그러나 가난한 사람들은 집에서 먹다 남은 찬밥을 가지고 김치 하나만을 가지고 먹었습니다. 어떤 사람은 컵라면을 가지고 와서 먹든지 아니면 원치 않게 금식하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이로 인해서 가난한 사람들은 소외감을 느꼈습니다.

부자들은 가난한 자들을 멸시하였습니다. 멸시를 받은 가난한 사람들은 열등감을 가지고 잘 사는 사람을 삐딱하게 대했습니다. 사랑으로 하나가 되어야 하는 애찬이 오히려 갈등의 골을 깊게 했습니다.

 

(사랑의 공동체 교회)

 

22절을 보십시오. “너희가 먹고 마실 집이 없느냐? 너희가 하나님의 교회를 업신여기고 빈궁한 자들을 부끄럽게 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무슨 말을 하랴? 너희를 칭찬하랴? 이것으로 칭찬하지 않노라.”

 

부자들이 가난한 성도를 업신여기는 것은 하나님의 교회를 업신여기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업신여기는 것이요. 예수님을 부끄럽게 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배가 고프면 집에서 먹고 와야 합니다. 교회에서 먹을 때는 다른 사람들이 다 모일 때까지 기다려야 합니다.

함께 식사를 해야 합니다. 서로 사랑의 교제를 나누어야 합니다.(33,34) 예수님 안에서는 잘 사는 사람이나 못사는 사람이나 똑같은 사람입니다. 예수님 안에서는 박사나 고등학교만 졸업한 사람이나 모두가 하나입니다. 양반이나 상민이나 천민이나 하나입니다. 예수님 안에서는 사장이나 경비원이나 하나입니다. 모두가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사랑의 공동체를 만들어야 합니다. 그럴 때 얼마나 아름답습니까?

 

(주님이 말씀하신 성만찬)

 

23절을 보십시오. "내가 너희에게 전한 것은 주께 받은 것이니 곧 주 예수께서 잡히시던 밤에 떡을 가지사

 

사도바울은 성만찬 예식은 주님께 직접 받은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사도바울은 최후의 만찬에 참석을 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을 직접 만나보지도 못했습니다. 그런데 주께 받은 것이라고 한 것을 보면 주님께서 직접적으로 계시하여 주신 것을 의미합니다. 성만찬은 주님이 주신 것이므로 절대적인 것입니다.

 

(살이 찢기신 예수님)

 

24절을 보십시오. “축사하시고 떼어 가라사대 이것은 너희를 위하는 내 몸이니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 하시고

 

첫째, 우리는 성만찬을 통하여 예수님의 몸을 먹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떡을 떼어 주시며 이것은 너희를 위하여 주는 내 몸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떡을 먹으며 예수님을 기념하라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떡을 먹는 것은 예수님의 살을 먹는 것입니다. 떡을 뗀다는 말은 떡을 부서뜨린다는 말입니다.

그처럼 예수님은 자신의 몸을 부서뜨렀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에 채찍에 맞으셨습니다. 살점이 떨어졌습니다. 머리에는 가시 면류관이 쓰여지고, 가시가 살을 파고들었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양손과 발목에 못이 박히셨습니다. 허리에는 창으로 찔리셨습니다. 예수님의 살을 먹으라는 것은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신 사랑의 의미를 마음으로 받아들이라는 것입니다.

특히 먹는다는 말은 믿는다는 말을 달리 표현한 것입니다. 왜 믿으라는 말을 먹으라고 말씀하셨을까요? 먹으려면 씹고 위와 장에서 소화를 시켜야 합니다. 내 살과 피를 만드는 것입니다. 그처럼 예수님의 살과 피의 의미를 나의 것으로 깊게 완전히 소화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죄를 담당하심)

 

그러면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몸이 찔리시고 찢기신 의미는 무엇일까요? 베드로 전서 224절에는 말씀하십니다.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저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니,” 이사야 534,5절 말씀입니다.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서 하나님에게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우리는 이 두 말씀을 통하여 살을 먹는다는 의미를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습니다. 우리의 질병의 고통을 담당하셨습니다. 우리의 슬픔을 담당하셨습니다. 우리의 허물을 담당하셨습니다. 담당하셨다는 말은 빚을 대신 갚아 주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은 우리 대신 빚을 갚아 주셨습니다. 죄의 빚, 질병의 빚, 슬픔의 빚, 허물의 빚을 담당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죽으시면서 다 갚으셨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몸을 먹음으로 죄에서 자유를 얻고 질병에서 치료함을 받아 건강해지고 슬픔에서 벗어나 기쁨을 얻고 허물에서 벗어나 강하고 담대한 자가 될 수 있습니다. 요즘에 우울증의 문제가 심각합니다. 우울증으로 많은 사람들이 자살합니다.

