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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주의 대학생 선교기관

천안UBF

성경66권강해서

고린도전서 9장 강해 1부 바울의 자랑(9:1-18)

작성자 : 오요한
작성일 : 2006-07-24 00:00:00
조회수 : 3,013

문제지풀이(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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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린도 전서 9장 강해 1부 바울의 자랑

말씀 고린도전서 91-고린도전서 918

요절 고린도전서 915

 

바울은 8장에서 우상의 제물에 대해서 가르쳤습니다. 우리는 우상의 제물에 대해서 자유한 지식을 가져야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지식은 사랑에 의해서 제재를 받습니다.

바울은 우상의 제물에 대해서 이야기하다가 자신이 사도권을 다 쓰지 않는 것을 자랑합니다. 바울은 사도로서 권리를 쓰지 않는 것을 자랑하며 우상의 제물을 먹을 수 있는 자도 그 권리를 쓰지 말아야함을 함을 말합니다.

사람들은 자식이나 아내를 자랑하면 팔불출이라고 합니다. 자신을 자랑하는 사람은 교만한 사람이라고 합니다. 그 우리에게는 이런 세상적인 자랑은 좋지 않습니다. 우리는 이런 세상적인 자랑이 아닌 높은 하나님 안에서 자랑이 있어야 합니다. 자랑이 있어야 사명을 감당할 수 있고 다른 사람을 위해서 희생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바울의 자랑은 구체적으로 무엇입니까?

 

(바울의 권리)

 

1절을 보십시오. “내가 자유자가 아니냐? 사도가 아니냐? 예수 우리 주를 보지 못하였느냐? 주 안에서 행한 나의 일이 너희가 아니냐?”

 

바울은 먼저 자신이 가진 권리를 말합니다. 사도 바울은 설의법을 써서 자신이 자유자요. 사도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을 보았고 주안에서 전도의 열매가 고린도 성도임을 말합니다. 사도 바울은 자유자입니다. 그는 예수님을 만난 후에 죄에서 자유했고, 죽음에서 자유했고, 율법에서 자유하고, 사람에서 자유하고, 가난과 질병에서 자유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자유를 주십니다. 우리가 부활할 때는 연약한 육신으로부터도 자유를 얻습니다. 우리는 노예가 아닙니다. 그런데 우리 주위에는 노예로 사는 사람이 많습니다. 사람의 노예로 살고, 미움의 노예로 살고, 술과 담배의 노예로 살아갑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믿으면 우리는 이 모든 것에서 자유를 얻습니다. 노예가 해방 받을 때 얼마나 기쁘겠습니까? 우리는 예수님 안에서 이런 자유를 누리는 사람들입니다.

또한 바울은 사도입니다. 하나님 나라에서 우리의 왕이신 하나님이 보내신 사도입니다. 사도는 대사라는 말입니다. 대사의 권위는 보낸 나라의 국력에 따라서 결정됩니다. 국력이 센 국가의 대사가 강한 대사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영원한 나라고 어느 나라보다 강한 나라입니다. 우리의 왕 하나님은 창조주요 전능하신 하나님이시요. 사랑의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사도는 하나님의 권세가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높이고 크게 볼수록 사도의 권위는 커집니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을 가장 높이고 사랑했기 때문에 자신의 사도직에 대한 긍지와 자부심이 대단했습니다.

우리가 말을 듣지 않는 양들을 돌보면서 메뚜기처럼 초라하게 생각하는 것은 겸손이 아니라 죄악입니다. 하나님을 무시하는 사람들이 자신을 초라하게 생각합니다.

그리고 바울은 자신이 주님을 본 것을 자랑합니다. 그는 부활하셔서 해보다 밝은 빛으로 임하신 주님을 보았고 그분을 영접한 후에 성령님을 받았습니다. 그는 부활의 주님을 마음에 소유했습니다. 그의 마음에는 영생이 있었고 하나님 나라가 있었습니다. 그는 주 안에서 행하는 사람이었습니다. 포도나무 되신 예수님께 거하여 항상 열매가 풍성했습니다. 그는 가는 곳마다 풍성한 열매를 맺었습니다. 바울은 소아시아 유럽 로마에 많은 영적열매를 맺었습니다. 고린도 교회도 그 중에 하나입니다.

 

(제자가 사도의 임명장)

 

2절을 보십시오. “다른 사람들에게는 내가 사도가 아닐찌라도 너희에게는 사도니 나의 사도 됨을 주 안에서 인친 것이 너희라.”

