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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주의 대학생 선교기관

천안UBF

성경66권강해서

고린도후서 3장 강해 이부 새언약의 일꾼

작성자 : 오요한
작성일 : 2005-03-12 00:00:00
조회수 : 4,372

문제지풀이(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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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린도후서 3장 강해 이부 새언약의 일꾼

고린도후서 36-고린도후서 318

요절 고린도후서 36

 

아테네와 페르시아가 전쟁을 할 때입니다. 아테네가 말아톤에서 페르시아를 이겼습니다. 장군은 전령을 보냅니다. 전령는 승전보를 전하고 죽습니다. 그때 42,195킬로 미터입니다. 여기서 마라톤 경기의 유래입니다. 그 사람이 승전보의 일꾼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가 승리하신 기쁜 소식을 전하는 복음의 일꾼입니다. 구약의 모든 신비를 벗기면 그곳에 예수님이 계십니다. 새언약의 일꾼은 성령님을 통하여 구약에서 수건을 벗기고 예수님을 보게 하십니다. 우리를 진정 자유하게 하십니다.

 

(우리는 새언약의 일꾼이다)

 

6절을 보십시오. “그가 또한 우리를 새 언약의 일꾼 되기에 만족하게 하셨으니 율법 조문으로 하지 아니하고 오직 영으로 함이니 율법 조문은 죽이는 것이요 영은 살리는 것이니라

 

바울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새 언약의 일꾼으로 자격을 주셨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이 새언약을 감당할 능력을 주십니다. 능력은 헌신 다음에 오는 것입니다. 순종할 때 능력을 주십니다. 그는 구약의 일꾼이 아닌 신약의 일꾼이라고 말합니다. 율법주의자와 바울을 대조하여 말하고 있습니다.

새언약은 구언약과 대조 되는 것입니다. 구언약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과 세우신 언약입니다. 이 언약의 중심내용은 십계명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 언약을 다 지켜 행하겠다고 언약했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의 순종을 조건으로 그들의 하나님이 되시겠다고 언약했습니다.(24:1-8) 그리고 짐승의 피를 뿌려 이 언약을 확실히 보증했습니다. 그 언약을 지키지 않으면 짐승처럼 피흘려 죽을 수 있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이 이 계명을 다 지키지 못할 것을 아셨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이 죄를 지었을 때 피할 길을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언약궤 위에 속죄소를 두어 언약을 어기면 주님께 나가서 회개하도록 하였습니다. 이스라엘은 죄악되어 말씀을 다 행하지 못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선지자를 통해서 끊임없이 회개를 촉구하였지만 이스라엘 백성은 목을 뻣뻣이 하고 회개하지도 않았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의 완악함으로 인하여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의 하나님이 되실 수 없었고,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의 진노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의 하나님이 되실 수 없었습니다. 애매한 짐승들만 피를 흘리며 한 없이 죽어갔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다 피흘려 죽게 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은혜롭게도 이스라엘을 피흘리지 않고 자신이 피흘리는 쪽을 택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통하여 새 언약을 세우셨습니다. 예수님은 최후의 만찬에서 포도주를 주시며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죄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26:28) 옛 언약은 새언약의 그림자이지만 새 언약은 옛언약의 실체입니다. 옛언약에서 짐승의 피를 흘리게 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통해서 온전하게 되었습니다. 십계명의 말씀은 예수님이 사랑의 새계명을 주심으로 완성되었습니다. 옛 언약은 짐승의 피로 맺은 언약이기 때문에, 그 효력이 일시적이고 유한합니다. 그러나 새 언약은 예수님의 피로 맺은 언약이므로 그 효력이 완전하고 영원합니다.

