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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주의 대학생 선교기관

천안UBF

성경66권강해서

고린도후서 4장 강해 이부 질그릇에 담긴 보배

작성자 : 오요한
작성일 : 2010-12-30 00:00:00
조회수 : 5,623

문제지풀이(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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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린도후서 4장 강해 이부 질그릇에 담긴 보배

고린도후서 47-고린도후서 418

요절 고린도후서 47

 

고린도후서 4장에서는 예수님이 보배임을 강조하면서 우리 인간은 질그릇이라고 대조하여 설명하고 있습니다. 복음이 얼마나 귀하고 영광스러며 복음을 맡은 자가 얼마나 영광스러운가를 말합니다. 바울은 그의 내면에 있는 보배로 인하여 낙심하지 않았습니다.

 

(질그룻에 담긴 보배)

 

7절을 보십시오.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심히 큰 능력은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

 

사도바울은 보배와 질그릇을 통하여 복음을 설명합니다. 여기서 보배는 예수 그리스도를 의미하고, 질그릇은 우리의 육신을 의미합니다. 사도 바울은 사람은 질그릇이라고 합니다. 질그릇은 흙으로 만들었습니다. 질그릇은 연약하고 잘 깨어지고 볼품없습니다. 옛날에 질그릇이 깨어지면 시멘트로 발라서 사용하였습니다. 우리의 육신은 질그릇처럼 흙으로 만들어졌습니다. 언젠가는 깨어질 몸이요, 약한 몸이요, 추한 몸입니다. 우리는 흙에서 와서 흙으로 돌아가는 존재입니다. 우리의 몸이 바이러스에 의해서 무너집니다. 마음도 의지도 약합니다. 인간은 상한 갈대와 같고 꺼져가는 등불과 같습니다.

사도베드로는 여자가 약한 그릇이라고 하였습니다. 저녁에는 새벽 기도에 나온다고 하고 못 나옵니다. 질그룻은 싸구려입니다. 별가치가 없습니다. 나무그릇 금그룻보다 쌉니다. 인생은 싸구려 인생입니다. 육신만 가진 인생은 자랑할 것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연약한 육신에 보배 되신 예수님을 주셨습니다. 그 질그릇에 보배가 담겨져 있습니다. 보배는 보배합에 간직해야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보배 되신 예수님을 우리 연약한 육신에 담아주셨습니다. 이것이 큰 은혜입니다. 앞에서는 복음을 빛이고 영광이라고 하다가 이제는 보배라고 합니다. 보배는 영원히 빛나고 가치 있고, 강한 것입니다. 질그릇에 보배를 담으면 보배로 질그릇의 가치가 생깁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영접하면 보배되신 예수님이 우리 마음에 들어오셔서 우리 인간은 가치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영이 인간을 떠나면 우리는 질그룻만 있어서 무가치하게 됩니다. 내용물이 그릇을 가치있게 만드는 것입니다. 사람은 무가치하지만 가치 있는 복음을 가져서 가치 있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우리는 자신이 보배가 되고자 하니까 낙심이 됩니다. 그러나 우리는 보배가 아니라 질그릇입니다. 우리는 보배되신 예수님을 바라보면서 낙심하지 말아야합니다.

하나님이 이렇게 보배를 질그릇에 담아 주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이는 능력의 심히 큰 것이 인간에게 있지 아니하고 하나님께 있음을 드러내기 위해서입니다. 우리 속에 있는 그리스도를 전하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온전히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은 바울을 통하여 큰 능력을 베푸셨습니다. 병자를 고치고, 죽은 자를 살렸습니다. 많은 자들이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었습니다. 이는 바울이 훌륭해서 된 것이 아닙니다. 바울은 자신의 본질이 흙이라는 것을 잊지 않았습니다. 오직 보배되신 예수님의 은혜로 인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체질을 알듯이 우리도 우리의 체질을 알아야합니다.

바울은 자신의 한계를 알았습니다. 바울은 자신에 대해서 절대 부정합니다. 그는 낙심될수록 자신의 안에 있는 그리스도만을 인정하였습니다. 그는 낙심될수록 그리스도를 높였습니다. 예수님에 대해서만 절대긍정합니다. 능력의 큰 것은 하나님께 있습니다.