현대인들은 많은 질병에 시달립니다. 육신의 질병뿐 아니라 정신적인 질병에 시달립니다. 고난 없이 자란 요즘 세대들은 연악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예수님의 십자가의 몸을 나의 것으로 믿을 때 우리는 힘을 얻을 수 있습니다. 십자가의 몸을 믿을 때 치료함을 받고 건강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분명히 십자가의 고난을 받는 것은 너희를 위해서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더 이상 이런 질병과 슬픔에 시달리지 않아도 됩니다. 우리가 연약할수록 병이 날수록 슬플수록 허물이 있을수록 예수님의 살을 먹어야 합니다.

 

(죄사함의 피)

 

25절을 보십시오. “식후에 또한 이와 같이 잔을 가지시고 가라사대 이 잔은 내 피로 세운 새 언약이니 이것을 행하여 마실 때마다 나를 기념하라. 하셨으니

 

둘째, 우리는 예수님의 피를 마셔야 합니다. 예수님은 피로 새로운 언약을 세우셨습니다. 마태복음에 보면 죄사함을 얻게 하는 새 언약이라고 분명히 말씀하십니다.(26:27,28) 죄사함을 주시고 하나님이 우리의 아버지가 되고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것입니다.

과거에는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 사이에 행위로 언약을 세웠습니다. 순종하면 하나님이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불순종하면 그들의 하나님이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 인간은 심령이 부패하여 하나님의 언약을 어기고 저주를 받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우리는 이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이를 아시고 죄를 지을 때마다 양과 염소의 피를 흘려서 하나님께 나갈 수 있는 길을 예비하셨습니다. 이 길은 일시적으로 번거로웠습니다. 불완전하였습니다.

이제 하나님께서는 새로운 언약을 세우셨습니다. 하나님이 친히 자신의 아들을 보내서 피를 흘리고 예수님을 통하여 죄사함을 주시고 성령과 복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언약은 이스라엘이 출애굽할 때 뿌린 유월절 피에 근거한 것입니다.

이집트에서는 죽음의 재앙이 임했습니다. 하나님은 이들에게 약속을 하셨습니다. 양을 잡아서 피를 문설주에 바르면 그들의 죽음을 면제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죽음의 재앙이 피를 보면 넘어갑니다. 그들의 행위와는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다만 피를 발랐느냐 바르지 않았느냐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의 피를 믿으면 우리는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하는 자녀가 되고 하나님은 우리의 아버지가 되십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기뻐하시고 자랑스럽게 생각하십니다. 예수님의 피는 생명을 말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피를 믿으면 우리에게 성령을 주시고 생명을 주십니다. 우리와 함께 하셔서 하나님을 경외할 수 있는 힘을 주십니다. 예수님의 피는 신비로운 능력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답게 사는 힘을 주십니다. ‘왜 그러냐고 묻지 마세요. 하나님이 그렇게 약속을 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기념하라)

 

예수님은 살과 피를 먹고 마시라고 하면서 나를 기념하라고 두 번이나 말씀하셨습니다. 기념하라는 것은 규칙적으로 기억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의미가 있는 것을 기념일을 정해서 기념합니다. 결혼기념일 생일 광복절 제헌절을 기념합니다.

하나님은 요단강을 건넌 후에 열두 개의 돌을 취하여 요단강을 멈추게 하신 하나님을 기억하게 하셨습니다. 이 하나님이 가나안 땅 정복에 기초가 되었습니다.

다음으로 예수님은 자신에게 향유를 부은 마리아를 복음이 전해지는 모든 곳에서 기념하도록 하셨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를 기념해야 합니다. 우리를 위해서 자신을 다 희생하신 예수님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 가운데 병이 있습니까? 물질 문제가 있습니까? 취업문제가 있습니까? 두려움의 문제가 있습니까? 마음의 죄의 문제가 있습니까? 세상을 사랑하십니까? 십자가의 피를 기억해 보십시오. 그 안에 모든 해답이 들어 있습니다. 십자가의 피로 우리의 모든 문제를 해결하신 것을 볼 때 우리는 모든 문제에서 자유를 얻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경외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피는 마스터키와 같습니다.

