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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주의 대학생 선교기관

천안UBF

성경66권강해서

작성자 : 오요한
작성일 : 2005-03-13 00:00:00
조회수 : 3,059

문제지풀이(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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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서 10징 구원의 길

온 세상이 울긋불긋 물든 가을이 어제께인가 했더니 어느덧 우리 곁에 옷깃을 여미는 스산한 겨울이 찾아왔습니다. 가을이 오고 겨울이 오는 것은 어쩔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 마음은 항상 가을처럼 아름다운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우리가 믿음에 믿음을 더하면 하나님께서는 충만한 구원의 은혜를 넘치게 부어주십니다. 오늘 이 시간 로마서 10장 말씀을 통해 구원에 이르는 길을 깨닫고 함께 은혜 나누는 귀한 시간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제일장 이스라엘은 자기의로 구원을 받지 못했습니다.

1절을 보십시오. "형제들아, 내 마음에 원하는 바와 하나님께 구하는 바는 이스라엘을 위함이니 곧 저희로 구원을 얻게 함이라." 지금 사도바울은 하나님께 이스라엘의 구원을 얻게 해달라고 간절히 기도합니다. 하나님은 일방적인 은혜로 이스라엘을 택하셨습니다. 이스라엘이 잘나거나 거룩해서 택한 것이 아닙니다. 오직 은혜로 이스라엘 민족을 택하셨습니다. 그들을 통해서 하나님의 크신 영광을 드러내시고자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민족에게 구원의 축복을 맘껏 주시고자 하셨습니다. 그들에게 구원의 축복을 주시고 그들을 통하여 세계 만민을 구원하고자 하셨습니다. 그들에게 구원은 잘 차려놓은 밥상과 같습니다. 그들은 단지 믿고 영접하면 배부르고 풍요로운 삶을 살 수 있습니다. 바울은 이스라엘이 구원에 이르기를 간절히 바라고 기도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구원에 이르지 못했습니다. 왜 그러합니까?

2절을 보십시오. "내가 증거하노니 저희가 하나님께 열심이 있으나 지식을 좆은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 사람들은 하나님께 대하여 열심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하루 세 번 기도를 절대적으로 감당했습니다. 안식일을 거룩히 지켰고, 일주일에 2번씩 금식기도를 드렸습니다. 십일조를 빼먹지 않고 드렸습니다. 심지어 그들은 외출하고 돌아오면 꼭 손과 발을 부지런히 씻은 다음에 먹었습니다. 이 정도하기도 쉬운 일이 아닙니다. 어려운 일입니다. 신앙에서 열심이 있다는 것은 좋은 것입니다. 예수님은 식사할 겨를이 없다고 하실 정도로 열심히 복음역사에 헌신하셨습니다. 사도 바울도 열심 있는 신앙 생활을 권면하였습니다. 로마서 12장 11절은 말씀합니다. "부지런하여 게으르지 말고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라." 열심 자체는 좋은 것입니다. 바른 것입니다. 하지만 유대인들의 열심은 옳지 못합니다. 바르지 못합니다. 그들이 바른 지식을 따라서 열심을 갖지 않았습니다. 무식한 열심은 위험한 것입니다.

