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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주의 대학생 선교기관

천안UBF

성경66권강해서

고린도전서 10장 강해 1부(10:1-13) 역사의 거울

작성자 : 오요한
작성일 : 2006-09-24 00:00:00
조회수 : 3,522

문제지풀이(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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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린도전서 10장 강해 1부 역사의 거울

말씀 고린도전서 101-고린도전서 1013

요절 고린도전서 106

 

우리는 미래에 대해서 관심이 많습니다. 우리가 만약 미래를 알 수 있는 거울이 있고 그 미래를 바꿀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셔서 미래를 알 수 있는 신비로운 거울을 주셨습니다. 그것이 역사입니다.

우리는 역사를 통해서 미래의 내 모습을 보고 미래를 바로 잡을 수 있습니다. 과거에 술을 먹고 사고를 내었다면 다음에는 그것을 거울로 삼아서 술을 먹고 운전을 하지 않으면 됩니다. 하나님은 특히 이스라엘의 출애굽의 역사를 통해서 우리 신앙 생활과 교회 생활의 미래를 거울처럼 보여 주셨습니다.

바울은 8장에서부터 우상의 제물 먹는 문제를 돕고 있습니다. 원칙은 우상의 제물을 먹는데 자유하나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자유가 제한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자신이 사도이지만 사도로 물질의 지원을 받지 않고 자립하였다고 말하였습니다. 이제 바울은 역사를 교훈 삼아서 우상의 제물 먹는 문제를 행하라고 하십니다.

 

(복음을 계시하는 이스라엘 역사)

 

이스라엘의 역사는 복음을 계시하는 역사입니다. 특별히 출애굽 역사는 더욱 그렇습니다. 이스라엘이 430년 동안 애굽에서 바로에 의해서 노예살이 하다가 해방되어 나옵니다. 이는 죄와 사단의 노예로 살다가 구원 받은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은 바로에게 열 가지 재앙을 내리십니다. 열 번째 재앙이 모든 장자를 죽이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어린 양의 피를 바르고 죽음에서 면합니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죄사함을 받고 심판에서 구원받은 것을 의미합니다. 그 후 광야를 지나 요단강을 건너 가나안 땅에 들어갑니다. 하나님은 이를 통하여 교회 생활하다가 죽음을 건너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을 계시하셨습니다.

 

(홍해의 세례)

 

1,2절을 보십시오. “형제들아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내가 원치 아니하노니 우리 조상들이 다 구름 아래 있고 바다 가운데로 지나며 모세에게 속하여 다 구름과 바다에서 세례를 받고

 

하나님은 출애굽 후에 구름 기둥과 불기둥으로 인도하십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가까운 불레셋 사람의 길로 인도하지 않으시고 먼 홍해 길로 인도하셨습니다. 앞에는 넘실거리는 홍해 바다가 있습니다. 뒤에는 바로의 중무장한 군대가 쫓아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밤새 구름 기둥과 불 기둥으로 보호해주십니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지팡이를 홍해에 내밀게 하셔서 홍해를 가르시고 바다에 길을 내셨습니다. 이스라엘은 홍해의 물이 벽을 이룬 가운데 홍해를 건넙니다. 바울은 홍해를 건너는 사건을 바다의 침례라고 말합니다.

이 말 한마디가 바울의 신학에서 중요합니다. 이 편지를 연구하는 사람은 감탄합니다. “! 바울은 천재다.” 라고 합니다. 홍해를 건넌 것을 침례라는 해석한 것이 중요합니다. 침례는 옛사람은 물에 죽고 새 사람으로 태어났다는 의식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홍해를 건너는 순간에 애굽에 살던 옛사람은 죽은 것입니다. 이제 애굽에서 살던 사람과 전혀 다른 가나안의 새 이스라엘 사람이 살아가는 것입니다. 율법으로 사는 사람은 죽고 은혜로 사는 사람은 살고, 육체로 사는 사람은 죽고 영으로 사는 사람은 살아가는 것입니다. 애굽의 노예된 사람은 죽고 제사장 백성으로 살아갑니다. 그들은 이제 다시 애굽의 노예살이로 돌아갈 수 없는 돌아갈 수 없는 다리를 건넌 것입니다.