 

고린도 성도들은 사도 바울의 사도권을 인정하는 임명장입니다. 그의 사도권은 바울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날 때 주어졌습니다. 예수님이 주신 바울의 사도권은 양들의 변화를 통해서 확증되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당시에 제사장도 선지자도 아니었습니다. 신학교를 나오지도 않았습니다. 12사도도 아니었습니다. 그는 전임 사역자도 아니었고 평신도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를 만나 변화시켰고, 예수님은 그를 이방인의 사도로 임명하셨습니다. 바울은 자신을 통해서 변화된 고린도 성도들이 이런 사도의 임명장이라고 말합니다.

 

(바울의 긍지)

 

사도 바울이 이렇게 사도권을 말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첫째는 사도 바울 자신의 긍지와 자부심을 나타냅니다. 사도바울은 사도로서 긍지와 자부심이 있었습니다. 그는 아그립바 왕 앞에서 죄수의 몸으로 서있을 때에라도 그는 이그립바왕이 자신과 같이 되기를 바란다고 했습니다.

그는 대통령보다 판검사보다 도지사나 장군보다 연예인보다 더욱 사도로서 자긍심이 있었습니다. 세상의 의사나 판사나 국회위원보다도 긍지와 자부심이 있었습니다. 이런 세상의 직업은 생명을 살리지 못합니다. 그러나 사도는 죽어가는 생명을 살릴 수 있습니다. 그는 사도로서 자긍심이 있었기 때문에 여러 환난을 극복하고 복음을 전할 수 있었습니다.

 

(양들을 위한 사도권)

 

둘째는 양들을 위해서입니다. 그들이 사도 바울의 사도권을 인정해야 사도 바울을 통해서 예수님을 믿은 많은 사람들의 믿음이 견고해집니다. 양들이 바울의 사도권을 인정해야 사도 바울을 통하여 계속적으로 은혜를 받을 수 있습니다. 자녀는 부모에 대한 자랑이 있어야 인격이 바로 성장합니다. 학생은 선생님에 대한 자랑이 있어야 성적이 올라갑니다. 양은 목자를 신뢰하고 자랑해야 신앙이 바로 성장합니다. 바울은 고린도 성도들의 믿음을 위해서 자신의 사도권을 주장합니다.

 

(권리를 쓰지 않은 바울)

 

3-6절을 보십시오. “나를 힐문하는 자들에게 발명할 것이 이것이니 우리가 먹고 마시는 권이 없겠느냐? 우리가 다른 사도들과 주의 형제들과 게바와 같이 자매 된 아내를 데리고 다닐 권이 없겠느냐? 어찌 나와 바나바만 일하지 아니할 권이 없겠느냐?”

 

사도 바울은 사도로서 권리를 주장합니다. 사도는 양들이 주는 물질로 먹고 마시는 권이 있습니다. 결혼하여 아내를 데리고 다닐 권한도 있습니다. 한 마디로 말하면 사도는 결혼도 하고 사례금을 받을 권리가 있습니다.

당시 사도의 대표인 게바가 결혼하고 사례금을 받았습니다. 예수님의 동생들도 사례금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사도이지만 이들과 달리 결혼도 하지 않고 평신도로 직장생활을 하고 복음을 전했습니다.

사람들은 바울이 사도가 아니기 때문에 이렇게 사는 줄로 오해했습니다. 목자가 겸손하고 희생적으로 사는 것은 어려운 것입니다. 다른 사람의 종이 되어 섬기는 삶은 어렵습니다.

목자가 자신의 권리를 주장하지 않고 겸손하게 살면 사람들은 그를 존경하는 것이 아니라 무시합니다. 오히려 목에 힘주고 폭력을 쓰는 사람을 싫어하면서도 그런 사람들을 어려워합니다. 여기에 인간의 모순이 있습니다.

마키야 벨리는 이런 인간의 죄악된 속성을 알고 군주론이라는 책을 썼습니다. 그는 군주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폭력을 써야 통치를 잘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그렇게 해야 사람들을 일사분란하게 통솔할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이런 인간의 악한 본성 때문에 착한 사람도 점점 악하게 됩니다. 이것이 우리의 현실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방법은 그런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방법은 힘들고 더디더라도 인격적으로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육신을 입고 오시고 십자가에 죽으신 것은 이런 이유에서입니다.

 

(인간적으로 본 사도의 권리)

 

7,8절을 보십시오. “누가 자비량하고 병정을 다니겠느냐? 누가 포도를 심고 그 실과를 먹지 않겠느냐? 누가 양떼를 기르고 그 양떼의 젖을 먹지 않겠느냐? 내가 사람의 예대로 이것을 말하느냐? 율법도 이것을 말하지 아니하느냐?”