예수님의 피로 죄사함을 받으면 하나님은 우리의 마음에 성령을 주십니다. 예레미야 3133 “그러나 그 날 후에 내가 이스라엘 집과 맺을 언약은 이러하니 곧 내가 나의 법을 그들의 속에 두며 그들의 마음에 기록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될 것이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우리 안에 성령이 오셔서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 삼으시고 하나님은 우리의 하나님이 되십니다. 우리로 율법을 지킬 힘을 주십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을 새 언약의 일꾼으로서 확신이 있었습니다. 모세가 구언약의 일꾼이었다면 자신은 새언약의 일꾼이라는 말입니다. 새언약이 오므로 구언약은 이제 온전하게 되었습니다.

 

(새언약의 직분은 영광스럽다)

 

7-11절을 보십시오. “돌에 써서 새긴 죽게 하는 율법 조문의 직분도 영광이 있어 이스라엘 자손들은 모세의 얼굴의 없어질 영광 때문에도 그 얼굴을 주목하지 못하였거든 하물며 영의 직분은 더욱 영광이 있지 아니하겠느냐 죄의 직분도 영광이 있은즉 의의 직분은 영광이 더욱 넘치리라 영광되었던 것이 더 큰 영광으로 말미암아 이에 영광될 것이 없으나 없어질 것도 영광으로 말미암았은즉 길이 있을 것은 더욱 영광 가운데 있느니라

 

사도 바울은 새 언약의 직분이 얼마나 영광스러운가? 말합니다. 본문을 보면 사도 바울은 구언약의 직분과 새언약의 직분을 대조하여 설명하고 있습니다. 율법 조문의 직분과 영의 직분, 정죄의 직분과 의의 직분, 없어질 것과 있을 것이 대조되어 나옵니다. 바울은 먼저 구언약의 직분이 영광스러움을 말하고, 새언약의 직분이 더욱 영광스러움을 말합니다. 바울은 더욱이라는 말을 세 번 반복하여 새언약의 직분이 구언약의 직분보다 대조적으로 영광스러움을 말합니다.

구언약의 직분은 모세의 영광을 말하는 것입니다. 모세가 시내산에서 하나님께서 친히 쓰신 십계명을 들고 내려왔을 때 그 얼굴에서 광채가 났습니다. 이 영광은 곧 없어질 영광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이 감히 모세의 얼굴을 쳐다보지 못할 정도로 영광스러웠습니다. 모세의 직분이 영광스러웠던 것은 율법을 통하여 그리스도에게 나가게 하기 때문입니다. 마치 구언약의 직분은 달의 영광과 같습니다. 달이 영광스런 것은 해의 찬란한 빛을 반사하기 때문입니다.

달빛도 환하다고 한다면 해는 얼마나 영광스러운 것입니까? 새 언약의 일꾼의 영광은 햇빛과 같이 찬란한 영광입니다. 생명을 주는 그 자체가 영광스러운 것입니다. 이것은 영적인 가치관을 가진 자만이 아는 영광입니다.

사실 사도 바울은 현재 위치는 아무런 사회적 지위도 없는 무명의 전도자 입니다. 그에게는 재산도 권세도 없었습니다. 그는 추천서 한 장이 없어서 양떼들로부터 불신을 받고 있었습니다. 그는 장막을 치는 텐트 만드는 자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을 인간적인 눈으로 보지 않았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영적인 눈으로 바라보았습니다. 그때 자신의 목자 직분이 세상에서 가장 가치 있고 영광스러운 직분이라는 확신이 생겨났습니다. 오직 자신의 직분만이 생명을 살리는 직분임을 확신했습니다.

 

(목자의 직분은 가장 영광스러운 직분이다.)

 

세상에는 의사와 판사의 직분을 귀히 여깁니다. 의사는 사람의 생명을 살리고, 판사는 죄인의 생명을 좌우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의사는 육신의 생명을 조금 연장시킬 뿐이고, 판사는 죄인의 형량을 조금 감면해줄 뿐입니다. 하지만 목자는 죽을 영혼을 살리는 직분이요, 죄인을 의롭다 하는 직분입니다.