 

(어거스틴의 침례)

 

성 어거스틴은 13년간의 방탕한 삶을 살았습니다. 마니교에 취해서 몸과 마음이 방탕했는데 예수님 믿고 새사람이 되었습니다. 하루는 옛날에 자주 드나들던 술집을 지나는데 술집 아가씨들까지 나와서 반가워합니다. 어거스틴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걷기만 했습니다. 그래도 계속 따라 오니 이렇게 말합니다. “사람 잘못 보았구먼 그 때 그 사람은 죽었어.” 죽었다는 말은 생명력이 없고 생각이 없고 완전히 단절되었다는 것입니다. 죽은 사람은 미련 없이 땅에 묻어 버립니다.

이처럼 옛사람은 죽은 것입니다. 인간의 노력으로 죽은 것이 아닙니다.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으로 죽었습니다. 바다가 갈라지는 것은 하나님의 기적입니다. 그 순간의 기적에 애굽의 430년의 삶은 깨끗이 잊어버리게 됩니다. 바다를 건널 때 얼마나 신났겠습니까? 옛사람을 완전히 부인합니다. 목이 터져라 찬송합니다. 미리암이 북을 치고 하나님을 찬송합니다. 그 감격을 그대로 유지한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바다를 지날 때 엄청난 은혜의 감격을 잊지 않을 때 우리는 새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바다가 갈라지듯이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셨습니다. 이는 바다가 갈라지는 것보다 더 큰 기적입니다. 이 놀라운 순간에 우리는 침례를 받고 거듭나 새사람이 되었습니다.

 

(광야의 만나)

 

3,4절을 보십시오. “다 같은 신령한 식물을 먹으며 다 같은 신령한 음료를 마셨으니 이는 저희를 따르는 신령한 반석으로부터 마셨으매 그 반석은 곧 그리스도시라.”

 

광야에서는 먹을 것도 마실 것도 없습니다. 광야 사막에서는 인간의 노력으로 살 수 없습니다. 지속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공급 받아야 살 수 있습니다. 계속 생명력을 공급받아야 합니다. 이곳에서 이백만의 인구가 40년간 살아갑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광야에서 신령한 식물을 먹었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새벽마다 만나를 내려 주십니다. 반석에서 물이 강물처럼 나오게 하여 그 많은 사람이 마시게 합니다.

하나님은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지속적으로 은혜를 공급해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루 동안의 양식만 내려 주십니다. 매일 만나를 거두어 들여야 합니다. 만나를 많이 거두면 썩습니다. 하나님은 이를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으로 살아가야함을 가르치셨습니다.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나갔을 때 만나를 주셨습니다. 그들이 먹고 살기 위해서 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순종한 것뿐입니다. 만나는 하나님의 말씀의 의미합니다. 사람은 하나님을 매일 의지하고 말씀을 의지해서 살아야 합니다.

모라비안 교도들은 식사를 할 때 요절을 찾아놓고 한 절을 읽고 식사를 합니다. 성경을 보고 식사하도록 합니다. 하루라도 말씀을 듣지 않으면 살 수 없습니다. 주일날 교회에 나와서 말씀을 듣지 않으면 살 수 없습니다.

 

(성령의 샘물)

 

또한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광야에서 신령한 물을 주셨습니다. 모세가 반석을 치니 그곳에서 물이 강물처럼 나왔습니다. 물은 반석에서 나왔습니다. 지금도 성지에 가면 풀이 마르는 뜨거운 여름에 바위틈에서 물이 솟아난다고 합니다. 바위에서 폭포가 쏟아집니다. 바위틈에서 엄청난 물이 솟아납니다. 바울은 다시 여기서 놀라운 해석을 합니다.

그 반석은 곧 그리스도라고 말합니다. 놀라운 해석입니다. 그리스도에서 솟아나는 물은 성령님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부활하신 그리스도 예수님을 믿으면 그곳에서 생수의 강이 흐릅니다.

성령님은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물입니다.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입니다. 우리의 생명의 근원이 되는 물입니다. 우리가 물을 먹어야 목마르지 않듯이 우리의 영혼은 하나님의 성령을 마셔야 다시는 목마르지 않습니다. 성령님은 물처럼 우리의 영적 생명을 유지하게 하십니다. 우리의 영혼을 시원하게 하고 기쁘게 하십니다. 우리의 영혼을 평화롭게 하십니다. 우리는 물을 마시듯이 매일 매일 성령님의 충만함을 받아야 합니다.