3절을 보십시오.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를 복종치 아니하였느니라." 여러분! 죄에도 진짜 죄와 가짜 죄가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예, 그렇습니다. 가짜 죄는 진짜 죄가 아닌데도 우리들로 하여금 죄로 여기고 죄책감을 느끼게 만드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그런 가짜 죄를 만드는데 선수였습니다. 그들은 이렇게 말하기를 잘하였습니다. "뭐라구? 새벽기도에 나오지 않았다구? 아니! 소감을 쓰지 않고 학생회 모임에도 나오지 않았다구? 아니! 어떻게 저렇게 헌금을 조금 낼 수가 있는가?" 하며 사람들에게 계속 죄책감을 심었습니다. 이는 그들이 바로 행위중심적인 자기 의를 세우려고 신앙생활했기 때문입니다. 이런 자기 의는 하나님의 의에 이르게 하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맛 볼 수도 없게 하고 구원에도 이르지도 못하게 합니다. 우리도 행위를 앞세우기 쉽습니다. 행위로 선을 주장하기 쉽습니다. 이것은 곧 자기 의를 말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자기의가 아닌 하나님의 의를 알아야 합니다. 자기 힘과 노력으로 가다간 낙망하고 지쳐 쓰러지기 쉽습니다. 우리들 가운데도 행위로 열심을 좇다가 쓰러지는 사람이 있습니다. 열심히 기도를 합니다. 날마다 영혼의 양식을 먹습니다. 양들도 먹이고 양육합니다. 장막 모임에서 궂은 일을 도맡아서 합니다. 주야로 말씀을 묵상합니다. 이런 것이 나쁜 것이라 말씀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무슨 힘으로 이 일을 감당하고 있는냐 하는 것입니다. 중심에 무엇을 두고 이를 하느냐는 것입니다. 자기 힘을 의지하고 열심을 내고 있느냐 아니면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절대적인 성령의 도우심으로 하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자기 힘으로 하는 사람은 힘이 듭니다. 자기 의 때문에 다른 사람의 약점과 허물을 정죄합니다. 판단합니다. 교만합니다. 자기 불의에 잘 빠집니다. 이런 류의 사람은 불신으로 쓰러지기를 반복하다 어려움에 빠집니다. 크고 넓은 태평양바다가 있습니다. 여기 두 사람이 태평양을 건너기 위해 몸을 풀고 있습니다. 한사람은 체격도 좋고 건강해 보입니다. 아주 태평양을 잘 건널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또 한 사람은 매우 왜소하고 허약해 보입니다. 아마 처음부터 겁을 먹고 포기하지 않으면 다행일 것 같습니다. 이제 이 두 사람은 동시에 태평양으로 뛰어 들었습니다. 건장한 사람은 보란 듯이 바다를 힘차게 헤엄쳐 나갔습니다. 건강해 보이는 자는 자기의 강한 몸과 의지를 굳세게 믿고 빠른 속도로 나아갔습니다. 다른 한 사람도 자신의 보잘것없는 몸을 낙담하지 않고 포기치 않고 바다에 뛰어들었습니다. 그는 이내 예수님의 배로 올라탔습니다. 그는 예수님이 주시는 방향대로 때로는 열심히 노를 젓고 때로는 방향을 바꾸었습니다. 때론 세상에서 가장 편안한 모습으로 하늘의 구름과 별들을 맘껏 바라보기도 했습니다. 그는 그와 함께 하시는 예수님만을 의지하고 자신의 생명조차도 예수님께 맡겼습니다. 건장한 사람은 자기 힘으로 열심히 잘 나갔습니다. 그러나 문제가 생겼습니다. 몸에 힘이 빠지고 숨이 가빠졌습니다. 의지도 약해지고 두려움도 임했습니다. 결국! 그는 더 어려움에 빠졌습니다. 그는 어쩔 수 없이 포기를 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배로 갈아탄 왜소한 자는 휘파람을 부르며 즐겁게 이 항해를 완주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이 건장하고 육체적으로 뛰어난 사람은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를 복종치 아니한 사람입니다. 우리 믿는 사람들에게 묻습니다. 우리는 어떤 방법으로 험난한 우리의 인생의 바다를 건너가야 할까요?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의를 붙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의는 바로 예수님을 말합니다. 우리의 모든 죄와 허물을 지시고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믿어야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더럽고 추하디 추한 죄를 위해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의 십자가의 보혈을 매순간 믿고 죄사함을 받아야 합니다. 예수님께 우리 마음의 중심을 드리고 예수님과 뜨거운 사랑의 관계성을 맺어야 합니다. 그리할 때 예수님께서 우리마음에 살아계시게 됩니다. 예수님을 가장 사랑하고 중심을 드리는 자는 얼굴에서 드러납니다. 얼굴에 미소가 떠나질 않습니다. 얼굴에서 예수님의 모습이 떠오릅니다. 박영상형제를 처음 보았을 때 그의 얼굴은 굳어있었고 무거워 보였습니다. 세상 근심을 혼자 지고 가는 어린양 같이 보였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얼굴이 매우 밝게 변했습니다. 여유가 생겼습니다. 입이 항상 귀에 걸려있었습니다. 미소가 떠나지 않습니다. 이 변화의 주체는 영상형제의 중심에 예수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기쁨으로 간절함으로 예배를 드리느냐 아니면 일요일이니깐 하는 수 없이 예배자리에 앉아 있느냐는 그 중심에 큰 차이가 있습니다. 오고 안 오고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마음의 중심과 사랑이 문제입니다.