또 지성인인 대학생을 가르치는 교수의 직분을 영광스럽게 생각합니다. 그러나 교수는 세상이 발전 할수록 없어지는 상대적인 지식을 가르칠 뿐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영원한 하나님의 진리를 지성인에게 가르치는 목자입니다.

세상에는 대통령이나 국회의원을 영광스럽게 생각합니다. 그들은 세상을 다스리는 법을 만들고 다스리는 자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눈에 보이는 세상을 다스립니다. 하지만 우리는 눈에 보이지 않는 영적 세계를 다스리는 왕 같은 제사장입니다.

우리는 대통령이나 교수나 의사나 판사, 검사보다 더 영광스러운 목자의 직분을 맡은 자입니다. 대구의 학사회장 김바울 목자님은 정형외과 과장을 그만둘 수 있지만 목자를 그만둘 수 없다고 했습니다. 정 아브라함 목자님은 고등법원 부장판사를 사표낼 수 있지만 1:1성경선생의 직분을 그만둘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그 분들의 고백이 우리의 고백이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도 우리가 목자로서 긍지나 자부심이 없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어떤 분은 자신을 실업자요, 세일즈맨과 같이 자신을 비하시키고 스스로 메뚜기가 되는 사람이 있습니다. 또 세상의 조교 자리만큼도 귀하게 여기지 않는 분이 있습니다. 이는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복음을 통하여 생명이 살아나고 변화되는 것을 경험하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복음의 능력을 체험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이들은 단지 사람을 모으는 자요. 성경지식을 가르치는 자들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바로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어떤 처지에 있어도 목자가 이세상에 가장 영광스러운 직분임을 인식하고 긍지와 자부심이 있어야 합니다. “목자가 최고 영광스러운 직분이라!” 이것이 우리의 고백이 되어야 합니다.

 

(옛 직분은 벽이 있다.)

 

12절을 보십시오. “우리가 이같은 소망이 있으므로 담대히 말하노니 우리는 모세가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장차 없어질 것의 결국을 주목하지 못하게 하려고 수건을 그 얼굴에 쓴 것 같이 아니하노라

 

사도 바울은 새언약의 직분을 받은 자의 축복을 말합니다 구언약의 직분은 자신의 영광을 주목치 못하게 하려고 수건을 썼습니다. 모세가 시내산에서 40일동안 하나님을 만나면서 십계명을 받습니다. 하나님의 긍휼로 감싸사 하나님을 만나는 자격을 주셨습니다. 모세는 혈기도 있고 정욕도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모세를 의롭다하시고 함께 해주셨습니다. 하나님을 보면서 먹는 것도 잊어버립니다. 인간으로 보면 사십일이지만 사실은 시십초처럼 보냈을 것입니다. 그대로 행복한 삶을 살았습니다. 그런 은혜의 시간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많이 듣고 산에서 내려옵니다. 하나님을 보았을 때 모세의 얼굴에 광채가 났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모세의 얼굴에 전이되었습니다. 본인은 몰랐습니다. 백성들이 모세를 보자 두려워서 나아오지 않습니다.

모세는 수건을 써서 그 두려움을 없애 주었습니다. 수건은 너울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본문에 네 번이나 나옵니다. 요즘 너울은 망사라고 하여 속이 들여다보입니다. 그러나 이곳에 너울은 중동의 여자들이 쓰는 것처럼 아래까지 쓰는 것입니다. 영광의 광채가 너무 강해서 쳐다볼 수 없어서 수건을 쓰고 말씀을 전하였습니다. 하나님을 만날 수 없고 하나님을 만난 모세도 만날 수 없습니다.

너울은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운 것입니다. 그러나 너울이 있어서 하나님과 만남이 가능한 것입니다. 마치 태양을 볼 때 꺼멍칠한 거울로 보는 것과 같습니다. 이것이 태양을 보는 가능한 길이듯이 너울을 통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직접 말씀하시자 사람들은 하나님께 말씀하지 말라고 합니다. 심장이 멎을 정도입니다.