 

(광야 교회 생활)

 

5절을 보십시오. “그러나 저희의 다수를 하나님이 기뻐하지 아니하신 고로 저희가 광야에서 멸망을 받았느니라.”

 

이스라엘 백성은 홍해를 건넌 후 40년간 광야 생활을 합니다. 광야는 행 7장에서 스데반에서 광야 교회에 있을 때라고 말합니다. 스데반은 광야를 교회 생활로 해석합니다.

이스라엘은 광야의 교회 생활에서 여러 시험에 빠지게 됩니다. 특히 그들은 열 두령이 가나안 땅을 정탐한 후에 불신의 시험에 빠집니다. 시험에 빠지지 않은 사람은 갈렙과 여호수아입니다. 그들은 불신에 빠지지 않습니다. 그들은 이스라엘의 구원을 이루었습니다. 하나님은 불신에 빠진 다수를 기뻐하지 않고 죽이셨습니다. 우리는 이들을 통하여 교회 생활을 어떻게 해야 하는 지 배워야 합니다. 우리는 불신에 빠지지 말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을 믿어드려야합니다.

 

(역사의 거울)

 

6절을 보십시오. “그런 일은 우리의 거울이 되어 우리로 하여금 저희가 악을 즐겨한 것 같이 즐겨하는 자가 되지 않게 하려 함이니.”

 

거울이 된다는 말은 우리의 교훈이 된다는 말입니다. 출애굽하여 가나안에 가는 길은 거울입니다. 이들의 실패를 거울 삼아서 실패를 반복하지 말아야 합니다. 오시범(誤示範)이 있습니다. 오시범은 좋지 못한 것을 보여주는 시범입니다. 오시범의 가치가 무엇이냐면 그것을 보면서 잘못된 것을 혐오하게 하는 것입니다. 남의 잘못을 보고 자신의 잘못을 고치게 하는 것입니다. 사자성어로는 타산지석이라고 합니다. 어리석은 사람은 오시범을 바라보면서 따라 하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지혜로운 사람은 이런 실패와 넘어짐의 사건을 내 모습의 거울로 바라봅니다. 내가 이런 사건과 상관없는 자가 아니라 깊은 상관이 있는 사람입니다. 그렇게 될 때 과거의 오시범은 우리에게 최고의 선물이 됩니다. 이 거울은 네 가지 시험에 잘 빠질 수 있음을 보여 주십니다.

 

(우상숭배의 죄)

 

7절을 보십시오. “저희 중에 어떤 이들과 같이 너희는 우상 숭배하는 자가 되지 말라. 기록된 바 백성이 앉아서 먹고 마시며 일어나서 뛰논다 함과 같으니라.”

 

모세가 시내산에 올라갔을 때 이스라엘 백성들은 먹고 마시고 뛰어놀았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가져온 금은 패물을 모아서 송아지 우상을 만들었습니다. 그들은 송아지 우상을 여호와 하나님이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은 레위인을 통하여 그들 가운데 3천명을 죽게 하셨습니다. 그후에 그들은 다시 우상숭배를 하다가 북이스라엘도 남유다도 망하였습니다.

우리는 우상을 숭배해서는 안 됩니다. 여호와 하나님을 형상화해서는 안 됩니다. 마리아상도 베드로 상도 예수 그리스도의 상도 숭배해서는 안 됩니다.

그들은 송아지 우상 앞에서 댄스홀처럼 뛰어 놀았습니다. 그들은 성령님으로 인하여 기뻐 춤을 춘 것이 아닙니다. 종교를 오락화 하였습니다. 찬송을 부른다고 하고 나서 댄스 홀과 같이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두두둑 꽝! 두두둑 꽝! 하는 것입니다. 예배가 오락화 되어서는 안 됩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우상화하는 것입니다. 감성으로 경건을 대신해서는 안 됩니다. 예배를 향락화해서는 안 됩니다. 무책임한 윤리성이 없는 종교는 문제입니다.

 

(간음의 죄)

 

8절을 보십시오. “저희 중에 어떤 이들이 간음하다가 하루에 이만 삼천 명이 죽었나니 우리는 저희와 같이 간음하지 말자.”