4절을 보십시오. "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이 되시니라." 유대인들은 열심히 율법을 쫓아 행했습니다. 밤낮으로 충성을 다했습니다. 그들은 율법을 달달달 외우고 다녔습니다. 그들은 율법적인 행위만이 구원에 이르게 한다고 주장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마음은 음란, 탐욕, 도둑질, 속임수, 홀기는 눈, 교만, 훼방, 살인, 광패로 가득하였습니다. 그들은 겉으로는 열심을 내었지만 그들의 속은 까맣게 썩어가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결국 구원의 기쁨도 누리지 못하는 가장 불쌍한 신앙인이 되다가 죽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힘써 율법을 지키려 하지 않아도 우리에게 율법의 마침이 되시는 분이 계십니다. 그분은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이 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힘든 율법의 멍에를 다 지시고 가셨습니다.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으면 우리가 율법을 다 지지킨 자로 인정해주십니다. 이 예수님께 감사와 찬양을 드립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소유하고 믿을 때 율법을 지킨다는 것이 어렵고 딱딱하고 지겨운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우리 안의 예수님께서 친히 율법을 행할 힘과 은혜를 넘치게 부어주시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그리스도 되신 예수님께서는 모든 율법을 종결지으셨습니다. 이제 우리는 이 예수님을 통해서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질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모든 축복과 영광을 맛볼 수 있습니다.

제이장 예수님을 주로 시인하며 구원을 받습니디.

6, 7절을 보십시오.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는 이같이 말하되 네 마음에 누가 하늘에 올라가겠느냐 하지 말라. 하니 올라가겠느냐 함은 그리스도를 모셔 내리려는 것이요, 혹 누가 음부에 내려가겠느냐 하지 말라. 하니 내려가겠느냐 함은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모셔 올리려는 것이라." 신앙은 내가 하늘에 올라가고 음부에 내려가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열심히 선을 행했기 때문에 하늘에 올라가고 내가 율법을 다 지켜 행했기 때문에 하늘에 올라가는 것이 아닙니다. 또 내가 너무도 부족해서 내가 죄와 허물이 너무도 많아서 또 내가 연약하여 실수하고 실패했기 때문에 음부에 내려가는 것도 아닙니다. 십자가에 죽으시고 음부에 내려 가신 분은 예수님이요. 부활하여 하늘에 올라가신 분은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하늘과 음부의 주권은 오직 하나님께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첫째도 예수님을 믿고 둘째도 예수님을 믿고 셋째도 셋째도 예수님을 믿기를 원하십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믿음으로 하늘에 올라가고 예수님을 믿지 않음으로 지옥에 내려갑니다.