 

(주님 오실 때까지)

 

26절을 보십시오. “너희가 이 떡을 먹으며 이 잔을 마실 때마다 주의 죽으심을 오실 때까지 전하는 것이니라

 

우리는 이 떡을 먹으며 잔을 마시며 주의 죽으심을 재림 때까지 전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피를 믿는 사람은 재림하실 때 하나님 나라에 가서 영생 복락하십니다. 예수님의 잔은 고난의 잔입니다. 사약을 내린 잔과 같습니다. 우리가 주님의 살을 먹고 잔을 마신다는 것은 우리도 예수님의 죽음에 참여하겠다는 결단입니다. 여러분은 무엇을 깊이 생각하십니까? 사람입니까? 돈입니까? 그러나 우리는 무엇보다 예수님을 깊이 생각해야합니다. 예수님의 피를 깊이 생각해야합니다. 그러면 그 안에 생명이 있고 구원이 있습니다.

 

(회개한 후에)

 

27절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누구든지 주의 떡이나 잔을 합당치 않게 먹고 마시는 자는 주의 몸과 피를 범하는 죄가 있느니라. 사람이 자기를 살피고 그 후에야 이 떡을 먹고 이 잔을 마실지니"

 

우리는 성만찬을 잘못하면 주님께 죄를 짓는 것입니다. 우리는 성만찬을 하기 전에 먼저 자신의 죄를 회개해야 합니다. 나의 죄를 회개해야 나의 죄를 위해서 살과 피를 주신 은혜를 체험할 수 있습니다. 의로운 심정으로 성만찬을 하면 하나님께 죄를 짓는 것입니다. 성만찬을 할 때는 장난으로 해서는 안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경외심 있게 대해야 합니다.

 

(믿음으로하는 성만찬)

 

29,30절을 보십시오. “주의 몸을 분변치 못하고 먹고 마시는 자는 자기의 죄를 먹고 마시는 것이니라. 이러므로 너희 중에 약한 자와 병든 자가 많고 잠자는 자도 적지 아니하니

 

또한 성만찬을 할 때는 주의 몸을 분변하고 마셔야 합니다. 주의 몸을 분변하여 마신다는 말은 성만찬을 할 때 일반적인 식사를 하듯이 해서는 안 된다는 말입니다. 성만찬을 할 때 이는 주님의 살과 피라는 것을 믿음으로 경외심 행해야 합니다. 성만찬을 제대로 하지 못했을 때에 약한 자와 병든 자와 잠자는 자 곧 죽는 자가 많이 생깁니다. 반면에 성만찬을 제대로 하면 우리가 강해지고 건강하게 되고 장수하게 됩니다.

 

(회개치 않는 자는)

 

31,32절을 보십시오. “우리가 우리를 살폈으면 판단을 받지 아니하려니와 우리가 판단을 받는 것은 주께 징계를 받는 것이니 이는 우리로 세상과 함께 죄 정함을 받지 않게 하려 하심이라.”

 

고린도 성도들이 자신을 살피고 성만찬을 한다면 판단을 받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회개치 않고 함부로 성만찬을 했다면 바울의 책망을 받아야 합니다. 그들이 사도 바울의 책망을 받을 때에 이것을 주님의 책망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지금 책망을 받고 회개하여 바른 자세로 성만찬을 하면 예수님의 재림 시에 세상과 함께 심판을 받지 않습니다. 바르게 성만찬 하는 자를 예수님을 상주십니다.

 

(질서있는 성만찬)

 

결론적으로 우리는 예수님의 살을 먹고 피를 마셔야 합니다. 교회 안에서 질서 있게 성만찬을 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살은 참된 양식이요. 예수님의 피는 참된 음료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흘리신 살과 피를 먹고 마심으로 우리는 새 생명을 얻고 하나님을 경외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에수님의 피를 마심으로 우리의 삶이 건강하고 번성하고 강성하고 왕성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아멘!

 

고린도전서 11장 강해 2부 나를 기념하라

말씀 고린도전서 1117-고린도전서 1134

요절 고린도전서 1124

고린도전서 11장 강해 이부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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