 

사도의 권리에 대해서 사람의 예대로 말합니다. 군사는 입대하면 국가에서 먹을 것 입을 것, 잠자는 것을 책임져 줍니다. 포도나무를 심는 사람은 농사 지은 후에 그 실과를 먹을 수 있습니다. 양떼를 기르면 젖을 먹는 것도 당연한 것입니다. 우리가 양들에게 말씀을 가르치고 그들을 사랑으로 섬기면 그들에게서 물질적인 지원을 받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대부분의 목회자들이 자신과 가족들의 신수비를 받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그것을 욕해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목회자의 생활을 책임져 주지 않는 교회가 있다면 그것을 욕해야 합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사도의 권리)

 

9-11절을 보십시오. “모세 율법에 곡식을 밟아 떠는 소에게 망을 씌우지 말라. 기록하였으니 하나님께서 어찌 소들을 위하여 염려하심이냐 전혀 우리를 위하여 말씀하심이 아니냐? 과연 우리를 위하여 기록된 것이니 밭 가는 자는 소망을 가지고 갈며 곡식 떠는 자는 함께 얻을 소망을 가지고 떠는 것이라. 우리가 너희에게 신령한 것을 뿌렸은즉 너희 육신의 것을 거두기로 과하다 하겠느냐?”

 

이런 사도의 권리는 성경에도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은 율법에 곡식을 밟아 떠는 소에게 망을 씌우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소를 염려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소를 비유하여 주님의 일을 하는 자에 대해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일을 하는 자는 그 일 한 것의 삯을 받을 권리가 있음을 말씀하십니다. 밭을 가는 자나 곡식을 떠는 자는 농사를 져서 추수할 소망을 가지고 하는 것입니다. 목자가 신령한 말씀을 가르치고 양들이 구원을 받도록 도왔습니다. 그렇다면 목자는 양들에게서 물질적인 지원을 받을 수 있는 권리가 있습니다.

 

(물질을 지원받으며 복음 전할 때 문제)

 

12절을 보십시오. “다른 이들도 너희에게 이런 권을 가졌거든 하물며 우리일까 보냐? 그러나 우리가 이 권을 쓰지 아니하고 범사에 참는 것은 그리스도의 복음에 아무 장애가 없게 하려 함이로라.”

 

복음을 전하지 않은 다른 사도들도 고린도 성도들에게 지원을 받았습니다. 그렇다면 복음을 전한 바울이 이들에게 지원을 받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것입니다. 그런데도 사도바울이 지원을 받지 않은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는 그리스도의 복음에 장애를 없게 하기 위해서 지원을 받지 않았습니다. 복음은 그리스도의 복음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복음입니다. 은혜의 복음입니다. 그리스도가 복음입니다. 그리스도가 우리의 죄를 사하셨고 우리의 슬픔과 가난과 질병을 가져가셨습니다. 그리스도가 우리를 하나님 나라로 인도하셨습니다. 우리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받습니다.

그런데 사도가 물질적인 지원을 받을 때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데 장애가 될 수 있습니다. 자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는 복음을 순수한 마음으로 전합니다. 그리고 물질적인 지원을 받습니다. 이것은 너무나 자연스럽습니다.

그런데 세상 사람들이 볼 때는 복음을 전하는 것이 물질적인 유익을 얻기 위해서 전한다고 생각합니다. 교회에서 복음을 전하는 것도 하나의 기업이라고 생각합니다. 세상적으로 자신의 유익을 위해서 열심히 일을 하여 사업을 확장 시키듯이 복음 사업을 확장 시킨다는 것이라고 합니다. 한마디로 말해서 복음을 전하는 이유가 돈 벌기 위해서라고 말합니다. 자식들을 유학 보내고 공부시키기 위해서 세상일을 하듯이 열심히 주의 일한다고 비방을 합니다.

 

(바울이 평신도로 산 이유)

 

여기서 갈등이 있습니다. 우리가 처음 복음을 알고 복음을 전하는 것은 구원의 은혜가 크기 때문입니다. 복음이 너무나 좋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하나의 직업화되다 보면 우리는 거기에서 자신의 유익을 추구하게 됩니다. 목회자는 자신의 유익을 위해서 열심히 일하게 됩니다.

카톨릭 교회가 타락한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복음의 순수성이 없어지고 자신의 이해관계와 얽혀 복음을 전합니다. 이렇게 목회자가 이익을 얻는 수단이 되면 목회자는 욕을 얻어먹습니다. 잘못하면 목회자가 십자가의 원수가 되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을 수도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런 딜레마를 해결하기 위해서 순수하게 평신도의 길을 가며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그는 복음을 전하는데 장애가 될까봐 결혼도 하지 않았습니다.