그래서 백성들은 모세를 통하여 말씀을 듣겠다고 말합니다. 이것이 겸손한 것이요. 유일한 길입니다. 간접적으로 듣겠다고 합니다. 하나님이 직접 나타나지 못하고 모세를 통해서 나타나는 것입니다. 모세도 하나님이 씌워주신 하나의 너울입니다. 하나님이 모세 안에서 작아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모세를 통해서 말하는 것은 하나님이 작아지는 것입니다.

우리가 아이들에게 눈높이에서 말해야 합니다. 음식이라고 하지 않고 맘마라고 하고 어머니라고 하지 않고 엄마라고 합니다. 서로 간의 의사는 통하지만 내가 모든 것을 다 말하지는 못합니다. 그러나 어린아이가 성장하며 자유롭게 말합니다. 이것이 계시론의 골자입니다. 이것이 최선의 길입니다. 진리를 비유와 상징을 통해서 설명하면 설명이 가능하지만 진리는 작아진 것입니다. 하나남께서 사람의 수준으로 만납니다. 우리는 그것을 통해서 하나님을 만나게 됩니다.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장벽이 있었습니다.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는 지성소와 성소 사이의 휘장이 가로 막고 있습니다. 이 휘장은 인간을 보호해주는 휘장입니다. 휘장을 넘어 가까이 가면 인간은 죽습니다. 인간은 하나님 앞에 자유로이 나갈 수 없습니다. 고린도 성도들 가운데는 구약의 성도와 같이 하나님께 나가는데 이런 율법적인 장벽을 가지고 나가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이들은 자유함이 없습니다.

 

(주께로 돌아오면 수건이 벗겨진다)

 

14-16절을 보십시오. “그러나 그들의 마음이 완고하여 오늘까지도 구약을 읽을 때에 그 수건이 벗겨지지 아니하고 있으니 그 수건은 그리스도 안에서 없어질 것이라 오늘까지 모세의 글을 읽을 때에 수건이 그 마음을 덮었도다 그러나 언제든지 주께로 돌아가면 그 수건이 벗겨지리라

 

모세 자신이 하나의 수건입니다. 모세의 영광마져도 수건을 썼으니 다시 한번 하나님이 작아진 것입니다. 구약 성경은 예표적이고 상징적입니다. 아브라함의 이야기, 노아의 이야기는 먼 이야기입니다. 이것이 나에게 주시는 말씀이 되기 위해서는 해석이 되어야합니다. 이 예언적이라는 것도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이지만 하나님의 진리는 작아진 것입니다. 성경의 초점은 예수님께 맞춘 것입니다. 모세오경과 예언서가 다 예수님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일구월심 예수님을 기다립니다. 베들레헴에서 메시야의 어머님로 쓰임 받고자 많은 여자들이 결혼하지 않고 베들레헴에 살았다고 합니다.

정말 메시야가 왔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을 기다리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습니다. 이것이 수건이 벗겨지지 않은 것입니다. 그들이 예수님을 몰라봅니다. 그들은 수건을 벗고자 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수건을 벗지 않고자 몸부림을 치는 사람들입니다. 우리 인간에게 이런 못된 버릇이 있습니다.

심리학적으로 고착이라는 것입니다. 손가락을 빠는 것은 우유병 젖꼭지를 빨던 습관으로 빠는 것입니다. 어린아이들에게 거짓 젖꼭지를 주는 것도 이런 것입니다. 어른이 되어 밥을 먹을 줄 알면 젖꼭지를 버려야합니다. 어렸을 때 쓰던 담요를 가지고 시집갈 때도 가지고 갑니다. 버려야할 것을 버리지 못하는 것입니다. 영적으로도 고착현상이 있습니다.