우리는 자신을 높이지 말아야합니다. 우리가 자신이 자격이 있다고 하면 하나님이 우리를 쓰시지 않습니다. 바울은 능력의 큰 것이 나에게 있지 않다고 하였습니다. 우리는 자신으로 인하여 낙심하기 쉽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자신 때문에 낙심하지 말아야합니다. 우리 안에 계시는 예수님으로 인하여 소망을 가져야 합니다. 오직 그 안에 계신 보배되신 예수님이 일을 하십니다. 우리는 자신이 흙에서 나서 흙으로 가는 질그릇에 불과함을 깨닫고 온전히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합니다. 그러면 보배를 담은 질그릇과 같은 바울의 삶이 어떠했습니까?

 

(부활의 주님으로 낙심지 않는 바울)

 

8,9절을 보십시오.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박해를 받아도 버린 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고

 

바울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고, 답답한 일을 당하고, 핍박을 받고, 거꾸러뜨림을 당하였습니다. 바울은 치열한 영적싸움에서 원수들에게 쫓기고 궁지에 몰리고, 난감한 상황 속에서 절망하고, 망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부딪혔습니다.

바울은 복음의 종으로 많은 고통을 당하였습니다. 사도로 인정받지 못하였습니다. 교회의 문제로 눌림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이 모든 환난 가운데서도 능히 승리 할 수 있었습니다. 바울 속에 담긴 보배가 바울을 도와 주셨습니다. 질그릇은 우겨쌈을 당하여도 그리스도는 우겨쌈을 당하지 않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이 크신 하나님의 능력으로 함께 해 주셨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많은 고통을 당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결코 낙심치 않습니다. 우리 안에 살아게신 예수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우리 육체가 죽어도 영은 죽지 않습니다. 기독교를 국교로 하는 로마가 망했습니다.

어거스틴은 이것을 보고 고민하다가 책을 하나 썼습니다. 하나님 나라라는 책입니다. 그는 찬란한 로마가 무너지지만 하나님 나라는 다시 선다고 말하였습니다. 사람들은 다 자기의 나라를 세우고자 합니다. 자기만의 나라를 세우고자 하는 야심은 다 있습니다. 이런 야심이 무너지면 낙심합니다. 그러나 이 가운데 우리는 보배되신 예수님을 바라보아야합니다. 예수님의 나라를 세워야합니다.

 

(예수의 죽음을 짊어지는 바울)

 

10-12절을 보십시오. “우리가 항상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우리 살아 있는 자가 항상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겨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죽을 육체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그런즉 사망은 우리 안에서 역사하고 생명은 너희 안에서 역사하느니라

 

이제 바울은 자신이 자원하여 고난을 받습니다. 사도 바울은 예수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지고 다녔습니다. 사도바울은 예수님의 십자가의 고난에 적극 동참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죽음에 넘기웠습니다. 질그룻이 깨어졌습니다. 이제는 죽었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이를 통하여 그 내면에 있는 보배되신 부활의 예수님이 나타나게 하였습니다. 마치 질그릇이 깨어져야 보배가 더욱 빛나듯이 우리가 적극 고난을 사랑해야 부활의 생명이 역사할 수 있습니다.

내가 낙심할 때 하나님의 생명이 나타납니다. 이것이 부활의 역설적인 진리입니다. 내가 망해야하는데 그때 예수님의 생명이 나타납니다.

바울이 삶의 체험에서 나온 간증입니다. 돌에 맞고 죽을 것 같았는데 새생명이 나타납니다. 바울은 루스드라에서 돌로 침을 당해서 죽을 줄 알았는데 제자 디모데를 얻었습니다. 우리가 고난을 사랑하면 할수록 부활의 생명은 양들의 심령 가운데 역사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고난을 사랑하면 할수록 부활의 생명은 양들의 심령 가운데 역사합니다. 예수님 때문에 당하는 고난. 예수님 때문에 죽음을 당해야합니다.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날마다 예수님을 따라야 합니다. 우리는 순종을 통하여 자신을 죽여야 합니다. 바울이 십자가를 질 때 예수님의 부활을 체험하였습니다. 우리의 고난은 잠간입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나타나는 부활의 능력은 영원합니다. 목자가 죽을 때 하나님의 생명이 양들에게 나타납니다.