 

모압 족속은 음란한 족속입니다. 롯과 그 딸 사이에서 태어난 민족입니다. 이들은 발람을 통해서 이스라엘을 저주하려고 하다가 되지 않으니 미인계를 썼습니다. 여자들이 짧은 미니스커트를 입고 부비부비를 추며 이스라엘 남자를 유혹했습니다. 이를 처음 보는 이스라엘 남자들은 황홀감에 빠져서 곧바로 죄를 지었습니다.

죄를 지을 뿐만 아니라 모압 족속의 신 바알브롯을 섬겼습니다. 하나님은 진노하셔서 그날 4만 삼천 명을 죽게 하십니다.

간음은 욕망 주도적인 것입니다. 육체적인 향락주의입니다. 간음은 하나님이 허락하지 않은 성적 관계를 맺는 것입니다. 혼전 성관계를 맺는 것이나, 유부남과 성관계를 맺는 것도 간음입니다. 동성애도 죄악입니다. 간음은 정신적인 사랑이 동반되지 않은 성행위입니다. 아내와의 관계라도 사랑이 동반되지 않으면 간음입니다. 인간을 비인간화하는 것입니다. 사랑은 없고 성적인 행동만 있습니다. 상대방을 향락의 도구로 사용합니다.

그들이 가나안 사람의 음란을 본받습니다. 간음은 이방 사람에게는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그들은 우상을 섬기고 공식적으로 간음을 하였습니다. 간음은 이방인의 더러운 행동을 본받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간음을 해서는 안 됩니다. 간음을 하면 망합니다.

 

(하나님을 시험하는 것)

 

9절을 보십시오. “저희 중에 어떤 이들이 주를 시험하다가 뱀에게 멸망하였나니 우리는 저희와 같이 시험하지 말자.”

 

이스라엘은 므리바에서 하나님을 시험하다가 죽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광야에서 물이 없자 하나님이 과연 살아계셔서 물을 주실 수 있는가 시험했습니다. 하나님은 이들을 불뱀을 보내서 죽게 하셨습니다.

사단은 예수님께서 광야에 있을 때 하나님을 시험하라고 합니다. 성전 꼭대기에 세워두고 뛰어내리라고 합니다. 그러면 말씀대로 하나님이 지켜 주신다고 말합니다. 사단은 말씀을 자신에게 유리하도록 해석하라고 합니다. 말씀을 나 중심으로 해석하라고 합니다. 예수님은 기록되었으되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치 말라는 말씀으로 물리치셨습니다.

지금도 사단은 믿는 자는 능력이 많으니까 물 위를 걸어가도 된다고 하고 독약을 먹어도 안 죽는다고 말합니다. 네가 하나님을 믿는다면 부자가 되어보라고 합니다. 과에서 일등을 해보라고 합니다. 그것을 하지 못하면 네가 믿는 하나님은 거짓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을 시험하는 자는 영적 교만입니다. 하나님을 시험하는 자는 죽습니다. 하나님은 시험의 대상이 아니라 믿고 경배하고 순종해야하는 대상입니다.

 

(원망의 죄악)

 

10,11절을 보십시오. “저희 중에 어떤 이들이 원망하다가 멸망시키는 자에게 멸망하였나니 너희는 저희와 같이 원망하지 말라. 저희에게 당한 이런 일이 거울이 되고 또한 말세를 만난 우리의 경계로 기록하였느니라.”

 

하니님의 존재를 안 믿는 자들은 하나님과 사람들에게 원망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가나안 땅을 정탐하고 불신에 빠졌습니다. 가나안 거민은 키도 크고 가나안 성도 웅장합니다. 뿐만 아니라 철병거를 가졌습니다. 이를 보고 이스라엘 사람들은 자신을 메뚜기같이 여기고 죽게 되었다고 자신들을 애굽에서 구원하신 하나님을 원망합니다. 집단적으로 원망하다 여호수아와 갈렙을 제외한 모든 사람들이 죽음을 당했습니다.

출애굽기, 민수기에 보면 이스라엘 백성은 건수만 있으면 원망합니다. 길이 험하다, 길이 멀다, 먹을 것이 없다, 마실 것이 없다, 고기를 주지 않는다, 주위 사람들이 너무 심한 벌을 받았다 등등 원망이 끝이 없습니다. 원망은 큰 죄입니다. 하나님은 원망하는 자들을 불뱀을 보내어 죽게 하였습니다.