8절을 보십시오. "그러면 무엇을 말하느뇨? 말씀이 네게 가까워 네 입에 있으며 네 마음에 있다 하였으니 곧 우리가 전파하는 믿음의 말씀이라."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말씀에 기초한 믿음을 원하십니다. 감정과 느낌이 아니라 말씀에 뿌리를 둔 믿음을 원하고 계십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믿는 믿음을 바라고 계십니다. 말씀이 항상 우리 입에 있고, 마음에 있습니다. 우리가 마음으로 말씀에 기초하여 예수님을 믿고 입으로 시인하면 됩니다. 우리가 구원을 얻는 것은 매우 쉬운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리스도가 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우리의 모든 죄와 연약과 허물을 감당해 주셨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자들은 이제 혼자가 아닙니다. 이제 더 이상 외롭지 않습니다. 더 이상 과거의 자신에 목매달지 마십시오. 과거의 죄를 묻지 말아 주시기 바랍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를 다 용서해 주셨습니다. 부활하셔서 죄의 삯인 사망권세까지 다 없애주셨습니다. 우리들이 신용카드로 물건을 구입했습니다. 흥청망청 구입했습니다. 결재 일을 생각지 않고 원하는 데로 생각나는 대로 구입했습니다. 그러다가 감당하기 어려운 대가를 치러야 할 처지에 놓였습니다. 결재 날이 되자 결재대금청구서가 어김없이 날아왔습니다. 차마 두 눈을 뜨고 볼 수 없어 한 쪽 눈을 지긋히 감은 채 한쪽 눈으로 청구서를 한참만에 보았습니다. 근데 놀라운 일이 벌어 졌습니다. 믿기지 않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청구서에 결재금액이 0원으로 되어있었습니다. 나의 물건 값을 대신 갚아준 이가 있었다고 카드회사로부터 연락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가슴이 뛰고, 기쁨이 물밀 듯이 올라왔습니다. 이분이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물건 값이 아니라 우리의 죄를 위해 그 피로 대신 갚아 주셨습니다. 과거에 연연하고 자기의 연약함과 허물로 인해 주의 역사를 섬기는데에 뒤로 물러서는 성도가 있습니다. 또 끊임없이 자기를 학대하고 예수님께 나아가지 못하는 성도가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지금 큰 연약함과 허물이 있지만 진실하게 그 모든 것을 들고 나오는 자들을 간절히 찾고 계십니다. 우리가 나의 모든 빚을 갚아주신 예수님을 볼 때 우리는 다시 흥청망청 살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우리를 위해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마음에 믿으면 됩니다. 구원의 길은 아주 쉬운 것입니다. 예수님은 지금 말씀하십니다.

9,10절을 보십시오.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얻으리니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 우리가 어떻게 구원을 얻을 수 있습니까? 그것은 바로 예수님을 주로 마음으로 믿고 입으로 시인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사 주님이요 왕이요 그리스도가 되게 하신 것을 믿으면 구원을 받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 모든 삶의 주인되심을 마음으로 굳세게 믿고 입으로까지 날마다 시인할 때 구원을 얻을 수 있습니다. 마음은 믿는데 입은 시인하지 않으면 구원과 멀어집니다. 또 입으로 열심히 시인하면서 마음으로 부정하면 구원과 멀어집니다. 마음과 입이 하나가 되어 믿어야 합니다. 몸과 마음이 일치가 되어 믿음을 고백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외모를 원치 않으시고 제사를 원치 않으시고 진심으로 하나된 중심을 기뻐 받으십니다. 구원은 거창하거나 먼 곳에 있지 않습니다. 우리는 신령한 마음과 입을 통해서 구원에 이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시인한 사람은 자연히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합니다. 다른 사람에게 순종하도록 돕습니다. 예수님은 우리 교회, 우리 가정, 우리의 미래, 우리의 직장, 우리 학과공부, 우리 사명의 주가 되십니다. 아담의 범죄이후로 우리는 근본이 악하고 타락한 피조물입니다. 우리가 죄를 짓고 싶지 않아도 저절로 죄는 우리 안에서 생깁니다. 형제는 자매를 보고 연애감정이 생깁니다. 자신에게 잘못하는 사람이 있으면 미움이 생기고, 적대하는 감정이 생깁니다. 자기보다 잘난 사람이 있으면 시기심이 생깁니다. 그리고 매순간 우리는 너무도 교만합니다. 하지만 이런 마음의 죄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이런 것을 예수님께서 다 아시고 십자가에 달리셨습니다. 우리 안에서 성령으로 오셔서 거룩한 소원을 주십니다. 우리가 애통할 문제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의 주인으로 삼지 않는 데 있습니다. 내가 왕으로 사는 것을 회개하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우리 마음의 중심에 주로 모셔들이고 마음으로 믿고 입으로 시인할 때 우리 주님은 우리의 안에서 살아계셔서 선을 행할 힘을 주십니다.

고린도전서 12장 3절은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하나님의 영으로 말하는 자는 누구든지 예수를 저주할 자라 하지 않고 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 우리는 자기가 하나님의 영을 받아서 말씀을 전하고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을 종종 만나게 됩니다. 그럴 때 우리는 이 사람이 진짜인지 가짜인지 몰라 당황할 때가 있습니다. 그때 간과하지 말아야 할 것은 하나님의 영을 받아서 말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예수를 저주할 수 없습니다. 예수를 부정할 수 없습니다. 예수를 소외시키거나 무시할 수 없습니다. 성령의 도움 없이는 아무도 예수는 주님이시다.''''''''라고 고백할 수 없습니다. 이것이 진리입니다. 우리가 이를 알고 그가 정말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모시고 예수님을 높이는지를 보아야합니다.