바울의 이런 모습은 바로 예수님의 모습을 배운 것입니다. 예수님도 하나님으로서 권리가 있었습니다. 예수님을 이런 하나님으로서 특권을 버리고 사람의 모습으로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예수님도 이 세상에 오셔서 결혼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인간의 종이 되어 십자가에 죽기까지 인간을 섬기셨습니다. 이렇게 하신 이유는 복음이 장애를 받지 않고 전파되게 하시기 위해서입니다.

 

(내가 평신도 목자가 된 이유)

 

이 말씀은 나에게 매우 의미 있는 말씀입니다 저는 과거 예수님을 믿기 전에 교회에 대해서 부정적이었습니다. 나는 교회라는 곳도 결국은 이익을 추구하는 집단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교회가 왜 열심히 전도할까요? 교회에서 왜 각종 헌금을 만들었을까요? 나는 당시에 성도들의 돈을 수탈하기 위해서라고 생각하였습니다.

물론 이런 생각은 잘못된 생각이지요? 하지만 당시에 나의 생각이 그랬습니다. 그런데 대학교 이 학년 때 고린도 전서 일용할 양식 말씀을 공부하는데 바울이 평신도로 복음을 전한 것을 읽으며 신선한 충격을 받았습니다. 현실에서는 이런 사람을 볼 수 없는데 성경에는 평신도 목자가 있다는 것은 매우 감명을 받았습니다.

나는 그때 나도 사도 바울과 같은 평신도 목자가 되고자 서원하였습니다. 하나님은 나의 서원을 받으시고 나를 지금까지 23년 동안 평신도 목자로 인도하셨습니다. 물론 평신도 목자에 어려움도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일과 직장 일을 동시에 한다는 것은 현대사회에서 어려운 일입니다. 평신도로 살기 때문에 양들에게 죄송한 면도 있습니다. 양들을 전적으로 섬기고 돌보지 못합니다. 하지만 평신도는 복음의 순수성을 지켜 나가는 좋은 방법이 됩니다. 평신도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주시는 특별한 은혜도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직장에서도 많은 은혜로 승리하게 도우십니다. 풀타임 목자에 비해서 시간이나 물질을 조금뿐이 못 드렸는데도 하나님은 크신 은혜를 주십니다.

하나님은 오십이 되면서 이제 전임사역자로 물질의 지원을 받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성경 66권 강해서를 쓰게 하셨습니다. 유튜브강해를 시작하게 하셨습니다. 3시간 기도를 하게 하셨습니다.

 

(제사장과 레위인의 예)

 

13,14절을 보십시오. “성전의 일을 하는 이들은 성전에서 나는 것을 먹으며 제단을 모시는 이들은 제단과 함께 나누는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이와 같이 주께서도 복음 전하는 자들이 복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명하셨느니라.”

 

하나님께서는 성전에서 일을 하는 제사장이나 레위인은 일을 하지 못하게 하셨습니다. 그들은 성전에서 하나님께 드리는 제물을 먹고 살도록 하셨습니다.

이와 같이 예수님께서도 복음을 전하는 자는 복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전도 여행을 보내시며 돈이나 옷이나 신발을 가지고 가지 못하게 하셨습니다. 복음을 전하고 복음을 받은 자들이 섬기는 것으로 의식주 문제를 해결하도록 하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도 바울이 이런 권한을 쓰지 않았습니다. 바울은 개인적으로 이런 권리를 쓰지 않으면서 높은 자랑이 있었습니다.

 

(사도바울의 자랑)

 

15절을 보십시오. “그러나 내가 이것을 하나도 쓰지 아니하였고 또 이 말을 쓰는 것은 내게 이같이 하여 달라는 것이 아니라. 내가 차라리 죽을찌언정…… 누구든지 내 자랑하는 것을 헛된 데로 돌리지 못하게 하리라.”

 

사도 바울이 목회자가 지원받는 것이 당연하다고 말하는 것은 이렇게 해달라는 것이 아닙니다. 사도 바울은 차라리 굶어 죽을지언정 값없이 복음을 전하는 자신의 자랑을 다른 사람에게 빼앗기지 않고자 하였습니다.

사도 바울은 물질보다는 명예를 택했습니다. 요즘에 정치지도자 CEO들 심지어 목회자 가운데서도 돈 때문에 자신의 명예를 더럽히는 사람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러나 사도 바울은 스스로 가지고 있는 자랑 곧 명예심이 대단했습니다.