율법은 그리스도의 예표인데 아직도 율법을 붙들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오시면 율법적 사고를 버려야합니다. 예수님 안에서 율법을 온전히 해석해야 합니다. 햇빛이 오면 달빛은 사라지는 것인데 아직도 달빛에 머물고자 합니다. 예수님을 기다리다 예수님을 배척한 이유입니다. 율법은 수건입니다.

십계명은 수건을 씌워 놓은 것입니다. 본질은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서로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은 벗겨져서 본질이 다가와야 합니다. 그것이 예수님을 만나는 것입니다. 많은 제사도 예수님을 위한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초점으로 하는 것입니다. 구약의 모든 것은 예수님의 그림자입니다. 우리가 예수님께로 나가면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있는 모든 장벽이 사라집니다.

옛날 결혼식에는 면사포를 써서 얼굴을 가리웠습니다. 신랑은 신부를 본 일이 없습니다. 부모님이 다 본 것입니다. 신부가 들어올 때 수건을 쓰고 들어옵니다. 신랑이 너울을 벗깁니다. 그때야 비로소 눈이 둘이고 코가 하나라는 것을 처음보는 것입니다. 너울을 벗기는 이것이 계시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모든 것이 베일 중에 있습니다. 성령께서 이 모든 것을 벗겨주십니다. 이 모든 것을 벗기면 그 속에서 예수님을 만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통하여 이 모든 것을 보는 것입니다. 주님이 친히 오셔서 주님의 인격을 만나게 됩니다. 진실에 대한 인식은 믿음이 없이는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계시의 진실을 받아들이도록 성령이 일하십니다. 예수님이 죽으심으로 이 휘장이 찢어졌습니다. 이제는 새언약의 일꾼이 모세와 같이 얼굴에 수건을 쓰지 않아도 됩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피를 의지하여 항상 어디서나 하나님께 나갈 수 있습니다. 우리가 태양을 볼 수 없을 때 태양이 우리가 볼 수 있는 인간의 모습으로 오셨습니다.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셔서 우리의 죄를 사하심으로 하나님이 우리 안에서 들어오실 수 있는 공간을 만드셨습니다. 우리 안에서 성령으로 거하셨습니다.

 

(주의 영이 있는 곳에 자유함이 있다)

 

17,18절을 보십시오. “주는 영이시니 주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가 있느니라 우리가 다 수건을 벗은 얼굴로 거울을 보는 것 같이 주의 영광을 보매 그와 같은 형상으로 변화하여 영광에서 영광에 이르니 곧 주의 영으로 말미암음이니라

 

성령이 예수 그리스도를 보게 하십니다. 예수님을 통해서 주신 계시를 받아들이게 하는 것입니다. 주의 성령으로 우리는 살아갑니다. 주님은 지금 영이십니다. 지금은 주님이 성령으로 우리 안에 들어와 계십니다. 주의 성령이 계시면 우리는 모든 구속이 사라지고 자유함이 있습니다. 성령이 계신 곳에 구원이 있고 죄사함이 있고 깨달음이 있고 충만이 있고 사랑이 있습니다. 성령을 따라 사는 사람은 모든 장벽이 사라지고 자유합니다. 자유는 온전한 구원이 있다는 말입니다. 성령은 자유의 영입니다. 진리의 영입니다. 우리는 성령 안에서 자유함 가운데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봅니다. 큰 바위 얼굴에 보면 어니스트가 큰 바위 얼굴을 매일 보자 큰바위 얼굴로 변합니다. 우리는 성령 안에서 자유함을 가지고 그리스도의 얼굴을 항상 바라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보면 볼수록 우리는 그리스도의 얼굴로 변합니다. 우리에게서 그리스도의 햇빛같은 광채가 빛나게 됩니다. 우리는 점점 영광스러워집니다.

고린도후서 3장 강해 이부 새언약의 일꾼

고린도후서 36-고린도후서 318

요절 고린도후서 36

고린도후서 3장 강해 이부 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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