우리도 이웃을 원망하고 형제를 원망합니다. 내 소원을 안 들어주시나 복을 안 주시나 조급함으로 원망합니다. 내 고집을 기준으로 원망합니다. 하나님이 길을 몰라서 광야로 인도하셨습니까? 하나님이 배고파 죽게 하고 목 말라 죽게 하겠습니까? 광야로 인도한데는 하나님의 깊고 높고 위대하고 아름다운 섭리가 들어 있습니다. 이를 알지 못하고 자신의 생각대로 안 된다고 생각하니 원망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원망하다가 많이 죽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를 거울삼아서 항상 감사함으로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 중심으로 생각하며 감사해야 합니다.

 

(넘어질까 조심하는 삶)

 

12절을 보십시오. “그런즉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

 

아침 햇살이 비추는 깊은 샘으로 많은 짐승들이 물을 먹으려고 모였습니다. 사슴은 연못 속에 자신을 보았고 자신은 아름답고 다른 놈들은 못생겼다고 생각했습니다. 다른 짐승들이 떠난 뒤에도 계속 물을 바라보았습니다. 그때 사자가 찾아왔습니다. 사슴은 열심히 도망갔으나 뿔이 수풀에 걸려서 사자의 밥이 되었습니다. 사슴은 뿔을 자랑했는데 뿔 때문에 죽는다고 말했습니다.

왜 하나님의 백성이 시험에 넘어지느냐? 어떻게 하면 넘어 지지 않느냐? 매우 중요한 문제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이 시험에 빠지는 이유는 섰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좋은 것을 자랑하기 때문입니다. 이만하면 다 되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 속에 있는 실수의 모습이 나의 속에 있다고 생각지 않습니다. 내 생각이, 내 뜻이 하나님의 생각보다 위대하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자들이 넘어집니다.

 

(시험은 언제나 있다)

 

13절을 보십시오. “사람이 감당할 시험 밖에는 너희에게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치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지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

 

우리는 이 말씀을 통하여 세 가지를 배웁니다. 첫째는 언제나 시험은 있다는 것입니다. 기도하면 아무 시험이 없느냐는 것입니다. 아닙니다. 건강한 사람에게 병이 있듯이 사람이 살아 있는 동안에 시험은 있습니다. 사십일 금식 기도한 예수님도 시험을 받았습니다. 언제나 어떤 사람이니 어떤 상황이나 시험이 있다는 것입니다.

주기도문에서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소서 기도하라고 합니다. 시험이 있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왜 세상에에서 왜 시험이 있느냐는 것입니다. 모든 인류가 묻는 궁극적인 질문이요. 많은 사람의 질문입니다.

어떤 시험은 죄 때문에 옵니다. 법을 어기면 대가가 있습니다. 불이 타는데 손을 집어 낳으면 불에 데입니다. 과로하고 술을 먹고 담배피우면 건강에 안 좋습니다. 국가적인 죄, 사회적인 죄도 있습니다. 구십오프로는 죄로 인해서 시험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시험에 들지 않으려면 죄를 회개해야합니다.

또한 우리가 연약해도 시험이 듭니다. 건강하지 않으면 오는 감기 가는 감기 다 걸립니다. 영적으로 약한 사람이 시험에 걸립니다.

뿐 아니라 시험은 새로운 길로 인도하기 위해서도 옵니다. 죄악된 길로 못 가게 막는 것입니다. 귀가 어둔 사람에게 확성기와 같은 것입니다. 시험은 우리의 가는 길을 막고 새로운 길을 냅니다. 우리는 시험을 통하여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 버릴 것은 버리고 깨뜨릴 것은 깨뜨리게 하십니다. 하나님은 시험을 통하여 그 백성을 성장시키고 영광스럽게 만듭니다.

학생들에게 시험이 없으면 공부하지 않습니다. 아름다운 향기가 나는 인격을 소유한 사람을 보면 수많은 시험을 겪은 사람입니다. 하나님은 사랑하는 자에게 시험을 주셔서 믿음을 연단하십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시험 중에 기도해야 합니다. 주님의 뜻을 이루어 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사람은 시험을 받을 때 감사해야합니다. 이 시험을 통하여 하나님이 더 큰 복을 주실 것을 믿고 감사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시험당할 때 멀리서 내려다보지 않습니다. 함께 울고 괴로워하십니다. 예수님은 우리와 한결같이 고난을 받으신 분이십니다.