사도 바울 자신이 순수하게 복음역사를 섬긴다는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했습니다. 자신은 어떤 이익이나 결과를 바라지 않고 깨끗하게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의 자랑과 명예를 위해서 물질을 포기하였습니다. 이런 높은 자랑 때문에 평생을 주님을 위해서 현신할 수 있었습니다. 신약 성경에서 자랑이라는 말을 검색해보면 자랑이라는 말을 대부분 사도 바울이 쓰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무익한 종의 자세)

 

16,17절을 보십시오. “내가 복음을 전할찌라도 자랑할 것이 없음은 내가 부득불 할 일임이라. 만일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내게 화가 있을 것임이로라. 내가 내 임의로 이것을 행하면 상을 얻으려니와 임의로 아니한다 할찌라도 나는 직분을 맡았노라.”

 

사도 바울은 사람들 앞에서 평신도로서 긍지와 자부심이 있었지만 교만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하나님 앞에서는 자랑할 것이 없었습니다. 바울은 때로 부득불 복음을 전할 때도 있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대부분 자원하는 마음으로 주의 일을 하지만 어느 때는 부득불 주의 일을 할 때도 있습니다. 부득불 예배에 나올 때도 있고 부득불 일대일 할 때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자랑할 수 없습니다. 사도바울은 복음을 전하지 않으면 화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하나님이 복음의 원수된 바울을 복음의 일꾼 삼으셨습니다. 그런데 복음을 전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은혜를 배신하는 것입니다. 그가 복음을 전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벌을 받을 것처럼 생각되었습니다.

바울이 복음을 전하는 것은 자신의 임의로 하는 일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그에게 사도의 직분을 맡기셨습니다. 그는 사도의 직분을 맡았고 주님의 일에 힘을 썼습니다. 그는 열심히 일하고 나서도 무익한 종의 자세가 있었습니다. 그는 자신이 받은 은혜가 얼마나 큰지를 알았고 그 은혜를 위해서 힘을 썼습니다.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고 복음의 원수로 살았고 정욕과 교만으로 성령을 훼방하며 살았습니다. 이런 자를 사랑하시고 함께 하신 은혜를 잊어버리고 복음을 전하지 않으면 화가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상을 바라는 바울)

 

18절을 보십시오. “그런즉 내 상이 무엇이냐? 내가 복음을 전할 때에 값 없이 전하고 복음으로 인하여 내게 있는 권을 다 쓰지 아니하는 이것이로라.”

 

바울은 순수한 자긍심을 갖고 복음을 전할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께서 상주실 것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사람들의 보상이나 인정을 바라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에게는 바라는 한 가지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상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두 가지를 믿어야합니다.

첫째는 하나님이 살아계시다는 것입니다. 둘째는 하나님이 반드시 상주신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상주신다는 것을 믿을 때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상주심을 믿고 목자 생활을 해야 합니다. 우리가 사람의 상을 받으면 하나님의 상을 받지 못합니다.

우리가 양들을 섬겼는데 양들은 떠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수고가 헛된 것처럼 보일 때도 있습니다. 우리가 주님을 위해서 봉사했는데 대가를 받지 못할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오히려 감사해야 합니다. 우리가 주님을 위해서 수고한 것은 하나님께서 다 보상해 주실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상주심을 믿을 때 주님을 위해서 헌신할 수 있습니다. 바울은 하나님의 상주심을 믿고 교회에서 물질을 지원받지 않고 양들을 섬겼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상만을 바라고 깨끗하고 순수한 마음으로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하나님 안에서의 자랑)

 

요즘에 자랑이 많은 시대입니다. 그러나 이런 시대에 우리는 더욱 높은 하나님 안에서 자랑을 가질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우리가 평신도로 양을 치는 것은 바울과 같은 자랑입니다. 우리가 교회 일에 아무 보수도 받지 않고 헌신하는 것도 우리의 자랑입니다. 양들을 위해서 눈물로 기도하는 것도 우리의 자랑입니다. 회장단들이 여름 수양회를 무보수로 섬기는 것도 자랑입니다. 한 목동님이 센타일을 아무 대가 없이 섬기는 것도 자랑입니다. 우상의 제물을 먹는 문제도 마찬가지입니다. 마음대로 제물을 먹을 수 있느나 다른 사람을 사랑하여 먹지 않을 수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자랑입니다. 또한 이것이 우리의 상급입니다. 우리가 이런 자랑과 믿음이 있을 때 우리는 주님을 위해서 헌신하고 다른 사람을 섬길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 이런 영적인 자랑이 많기를 기도합니다. 아멘!

 

고린도 전서 9장 강해 1부 바울의 자랑

말씀 고린도전서 91-고린도전서 918

요절 고린도전서 915

고린도전서 9장 강해 일부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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