 

(믿음으로 죽은 후에 부활을 보는 바울)

 

13절을 보십시오. “기록된 바 내가 믿었으므로 말하였다 한 것 같이 우리가 같은 믿음의 마음을 가졌으니 우리도 믿었으므로 또한 말하노라

 

시편 기자는 시편 11610절에서 나는 믿었다 그러므로 나는 말하였다고 하였습니다. 사도 바울도 부활의 주님이 함께 하시는 것을 믿고 담대하게 십자가를 지겠다고 말합니다. 주님이 부활시킬 것을 믿고 십자가를 적극적으로 집니다. 그는 십자가 후에 부활과 영광을 있을 것을 믿고 현재 믿음으로 부활할 것을 말합니다.

사도바울은 로마에 복음이 전파될 것을 로마도 보아야하리라 말했습니다. 아브라함은 자신이 큰 민족이 될 것을 믿고 자신의 이름을 아브라함이라고 말하였습니다.

 

(모든 것이 너희를 위함이니)

 

14,15절을 보십시오. “주 예수를 다시 살리신 이가 예수와 함께 우리도 다시 살리사 너희와 함께 그 앞에 서게 하실 줄을 아노라 이는 모든 것이 너희를 위함이니 많은 사람의 감사로 말미암아 은혜가 더하여 넘쳐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함이라

 

나아가 바울은 고난을 동참할 때 자신도 예수님과 함께 부활하여 하나님 앞에 서게 하실 줄을 확신했습니다. 예수님을 부활시키신 하나님이 우리를 또한 부활시키십니다. 바울이 고난을 받을 때 고린도 성도들이 유익이 될 것을 믿었습니다. 그는 다시 살아 그리스도 앞에 살 것을 알았습니다. 그는 부활의 그리스도를 믿고 자신의 부활을 알았습니다.

바울은 고린도 성도들을 위해서 고난을 받았습니다. 바울이 고난을 받을수록 고린도 성도들은 더 많이 그리스도에게 인도될 것을 알았습니다. 바울은 고린도 성도들과 함께 살아날 것을 믿었습니다. 그리스도를 위하여 십자가를 지는 사람들은 주님의 크신 은총에 감사하는 마음이 넘쳐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립니다. 바울은 자신이 고난을 받음으로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께 돌아와 하나님을 찬양하는 놀라운 일이 일어날 것을 믿었습니다.

 

(속 사람은 새로워짐으로 낙심치 않음)

 

16절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우리의 겉사람은 낡아지나 우리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지도다

 

1절에는 바울이 하나님의 긍휼로 낙심치 않습니다. 8,9절에서는 보배로 인하여 낙심치 않았습니다. 이제는 그의 내면이 새로워짐으로 낙심하지 않습니다. 질그릇으로 된 우리 육신은 날마다 낡아집니다. 우리의 육신은 날마다 나이가 들면 들수록 노쇠해지고 기능이 저하됩니다. 저의 몸도 쉽게 피곤하고 소화가 잘 안됩니다. 기억력도 쇠퇴합니다. 눈도 좋지 않습니다. 영예도 오래가지 못합니다. 외적인 것은 사라집니다. 사람들은 환난을 볼 때 낙심합니다. 일시적인 것을 집착할 때 낙심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이렇게 늙어가면 속 사람도 낡아집니다.

그러나 우리는 속 사람이 날로 새로워지므므로 낙심하지 않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겉사람이 낡아지면 낙심합니다. 사람들은 겉모습만 보고 현실만 보면 낙심할 수밖에 없습니다.