구원에 이르는 길이 고3처럼 대학을 들어가기 위해서 죽을 힘을 다해 공부하는데 있지 않습니다. 열심히 절대적으로 기도하고 십일조를 빠짐없이 드리고 1:1과 소감을 빼먹지 않고 행하면 구원에 이른다고 하지 않았습니다. 구원의 길은 마음으로 예수를 주로 믿어 입으로 시인하는 것이라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매우 간단하고 쉽습니다. 너무 간단해서 사람들이 오히려 믿지 못하는 것입니다. 구원은 우리 가까이 있습니다. 손만 뻗으면 닿을 곳에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구원의 비밀입니다.

제삼장 복음을 전해야 구원을 받습니다.

11절을 보십시오. "성경에 이르되 누구든지 저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리라." 우리가 예수님 앞에 우리의 추한 죄를 모두 들고 나와 예수님의 십자가의 보혈을 믿으면 결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습니다. 사람들이 아무리 손가락질해도 하나님이 의롭다고 하시니 모든 것이 O.K.입니다. 또 예수님을 믿을 때 가정과 직장에서 핍박이 있을 수 있습니다. 가족들이나 친구들이나 동료들에게 왕따를 당할 수 있습니다. 버림을 받을 수 있습니다. 이런 것은 부끄러움이 아닙니다. 진정한 부끄러움은 주님을 무시하고 주님을 배신하는데 있습니다. 구원의 때에 구원받지 못하는 것이 부끄러움입니다. 베드로전서 2장 6절은 말씀하십니다. "경에 기록하였으되 보라 내가 택한 보배롭고 요긴한 모통이 돌을 시온에 두노니 저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치 아니하리라 하였으니." 우리 삶의 모통이 돌 되시는 예수님을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게 되고, 믿지 아니하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게 되는 것이 바로 진리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영화롭게 하여주십니다.

12절을 보십시오.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차별이 없음이라 한 주께서 모든 사람의 주가 되사 저를 부르는 모든 사람에게 부요하시도다." 하나님은 주를 부르는 자마다 풍요롭게 하십니다. 주를 높이는 자마다 축복을 주십니다. 잠언 4장 8절에 "그를 높이라 그리하면 그가 너를 높이 들리라. 만일 그를 품으면 그가 너를 영화롭게 하리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를 품어보세요. 그를 높여 보세요. 그가 당신을 높여주시고, 영화롭게 하실 것입니다. 성경의 인물 중에 아브라함이 그 대표적 인물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람에게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지라."라고 약속하여 주셨습니다. 아브라함은 비록 연약하여 실수도 많았지만 끝까지 이 하나님의 말씀을 믿음으로 순종하였고, 감사로 단을 쌓았습니다. 그럴 때 실제로 하나님이 주신 믿음의 영적인 축복을 다 누리는 자가 되었습니다. 풍성하고 부요한 삶을 살았습니다. 우리 가운데에도 하나님을 왕중의 왕으로 섬김으로 복의 근원된 삶을 살기를 기도합니다.

13절을 보십시오.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누구든지, 부자든지, 가난한 자든지, 병든 자든지, 왕따를 당하는 자이든지, 대통령이든지, 꼴찌든지 누구든지 주님의 이름을 부르면 구원을 얻습니다. 주님의 이름을 믿으면 구원을 얻습니다. 주님의 이름은 예수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백성을 죄에서 구원하실 자라는 뜻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나의 죄에서 구원할 자로 마음으로 믿고 입으로 부르면 우리는 구원을 받습니다. 입으로만 주여 주여 하고 마음은 멀리 있는 자는 구원을 받지 못합니다. 우리가 마음 중심으로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고 고백해야 구원을 받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 하사 성령을 주시고 우리의 삶 속에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기적을 만나게 됩니다.