 

(그 시험을 감당할 수 있다)

 

성경은 사람이 시험을 감당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중학생에게 대학생 시험 문제를 내지는 않습니다. 시시한 시험에 넘어지면 시시한 것입니다.

왜 시험을 이기지 못할까요? 상상력 때문입니다. 시험이 들면 믿음이 없는 사람은 최악의 시나리오를 생각합니다. 끝났다고 생각합니다. 상상력이 최악으로 돌아가는 이유는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믿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믿지 않을 때 쓰러지는 것입니다.

존번연이 천로 역정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언덕을 오르는 데 의심과 비겁이 내려옵니다. 저 언덕 위에 큰 사자가 있어 못가고 내려온다고 합니다. 성 앞 언덕 위에 사자가 으르렁 거리며 달려 듭니다. 그러나 크리스찬은 믿음으로 나갑니다. 성문이 열리면서 한 사람이 알려 줍니다. 사자는 묶여 있다는 것입니다. 길 한 가운데로 가는데 사자의 목에는 쇠사슬이 묶여 있어서 나오지 못하는 것을 발견합니다. 사자는 하나님의 백성을 시험하기 위해서 있습니다.

하지만 묶여 있는 사자같은 사단은 우리를 넘어뜨리지 못합니다. 주님의 손안에 그 시험도, 그 사건도 결박되었습니다.

 

(마음에서 오는 시험)

 

스포츠맨이 두 가지 피로를 견뎌야 합니다. 실제적인 피로가 있고 정신적인 피로가 잇습니다. 마라톤을 십킬로 미터 달리면 7킬로 지점에서 주저 앉고 싶다는 것입니다. 누구나 이런 지점에 오면 그렇습니다. 이 지점을 지나면 승리할 수 있습니다. 우리 인생길도 지례 겁먹고 가짜 피로에 넘어지는 사람이 있습니다.

사단은 사람을 넘어뜨릴 때 육신 영혼 마음 중에 먼저 마음을 공격합니다. 지정의(知情意)를 공격합니다. 이중에서도 지()부터 공격합니다. 먼저 생각이 의심합니다. 선악과 앞에서 하와가 있습니다. 뱀이 와서 동산 모든 나무의 실과를 먹지 말라고 하더냐고 합니다. 그 말을 듣고 의심이 들고 불평이 일어납니다. 그 의심으로 보니 선악과가 보암직도 하고 먹음직도 합니다. 먹어야지 하면서 의지가 들어갑니다. 그 다음에 육체로 가고 영혼이 쓰러집니다. 그러므로 시험 앞에서 마음을 굳건히 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신실하셔서 피할 길을 주십니다.}

 

피할 길은 적극적인 하나님의 개입입니다. 아버지가 아들에게 무거운 통을 들고 따라오라고 합니다. 아버지는 아들에게 통을 들으라고 합니다. 아들이 땀을 뻘뻘 흘리며 따라가면 아버지가 도와줄까하며 통을 맞잡아 줍니다. 이것이 피할 길입니다.

열심히 수고하면 하나님이 들어주십니다. 시험의 기간도 단축시켜 주십니다. 일단 지고 가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러면 역사하십니다. 내 마음을 강하게 하고 담당해 주십니다 그러므로 시험 앞에서 주저앉으면 안 됩니다.

 

(시험을 이길 수 있다)

.

이스라엘의 역사를 거울로 하여 볼 때 우리에게 많은 시험이 다가 올 것입니다. 앞으로 우상 숭배의 유혹도 있고 간음의 유혹도 있고, 원망의 마음이 들 때도 있고 하나님을 시험하는 마음이 생길 수도 있습니다. 우상의 제물을 먹는 문제를 통해서도 시험이 올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신실하신 하나님을 믿을 때 우리는 이런 시험을 넉넉히 이길 수 있습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시험을 이기고 더욱 성숙한 사람이 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아멘!

고린도전서 10장 강해 1부 역사의 거울

말씀 고린도전서 101-고린도전서 1013

요절 고린도전서 106

고린도전서 10장 강해 일부 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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