진시황은 중국을 통일하였습니다. 그는 만리장성을 쌓고 아방궁을 지었습니다. 그는 불로초를 구하였습니다. 그는 젊어지고자 수은을 발랐습니다. 수은연못에서 목욕하였습니다. 그는 수은중독이 되어 폭정을 합니다. 그는 부하에 의해서 죽음을 당합니다. 그는 거대한 제국을 세웠으나 풀의 이슬처럼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이런 자는 낙심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날마다 낡아갈지라도 소망이 넘쳤습니다. 이는 그의 내면이 보배 되신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날마다 새로워지기 때문입니다. 성령님이 우리의 내면을 새롭게 변화시킵니다. 고난을 통하여 우리의 내면이 새롭게 변화됩니다. 우리는 환난으로 날마다 내면은 성장하고, 예수님을 닮아갑니다. 우리 내면에 보배는 날마다 광채를 내게 됩니다. 우리는 우리의 내면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환난 뒤에 영원한 영광을 보는 바울)

 

17,18절을 보십시오. “우리가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니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라

 

지금 사도 바울은 큰 환난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환난이 가벼운 것이라고 합니다. 환난은 잠간이라고 합니다. 우리의 질그릇은 잠깐 환난을 받으나 우리 속의 보배로 인하여 크고 영원한 영광의 부활에 참여할 것입니다. 우리는 크고 영원한 영광을 보아야합니다. 영원한 영광의 관점에서 현재를 보면 낙심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눈에 보이는 육신은 잠간이나 보이지 않는 보배는 영원한 것입니다. 우리는 영원한 것을 바라보아야합니다.

 

(질그룻에 담긴 보배)

 

우리는 질그릇이지만 우리 안에 보배가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 속에 있는 보배로 인하여 낙심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갈수록 하나님 나라의 소망에 불타오르게 됩니다. 하나님의 상급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어떤 분이 사업에 크게 성공하였습니다. 가족을 돌볼 여유도 없이 살았습니다. 그런데 그는 암이 걸렸습니다. 그는 이제 나는 망했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때 그는 가족들의 소중함을 알았습니다. 예수님을 영접하였습니다. 그는 건강을 잃었지만 가족을 얻고 예수님을 얻었습니다.

산에서는 폭포가 내려옵니다. 산에서 비가 와서 내리는 것이 아닙니다. 땅 속에서는 물이 위로 솟아오릅니다. 자연도 내려오는 것이 있지만 위로 올라가는 것이 있습니다. 겉으로는 무너지지만 속으로는 올라갑니다. 우리의 삶 속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이것이 변화의 방법입니다.

우리는 전쟁을 무서워합니다. 환난의 극치가 전쟁입니다. 그러나 전쟁을 통하여 세워지는 것이 있습니다. 우리나라는 병자호란, 임진왜란을 통해서 서민의식이 발달하고 언어가 변화됩니다. 전쟁이 많은 것을 변화시킵니다. 전쟁은 교만과 안일과 편견을 부서지게 합니다. 그러면서 새로운 하나님의 역사를 만듭니다. 전쟁 후에는 나라가 새롭게 세워집니다.

건설하기 위해서 부수는 것입니다. 우리는 부수는 힘 앞에서 낙심합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실패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새로운 역사를 만듭니다. 하나님은 고난을 통하여 복음을 전파됩니다. 고통을 통해서 복음의 샘물이, 은혜의 빗줄기가 들어갑니다. 무너지는 것 속에는 엄청난 새로운 것이 세워집니다.

루터가 낙심할 때 부인은 상복을 입고 울었습니다. 누가 죽었느냐고 물었습니다. 하나님이 죽었다고 말하였습니다. 루터가 화를 내자 하나님이 살아계시면 왜 낙심하느냐고 말하였습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을 믿으면 우리는 낙심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자녀를 인하여, 양들을 인하여 낙심하지 말아야합니다. 하나님은 새로운 역사를 이루어가십니다. 낙심하는 것은 자기중심적입니다. 하나님을 바라보면 우리는 낙심하지 않습니다. 우리에게 하나님의 사랑이 있습니다. 우리에게 보배되신 예수님이 있습니다. 예수님으로 우리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집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떤 절망 속에서도 소망을 갖고 힘을 냅니다. 우리는 오히려 자원하여 고난을 받음으로 예수님을 나타나게 합니다. 아멘!

고린도후서 4장 강해 이부 질그릇에 담긴 보배

고린도후서 47-고린도후서 418

요절 고린도후서 47

고린도후서 4장 강해 이부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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