14-15절을 보십시오. "그런즉 저희가 믿지 아니하는 이를 어찌 부르리요? 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믿으리요?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으면 어찌 전파하리요? 기록된 바 아름답도다.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들의 발이여 함과 같으니라." 우리는 예수님을 불러야 구원받습니다. 예수님을 부르려면 우리가 예수님을 믿어야합니다. 예수님에 대한 믿음은 말씀을 들어야 생깁니다. 말씀공부를 해야 생깁니다. 믿음을 갖게 하기 위해 말씀을 전해야 합니다. 말씀을 전해야 예수님을 믿고 생명을 얻을 수 있습니다. 말씀을 전하려면 누군가 전도자를 파송해야합니다. 그러므로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발은 바로 복음을 전하는 발입니다. 복음을 전하는 발은 생명을 살리는 향기로운 발입니다. 좀 냄새가 나도 이보다 더 아름다운 발은 없습니다. 우리는 선교사를 많이 양성하여 개척과 세계선교에 파송해야 합니다. 캠퍼스에 나가서 힘써 말씀을 전해야 합니다. 믿은 자들에게는 계속하여 말씀을 가르쳐야합니다. 씨를 뿌려야만 수확을 기대하듯이 영적인 말씀의 씨를 캠퍼스 곳곳에 뿌리면 영적인 열매가 맺힙니다. 풍성한 수확을 할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디도데에게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고 하였습니다. 내가 엄히 명하노니 말씀을 전파하라고 하였습니다.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말씀을 전파하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도 승천하시며 말씀을 전하라는 최고의 명령을 하셨습니다.

제사장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돌아오기를 기다립니다.

16-18절을 보십시오 “그러나 저희가 다 복음을 순종치 아니하였도다. 이사야가 가로되 주여 우리의 전하는 바를 누가 믿었나이까? 하였으니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그러나 내가 말하노니 저희가 듣지 아니하였느뇨? 그렇지 아니하다 그 소리가 온 땅에 퍼졌고 그 말씀이 땅끝까지 이르렀도다. 하였느니라.”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못하여 예수님을 믿지 못한 것입니까? 아닙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복음은 온 땅에 퍼졌고 그 말씀이 땅끝까지 이르렀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사람은 믿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복음을 순종하지 않았습니다. 이사야가 우리의 전한 바를 누가 믿었나이까 하신 말씀처럼 그들은 믿지 않았습니다. 주님의 역사는 믿음 없는 곳을 떠나서 믿음이 있는 곳으로 흘러갑니다. 물이 높은 데서 낮은 데로 흐르듯이 믿음이 없는 자에서 믿는 자로 흘러가는 것은 자연스러운 원리입니다. 하나님은 유대인들이 믿지 않으면 믿는 이방인들을 통해서라도 구원역사를 이뤄 가십니다.

19절을 보십시오. "그러나 내가 말하노니 이스라엘이 알지 못하였느뇨? 먼저 모세가 이르되 내가 백성 아닌 자로써 너희를 시기나게 하며 미련한 백성으로써 너희를 노엽게 하리라. 하였고" 하나님은 일방적인 은혜로 이스라엘을 택하시고 그들이 믿음으로 거룩한 백성이요, 제사장 나라가 되기를 바라셨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말씀을 통해 예수님을 알았으면서도 믿지 않았습니다. 이런 그들을 보고 하나님은 심히 괴로워하십니다. 그 옛날 모세 시대에 말씀하셨습니다. 신명기 32장 21절에서 나도 내 백성이 아닌 흉한 족속을 사랑하여 그들의 질투심을 일으켜 놓고 그들의 속을 썩여 주겠다고 하십니다. 이스라엘 백성을 화나게 하시고 분노하게 하시겠다고 하십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불신하자 이방인들을 사랑하여 그들을 구원하십니다. 하나님은 이방인에 대한 사랑을 통하여 이스라엘이 이방인을 질투하게 하십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더욱 하나님을 사랑하도록 도우십니다. 마치 본처가 남편을 사랑하지 않으니까 첩을 통하여 본처가 남편을 더 사랑하게 하는 것과 같습니다.

20절을 보십시오. "또한 이사야가 매우 담대하여 이르되 내가 구하지 아니하는 자들에게 찾은 바 되고 내게 문의하지 아니하는 자들에게 나타났노라 하였고" 이사야가 대담하게 일러주었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도와주려고 항상 기다리고 있었으나 하나님께 도와달라고 호소하는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고 말입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은 구하지도 않고 문의하지도 않은 이방인에게 구원의 손을 뻗치셨습니다. 하나님은 이방인들로 이스라엘을 시기나게 하여 결국은 이스라엘도 구원을 받게 하십니다. 그 후에 예수님이 오셔서 구원은 완성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이방인 구원역사를 이루는 초점은 결국 이스라엘을 구원하시고자 하시는 데 뜻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에 대해 어떤 마음을 품고 계십니까?

21절을 보십시오. "이스라엘을 대하여 가라사대 순종치 아니하고 거스려 말하는 백성에게 내가 종일 내 손을 벌렸노라 하셨느니라." 하나님께서는 손을 벌렸습니다. 주님께서 친히 이스라엘 백성을 향해 손을 벌렸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잠깐 벌리지 않으십니다. 온종일, 힘을 다해 손을 벌리십니다. 탕자를 기다리시는 아버지의 마음으로 탕자가 돌아오기만을 기다리십니다. 하나님은 유대인들이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오기를 기다리십니다. 이 말씀을 보면 탕자비유가 생각납니다. 첫째 아들은 유대인이요. 둘째 아들은 이방인입니다. 둘째 아들인 이방인이 하나님을 떠났다가 돌아왔습니다. 그런데 첫째 아들인 유대인이 다시 아버지 곁을 떠났습니다. 하나님은 둘째 아들을 기다리는 그 마음으로 동일하게 첫째 아들을 기다리십니다. 하나님은 집나간 첫째 아들을 눈이 빠지게 기다리고 계십니다. 손이 아프도록 팔을 벌리고 기다리십니다. 하나님은 첫째 아들이나 둘째 아들이나 다 구원 받기를 원하십니다. 우리가 이를 안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힘써 나가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해야합니다.

저는 매우 인간적인 자였습니다. 세상적인 자였습니다. 특히 사람 앞에서 산 자였습니다. 저는 대학교 3학년 때 능력주시는 예수님을 만나서 기쁨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후로 예수님이 제 마음속에 있지 않았습니다. 사람이 더 크고 높게 보였습니다. 그래서 늘 교회에서 사람을 높이고 자기 의를 지키려고 몸부림치며 사람 앞에서 살기를 밥 먹듯이 한 자였습니다. 저는 사실 편입을 했지만 이것조차도 사람들을 의식해 얘기하지 못한 철저한 율법에 바탕을 둔 인본주의 자였습니다. 기도하고 소감감당하고 주일예배를 감당하고 순종하는 것과 같은 행위만을 앞세우는 답답하고 숨 막히는 율법주의자였습니다. 이로 인해 제 속에는 철저한 자기의가 자라고 있었습니다. 제어할 수 없었습니다. 자유함이 없었습니다. 답답하기가 이루 말로 표현하기 어려웠습니다. 이제 그동안 저를 발목잡은 철저히 사람을 높이고 하나님을 무시한 죄악을 고백하며 용서받기 원합니다. 예수님께서 저같은 자를 위해서 십자가에서 보혈의 피로 깨끗이 죄사함을 내려주신 것을 믿습니다. 이런 저를 하나님은 절대적 새벽기도로 주의 사람되게 인도해가고 계시며 개척과 도전의 놀라운 비젼을 심어주시며 장차 이 시대의 캠퍼스 영혼을 먹이고 깨우는 말씀의 목자로 인도해 가시는 은혜의 하나님이 되어주셨습니다. 이제 사람에게는 부끄럽게 될지언정 하나님으로부터는 반석이 되는 삶을 따르겠습니다.

우리가 이 시간 모든 자기 의를 내어던져 버리고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고 하신 주님의 말씀을 심령에 품고 매일 주님께 나아가 죄 사함을 받고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고백하고, 주님이 이미 주신 구원의 선물을 누구든지 받으시기를 기도합니다. 그리고 이 가장 소중하고 가치 있는 구원의 선물을 많은 사람들에게 전하는 아름다운 발을 가진 자들이 되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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